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dio 기기 & 이야기들

[스크랩] 국내 오디오 야사

mistyblue 2013. 5. 8. 00:03

 

한국의 사운드란 어떤 소리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태리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나름대로 그 나라의 전통적인 소리를 담고 있는 시스템들은 국민성이라든가 기후 풍토 등을 은연중에 느낌으로 알 수 있게 했다. 예를 들어 이태리의 경우 인테리어적인 아름다운 가구풍의 디자인의 스피커 시스템이라든가, 영국의 경제형 디자인의 앰프 그리고 클래식한 패션풍의 프랑스 제품을 들 수가 있다.
그렇다면 수출을 포함, 총 매출 1조 8천 억원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 사운드인 우리나라 오디오 시스템 소리는 과연 어디서부터 찾아볼 수 있을까!


  1959년 잘살아 보기 위한 수단으로 전자제품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한 한가지 목적으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이런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은 내전에 모든 것이 사라진 불모의 땅에 소리 문화란 사치에 불과했던 것으로 그런 여유있는 생각은 해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웃 일본은 우리네와는 달리 전자산업에 불을 당기면서 무섭게 경제국으로 성장 오디오 문화를 창설 일찍부터 이 분야의 전문 기술자들을 양성 한때는 전세계 오디오 시장 90%을 점유 할 때가 있었다.

 
라디오 A-501로 시작한 한국 사운드

 

  1959년 금성사가 개발한 전기식 라디오인 모델 A-501이 우리나라 오디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면서 한국 사운드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 라디오가 개발된 당시의 배경은 우리나라 시장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제 라디오이었다.

당시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고 우리나라가 전자 공업국가로서 발전하는데 있어 중요한 갈림길이 없다. 그러나 당시 제정된 전자공업 육성법이라든가, 전자진흥법 책정등 그리고 제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착실하게 실효를 걷게되어 이에 힘입어 출발한 음향 관련 산업이 오늘날 오디오 제조 및 기술 향상에 어느 정도의 기반을 마련해주는데 기여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를 기반으로 꾸준하게 성장 가도를 달려온 국내 오디오 산업은 반도체 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선진 외국의 디지털 기술은 물론 광전자 산업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참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디지털 시대에 더욱 세련된 기술 개발

 
국내 오디오 산업의 본격적인 기술 개발은 디지털 시대에 와서 더욱 세련된 기술을 개발 디지털 압축기술을 비롯해 녹색 레이저를 이용한 D-VDR과 영상 기록 매체인 DVD의 개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꾸준한 기술개발은 우리 나라가 첨단 전자산업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차세대를 위한 디지털 기술력 확보는 그 어느 때 보다 시급한 일로서 신기술이 없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다는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특히 한국 사운드를 개발하는데 있어 중요한 과제는 이를 위한 핵심 부품 소재 개발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국내에서 개발되어야 수출 경쟁은 물론 우리의 전자산업이 다시한번 전세계 시장에서 활기를 찾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차세대의 신기술 연구와 기술 습득을 위해 각 회사들이 전문 연구소를 개소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지만 컴퓨터나 자동차등에 빼앗긴 국내 오디오산업은 새로운 이슈 없이는 아직도 불투명한 상태다.

국내 오디오시스템이 아직도 컴포넌트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랙크 형태나 미니 컴포넌트 시스템에 주력하고 있고 소비자들에게 이렇다할 이슈를 내놓지 않고서는 물밑처럼 들어오는 외국 유명 상표에 이제는 설자리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외면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모든 일들을 감안해 볼 때 우리나라도 이제는 한국 사운드를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하이엔드 제품 개발이 그 어느때 보다 시급한 일이다.
그 동안 국내 오디오 산업을 주동해온 기업들은 거의가 중소 기업체가 해낼 수 없는 막대한 물량을 투입 제품을 만들어 판매해 왔으나 오디오 산업이 부진하면서 부가 가치가 낮은 라인을 철수 다른 것으로 대처해 주기 시작하면서 더욱 위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WTO 출범이후 전세계 시장은 개방시대를 맞이해 거의 노출된 상태에서 경쟁을 벌리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술력 향상과 이를 위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국내 오디오 산업은 여러모로 꾸준하게 첨단 기술력을 개발 살아 남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점차 위축되가고 있는 경기에 오디오 산업은 깊은 늪속에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첨단기술이 개발되면서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급기야는 인켈을 인수한 해태전자가 부도가 나고 아남전자 역시 똑같은 경우에 있고 롯데전자와 대우전자 그리고 삼성전자 등이 오디오 산업을 거의 포기하고 있는 현실이고 보니 국내 오디오 산업의 앞날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있다.

이미 다변화 지역으로 묶여있던 일본 제품이 무역 정책에 의해 완전 자유화 되었으나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지는 몰라도 태광산업이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을 비롯해 중 저 가격대의 신제품들을 개발 오디오 산업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최초의 국산 '소리 통' 탄생

 

  구한말인 1876년 고종 13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 나라도 신 문명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전화기가 가설되었고 전기가 처음 켜진 곳은 1886년 10월쯤 고종임금이 거처하던 건청궁 인데, 에디슨 전기회사의 기술인 윌리엄 맥케이가 설치했다.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전파상은 1927년쯤 광운상회(光雲商會)등 몇 안되는 라디오 상들이 일본으로부터 부품을 들여와 라디오 수신기를 조립해 판매한 것에서 비롯된다.

최초의 '소리통'이 소개된 것은 1866년 아산만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프러시안 사람인 오베르트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구한말, 미국공사로도 우리나라에서 활약이 많았던 호렝스 알렌이 대신들을 초청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기불과 함께 개화물결이 일기 시작하면서 소리통의 역사도 서서히 막을 올리게 된 것인데 1925년 매주 4회 정도의 실험방송이 성공을 거두자 다음해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이 개국을 했고 1927년 라디오 방송 원년을 맞게된다.


  당시의 라디오란 수신기는 지금처럼 흔히 보는 라디오가 아니라 그야말로 귀중품이었다. 휴전 직후 1954년 민간방송인 기독교 방송국(HLKY)이 설립되면서 일반인들의 라디오 수신기에 관심이 높아졌다.

당시 라디오는 소형에서부터 대형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가 있었는데, 거의가 미국과 일본제였다. 중고품이나 광석 라디오도 당시에는 인기가 있었다.

 
국산 소리 통 A-501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1958년에 주식회사 럭키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살림을 시작한 금성사는 59년 11월 최초의 국산 소리통신인 A-501을 만들어 냈다. 당시 국제신보 59년 11월 4일자에 보도된 내용은 '국산 라디오 등장'이란 제목과 함께 값싸고 외국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을 실었다.

A-501 라디오는 왕관 마크와 금성의 영문표식 등이 왼쪽에 새겨져 있었고 국산화 율은 60%로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에 있어 기록될만한 일이었다.

이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독인 헹케(H.W.Henke)를 기술 고문격으로 초빙, 판매 이익금 중 2%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생산설비 및 부품을 들여온 것이다. 또한 이 제품을 개발하는데 참여한 사람으로 이공계 출신인 하동 중학교 교사였던 김해수(金海洙)씨가 금성사가 공채 한 1기생으로 기능공 2명과 함께 일본제 라디오인 산요를 모델로 설계를 시작했다.

초반부터 헹케와 김해수는 제품설계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즉 라디오 캐비닛에서 부터 내부구조에 있어서도 헹케는 ㄷ자형 샤시를 고집한 반면에 평판형을 추천, 기술감독인 헹케와 실무간의 의견대립은 계속되었지만 결국은 일본제를 모델로 삼자는 김해수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여기서 A-501이라고 모델 이름은 A자는 AC에서, 5자는 5구식 라디오란 것이고, 1은 제1호란 의미였다. 이 제품의 설계 특징은 전기사정은 좋은 편이 아닌 당시 100 볼트로 사용하게 했지만 전기 사정을 고려해 50볼트 낮은 전압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진공관 라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불륨 스위치들을 국산화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고 기술수준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했다.

사용 부품에 있어서도 진공관, 스피커, 저항, 더스트 코어, 볼륨, 컨트롤 등은 수입했고, 전원스위치, 샤시, 트랜스, 플레이트 그리고 전원소켓 등은 자작한 것을 사용하는등 매우 공들인 제품이 아닐 수 없다.

오직 이런 모든 공정이 우리 나라에서도 라디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정신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전자제품이 의욕만으로 해결될 수 없듯이 몇 가지 부품이 자작과정에서 문제점을 노출하기도 했다.

1959년 8월 시작품(試作品)이 완성되어 상공부 제4133호로 상표 등록까지 마쳤고, 11월 15일 드디어 대망의 소리 통인 국산 라디오가 탄생했다. 초기 생산은 약 80대로 알려져 있고 5종류의 컬러로 소비자 취향에 따라 선택 할 수 있게 했다.

A-501의 당시 판매가격은 약 2만원 정도였고, 외국제 가격은 3만 3천원, 국산부품을 처음부터 60%나 사용해 만들었다. 60년대에 와서 라디오 수출에 힘입어 발전해온 국내음향산업은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사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것이므로, 최초의 금성사 A-501 모델이 갖는 의의는 그만큼 큰 것이다.

60년 초기에 일어난 박정희 소장 쿠테타는 우리 나라가 전자공업국가로서 발전하는데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자본과 기술이 빈약한 중소기업에 참여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군사정부가 수출산업에 대대적인 지원을 시작한 1960년 1월 17일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전자공업 육성 안이 발표되면서, 전자공업 협동조합이 창립되고 전자진흥 공업법이 제정됨에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지원도 있었다.

6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출발한 음향산업은 라디오 조립에서부터 시작,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에 힘입어 스피커 제조회사들이 등장한다. 삼미기업 고려전자 등을 위시해 몇몇 중소기업들이 라디오용 스피커를 제조해 라디오를 수출하던 오리온전자, 금성사, 천우사 등에 납품, 점차 전자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콘 설 형 전축 등장

 

  초기의 전축은 라디오에 크리스털 카트리지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형으로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이에 필요한 부품들은 시장에 나오자마자 팔려 나갔다. 우리나라 음향기기 산업에 자주 등장하는 천일사의 별표전축이나 성우전자의 독수리표전축이 등장한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제품이 전축 행세를 했다.




