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가요무대 남인수 특집 "진주 공연", 2010년 6월 7일 - 애수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박시춘(朴是春) 작곡 / 1938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하건만
못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고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든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만은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면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남인수의 데뷔 곡 '눈물의 해협'
SP음반에 들어있는 가사지에 있는 사진.
남인수 데뷔때의 앳띤 모습을 볼 수 있는 귀한 사진.
1939년 무렵 오케연주단의 모습
오케 연주단 지방공연 사진.
1. 남인수, 2. 고복수, 3. 이화자, 4. 이난영, 5. 김해송, 6. 김정구,
7. 이철- 오케 연주단 단장- 오케레코드사 사장,
8. 손목인, 9. 이은파, 10. 장세정, 11. 김용호
오케레코드 1941년 7월 신보 목록에 실린 남인수 사진.
남인수의 고향인 진주 촉석루 아래에서 찍은 사진
맨 왼쪽이 남인수,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작사가 구완회
맨 오른쪽이 작사가 박영호
작곡가 이용준(왼쪽), 남인수(오른쪽), 미상
백난아(당시 19세, 왼쪽)과 남인수 부부(중앙- 남인수,
오른쪽- 김은하) 가 일본 전국 순회공연 중 분장실에서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김은하는 당대 한국 무용계의
1인자였다.
1939년 만주 신경(현재 장춘)에서 오케 밴드마스타
서영덕과 함께 찍은 사진
조선악극단 멤버들의 사진 앞줄 왼쪽 부터 이난영, 서봉희,
이화자, 맨 끝이 단장 이철 가운데줄 왼쪽 부터 이봉룡,
남인수, 뒷줄 두번째 부터 엄재근, 송달협, 김정구
지휘봉을 든 사람이 손목인
40년대 말 이난영, 장세정, 김정구와 국도극장에서.
군예대 시절 앞줄 왼쪽이 남인수, 그 옆이 가수금사향
50년대 시민회관 공연사진.
맨 왼쪽이 이인권,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복수 왼쪽에서
세번째가 남인수이고, 네번째가 김정구.
50년대 중반- 작곡가 손석우와 함께 중앙극장 앞에서 찍은 사진
50년대 중반-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찍은 사진.
50년대 중반 태평양 가극단의 포스터. 정중앙이 남인수
50년대 극장 포스터이다.
가요계 황제-남인수, 가요계 여왕- 신카나리아, 모던가수- 고운봉,
오리엔트 전속- 김용태, 가요계의 호프- 김백희 등의 광고문구가 보인다.
1958년 국도극장 공연에서
앞줄 왼쪽부터 영화배우 김지미, 이난영 뒷줄 왼쪽부터
계수남, 남인수, 영화배우 이민, 고운봉, 김선영.
남인수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이난영.
50년대 말 남인수와 이난영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장동휘, 일곱번째가 최병호
앞줄 왼쪽부터 손석봉, 남인수, 황금심, 고복수,
박진(전 국립극단장), 한 사람 건너 최남용
앞 줄 외쪽부터 남인수, 신카나리아, 황금심, 고복수
57년 고복수 은퇴공연때 찍은 사진
남인수 친필문서- 59년가수협회장이던 남인수가
반야월에게 보내는 편지
1960년 현 남인수 기념사업회 회장 신해성과 함께
출처 : http://blog.daum.net/choiesimon/13418356
1935년 8월 신보로 시에론레코드에서 발매된 '희망의 노래'. 당시 별다른 호응을 받지는 못한 곡이지만, 이후 우리나라 유행가계에 대표적인 작곡가로 떠오르게 되는 박시춘의 첫 작품이었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타 소리 하나로만 잔잔하게 흐르는 반주에 맞춰, 애조 띤 목소리는 낭랑하게 울린다. 고적한 밤에 느끼는 짙은 회한을 청각적 이미지로 집약해서 표출해 내는 가사와, 격한 감정을 가만히 다스리기라도 하듯이 차분하게 진행되는 곡조가 30년대 유행가의 대표적인 한 스타일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행가 시대 -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만은
신진 작곡가 박시춘은 얼마 뒤 역시 시에론이 발굴한 신인가수 강문수에게 '눈물의 해협'(김상화 작사)이라는 곡을 주게 되는데, 이 강문수가 바로 뒷날 불세출의 명가수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전무후무하게 '가요황제'라고까지 불린 남인수였다.
