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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뜨거운 감자 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원문

mistyblue 2015. 11. 3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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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청(淸)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이 관월산(關月山)을 보내어 탁본을 만들게 했고, 그후 중국의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에 의해 많은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자료로 구체적인 역사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초기의 탁본은 대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을 해독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1888년에 그 내용이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 會餘錄〉 5집에 실려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후 속속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니혼쇼키 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그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1913년에는 세키노[關野貞]·이마니시[今西龍]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1935년에는 이케우치[池內宏]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자세히 조사했다.

  일본인에 의해 연구가 독점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어 비를 실측하지도 못했고 탁본을 자료로 연구에 이용하지도 못했다.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비문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정인보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즉 기존의 일본인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는 1959년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여러 탁본들을 대조하여 각각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석회를 바르기 전의 탁본과 바른 뒤의 탁본을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제기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3년에 중국과 합동으로 능비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에는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가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능비에 관한 우리쪽 문헌을 거의 망라하여 찾아내고, 또 비의 재발견 경로를 상세히 검토했다. 또 문제가 되는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해석법을 받아들여 기존에 일본인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의 일환으로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리고 정반대로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分國)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는 신묘년기사에 대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한 박시형과는 약간 해석을 달리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가 국내에 전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남한의 연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초에 재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 전후해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자체적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국내에서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80년대 들어 다수의 정밀한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1984년에는 왕젠췬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왕젠췬은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기왕의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으며, 문자의 총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의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한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다시금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한편, 비문은 그 내용에 의해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이다. 둘째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를 적은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특히 신묘년기사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는데, 연대에 따라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395)조는 비려(稗麗) 정벌에 관한 것이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이 비려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 거란[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황해도)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이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비문은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연구에 중요하다.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무술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숙신(肅愼) 토곡(土谷)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 나성(莫 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 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 佳城), 성( 城) 성(城)을 파하였다.

20년(410) 경술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 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시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 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城)이 64, 촌(村)이 1,400이었다.(하략)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재위;371-384년)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고국양왕(;재위384-391년)의 아들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391년 7월에 왕은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9월에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본국에서 흩어진 백성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10월에 다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江華 喬桐島)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바다에 에워싸인 채 우뚝 솟아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왕은 군사를 일곱 군데로 나누어 공격케 하여 20일 만에야 성을 빼앗았다. 

  392년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였다. 

  394년 7월에 백제군이 쳐들어와 왕은 날랜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싸워 물리쳤다.  8월 백제와 패수(浿水) 가에서 싸워 격파하고 8천을 포로로 잡았다. 왕은 비려(碑麗)가 고구려인을 돌려 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富山)을 넘어 산을 등에 지고 염수(鹽水)에 이르러 비려의 3부락 6∼7백 령(營)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가지고 돌아왔다. 

  395년 8월에 왕은 패수에서 백제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396년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여러 성을 치고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城橫) -혹은 악성(岳城)-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아신왕)이 항복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될 것을 맹세하였으며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398년 원수를 보내어 숙신(肅愼)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加太羅谷) 남녀 삼백 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여진족)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399년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구과 사통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하니 신라왕이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400년 왕께서 보기병 5만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하였는데 종남거성(從男居城)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러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성(拔城)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安羅人)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2월에 중국 북방의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3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연나라 장수 모용 희(慕容熙)가 선봉에 서서 신성, 남소 두 성을 함락시켰다. 적군은 7백여 리의 땅을 개척하여 민가 5천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 즉, 396년 모용보(慕容寶)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 (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하는가 하면 400년에는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옴으로써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401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자 연의 모용귀(慕容歸)가 도망했다. 

  402년에 왕이 군사를 보내어 연나라의 숙군성을 치게 하니, 연나라의 평주 자사 모용 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404년에 다시 왕은 군사를 일으키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백제가  침공해왔지만, 이 또한 5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에서 몰아냄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고, 나아가서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한다.

  405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 희(慕容熙)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406년12월에 모용희(慕容熙)가 다시 요동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와 함께 대왕이 산둥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 대하여 천리마 등을 보내면서 접근을 꾀한 것도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인 것 같다.

  407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어 종족의 은의를 배풀자 북연왕(北燕王) 고운(高雲)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보답했다. 

  408년 왕자 거련(巨連; 장수왕)을 태자에 봉하고 7월 동쪽지방에 독산성(禿山城)등 6성을 축조하고 평양 민가를 옮겼다. 

  410년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그 해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 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이렇듯 정력적인 정복사업의 결과, 재위기간 중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하였다.

  413년 10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아들 거련(巨連)이 장수왕이 되었다.

  한편, 내정에도 힘을 기울려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한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

 

 

 

광개토왕 전략.전술

[광개토왕은 주변국을 정벌함에 있어 어떤 수순과 전략.전술을 사용했는가?]

 

1. 광개토왕 전략.전술

사람들은 광개토왕을 가리켜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광개토왕이 어떤 신묘한 전략.전술을 사용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는지? 광개토왕이 넓힌 영토는 어디까지였는지? 광개토왕은 넓힌 영토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렸는지? 등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광개토왕이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광개토왕 특유의 통치술과 신묘(神妙)한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광개토왕이 어떤 전략.전술을 사용하여 영토를 넓혔고, 넓힌 영토를 어떤 방법으로 다스렸는지 살펴본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A.D 386년에 태자로 된 분으로 본명은 담덕이다.

