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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성 A501

mistyblue 2013. 5. 8. 00:04
[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6)태동기-전자산업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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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부산시 연지동 341번지 대지 1964평에 걸립된 금성사 연지공장.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전후 폐허가 된 국토 위에 전자산업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 전자제품 생산업체 금성사가 설립된 것. 금성사는 창사 1년 만에 국산 라디오를 내놓으면서 한국 전자산업사의 첫 장을 열었다.

 ◇“우리가 한번 해보는기라”=1958년 10월 1일 구인회 사장(당시 락희화학 대표)은 금성사를 설립, 국내 전자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금성사 설립은 구인회 사장의 도전정신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했다. 당시만 해도 전자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고 전자제품이라고 해야 외제 라디오와 소수의 미제TV 정도가 전부였다. 방송 환경도 열악했다. 구인회 사장이 운영하던 락희화학은 당시 국내 플라스틱 공업의 70%를 차지할 만큼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때 그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마음을 먹었다. 열악한 전자산업을 돌아보면서 오히려 발전 가능성을 내다봤다. 구 사장은 1957년 구체적으로 전자공업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자공업에 대한 진출 결정이 곧바로 사업 착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미개척 분야인 만큼 위험부담이 컸고 그만큼 찬반 의견도 분분했다. 구인회 사장은 1년 정도의 다각적 검토 끝에 1958년 봄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한국 전자공업의 신호탄이자 국민의 생활 혁명을 몰고 올 역사적 순간이었다.

 ◇금빛 왕관의 탄생=제품 개발은 라디오로부터 시작됐다. 1958년 4월 구인회 사장은 윤욱현 부장이 입안한 전기기기 생산 공장 건립안을 채택하고 라디오 생산을 위한 기본 사업계획서 작성에 착수했다. 이어 9월에는 생산 시설을 비롯해 연차 생산 품목, 생산량, 기술요원 확보 대책 등을 골자로 하는 기본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공장은 부산시 연지동 341번지, 대지 1964평에 건평 767평 규모의 이 공장은 금성합성수지공업사가 락희화학 공장 맞은편에 신축해 사용하고 있었다. 또 생산 시설 도입을 위해 1차로 8만5195달러의 예산을 책정하고 서독인 기술자 헨케(H W Henke)와 2년 계약을 체결, 전기기기 설계와 제작 책임을 맡겼다.

 구 사장은 본격적으로 전자공업의 큰 꿈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이듬해인 1959년 2월 17일 개인업체였던 금성사를 법인체로 전환했다. ‘주식회사 금성사’로 재발족하면서 제2의 창업을 맞은 금성사는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A-501, 대한민국 전자산업 서막을 열다=금성사는 설립 이후 기술 인력과 생산 시설을 확충, 1959년 6월 라디오 모델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공채 1기생인 김해수 주임이 설계를 맡았으며 부품 생산도 동시에 진행됐다. 과정은 험난했다. 우선 부품을 자체 생산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라디오 부품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던 당시 사정에 비춰볼 때 자체 제작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금성사 기술진은 스위치·섀시·노브·트랜스 등을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 부품 국산화율을 60%까지 높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기술 감독으로 초빙한 헨케와 금성사 기술진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잦았던 것. 헨케는 얼마 안 돼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1959년 금성사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라디오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전자산업과 매스커뮤니케이션 발달의 서막을 연 기록적인 사건이었다.

 모델명 A-501은 AC, 즉 전기용 진공관 5구 라디오 제1호라는 뜻. 정격전압은 100V로 돼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50V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50V로도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모양 또한 외제 라디오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케이스는 다섯 가지 색상. 소비자가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었다. 중파·단파 겸용에 2접점 3회로 로터리 스위치를 달았고 이어폰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가격은 2만환 정도. 비슷한 성능의 외제 라디오 3만3000환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다.

◇국산 라디오 개발 주역 김해수 기술주임

 최초의 국산 라디오 설계와 생산을 책임진 것은 김해수 기술주임이었다. 헨케와의 갈등 속에서도 부품 국산화 등을 주도해 국내 전자산업의 서막을 열었다.

 김 주임은 1923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고공 졸업 후 강원도 광산에서 전기 책임자로 일했다. 1945년 가을 하동에서 ‘창전사’를 개업하고 이후 부산에서 ‘화평전업사’와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 등을 운영하기도 했다.

 1958년에 공채시험을 통해 금성사에 입사했다. 락희화학공업사가 낸 ‘고급 기술 간부 모집’ 광고를 보고 시험에 응한 그는 1등으로 합격한다. 라디오를 개발 작업에서 주파수 채택, 수신방식 결정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독인 기술자 헨케와 부딪히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아 구인회 사장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금성사의 TV와 콘덴서·전자교환기 등 신제품 개발을 주도했으며 1960∼1970년대에 성장가도에 오른 한국 전자산업사의 중대한 고비마다 엔지니어 김해수의 발자취가 새겨졌다.

