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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수 억원 상당의 문화재 팔아 넘긴 가야 무덤 도굴꾼들

mistyblue 2026. 1. 10. 12:54

온갖 문화재 다 모았던 조선유물 '덕후' 日 오구라, 국보도 가져갔다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 ⑤ 오구라는 왜 조선의 유물에 관심을 가졌을까?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도쿄대학 졸업 후 선망받는 회사에 취직하며 밝은 미래를 보장받는 듯했지만,

아버지의 뇌물 수수 사건으로 인해 교도소 수감자가 되었다가 조선으로 건너와 전기사업에 성공하며

'조선의 전기왕'으로 거듭나는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갔다.

그는 전기사업을 중심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식민지 조선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유지로서 활동했다.

그러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920년대 초부터 신라와 가야의 고분 도굴품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고고유물, 불교조각, 금속공예, 목공예, 도자, 회화, 전적, 복식 등 그 종류도 다종다양했으며,

그 시기 또한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광범위했다.

현재 그가 수집한 한국 관계 유물들은 그의 사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으며,

그 수는 1,030점에 이른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에 해당하는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 도쿄국립박물관의 오구라 컬렉션 일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사업가·재력가로서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리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왜 조선의 유물들을 모으는 수집가가 된 것일까?
고고학이나 역사학, 미술사학과 같이 문화재들과 관련한 학문을 전공한 적이 없는 그가
조선의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구라 컬렉션'이라고 부를 만큼
수많은 조선의 유물들을 손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회고를 통해 그가 조선에서 수많은 유물들을 모은 동기 또는

이유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나는 사학이나 고고학에 대해서는 일개의 문외한에 지나지 않으나,

다만 다년간에 걸쳐 취미와 기호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수집하였다···

일본의 고대사 중에는 조선의 발굴품이나 고미술품에 의거해서 비로소

분명하게 되는 부분이 의외로 많은 사실에 놀랐다.

나는 이 점에서, 반드시 고미술품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고기(古器)와 고물(古物)을 가능한 한 계통에 따라

정비·보존하는 것은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데 뿐만 아니라 극동의 퉁그스족 문화의 연구에도

공헌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여 수십년에 걸쳐서 그 수집에 힘을 기울여 왔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자신이 사학이나 고고학을 모르지만,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데

조선의 유물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조선의 여러 유물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다른 회고에서도 '조선 문화의 옛것들이 일본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고고학 등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수집했다'와 같은 취지로

조선의 유물을 수집한 이유를 밝혔다.

이와 같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본의 고대사나 일본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조선의 유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유물들을 수집했을까?

 

오구라가 수집한 유물은 무엇이 있었을까?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에서 수집해서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들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고고자료 580점, 조각 49점, 금속공예 130점, 도자기 152점, 칠공예 44점, 서적 36점, 회화 94점, 염직 25점

총 1,110점으로 '오구라 컬렉션'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패전하자 그도 귀국하게 되는데, 그동안 수집·보관해 온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는 1958년에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하고, 1964년에는 『오구라 컬렉션 목록』을 만들어 유물들을 관리했다.

1964년에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오구라 야스유키(小倉安之)가 오구라 컬렉션을 관리하다가

1981년에 이를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오구라 컬렉션 중 중국, 일본, 그 외 출토 유물 80점을 제외한 1,030점이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그 유물의 시대부터 그 종류까지 다양하며,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에 해당하는 중요문화재와 중요미술품도

각각 8점과 31점이나 포함하고 있다.

 

석창(石槍, 돌로 만든 창), 타제석촉(打製石鏃, 돌을 깨트려 만든 화살촉)과 같은 신석기 시대 유물부터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조선 시대 유물까지 광범위한 시대에 걸친 유물들이 골고루 있으며,

그중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금동관모(金銅透彫冠帽), 금동신발(金銅透彫飾履)과 같은

중요문화재와 견갑형동기(肩甲刑銅器), 환두대도(環頭大刀), 금동원통형사리합(金銅圓筒形舍利盒)과 같은

중요미술품도 포함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본으로 반출한 유물들 중 중요한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경상북도 고령 출토 금관

가야 최대의 고분군인 경상북도 고령군의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5세기 말에 제작된 대가야의 금관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3.2㎝, 직경 17.1㎝의 크기로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금관은 대가야의 최고위급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발굴되지 않고 도굴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가 없다.

도굴 이후 시중에서 매매되다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 고령 출토 금제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보통 금관이라고 하면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신라의 금관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이마에 두르는 테두리인 대륜(大輪) 위에 날 출(出)자의 나뭇가지 모양으로
장식을 한 출자형입식(出子形立飾)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가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금관은 대륜 위에 꽃과 풀 같은 모양으로 장식을 한

초화형입식(草花形立飾)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이 금관은 가야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금관과 비슷한 모양을 한 금관은 삼성미술관 리움과 국립광주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으며

고령 출토 금관과 나주 출토 금관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출토된 사례가 많지 않다.

 

경상남도 창녕 출토 유물

금동관모(金銅透彫冠帽)는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유물로

구리에 금을 도금하거나 금박을 입힌 금동(金銅)을 재료로 하여 이를 파내면서 장식을 만드는

투조(透彫) 기법을 사용한 관모(冠帽)이다.

고깔 모양의 머리에 쓰는 모(帽)에는 양쪽에 두 개의 날개 모양 장식이,

윗부분에는 깃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으며, 크기는 높이 41.8㎝, 폭 21.2㎝이다.

5~6세기 즈음 신라 또는 가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주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독특한 모양을 한 금동관모가 출토된 사례가 없다.

창녕군 지역의 고분군들은 대부분 도굴당했는데, 그중 일부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사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 경상남도 창녕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굵은고리귀걸이, 팔찌, 팔가리개,
환두대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금동관모는 새날개모양관식(金銅鳥翼形冠飾, 길이 38.9㎝/폭 22㎝), 금동신발(金銅透彫飾履, 길이 28.3㎝),
굵은고리귀걸이(金製太環耳飾, 길이 7.2㎝/직경 3㎝), 팔찌(金製釧, 직경 7.5㎝),
팔가리개(金銅臂甲, 길이 37.7㎝/폭 16.8㎝), 환두대도(單龍文環頭大刀, 길이 26.8㎝)와 함께
창녕 출토 일괄 유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유물은 모두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부산 연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부산 연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로 철로 만든 투구(遮陽冑), 갑옷(鐵製短甲),

관모형복발(冠帽形覆鉢), 원두대도(圓頭大刀) 4점이 여기에 속한다.

