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b장조 Op.73 "황제"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
이 곡은 1809년 베토벤의 38세 때 작품으로 그의 원숙기를 대표하는 최대의 걸작이다.
당시 그는 빈의 성벽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빈은 나폴레옹군의 공격을 받아 큰 혼란이 일어났었고 수습하기 어려운 큰 소동이 일어나 도시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지만, 베토벤은 지하실에 피신한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악상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그가 작곡에 태연히 열중했던 당시 만들어진 곡이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이다.
한 번은 그가 프랑스군의 장교와 마주쳤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내가 만일 전술에 대한 것을 대위법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텐데.."라며 분개를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이 곡의 제목인 ≪황제≫는 누가 먼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곡의 당당함과 호탕함이 왕의 품격과 같다는 의미에서 딱 맞는 제목이라 하겠다.
작곡자 베토벤도 이 제목의 유래에 대해 전혀 몰랐고 어느 특정한 황제와 관련이 없지만,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최고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려진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고금의 피아노 협주곡을 통틀어 규모나 내용상 황제의 지위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
전악장 이어듣기
Wilhelm Backhaus, Piano
Landon Ronald, Cond / London Symphony Orchestra
Youri Egorov, Piano
Dirigent Wolfgang Sawallisch, Cond /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
Maurizio Pollini, Piano
Karl Böhm, Cond / Wiener Philharmoniker
▶3악장
8박자의 론도 형식. 피아노 기교의 극치를 보여주는 무곡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빠르게 튀겨지는 화려한 음악처럼 세계의 엄청난 변화도 결국 서로를 껴안으며 원무를 추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선 악장의 끝부분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이 악장에서 음악은 다시금 첫 악장의 기세와 분위기로 복귀한다. 이 '승리'를 향한 행진곡에서, 춤곡풍의 주제는 마치 곡예를 펼치는 듯하며, 피아노와 관현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술래잡기를 하는 듯하다. 협주곡 고유의 경쟁의 묘미와 돌파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박진감 만점의 멋진 피날레이다.
II Adagio
Krystian Zimerman, Piano
Leonard Berstein, Cond / Wiener Philharmoniker
Ludwig van Beethoven
1809년 초, 베토벤의 생활은 비로소 든든한 반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일단 3월 1일부터 '평생 연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세 명의 젊은 고위 귀족,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이 그에게 매년 4천 플로린이라는 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다만 베토벤이 '빈 혹은 오스트리아 황실 폐하의 다른 세습 영지를 거주지로 하는 대신'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확보한 베토벤은 들뜬 기분에 여행이나 결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특히 친구인 글라이헨슈타인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해 5월,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침공에 대한 대응에 나선 프랑스군이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다음 내친 김에 빈까지 진격해 왔고,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왕족과 귀족, 부유층들은 서둘러 빈을 탈출했다. 뒤에 남은 시민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수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해서 극장에 있던 총과 창, 칼 등의 소품들까지 꺼내 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빈은 포위된 지 일주일 만인 5월 13일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빈 함락 시기에 작곡된 이 곡은 베토벤의 시대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장대한 스케일, 찬란한 색채
빈에 남게 된 베토벤의 상황은 절박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에는 약해진 청력을 보호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베개를 머리에 두르고 있어야 했다. 또 프랑스군이 도시를 점령한 뒤에도 한동안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인한 전투가 계속되어, 그는 사방을 뒤덮은 전쟁의 참화와 진군의 북소리, 군화소리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후원자들이 모두 도시를 떠나면서 경제적 원조가 끊기는 바람에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힘겨웠는데 피난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가까스로 동생의 집에 의탁한 그는 여름에 쓴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비참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5월 4일 이후 나는 일관성있는 작품을 거의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단편 이것 저것 뿐입니다. (...)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쌓아올린 생존의 기반이 불안정해졌습니다. (...) 주위에서는 온통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행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북소리, 대포소리,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인 처참함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협주곡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9월에 베토벤은 자선 연주회에서 <영웅 교향곡>을 지휘했고, 전황이 정리되어 감에 따라 빈의 질서와 생활도 점차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갔다. 일련의 상황은 10월 14일 쇤부른 궁전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되었고, 베토벤도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그 전란의 와중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장조>는 베토벤 최고의 역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 왕성한 추진력, 찬란한 색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 베토벤 자신조차도 이 정도로 대담하고 격렬한 협주곡은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 곡에서 특유의 강력한 피아니즘을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펼쳐 보였고, 그 결과 이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G장조>에 이어 다시 한 번 피아노 협주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웅적인 기개와 경이로운 조성 전개
이 협주곡은 베토벤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훗날 슈만과 브람스가 계승하게 되는 ‘교향적 협주곡’(Symphonic Concerto)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 곡은 분명 ‘협주곡’이지만 관현악부가 독주부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며, 두 파트가 긴밀하게 어우러져 더없이 절묘하고 역동적인 음악세계를 펼쳐 보인다. 발터 리츨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품은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에서 영웅적인 기개를 과시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극치를 보여준다. 강렬한 개시 화음들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건물 안으로 이끄는 웅장한 입구와도 같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자크 다비드, 610x931cm, 1807
(우)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의 부분. 이 곡에 '황제'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영웅적인 기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흔히 이 곡의 제목처럼 통용되는 '황제'라는 별명은 정작 베토벤 자신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한때 존경하던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서 격노하여 <영웅 교향곡>의 원래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를 떠올리자면, 베토벤의 가장 돋보이는 걸작 중 하나에 '황제'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은 심히 불경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별명을 누가 붙였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설에는 J. 크라머라는 영국의 출판업자가 거론된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모든 피아노 협주곡들 가운데 황제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꽤나 그럴듯한 발상 아닌가? 더구나 젊은 시절에는 혈기왕성했던 베토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보수적인 성향으로 변해갔으며 한때 황실 악장의 직함을 원하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싶다.