당시 시에론은 다른 음반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처지며 사세가 급격히 쇠퇴하고 있던 중이라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눈물의 해협'이 발매된 것은 1936년 전반쯤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론레코드는 신문 광고가 1937년 1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므로 이 무렵 사실상 문을 닫은 것 같고, 이때를 전후해 가수 강문수와 작곡가 박시춘은 새로운 활동공간을 찾게 된다.
강문수는 남인수로 이름을 바꾸어 1936년 12월 오케레코드에서 재데뷔를 했고, 박시춘도 오케 전속작곡가가 되어 1937년 초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시에론에서 가요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고 비슷한 시기에 오케로 옮겨 와 다시 함께 활동하게 된 두 사람은, 차츰 조선 유행가계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작곡가-가수 콤비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물방아 사랑'(박영호 작사, 1937년 3월), 북국의 외로운 손'(김용호 작사, 1937년 12월) 등의 인기곡을 계속 발표한 박시춘-남인수 콤비는 1938년 1월에 그 명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이들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애수의 소야곡'이다.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 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 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만은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 >
그런데, 이렇게 잘 다듬어진 전형적인 작품은 일정함 범위의 틀을 뛰어넘어 기발한 충격을 주지는 못하는, 어쩌면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일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주제부터가 이미 수없이 많은 유행가에서 다루었던 것이고, '애수의 소야곡'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들이 그 전후로 상당히 많았던 것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인기와 유행의 이유를 작품 자체가 잘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만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적으로 작용한 다른 무엇인가가 '애수의 소야곡'을 폭발적인 성공으로 이끄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앞서 말한 '눈물의 해협'과 '애수의 소야곡'의 관계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1936년에 나온 '눈물의 해협'과 2년 뒤에 나온 '애수의 소야곡'은 가수와 작곡자가 같다. 뿐만 아니라 노래의 곡조 자체도 완전히 같다. 즉, 똑같은 곡에다 제목과 가사만 새로 입혀 일종의 재창작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거의 완전히 잊혀졌고 하나는 지금껏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런 차이를 두고 제목과 가사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고 표면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애수의 소야곡'을 작사한 이노홍, 즉 이부풍이 당대를 대표한 뛰어난 작사가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보다는 유행가를 생산해 내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눈물의 해협'과는 달리 '애수의 소야곡'이 성공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1936년 '눈물의 해협'이 발매될 당시 시에론은 신문광고조차도 제대로 못할 만큼 기울어가는 상태였고, 무명의 신인 가수와 작곡자가 발표한 곡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만한 추진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애수의 소야곡'이 발매된 1938년의 오케는 상황이 이와 전혀 달랐다. 일당백의 기세로 다른 음반회사들을 압도하며 적극적인 스카웃으로 뛰어난 가수와 작가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작품 창작에서 음반 판매에 이르는 전과정, 특히 홍보 부문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30년대 헐리웃 영화계를 연상케 하는 체계적인 제작시스템이 확실히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인수는 오케에서 재데뷔할 당시부터 '천부적인 미성으로 청춘의 비련을 구가하는 스마트한 가수'로 인식되도록 선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홍보로 형성된 이미지가 '애수의 소야곡'의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져 그 유행을 촉진했고, 이것이 다시 또 남인수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시에론의 강문수-박시춘은 오케의 남인수-박시춘과 이러한 시스템상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가 곧 '눈물의 해협'과 '애수의 소야곡'의 차이이며, 한번 실패한 노래가 재창작으로 거듭나 오히려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 배경이다.
'애수의 소야곡'이 일으킨 대대적인 유행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38년 10월에는 '눈물의 해협'도 다시 재발매되어 나왔다. 물론 이미 영업을 정지한 시에론에서 낸 것은 아니며, 재발매에만 주력한 고라이라는 소규모 음반회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1937년 3월에 첫 음반을 발매한 고라이레코드는 처음에는 1936년 후반에 잠시 음반을 발매했던 밀리온레코드의 작품을 재발매했지만, 1938년에는 주로 시에론레코드에서 낸 작품들을 재발매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
(do애고라이가 어떤 과정을 통해 다른 음반회사에서 낸 작품을 재발매할 수 있었는지는 현재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눈물의 해협'은 분명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재창작곡의 인기에 힘입어 원곡이 다시 발매된 흔치 않은 경우이므로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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