담덕이 태자로 되었을 무렵 고구려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 및 신라와 대치하고 있었고, 서쪽으로 후연(後燕)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북쪽으로 동부여와 대치하고 있었고, 동쪽으로 읍루와 대치하고 있었다. 즉 당시 고구려는 사방으로 적대국들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었다. 반면에 구태백제(仇台百濟)는 A.D 204년 10월에 대방고지(帶方故地:황해도 지방)에서 입국(立國)하여 A.D 205년에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하였고 A.D 205-208년경에는 대마도, 일본열도 및 일부 가야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야국들을 복속시켰으며, A.D 313 - 314년경에 모용씨(慕容氏::A.D 337년에 燕이라 칭함)와 동맹을 맺고 요서(遼西)에 진출하여 (당나라 때의) 유성군(柳城郡:조양 방면)과 (당나라 때의) 북평군(北平郡:난하 서쪽 방면) 사이에 있던 (당나라 때의) 요서군 자리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고, 서진(西晋)이 망하는 A.D 316년에는 양자강하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송나라 때의) 진평군(晋平郡) 자리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었으며, A.D 37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평양(平壤:저자는 이 평양을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펴기 위하여 일시 제2 수도로 사용한 황해남도 신원군 장수산 소재 장수산성으로 보고 있다)을 점령하였고, 후위(後魏:北魏 A.D 386년~) 때는 중원(中原)과 중국동해안 전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국력이 아주 강성해져 있었다. [참고: 백제의 요서 및 중국동해안 진출시기 등에 대하여는 본서 백제 장의 구태백제 항 참조]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에 군을 가지고 있었다. (요서에 있는 군은) 지금(당나라 때)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註 일부 사학자는 북평을 지금의 북경 방면이라 주장하나, 통전을 지은 당나라 때의 북평군은 난하 서쪽에, 유성군은 조양 방면에 각 있었고, 요서는 난하에서 유성 사이이다. "北平郡東至柳城郡七百里..西至漁陽郡<북경 동북>三百里(북평군은 동쪽 700리에 유성군이 있고 서쪽 300리에 어양군이 있다). 遼西今柳城及北平郡之東境皆是也(요서는 북평군에서 유성군 사이이다).  柳城郡東至遼河四百八十里(유성군 동쪽 480리에 요하가 있다)." 通典卷第187 州郡8]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다. (중국동해안 방면의) 백제의 치소는 (송나라의) 진평군 진평현이 있던 곳이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군은 백제의 군현 이름이 아니고 송나라가 A.D 468년에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했다가 A.D 471년에 폐지한 군현의 이름이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양자강 좌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晋宋濟梁據江佐右」北史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강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위(북위) 때 중원에 자리잡았다. 自晋宋齊梁據江左後魏宅中原」周書 百濟傳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王爵)을 분봉(分封)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征伐)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明治年間)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고 부진(不振)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盡歸聖朝」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는 명치(明治)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주몽)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文咨好太列帝 改元明治 十一年 齊魯吳越之地 屬我 至是 國疆漸大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百濟)가 영유하던 곳을 요서.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D 502년) 11월에 이르러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상해 서남 방면), 회계(會稽:강소성 소주),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복건성에 있는 지명)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 백제(百濟)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遼西), 진평(晋平) 등지를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百濟所領曰遼西晋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移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遼西晋平等郡 百濟郡廢」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2. 백제 정벌

 

고국양왕 3년(A.D 386년)에 태자가 된 담덕은 온조백제(溫祚百濟)를 공격해 보았으나 북한성(北漢城:삼국유사에는 양주로 적혀 있으나, 사학자들은 북한산 방면으로 비정한다)을 수도로 한 온조백제와 웅진(熊津:공주)을 수도로 한 구태백제(仇台百濟)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공격을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기 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고국양왕 3년(A.D 386년) 봄 정월 왕자 담덕(談德)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은 군사를 내어 남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사꽃(桃) 오얏꽃(李)이 피었다. 소(牛)가 말(馬)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談德爲太子 秋八月 王發兵南伐百濟 冬十月 桃李華 牛生馬 八足二尾」

 

위에 나온 복사꽃(桃), 오얏꽃(李)은 같은 발음의 도이(島夷) 즉 왜(倭)를 군사로 사용한 구태백제와 외교적으로 어떤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위에 나온 소(牛)는 소마리(牛頭.牛首:일명 소시모리. 소의 머리를 한 농사의 신을 숭배한 송화강유역 등 요하 동쪽 농경지방 지칭)에서 이주한 구태백제를 가리키고, 말(馬)은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국된 온조백제를 가리킨다. 그리고 소(牛)가 말(馬)을 낳았다는 것은 구태백제가 부모(종주국)이고 온조백제가 자식(복속국)이라는 뜻이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붙어 있다는 뜻으로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이라는 뜻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담덕이 8월에 온조백제를 공격하였다가 10월 달에 구태백제와 외교적으로 어떤 접촉이 있은 후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공격을 중지하였다는 내용이다. [註 삼국사기 본기에서 도이(桃李)가 나오는 시기를 살펴보면, 고구려본기에는 고국양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문자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안원왕 10년조(冬十月 桃李華),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3년조(冬十月 雷 桃李華)에,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 23년조(冬十月桃李華), 내해이사금 8년조(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진흥왕 원년조(冬十月 地震 桃李華), 흥덕왕 8년조(冬十月 桃李再華), 경문왕 3년조(冬十月, 桃李華), 경덕왕 22년조(二十二年 八月 桃李再花) 등에 나온다. 이는 이 무렵 도이(桃李)로 지칭되는 세력과 어떤 접촉이 있었음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으로, 도이는 상대국을 비하하여 적은 것이다. 또 도이(桃李)가 나오는 시기는 대부분 10월인데, 이는 당시 10월이 상달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달인 10월에 도이(桃李)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군사적 접촉이 아니라 외교적 접촉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덕왕 22년 8월조(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는 자연현상을 적은 것인지 아니면 정월에 이어 8월에도 외교적 접촉이 있었는 것을 적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게 된 담덕은 백제(百濟)에 대한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즉 여태까지 백제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외교실패로 서쪽 방면의 후연(後燕) 및 남쪽 방면의 백제와 모두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군사력이 서쪽과 남쪽으로 분산된 점, 백제와 후연이 동맹관계에 있는 점,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인 점, 제해권(制海權)을 구태백제가 장악하고 있는 점 등을 깨닫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정책을 취하였다.