1931년 5월~6월 사이에 도굴되어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투구는 야구모자와 같이 앞쪽에 챙이 달린 모양으로 높이 20㎝, 직경 31㎝의 크기이다.

5세기 즈음 한반도 남부와 왜에서 유행하던 방식으로 일본에서는 다수 출토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출토되는 일이 드문 유물이다.

원두대도는 명칭 그대로 칼의 손잡이 끝부분이 둥그렇게 되어 있으며,

금은으로 장식하고 있고 길이는 93.3㎝이다.

오구라 컬렉션에는 금은으로 장식한 대도(大刀)가 다수 존재하는데,

이 원두대도와 같이 그 상태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흔치 않다.

 

▲ 부산 연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 투구, 관모형복발, 원두대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및 오구라 타케노스케의 한국 문화유산 약탈과 반출

현재 '전(傳) 경상남도 동래군 연산리'로 표기되어 있는데,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기 전에
오구라 컬렉션 목록에는 이러한 표기가 없었다.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여 '동래군 연산리 출토로 전해진다'는 의미를 드러내면서
도굴된 유물이라는 점을 애써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유물들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불법적으로 유물들을 수집했다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례이며,
한일 양국의 고고학 연구 자료로 학술적 가치도 큰 유물이다.
특히 투구와 갑옷은 삼국시대 당시 투구와 갑옷이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중요한 유물이다.
 

석조 유물

경북대학교박물관의 야외전시장인 월파원(月坡園)에는 석불, 석탑, 석등, 문관석 등

여러 석조 유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중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자신의 대저택 마당에 장식품처럼 놔두던 석조 유물들도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해야 했던 그는 이 석조 유물들이 너무 무거워 일본으로 반출하지 못했고,

결국 1956년 1월, 1958년 12월, 1960년 4월 세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로 옮겨진 경위가 있다.

▲ 석조비로자나좌상(보물 제335호, 왼쪽)과 석조승탑(오른쪽 상단: 보물 제135호, 오른쪽 하단: 보물 제258호)
ⓒ국가유산포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수집한 석조 유물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다.
보물 제335호 석조비로자나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과
보물 제135호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大邱山格洞蓮花雲龍裝飾僧塔),
보물 제258호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大邱山格洞獅子奏樂裝飾僧塔)이 그것이다.
 
석조비로자나좌상은 높이가 275㎝이며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승탑 2점은 모두 높이 280㎝이고,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승탑이 세워져 있었던 원래 위치와 승탑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이와 같이 보물에 해당하는 가치가 큰 석불과 석조승탑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석조 유물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력과 이를 눈감아 주는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조선의 유물들을 수집한 동기는 일본의 고대사와 일본 문화를 연구하는 데

조선의 유물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경상북도 고령 출토 금제관, 경상남도 창녕 출토 유물, 부산 연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경주 금관총 유물, 석탑과 같은 다양한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유물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에 해당할 만큼 중요한 유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불법적으로 자행된 도굴품들이었다.

다음주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불법적으로 도굴된 유물들을 수집했다는 정황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일화를 살펴보자.

 

■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2006.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편, <오구라 컬렉션-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박천수, <오구라 타케노스케의 한국 문화유산 약탈과 반출>, 경상북도·(사)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24.
정규홍 편저,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경상북도·(사)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18.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문화재 일본소장 ②>, 1995.

 

오구라컬렉션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단에서 펴낸 일제시대 반출된 우리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다.

국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 중 약 43%인 6만 8천점이 일본에 있다.

이는 공식적으로 박물관, 미술관등 공공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숫자로 개인소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문화재의 출처와 반출경로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문화재는 선물 또는 수집의 합법적인 형태도 있을 수도 있으나

약탈이나 도굴등의 불법적인 방식으로 일본에 반출된 것이 대다수 인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문화재의 도굴및 일본의 공권력에 의한 부당반출이 빈번하여

현재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에 대한 표면적 현황은 대략적이나마 파악되었지만

그 출처 및 반출경위등 구체적인 사항을 명확하게 밝히는 조사는 아직도 지난한 과제로 남아있다.

2012년 7월 설립된 국외소재문화재단은 이러한 배경속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오구라컬렉션에 주목하고

1904년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한 한국문화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다.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한국문화재의 1/3은 오쿠라 컬렉션으로 모두 역사적 문화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이중 많은 유물이 일본의 국가유물로 지정됐을 정도다.

이 책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오구라다케노스케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고 및 문화재반출과

오구라컬렉션의 배경등에 대한 설명을, 2부에서는 오구라컬렉션의 유물을 고고유물, 불교유물, 공예,

복식, 회화등 장르별로 도록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306-352페이까지는 연번에 따라 905가지 유물의 리스트가 기록되어 있다.

해외여행을 가면 꼭 방문해 보는 곳이 박물관과 미술관이다.

일본의 교토박물관을 향해 걸어갈 때 그 중간쯤 있었던 귀무덤,

임진왜란당시 수급 대신 코와 귀를 잘라 갔고 그것을 모아 무덤을 만들고,

그곳을 지나 교토의 박물관을 갔을때, 항상 같이 전시되어 있던 한국의 문화재는

뿌듯함보다는 뭔가 슬프다는 느낌이 항상 앞섰다.

일본의 이런 문화재가 있는데, 한국의 것은 보조적인 그 무엇이다 라는 식의 교보재느낌으로 치부하는 것 같아서.

고대의 문화는 일본 자체적이거나 중국을 통해서 받았다.

뭐 대충 이런 자기만족식의 전시같은 느낌이랄까.

가끔 일본친구들과 역사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대 중세 등의 자국역사를 잘 모르는 분위기였다.

그 만큼 숨기고 싶거나 내세울게 많지 않은 부분에서 였을 것이다.

