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의 다시면 복암리 너른 들에는 흥미로운 고분이 늘어서 있다.
예전에는 칠조산(七造山)이라고 해서 고분이 7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3기는 1960~70년대 경지정리로 삭평되어 이제 4기만 남았다.
1995년 이른바 복암리 고분 가운데 3호분에 대한 복원계획이 수립되어 발굴이 시작됐다.
3호분은 어느 종가의 선산이었는데, 주변 경작으로 계속 봉분 유실되자 복원계획을 세운 것이다.
■도굴되지 않은 싱싱한 고분
그런데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만 하던 중 심상치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무덤 주위를 두른 주구(周溝·묘역을 구분하거나 배수, 혹은 신성불가침의 상징으로 만든
도랑 같은 유구가 계속 확인됐고, 고분과 고분 사이에서도 유물들이 쏟아진 것이다.
1996년 5월 어느날 발굴을 맡은 전남대 박물관은 이 3호분에서
도굴을 당하지 않은 싱싱한 석실분을 확인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나서 훗날 ‘96석실분’이라 명명된 이 무덤을
전남대박물관과 함께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굴단은 깜짝 놀랐다.
대형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보였다.
옹관은 남은 길이 98~180㎝ 정도였다.
옹관 안에는 6구의 인골이 확인되었고, 금은장삼엽환두도
(金銀裝三葉環頭刀·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모양의 둥근고리칼)와 각종 토기류, 철대도·철촉 등
철기, 행엽(杏葉·말띠드리개)·재갈·호등(壺등·발걸이의 일종) 등 마구(馬具)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덤방의 앞쪽 오른쪽(연도 동쪽) 옹관 밑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포착됐다.
진흙 속에 묻힌 유물이 노출됐다. 발굴을 맡은 윤근일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금동신발임을 직감했다”면서 “이미 전북 익산(입점리)에서도 비슷한 금동신발을
발굴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발굴단은 함석판을 이용해서 금동신발이 묻힌 진흙을 고스란히 떠서 석실에서 나온 뒤
곧바로 렌터카를 불러 직원편으로 서울로 보내 보존처리실로 바로 보냈다.
확인된 대형옹관을 꺼내는 것도 큰일이었다.
옹관의 경우 어떤 것은 하나의 옹관으로 된 단옹식(單甕式)이고, 어떤 것은
대옹과 소옹을 만들어 접합한 합구식(合口式)이었다.
합구식은 밖에서 작은 옹관과 큰 옹관을 따로 만들어 무덤에 들어간 뒤에 하나로 맞춰 놓은 것이다.
그랬으니 유물 수습 단계에서 키가 170㎝이 넘는 옹관(대옹 98.2㎝, 소옹 72.2㎝)들이
무덤길에 걸려 나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할 수 없이 석공들을 불러 무덤길(羨道)에 조성된 기둥을 깔아 길을 넓힌 후에야
옹관 4개를 무사히 빼낼 수 있었다.
96석실에서 발굴한 옹관 4기는 양념에 불과했다. 복
암리 3호분 전체에서 대형옹관이 28기나 쏟아졌다.
합구식 옹관 중에는 3m에 가까운 경우(15호 옹관·284m, 대옹 152㎝ 소옹 136㎝)가 있었고,
단옹인데도 2m에 가까운 것(11호 옹관·194㎝)도 있었다.
복암리 3호분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거대한 블랙박스였다.
3m에 가까운 대형옹관이 잇달아 출토되고(26기), 금동신발과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영산강 유역과 백제·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유물 뿐이 아니었다.
3호분 한 분구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들이 나왔다.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가 줄줄이 나왔다.
옹관 발생단계인 3세기 옹관묘에서부터 7세기 백제의 전형적인 석실분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것이다.
가히 고분아파트, 혹은 고분박물관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복암리 고분의 피장자들은 이 지역 토착세력의 수장급이었을 것이다.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40대 여성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14년 평야에 조성된 복암리 고분군을 감시하듯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무덤,
즉 정촌고분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나왔다.
그해(2014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 결과 너비 355㎝, 길이 483㎝, 높이 296㎝ 규모의
현실(널방·주검이 안치된 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확인됐다.
이것은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권에서 확인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따라서 해발 110m의 잠애산 남서쪽 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정촌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오히려 당대(5세기 3/4~6세기 1/4분기)의 복암리 3호분 주인공보다 지위가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촌고분의 굴식돌방무덤(1호 석실)에서 시차를 달리한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다.