-수군(水軍)을 강화하였다. 이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상륙전술을 펼치기 위해서 였다. 이 정책으로 고구려는 백제보다 월등히 강한 수군(水軍)을 보유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수군은 그 뒤 A.D 392년에 수만 명이 동원된 한강하류 방면 상륙작전과 A.D 396년에 역시 수만 명이 동원된 금강하류 방면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외교적으로 백제를 고립시켰다. 이를 위하여 담덕은 그 전까지 적대관계에 있는 후연(後燕)에 조공(朝貢)하여 고구려와 후연을 동맹관계로 만들고, 동맹관계에 있는 후연과 백제(百濟)를 적대관계로 만들었다. 또 미해(美海)를 구태백제(仇台百濟)에 인질로 보내고 구태백제에 복속하는 신라를 위협하여 실성을 인질로 받아, 신라와 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고, 신라와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었다. [註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9년(A.D 400년)에 후연(後燕)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연서(燕書)에는 광개토왕 즉위 초년(A.D 392년)에 광개토왕과 후연이 함께 온조백제로부터 인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麗王談德在位初年冬十月南伐濟數十城之入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子一人). 이로 보아 고구려가 후연에 조공하기 시작한 해는 A.D 392년 이전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서에는 백제와 후연이 왜 적대관계로 변했는지 그 사유가 나오지 않으나, 당시 백제가 영유하고 있던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지방에서 백제와 후연간에 영토문제로 불화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광개토왕은 백제와 후연과의 불화를 놓치지 않고 후연에게 백제를 정벌한 후 백제가 영유하고 있던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지방을 후연이 영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하여 백제와 후연을 이간시키고 고구려와 후연을 동맹관계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후 광개토왕 9년(400년)에 후연이 거만하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광개토왕이 후연에게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지방을 후연이 영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고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요서지방의 백제장군들을 귀복시켜 그곳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또 후연의 유주자사와 태수들을 귀복시켜 후연의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註2 백제가 진출한 (당나라 때의) 북평군(난하 서쪽)에서 유성군(조양 방면) 사이는 원래 연(燕)의 전신(前身)인 모용씨(慕容氏)의 영역이었다. 모용씨는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후방에 있는 백제와 동맹을 맺으면서 모용씨의 영역인 북평에서 유성 사이 요서지역에 백제가 진출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그뒤 요서는 연(燕:모용씨가 칭한 나라. 보통 前燕이라 부름), 전진(前秦), 후연(後燕) 등의 순서로 영유하였는데, 이들 나라들은 그들의 영역 내에 있는 요서의 백제군을 폐지시키지 않았다. 이는 전연, 전진, 후연도 모용씨처럼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후방에 있는 백제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뒤 후연이 개국될 무렵 백제는 요서와 중국동해안뿐만 아니라 중원까지 진출하는 등 힘이 막강해지자 그때부터 백제는 유성에서 북평 사이 요서 지역에서 후연(後燕)을 배제하고 영유권을 행사하다 후연과 불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요서진출은 본서 한군현 장의 나라군과 대방군의 모용씨 영역으로 이동 항 참고.]

 

담덕의 이러한 정책은 온조백제, 구태백제를 불문하고 백제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즉 신라와 고구려가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백제는 고구려와의 국경 외에 신라와의 국경에도 군사를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백제 군사의 신라 국경 배치는 백제 전력(戰力)의 분산을 가져와 서해안(西海岸) 방면의 방위력이 약화되었으며, 서해안 방면의 방위력 약화는 고구려 수군이 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반대로 고구려는 후연과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후연 방면에 배치한 군사를 백제 방면에 집중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온조백제에 일부러 져주어 온조백제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진사왕 5년(A.D 389년)가을 9월 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변을 침략하였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진사왕 6년(A.D 390년) 가을 9월 왕은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를 쳐 도곤성을 빼앗고 2백 명을 사로 잡으니 왕은 진가모에게 병관좌평을 제수하였다.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온조백제는 A.D 387년 9월에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워 이기지 못하였고, A.D 391년 4월에는 말갈에게 북변의 적현성을 빼앗겼다.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말갈은 고국양왕이 보낸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아니고 당시 고구려에 복속한 강원도 지방의 토착거수들이 보낸 기마부대로 추정된다. 당시 온조백제는 말갈과의 싸움에서도 이기지 못 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공격에 도곤성 등을 빼앗기었다. 이는 온조백제를 교만하게 만들어 온조백제와 구태백제를 이간시키려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온조백제에 일부러 져주어 온조백제 진사왕을 극도로 교만하게 만든 다음 이간전술을 사용하여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이간시켰다. 담덕이 일부러 져준 것도 모른 채 연이어 이긴 것에 고무되어 극도로 교만해진 온조백제 진사왕은 이번에는 담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구태백제의 도움 없이도 온조백제만으로 고구려를 상대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구태백제를 배신함으로써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에 불화가 일어났고,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의 불화는 백제 전력(戰力)의 분열을 가져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온조백제 진사왕이 구태백제를 배신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진사왕 7년 가을 7월 서울 서쪽에 있는 큰 섬에서 사냥하면서 왕이 친히 사슴을 쏘았다. 8월 다시 횡악(橫岳:삼각산)의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又獵橫岳之西」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당시 온조백제의 수도는 북한성이었는데, 삼국유사에는 북한성이 양주로 적혀 있으나, 사학자들은 북한산 방면으로 보고 있다.]

