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가곡·연주·합창

[스크랩] Chopin, Scherzo

mistyblue 2015. 2. 8. 22:43

 

 

 

Chopin, Scherzo

쇼팽 '스케르초'

Frédéric Chopin

1810-1849

   

 

 



             Fredric Franois Chopin (1810 - 1849)
     Scherzo No.2 in Bb minor, Op.31 / Artur Rubinstein,Piano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으며, 20세 때부터 파리에서 살면서 19세기의 피아노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   

 

정열과 섬세한 신경으로 주옥과 같은 작품을 많이 남겨 놓은 낭만파 작곡가입니다.

 

쇼팽의 음악은 그 어느 것이나 쇼팽의 피아노 음악의 진수에 접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기술적으로 보아 쉬운 것은 없지만

 

면밀한 훈련과 치밀한 신경으로 그 구성, 음색, 시정,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는 음악성을 아름다운 영상을 바탕으로하여

 

그림을 그리듯 연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쇼팽은 이 스케르쪼를 단독의 피아노곡으로 만들었다

 

그의 스케르쪼는 전 4곡이 있다

 

이것들은 리스트가 말하고 있듯이 <가눌 길 없는 분노나 절망적인 기분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며,

 

때로는 그것이 신랄한 야유가 되고 또 완고한 자존심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쇼팽은 발라드와 마찬가지로 이 양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형식화, 그 명칭에 스케르쪼라는 이름을 빌린 것이다.

쇼팽의 <스케르쪼> 4편 중에서 가장 유명한 2번째 곡.

 

이 곡이 작곡된 1837년은 쇼팽이 사랑하는 백작의 딸 마리아 보진스카에게 정식 구혼을 했다가

 

마리아의 백부의 완고한 반대로 고배를 마실 때였던 만큼 인생에 대한 회의와 애증이 서려 있다고 한다.

 

이 제2번은 1837년 27세 때의 작품으로 정열과 시적인 낭만의 꿈이 대조적으로 융화되어 생기 발랄한 젊음이 넘치는 음악입니다.

 

 

 

   스케르쪼 (scherzo, 뜻: '익살')


1. 고전주의 시대: 스케르쪼는 3/4 또는 3/8박자의 빠르고 익살스럽고 변덕스러운 음악으로서,

 

소나타 형식의 음악(소나타, 심포니, 사중주, 협주곡)에서 주로 세 번째 악장으로 삽입된다.

 

세 번째 악장에는 원래 미뉴에트가 오는 부분이었는데 베토벤은 이를 스케르쪼로 대체했다.

 

스케르쪼도 미뉴에트처럼 트리오가 뒤따른 후 다시 스케르쪼가 반복된다

 

(거기에 다시 트리오와 스케르쪼가 첨가되기도 한다, 예: 베토벤 7번 교향곡).

 

스케르쪼는 이미 하이든에게서 그 싹이 나타났다.

 

그는 1781년에 미뉴에트식의 음악에 스케르짠도(scherzando) 또는 스케르쪼라는 말을 사용했다

 

(현악 사중주 op. 33, no. 2-6).

 

그 이전에도 하이든은 위의 두 용어를 일종의 연주 지시어로 사용했는데

 

(예: 현악사중주 op.3, no. 5-6),

 

모두 짝수 박자형이었다.

 

하이든은 스케르쪼의 형식성이 분명한 Op. 33번을 쓴 이후에 스케르조의 요소를 가진 음악에도 미뉴에트란 용어만을 사용했다.

 

베토벤은 스케르쪼를 주로, 미뉴에트를 예외적으로 썼는데, 그 음악적 내용이 용어의 다름처럼 차이나는 것이었다.

 

슈베르트, 멘델스죤, 브람스, 브루크너 등이 스케르쪼를 다악장의 소나타 형식에 사용했다.

2. 19세기: 쇼팽은 독립된 곡에 스케르쪼란 용어를 썼다.

 

이 곡들은 연주회용의 기교적 피아노 곡들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에도 이러한 종류의 것이 있다.

3. 바로크 시대, 가벼운 성악곡을 위한 명칭으로 사용된 경우: 몬테베르디의 1607년과 1633년의 작품 중.

 

다악장 기악곡에서 경쾌한 악장을 위한 명칭으로 사용된 경우: 바흐, 파르티타 A장조 BWV 827, 제 6악장(2/4박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Artur Rubinstein,1887~1982)
 
루빈스타인은 1887년 1월 28일,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 로지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불과 네살 때부터 공개석상에서 피 아노를 연주했고,

 

10세 때는 베를린으로가서 명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의 추천으로 리스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바르트를 비롯해

 

로베르토 칸, 막스 브루흐 같은 대가들을 사사했다.

12세 때 베를린에서 요아힘이 지휘하는,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데뷔하였다.

 

1897년에는 쿠세비츠키의 지원으로 러시아 순회 공연을 떠났으며

 

그 이듬해 베를린에서 데뷔 무대를 갖고,1905년 다시 파리로 이주해 연주를 계속했다.
당시 그의 연주를 들은 생상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연주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해 감행한 미국 데뷔 무대도 큰 성공을 거둬, 명실 공히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한다.

 

1937년부터는 나중에 그의 주요 레퍼토리가 된 쇼팽의 곡 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미국에 정착, 실내악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1954년에는 헐리우드를 떠나 다시 파리로 향하게 되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도 높은 레퍼토리를 주종으로 하는 일련의 콘서트를 개최 청중을 사로 잡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위해서 페트루슈카 가운데 세개의 무곡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해 주었으며

 

<피아노 랙 뮤직>을 헌정하기도 했다.

 

쇼팽 이래 최고의 쇼팽 연주자로 통하던 루빈스타인은

 

자유 분방한 낭만적 정취를 피아노에 듬뿍 담아내던 인물이었다.

 

매우 빠른 템포와, 강조된 기교, 그리고 일면 과장된 듯한 프레이징은 당시에 는 매우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비평가들은 그의 연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젊은 시절 또 한 사람의 쇼팽 전문 연주자였던 호프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본인의 말 처럼

 

그의 쇼팽 연주는 비교적 주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본질이 본래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구현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자의적인 해석이 작품의 본질에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뛰어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자유롭지만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쇼팽, 그것은 작품에 대한 기본 정서를 섭렵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주로 RCA 레이블의 음반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데, 역시 쇼팽이 레퍼토리의 중심을 이룬다.

 

생상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그리고 라인스도르프가 지휘한 차이코프스키와 그리그의 협주곡 등도 유명한 음반이다.

 

풍부한 음량과 변화가 많은 음색을 갖춘 20세기의 대표적 피아니스트로서,

 

드뷔시 ·라벨 ·프랑크· 로보스 등의 작품에 뛰어난 해석을 보였다.

 

 

 

 

 

 

 

 

 

 

 

 

 

 

 

 

 

 

출처 : 생각하는 다람쥐
글쓴이 : 사피엔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