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강한 제국주의의 국뽕도 2차세계대전 그들이 원자폭탄을 맞기 전까지였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듯이, 한번 쯤 이런내용을 가볍게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해서

주말연휴에 읽었던 책중의 하나였다.


문화재를 사는자와 파는자

침략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속에는 단순한 인명의 살상이나 영토의 확대 축소의 문제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 이어져온 역사적 유물의 유실과 파괴등 전통과 가치 정신등의 훼손등이 잔인하리만큼

파괴되는 결과 또한 따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가 파악하기 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2012년 설립된 국외소재문화재단은 이러한 해외에 흩어진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재파악과

이에 대한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1981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오구라컬렉션은 1030건에 이를 정도로 많고

광복후 한국을 떠나기전 남겼던 문화재와 일본에서 되팔았던 문화재까지 모두 합하면

오구라가 수집했던 문화재는 이것의 두 세배에 이를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반도의 청동기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한국 역사를 망라한 문화재가

공예 회화 복식등 다양하게 걸쳐있으며, 이중 31건의 문화재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입장에서 외국의 문화재가 자국의 중요미술품 또는 국보로 지정된다는것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것이다.

오구라컬렉션은 한일회담 당시 반환을 요구했던 것이기에 한일협정 체결 직전인 1964년 6월

오구라의 집에서 문화재 100여점이 발견된것을 계기로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일본정부에서는 반환을 거부했다.

1960년 제 5차 한일회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오구라 소장품을 보물로 지정하거나

유출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일본으로 반출한 뒤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한 것에 대한 문제가 언급되기도 했다.

 
 
 
 
 
 

현재 사실상 한일역사학자의 공통적 의견으로 파기된 '임나일본부설',

일본이 과거 한반도에 식민지를 건설 운영하였다는 이론인데,

4세기 후반 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6세기 중반까지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 사료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고적조사사업이 동원되었고

일본부가 최초로 자리 잡았다고 추정한 김해와 함안지역을 비롯하여, 창녕, 고령, 성주, 선산 등지의

많은 고분이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물증'을 찾기 위해 마구잡이로 조사되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발굴 조사였으나 그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그들의 주자에 따르면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 물질문화에

일본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대와는 달리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야지역 발굴에 참여한 구로이타는

'막상 일본부라고 전하여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내가 조사한 결과 함안. 김해는 모두 일본우 소재지라고 추정할 만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다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강변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오구라 뿐만 아니라 여럿 일본 한국문화재 수집상에 대한 설명을 더하고 있다.

곤도사고로, 아마이케 시케타로, 도미타 기사쿠등이다.

곤도는 1897년 서울로 온 이후 고려청자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박고당이라는 골도품상을 운영하며

도쿄나 오사카에 분점을 열고 수집하고 거래하였다.

아마이케는 주로 도굴품들을 거래했으며, 그 수또한 700여점이상으로 상당하였다.

1925년 아마이케는 도쿄제실박물관에 다완과 나전상자등을 기증하고 헌납된 유물을 기록한 [열품록]에는

아마이케의 기증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1904년 이주한 도미타는 개항장인 진남포에 거주하며 여러사업을 운영했다.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삼화도자기를 설립하고 제조한 청자 및 한국 특산물의 판매 등을 위해

남대문에 도미타상회를 열었다.

도미타 상회는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을 소장했다.

도미타상회가 일본으로 반출한 이 화첩은 1930년 간송 전형필이 일본 오사카에까지 찾아가 어렵게 되찾아왔고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잇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누구인가?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870년 8월 12일 오구라 요시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구라의 집안은 본디 농가였으나, 요시노리는 도장을 운여하며 검술과 한학을 다케노스케에게 가르쳤다.

6살에 인근 마을이 오무로 소학교에 입학, 고등과를 12살에 졸업한 다케노스케는 그로부터 2년 뒤

아버지가 세운 호쿠소에이칸 의숙에 입학하여 한학과 영어를 배웠다.

이즈음은 제국대학령이 공포되며 교육제도가 완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농업에 기반을 둔 가업을 물려받기보다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다케노스케는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대학졸업후 법학사를 따고 닛폰우선주식회사에 입사하고 근무하던중

그의 부친 요시노라가 표면상 사장직을 맡았던 도쿄위생회사의 뇌물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그 이후 그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 되는데,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자리를 약속받아 한국행을 결정한다.

그에게 한국행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업무에 매진하기보다는 한국의 현지 시찰과 사업대상을 물색하는 일에 주력한다.

수완을 발휘해 자금을 모으고 최초로 정착했던 대구 인근의 토지를 사들이며

사업 기반을 차근차근 닦아나간다. .

여러번의 시행착오끝에 전기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게되고 1920년경부터 고미술품수집을 시작하게 된다.

전기사업을 통해 번 돈과 전국에 그의 출장소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활동이 더욱 용이하게 된다.

오구라는 경주고적본존회의 평의원 23명중 한 명이었다.

1922년 경주고적보존회 사업보고 문건 중 보존회 역원명부에서 오구라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한국의 전기 공급과 통제 정책을 진행할 때 오구라가 경영했던 대흥전기는

합병 전기사 중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했고, 오구라는 1937년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이시기 오구라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중요미술품으로 신청하였고 20여 건이 지정되었다.

대구 집에 있는 석조 부도는 조선총독부의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보존령]1조에 의해

1936년과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보존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오구라는 서울에 가면 인사동에서 눈에 띄는 문화재를 구매하곤 했다.

또한 그의 소장품중에는 도굴로 의심되는 유물들이 있었는데,

그가 도굴을 주도했다거나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당시 도굴 분위기를 보면 오구라가 관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1923년 대구부의 달서면 당내동에서 갑옷과 검을 비롯한 신라 고고유물이 발굴되었고,

이후 철도와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계속해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925년 4얼 5일자 [경성일보]에는 신라고분 도굴 사건에 대한 당국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기사가 실렸다.

오구라는 고분 출토품을 비롯하여 불교문화재, 도자기, 목칠고예품, 금속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한국문화재를 수집하였다.