  당시의 전축은 일본 제품을 그대로 복사한 콘솔형으로 디자인이 요란하고 거의 다리가 4개 달린 형이다. 일반가정에서 전축을 갖고 사용하고 있다면 돈푼 깨나 있는 집안으로 행세하였고 부(富)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별표나 독수리표 전축은 일체형으로 된 스피커 인클로저가 좌우에 부착되어 있고, 중앙 상단에는 라디오 수신기가 내장된 앰프, 그리고 하단에는 레코드 플레이어가 설치되어진 형이다.

제품에 따라서는 레코드 플레어어를 상단에 설치해 놓은 것도 있고 장식장에 자개를 박은 고급형도 판매되었다. 이들 전축들이 가장 인기 있었던 곳은 고급요정이나 술집이었는데, 도라지 위스키 시험장이 시내곳곳에서 성행하고 다이아 맥주가 크라운 맥주보다 인기가 있었던 이때에 우후죽순처럼 불어난 다방에 필수품이 될 정도였다. 우리가 라디오에 한참 열을 올리기 시작할 때 독일이나 일본은 진공관 라디오에 수동식 레코드 플레이어를 탑재시켜 놓은 일체형 전축을 내놓고 바야흐로 LP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셔널, 빅터, 독일의 그룬디히 그리고 미국의 마그너복스 등이었는데 이때의 제품 다수가 국내시장에서도 판매되었다.

 
천일 사 별표 전축과 성우전자의 독수리 표 전축 등장

 

  60~70년 대까지 진공관을 사용해 만든 전축들이 우리나라 오디오 산업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을 때 대표적인 회사가 천일사의 '별표'전축(지금의 태광산업)과 성우전자의 '독수리 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이 기기들은 우리 나라의 진공관 전축의 일대기를 기록했다고 보는데 금성사의 진공관용 라디오 A-501이 소개되기 이전 수공업식이 만들어져 서울의 청계천주변에서 판매된 라디오 식 전축이 많았다.

이 제품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라디오를 해체시켜 배터리용 레코드 플레이어를 부착시켜 만들었다. 여하간에 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에 전축하면 별표를 비롯해 독수리표, 활표, 바이킹, 엠파이어 등이 있었다.

60년대 초 전축은 거의 라디오를 개조시켜 만든 것으로 대형은 물론 요란하게 치장을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울긋불긋한 전등과 요란한 장식등이 부착되어 있었고 고급품은 호마이카 칠을 한 자개장처럼 래크가 내용보다 더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이중 천일사의 별표전축은 1978년 12월 31일자로 단 하루만에 현재의 태광산업으로 넘어갔다. 동사가 만든 전축이 전세계에 수출될 때만해도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사업을 확장, '우리상품, 우리기술, 우리 힘'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아직도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데, 한 시대를 음향기기에 바쳐온 정보윤은 한국 오디오계의 거목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천일사의 별표 전축과 함께 기억되어지는 것은 성우전자가 내놓은 독수리표를 들 수 있다. 성우전자는 1957년 진공관 시대에 천일사 별표 전축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문화 전파사란 상호로서 출발했다.

 

트랜지스터 앰프 등장으로 오디오산업 급진전

 

  전축 소자로 사용된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설계에서부터 디자인, 그리고 성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으며, 인건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던 중소기업은 호경기를 맞이하게 된다. 

 

반영구적인 트렌지스터의 등장은 새로운 활력소를 가져왔음은 물론 혁신적인 회로설계와 함께 참신한 디자인의 제품들을 등장시켜 소비자들로 하여금 구매의욕을 갖게 했다. 한마디로 말해 70년에 와서 우리 나라의 오디오 산업에 본격적인 태동기를 갖게 해준 것이 바로 트랜지스터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진공관으로부터 트랜지스터로 이어지는 시기에 등장한 전축으로는 바이킹이란 상표가 있다. 한때 무역업에 종사해왔던 사람이 전축에 흥미를 갖고 설립된 회사로 명동입구 등에 전시장을 마련, 대대적인 판매에 임하기도 했다. 바이킹 전축은 당시 4대 유명 일간지에 3일에 한번 광고를 낼 정도였으며 한달 신문 광고료만도 약280만원이 지출되었다고 한다.

공장은 청계천 8가에 위치한 중앙시장 쪽이었는데 래크와 스피커 유닛, 그리고 부품들을 국내외에서 납품 받아 조립한 것으로 거의가 월부 판매 방식으로 운영했다. 당시의 전축은 출력표시도 엉망으로 5~10와트 정도의 라디오 전축에 스피커 유닛이 큰 것을 사용했을 때는 20~30와트라고 했으며 소형 유닛 일 때는 그보다 약하게 표시해 놓았다. 다시 말해 출력이 낮은 제품에 대형 스피커를 연결 청감상 음량이 크게 들리게 되므로 출력을 높게 표시해 주었다.

당시 전축 장사는 몇몇 업체를 제외하고는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그 당시 전축 사업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과다한 세금이 우리 나라 오디오 산업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라고 했듯이 이에 관계했던 중소기업인들이 거의가 중도에 포기했던 것을 보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자 부문에서 라디오가 단일 품목으로는 가장 인기가 있었고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소자가 바뀌게 되자 점차 다양한 종류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삼미와 마샬 전자의 국산 스피커 등장

 

  음향기기의 핵심 부분의 스피커는 거의가 외국제품이었으나 몇몇 중소기업인들이 이 부분에 적극 참여, 국내 제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즉 마그네트형에서부터 시작, 다이내믹형 스피커를 만들어 냈다.

1959년부터 스피커 제조를 위해 뛰어왔던 고려 전자 공업사(후에 마샬전자)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들어보면 순수한 국산재료를 사용, 제작한 다이내믹형으로 상표는 코스모스였고 같은 계열의 삼미사는 웨스턴이란 상표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대로 국산 스피커를 제조하게 된 것은 당시 정부와 민간 단체가 주동이 되어 농어촌지역에 스피커 보내기 운동이 일어나 어느정도 활기를 띠었고 전국 유선방송 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극장 입장객을 상대로 모금을 벌였다.

스피커 제조 부분에서 과거 삼미사를 들 수 있는데 김문주 형제에 의해 설립되었고 실질적인 사주는 동생으로 엔지니어 출신이다. 고려전자 공업사로부터 상호를 마샬로 변경, 본격적인 스피커 제조에 뛰어든 박병윤은 의학을 전공한 분으로 6.25전쟁 중 단신 월남, 초기부터 음향기기에 뛰어들었는데 70년대 국내시장은 물론 외국까지 한국 스피커 상표를 널리 알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70년대부터 80년 사이에 레코드 플레이어로 이름을 떨쳤던 신일산업(지금은 가전제품 생산)의 김덕현도 국내 오디오 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분이다.

국가정책에 힘입어 출발한 국내 전자산업은 70년을 향해 더욱 힘찬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이때는 누구나 한번쯤 전자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할 정도었다. 여하간에 우리 나라 음향 기기는 70년대를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는데, 그 중에 70년 초 혜성처럼 등장한 동원전자를 들 수 있다. 동원전자는 90년 3월 이 회사 창립 20주년을 맞아 주식회사 인켈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0년대 설립 당시의 동원전자 회사 모습 

이 회사를 설립한 조동식은 1918년 출생으로 고령이지만 아직도 건강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시 젊은 사람 못지않는 건강과 패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전자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9년 일본의 전시장인 아키 하바라를 둘러본 후였다.

특히 전자공학 연구한 김완희 박사의 권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1972년도에 설립한 삼풍 전자상사는 전자산업과 인연을 맷은 첫 동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2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된 이후, 역시 성동구에서 대의원으로 당선된 일동제약의 윤용구(尹溶求)사장과의 만남이 오디오 산업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인켈의 전신이었던 일렉트릭 보이스 코리아가 전시회에 참가 각종 제품을 전시회 놓고 있는 부스 모습

  일동제약 윤용구 사장의 권유로 결심을 굳힌 조동식 사장은 100% 외국법인(당시 윤두영씨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 외국인이 투자한 회사로 되어 있었음)인 한국 EV의 최고 경영자로 참가하면서 부득이 상호를 인터내셔널 코리아 전자주식회사로 변경하게 된다.

현재 해태전자가 소유하고 있는 인켈이란 회사 이름은 당시 이 회사가 전보 약자로 사용해 온 것으로 인터내셔널의 IN을, 코리아에서 K 첫자를, 그리고 일렉트로닉에서 EL를 딴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3년 3월 7일 정관을 개정하고 탄생된 이 회사는 초기에 전축 바늘인 카트리지와 헤드폰을 생산, 현재 위치인 도봉동에 인켈의 아성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진에 의해 출범된 이 회사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경리 업무였다.  

 
국내에서 제작해 전세계 시장에 판매된 EV사의 앰프 모습

  전 윤사장과 함께 참여해온 일부 임원들이 교체되었고 조사장과 함께 오래 동안 일해온 엄익정씨와 조사장의 차남(현 미국 셔우드 대표)이 참여하게 된다.

엄익정씨는 인켈의 창업멤버이면서 후에 스트라우트 오디오 제조회사를 설립한 사람으로 한국 오디오 시장에 검정패널의 컬러디자인을 가장 먼저 소개한 장본인이다. 회사를 인수한 첫해에 외형상 100%의 신 장세를 가져왔지만 오히려 적자는 늘어나게 되자 부사장직 을 맡았던 윤사장은 더 이상 경영에 참가하기를 꺼린 반면, 조사장은 이 회사에 사활을 걸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결국 윤사장의 소유지분 주식을 전부 인수해 순수 내국인 업체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 가담한 사람이 당시 인켈의 사장이자 조동식 회장은 큰아들인 조석구였다. 70년 초반 설립된 스피커시스템 전문 제조 메이커로는 KEP를 들지 않을 수 가 없다.