 

위 문구에 나오는 사냥은 같은 동족끼리 싸운 사실을 은유법으로 적을 때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위 문구는 온조백제 진사왕이 직접 강화도로 출동하여 강화도에 있는 구태백제 수군기지를 공격하였다는 것과, 다음달 8월에 구태백제 군사가 온조백제 진사왕을 응징하기 위하여 횡악(삼각산)의 서쪽 방면 즉 온조백제 수도의 서쪽 방면으로 출동하였을 때 진사왕이 친히 출정하여 구태백제 군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난 온조백제 진사왕이 온조백제 서쪽 섬에 있는 구태백제 수군기지를 점령하여 구태백제 수군을 강화도에서 쫓아버림으로써, 온조백제의 서해(西海) 방면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되었다. 이는 다음해 7월에 고구려 수군이 서해를 통하여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A.D 386년부터 A.D 392년 사이 어느 해부터 후연에 조공하면서 후연과 백제를 이간시켜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이간시켜 백제를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데 성공한 광개토왕은 A.D 392년 7월부터 백제를 공격하였다.

A.D 392년 7월 광개토왕은 군사를 보내어 온조백제와 신라와의 접경인 구원(狗原) 방면에서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作戰)을 펼쳐 온조백제 군사가 구원 방면으로 몰림으로써 온조백제의 서해안 방면 방위가 허술해졌을 때, 수군(水軍)을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시켜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 성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었다. [註 온조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이 있기 전 도성을 북한성(양주나 북한산 방면)에서 남한성(송파구 풍납토성이나 하남시 방면)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미성은 서해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가는 입구를 지키던 성으로 한강하류나 강화도, 교동도 방면에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진사왕기(辰斯王紀) 8년조에는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광개토왕 원년(392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註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원년이 A.D 392년으로 적혀 있으나, 광개토왕비문에는 A.D 391년으로 적혀 있다.]

「진사왕 8년(392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군사 4만을 거느리고 와 북변을 공격하여 석현 등 10여성을 함락하였다. 왕은 담덕(談德)이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서 항거하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왕은 구원(狗原)에서 사냥하고 열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三國史記 百濟本紀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 있었는 시기가 10월부터 11월까지로 적혀 있으나 7월에 고구려 수군이 수도와 가까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 10여 성을 점령하였을 때 온조백제가 전혀 항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성동격서 작전을 펼친 7월에 이미 주력부대를 이끌고 구원 방면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위 구원은 신라와의 접경 방면이나 그 위치는 불명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A.D 396년에 광개토왕이 구태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웅진(공주), 임천(부여 임천), 와산(보은), 괴구(괴산), 복사매(영동), 우술산(대덕), 진을례(금산), 노사지(유성) 등지를 점령한 후 속리산에서 제천행사를 치르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온조백제 지역인 구원은 구태백제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었을 것이므로, 괴산, 수안보, 충주 방면이거나(조령을 넘어갈 경우), 단양, 제천 방면(죽령을 넘어갈 경우)으로 추정된다]

 

진사왕(辰斯王)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에 쉽게 말려든 것은 청목령(靑木嶺:개성 부근)에서부터 북으로 팔곤성(八坤城)까지 설치한 관방(關防:방어진지)과 한강하류 방면에 있는 관미성(關彌城)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즉 진사왕은 고구려 군사가 온조백제의 관방이 있는 전방이나, 관미성이 있는 한강하류 방면을 피하여 신라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으로 믿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가 신라와 온조백제와의 접경 지역인 구원(狗原) 방면에서 성동격서 작전을 벌이자 그 전에 광개토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진사왕 7년 11월에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태백제 수군(水軍)을 쫓아버림으로써 서해(西海)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져 있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동쪽인 구원(狗原) 방면으로 갔다가 고구려 수군(水軍)에게 서해(西海) 방면의 방위력이 허술해진 허를 찔렸다.

같은 해 10월 고구려 군사가 서해에서 한강을 통하여 수도 남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던 관미성을 점령하자 온조백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 연서(燕書)에 의하면 이때 연나라도 백제공격에 참가하였다.

 

「광개토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진사왕 8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三國史記 百濟本紀

「고구려왕 담덕은 재위 초년 10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수십성을 빼앗고, 담덕과 연나라는 백제의 태자와 왕친자 1인을 인질로 받았다. 麗王談德 在位初年 冬十月 南伐濟數十城之入 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子一人」燕書 [註 광개토왕이 온조백제를 정복하고 인질을 받은 사실이 A.D 392년 것은 연서(燕書)에, A.D 396년 것은 광개토왕비문에  각 나온다. 광개토왕비문에는 A.D 392년에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인질을 바친 내용이 나오지 않으나, 온조백제는 A.D 392년에도 인질을 바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A.D 392년 10월 온조백제는 수도 방어의 요지인 관미성이 함락당한 후 고구려의 공격에 수도를 방어할 힘이 없었는데도 고구려는 온조백제의 수도를 점령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이는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고 인질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문에 A.D 392년 거란과 온조백제를 정벌한 사실이 적혀 있지 않는 것은, 그해 거란과 온조백제를 정벌하였으나 두나라가 곧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므로써 두나라에 대한 정벌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 그뒤 A.D 395년에 비려를, A.D 396년에 온조백제를 각 다시 정벌하였다. 참고로 광개토왕의 재위 초년은 연서(燕書)와 삼국사기에는 A.D 392년으로, 광개토왕 비문에는 A.D 391년으로 각 적혀 있다.]