수집한 문화재들은 주로 거점으로 삼고 있던 대구의 자택과 서울 장충동의 별채에 보관했으며,

일본 도쿄로도 조금씩 옮겨 놓고 전시 등을 통해 공개하였다.

대구와 서울에 있는 그의 집에는 골동상인과 도굴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938년에는 오구라의 창고에 도둑이 들어 금불상등 10점을 훔쳐갔는데 그 값이 대략 3천여원어치였다고 한다.

1945년 일본 패전이후 그는 그가 수집한 문화재들을 개인의 재산에서 재단법인의 자산으로 바꾸어놓는다.

오구라컬렉션보존회의 이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도 문화재 수집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오구라는

1964년 95세로 사망한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오구라컬렉션 중 불교 관련 유물은 93건으로 전체 유물 가운데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중 불교 조각이 49건, 불교회화가 3건 불교 공예가 31건 그 외 전적류등이 10건이다.

오구라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왓고 고향에서는 후원활동도 꽤 많이 한것으로 알려졌다.

불교 조각은 49건중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들이 많다.

특히 영남지역 출토품들이 많은 편이다.

[금동반가사유상]은 높이 16.3센티의 작은 불상이지만, 오구라컬렉션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크기가 작은 반가사유상은 사실적인 표현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크기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균형감이 뛰어나며 치밀하고 사실적 표현이 뛰어나다.

오구라컬렉션에서 도자기는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고유물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고려시대 무덤에서 파낸 청자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던 백자까지 수집자의 취향을 반영한

다양한 컬렉션이 모였다가 또 흩어졌다.

회화는 총 66건인데, 회화컬렉션은 오구라가 수집한 고고유물이나 도자기등 다른 분야와 비교할 때,

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그림들이 오구라가 수집한 회화의 전부는 아니다.

오구라는 석물과 함께 그림병품 등 부피가 큰 회화를 대구박물관에 기증하거나 집에 남겨두었다.

회화컬렉션은 조선 전 시기를 아우르는 산수화와 영모화, 화조화, 인물화, 풍속화등

다양한 화목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전기 작품으로 강희안(1417-1654)[산수도], 강희안의 동생인 강희맹[독조도],

신윤복과 김홍도의 작품등이 있었다.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전 경남 출토 금관’. 신라의 전형적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의 특성인 ‘초화(草花)’ 형

금관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장관님, 오쿠라(大倉)가 아니라 오구라(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생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전혀 문제될 게 없는 발언 같다.

하지만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은

“아마도 문화부 장관이 오구라를 오쿠라로 잘못 언급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문화부는

“장관 발언을 보도자료로 옮길 때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장관이 잘못 발언했든 아니든 헷갈리기 십상이다.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오’라고 해서 ‘대창(大倉)’을 ‘오오쿠라’로 읽었지만

지금은 표기법이 바뀌어 그냥 ‘오쿠라’라 한다.

그래서 원래 ‘오구라’로 읽는 ‘소창(小倉)’과 헷갈리게 됐다.

오구라 유물 중 또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큰 창고’와 ‘작은 창고’

그러나 솔직히 말해 ‘대창’이든 ‘소창’이든, ‘오쿠라’든 ‘오구라’든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귀중한 한국문화재를 가져간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이다.

그러고보면 오쿠라의 ‘대창(大倉)’은 큰 창고, 오구라의 ‘소창(小倉)’은 작은 창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큰 창고’인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의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인가.

딴은 그렇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청·일 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된 인물이다.

구한말 부산에 진출,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한 오쿠라는 엄청난 양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대창(大倉)’ 오쿠라 기하치로(왼쪽 사진)이 가져간 이천 석탑(가운데)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 팔각탑(오른쪽).

 

특히 일제가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답시고 철거한 경복궁 자선당(세자의 침전) 건물을 통째로 뜯어갔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 때 경기 이천 향교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온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도 가져갔다.

오쿠라는 그렇게 반출한 자선당 건물과 석탑, 유물 등으로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1917년 개관)을 꾸몄다.

오쿠라슈코칸의 조선실에 진열된 미술품이 3692점이나 됐고 서적도 1만5600여권에 이르렀다.

 

하지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자선당을 비롯한 슈코칸의 진열관이 모두 소실되었다.

오쿠라가 모았던 고려자기 등이 모두 불에 탔고, 석조물(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팔각석탑)만이 남았다.

1996년 겨우 살아남은 자선당의 유구만이 반환되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쓸어간 남의 나라 문화재를 화재로 잃어버린 오쿠라의 죄상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찾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게 만들어버린 죄를 어지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쿠라슈코칸에 옮겨진 경복궁 자선당 건물(위 사진).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불에 타서 유구만 남아있다가(아래 사진)

김정동 목원대교수가 찾아냈으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반환됐다.

 

■‘작은 창고’의 묻지마 싹쓸이 수집

그렇다면 ‘작은 창고’(小倉)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어떤가.

그 역시도 어마어마한 수의 한국문화재를 쓸어간, 악명이 높은 자이다.

오구라는 일본에서 아버지의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한 뒤 ‘한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행’을 택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불량도항자들이었다. 일본에서 발붙일 곳이 없던 자들이 한국행 배를 탄 것이다.

 

오구라는 부동산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유명인사로 행세했다. 수재의연금을 내고 영남지역의 명망가로 평가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5만엔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했고, 닥치는대로 수집한 한국문화재를 특별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건너온 오구라는 막 개발붐이 일어난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다.

사업수완을 발휘한 오구라는 곧 전국의 전기사업을 통합 경영하면서 재력가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떼돈을 모은 오구라가 눈길을 돌린 분야는 바로 문화재 수집이었다.

오구라는

“일본 고대사 중에 조선의 발굴 및 고미술품에 의해 비로소 분명하게 밝혀지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문화재 수집 동기를 밝혔다.

‘전 울산’ 금동관(왼쪽 사진)과 ‘전 경주’ 금동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실제로 오구라가 한국문화재 수집을 위해 2000만엔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당대의 수장가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투자한 돈의 10배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있다.

아무리 일본인이지만 꼬박꼬박 제 돈 주고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가.

그것을 팔아넘긴 한국인들의 잘못이 더 큰 게 아닐까.