동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전자부품공업으로 오직 스피커 시스템 제조만을 위한 메이커로 제일동포인 김용태에 의해 1973년에 설립되었다. 외국인 투자 승인 절차를 밟아 설립된 동사는 수출공단에 있으며 현재는 설립자 친동생인 김용호가 맏아 운용해 오다가 결국은 최근에 다른 사람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만다.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초창기 국내 오디오 제조 회사의 조립 작업 모습

  설립자인 김용태는 고국의 낙후된 전자산업의 핵심부분인 부품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민단 활동을 중지하면서 귀국, 계획한 사업으로 그 동안 많은 업적을 갖고 있다. 

 

 
서음전자가 최초로 시도한 검정 색 전면 색상

 
80년 초기까지만 해도 오디오 시스템의 전면패널 색상은 거의 실버계통의 밝은 쪽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서음전자가 과감하게 검정 색상을 오디오 시스템의 새로운 패션으로 등장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검정 패널의 스트라우트 제품은 색다른 감각을 갖게는 했으나 검정 색상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소비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유럽형의 오디오 시스템의 독특한 면을 알리려고 했던 이 아이디어는 결국 국내에서 당시만 해도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시작된 사업이 경영 자체에서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당시 석유파동으로 인한 수출부진 등에 의해 결국 스트라우트란 이름은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앞서간 디자인 컬러로 오히려 실패를 본 스트라우트 오디오 시스템

  이 스트라우트 제품에 관련해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신문지상이나 잡지 등에 "소리는 안다, 선택할 오디오는 없었다. 매킨토시와 비교해 보십시오"란 선전문구였다.

 

 
서음전자가 스트라우트 브랜드로 한국 전자전에 참가할 당시의 부스 모습 

스트라우트가 패션 상품으로 등장시킨 검정 색상은 이후 1~ 2년 후 모든 오디오 시스템이 이 색상을 채택하기 시작,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퍽이나 아이러니컬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남보다 너무 앞섰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현재 오디오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70년대를 기점으로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메이커로는 아남, 롯데 파이오니아, 인켈 등을 들 수 있고, 천일사를 인수한 태광산업, 그리고 기존의 라인을 늘여 음향기기 제조를 시작한 금성사나 삼성전자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가전3사 오디오 산업에 참여

 
1967년 설립된 성음사(星音社)는 금성사의 전신으로서, 또 삼성전자는 1969년 스테레오 설계 방식의 모델 PH-505를 만들어 내면서 시작하면서 오디오 제품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4년 대우전자는 경영난에 있었던 대한전선의 오렉스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음향기기 대열에 끼어 들었다.

 


천일사 별표 전축 회사를 설립한 경기도 파주 출신인 정봉윤 사장 모습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오디오 산업에 있어 70년을 가리키게 되면 어쩌면 먼 옛날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천일사의 별표 전축이나 독수리 표, 바이킹 전축 등의 월부 판매 광고,

 


지금의 태광 오디오의 전신이라고 볼수 있는 천일사 별표 전축 공장 모습 

플래카드가 변두리 길거리에 나부끼기 시작했고 충무로나 세운상가에는 거의 대부분 외국제품이 판을 쳤다.



당시 오디오 제품 선전은 길거리에 내걸은 간판이 대부분이었다. 

70년도 외국 음향기기가 국내시장에 소개된 경로를 살펴보면 미군 PX에서 유출된 제품과 당시 서독에 가있었던(광부와 간호원) 등의 인력 편에 의해 반입된 유럽 오디오 제품, 그리고 월남전에 참가한 군인들에 의해 들여온 일본 오디오 제품들이었다.


80년대의 우리 나라 오디오 산업은 2차 오일 쑈크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그 동안의 경제 성장에 힘입어 인켈을 비롯해 롯데, 태광, 삼성, 금성사, 대우, 아남 등은 계속 하이파이 사업이 큰 몫을 차지했었다. 특히 70년대 초기서부터 일본 기술을 제휴한 제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오디오 시스템을 가지고 신제품 품평회를 가진 회사는 한국 내셔널 전기주식회사(현재의 아남전자)였다.  

 
일본 내 TU널과 합작 회사로 출발한 아남전자가 첫 시작품 발표회의 모습 현재 MBC프로덕션의 박원웅 상무가 사회를 보고 있는 모습 

아남과 기술제휴를 맺고 있던 테크닉스 상표는 우리 나라 오디오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으며 특히 레코드 플레이어 부분에서는 타 회사에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인기상품이었다.

외국과의 합작 투자회사로는 70년 중반 출범한 롯데 파이오니아사가 있다. 동사는 일본 파이오니아와의 합작투자로 1973년 11월에 설립, 80년 초 내수용을 만들어 판매했다. 이 회사가 국내시장에 내놓은 초기의 제품은 종합 앰프인 리시버형이었는데, 이 모델 또한 테크닉스 제품처럼 일본의 파이오니아 회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초기의 국내 오디오 제품들은 거의가 콘솔형 디자인으로 덩치가 커야만 비싼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다시 말해 뒷면 패널에 붙어 있는 글씨만 없으면 외국제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회사는 오디오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단품판매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롯데와 인켈의 경쟁, 국내 오디오 성능과 서비스 촉진

 
 

 

 

롯데 파이오니아사의 전경과 하이파이 컴포넌트 시스템 모습 

'전세계의 음의 천재들이 고뇌와 집념으로 창조해 낸 위대한 음의 세계, 이 음의 세계를 이해하고 원음 그대로를 전하기 위해 파이오니아는 존재한다.'는 슬로건은 당시 음향 재생 기기 제조회사로서의 이념을 과시했다.

동사를 상징하는 심벌 컬러는 초기 국내 시장에서는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80년 초기 국내 오디오 시장은 동원전자의 인켈 상표가 그 아성을 쌓기 위한 기초를 겨우 마련할 때여서, 전량 수출만 하던 파이오니아 오디오 제품의 국내 판매허용은 경쟁상품으로 경영진이나 대리점을 긴장시켰다.

그리하여 파이오니아 제품은 국내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음향 기기 전문회사로 인켈과 함께 초반부터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다. 롯데는 음향산업에서 음의 출구 쪽인 스피커에 관한 연구와 개발에 치중하면서 한동안 외국 유명메이커의 제품과 비교 시청회 등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스피커 제일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제품이든 간에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제품의 성능은 물론 가격 등에서 소비자들에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한편 별표전축이란 상호를 간판으로 출범한 태광산업은 그 동안 일본의 도시바와의 기술제휴를 한 후 오직 수출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제6회 한국 전자전에 출품한 태광산업의 부스 모습 

국내 오디오 산업을 최초로 시작해 별표전축이란 이미지를 업고 자신만만하게 도전한 태광은 그 동안 군납 등을 통해 국내시장에 도전 차츰 태광 엘로이카란 브랜드 이미지 심기에 최선을 다해 왔다.

 

 
태광산업이 개발한 제품중 가장 많이 판매된 토파즈 시리즈 모습 

이 회사가 도시바와 기술 제휴에 힘입어 만든 미니 사이즈의 서라운드 컴포넌트인 '토파즈 G7'이란 패션상품 내놓아 보급형 오디오 시스템 매출의 제 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토파즈 시리즈가 롱런하자 이번에는 '쾨헬'이란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대우전자가 내놓은 마이제스타 제품 

대우전자가 오디오 산업에 뛰어들면서 내놓은 마제스타는 그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슬그머니 그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으나 또 한번은 에어로 할러소닉 스피커시스템을 채용, 국내시장에 다시 도전하고 있다.

 
3차원 음향이라는 에어로 할라소닉

 
 

 
에어로 시스템사가 내놓은 스피커 시스템들 

스피커시스템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또 한 가지 일은 현재 해태전자가 소유하고 있는 에어로 시스템 사를 들 수 있다. 동사는 당시 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유신영이 개발한 3차원 음향이라는 에어로 할라소닉 음향 이론으로 개발한 혁신적인 기술로 등장시켜 관심을 끌게 했다. 그러나 이 음향 기술은 생각했던 것과 같이 빛을 보지 못하고 서서히 자태를 감추고 만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스피커 엔지니어인 유신영은 한때 평국 전자 공업과 하이제스트 제품을 개발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성공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PA족에 벤쳐기업을 설립했다는 얘기도 있다. 여가간에 이러한 엔지니어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한 우리 나라 스피커 산업도 전망은 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80년대를 거쳐 90년 후반기를 맞기까지 우리 나라 오디오 산업은 무수한 발전을 해왔으나 아직도 핵심적인 문제는 풀리지 않은채 점차 한국 사운드 이미지를 전설에 남기려는 듯한 미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어 안타가운 마음 그지없다.

 
국내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의 도전

 
 

 
해외 시장에 "SHERWOOD"란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는 지품 모습 

오디오 전문 메이커인 주식회사 인켈은 셔우드란 70년대 브랜드 이미지를 잘살려 이미 외국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상표는 이제 세계적인 브랜드 정착 우리 나라 오디오 기술을 중 상급으로 끌어올리는데 많은 역할 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동사를 인수한 해태전자가 최근 법정 관리로 넘어 가면서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가 없다.

 

 
진 사운드사의 스피커시스템 모습 

그런가 하면 AV시스템 전문업체인 아남전자도 그 동안 꾸준하게 하이엔드 제품 개발에 도전 미로형의 스피커시스템을 내놓는가 하면 프로로직 기능의 앰프, HDCD 첨단 음향 기술을 탑재한 하이엔드급 CD플레이어 등을 발표 국내 오디오시스템 산업이 하이엔드로 나가는데 견인차 역활을 해왔다. 그런가 하면 96년과 97년 그리고 98년 사이 미국에서 열린 하이엔드 오디오쇼에 태광산업을 비롯해 삼성전자, 아남전자, SIS, 진 사운드 그리고 실바드오디오랩사 등이 하이엔드 제품을 개발해 출품, 오디오 매니어들의 관심을 갖게 했는데 아마도 국내 오디오 제품이 수준 급 제품으로 해외 시장에서 선보인 것은 이들 제품이 최초이지 않나 한다.

