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쿠바의 하바나의 정글이 아닌 비야레알 골프 클럽(Villareal Golf Club)에서 갖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골프 시합
 2 AUGUST 1961 - HAVANA, CUBA - Fidel Castro and Ernesto "Che" Guevara
젊은 시절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변호사, 아마 야구선수, 1926-) 전 국가평의회 의장은 야구와 농구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골프에 대해서는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1959년 카스트로가 집권했을 때만 해도 수도 하바나에는 훌륭한 골프 코스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골프는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스포츠로 밖에는 보지 않았을 뿐더라 철저히 싫어했다.
어느 날은 코스 하나를 몰수하여 노동자들의 리조트 시설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1961년에는 동지이며, 아르헨티나 출신의 전설적인 혁명가이며 테러리스트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와 하바나의 Villareal Golf Club에서 골프 시합을 하는 퍼포먼스를 피로했다. 당시의 미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를 의식한 선전이 목적이었으나 이 시합에서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에 졌고, 카스트로는 이후 더욱더 골프를 싫어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경기 결과가 보도되자,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의 승리를 보도한 기자를 해고하고, 코스는 몰수하여 군사기지로 바꾸어 버리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the Villareal Golf Club in Havana, Cuba. 비야레알 골프 클럽에서 피델 카스트가 티숏의 다운 스윙을 하고 있다.
 the Villareal Golf Club in Havana, Cuba. 비야레알 골프 클럽에서 피델 카스트가 체 게바라의 퍼팅을 지켜보고 있다.
이 두 사람은 평상시가 혁명이었으며, 골프 코스에서도 Hole Out 까지 "맨손"에 "군복 차림"이다. 이날 어쩌면 골프가 목적이 아니라, 진짜 목적은 마이애미 반도에 상륙하여 워싱턴 DC까지를 공략하기 위한 도상훈련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련제의 군화로 그린에서 볼(사병)들을 어떤 방법으로 홀인(공략)하는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왼쪽의 카스트로가 벙커 샷을 끝낸 게바라를 주시하고 있다.

[Associated Press (1961)] Cuban Prime Minister Fidel Castro sinks a short putt on the sixth green of the Villareal Golf Club in Havana, in his match against Ernesto “Che” Guevara. The course no longer exists.
2008년2월에는 카스트로가 건강상의 문제로 정식 은퇴하고, 동생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Ruz)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그는 형과 달리 골프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도리어 국외자본을 유치하여 새로운 골프코스 증설과 고급호텔의 건설로 저조한 관광산업에 주력하는 듯하다. 머지 않아 소련제의 군화를 나이키가 대신 할 날이 다가올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교정 불가능한 스윙 습관이라고 하더라도, 독특한 테크닉으로 극복한 대단한 현역의 명 플레이어가 있다. 한때 백악관의 집무실에서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Samille Lewinsky)양의 드레스에 결정적이 증거인 "DNA"를 바르기도 했던,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제42~43대) 이다.
그는 골프 스코어 "조작의 명인(?)"으로 대단히 유명하며, 이 골프의 테크닉 하나로 세계에 알려져 있으며, 벤 호간이던, 아놀드 파머이든, 잭 니클라우스이던, 타이거 우즈이던, 그를 이길 플레이어는 영원히 없다. 그러한 그도 "불륜 스캔들의 조작"만에는 실패했다. 즉, 골프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었던 것이었다.
Lewinsky a blue dress with Clinton's semen stain. FBI의 DNA감정 결과, 정액이 다른 사람의 것일 확율은, 7조8700만명 분의 1.
처칠은 수단 만은 알고 있었으나, 빌 클린턴은 수단과 방법을 다 알고 있었다. 귀중한 "DNA"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녀 힐라리 마님의 "걱정의 씨앗"이기도 했으나, 그렇고 그런 그 였으나 재탕에 성공하는 저력을 발휘해 대통령 재직 8년이란 성적을 거두었다.
호주의 어느 박물관에 전시된 훌륭한 사람들의 실물 크기의 밀납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도 불륜 스캔들의 빌 클린턴 밀납인형도 전시되어 있으나, 무슨 이유에서 인지 특히 그의 "바지 지퍼"만은 항상 열려 있는 상태이다.
박물관의 담당자가 열려있는 것을 확인해 다시 지퍼를 열심히 올려 놓으면, 어느 틈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내려오는 21세기 미해결의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이것은 또 다른 힐라리 마님의 "걱정의 씨앗"이기도 하다.
