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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작가.. 전혜린에 대한 질문요.

mistyblue 2012. 12. 28. 10:55
  • 작가.. 전혜린에 대한 질문요.
  • *전혜린(1934.1.1~1965.1.10) 1934년 1월 평안남도 순천에서 유복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국민학교 시절을 서울과 신의주에서 보냈으며, 1946년 경기여중에 입학하여 중,고등학교 시절을 서울과 부산에서 보냈다. 1952년 법학자인 아버지의 원에 따라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법학은 그녀의 본질적 성격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녀의 전학창 시절을 통하여 받은 관료적 교육은 자유로운 학문에 끝없는 갈망을 품고 있던 그녀의 본질 속에서 반발을 일으키게 됐다. 1955년 가을, 아직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새로운 땅'을 향하여 출발하는 새 결심을 했다. 그 땅은 독일이었다. 이 새로운 출발은 그녀의 생에 커다란 분계선이 된 생 자체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뮌헨 대학에 입학한 후 대학 시절의 전공인 법철학에서 문학으로 전공을 옮겼으며 수많은 문학 (특히 그릴파르처)과 철학 (특히 니체)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해 카톨릭에 입교하였으며 (본명 마리아 막달레나) 이듬해 결혼했다. 그녀의 짧은 생애의 찬란한, 그러나 슬픈 제 3기는 1959년 뮌헨 대학에서 5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시작된다. 모교인 경기여고는 돌아온 그녀에게 독일체재 중의 주옥같은 번역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영매상'을 주었다. 1960년부터 그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을 비롯하여, 성균관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숱한 제자들에게 독일 문학의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 1964년 그녀는 성균관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으며, 5년간 교수생활중 불과 같은 언어와 필치로 많은 번역과 저술을 남겼다. 그녀의 문장은 점차 원숙하세 되어 갔다. 1965년 1월 10일 일요일 아침, 일요일에 출생한 (독일에서는 일요일에 출생한 사람은 행운아의 상징이라고 말하던) 그녀는 똑같은 일요일 아침에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세상에 그녀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남기고 갔으며, 단지 그녀가 생전에 좋아하던 흰 장미 한 송이만큼의 사랑을 안고 갔다. 그녀의 일생은 자기의 모든 것 (지식과 정열과 그리고 사랑)을 모든 이에게 쏟아 부은 일생이며 꿈과 기쁨과 괴로움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찬 매 순간을 산 일생이었다. 자기의 생을 완전히 자유롭게 (마치 번역작품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생은 자유로우려는 그녀의 정신과 현실 세계와 대결해가는 투쟁 과정이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篇輯者) 저서및 역서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데미안 (헤르만 헷세) 한 소녀가 걸어간 길 (E.슈나벨) 압록강은 흐른다 (이 미륵) 에밀리에 (H.게스던) 외 다수 '위대한 컴플렉스 -이규동 저.' 중에서 전혜린 편. *완전한 생을 추구했으나 끝내 자살로서 짧은 생을 마친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 전혜린-그녀의 내면에는 신처럼 여긴 아버지에 대한 부성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즘을 초극하려는 갈등이...... . 전혜린은 서른 한 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전설의 베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안이하고 평범한 삶을 경멸하고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로서 전생애를 인식에 바치고 싶다는 열광적 소망으로 짧은 생애를 이어간 그녀는 그런 뜻에서 천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한 여성이었다.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되고 완전한 순간들의 삶을 염원하던 그녀는 단조롭게 전개되는 일상생활에는 너무 무력한 지성인이기도 했다. 인생에 대해서 그녀는 극단적인 욕심쟁이였다. 비범과 평범을 한꺼번에 소유하고 싶었던 나르시스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절대와 완전에의 지향은 어느 땐 예속적이리만큼 강렬했다. 그것은 그녀의 지성이나 의식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심층심리적 문제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일기나 에세이의 곳곳에서, 편지의 어느 곳에서나 날카로운 자기 성찰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은 그녀의 필생의 소망이었던 한 편의 작품을 쓰고 싶다는 아주 겸손하다면 겸손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완전에의 집착 때문이었다. 그녀 말마따나 조금의 유모어도 틈입할 수 없었던 그녀의 지성-이것을 넓은 뜻으론 심적 방어라 할 수 있다-은 작품을 쓰기엔 너무 방어적이었다. 지성의 너무 많은 지배, 그것은 철학적.관념적 아니면 명상적 태도를 지향할 수 있어도 적어도 작품세계로의 전개에는 부적합할 경우가 많다. 그녀의 일기나 수상록의 곳곳에는 보들레르, 헤세, 지드, 빠스쩨르나끄, 린저, 니체 등 최고의 문학인이나 철학가에 대한 경도와 더불어 그들의 글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또한 그녀는 그런 몇몇 작가들의 번역문학으로 성가를 올리기도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런 누구를 몰라도 가능하다. 너무 많은 지성의 소유자는 그 권위에의 컴플렉스 때문에 작품을 쓰지 못한다. 작품을 쓰기엔 너무 지성적인 것이다. 전혜린은 영감을 위하여 일상성을 피하고 비범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은 그녀가 일생동안 초극하려던 아버지 컴플렉스, 그리고 지성의 포로였다는 점에 있었다. > 전혜린은 아버지 전봉덕과 어머니 김순해의 8남매 (1남7녀)의 맏딸로 1934년 1월1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봉덕은 당시 고등문관시험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한 최고 엘리트였다. 아마도 전혜린의 남다른 지성은 아버지 쪽에서 물려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작은 체구였지만 지성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가집 맏며느리답게 귀티가 나는 체구가 큰 여성이었다. 전혜린의 지...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이루릴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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