 

A.D 392년 전쟁에서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패배한 것은 외교실패로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는 연나라가 적대관계로 변한 점 및 광개토왕의 이간전술에 놀아나 구태백제를 배신함으로써 광개토왕의 공격 때 구태백제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3년조에는 진사왕(辰斯王)이 구태백제를 배신한 사실이 우회적으로 적혀 있고,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다음달 11월에 기각숙니 장군 등을 온조백제로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우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이로서 온조백제는 10월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가 11월에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無禮)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도숙니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註 온조백제)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도숙니 등은 아화(阿花:註 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石川宿禰 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日本書紀  [註 일본서기 응신천황기 3년조에는 구태백제왕과 온조백제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한 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대화왜 천황이 한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이나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한반도 백제 지역에 백잔(百殘:온조백제)과 이잔(伊殘:구태백제)이 있었다고 적혀 있고, 백잔(百殘)과 왜(倭)는 (구태)백제의 보좌(補佐) 또는 신민(臣民)이었다고 적혀 있다.]

「진사왕 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돌아갔다. 冬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자 광개토왕은 구태백제를 괴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를 괴멸시켰고, 이어서 보기병을 남진시켜 아리수(한강)를 건너 도성을 공격하여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 받았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屬國)이어서 조공(朝貢)을 바쳐 왔는데 왜(倭)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伊殘國)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都城:註 남한성. 진사왕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A.D 392년 7월 이전에 수도를 북한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을 핍박하니 백잔왕(百殘王)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0以辛卯年倭來渡破百殘00新羅以爲臣民以(永樂)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伊殘國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00000便國城百殘王困逼獻0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殘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取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註 구태백제를 비하하여 이잔(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 왜(倭)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왜(倭)로 적혀 있다.]

「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8년조에도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응신천황(應神天皇)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來朝)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말하였다. 아화(阿花:아신왕)가 왕이 되어 귀국(貴國)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제주도?),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가야 지역)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直支:전지)를 천조(天朝)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日本書紀  [註 이때 광개토왕이 가야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海上通路) 차단과 남해(南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개토왕 즉위 후 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승리한 원인

 

A.D 392년 이전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평양성을 점령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승리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전술 때문이었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전술과 고구려의 전략.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과 기마전술을 주 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던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주 전술로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과 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과 수군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구려 수군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시킨 것, A.D 396년에 고구려 수군이 금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 등을 괴멸시킨 것, A.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서 대마도(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로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3. 임나(任那:대마도)와 이(伊:대화왜), 왜(倭:구주왜) 정벌

 

영락(永樂) 9년(A.D 399년)에 응신조 왜 군사가 신라와 가야를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왜를 물리치고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대마도)를 점령한 후 이어서 일본열도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영락(永樂) 9년(A.D 399년) 기해년에 백잔(百殘:註 온조백제)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倭人:註 구태백제와 응신조왜 지칭)과 더불어 화통(和通)하였다. 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하는데, 마침 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되 왜인(倭人:註 응신조왜 군사)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城池)를 파괴하니 노객(奴客)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아 뵙고 명(命)을 청한다고 하였다. 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密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0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000其忠00遣使環告以00」廣開土王碑文

「영락(永樂)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新羅)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관병(官兵: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註 응신조왜 군사 지칭)가 가득하였다. 관병(官兵)이 이르자 왜(倭)가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차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00에 가득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註 賴戶內海에 있는 섬, 兵庫縣에 속함)를 경유하여 단마(註 兵庫縣의 북부)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註 대판)를 경유하여 무장(註 那良의 春日野)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註 북구주)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0其中官軍方至倭賊退官兵跡而越來攻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0城倭滿倭潰城六被我攻滅無遺倭遂擧國降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戌兵滿假00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諸賊謀00官兵制先直取卓淳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斯諸賊悉自潰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0000朝貢」廣開土王碑文 [註 파란색 글자는 계연수님이 지은 碑文徵實로 결락자를 보충한 것임.]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倭)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百濟),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所至 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영락 (永樂) 6년조, 9년조, 10년조 사실이 함께 뒤섞여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구태백제가 이(伊)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이 이(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근국(根國)인 구태백제(일명 南夫餘.伊國)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왜(倭)는 서.남해(西.南海),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에 거주한 왜(倭)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4. 유주,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