여하간에 외국 평론가나 매스컴에 한국 사운드를 알리는데 일역을 했던 것으로 기록 될 것이다.  

 
삼성전자의 앰퍼널 시스템 

이중에는 태광산업의 오너 제품과 삼성전자의 엠퍼럴 시스템은 국내에서 개발한 하이엔드시스템으로서는 최상급의 제품들로 전세계 오디오시장에 이들 회사의 이미지를 알리는데 커다란 효과를 갖게 한바있다.

 

 

국내 하이엔드 제품 세계 시장에 도전장

 
여하간에 이들 회사들이 처녀 출품한 신제품들은 전세계 유명 회사의 제품들과 당당히 디자인에서나 성능 그리고 음질 경쟁을 벌린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97년 미국 CES 동계전인 라스베가스 하이엔드 전에 출품한 태광산업이 매니어용 하이엔드 진공관 앰프를 비롯해 백 로드 설계 방식의 스피커시스템은 이 제품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태광산업이 해외 시장에 소개한 앰프와 스피커시스템들 

당시 국내 하이엔드 시스템 개발은 대기업 뿐만아니라 중소기업체들도 나름대로 참여 하이엔드 오디오시스템 개발하는데 주도적인 역활을 해왔으나 IMF 이후 극심한 타격을 입고 난 후 거의가 손을 들고 있는 상태다.

다시 말해 의욕적으로 출발 하이엔드 제품에 도전해 왔던 영세성 기업체들 대부분이 자본력의 뒷받침이 없어 결국에는 경쟁력이 문제가 되어 도산하는 업체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들 회사들이 개발한 제품 중에는 아직도 성능이 우수하게 평가받았던 제품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음향 기기 산업은 단기간에 걸쳐 완숙한 제품이 생산될 수 없는 것으로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기술 개발과 음향 튜닝등을 통해 가능한 것으로 이를 위한 자금력 약화로 결국에 가서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맞게되고 여기에 기술력의 한계까지 부딪쳐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급진적이면서 왕성한 활동성의 가능성을 갖고있는 국내 오디오 산업이 겉모양만큼 그 내용이 알차지 못한것도 문제다.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지만 우리 나라 하이엔드 시장은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참신한 기술력이나 경제적인 뒷받침 등이 없어 자생 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스피커 유닛 제조 업체를 살펴보자. 우리주변 국가에서 양산되고 있는 저가격 경쟁에 밀려 계속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서 스피커 유닛제조 업계는 계속 도산 위기를 맞고 있어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다.

스피커 관련 사업은 자동차용인 카 오디오를 비롯해 컴퓨터, 홈 시어더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가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도 스피커 제조 산업이 계속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그 동안 기술이나 연구 개발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여하간에 저 가격대의 동남아산에 밀려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고있는 실정은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과거의 안일한 기술이나 제조 방식으로는 새롭게 도전하고있는 저 가격대의 제품에 밀려나기 마련이다.

하이엔드 제품의 개발이 활발해 지려면 국내 부품산업에서도 이들 제품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고성능의 부품개발도 시급한 일이다. 결코 하이엔드로 가기 위한 국내 오디오 산업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는 일로서 이를 위한 기술 습득에 배전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특히 신소재 부품에 대한 기술 연구가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서 하이엔드 제품 개발은 절대 불가능한 일로서 지속적인 선진 제국의 높은 기술을 연구해 우리 것으로 소화해 주었을 때 가능하다.

이에 앞서 전문 기술자 양성과 숙련 기능공 확보도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데 기초기술 교육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제조회사들이 당기 이윤에만 집념하지 말고 장기적인 일환으로 기술개발에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국내 오디오 산업도 제 2의 도전이 가능해 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싶다.

엔지니어들을 주축으로 한 기술 개발과 제품 디자이너 그리고 경영자 등 삼위일체가 이루어져 제품이 만들어 놓았을 때 소비자들의 관심을 불러모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과 성실한 제품개발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의 국내 오디오 상가'

 
우리 나라에 오디오라는 문화가 꽃피운 것은 70년대 말경이지만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는 라디오와 유성기가 공전하는 시대였다. 당시의 오디오 상점은 지금의 형태와는 다른 것으로 라디오 수리 상이나 레코드 음반을 파는 곳에서만 몇 종류의 사제 전축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50년대의 오디오 상점이란 SP 음반이나 소형 라디오등을 취급하고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특히 8.15 해방과 더불어 닫아온 6.25란 엄청난 비극은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어온 다소의 전자산업 시설물 등마저 파괴,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서울 숭인동에 잇는 별표전축 대리점 모습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60년대까지 당시의 상황에서는 SP 음반이나 유성기를 판매하는 곳이 오디오 상점의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오디오 상점

 
유성기가 우리 나라에 보급된 것은 당시 일제하에 있었기에 상당히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910년 미국과 일본이 일미(日美)축음기 제조 주식회사를 설립, 니폰 혼(Nippon Horn) 상표를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 나라에 진출, 지금의 충무로 5가 쪽인 본정오정목(本町五丁目)에 상점을 차리면서였다.

1913년 9월 13일자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광고기사가 실렸다.

"2원 짜리 레코드 1장이 1원으로 가격을 내렸다"는 것과 "조선명창들이 조선 고유의 명곡을 녹음했다."라는 선전문구였다.  

 
70년대 인켈 대리점 모습 

그러나 유성기라는 기기 자체가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존재여서 유리창 안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한편 정식으로는 8.15 해방 직전 본 정통(지금의 충무로 2가)에 동경전기란 오디오 전문상점이 있었다고 원로이신 김용채 선생님이 필자에게 들려주신 일이 생각난다.

이분은 만주에서 통신기 엔지니어로 종사한 일이 있는데 당시에는 일본의 내셔널(지금의 파나소닉) 시설을 인수, 음향 기기를 조립하면서 시작되었다.

50년대 을 전후로 해 음악을 위한 프로그램 소스로는 SP 음반이 전부였는데 6.25 이후 60년대 말경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45회전용 일명 도너츠 음반이 소개되면서 전축에 관심이 많아졌다.

 

 
포터블 전축 모습 

외국에서 들어온 78회전 SP 음반은 중량 감 있게 두툼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한 것이 주로 컨트리 송 등이 선보였지만 이를 위한 유성기가 고가여서 상류층 가정에서나 사용될 정도였다.

당시의 유성기나 전축은 마치 부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군림, 가보로서 취급될 정도였다. 여하간에 SP시대의 음반이나 유성기가 요즘에 와서는 고가의 골통 품으로 등장 50년대의 위치로 다시 돌아 간 듯한 느낌이다.

 

 


60년대의 오디오 상점

 
50 대 말부터 60년대 초기까지 유성기나 전축 하면 종로나 충무로쪽의 전축상점들을 기억나게 한다. 9.28 수복 이후 수도 서울은 전시가가 거의 황폐화한 상태여서 명동 천주교와 시공관이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있을 때였다.

더구나 충무로나 명동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고 명동성당만이 여기가 충무로임을 알리는 이정표로 남아 있었다. 수복 이후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임시로 지어진 상점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라디오나 음반 등을 파는 상점들이다.

이들 가게에서는 당시 유행하는 대중 가요 곡을 SP음반과 확성장치를 이용, 길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어떤 상점은 쇼윈도우에 노래 가사까지 붙여놓고 음악에 따라 노래를 부르도록 배려한 곳도 있었다.

우리 나라의 오디오 상점을 얘기하자면 충무로와 청계천(복계되기이전) 그리고 종로 쪽을 들 수 있으며 부산은 광복동의 국제시장이 있다. 서울 충무로의 전문 오디오 상점 중 지금도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곳으로는 대연각 호텔 뒤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엔젤사라는 곳을 들 수가 있다.

 

 
60년대 충무로에 있었던 유명 오디오 상점인 엔젤사 모습 

지금의 세기전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엔젤 사에는 항시 내놓으라고 하는 많은 오디오 매니어 들의 출입이 잦은 곳으로 바로 서너집 건너서는 옆쪽에는 기쁜 소리사가 있었다. 아마도 70년대에 있어 충무로의 "기쁜 소리사" 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

특히 당시 매니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하이엔드 앰프 대부분을 이 상점에서 볼 수가 있었는데 종합가전 상점으로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까지 취급하고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특히 신세기 백화점의 전신인 동아 백화점 2층 전축부는 독일 그룬디익(Grundig)이나 텔레폰켄(Telefunken) 등을 수입, 진공관 라디오 간이식 전축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선보였다. 충무로 쪽에 등장한 오디오 상점 중에는 지금의 사보이 호텔 앞쪽에 전음사, 대연각 호텔 쪽의 음향센터 그리고 애음사 등이 있었다.

전음사를 개업한 황재복씨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한때는 '마이크 황'이란 애칭까지 갖고 있었을 정도로, 단신 월남 권투생활을 하다가 오디오와 인연을 맺은 분이셨다.

스테레오 시스템이 처음 소개될 60년대초 황씨는 자신의 상점 앞 길가에 시스템을 설치해 놓고 입체음향을 들려주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음은 물론 입체음향이 무엇인가를 알리는데 공헌을 한 분이다.

또한 일본 진공관 앰프 메이커인 산스이(山水)이와 파이오니아사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한 곳이 음향센터였는데 당시 파이오니아사의 진공관 리시버 앰프인 모델Q300이나 SM시리즈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좋은 제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음향센터를 운영하던 사장은 미군들이 PX로 사용하던 신세기 백화점에서 철수하자 백화점 개점과 동시에 점포를 차렸다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쫓겨났다는 일화도 있다. 종로 쪽은 YMCA 부근에 있었던 좋은 소리사를 들 수 있으며 전문 오디오 상점은 소규모이지만 청계천 쪽에 가장 많이 모여 있지 않았나 한다.

청계천 쪽엔 필자가 단골로 출입했던 최경복 씨가 운영하던 문화 소리사를 비롯해, 입체 음향사, 영락 소리사 등인데 이중 영락 소리사는 지금도 PA 장비 등을 취급하는 대규모의 중소기업으로 발전했다.