 1987년 일본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신기상역을 개업, 말년까지 전자산업의 현역으로 일했다. 2005년 8월에 83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디자인 담당 박용귀

 최초 국산 라디오의 디자인을 담당했던 것은 락희화학에 근무하던 박용귀였다. 박용귀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58년 ‘락희화학’에 채용돼 근무하다가 1959년 2월 금성사가 창립하고 6월에 의장실이 만들어지면서 제품 디자이너로 첫발을 디딘 후 약 20년간 금성사에 재직하면서 가전제품의 모든 디자인을 책임졌다.

 A-501 라디오를 디자인한 것을 비롯, 1958년 도안실로 출발한 디자인 부서를 1년 만에 공업의장실로 발전시켰다. 1967년 일본의 히타치 의장연구소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은 후 다시 금성사의 디자인 혁신에 나섰다. 부서 명칭을 디자인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이후 디자인연구소로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퇴사 후 그의 이름 이니셜을 딴 ‘YK디자인’을 설립, 충무로에서 전문 제품 디자인 사무실을 1년 동안 운영했으며 그 후 김희덕 한국디자인포장센터(KDPC) 이사장의 권유로 1년간 KDPC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진공관라디오 A-501의 의미

국내 최초 라디오 A-501 등장은 한국 전자산업의 서막을 연 역사적 사건인 만큼 무수한 뒷이야기를 남겼다. 처음으로 제품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적용된 사례라는 점이 눈길을 끄는가 하면 최근에는 최초 출하분 중 한 대가 1500만원의 가치가 있다는 감정을 받기도 했다.

◇전자제품에 디자인 개념 도입=A-501은 전자제품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한 국내 첫 사례. 공산품 등의 제작에 제대로 된 디자인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당시 금성사는 1958년 도안실을 설치, 전문 제품 디자이너를 채용했다.

디자인은 당시 서울대 미대 회화과 졸업반이었던 박용귀와 또 다른 디자이너인 최병태가 진행했다. 이 두 사람은 공채로 입사해 이후 약 15년간 금성사에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초창기 가전제품 디자인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1958년 도안실로 출발한 디자인 부서는 1년만에 공업의장실로 격상됐다. 이후 디자인실로 변모, 전문성을 배가했고 디자인연구소로 발전됐다. 첫 라디오에는 금성사의 상징인 왕관모양의 마크와 ‘골드스타(GoldStar)’라는 로고도 함께 등장했다. 왕관마크는 별(금성)을 연상토록 한 것이고 골드스타는 한자 ‘금성()’을 풀어 영문표기한 것이었다. 이 마크와 로고는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판매3과장으로 재직 중 금성사 라디오 판매부서로 자리를 옮긴 이헌조의 작품이었다.

◇출시 그 후=출시 당시 한국 전자산업 태동의 감격을 부산의 국제신보(국제신문의 전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드디어 쇼윈도에 나타나게 된다. 그동안 라디오 생산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갖추어 오던 금성사는 마침내 다량 생산 단계에 들어갔으며, 오는 11월 15일부터 전국 상점에 일제히 공급하게 되었다. 약 300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현대적 시설로 한달에 3000대를 만들 수 있는데 우선 처음 나올 제품은 세 가지 종류이며 제일 먼저 나올 것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골드스타 A-501이다...’<국제신보 1959년 11월 4일자>

첫 출하된 A-501 라디오는 총 40대였다. 그 중 18대가 판매됐다.

◇최초 라디오 가치는=1960년대 라디오 보급이 진행되면서 ‘금성 라디오’는 국민제품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첫 출하된 제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대에 불과해 그 평가금액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작년 5월 20일 방영된 KBS 감정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는 그 중 한 대의 소장자가 출연해 1500만원의 감정가를 받은 바 있다.

국산 라디오 개발의 주역인 김해수 당시 기술주임의 딸 김진주 씨는 지난해 펴낸 책 ‘아버지의 라디오’에서 남아 있는 국산 라디오 1호의 가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버지의 원고를 정리하는 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라디오’를 찾아나섰다. 아버지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국산 라디오 1호. 그런데 1959년에 생산한 그 라디오의 진품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사방에 수소문해보니 현재 남아 있는 진품은 전국을 통틀어 서너대뿐이고 수 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반열에 들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중략> 제조사인 LG 그룹에서조차 모조품을 전시해 놓고 있는 형편인 것을 보면 우리 아버지의 시대가 얼마나 바쁘게 앞길만 응시하며 달려왔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중략> ”<아버지의 라디오>(김해수 지음, 김진주 엮음)

◆최초 국내 개발 라디오 A-501의 규격

방식: 2밴드, 5구 슈퍼 헤테로다인

주파수 범위: MW 535-1605KC/SW 45-16.5MC

중간 주파수: 445KC

출력: 무왜 1.5W/최대 2W

전원: AC 100V

스피커: 5인치

크기: 178(H)×429(W)×163(D)㎜

황지혜기자@전자신문, gotit@etnews.co.kr

출처 : 디자인과 현대사회
글쓴이 : 김종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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