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가요

[스크랩] 장미리 - 말 전해다오

mistyblue 2014. 7. 11. 19:53

 

 

 

 

 

 

 

 

안개가 자욱한 밤에 말없이 찾아온 그 님

언제나 그 님 못잊어 쓸쓸한 내 마음은

부디부디 다시 와 다오 애타게 빌어도

눈 감으면 그 님 모습 내 눈에 아련히

 

떠오는 그 순간마다 내 마음 전하려 해도

눈 뜨면 보이지 않는 내 사랑하는 임에게

진실한 내 사랑을 안개여 말 전해다오

 

부디부디 다시 와 다오 애타게 빌어도

눈 감으면 그 님 모습 내 눈에 아련히

 

떠오는 그 순간마다 내 마음 전하려 해도

눈 뜨면 보이지 않는 내 사랑하는 임에게

진실한 내 사랑을 안개여 말 전해다오

 

 

 

 

 

[추억의 LP 여행] 3남매 가수(上)

장미리, 장은아, 장재남 솔로가수로 각기 폭넓은 인기

 

3남매 가수인 장미리, 장은아, 장재남. 가족 전체가 팀을 이뤘던 '작은 별 가족'이나 남매 팀'김 트리오', '아시아나'와는 달리 이들은 한 팀이 아닌 각기 솔로 가수로 히트 가수가 되었지만, 뒤늦게 3남매임이 밝혀져 화제를 모았다.

 

맏이 격인 장미리는 낭랑한 고음의 보컬로 노래한 ‘ 아 어떻게 할까', ‘ 말 전해다오' 등 컨튜리, 소울, 팝, 락 등 시대를 앞섰던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여가수였다. 공식 가수 데뷔가 가장 늦었던 장재남은 '제2의 송창식'불릴 만큼 외모, 창법이 송창식과 흡사했다. 그는 허스키 짙은 고음으로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텁텁한 보컬로 대화식의 노래 ‘ 빈 의자'와 ‘ 사람을 찾습니다'를 불러 70년대 말 젊은층의 폭넓은 인기를 모았다. 언니, 오빠와 달리 맑은 중음이 매력적이었던 막내 장은아는 여고 졸업 후 ‘ 시모나',‘ 맛댕기' 등 CM송을 부르다가 78년 초 ‘ 고귀한 선물'을 시작으로 ‘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 오늘 밤 내게' 등 맑은 노래로 사랑을 받았던 포크 가수였다.

 

섬유 사업을 했던 부친 장동옥씨와 생활력이 강해 가장 역할을 했던 모친 임수덕씨 사이의 5남 3녀 중 다섯째였던 장미리는 1948년에, 장재남은 여섯째로 1949년에 그리고 막내인 장은아는 1956년에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장미리의 본명은 장숙자, 장은아는 장숙희이다. 장재남은 본명이다. 형제 자매들은 모두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했지만 막내 장은아는 생후 3개월부터 어머니와 함께 서울 을지로에서 성장했다.

 

3남매의 성격은 노래만큼이나 판이했다. 장미리는 보수적이고 재남은 사교적이고 장은아는 외향적인 성격이다. 장재남은 미술에 재능이 있어 아르바이트로 만화 캐릭터 '땡이'를 그려 히트를 시켰을 정도. 또한 이승만 대통령 성대모사가 뛰어났던 재주꾼이었다. 그는 서라벌 고를 졸업한 후 60년대 말부터 장미리와 함께 미8군 밴드의 멤버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72년 군 입대 후 공백기를 가지고 70년대 중반 이후 지방 밤무대에서 언더 그라운드 가수 생활을 했다.

 

장미리는 어릴 시절부터 노래자랑 대회에 뽑혀 나갈 만큼 노래 실력이 출중했다. 카니 프란세스, 낸시 윌슨 음악을 좋아했던 그녀는 성만여상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66년 여고를 졸업하며 가수 데뷔를 꿈꿨지만 부친의 반대에 부닥쳐 둘째 오빠 장재의를 매니저 삼아 허락을 얻어냈다. 첫 무대는 미도파, 세운 등 초기 음악살롱 무대. 깜찍한 컨트리 송을 불러 젊은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때 서수남의 눈에 들어 67년 7월 컨튜리 밴드 올 오프리쇼 멤버로 스카웃 되면서 8군 무대에 진출했다. 이후 많은 미8군 무대를 통해 ‘ 한국의 아레사 프랭클린'로 성장했다. 이후 그녀는 68년부터 1년 간 일본, 대만, 말레이지사, 싱가폴. 태국, 라오스 등 동남아 8개국 순회공연에 오르며 국제적인 톱 가수를 꿈꿨다.