Maurizio Pollini (1942~ )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인물로 꼽히는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의 뒤를 이어 이딸리아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는 1942년에 태어나서 1957년 15세때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 출전하여 2위(1위없음)에 입상하였고, 1960년 쇼팽콩쿠르에서 심사 위원 전원 일치의 1위 입상자가 되었다. 이 때 심사위원장으로 있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우리 심사위원 중에서 그 만큼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쇼팽 콩쿠르 후 얼마 안 되어 폴리니는 악단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은퇴한 여러가지 사정에 대해서 소문이 있었지만, 10년후 침묵뒤에서 콘서트 홀로 복귀하였고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70년대 들어서면서 마침내 성숙한 음악을 각종 음반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쇼팽콩쿠르 우승자답게 그의 쇼팽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음색은 한마디로 밝고 부드러우며, 명확하다는 것이며, 이는 쇼팽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70~80년대의 음반들중에서도 베토벤 후기 소나타집은 가장 주목받는 연주로 그라모폰상을 수상하였고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진열대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장근로자들을 위해 직접 공장에가서 연주하기도 했던 폴리니, 음악은 특정 인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 그는 남들보다 5~10cm 낮은 의자에서 연주하지만 그의 음악은 높은 위치에 있는 지성파 연주의 대가이다.
카롤 뵘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출생의 지휘자, 음악을 좋아하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우선은 부모의 뜻에 따라 그라츠 대학의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소중히 여긴 아버지는 자식을 1년간의 빈 유학에 보냈다. 빈에서 만디체프스키라는 아주 엄격한 스승에게 사사하게 되어 퍽 효과적인 영재 교육을 받게 되고, 세계의 음악 중심 도시였던 빈에서 음악의 가장 뛰어난 결실을 얻게 되었다.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와 보니 때 마침 인재가 부족했던 시기여서 고향인 그라츠 가극장의 연습 지휘자라는 하급 직책을 얻게 된 것이 직업 음악가로서의 시작이었다. 뵘의 아버지는 예술가의 경력이란 심히 불안전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음악을 하되 법학 박사 학위는 따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강력히 종용했기에 가극장 일만 해도 과중한 노동이었는데도 이를 악물고 국가고시 시험 준비를 하여 결국은 박사 학위를 얻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통해 그 학위를 실제로 써 먹은 일은 없었다.
그라츠에서 데뷔한 지 5년 후에 브루노 발터의 초청을 받고 뮌헨으로 옮겨 대가극장에서 다시 밑바닥부터 올라가면서 귀중한 경험을 쌓고 실력을 축적했다.
1927년 33세때 다룸슈탓트 가극장의 총 감독이 되면서 책임 있는 부서를 맡게 되고, 그 후로 함부르크, 드레스덴 등에서도 활약,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로도 독일에 남아서 행동했기에 카라얀처럼 직접 나치당에 입당은 안 했지만 각 가지 혐의를 받게 되어 전후 2년간 연주 활동이 금지되어 각 가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복권된 후로는 어떤 의미에선 수 차례 자기를 괴롭힌 모국보다는 좀더 시야를 넓혀 국제적인 커리어를 쌓아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적극적으로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미국 등에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올려 각국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훈장, 명예적 그 밖의 포상을 받게 되고 최만년에는 안질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 부분은 영광에 찬 생애였다.
Krystian Zimerman (1956.12.5~ )
짐머만은 5세때 피아니스트인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2년후 Andrzej Jasinski의 학생으로 들어가 1973년까지 사사받았다. 1975년 가을, 제 9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금메달과 <마주르카 상>, <폴로네이즈 상을 받아 화려하게 세계 피아노 음악계에 등장한 인물이다. 이 때의 나이는 불과 18세...
쇼팽 콩쿠르 역사를 통해서 가장 나이 어린 우승자로 기록된다.