"지퍼"라면 처칠을 빼 놓고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다. 정계를 은퇴한 노년의 처칠이 어느 날 파티에 참석했을 때 어느 부인이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어요! 어떻게 하시지요?"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려 있다고 해 밖으로 못 나오지요."
Fidel Castro, 세계 최고령의 쿠바 야구 대표팀 감독시절(?)의 모습 그러나 결국 2008년 북경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The world remembers Che Guevara, the great revolutionary, on the occasion of his 80th birth anniversary.
1928 - 1967 - 2008
Major Ernesto "Che" Guevara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동지였던 카스트로와 골프 시합 이후 불화와 갈등을 겪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에 진출, 정글에서 고독하게 1967년10월9일 오후 1시10분에 처형 당했다.
 3살 때의 체 게바라 5살 때의 체 게바라 17살 때의 체 게바라
1960 1960 1961
 1963 1964
Che Guevara의 초상권에 관한 에피소드
체 게바라의 사진 촬영가 Alberto Korda(쿠바 출신, 본명, Alberto Diaz Gutierrez, 1928-2001)씨는 생전에 「게바라의 추억을 전하기 바라는 사람들이나, 세계의 평화목적으로 사진이 복사되는 한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영웅적 게바라」(아래 사진)의 저작권을 명확히 주장 하지 않았고, 각종 2차적인 저작물에서 발생한 이익도 일체 받지 않았다. 창조적 저작물에 관한 저작자의 권리를 국제적으로 정한 "베른 조약"에 - 정식 명칭은 문학 및 미술저작물 보호에 관한 국제협정(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Literary and Artistic Works, 1886년 스위스 베른)- 쿠바가 비준한 1997년 이후에도 일절 청구하지 않았다.
 Guerrillero Heroico - Alberto Korda's famous photograph of Che Guevara & To take the photo, Korda used a Leica M2 with a 90 mm lens, loaded with Kodak Plus-X pan film. 「영웅적 게바라」의 초상화 사진과 Korda씨가 애용한 "Leica M2" 카메라
이 한 장의 사진은 "마르크스 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며, 전세계적으로 반체제 혁명 사상과 패션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Korda씨 자신이 촬영한 게바라의 사진이 실린 "3 쿠바 페소" 지폐를 보고 있다.
단, 2000년에 영국의 주류회사가 "보드카"의 선전으로 「영웅적 게바라」의 사진을 이용하려고 했을 때, 게바라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는 인물였던 관계로 강하게 반발, 소송으로 발전했다. 이 재판은 주류회사가 Alberto Korda씨에게 5만 달러의 화해금을 지불하고, 선전을 취소하는 것으로 결착났다. 또 쿠바는 저작자의 사후 50년까지를 저작권 보호의 기간으로 하고 있으므로, 공적으로는 「영웅적 게바라」의 저작권은 2051년12월31일까지 유지된다.

 「라 코불 호」(La Coubre explosion) 사건. People near the docks run from the blast.
「영웅적 게바라」의 사진 촬영은, 1960년3월4일 금요일 오전 9시에, 쿠바 하바나 항에 벨기에에서 수입된 무기, 탄약 70톤을 적재한 증기 화물선 「라 코불 호」(La Coubre explosion)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폭발은 2번이나 발생하여 항만 노동자, 소방대원 등 81명이 사망, 수백명이 부상한 참사였다. 다음 날 하바나 시의 코론 기지에서 추도집회가 열렸다. 혁명 당시부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전속 카메라 맨이었던 Alberto Korda씨가, 이때 쿠바 정부관료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연단에 올라 있던 체 게바라의 표정을 찍은 것이 「영웅적 게바라」이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미국 CIA 관여설이 있다.
에피소드 2 금융관계에 초보자인 체 게바라가, 국립은행 총재로 취임했을 때, 그의 직책에 불만을 갖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하고 있다. 신 정부의 각료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카스트로가 "누군가 이코노미스트(경제통)는 없는가?" 라고 물었다. 연일 격무로 피곤해 잠깐 졸고 있던 게바라가 이 질문을 "콤니스타(공산주의자)로 잘 못 알아 듣고 손을 들어, 그가 국립은행 총재 취임이 결정되었다."
또 다른 모습의 체 게바라,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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