 

워커힐 전속 악단장, MBC TV 전속 악단장을 역임한 여대영과의 만남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외국 곡만을 노래했던 그녀는 대중가요를 취입하며 일반 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이 때가 69년 11월. KBS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로 슬로우 고고풍의 노래였던 ‘ 아빠 선생님'을 시작으로, ‘ 밤은 싫어요' ‘부부운전사' ‘찾아 온 바닷가' ‘ 첫 경험'을 연이어 발표했다. 탁 트인 고음의 매력적인 허스키 창법에 귀엽고 앳된 얼굴로 항상 웃음을 머금고 블루진에다 원형의 선글라스 착용한 그녀는 대중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세미클래식에서 팝송, 가요, 민요, 칸소네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완전하게 소화해 음악성 있는 여가수로 인정을 받았다. MBC ‘ 크라운 쇼'를 출발로 TBC ‘원 투 드리 고', 동아방송의 ' 밤의 그룹 사운드' 등 수 많은 TV쇼에 출연하고 록 그룹 he5와 함께 미8군 활동을 병행했다. 70년 9월 21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 6회 동양방송주최 방송가요상 시상식. 그녀는 ‘ 아 어떻게 할까!'로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71년부터는 댄스 풍의 가수로 거듭나며 인기 퍼레이드를 벌였다.

 

높은 인기는 항상 구설수를 동반하는 법.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 갔던 그녀는 73년 6월 영사운드와 함께 만든 별도의 음반에서 안길웅작곡의 '말 전해다오' '추억'등 듣기 편한 록 계열의 5곡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헌데 73년 11월 부산 TBC TV '가요대전' 출연 후 연락도 없이 MBC라디오와의 공개 방송 등 예정된 스케줄을 펑크 내자 증발 소동까지 터졌다. ‘ 3통의 협박편지와 전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언론은 ‘ 장미리 消?이라는 제하로 대서특필했다. 또한 히트곡 '아 어떻게 할까'를 작곡한 작곡가 안길웅과 지방 쇼를 주관했던 쇼 단장과의 황당한 스캔들까지 불거져 나왔다. 당시 좋은 노래로만 인기를 유지할 수 없는 환경이 힘겨웠던 그녀는 한동안 고향으로 내려가 머물렀던 것.

 

74년 12월, 한강변의 한 중국집에서 투코리안스의 손창철의 주선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대구에서 자동차 부품업체인 '아세아상사'를 운영했던 김민삼씨와 만나 75년 초 약혼을 하고 소리 소문 없이 치렀던 식이었다. 75년 10월 MBC TV '토요일 토요일밤에' 출연을 마지막으로 모습이 보이지 않자 “ 이민을 갔다”, “삭발을 하고 여승이 됐다”는 등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결혼 후에도 가수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보수적인 시댁의 반대로, 은퇴를 한 사실조차 다음해 7월에야 알려졌다.

 

 

[추억의 LP 여행] 3남매 가수(下)
장미리, 장은아, 장재남 서로 다른 음악색깔, 인생행로

 

3남매 중 두 번째로 정식 가수에 입문을 한 것은 장은아였다. 그녀는 을지초등학교 4학년 때 높은 경쟁률을 뚫고 염광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뽑혔던 재주꾼이었다. 학예회와 소풍 때는 단골로 불려 나가 노래 불러야 했을 만큼 학교에서는 유명했다. 한양여중에 진학하면서 절친했던 언니 장미리를 따라 방송국에 따라 다녔다. 사춘기 시절, 언니의 구두, 옷에 대해 참견을 하며 예쁜 옷은 몰래 입곤 했다. 장은아는 언니의 노래보다 양희은과 방의경 등의 포크송이 좋았다. 언니와 함께 방의경의 집으로 찾아 갔을 정도다. 이후 라디오 음악 프로를 통해 팝송과 포크송을 많이 들었다. 서문여고 3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 교본을 보며 오빠의 통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취미 삼아 노래를 했을 뿐 가수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명동 오라오라에서 노래를 했던 중학교 동창 박효근을 따라 놀러 갔다. 친구가 그곳의 연예부장에게 “인기가수 장미리의 동생”이라고 소개를 해 얼떨결에 무대에 올랐다. 이때가 76년 후반. 무대에 있던 통기타를 들고 양희은의 '내 님의 사랑은'과 오세은의 '고아'를 불렀다. 깜짝 놀란 연예부장이 “노래를 하라”고 제의했지만 가수가 될 생각이 없어 거절을 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집에까지 계속 찾아오자 어렵게 결심을 했다. 30분 타임을 배정 받아 사람이 없는 초저녁 무대에 올라 주로 외국 팝송과 포크송을 불렀다. 우연하게 가수 생활을 시작한 장은아는 노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당시 오라오라에는 고 김정호도 출연을 했다. 사회를 맡았던 허참의 소개로 77년, 김만수가 사회를 본 TBC 라디오 생방송프로 '노래하는 곳에'에도 출연했다. 첫 방송이 나가자 맑은 목소리 때문에 CM송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TBC PD출신 이수담의 CM송 사무실에서 곡을 받기 위해 고 김정호를 만났다. 작사가 박건호는 김정호를 통해 만난 신인 장은아를 픽업했다. 당시 김정호로부터 2곡을 받았지만 자신과 맞지 않아 취입은 못한 장은아는 77년 후반, 계동균과 오동식의 곡을 받아 78년 2월, 데뷔 음반 '잊어버리자/지구,1978'를 발표했다.