게다가 이 콩쿠르가 폴란드에서 열리는 것인데 정작 폴란드 출신의 우승자는 제 4회(1949년) 때의 하르나 스테판스카와 제 5회(1955년) 때의 아담 하라시에비치에 그쳤을 뿐 이후 20년간 외국인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짐머만의 우승은 폴란드인에 의한 20년만의 쾌거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짐머만은 1956년, 폴란드의 자브제에서 출생하여 카드비쉐 음악원의 안제이 야신스키의 문하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이미 소년 시절에 폴란드 국내에서 실시된 여러 콩쿠르를 석권하였고, 대망의 쇼팽 콩쿠르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음악원을 졸업하던 바로 그 해였다.
다른 우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짐머만의 연주가로서의 전도는 쇼팽 콩쿠르의 우승이 보증하는 것이었고, 예상했던 것처럼 유럽 여러 도시에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서 그의 무대는 빛나는 광채로 장식 되었다.
아담 하라시에비치라는 엄청난 거장이 그 동안 폴란드의 피아노를 대표했다고 한다면 짐머만은 다음 세대의 폴란드를 탄주하는 피아니스트로서 착실히 그의 길을 가고 있는 연주가이다.
특히, 그가 연주하는 쇼팽이야말로 "견줄 데 없을 만큼 시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세평(世評)이다.
Leonard Bernstein (1918~1990)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년 8월 25일 - 1990년 10월 14일)은
미국의 작곡가이자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첫 지휘자였고,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찬사를 받은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 시리즈 등과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캔디드》와 같은 다수의 작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번스타인은 1918년에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러시아 Rovno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샘 번스타인은 회사원이었으며, 처음에는 번스타인의 음악에 대한 관심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번스타인은 종종 루이스(아들의 별칭)를 오케스트라 공연에 데려갔다.
한번은 번스타인이 피아노 공연을 듣고 곧 마음이 사로잡혀서 곧장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번스타인은 보스턴 라틴 스쿨에 다녔다.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졸업한 후, 번스타인은 하바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월터 피스턴에게서 음악을 배우고,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지휘를 프리츠 라이너에게서 배웠다.
커티스에 있는 동안, 번스타인은 또한 Helen Coates와 Heinrich Gebhard에게서 피아노도 배웠다.
그는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그리고 교육자로서 크게 인정받았고, 특히 대중들에게는 장기간의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했으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을 썼다. 그는 또한 세 개의 교향곡, 두 개의 오페라, 다섯 개의 뮤지컬 음악 외에 다수의 작품을 썼다. 번스타인의 정치적 성향은 확고한 좌파였지만, 다른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반에, 그는 흑표범단(Black Panther Party)을 위해 자선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다.
1943년 11월에, 그는 아픈 브루노 발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으며, 즉시 성공을 거뒀다. 1949년에 그는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튀랑갈릴라 교향곡을 세계 초연했다.
1957년에 그는 텔 아비브에서 Mann Audiotorium의 개관 공연을 했으며, 거기에서 많은 녹음을 진행했다. 1960년대에, 그는 미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을 위한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 시리즈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작곡은 유대교 전례 음악(특히 그의 교향곡 1번과 3번, 그리고 치체스터 시편), 구스타프 말러, 조지 거슈윈, 그리고 그의 친구 아론 코플랜드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 날(12월 25일)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의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100만 명 가량의 청중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 때에, 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 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번스타인이 말했다.
번스타인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으며,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구스타프 말러, 아론 코플랜드, 요하네스 브람스,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의 영광, 작곡가로서의 생산성, 그리고 그의 열정 넘치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한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번스타인은 또한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그의 양성애적 성향 사이의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해지지만, Arthur Laurents(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번스타인의 조력자)는 Charles Kaiser(《The Gay Metropolis》의 저자)에게 번스타인은 단지 “결혼한 게이였다. 그는 전혀 충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게이였다”라고 말했다. 다른 번스타인의 친구인 Shelly Rhoades Perle는 번스타인의 전기작가인 Meryl Secrest에게 자신은 “그가 성적으로는 남성을, 감성적으로는 여성을 원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번스타인은 그의 만년에 우울증 발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의 여배우인 Felicia Montealegre와 1950년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Montealegre는 번스타인의 세 번째 교향곡인 《Kaddish의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의 연주에 화자(본래 이스라일 출신의 전설적인 여배우 Hanna Robina가 공연했던 역할)로 참여했다.
그 자신은 한 명의 사랑하는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번스타인은 음악 세계에서 그의 난잡한 성생활로 악명높았다. 부부는 1970년대에 그녀가 번스타인이 여러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에 이혼했다. 그의 아내와의 결별 이후에, 번스타인은 1971년부터 그의 파트너였던 Tom Cochran과 살았다. 그는 그의 아내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에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돌아왔다.
닉슨 대통령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정신병자 Samuel Byck은 그의 계획의 세부를,
한 사람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존경했던 번스타인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번스타인은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classic·가곡·연주·합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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