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orcycles & 그 이야기들

"가장 미국적인 게 우수한 것" 일본 이긴 '이 브랜드'

mistyblue 2019. 9. 12. 19:01

DBR/동아비즈니스리뷰] 가죽 재킷에 선글라스, 육중한 할리데이비슨 바이크까지.

모든 준비는 끝났다.

시동을 걸자 바이크가 토해내는 거대한 엔진 소리에 맞춰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고속 도로 위에서 칼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모습이야말로 중년 남성 로망의 "끝판왕"이 아닐까.

그 로망의 중심에 바로 미국의 모터사이클 명가 할리데이비슨이 있다.



할리데이비슨은 단순한 오토바이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설립 후 110년의 시기를 지나며 위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전 세계 100만 명이 넘는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비결이 무엇일까.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에서 알아본다.


출처Harley-Davidson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Harley Davidson)은 1903년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설립되었다.

윌리엄 할리(William harley)와 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이 합작해 회사를 창립했으며

자신들의 성을 따 브랜드명을 지었다.

할리데이비슨의 제품은 제1,2차 세계대전에서 군용 모터 사이클로 납품되며 전 세계적 인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할리데이비슨의 국내 인기 모델 중 하나인 아이언 883 기종

출처할리데이비슨 공식 홈페이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오토바이 시장에서 할리데이비슨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사실상의 독점 체제를 구축했다.

미국 내 오토바이 제조업체는 20세기 초반 한때 150여 개에 달했으나

1948년경에는 할리데이비슨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유럽, 일본으로부터 저가 오토바이의 수입이 늘어났지만

이 오토바이들은 작은 엔진을 장착한 소형 모델이었다.

때문에 배기량 750cc 이상의 대형 오토바이만을 생산해온 할리데이비슨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상황은 1960년대 후반까지 크게 변하지 않아 회사의 미래는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1970년 당시 혼다와 야마다 등 일본 회사들이 시장에 뛰어들며 대형 오토바이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출처혼다, 야마하 모터사이클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그런데 1969년 라켓부터 온갖 스포츠 용품을 만드는 AMF(American Machinery and Foundry)라는 대기업이
이 회사를 비싼 값에 인수했다.
그런데 AMF의 경영진은 오토바이 사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1970년대 들어 일본이 대형 오토바이 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진출, 할리데이비슨의 텃밭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AMF의 경영진은 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공정의 단순화와 함께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러자 노사분쟁의 심화와 함께 제품의 질이 크게 나빠지는 등 부작용이 훨씬 크게 나타났다.


좌측 포스터는 말론 브란도가 오토바이 족을 이끌고 다니는 두목으로 출연하는 영화 '위험한 질주'. 폭주족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으로 오토바이의 이미지에 범죄자 혹은 불량배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출처네이버 영화, 게티이미지뱅크

1970년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의 별명은 ‘몰기 힘든(Hardly Drivable)’,

‘무능력한(Hardly Ableson)’ 등 부정적인 것 일색이었다.

제품 불량이 많고, 크고 작은 고장이 잦은 오토바이라는 이미지가 만연했다.

여기에다 유명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 주연의 ‘위험한 질주(The Wild one)’처럼

당시의 폭주족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들의 영향으로 ‘범죄자, 불량배나 타는 오토바이’라는 제품 이미지까지 가세했다. 


품질 악화에 소비자들이 반응하면서 1970년대를 거치며 회사의 매출, 시장점유율, 수익성이 모두 나빠졌다.

예컨대 1972년 1000cc 이상의 대형 오토바이 시장에서 100%를 자랑하던 시장점유율은

1982년 15% 밑으로 떨어졌다.

결국 모회사인 AMF는 이 회사를 팔고 오토바이 사업에서 철수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원매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81년 할리데이비슨의 최고경영자였던 본 빌스(Vaughn Beals)는

최고 경영진 13명과 함께 이 회사의 경영권을 모회사로부터 8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회사를 회생시킬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모회사가 번번이 퇴짜를 놓자 회사를 아예 인수할 생각을 한 것이다.

독립 후 경영진은 위기 탈출을 위한 근본적인 전략을 다시 세웠다.

먼저 자사의 오토바이를 일본의 경쟁사들 제품과 비교해 봤다.

성능, 기계적 신뢰성, 가격의 모든 부문에서 할리데이비슨의 오토바이는 일본 제품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단시일 내에 이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도 없었다.