삼국사기 열전(列傳) 최치원전(崔致遠傳)에는 고구려, 백제 전성시대에는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었다고 적혀 있다. 유(幽), 연(燕),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은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이 있던 곳이다. 같은 곳을 고구려와 백제가 침범하고 흔들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백제로부터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을 모두 빼앗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고구려, 백제(百濟)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참고 : 연, 제, 노, 오, 월의 위치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유주(하북성 방면) 등지를 영유한 사실이 고분벽화에 암시되어 있다. 1976년에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기슭에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고분이 주목을 끄는 것은 벽화와 600여자에 달하는 묵서(墨書) 때문이다. 그 중 고분 전실 북벽 상단에 적혀 있는 묘지명(墓誌銘) 14행 154자와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의 직책은 광개토왕이 후연(後燕)의 유주자사와 13군 태수들을 귀복시키고 유주(幽州:하북성 방면) 등지를 영유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1행 00郡信都(註1)彰都鄕0甘里(00군 신도 창도향 0감리 출신),  2행 釋迦文佛弟子00氏鎭(註2)仕(불제자 00씨 진은 벼술길로 나가),  3행 位建威將軍國小大兄佐將軍(건위장군 소형 대형 좌장군),  4행 龍驤將軍遼東太守使持(용양장군 요동태수),  5행 節東夷校尉幽州刺使鎭(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 벼슬을 지냈다)(註3). 6행 年七七薨焉以永樂十八年(77세로 영락 18년에 돌아가시니),  7행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註4)(이 해는 무신년이었다. 12월 25일<을유>에) 8행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주공이 터를 잡고),  9행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공자가 날을 잡고, 무왕이 시를 뽑은 것과 같은 아주 극진한 예절과 정성으로 장지와 날과 시를 잡아 옥구를 장지로 옮겨),  10행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잘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 부귀가 7세 자손까지 미치고)  11행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자손이 벼슬길에 나가 벼슬이 나날이 올라 후왕에 이르고).  12행 造藏萬功日煞牛羊酒0米桀(많은 공을 세우게 되리라. 날마다 소와 양을 잡고 좋은 쌀로 술을 빚어),  13행 不可盡掃旦食鹽養一記(아침 공양에 음식, 소금, 된장이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기록하여),  14행 之後世寓寄無絶(후세에도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註1 신도(信都)는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로 귀화하기 몇년 전까지 후연의 모용수(慕容垂)가 기주(冀州)의 치소로 사용한 곳이다(冀州..慕容垂治信都. 宋書). 註2 주인공의 성은 지워져 알 수 없으나, 이름은 진이다. 註3 유주자사진은 유주자사가 주재한 곳으로 유주자사는 북경 방면에서 행정권과 군권을 함께 장악한 벼슬 이름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은 영락 18년 이전 가장 가까운 시기에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鎭)을 둔 나라는 후연(後燕:A.D 384~)이다. 후연은 북위(北魏)와의 싸움에 패하여 수도 중산(中山)을 빼앗기고 모용보(慕容寶) 때 수도를 동쪽 화룡(和龍:조양)으로 옮겼고, 그뒤 즉위한 모용희(慕容熙)는 자사진도 동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鎭)은 영지(令支)에, 청주자사진(靑州刺史鎭)은 신성(新城)에, 병주자사진(幷州刺史鎭)은 범성(凡城)에, 영주자사진(營州刺史鎭)은 숙군(宿軍)에, 기주자사진(冀州刺史鎭)은 비여(肥如)로 각 옮겼다. 뒤에 나오는 13군 태수들 명칭으로 보아 위 문구에 나오는 유주자사진은 북경 방면에 있을 때이다. 註4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로 붙여 읽으면 무신년 12월 25일에 죽은 것으로 해석되고, '太歲在戊申'과 '十二月辛酉朔卄五日乙酉成遷移玉柩'로 나눠 읽으면 그해 죽고 12월 25일에 장례치른 것으로 해석된다.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辛酉朔卄五日乙酉'은 12월 1일이 신유이고 25일이 을유라는 뜻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을 무렵 중국왕조는 위(魏)의 경초(景初) 원년(A.D 237년)에 양위(楊偉)가 완성한 경초력(景初曆)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경초력은 정월을 세수로 하고 정월 초에 입춘이 있어 정월에 봄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역법은 양력 2월 초에 입춘이 있으므로, 무신년 12월 25일은 양력으로 다음해 1월 하순경이다.]

 

-위 묘지명 문구에 의하면 피장자는 00군 신도 창도향 0감리에 태어나 건위장군, 소형, 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 벼슬을 하였고, 영락 18년에 77세로 죽었다. 삼국사기 잡지에 고구려의 벼슬에 자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장자는 후연(後燕)에서 유주자사 벼슬을 하다가 광개토왕에게 귀복한 후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은 귀복한 사람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 피장자가 죽은 해는 영락 18년(A.D 408년)이므로, 피장자가 후연(後燕)에서 유주자사를 지낸 시기는 A.D 408년 이전이다.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

-고분 전실 서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의 직책은 범양태수(范陽太守:북경 서남쪽 탁 방면), 어양태수(漁陽太守:북경 동북쪽 방면), 연군태수(燕郡太守:북경 동쪽 계 방면), 상곡태수(上谷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대군내사(代郡內史:북경 서쪽 방면), 광녕태수(廣寧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북평태수(北平太守:북경 동쪽 방면), 요서태수(遼西太守:난하 서쪽 방면), 창려태수(昌黎太守:대릉하중류 방면), 요동태수(遼東太守:요양 방면), 현도태수(玄菟太守:심양 방면), 나라태수(樂浪太守:대릉하하류 방면), 대방태수(帶方太守:대릉하하류 방면)이다.

-고구려와 후연간에 동맹관계가 깨어지고 적대관계로 변한 해는 A.D 400년이므로,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하므로써 고구려가 후연의 유주를 차지한 해는 A.D 400년으로 보인다.

-13군 태수들이 관할한 지역 중 난하 동쪽은 유주자사진 관할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고구려에 귀복한 후 유주자사 진을 모셨다는 것은, 광개토왕 특유의 통치술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이 고구려로 귀복하는데 유주자사 진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광개토왕 재위시기 중 A.D 400년까지는 고구려와 후연(後燕)이 동맹세력이었는데, A.D 395년에 후연(後燕)이 남진하는 북위(北魏)에 패하므로서, 후연(後燕)의 유주는 북위(北魏)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광개토왕은 동맹국인 후연(後燕)의 유주를 지켜주다가 A.D 400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고구려에 귀복시키고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고구려와 후연(後燕)은 A.D 400년부터 동맹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변하였다(資治通鑑 晋紀 33年條 참조). 진서지리지(晋書地理志)에는 후연(後燕) 모용보(慕容寶:A.D 396-398년)가 수도를 중산(中山)에서 용성(조양)으로 옮길 때 유주(幽州) 방면이 북위(北魏)의 영토로 변하였다고 적혀 있으나(自幽州至子廬溥鎭以南地入於魏), 광개토왕에게 복속한 후연의 13군 태수들 중에 범양태수(范陽太守), 어양태수(漁陽太守), 연군태수(燕郡太守), 상곡태수(上谷太守), 대군내사(代郡內史), 북평태수(北平太守), 요서태수(遼西太守) 등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도 유주는 계속 후연의 영토로 남아 있다가 A.D 400년에 고구려의 영토로 변하였다. 광개토왕이 전쟁없이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귀복시키고 그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든 것은 귀복한 이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광개토왕 특유의 통치술 덕분이다.

 

 

5. 후연 정벌

 

광개토왕 재위 시 고구려 주변에 있는 나라 중 국력이 가장 강한 나라는 백제와 후연이었다. 광개토왕은 백제와 후연 중 백제를 먼저 정벌한 후 후연을 정벌하였다.