그러나 오구라의 행적을 추적하면 절대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오구라 유물 가운데 ‘전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수식’이 눈에 띈다. 금관총 발굴 당시 도굴품을 오구라가 구입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우선 오구라는 특정분야 문화재를 집중 구입한 수집가들과 달랐다.

장르불문, 출처불문으로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묻지마 싹쓸이’ 수집이었다.

불교문화재와 도자기, 목칠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까지….

그렇게 모은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이

이른바 ‘오구라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다.

전 창녕 출토 금동제품들. 1920~30년대 창녕 고분에서 무자비한 도굴이 자행되었고, 그중 상당수가 오구라 등에게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거액으로 도굴품 마구 사들인 죄

물론 오구라가 도굴을 주도했거나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오구라는 도굴범들의 장물을 너무도 후한 값을 치르고 긁어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오구라는 경산의 한 농부가 들고온 ‘청자 죽작문주전자’(대나무와 참새 그린 주전자)를

5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20칸짜리 기와집 가격이 4000원 정도였다니 농부가 받은 돈은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원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농부가 고향에 가서 떠벌리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에 체포됐다가

오구라와의 대질 끝에 풀려났다는 일화가 회자됐다.

오구라 유물 중에는 고종과,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쓰고 입었던 익선관(위 사진)과

당의(아래 사진)가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니 모든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이 오구라 집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고령의 가야 고분 300여 기를 파헤친 악명높은 도굴꾼은 장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건넸다고 한다.

이때 개당 2원씩 샀다는 ‘굽은옥’(곡옥)의 양은 두 되가 넘었다.

‘후하게 쳐줘서 고맙다’는 인사치레에 오구라는 “물건만 많이 가져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개성경찰서장을 지낸 나가타(永田) 경시(총경급)는 개성 근무 당시 장물로 압수한 고려청자 5점을

자기 개인 소유로 둔갑시킨 뒤 이를 오구라에게 팔았다.

니가타는 10만원을 부른 평양 골동품상의 제의를 거절하고 ‘부르는 대로 다 준’ 오구라에게 넘겼다고 한다.

경주 계림보통학고 교장인 지바 젠노스케(千葉善之助)라는 자의 일화도 기막히다.

지바는 일요일마다 건장한 학생 몇몇을 불러 모은 뒤 미리 보아둔 신라 고분을 대놓고 도굴했다.

지바는 이 도굴품을 교장 관사에 옮겨두고 경주경찰서장과 오구라에게 연락하여

“유물 좀 보러 오라”고 했다.

그러면 오구라는 한밤중에 술을 사들고 찾아왔고, 마음대로 값을 계산한 뒤 경찰서장과 지바 교장에게

얼마씩 나눠주고는 유물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교장이라는 작자가 학생들을 도굴에 동원했으니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오구라 같은 자가 이렇듯 광적으로 한국 문화재를 싹쓸이했으니 엄청난 수의 유적이 파괴되고

유물이 도굴되는 악순환이 초래됐던 것이다.

1929년 10월29일 동아일보. 왕실유물이 유실되고 있다는 기사이다. 고종이 썼던 익선관 등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

오구라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라진 금관총 유물 어디갔나 했더니

그런 탓에 절대 다수의 ‘오구라 유물’ 명칭에는 ‘전(傳)’자가 붙어있다.

출토지가 어디인줄 모르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어디 어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傳)하는 유물’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전(傳)’자가 붙는 유물의 결정적인 흠은 ‘출처, 즉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물의 출토지와 출토상황 등을 모르는 유물로는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그러니 ‘근본을 모르는 유물’은 문화유산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가 오구라 유물 중 ‘전(傳) 금관총 유물 일괄’이다.

 

금관총은 1921년 9월 주막집 확장공사 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고분이다.

여기서 사상처음으로 신라금관을 비롯,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등

온갖 황금제품들이 출토됐다.

그러나 유적조사 전문가들이 신고한지 3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경험이 없는 경주 지역 조사원들이 불과 4일 만에 발굴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 혼란의 와중에 상당수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구라 유물’ 중에 있는 ‘전 금관총 출토유물’은 ‘금제수식’과 ‘금제흉식금구’, ‘금제도장구’,

‘곡옥’(굽은옥), ‘청령옥’(유리구슬옥) 등이다.

‘금제수식’은 금관테의 둘레나 귀고리에 붙인 중간장식이다.

‘금제흉식금구’는 장식에서 몇가닥으로 늘어진 구슬을 고정하려고 일정간격으로 끼운 부속구이다.

‘금제도장구’는 칼의 손잡이나 몸통에 돌려감은 얇은 금판이다.

모두 완성품의 부품들인데, 금관총 발굴 때 누군가 슬쩍 훔쳤다가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장물이었을 것이다.

‘전 동래 연산동’ 유물. 투구(왼쪽)와 갑옷(왼쪽 밑), 원두대도(오른쪽 사진)가 눈에 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왜 유물 앞에 ‘전(傳)’자가 붙었나 했더니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금관(전 경남)과 금동관 2점(전 경주 및 전 울산), 금동관모(전 창령) 등도

모조리 ‘傳’자가 들어가 있다.

도굴품이라는 얘기다.

이중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 양식인 ‘초화형(草花形)’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고령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관(국보 제138호)과 비슷하다”면서

“국내에 온다면 국보의 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통일신라시대 피리. 오구라 유물의특징은 장르불문, 출처불문인 것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

 

또한 ‘전 창녕 금동관모’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경남 창녕 또한 오구라의 집중 표적이 된 듯하다.

일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다수의 창령고분군이 도굴로 거의 내용물을 잃었는데

그 부장품들은 대구 오구라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등의 소장품이 됐다”

(우메하라의 <조선고대묘제>, 1972년)고 밝혔다.

 

‘창녕’이라면 최근 도굴분 밑에 가려있다가 온전한 모습으로 확인된 무덤(63호분)에서 금동관 등

금제유물이 쏟아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을 가리킨다.

오구라 유물 중 ‘전 창녕’ 출토품은 ‘금동관모’ 외에도 ‘금동제조익형관식’(새날개모양관장식) 등이 있다.

둘 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도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에는 무자비한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다.