1개체는 5세기 3/4분기(450~475년), 다른 1개체는 5세기 4/4~6세기 1/4분기(475~625년)에
안장된 목관의 주인공으로 각각 판단했다.
또 피장자 부근에서는 금동신발과 다량의 유리구슬, 옥류 등이 확인됐다.
이 무렵 마한 권역에서 발견되는 황금제품은 이 지역을 간접지배하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따라서 3차로 묻힌 피장자가 백제에게서 금동신발을 받을 정도로
이 지역 수장급 인물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인골 분석 결과 1차와 3차 목관의 주인공들인 두 인골이
모두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47살과 45살 정도였다.
측정가능한 1개체 인골의 신장은 146㎝ 정도(146.36±7.62㎝)로 추정됐다.
어쨌거나 5세기 후반~6세기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나주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보이는, 최고의 조망권을 갖춘 최고 신분의 고분에 묻힌 주인공 둘이 모두 여성이고,
특히 금동신발까지 껴묻이 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마한 800년설
이쯤해서 한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복암리 3호분이나 정촌고분의 피장자들은 이 지역을 다스렸던 지도자이고,
특히 정촌고분의 주인공 지위가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이 지역에 기반을 둔 학자 중 일부는 이들을 ‘마한의 지도자’라 규정한다.
즉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이 백제식 석실분이 도입되는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세력의 역사적 실체는 ‘마한’이라는 것이다.
기원후 500년대까지 영산강 유역은 백제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석실분들은 백제식이 아니라 북규슈(北九州)식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해석은 정교하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백제의 마한 합병은 3차례에 걸쳐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에 복속하지 않은 마한의 일부 세력이 일본(규슈)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5세기 4/4분기(475~500)~6세기 2/4분기(525~550)의 일본 규슈지역에서는
정치적인 파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아리아케해(有明海) 일대에 존재하던 지쿠시군(筑紫郡) 세력이 북규슈로 세력을 확대했다가,
오사카·나라·교토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大和) 왕권에 통합되는 격동기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백제의 핍박을 피해 망명했던 북규슈의 마한인들이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U턴했다는 얘기다.
영산강 유역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고분이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이 확인되는데,
이것이 바로 규슈로 망명한 마한인들이 귀향해서 남긴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전방후원분은 1회성, 즉 단 50년 가량 유지된 채 소멸된다.
백제의 남하→마한세력 일부 규슈 망명→영산강 유역에는 여전히 마한 존재→
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 발생→망명한 마한 세력들 본향으로 귀향이라는 순서다.
사뭇 그럴듯한 해석이다.
결국 영산강 유역은 6세기 전반까지 백제와는 ‘별도의 정치체’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5세기 말부터 유행한 왜계 횡혈식 석실분(전방후원분 등)은 백제의 남하에 망명한 일부 마한세력이
규슈지역의 정치적 격동기에 휘말려 다시 본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귀향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마한 800년설’
하지만 이런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전문가들이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의 요소가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핵심요소인 백제의 영향과, 주변변수인 가야와 신라의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복암리 3호분에서 보듯 옹관묘를 썼던 토착세력(마한계)은 왜계 구조를 지닌 석실분(5세기 후엽)을 쓰지만
다시 백제석실분(6세기 중엽)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형적인 일본식 묘제라는 전방후원분(장고분)에서도 백제의 요소가 분명히 보인다는 것이다.
또 5세기 무덤인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도 금동관과 환두대도, 목관 같은 백제의 요소가 보이고, 복
암리 3호분 출토품인 금동관과, 전방후원분인 함평 신덕고분에서 보인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흔적,
그리고 월계동 1호분 출토 은피관정(머리를 은판으로 감싼 관못) 등도 역시 백제계라는 것이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형태만 전방후원분일 뿐 이른바 위세품(세력을 과시하는 물건)은
백제나 가야의 것이고, 일반유물은 토착세력의 사용품들이라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복암리 3호분의 피장자들, 즉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여러 문화를 받아들인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것이다.
3호분 96석실분처럼 왜계의 석실분인데 그 안에는 마한의 옹관묘를 썼고,
후에 백제식 석실분으로 바뀌었는데도 그 안에는 옹관묘 전통인
다장(多葬·무덤에 시신을 여럿 안치하는 장례풍습)을 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일부 전문가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된 마한이 기원후 6세기 전반까지
백제와 상관없는 정치체를 유지하며 존재했다는 ‘800년 마한론’은 지역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지역고고학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믿지 않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6세기 전반이 아니라면 언제 백제에 흡수되었는가.