청계천 쪽은 아세아 극장이 세워지기 이전 그러니까 청계천 복계 공사가 있기 이전 영락 소리사를 비롯해 문화전파사, 후에는 삼덕무선등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 계속 늘어 영국의 AXION스피커를 수입해 판매하던 서울전자 등이 청계천 주변에서 개업을 시작했다.

부산하면 광복동의 국제시장이 당시에는 이름 있는 오디오 전문상점들이 하나 둘 들어섰는데 제일전파사나 트랜지스터 라디오 생산까지한 아리랑무선 그리고 창선동의 형제무선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는 유명한 오디오 전문상점들이 여러 곳에 있었으나 정확한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콘셀트'란 상표를 제작해 판매하던 곳이나 서독제 "SABA" 전축 등을 판매하던 상점들이 눈앞에서 아롱거릴 뿐 60년대 초반에 국내 오디오 상점 등을 지금에 와서 재조명해 볼 때 충분한 자료가 없어 기술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국내 오디오 시장 형성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이 형성된 것이 60년 때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청계천 복개공사가 끝나고 세운상가 나동, 그리고 아세아 상가, 대연각 호텔, 충무로 쪽에 오디오 상가 등이 들어서면서 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상점 대부분이 영세 점포들로서 거의가 미국 PX등지에서 흘러나온 변칙 물자나 밀수품 등을 취급 70% 이상이 오디오 제품은 거의 일본 제품들 이었다.

 

환상의 오디오 시스템, 4채널 시스템

 
70년 때에 오디오 산업에서 기억할 것이 4채널이라는 환상적인 음향 시스템의 등장이다. 여기서 70년 초기에 선보이기 시작한 4채널 앰프에 관한 얘기를 잠시 알아보자. 1971년부터 새로운 음향 기술제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4채널 방식은 오디오 붐을 조성하는 듯했다.

초기 4채널 시스템은 기존 앰프에 어댑터를 첨부, 사용할 수 있도록 한것과 새로 설계된 두 종류였다. 그러나 제조회사들이 제각기 다른 방식을 발표하여 혼선을 빚었기 때문에 통일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즉, 일본의 산스이(山水)사와 소니사의 SQ, 그리고 빅터(Victor)사의 CD-4가 4개의 스피커를 통하여 완전하게 4채널 음을 재생하게 만든 방식이었다.

당시 이를 처음 들어 본 사람들은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음향 기술에 반해 오디오 기기에 매료당했다. 소리의 새로운 세계, 그것은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며 바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돌비서라운드 프로로직 기능과는 다른 음향기술이지만 내부회로를 보면 당시의 기술은 상당히 진일보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대형 시네마스코프 방식의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할 때는 보통 6채널이나 8채널의 사운드로 듣게된다.

이런 첨단 음향 방식으로 가정에서 오디오시스템을 통해 음악을 들었을 때 환상적인 사운드는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가히 어떤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입체적인 사운드를 더욱 현장감 있게 듣게 해 주는데 이것은 두개의 스피커를 통하여 재생될 때보다는 4개로 분산되어 더욱 세분화된 음향이기 때문이다.

4채널 식 앰프란 요즘 AV용으로 설계된 돌비프로로직 기능의 리시버 앰프와 비슷하게 여러 개의 파워앰프를 한 섀시 안에 내장시켜 설계한 방식이다.

즉 스테레오 앰프 두 대를 프런트 (Front) 및 리어 (Rear) 앰프로 분리시켜 구성시켜 놓은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고 있는 스테레오 사운드가 2채널 식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1969년 여름, 미국의 하이파이 시장에 4채널 사운드가 등장하자, 그해 겨울 일본의 빅터사가 테이프 덱을 발표하여 4채널의 선구자적인 회사임을 자처했다.

 
4채널 방식의 녹음기 등장

 
그해 미국에서도 같은 종류의 4채널 설계 방식의 테이프 덱(Tape Deck)이 발표되었다. 이 방식은 곧 바로 특허 신청이 되었으며 1970년 6월경 산스이 사에서는 모델 QS-1을 발표했다.

그후 8월 들어 미국의 CBS 컬럼비아사가 SQ 방식을, 9월에는 일본의 빅터사가 CD-4방식이란 이름으로 여기에 동참하는 등 혼란이 일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미국과 일본은 당시 오디오의 혁명이라고 하던 4채널 방식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SQ 방식은 미국의 CBS 컬럼비어사를 비롯하여 영국의 EMI사 등 많은 레코드 회사들이 채택하였고 CD-4 방식은 일본의 빅터사와 미국의 RCA사, WB (워너브러더스)사 등이 사용했다.

4채널식도 레코드플레이어 에서보다는 테이프 레코더에 의한 재생이 중심이고 카트리지에 의한 레코드를 이용할 경우 문제점이 많았다. 4채널을 개발할 당시 이에 참여한 회사들이 방식상의 통일을 보았다면 더욱 발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방식이 통일되지 못함으로써 소비자들이 외면, 결과적으로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이에 많은 투자를 한 오디오 메이커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SQ, CD-4 등 대표적인 방식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과 판매를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이 방식도 제작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용자들 입장에서 볼 때는 음향 기기 외에도 따로 4개의 스피커가 필요해 경제적인 부담이 컸기 때문에 자연히 도외시됐다. 최근 새롭게 등장하는 서라운드 시스템도 이 4채널 방식과 비슷한 형태이다.

그러나 실제로 2채널 방식을 타임 딜레이(Time Delay) 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70년 중반까지 꾸준하게 소개된 제품을 살펴보면 1973∼74년도에 내놓은 산스이 회사의 QRX-6500과 QRX-3500, 그리고 켄우드사의 KR-8340형이 있고 파이오니아사는 모델 QX-949를 내놓았다.

또한 4채널 어댑터로 산스이사의 QS-800A와 QS-500, 그리고 파이오니아사의 QL-600A 등이 있었다. 이들 제품들은 거의가 4채널용 미터(Meter)를 설치하여 앰프의 각 채널의 동작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했는데 그렇게 성공적인 제품으로 어필하지 못했다.

4채널 앰프로 초기에 소개된 제품 중 피셔사의 모델 504는 MOS-FET 회로 방식으로 설계된 형으로 실효 출력이 채널 당 220와트였다.

 


70년대의 일본제 스피커 시스템

 
70년 초 앰프와 함께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에 소개된 일본제 스피커 시스템으로는 대부분이 북셀프(Bookshielf)형 이었다. 인기 모델로는 산스이 회사가 내놓은 SP-200이나 SP-1500 같은 제품들로서 외형 디자인이나 유닛의 성능이 비교적 우수해 음악 감상실같은 곳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인클로저 외형 디자인은 나무 무늬목으로 단단하고 중량감 있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내부 설계 또한 수준급이다. 스피커 시스템 거의가 멀티 유닛 구성방식으로 여러 개의 유닛을 사용해 줌으로써 외형상 보기에도 좋았고 중저음 대역이 풍부해 비교적 좋은 평을 얻었다.

당시 소개된 산스이사의 인기 모델로는 SP-1200 그리고 1700 등이 있었으며 원통형에 디자인을 보여준 것도 있었다. 산스이 제품과 달리 파이오니아사가 내놓은 CS 시리즈는 전면 그릴에 선이 굵은 X자형 틀의 디자인을 보여 주었는데 이 또한 상당한 인기를 얻은 것으로 기억된다.

후에 이 모델은 프리(Free)페팅이란 콘 페이퍼 구조의 진동판을 사용해 설계된 유닛을 장착, 모델 CS-99A나 CS-88A는 4웨이 6유닛 구성 방식으로 고음용인 트위터 디자인이 새로운 방식을 추구한 것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당시 동사는 이외에도 5종류의 뉴 모델을 소개, 산스이 제품과 막상막하의 경쟁을 별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앰프나 스피커 시스팀을 독특하게 설계한 방식의 제품으로는 켄우드사를 들 수 있는데 동사가 내놓은 모델 LS-990 시스팀은 3웨이 3유닛 방식의 독특한 진동판을 사용 설계된 시스템으로 화제가 되었다.

 
70년대에 등장한 하이파이용 녹음기들

 
녹음기의 역사를 언급한다면 아무래도 오픈 릴형의 제품을 들 수 있다. 특히 당시 녹음기 제조회사로 가장 이름이 많이 알려진 회사로는 일본의 AKAI사를 손꼽을 수 있는데 이 회사가 내놓은 M 시리즈는 프로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제품이다.

M시리즈는 로보츠(Roberts) 라는 상표로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기도 했는데 그중 모델 770X는 크로스 필드 헤드(Cross-Field-Head) 레코더로서 고성능의 하이파이용 녹음기이었다. 오픈 릴 녹음기와 함께 등장한 것이 8트랙 카트리지 방식의 엔드리스(Endless) 시스템이 있다. 이 제품은 협소한 공간에서 사용하기 쉽게 설계된 시스템으로 8자형 주행 방식 이어서 끝이 없다고 해 "엔드리스" 라고 부른 것이다.

이 제품이 가장 많이 사용 된 곳은 카 스테레오용으로 그리고 한때 노래방 초기에 음악반주용(일명 가라오케)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레코드 제조회사들이 음악용 8트랙 카트리지를 제조하기 위해 불법으로 유출된 가정용 카트리지 텍크를 대량으로 구입, 사용하기도 했는데 모델로는 파이오니아사의 3302와 니비코(Nivico)사의 CHR-250U 등이 있었다.

오픈 릴 녹음기를 가정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디자인이나 조작방식이 쉬워야 했는데 이에 가장 먼저 착안한 것이 일본 메이커들이다. 다시말해 간편하게 이동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된 저가형의 가정용 제품을 내놓은 것이 소니회사이다.

동사가 개발해 소개한 대표적인 모델로는 스테레오코더 200이란 제품이 있었다. 또한 슈퍼스코브(Superscope)인 모델 250A 테이프 텍크는 솔리드 스테레오 회로방식의 오픈 릴 녹음 데크로서 인기 모델이였다.