광개토왕이 후연을 정벌한 과정을 살펴본다.

광개토왕은 백제와 동맹관계에 있는 후연에 조공하여 백제와 후연을 갈라놓고 고구려와 후연을 동맹관계로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후연 정벌에 대비하여 미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정벌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 원년(A.D 392년) 9월 북으로 거란(契丹)을 쳐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흩어진 인구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九月 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 而歸」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영락 5년은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침략을 그치지 않으므로,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실 제, 부산(註 부여 지역인 장춘 방면)을 돌아 00에 이르러 염수(註 시라무렌하 방면) 가에서 비려(註 거란 지칭)의 3 부족 6, 7백 부락을 격파하고 소와 말, 양떼 등의 노획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은 수레를 돌려 0평도를 거쳐 동으로 0성, 역성, 북풍의 영토를 두루 살피고 사냥을 하면서 돌아왔다.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碑麗不貢00躬率往討過富山00至鹽水上破其三部族六七百營牛馬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0平道東來0城力城北豊王備獵遊觀土境田獵以還」  廣開土王碑文

 

그후 영락 10년(A.D 400년)에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북평에서 유성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범양태수(范陽太守:북경 서남쪽 탁 방면), 어양태수(漁陽太守:북경 동북쪽 방면), 연군태수(燕郡太守:북경 동쪽 계 방면), 상곡태수(上谷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대군내사(代郡內史:북경 서쪽 방면), 광녕태수(廣寧太守:북경 서북쪽 방면), 북평태수(北平太守:북경 동쪽 방면), 요서태수(遼西太守:난하 서쪽 방면), 창려태수(昌黎太守:대릉하중류 방면), 나라태수(樂浪太守:대릉하하류 방면), 대방태수(帶方太守:대릉하하류 방면)를 귀복시켜 백제의 요서분국과 후연의 유주 등지를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므로써, 후연을 동(고구려), 서(유주), 남(북평에서 유성 사이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 북(거란)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그 2년 후인 A.D 402년에는 후연의 요동태수(요양 방면)와 현도태수(심양 방면)를 귀복시켜 북진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길림에서 무순으로 만주 중앙을 가로지르며 길게 뻗은 산줄기) 사이 후연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이어서 군사를 보내어 후연의 숙군(宿軍:북진)을 점령하여 후연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혔다.

 

「광개토왕(廣開土王) 11년(A.D 402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宿軍:註 북진 방면)을 치니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註 이때 고구려 군사는 후연의 요동태수(요양방면), 현도태수(심양방면) 관할 지역에서 후연 군사와 싸우지 아니하고 바로 숙군(북진 방면)을 공격하였고, 유주자사 고분벽화에 현도태수와 요동태수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왕은 이 공격 전에 미리 후연의 현도태수와 요동태수를 귀복시킨 것으로 보인다.]

 

 

후연에 대한 포위망을 더욱 좁힌 광개토왕은 A.D 407년에 사방에서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하여 000000000에서 우리의 군사가 사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고 쓸어버리고 개갑 1만여령을 노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루성, 00성, 00000000성을 격파하였다. 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000000000師四方合戰斬煞蕩盡所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00城00000000城」 廣開土王碑文

 

후연은 이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내분이 일어나 멸망하고 고구려계 고운이 왕이 된 북연(北燕)이 세워졌다. 이때 광개토왕은 북연왕 고운에게 고씨 성을 하사하여 북연을 고구려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6. 그 외 주변국 정벌

 

북부여

모두루(牟頭婁) 묘지(墓誌)에 의하면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북부여(장춘 방면)로 진출하였다.

 

「전략. 조부 대형 염모(牟:再牟?)..중략..조부00, 대형 자0, 대형 00를 거치기까지 대대로 관직의 은혜와 물품을 하사받아 왔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 성민과 곡민을 함께 다스렸다. 전왕들의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조부의 인연에 따라 노객인 모두루와 00모에게 북부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전략. 祖大兄(再?)牟壽盡00於彼喪亡사由祖父00大兄慈0大兄000世遭官恩恩賜祖之0(出?)道城民谷民竝領前王0育如此還至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緣祖父0爾恩敎奴客牟頭婁00牟敎遣令北夫餘守事」

 

백신, 토욕

광개토왕은 영락 8년(A.D 398년)에 백신(연해주 방면 숙신 지칭)과 토욕(감숙성.청해성 방면 토욕혼 지칭)을 정벌하였다.

 

「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0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0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0事」 廣開土王碑文  [註 백신(帛愼)과 토욕(土谷)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 무리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숙신은 서천왕(西川王)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達加)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는데, 이곳은 고구려와 인접한 연해주 남부 지방이다. 그러나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중부지방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은 위서(魏書) 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방면에 있었다. 이해 광개토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北魏)가 후연(後燕)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盛樂:내몽고 呼和浩特 부근)에서 평성(平城:산서성 대동)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幽州)를 압박하자 북위(北魏)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백신(숙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광개토왕의 죽음이 몇 년만 더 늦었더라면 광개토왕은 북위마저 정벌하여 북중국을 고구려의 세력권에 넣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영락 20년(A.D 410년)에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영락 20년은 경술년이었다. 동부여는 옛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으므로 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대군이 부여성에 도착하자 동부여 전국이 두려워 하여 복종하고 000000을 바쳤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에 넓게 미치게 됨에 이에 회군하여 돌아왔다. 후략. 二十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城國駭000000000王恩普0於是旋還」 廣開土王碑文

 

7. 광개토왕의 주변국 정벌순서

 

광개토왕의 주변국 정복순서는 고단자들이 바둑을 두는 것처럼 아주 교묘한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이러한 수순에 의하지 아니하고 정복활동을 벌였더라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은 틀림없이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고구려는 백제와 후연 등 주변국의 합공을 받아 멸망했을 것이다.