도굴을 조장한 오구라 등이 고분군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장물들을 수중에 넣었다는 얘기다.

‘전 동래 연산리 출토 유물’과 ‘경주 입실리 출토품’도 1920~30년대 마구잡이 도굴로 흩어진 뒤

오구라의 품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밖에 ‘전 경주 출토품’으로 표기된 ‘견갑형 동기’는 현재까지 오구라 유물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청동기에는 두마리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한마리는 등에 화살이 꽂혀있다.

7세기 백제시대 작품으로 여겨지는 금동일광삼존불상. 본존은 좌상으로 8엽의 연화문이 장식된 원형광배를 갖추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고종이 썼던 익선관은 왜?

오구라의 유물 가운데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몇 점이 보인다.

익선관과 당의, 치마 등 조선왕실 최고위층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다.

실제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된 오구라 유물 목록에는

‘익선관(임금의 곤룡포에 쓰는 관모)=이태왕소용품’이고,

‘당의, 치마, 속곳 등=이왕비 소용품’이라는 기록이 나란히 발견됐다.

‘이태왕’은 고종(재위 1863~1907)을,

‘이왕비’는 순종(재위 1907~1910)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런 왕실유물들이 대체 언제 오구라의 수중에 넘어갔을까.

동아일보 1924년 10월19일 기사에서 실마리가 잡힌다.

“덕수궁에 보존된 왕실유물이 땅으로 새었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사라져서 재작년에 남은 물건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재고품 목록을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점차 없어졌다.”

 

나라 잃은 지도자의 유품마저 유물 사냥꾼의 손아귀 안에 잡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오구라 유물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 공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

금동일광삼존불상과 금동약사여래입상 등 93건의 불교문화재가 있다.

또 각종 고려자기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은 물론이고 소반과 주칠장까지 다방면의 문화유물을 긁어 모았다.

회화에도 손을 뻗쳐 겸재 정선과 심사정, 최북, 김득신, 강세황, 이인문, 김홍도, 변상벽,

장승업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물들도 소장했다.

‘괴물 불가사리’가 따로 없을 정도다.

수레모양 토기와 네 발 달린 항아리.|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해방되자 자기 집 마루밑에 숨기고간 유물

오구라는 해방 되기 10여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긁어모은 유물을 야금야금 일본으로 옮긴다.

그중 고운무늬청동거울(정문경)과 고려청자 등이 일찌감치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아마도 도굴품 거래의 증거가 되는 유물을 일본으로 옮겨 혐의를 피하려 했을 것이다.

기막힌 일이 또 있었다.

8·15 해방 직후 오구라는 트럭 한 대를 국립부여박물관까지 몰고와서

“소장 문화재를 나에게 팔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단다.

그러자 박물관의 일본인 관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아니 부여박물관 물건은 나라의 재산인데 어찌 당신한테 팔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단다.

그러자 오구라가 했다는 말이 기막히다.

“지금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구라는 마지막까지 한국문화재를 쓸어모으려고 발악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오구라의 유물들은 ‘적산문화재’으로 한국측에 귀속될 처지였다.

오구라는 눈물을 머금고 700~800점을 대구부(시)에 기증했다.

그러나 오구라는 다 주지 않았다.

트럭 7대분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그러고도 상당수 문화재를 700평에 달하는 대구의 저택 마루 밑과 천장에 숨겨두었다.

 

200여점의 유물은 과수원을 갖고 있던 심복(최창섭)에게 맡겨놓았다.

오구라는 최창섭에게 “10년 후에 다시 올테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쫓겨가던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자기 재산을 땅 밑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이 또한 기막힌 일이다.

1964년 5월27일 옛 오구라 저택의 밑바닥에 숨겨놓았던 유물 142점이 전기공사 도중 발각됐다.

이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인계됐다.

그런데 오구라는 “142점이 아니라 500여점을 마루 밑에 묻어놨다”느니,

“소장품 중 8할을 대구에 두고왔으니 행방이라도 알고 싶다”느니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오구라 유물 중 가장 독특한 유물로 평가되는 견갑형 동기.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한 부분처럼 생겼다고 해서

‘견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결국 돌아오지 못한 오구라 유물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은 어찌 됐을까.

오구라가 일본으로 돌아올 때의 나이는 76살이었다.

모든 생활의 기반이 한국에 있었던데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오구라는 결국 수집한 문화재를 야금야금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다.

오구라는 1964년 당시로서는 천수를 다한 9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구라 유물 중 남은 1030건의 한국문화재가 1981년 국립도교박물관에 기증된다.

 

오구라 유물은 1965년 한일회담 당시 한국측이 반드시 가져와야 할 ‘반환목록’에 올랐다.

1958년 4차회담에서 한국측은 “오구라 컬렉션이 개인소장품이라지만 대부분이 도굴품이고

일본의 국보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 많다”면서 “가치나 중요도로 비춰볼 때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정부는 1960년 제5차 한일회담에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오구라 소장품을

보물로 지정하거나 유출 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총독부가 오구라의 유물 반출을 방관 혹은 허락한 뒤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게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오구라 컬렉션은 어디까지나 개인소장품(사유재산)”이라면서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끝내 1965년 한·일 양국이 합의한 반환문화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1964년 6월17일자 조선일보. 오구라가 살던 대구의 저택 마루 밑바닥에서 유물 142점이 발견됐다는 기사다.

오구라는 조만간 다시 돌아온다는 일념아래 40여 년 간 긁어모은 문화재들을 여기저기에 숨기고 귀국했다.

 

지금 국립도쿄박물관이 갖고있는 오구라 유물은 1030점에 이른다.

이중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무려 39건이다.

그중 절대 다수가 출처, 근본을 잃어버린채 남의 나라 박물관 진열장이나 수장고에 놓여있는 처량한 신세이다.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반환을 요구해야 할 ‘한국 문화재’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한국내에서 ‘오구라컬렉션’이라는 표현을 쓰는게 어떤지 모르겠다.

한반도를 도굴천지로 전락시키면서까지 한국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쓸어간 자의 유물을

‘오구라 컬렉션’으로 세탁해주는 셈이 아닐까.

