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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쟁과 자동차 - 전쟁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 거듭된 발전

mistyblue 2013. 6. 15. 20:19

전쟁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서도 자동차는 발전해 왔다. 오히려 지금의 글로벌 업체들은 군수물자를 납품하며 사세를 키웠고 첨단기술의 개발과 경쟁으로 시장에서 인정을 받는 계기로 삼았다. 큰 틀에서 이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부활하며 국가 경제의 주축 역할을 해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우토반(Autobahn)은 자동차의 고향으로 불리며 독일 자동차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자동차(Auto)와 길(Bahn)의 합성어로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뜻이다. 아우토반은 1933년 1월 총리가 된 아돌프 히틀러가 실업자 구제와 병력·물자 수송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건설했다. 실업자 수십만 명이 공사에 투입되면서 히틀러 집권기간에만 무려 4,000㎞(현재 총연장은 1만 5,000㎞)가 건설됐다. 당시 아우토반을 통행하는 모든 차들은 무료로 이용했다. 아우토반은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 회복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고 이런 최적의 환경에서 벤츠나 BMW, 폭스바겐 등 명차들도 수혜를 입으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우토반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출처 : wikipedia>

 

 

히틀러, 폭스바겐에 주문…‘비틀’ 탄생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자동차 천재이자 자동차 역사상 최고의 엔지니어로 불리는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박사에게 누구나 탈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해 달라고 주문했다. ‘1ℓ로 10㎞ 이상, 5명 이상의 가족 탑승, 시속 100㎞ 이상’의 까다로운 조건도 제시됐다.


포르셰 박사는 3년여의 연구 끝에 1936년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자동차를 생산해냈다. 딱정벌레 차로 유명한 ‘비틀’(Beetle)이다. 독일 자동차업계의 자존심인 ‘비틀’은 국민차의 명성과 함께 전쟁에 투입되기도 했다. ‘비틀’은 훗날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무너진 독일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게 된다.

 

폭스바겐의 ‘비틀’. <출처 : wikipedia>

 

 

히틀러는 한편으로 세계 최강의 차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1937년 나치 정권은 2년간의 연구 끝에 항공기 엔진을 탑재하고 최고 시속 750㎞의 성능을 자랑하는 슈퍼카 ‘메르세데스 벤츠 T-80’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 자동차는 실제 10년 후 주행 실험에서 최고 시속 634㎞를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 중 군수용 자동차를 공급한 폭스바겐은 작센주 볼프스부르크의 공장이 전쟁통에 파괴되는 등 독일의 패전과 함께 자동차의 생산을 중단했다가 1945년 다시 생산을 재개했다.

 

전쟁으로 성장한 BMW는 역설적으로 전쟁 때문에 내리막길을 걸었다. 항공기 엔진 제작과 납품으로 시작한 BMW는 1928년 딕시 베르케를 인수하며 자동차 업계에 뛰어들었다. “독일이 부강해지기 위해선 자동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히틀러의 정책에 힘입어 성장 가도를 달린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항공기 제조업체’가 필요했던 히틀러는 BMW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시키고 항공기 엔진 제작을 지시, 결국 뮌헨 공장은 항공기 엔진·부품 공장으로 바뀌고 만다. 탱크와 비행기까지 생산한 이탈리아의 피아트는 1·2차 세계대전에서 군수물자를 지원하며 사세를 키웠다.

 

 

지프, 2차 세계대전·한국전쟁서 진가 발휘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인 곳은 단연 미국의 포드사이다. 전쟁 당시 포드가 생산한 군수품의 규모가 이탈리아 전체 경제 규모를 넘어설 정도였다. 전쟁은 특히 병기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4륜 구동방식의 ‘지프’(Jeep)였다. 지프는 미군이 1941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쉬빔바겐과 큐벨바겐으로 대표되는 기동차량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고 산악전과 기습작전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개발한 군수용 차량이다.

 

1941년부터 종전까지 포드자동차와 윌리스-오버랜드는 64만대를 생산해 연합군에 공급했다. 포드자동차는 처음의 설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미군은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나중에 포드를 참여시켰다. 지프는 종전 후 본격적인 오프로드 차량의 서막을 열었고 곧이어 터진 6·25전쟁에서는 그 진가를 톡톡히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64만대가 생산된 ‘윌리스 MB’. 미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Jeep의 시초이자 SUV의 원조.
<출처 : wikipedia>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한국전쟁이라는 큰 ‘호재’를 맞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 자동차시장은 GM과 포드 등 미국업체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때 터진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전쟁물자를 본토에서 운반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도요타에 기술을 제공하고 차량을 납품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지금의 ‘글로벌 도요타’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26년 직물 기계 공장의 한 부서로 시작한 도요타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GM의 쉐보레 트럭을 조립 생산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용 트럭을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 패전 후 도요타 역시 심각한 경영난을 겪기 시작됐고 급기야 1950년 봄에는 자금 압박과 파업 등으로 도산위기에 내몰리며 법정관리를 맞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이 전쟁이 장기화되자 가까운 일본에서 군용트럭을 조달키로 하고 GM의 쉐보레 트럭을 조립했던 도요타에 이를 맡겼다. 기사회생한 도요타는 종전 후 곧바로 독자적인 자동차 제작에 나섰고 크라운과 코로나 등을 생산하며 일본의 대표 자동차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닛산 역시 미군으로부터 군용트럭을 대량주문 받으며 한국전쟁을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삼았다.

 

 

안전벨트·HUD·선루프 등 비행기서 착안

전쟁은 무엇보다 자동차 기술을 빠른 시간 안에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자동차에 적용된 대표적인 전투기 기술인 BMW 헤드업 디스플레이(HUD)는 전투기 앞유리에 여러 정보와 레이더를 표시하는 장치로 1980년 프랑스 다소가 미라지 2000에 장착했다.

 

1914년 전투기가 공중회전할 때 조종사 몸을 고정시키는 가죽 안전벨트가 등장했다. 독일 아우토반 개통 후 도로를 주행하던 볼보자동차 직원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2점식(띠 양 끝이 차체 두 곳에 고정돼 있는 형태) 안전벨트를 차에 달기 시작하면서 널리 보급됐다.

 

2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 동체는 주로 알루미늄으로 제작됐는데 전쟁 후 철이 귀해지고 알루미늄의 장점이 드러나면서 자동차 회사들은 알루미늄으로 차체를 만들었다. 사브는 전투기 조종사가 탈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출장치에 착안해 선루프를 만들었다. ABS 역시 F-15에서 톱니바퀴를 이용한 기계적 제어 대신 배선을 통한 전기신호로 각종 조향장치를 제어하는 FBW에서 착안했다.

 

 

 

 안광호(ahn7874@kyunghyang.com) / 경향신문 
경향신문 편집국 디지털뉴스팀 소속이다. 그동안 지자체 출입 등을 해왔고 지금은 자동차 분야 취재를 맡고 있다.
출처 : 항상 여기 이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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