국내시장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이 AKAI 회사와 TEAC, SONY사 등이 있는데 이중 오디오 매니어 용에서는 TEAC사나 AKAI사가 단연 우세였다. SONY사의 제품으로는 모델 TC-730이 3모터 6헤드로서 품위를 자랑했고 카세트, 오픈 닐 그리고 엔드리스 카트리지 등 3종류를 같이 사용할 수 있게 한 AKAI사의 모델X-2000S의 등장이다.

 
카세트 등장과 시작된 녹음기 시대

 
70년대 오디오 시스템을 얘기하자면 국내 오디오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품이 일본제로서 녹음기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카세트 (Cassette) 출현일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필립스사의 기술 연구진에 의해 발표된 것으로 오디오 산업에 있어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그 동안 사용되어 왔던 오픈 릴 방식은 가정에서는 여러모로 사용하는데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다.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의 등장은 녹음 방식에 있어 새로운 활력소를 갖게 했다. 우리 나라 오디오 시장에 최초로 소개된 카세트 데크로는 일본 Teac사의 모델 A-20 있었다. 이 제품은 성능과 기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섯 개의 하얀색 버튼과 파란색의 녹음 버튼은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카세트 기기의 새로운 모습을 자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소개된 소니사의 모델 TC-127 제품도 TEAC의 A-20보다는 저렴한 가격으로 초기에 거래되었다.

 


점차 고급화되기 시작한 오픈 릴 녹음 데크

 
자신이 듣고 싶은 경음악이나 노래만을 녹음시켜 오랫동안 즐기는데 있어 녹음기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오디오 매니어들은 한결같이 성능이 좋은 오픈 릴 데크를 찾기 마련인데 기능이나 음질이 뛰어난 가정용 제품이 많이 소개된 해이기도 하다.

일본 아카이사의 모델 X-200D와 330D, 소니사의 TC-651 등 당시의 수준급의 제품들로서 소개되었다. 그중 아카이사의 X-200D 모델은 참신한 외형 디자인 못지 않게 고성능을 자랑했는데 오토리버스 기능인 자동 역주행 방식으로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갖추어진 제품이었다.

한편 소니사의 TC-651형은 전면 디자인이 다른 제품과 달리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다. 가벼운 터치식 버튼으로 특수한 컬러 디자인을 보여주었고 몇가지 첨단 기능이 첨부되어 있어 더욱 이 모델은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 등장한 제품이 도코더(Dokoder)사가 내놓은 녹음기가 소개되었다. 즉 원본을 복사 할 수 있는 기능으로 더빙 레코더라고 불렀다. 이 제품은 오픈 릴 테이프 네개를 사용, 복사를 할 수 있게 특별히 설계한 것이다.

 
4채널 시스템 등장과 함께 소개된 4채널용 오픈 릴 녹음기

 
4채널 방식의 오디오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자 4채널 녹음기는 완벽한 입체음향을 들려주었던 것으로 이 소리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방식에 흥미를 갖게되었으나 음반을 사용한 방식에서 그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시 말해 4채널 방식에서 음반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4채널용 레코드 플레이어는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모든 면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4채널용 녹음기로 대표적인 모델을 살펴보면 일본 AKAI사의 모델 1730D-SS와 1800D-SS, 파이오니아사의 QT-74 그리고 산스이사 SD-5050 등 수십 종류가 있었다.

 
70년 중반의 일본의 명품들

 
아직도 중고 오디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70년 중반에 소개된 제품 중 비교적 잘 만들어져 호평을 받은 것은 여러 종류가 있다. 이중 앰프로는 일본의 마란츠사의 2245 리시버와 2270등이 있었는데 이 모델들은 일본보다는 미국적인 냄새가 물신 풍기는 형이다.

당시 산스이사가 내놓은 것은 모델 8과 7000 이 있었고 200X가 소개된 것도 이때였다. 또한 5000A를 개량한 5000X가 200X를 뒤를 이여 신 모델로 등장 일본 앰프의 춘추전국 시대를 이루기 시작한다.

그리고 Kenwood사는 점보형 앰프 KR-6170을 내놓았는데 음악반주 기능을 탑재, 일반업소에서 사용 좋은 반응을 얻어낸바 있다. 이 모델은 글자 그대로 점보형의 디자인을 자랑했는데 매우 매력적인 제품 이였고 외형 디자인이 아주 좋았던 모델이다.

그런데 이 제품에 앞서 소개된 것 중에는 솔리드 스테이트 회로 방식에 튜너 KT-3000 과 인티그레이트형의 KA-2600이 아주 잘 만들어진 제품이 있었다. 동사가 소개한 리시버형으로는 KR 시리즈가 있는데 이중 KR-3130도 인기 모델이였다.

또한 소니사는 인티그레이티드형 TA-1120F은 Kenwood사의 KA6000과 함께 인기 있었던 제품이었는데 그후 이 회사가 내놓은 리시버형 KR7070과 함께 음질이나 성능면에서 돋보여 "Kenwood" 란 이름이 국내 시장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소개된 회로상의 문제로 말썽이 많던 일본 산스이사의 리시버 앰프 3000A가 등장한 것도 이때쯤. 이 제품은 월남전쟁이 한참일 때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에 보급, 잘못 사용한 분들이 출력부는 물론 스피커 시스템을 망가트리는 일까지 생겼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켄우드는 200W 리시버형 KR-6200을 소개했는데 이 모델은 최고의 인기를 얻었든 것으로 기억되며 특히 모델 AR 2ax 스피커시스템과 함께 많이 사용된 형이다.

이 회사는 이후에도 여러 종류의 인기모델인 리시버형을 소개 마치 Kenwood 전성 시대를 맞이할 정도로 가정용 오디오시스템에서 실력을 발휘해 줄 수 있는 제품들을 개발 계속 출시하고 있었다.

또한 파이오니아사 에서는 앰프 모델 SX-9000을, 켄우드사는 KR-6160을 선보였다. SX-9000은 에코 장치를 탑재한 모델이었고 Kenwood 모델 6160은 마이크를 사용할 수 있도록 PA기능도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디자인은 기존 앰프와는 다른 멋을 지니도록 한 것 이여서 당시로서는 매력적인 다기능 제품으로 인기가 있었다.

스피커는 산수이사에서 개발한 모델 SX-3000 시리즈가 많이 소개되었으며 영국의 굿맨(GOODMAN)사에서 내놓은 모델 AXIOM 브랜드 유닛인 201, 1220C, 80등이 국내 시장에 수입되어 스피커 품귀 현상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도 했다.

리시버형으로는 파이오니아사가 내놓은 모델 SX-939와 838이 있는데 이 제품들은 MOS- FET 회로를 채택한 설계된 시스템들로 각각 채널 당 70와트와 50와트의 출력을 자랑, 비교적 보급이 많이 되었던 제품들이 아닌가 한다.

산수이 회사의 모델 881과 771은 종래의 전면 디자인을 완전히 바꾼 새로운 형태의 모델들이 등장, 일본제품을 구입해 사용하던 사람들이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형으로 둔갑, 제품 선택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생기게 되었다.

 
아날로그 레코드플레이어

 
70년대를 더듬어 볼 때 파이오니아사의 PL-40 이란 레코드플레이어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제품은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에 AR사의 수동식과 함께 가장 많이 보급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묵직한 나무 베이스는 안정성도 있어 레코드플레이어로는 좋은 반응을 얻었든 모델이다. 이 제품과 함께 소개 것 중 산스사에 SR-4050C도 인기모델이었다.

듀얼사의 제품에 인기를 빼앗겼던 Garrard사는 제로 트래킹 이라는 새로운 스타일로 만든 레코드 플레이어를 내놓았다. 처음 이 제품을 볼 때는 전혀 다른 형의 톤암 이 설치되어 있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모델 이름도 제로 100(Zero 100) 이었다. 이것은 레코드의 소리 골을 따라 톤암이 주행할 때 항시 트래킹 각이 정확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 제품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으나 후에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아직도 이 기술은 아날로그 레코드 플레이어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70년대 국내에 등장한 오디오 명품들

 
우리 나라 오디오 시장이 형성된 70년대 무대는 서울의 충무로 입구 즉, 대연 각 호텔 뒤쪽 주변과 청계천 아세아 극장 상가이다. 이들 상점에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는 제품들은 거의가 중고품들로서 미국 PX로부터 유출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외국에 거주하다 귀국한 사람들이 반입한 것도 있었으나 그것은 극소수, 60년 서독에 파견된 광부들이 귀국하면서 유럽 쪽의 제품이 소개되었는가 하면 월남전쟁 와중에는 일본 제품들이 국내에 유입돼 판매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중동 건설 붐이 한참일 때도 다수의 일본 제품들이 80년 이후까지 계속 반입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 오디오 시장에 자주 소개되었던 제품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60년 중반과 70년 사이의 제품들

 
천일사의 별표 전축이 유일한 국내 오디오 제품으로 명성을 누렸던 시절. 충무로나 세운상가 전축 가게(당시 오디오 상점)는 PX 유출품으로 인기를 끌었던 영국의 가라드(Garrard) 레코드 플레이어를 비롯, AR과 KLH, EV (일렉트로 보이스), JBL 등의 회사 스피커 시스템이 진열장을 장식했다.

앰프로는 피셔(The Fisher), 셔우드(Sheerwood), H.H. 스카트, 다이나코(Dynaco) 등이고 매킨토시 (Mclntosch)나 마란츠(Marantz)처럼 고급형은 어쩌다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60년 중반 정식으로 수입되어 판매된 제품 중 서독의 그룬딕(Grundig)과 일본의 파이어니아사와 내셔날 제품이 있었다. 서독의 그룬딕 제품은 라디오에 레코드 플레이어를 올려놓은 형태의 것이었는데 일본의 내셔날 회사 제품은 비슷한 것이나 긴다리가 달린 일종의 콘설형이였다.