최근까지의 정설은 “마한은 BC 2세기 무렵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마한은 점차 흡수됐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통설은 두계 이병도(1896~1989)가 <일본서기>에 나온 반설화적 기록을 해석한 이후 구축됐다.
“(왜가) 침미다례(枕彌多禮·전남 지방의 마한 소국으로 해석)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다.
왕 초고(肖古·근초고왕)와 왕자 귀수(貴須·근수구왕)가 군사를 이끌고 맞으니….”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369년)
여기에 중국측 사료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 ‘동이전’ 등에 “277~290년까지
마한이 진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까지 더했다.
따라서 중국 사료들과 <일본서기>의 반설화적 내용을 차용,
‘백제의 마한 병합시기=근초고왕대인 369년’설이 정설로 등장했다.
즉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역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했고,
이후 백제는 직접통치보다는 간접통치라는 형식을 취해 영산강 유역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 또한 함정이 있다. 우
리측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기원후 8년 백제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
1년 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백제본기·온조왕조’)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이미 기원후 9년 멸망했다.
그런데도 역사학계는 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않았다.
역사학계 주류는 ‘<삼국사기>의 마한 멸망기록을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소급해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했다.
즉 <삼국사기> 기록은 54국 마한 연맹체의 우두머리격인 목지국(目支國)의 멸망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한의 잔존세력은 이후 백제의 핍박을 피해 점차 한반도 서남부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왜 이런 논리가 나왔을까.
모두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진서> 등의 기록을 믿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불신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기록보다 진수(233∼297)가 3세기 후반 쓴 <삼국지>를 더 믿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우리측 정사는 믿지않고 중국측이 교통도 좋지않은 (중국 입장에서)변방의 나라, 즉
한반도의 사정을 ‘카더라’ 통신으로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만 신뢰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였을까.
■한성백제 우물터에서 발견된 215점 제사토기
‘마한 800년설’ ‘369년 백제 근초고왕 병합설’ 에 이어 <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조’에 눈길을 주는 전문가들도 있다.
즉 “498년(백제 동성왕 20년)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자 중지했다”는 기록이다.
무진주는 지금의 광주, 즉 영산강 유역이다.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영산강 유역까지 내려갈 정도였다면 이곳은 이미
백제의 명실상부한 영역이었다는 소리다.
과문한 기자는 영산강 유역을 지배한 세력의 정체성을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다만 한성백제의 도읍인 풍납토성에서 5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우물터에서
무려 215점의 제사토기들이 묻혀있었던 것에서 단서를 찾고 싶다.
켜켜이 쌓인 완형의 토기들은 아가리 부분을 의도적으로 깬 형태였다.
제사를 위한 파괴의식이 분명했다. 그런데 게중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장군(액체를 담는 그릇)과 같은 토기들도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물이 조성된 5세기 초반이면 한성백제가 멸망하기 전이다.
그때 이미 백제는 전라도 지역까지 완전히 아우르고 있었으며,
백제 중앙이 지방세력을 서울로 불러모아 제사를 지낸 뒤 복속의례의 차원에서
지방산 토기들을 차곡차곡 매납한 증거가 아닐까.
■마한이 정말 강했다면…
객관적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영산강 유역에서 활약한 옛사람들의 실체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었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지방통치 아래 간접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한성백제가 망하자 일시적으로 파동이 일었지만(기원후 475년)
독립국을 이룰 힘이 없었는지(아니면 의지가 없었는지), 다시 백제의 직접통치 아래 놓인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영산강 유역에서는 국가단계의 지표인 궁궐과 성벽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한이 정말 강했다면 한성백제가 멸망했던 그 어수선한 시기에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독립을 선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세력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격으로 떠올랐다.
복암리 고분의 주인공과 정촌고분의 40대 여성 지도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백제가 웅진(475년)-사비(538년) 천도의 격동을 겪은 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자 더는 웅비하지 못했다.
이것이 한성백제 멸망기(475년)에 등장한 전방후원형 고분이 50년도 안돼 홀연히 사라진 이유일 수 있다.
마한이 54개국이 맺은 느슨한 연맹체였다는 것과, 마한이라는 명칭도 백제와 신라와 같이
스스로 정한 국가명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불러준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전문가도 있다.
물론 이 또한 추론일 뿐이다.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를 가늠하는 고고학 자료가 나오길 바란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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