현재에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성조기를 이용한 다수의 광고 등 미국의 정신과 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출처Harley-Davidson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하지만 그들은 오직 할리데이비슨만이 가진 특징에 주목했다.

창사 이래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미군과 함께 전장을 누비는 등 20세기 미국 역사와 함께 해온

유일한 미국제 오토바이라는 이미지는 일본 회사들은 결코 가질 수 없었다.

품질, 성능, 가격 면에서 일본 오토바이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없는 ‘미국적인 것’을 팔자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마침 새로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 역시 소련의 군사적 야심에 대응해 ‘강한 미국’ 재건을 외치면서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향수 및 선호의 경향이 크게 유행했다.

이 회사의 새 전략과 주위 상황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 회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1983년

배기량 700cc 이상의 대형 수입 오토바이에 대해 5년 기한으로 45%의 관세를 부과했다.


Harley-Davidson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이렇듯 호전된 경영 환경이 제공하는 기회를 경영진은 놓치지 않았다.

우선 오토바이 디자인은 미국의 전성기였던 1950~1960년대식 복고풍을 강화해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또한 딜러 수를 3분의 1로 줄였다.

그동안 품질도 나쁘고 주위에 흔히 있던 오토바이가 이제는 구입 신청서를 내고 몇 달이고 기다려야만 하는 인기상품이 됐다.



게다가 미국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이 제품을 오래 소장하고 있으면 가격이 더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심리가

소비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더 자극했다.

이 회사의 경영진은 딜러 수 감소로 인해 자연스레 줄어든 판매량 문제에 대응해 고가 정책으로 수익성을 확보해 나갔다.

동시에 생산량을 줄이면서 이를 품질 향상의 기회로 삼았다.


가죽 재킷과 가죽 부츠, 장갑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출처Harley-Davidson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여기에 이 회사를 도와주는 경영 환경의 호전이 또 하나 가세했다.

이른바 ‘여피(yuppie) 족’의 등장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풍요 속에서 자라나 미국 경제의 고도화에 따라 생겨난 고소득 전문직 계층이었다.

소비 성향이 큰 이들에게 고가 제품이면서 자신들이 자란 1950∼1960년대의 풍요를 상징하는 할리데이비슨은

구입하고 싶은 제품이었다.

1950∼1960년대 폭주족이 입던 가죽 재킷 등도 이들에게는 멋있는 패션이 됐다.


할리데이비슨 오프라인 HOG 퍼레이드

출처DBR

경영진은 이런 트렌드도 마케팅에 활용했다. 1

983년 이 회사는 자사 오토바이 소유자들을 대상으로 ‘H.O.G(Harley Owner Group)’라는 일종의 팬클럽을 만들었다.

둔중하게 생긴 자사 오토바이의 별명 HOG(돼지)를 차용한 것이다.

회사가 지원하는 이 클럽을 통해 소비자들의 충성도도 높이고

가죽 재킷, 부츠, 벨트 등의 제품을 팔아 부가 매출을 올릴 의도였다.

이 클럽은 여피들의 열광적인 호응 속에 미국 내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며 회사 매출에 큰 기여를 해왔다.


할리 데이비슨은 자사 제품을 운행할 때 엔진이 내는 소리까지 상표로 등록하려 하며 제품 그 이상의 것을 판매하고자 했다

출처Harley-Davidson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이후에도 할리데이비슨 경영진은 자사의 V자형 2기통(V-twin) 엔진이 내는 독특한 소리를 상표로 등록하려고 했다.

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품의 소리까지 판매하려 했던 이 시도는 경영진의 전략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단순한 오토바이라는 제품을 넘어서 ‘미국’이라는 문화와 감성을 판매한 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은 1980년대 이후 큰 흑자를 내며 주가도 크게 뛰었고

미국 내 대형 오토바이 시장에서 지금도 부동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할리데이비슨은 호전된 시장 환경을 놓치지 않고 공략했을 뿐만 아니라

타사와 차별화되는 자사의 강점인 '미국적인 것'을 살리는 전략으로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했다.

그 결과 충성도 높은 대규모의 '할리 마니아' 집단을 만들어 내며 '꿈의 오토바이'이자

미국적 정신 '자유와 개성'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때문에 할리데이비슨은 단순한 오토바이가 아니다. 그 자체로 미국의 정신이자 문화로 소비자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58호
필자 김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