그러나 파이어니아사 (Pioneer)의 제품은 리시버 형태로 설계된 단품 앰프로서 외형 디자인이 아름답게 꾸며져 관심을 끌었다. 이 회사가 소개한 SM 시리즈로는 SM-B200과 Q300 모델이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제품을 구입했을 때의 흥분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특히 미국 알텍(Altec)의 스피커 604 시리즈와 영국 태노이(Tannoy)사의 오토그래피 유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정도였으니... 60년대 중반 하얀색의 레코드 플레이어인 가라드사의 Type A형과 AR사의 완전수동식 제품은 국내에 가장 많이 보급된 제품들이였다.

전후 아이들러 방식을 고수하여 여러가지의 제품을 만들어 온 가라드사는 최초로 다극(多極) 모터로서 속도 연속 가변형인 센터 드라이브 방식의 우수한 제품 '201'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LP초기까지 약간 개량되어 사용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명기로 전해지고 있는 301형은 195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BBC등에 방송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프로용의 턴테이블이다. 이는 인덕션형의 모터로서 아이들러 방식이며 중량은 3Kg, 오늘날에 와서도 좋게 평가되고 있어 명작품으로 남아있다. 그후에 만들어진 401은 301이 알루미늄 주물로 만들어진 회전판 때문에 의해 모터 하울링이 발생하는 점을 개량하여 철재로 회전판을 개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도 80년 초기 일본제품과의 경쟁에 견디다 못해 브라질의 '그라디엔터' 라는 전자 메이커로 경영권이 넘어가 이제는 그 명성도 전설처럼 되어 버렸다.

한때 일주일에 50만대의 레코드 플레이어를 생산, 세계 정상급의 위치를 굳힌적도 있지만 당시 1백만불의 경영상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손을 들고 말았다. 이 회사가 내놓은 제품 중 보급형은 70 MKⅡ와 SL시리즈들이 있는데 레코드 플레이어하면 가라드를 연상했을 정도였다.

이후 서독의 듀얼 (Dual)사의 제품이 소개되면서 가라드 시대로 부터 새로운 듀얼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회사가 내놓은 제품은 모델 1019에 이어 1015F, 1219등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인 바 있는데 림드라이브 방식으로 정교한 메카니즘을 자랑했다.

가라드나 듀얼사의 제품보다 모든면에서 한수 위라고 할 수있었던 제품은 서독의 엘락(Elac) 그리고 P.E.사의 제품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제품은 가라드나 듀얼사의 유명세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벤자민 미라코드(Benjamin Miracord)로 ELAC 모델 PW 50H는 지금에 와서 봐도 잘 만들어진 제품이다.

고급형의 제품들로는 카트리지로 유명한 엠파이어(Empire) 사가 내놓은 모델 389G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제품은 80년말까지 모델 598까지 시리즈로 소개한 바 있다. 금색의 찬란한 컬러 디자인으로 부터 미국적인 우아함을 보여준 벨트 드라이브 방식의 레코드 플레이어였다.

이와 대조적인 제품으로는 REK. O. KUT사의 B-12H를 손꼽을 수 있다. 이 모델은 프로용으로 3스피드 컨트롤 시스템. 토렌스(Thorens)사의 명기인 TD-124와 같은 수준급의 제품도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와서도 오직 아날로그 제품만을 고수하고 있는 토렌스사가 내놓은 제품 중 1962년에 발표한 TD-224는 자동 플레이어로서 설계된 형. 예비 음반을 올려놓도록 된 액세서리가 부착되어 있는데 TD-124 모델을 변경해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레코드 플레이어를 위한 톤암을 전문적으로 생산해온 회사로서는 SME사를 비롯해 슈어(Shure), 엠파이어, 그리고 REK-O-KUT사 등이었다. 그중 SME사가 내놓은 3009와 3012는 명품으로 알려진 바있다.

이 톤암은 미국의 카트리지 명문인 슈어사가 자사의 이름을 붙여 미화 100달라 50센트에 판매했다. 그러나 엠파이어 980G 12″톤암은 29달라 95센트, REK-O-KUT사의 12″모델 S-320은 34달라 95센트였던 것을 보면 SME 톤암이 당시에도 고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레코드 플레이어들을 위한 카트리지로는 슈어(Shure), 엠파이어(Empire), 피커링 (Pickring)사의 제품들인데 슈어사의 M3D와 엠파이어의 880시리즈는 무빙 마그네트형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너무나도 많이 알려졌었다.

 
앰프 다운 앰프 피셔(The Fisher)

 
60년 중반 오디오 시스템에 심취된 분들이 기억하리라 생각되는 제품 중 피셔사의 앰프를 들 수 있다. 1937년 음악애호가인 에보리 피셔(Avery Fisher)에 의해 'Fisher Radio'라는 간판을 걸고 뉴욕 롱 아일랜드 시티 1에 공장을 세우면서 출발했다.

이 회사가 최초로 개발한 제품은 빔관을 사용한 파워앰프와 밀폐형 스피커 그리고 카트리지. 이 회사가 소개한 진공관형 모델 중 X-100이나 X-202B 등은 정말로 잘 만들어진 인티그레이티드형들로 외형 디자인은 물론 내부회로 설계, 재생음질 또한 좋았던 제품이다.

실효출력 80W의 X-202B는 12개 진공관의 빨간 불빛과 함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케 한다. 독특한 스위치의 촉감 그리고 품위를 갖게한 듬직한 패널등은 확실히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당시 소개된 북셀프형의 스피커 시스템인 KLH이나 AR 회사 제품과 너무나도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웠던 것이다. 특히 AR사가 소개한 스피커 시스템 모델 2ax나 4x는 국내 오디오 시장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었던 모델들이다.

56W 실효출력의 X-101B 앰프는 36W의 X-100의 후속 모델로서 1964년 신형 제품으로 소개된 X-101C와는 전혀 다른 디자인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자했던 피셔 제품이 트랜지스터 시대에 와서 리시버형인 턴 오 매틱 (Tune O Matic) 기능을 탑재한 시스템을 하이라이토로 사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진공관 리시버 앰프로서 최후를 장식한 모델 800-C는 출력관 7591를 사용한 명기로서 아직도 매니어들이 사용하고 있다.

60년대 진공관 앰프 제조회사로서 알려진 하만가든사의 설립자 시드니 하만 박사는 1963년에 제작한 사이테이션 2 파워앰프를 시작으로 현재는 다국적 기업인 하만 인터내셔날사의 회장에 재직 중이다.

이 그룹내에는 JBL, 인피니티 등 전세계 유명 오디오 회사 대다수가 속해 있을 정도로 대가(大家)를 이루고 있다. 1960년 초기 헤성처럼 등장한 하드레 (Hadley) 라는 앰프 회사를 기억하는 분들은 별로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회사가 내놓은 프리앰프 모델 621은 마치 마란츠 모델 7을 연상하게 되는데 트랜지스터 시대로 이어지는 1963년에 내놓은 제품이였다. 당시 진공관 회로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엔지니어 중 토슨 하드레는 솔리드 스테이트 (Solid State) 회로에 매료당해 이 방식을 사용한 앰프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앰프 제조회사로서 유명한 매킨토시나 마란츠사도 감히 솔리드 스테이트 방식 사용을 엄두도 못내는 것을 보면 이 모델은 매우 성공적이였다는 평을 들었다.

마란츠사가 1967년경에 와서야 모델 7T 프리앰프를 내놓았는데 이 제품이 최초로 트랜지스터 회로로 제작된 제품이다. 여기서 잠시 AR 회사에 관해 살펴보자.

1954년 음악을 좋아하고 오디오 기기 설계등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Edgar M. Villchur이라는 엔지니어에 의해 설립된 회사가 AR (Acoustic Research) 이다. 제 2 차 세계댄전 중 항공대에 5년간 근무하면서 전자기술을 연구, 밀폐방식인 어쿠스틱 서스패션 (Acoustic Suspension) 스피커를 발명했다. 그때만 해도 모든 스피커 시스템은 대형의 구조를 취한 것이 일반적이였는데 밀폐방식이 개발되면서 소형으로 제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가정용의 소형제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 책꽂이형 스피커인 북셀프(Book-Shelf)가 탄생된 것이다. 당시 AR사는 유명 아티스트들을 자사의 팜플렛에 넣어 선전했다.

그중 베를린 필하모닉의 불멸의 지휘자인 고(故)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뉴욕에서 기거할 때 'AR3a'란 스피커 시스템을 사용한 사진을 실어 오디오 매니어들 사이에서 AR 제품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회사 제품 중 스피커로서 'AR4X' 그리고 'AR2AX'는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명기로서 기억될 것이다. 미국의 이스트 코스트 사운드의 대표적 회사였던 AR사가 역시 몇 차례나 다른 경영자의 손에 넘어간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러나 장인들이 남긴 뛰어난 제작 기술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며 거이에 담겨진 소리는 게속 살아서 숨쉬고 있다. 여하간에 완전 밀폐방식인 소형 스피커 시스템은 AR사의 에드가 M. 빌츄쳐에 의해 개발, 스피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그가 개발해 주목을 받은 것중 1958년 발표한 돔형 트위터도 있으며 4년후에 내놓은 3 포인트 서스펜드 서브샤스 (3-Points Suspended Subchassis) 유닛으로 제작한 AR 레코드 플레이어는 너무나도 유명했다.

AR사는 이후에도 리시버형 앰프와 인티그레이티드형 앰프 2종류를 소개했다. 1964년 등장한 일렉트로 보이스사의 EV-TWO란 북셀프형 스피커 시스템도 2웨이 방식으로 음질면에서 주목을 받은 모델이다.

당시 EV사가 내놓은 스피커 시스템 중 마퀴스(Maquis)나 아리스토크리트 (Aristocrat)는 콘셀형으로 소개되었다. 앰프 제조회사로서 H. H.스코트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관련이 깊은 스코드 (SCOTT)사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허먼 H. 스코트 (Hermon H. Scott)가 1947년에 세운 H. H. Scott 사는 첫해에 진공관 인티그레이티드형 앰프를 소개, 음향사업에 착수했다. 1961년에 FM 멀티프렉스 스테레오 튜너를 개발, FCC의 승인을 받은 아답터를 소개한 바 있었다.