‘오구라 도굴품’ 혹은 ‘오구라 도굴조장품’ 쯤으로 일컬어야 하지 않을까.

또하나 일본정부는 ‘개인소장품’이어서 반환이 난색을 표했단다.

그렇다면 1981년 이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면 이제는 ‘개인소장품’이 아니다.

정부차원이라면 얼마든 반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 아닌가.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 ⑥ 가야 고분 도굴품을 사들인 오구라 다케노스케

가야 고분 도굴품 곡옥(曲玉)을 사들인 오구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수집한 유물들 가운데 도굴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상당하다.

그 예로 가야 고분에서 도굴된 곡옥(曲玉)을 들 수가 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이와 관련한 이야깃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고령 일대의 가야 고분을 도굴한 김영조라는 도굴꾼이 있었다.

그는 김준철, 구금도라는 자와 함께 무려 300여 기의 가야 고분을 도굴했고,

그 유물들을 모두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겼다고 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 국가유산포털

그 가운데 곡옥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나는 토기를 많이 만져 본 사람인데, 내가 갖고 있던 것은 전부 대구에 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지금은 한 개도 없습니다.

오구라에게 토기뿐만 아니라 매장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가서 팔았는데,

비취곡옥(翡翠曲玉)만 해도 아마 두 되 이상은 될 것입니다. 일정(日政) 때 얘기지만,

우리가 '굼벵이'라고 불렀던 비취곡옥을 그때 돈으로 오구라는 한 개에 2엔씩 쳐 줍디다.

 

곡옥은 '굽은 옥', '곱은 옥'이라고도 하며, 두툼한 머리 부분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끈 등으로 꿰거나

금장식을 씌워 사용하는 장신구이다.

옥이나 금, 유리, 수정 등을 재료로 만들고 크기는 1㎝ 내외부터 10㎝ 내외이다.

금관, 목걸리, 귀걸이 등의 장신구에 사용되며, 그 모양은 초승달, 알파벳 C자, 쉼표 등과 비슷하다.

도굴꾼 김영조는 이 곡옥이 몸을 반 정도 만 굼벵이의 모양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굼벵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곡옥은 금관총, 천마총, 서봉총, 황남대총 북분(北墳)과 같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목걸이에서

장신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래의 이미지는 1921년에 발굴된 경주 금관총 출토 금관이다.

이 금관은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의 크기로 1962년에 국보 제87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머리에 쓰는 관테와 관테 앞쪽의 날 출(出)자 모양의 장식, 좌우의 사슴뿔 모양 장식에 모두 곡옥이 달려있으며,

관테의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드리개의 끝에 달린 드림도 곡옥으로 장식하는 등 57개의 곡옥이 금관에 달려있다.

▲ 금관총 출토 금관과 금관에 달린 곡옥.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도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그 수는 적지만 곡옥이 달려있다.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45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가야의 금관은 높이 11.5㎝, 지름 20.7㎝의 크기로
1971년에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호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금관의 관테에 곡옥이 달여 있고, 금관과 함께 출토된 장신구의 윗부분이 곡옥으로 장식되어 있다.
▲ 대가야의 금관(왼쪽)과 부속 장신구(오른쪽)에 달린 곡옥. ⓒ리움 미술관 홈페이지

오구라 컬렉션의 곡옥
▲ 오구라 컬렉션의 곡옥. ⓒ 국립문화재연구소,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2005.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에는 수십 개의 곡옥이 포함되어 있다.
길이는 가장 짧은 것이 1.0㎝, 가장 긴 것이 8.5㎝로 1.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하고,
재료도 경옥(硬玉, 비취), 벽옥(碧玉), 금, 금동, 수정, 유리, 마노석(瑪瑙石), 호박석(琥珀石),
사문암(蛇紋岩), 흙 등으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전(傳) 경상북도 경주 금관총', 즉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곡옥이 한 개 포함되어 있다.

이 곡옥은 길이가 4.7㎝이고, 연두색의 경옥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 부분 앞쪽에 세 줄의 음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오구라 컬렉션에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곡옥 한 개만 남겨져 있지만,

실제로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당시 좀 더 많은 곡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에 발간한 <경주 금관총과 그 유적>이라는 보고서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 경주 금관총 출토로 추정되는 오구라 컬렉션의 비취곡옥. ⓒ ColBase: 國立文化財機構所藏品統合檢索システム

이 보고서는 '제1장 서설-제4절 발견 유물의 종류와 수량'에서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장신구와 기타 장식구' 부분에서 곡옥은 경옥 54개, 수정 1개, 호박 1개, 벽옥 1개, 유리 1개로 총 59개의 수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출토 목록을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발견 당시 흩어져 없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이 고분 출토품으로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곡옥 십 수개가
개인 소유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다"라는 각주를 달고 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곡옥이 어떤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인데,

오구라 컬렉션에 금관총 출토로 추정되는 곡옥이 있는 것을 봤을 때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십 수개의 곡옥'을 사들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오구라가 도굴꾼에게 사들인 곡옥 수량은 얼마나 될까

도굴꾼 김영조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먹은 곡옥의 대략적인 개수를 먼저 무게로 추정해 보자.

경상도 지역에서 말하는 쌀 한 되가 보통 1.6㎏에 해당하는데, 쌀과 곡옥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한 되에 1.6㎏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도굴꾼 김영조가 곡옥의 무게를 쟀을 때

최소 3.2㎏에 해당하는 곡옥들을 오구라에게 팔아넘긴 것이 된다.

해당 곡옥의 크기와 무게를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필자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곡옥 전문가 강윤기씨의 도움을 받아 그가 직접 제작한 비취곡옥의 정보를 받았다.

해당 비취곡옥들의 크기와 무게(가로/세로/두께/무게)는 각각 1.0㎝/2㎝/0.8㎝/3g, 1.4㎝/3㎝/1.1㎝/8g, 1.7㎝/4㎝/1.3㎝/16g,

2.0㎝/5㎝/1.5㎝/22g, 2.3㎝/6㎝/1.6㎝/34g이며, 그에 따르면 기술력의 차이로 인해 금관총 출토 금관의 비취곡옥과 같이

예전에 제작된 것이 요즘 것보다 무게가 약간 적게 나갈 것이라고 한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한 되 1.6㎏ 당 각각 약 533개, 200개, 100개, 72개, 47개이고, 최소 '두 되' 3.2㎏으로 할 경우

각각 약 1,066개, 400개, 200개, 144개, 94개가 된다.