광개토왕의 주변국 정벌순서를 정리해 본다.

광개토왕은 고구려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백제와 후연 중 백제를 먼저 정벌하였고,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A.D 386년에서 392년 사이 어느 해부터 후연에 조공하여 후연과 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고 후연과 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었다.

A.D 392년 정월에는 백제의 측방에 있는 신라를 복속시켜 백제를 북쪽과 동쪽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후연과 같이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같은해 10월 온조백제를 항복받았다.

같은해 9월에는 훗날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후연의 북쪽에 있는 거란을 미리 정벌하였고, 그뒤 A.D 395년에는 후연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다시 거란을 정벌하였다.

A.D 396년에는 수군을 금강하류에 상륙시켜 구태백제를 괴멸시키고 이어서 보기병이 한강을 건너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항복받았다.

A.D 398년에는 북위가 후연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주 방면으로 동남진하자 정예군사를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에 보내어 토욕혼을 정벌하므로써 북위를 동쪽(고구려.후연)과 서쪽(토욕혼)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고, 또 군사를 동부여의 동쪽에 있는 숙신에도 보내어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동쪽(숙신)과 남쪽(고구려) 양 방면에서 포위하였다.

A.D 399년에는 구태백제가 응신조 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A.D 400년에 이를 물리치고 왜를 정벌한 다음 임나연정을 만들어 신라, 백제, 왜를 통제케 하였다.

A.D 400년에는 후연을 사방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유성에서 북평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 장군들과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태수들을 귀복시켜 요서지방과 유주를 고구려가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후연을 동(고구려), 서(유주), 남(유성에서 북평 사이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 북(거란)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A.D 402년에는 북진에서 단단대령 사이 후연 지역을 빼앗아 후연을 더욱 고립시켰고, A.D 407년에는 사방에서 후연을 공격하여 후연을 괴멸시키고 후연 지역에서 일어난 북연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A.D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함으로써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정벌을 마쳤다.

만주 정벌을 마친 광개토왕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전부 정벌하기 위하여 당시 북중국의 강자이던 북위(A.D 398년에 이미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동서쪽에서 포위해 놓았다) 정벌을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광개토왕의 정벌활동은 끝이 났다.

 

8. 정복지 통치 방법

 

1). 개요

 

광개토왕이 주변국을 정복한 후 피정복국에 취한 정책은 조금씩 달랐다.

 

▶신라,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들,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

 

신라는 복속을 맹세받은 후 신라 체제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섬긴 점만 제외하고는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에 백제의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과 전에 후연의 유주자사 진과 13명의 태수들은 종전의 직위와 직책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이 방식은 복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고구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쉽게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요서와 중국동해안 지방을 번갈아 가며 영유한 것도 요서와 중국동해안 지방에 있는 전의 백제 장군들이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온조백제, 거란, 숙신, 토욕

 

군사를 보내어 정복한 후 피정복국으로부터 복속을 맹세받고 인질과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고구려왕 담덕은 재위 초년 10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수십성을 빼앗고, 담덕과 연나라는 백제의 태자와 왕친자 1인을 인질로 받았다. 麗王談德 在位初年冬十月 南伐濟數十城之入 德燕取人質 濟太子外王親子一人」燕書

「광개토왕(廣開土王) 원년(A.D 392년) 9월 북으로 거란(契丹)을 쳐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 본국에서 흩어진 인구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 而歸」

「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0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0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0事」

 

▶구태백제와 왜

 

고구려에 가장 적대적인 구태백제와 구태백제의 후국인 응신조왜는 군사를 보내어 멸망시켰다.

 

▶임나연정

광개토왕은 신라, 백제, 가야, 왜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10국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인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수군(水軍)을 두고 백제, 왜, 신라, 가야를 통제하였다.

 

「임나(任那)는 원래 대마도의 서북(西北)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治所)가 있었는데 국미성(國尾城)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對馬)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任那)가 통제하게 되었다. 때문에 임나(任那)는 이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대마도와 구주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가 또 갈려서 3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3가라(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註 임나연정 지칭)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烈帝)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 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 自古 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任那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首邑指稱也 自是三汗相爭 歲久不解 佐護加羅屬新羅 仁位加羅屬高句麗 계知加羅屬百濟是也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海陸諸倭 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然直割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桓檀古記 高句麗本紀」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전략. 뒤에 임나(任那)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였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後倂于任那 聯政以治 三國在海 七國在陸」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임나연정의 역할 중 백제와 일본열도 사이 해상통로 통제는 A.D 404년에 왜(구태백제)가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통제에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왜 통제는 A.D 404년에 일본열도로 피신한 구태백제 지배층이 왜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대화왜(大和倭)는 임나연정 시기에 임나왕(任那王)의 요구에 따라 임나(任那)에 신(臣) 또는 장군(將軍)들을 보내었고, 임나(任那)에 파견된 일본부(日本府) 장군들은 임나왕(任那王)의 지시를 받았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신라(新羅) 통제는 초기에는 성공하였으나 후에는 실패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미사흔(未斯欣)을 임나연정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각 인질로 보내고 임나연정과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卜好)를 고구려로부터 돌려받고, 같은 해 가을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몰래 빼내 온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2년(A.D 418년) 봄 정월 왕의 아우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내마(奈麻) 제상(提上)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倭國:註 대마도 임나연정)에서 도망해 왔다. 二年 春正月 王弟卜好自高句麗與堤上奈麻還來 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광개토왕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A.D 416년에 중국동해안지방의 전 백제분국 장군들이 도로 백제에 복귀함으로써 고구려가 중국동해안 지방을 상실한 것과 A.D 418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 등은 장수왕의 통치술에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끝
 

 

출처 : 신들의 황혼
글쓴이 : 은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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