1964년경에는 최초로 트랜지스터 회로인 FET(Field Effect Transistors)방식을 FM 회로에 채택했고 이어서 이 회로 방식의 인티그레이티드형 앰프도 내놓았다.

당시 이 회사가 내놓은 여러 종류의 앰프들은 상당히 고급스런 디자인과 안정성 있는 음질 등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70년 이후 일본제품과의 가격 경쟁에서 실패한 후 점차 경영이 어렵게 된 회사 중의 하나였다.

동사는 겨우 OEM 방식으로 80년까지 우리 나라 인켈, 삼성전자 등에서 제품을 제작해, 미국지역에서 판매했다. 동사가 전성기 시대에 개발 소개한 제품으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은 제품으로 트랜지스터 설계 방식의 90와트의 모델 344C와 65와트의 리시버형 모델 382B등은 상당한 인기있는 제품이었다.

또한 120와트의 모델 260B는 실리콘 트랜지스터 솔리드 스테이트 회로방식의 인티그레이티드형 앰프. 동사는 이외에도 몇 종류의 키트 제품을 내놓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는데 요즘 중고 오디오 시장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

 
녹음기의 대부 암펙스(Ampex)사

 
아마 요즘 젊은 세대 중에서는 미국의 암펙스(Ampex)녹음기를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으리라 본다. 1960년경 우리 나라에 소개된 미국의 암펙스 녹음기는 오픈 릴형으로 아마츄어용과 프로용이 있었다.

프로용은 음악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레코드 스튜디오와 방송국 등인데 약 50% 정도가 당시 이 회사 제품을 사용했을 정도이다. 녹음기하면 암펙스를 연상하는 것은 일본제품이 등장한 얼마까지만 해도 성능이 우수해 신뢰성 있는 제품으로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프로용으로는 AG-440B와 아마츄어용에서는 1100 시리즈가 있었다. 진공관 증폭회로를 사용한 제품이었으나 내부설계가 튼튼하게 되어 있음은 물론 메카니즘이 좋아 녹음 및 재생이 아주 훌륭했던 것이다.

또한 노르웨이 회사로서 탠드버그(Tandberg)사도 여러 종류를 선보였는데 모델 64가 가장 인기있는 형이었다. 이후 소개된 74B란 모델은 비교적 심플한 디자인을 보여준 형으로 회전 작동 모터가 사용 중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생겨 문제가 되었다.

암펙스사 제품 중 모델 850은 3스피드 조정 방식의 메카니즘을 채용한 신모델로 소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공관 시대의 다이나코 (Dynaco)

 
1980 년 말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데이비드 하플러라는 엔지니어에 의해 설립된 다이나코사는 스테레오 초기부터 두각을 보인 제품을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 이 회사가 소개한 모델 스테레오 70A는 출력관 EL-34 4개를 사용한 파워앰프로서 채널 당 35와트의 실효출력을 갖게 설계된 제품.

외형보다는 내부회로와 성능이 우수해 좋은 반응을 보였던 모델로 울트라 리니어 회로 방식이었다. 다이나코사가 당시에 판매한 모델들을 보면 파워앰프 35A, 프리앰프 SCA-35A 그리고 PAS-3X 등이 있다.

FM 튜너로는 FM-1과 FM-3가 있었으며 모든 제품은 회사에서 조립, 반드시 'A'자를 붙였고 키트(조립식) 판매 제품에는 'A'자 없이 판매했다. 다이나코사는 북셀프형의 스피커 시스템으로 2 웨이 방식의 A-25 모델도 소개한 바 있다.

스피커 제조회사로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 영국의 와피데일(Wharfedale)사의 스피커 시스템이 소개된 것도 이때쯤. 보기에도 훌륭한 콘설 마루형인 W90 MK Ⅱ를 비롯 W70 MK Ⅱ등 이였는데 인클로저 사이에 진동 방지용인 모래를 넣어 제작, 수 공업식 스피커 시스템임을 자랑했다.

W90 MK Ⅱ 모델은 저음대역을 위해 12½″와 중음용에는 5½″ 그리고 고음용은 3″구경의 것을 사용, 설계된 제품 이였다. 지금은 그 이름이 이미 퇴색해 버렸지만 미국의 앰프회사로서 보켄(Bogen)하면 상당한 위치의 회사였다.

동사가 내놓은 RP-60은 실효출력 60와트의 모델인데 성능이 좋아 여러 사람들이 이 제품을 구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독특한 구조의 제품들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에 가장 많은 유닛을 소개한 바 있는 영국의 굿맨(Goodman)사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AXIOM'이란 스피커 유닛이다.

그러나 이 회사가 소개한 굿맨 오디오스트 시스템은 인티그레이티드형 앰프와 튜너, 레코드 플레이어 그리고 소형 스피커 시스템으로 구성된 미니형. 앰프의 출력은 채널당 12W의 트랜지스터 회로 구성이었고 레코드플레이어 M.T. 1000은 토렌스 제품.

TD-150A 모델로 생산되었던 이 제품은 슈어사의 카트리지 M-75-MB를 부착시켜 주었고 북셀프형의 '맥심' 스피커 시스템은 2웨이 방식의 초미니 형이다. 그러나 시스템 선택에 따라 12″유닛으로 설계한 'MEZZO' 또는 3웨이 방식의 'MAGNUM-K' 제품을 구입해 줄 수도 있었다.

60년대 필자를 흥분시킨 리시버형 앰프 중 미국의 KNIGHT사가 내놓은 KU-45A란 제품은 아직도 옛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1964년도에 판매된 이 리시버 진공관형 앰프는 외형 디자인도 돋보였지만 내부회로와 음질이 아주 좋아 부하(負荷)를 걸어주지 않은체 전원을 넣고 이불속에서 그만 잠들어 출력부를 고장나게 한 일이 있었다.

현재 주식회사 인켈이 외국상표로 사용하고 있는 셔우드(Sherwood) 제품도 60년대 미국시장을
주름잡았던 명문 제품이었다. 특히 이 회사의 제품은 다른 회사와 달리 슬림라인 형태로 설계, 진공관이나 트랜스 또는 콘덴서 등을 옆으로 누인 상태로 디자인되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깜찍한 회로 설계에 감탄케 했다.

높이가 10Cm 정도였으며 당시로서는 놀랄만도 했다.

하얀색의 전면 패널에는 3색의 컬러등이 부착, 더욱 운치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회사가 내놓은 모델로는 S-7700, S-7800 등이 있고 후에 소개된 S-8800은 160W의 실효출력에 제품이였다.

미국의 마란츠 회사가 리시버형으로 1967년에 소개한 진공관식인 모델 18은 이 회사가 마지막으로 스케치한 제품이 아닌가 한다. 이 모델은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에서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마란츠 명성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것 같지만 오리지날 솜씨를 구석구석에서 찾게된다.

 
스피커시스템보다 유닛이 돋보여

 
60년대 오디오 시장은 스피커 시스템 못지않게 성능이 우수한 스피커 유닛 소개가 활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태노이사의 리드 모니터라든가 알텍사의
604 시리즈 그리고 JBL사의 12″ 저음용 유닛 D131, D123과 075란 고음용 트위터를 들 수 있다.

또한 영국의 굿맨(Goodman)사의 AXION 100, 80, 201, 301 등이 있으며 유타 (Utah) 그리고 젠센사의 G-610 시리즈를 비롯, SG-222, SG-220 등이 유명했다.

이처럼 이들 유닛이 인기 있었던 것은 자작 (自作) 파를 위한 것으로 고급형의 유닛은 거의가 인클로저없이 판매되었다. 60년 중반 유닛 판매가격을 보면 미화 100불부터 250불로 비교적 고가였는데 중급형의 것은 20불에서 80불 정도의 것도 많았다.

그중 유니벌시티 사운드(University Sound)사의 3웨이 동축형 315C는 미화 150 달라 30센트, 젠센(Jensen) 사의 G-610B는 미화 258 달라 12센트였고 알텍(Altec)의 604E 모델은 179 달라 10센트.

 
60년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트랜지스터 앰프

 
진공관 시대에 있어 수많은 명기들이 그 위력을 떨치기 전 등장한 트랜지스터형 앰프들은 또 한차례의 폭동을 몰고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공관의 아름다운 선율을 완벽하게 터득하기 전 반영국적인 제품이라고 떠들썩하게 선전하며 등장한 트랜지스터란 소자에 눈을 돌리고 만다.

실제로 19세기 초에 등장한 진공관은 반세기가 넘도록 전자산업을 지배해 왔으며 특히 음향기기에 있어서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해 온 것이다. 그런차에 등장한 반영구적이고 간편한 회로설계에 이상적인 트랜지스터 소자는 과히 혁명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방열처리는 물론 대량 생산 가능성과 특성치에 있어서 거의 완벽한 성능을 갖추고 있다는 학계의 보고는 적어도 음향산업에 새로운 활력소를 갖게했다.

 
전세계 오디오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본제품

 
70년을 맞이하기 일년전 트랜지스터형 앰프가 양산체재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일본 오디오 제품이 서서히 그 위력을 들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의 오디오 산업은 60년대부터 기초를 닦아왔으며 전세계 시장을 향한 저가격대의 시스템 개발을 추진해온 바 있다.

그중 파이어니아사와 켄우드(Kenwood)사의 전신인 트리오(Trio) 그리고 마란츠사를 인수한 스탠다드(Standard) 그리고 JVC, LUX, 온쿄 등이였다. 트랜스를 전문적으로 제작 판매하던 山水사도 명작이란 칭송을 받았던 1000A 진공관 리시버형을 내놓아 화제가 되었는데 월남전쟁 중 국내에 많이 소개된 모델.

출력관 7591 4개를 사용,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모델로 실효출력 100W를 자랑했다. 여하간에 70년대를 향한 일본 오디오 제품들이 단기간내에 전세계 오디오 시장을 장악,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출처 : 오가닉 스마일
글쓴이 : 얼음천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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