 

도굴꾼 김영조가 도굴한 곡옥들은 길이와 무게가 달랐겠지만, 2㎝짜리라면 약 1,066개, 6㎝짜리라면

94개를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것이 된다.

그리고 여러 길이의 비취곡옥들을 한 되에 무작위로 담았다고 할 경우 정확하게 2㎝짜리 몇 개,

6㎝짜리 몇 개라는 것을 알 수 없지만, 2㎝부터 6㎝의 비취곡옥들을 한 되에 담았고

위의 개수들의 평균값이라고 가정하면 약 380개가 된다.

'두 되 이상'의 '두 되'가 380개라고 한다면, 금관총 출토 금관에 57개의 곡옥이 달려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도굴꾼 김영조는 최소 금관총 출토 금관 약 6.6개에 달려있는 곡옥들을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것이 된다.

 

다음으로 도굴꾼 김영조가 도굴한 곡옥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않고, 나무로 된 상자 모양의 되에

곡옥을 퍼담아 팔아넘겼을 경우의 개수를 계산해 보자.

그가 사용한 되의 크기를 알 수 없지만, 국립박물관에서 설명하는 되의 크기(17.7cm/17.7cm/9.0cm)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AI를 사용하여 한 되에

① 가로/세로/높이 17.7cm/17.7cm/9cm 크기의 나무로 만든 되에 가로/세로/두께/무게가 1.0㎝/2㎝/0.8㎝/3g,

1.4㎝/3㎝/1.1㎝/8g, 1.7㎝/4㎝/1.3㎝/16g, 2.0㎝/5㎝/1.5㎝/22g, 2.3㎝/6㎝/1.6㎝/34g인 비취곡옥이 몇 개 들어가는지,

② 서로 다른 크기의 비취곡옥을 혼합해서 넣었을 경우 몇 개가 들어가는지에 대해 답을 구했다.

그 결과 ①은 각각 약 1,570개, 545개, 284개, 168개, 114개, ②의 경우 빈공간을 최소화하여 대형 비취곡옥 사이의 공간을

중소형 비취곡옥이 메우는 형태로써 최적의 개수로 약 757개(소형 약 630개+중형 약 99개+대형 약 28개)가 나왔다.

도굴꾼 김영조는 최소 '두 되'의 비취곡옥을 팔아넘겼기 때문에 해당 개수는

①의 경우 각각 약 3,140개, 1,090개, 568개, 356개, 228개,

②의 경우 1,514개가 된다. 이는 금관총 출토 금관에 달린 곡옥의 개수와 비교하여 ①은 각각 약 4배, 6.2배, 9.9배, 19배, 55배

②는 26배나 더 많은 개수이다.

 

위와 같이 필자 나름대로 도굴꾼 김영조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곡옥의 개수를 필자 나름대로 추정해 봤다.

계산 결과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두 번째 방법으로 계산한 것 중 어느 것이 그가 팔아넘긴 곡옥의 최소 개수에

조금이나마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되에 쌀이나 곡식 등을 담아 파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보통 곡식더미에 되를 푹 담고

들어 올린 뒤 되의 윗부분을 평평하게 해서 '한 되'로 팔았다.

도굴꾼 김영조도 고령 지역의 300여 기의 가야 고분에서 도굴한 곡옥들을 쌀자루나 나무상자 등에 넣어 보관하다가

여기에 되를 푹 담은 뒤에 '두 되 이상'이 되는 곡옥들을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겼을 것이다.

 

오구라는 왜 곡옥을 사들였을까

그렇다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왜 그렇게 많은 곡옥들을 사들였을까?

그의 조선 유물 수집 동기와 아래의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의 설립취지서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곡옥은 이전에는 야마토 민족 특유의 장식품으로, 다른 민족에게는 유례가 없다고 했다.

확실히 194년 내가 처음 조선에 건너갔을 쯤에는 조선에서 곡옥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1921년 경주에서 대발굴(금관총 발굴: 필자주)이 있었고, 황금 왕관 외에 대량의 고미술품이 출토되었는데,

그 왕관은 51개의 곡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후 경주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곡옥이 출토됨에 따라 오늘날에는

일본과 조선 중 어디가 (곡옥의: 필자주) 본가인지

의문을 품어도 지장이 없기에 이르렀다.

그 외 거울, 토기, 복식에 이르기까지 한일문화교류의 증거는 현저한 면이 있다.

(중략) 이로써 조선 문화의 자재(資材)는 일본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재료라고 믿는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조선 유물 수집 동기로 '일본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에

조선의 고미술품 등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곡옥 또한 일본의 역사, 그리고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었고,

그의 말대로라면 이를 위해 고령 지역의 가야 고분에서 도굴한 곡옥, 그리고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곡옥들도 사들였던 것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이와 같이 고령 지역의 가야 고분을 파헤쳐 도굴된 수많은 곡옥들을 사들였다.

현재 오구라 컬렉션에는 47개의 곡옥밖에 없는데, 그가 사들였던 '두 되 이상'의 곡옥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일본의 역사와 문화 연구를 위해 제대로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팔아넘긴 것일까?

도굴꾼 일당은 생계를 위한 물질적 만족을 위해 가야 고분 속에 잠들어 있었던 수많은 곡옥들은 도굴했고,

오구라는 자신의 수집 목적을 위한 정신적 만족을 위해 도굴된 곡옥들을 사들였다.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귀뜸해 줄 곡옥은 그렇게 일본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고,

앞으로 영원히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시, <경주 금관총 발굴조사보고서(국역)>,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2006.
국립민속박물관, 〈읽어주는 박물관-홉, 되, 말〉, 202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편, <오구라 컬렉션-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정규홍 편저,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경상북도·(사)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18.
이경희, 〈오쿠라(小倉) 컬렉션의 行方〉, <월간 조선> 27권 5호, 2006년 5월.


국가유산지식이음

 

[엄태봉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utb@gw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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