 

군에서 제대를 한 장재남은 78년 부산 '미리내'에서 언더 가수로 노래를 했다. 데뷔 음반을 준비중이던 장은아는 박건호를 부산으로 초청해 오빠를 소개시켰다. 송창식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 박건호는 최종혁에게 의뢰해 장재남의 데뷔 음반제작을 장은아와 동시에 착수했다. 먼저 발표된 장은아의 데뷔 음반은 흥행이 되질 않아 곧 바로 절판이 되고, 2달만에 오동식 곡 '고귀한 선물'을 타이틀로 2집을 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3집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1979년'는 연속 히트를 터트리며 인기가수로 떠오르게 했다. 3남매 중 가장 늦게 솔로 가수로 데뷔한 장재남. 데뷔 곡인 대화 형식의 독특한 노래 '빈 의자'를 포함, 경쾌한 컨튜리풍의 '사람을 찾습니다', '항아리'의 반응은 대단했다. 동시에 두 남매가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자 은퇴한 장미리까지 거론되며 각 언론들은 '한국 최초의 삼남매 히트 가수 탄생'이라며 집중 조명했다. 이때부터 삼남매는 ‘ 열린음악회’, ‘ 토요일 토요일 밤에’, ‘ 쇼2000’ 등 TV무대에 함께 올랐다. 동생들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장미리는 강력한 활동 재개 요청을 받았다. 팀 결성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장미리의 제한된 활동과 판이한 음악 색깔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장재남은 데뷔 음반 이후 자신의 음악 방향과 폭을 넓히기 위해 2년 간 칩거했다. 81년 9월, 슬로우 풍의 애절한 신곡 '멀어진 사람'과 고고 풍의 '동대문' 등을 발표하면서 YMCA 대강당에서 '신곡 발표회' 콘서트를 개최했다. '동대문'은 옛 것과 오늘을 보면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젊은 의식이 담긴 야심작이었다. 당시 게스트는 장은아, 유심초, 김학래 등. 이후 장은아는 81년 KBS 2FM '젊은이의 노래'에서 임백천과 함께 DJ를 맡아 8개월여 진행했다. 이후 오빠와 같은 서라벌로 전속사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신인 작곡가 이범희가 지은 디스코 풍의 신곡 '작은 나비'를 발표했다. 이후 81년 12월 KBS 라디오 PD 김종건과 세실극장에서 결혼을 했다. 장재남 역시 82년 3월 함세웅 신부의 주례로 82년 4월 결혼을 했다. 10개월만에 재기를 한 장은아는 조동진 곡 '오늘 밤 내게'를 발표해 변화된 음악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후 83년 '꿈꾸는 인형'등 음반을 몇 차례 발표했지만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93년 초반, 장은아는 기획사 화인픽스를 창립, 록 그룹 '점프' 등 몇몇 음반을 제작償嗤?실패했다. 이후 한동안 가정에만 전념하다 98년, 포크 바람을 타고 미사리 무대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작년엔 어린이대공원에서 양희은, 박경애 등 10명의 여성 포크 가수들과 조인트 공연을 열었다. 장은아는 방송 활동보다는 소극장 위주로 성숙된 음악적 분위기에서 노래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예전의 히트곡을 포크적으로 편곡하고 3곡 정도 신곡을 준비해 신보를 발표할 마음을 품고 있다. 한편 재작년까지 경기도 안양 근방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했던 장재남은 지금도 라이브 무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장미리는 논현동에서 딸 둘을 낳은 평범한 가정 주부로만 살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음악 항해를 해 오고 있는 3남매. 음악 색깔이 달라 팀 결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남긴 히트 넘버들은 지금도 대중의 애창곡으로 사랑 받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2004. 04. 15)

 

출처 :

출처 : 길 위에 흐르는 음악
글쓴이 : 호크아이(이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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