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⓵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 무령왕릉 50년, 졸속 발굴이 문화재과학 초석 되다
「 “이 무덤은 백제 사마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1971년 7월 8일 흥분을 억누르며 김원룡 발굴단장(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했다.
벽돌로 덮어 쌓은 아치형 무덤 입구 한쪽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후였다.
벌떼처럼 둘러싼 기자들이 “사마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국 역대 왕조 연표를 들어 확인시켜준 공식 시호는 백제 25대 무령왕.
5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강국이 되다)’을 선포한 백제 중흥의 군주 무령왕의 무덤이
약 1500년 만에 침묵을 깬 순간이었다.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
“한국 고고·역사학을 바꾼 기념비적 발굴” “되풀이돼선 안 될 실패의 거울”로
동시 조명되는 무령왕릉을 통해 문화재 발굴과 보존과학 50년을 3회에 걸쳐 돌아본다.
천마총·황남대총·무용총·쌍영총…. 신라·고구려의 고분들은 대체로
‘총’으로 끝나는데 왜 무령왕릉은 ‘능’일까.
이런 의문을 품은 적 있다면 1500년 된 고대사 ‘블랙박스’를 열어젖힐 준비가 됐다.
그만큼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푸는 열쇠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무덤 벽돌이 걸리지 않았다면
백제사, 아니 삼국사 전체가 오래도록 암흑이었을지 모른다.
“총 17점의 국보가 나왔는데, 단일무덤에서 이렇게 나온 경우가 없죠.
그 중 첫 손에 꼽는 게 지석입니다.
삼국시대 어느 무덤에도 없던 유물의 절대 편년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과 고고미술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올 상반기 무령왕에 관한 대중역사서 『끝나지 않은 신화』를 출간하는
정재윤 공주대 교수(사학과)의 설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석은 국보 163호로 묘지석, 능석이라고도 불리는 돌판이다.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매지권이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나왔다.
왕의 지석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묘년(523년)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이렇게 확실한 삼국시대 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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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왕릉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태릉, 정릉 등)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총은 왕에 준하는 사람 무덤 같긴 한데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 붙이는 이름.
예컨대 천마총 발굴 당시 경주 김씨 종친회에서 “신라 왕릉이 확실한데 왜 천마총이라 부르느냐”며
들고 일어났어도, 누구 무덤인지 알 수가 없어 묵살되기도 했다.
무령왕릉과 천마총 발굴에 잇따라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다.
고고·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 ‘능’은 무령왕릉 뿐”이라고 강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연도 상부 세부 노출 상태.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석수(진묘수)와 지석(묘비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부분.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게다가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백제 고분이다.
(이렇게 손을 안 탄 무덤을 ‘처녀분’이라 불렀는데, 요즘 언어 사용에선 기피되는 단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공주 백제 유적은 일제강점기 공주고보교사로 일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에 의해 샅샅이 털렸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날 무렵인 1940년 스스로
“백제 고분 1000기 이상을 조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설사 가루베가 훼손한 게 아니라 해도 백제 고분 구조가 신라에 비해 도굴이 쉬운 편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꾼이 무너뜨리지 않고
유물을 빼돌리기 힘든 반면, 백제는 돌방무덤 아니면 전축분(벽돌무덤)이라
입구가 한번 노출되면 훼손이 쉽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에 위치했던 무령왕릉은 기적적으로
가루베 혹은 여느 도굴꾼의 눈을 피해, 1500년 만에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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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7점 쏟아진 '백제 고분예술의 정수'
온전히 보존됐다 하더라도 백제 고분은 상대적으로 부장품이 적은 편이다.
가루베가 빼돌렸을 유물도 간 곳을 알길 없다.
그런데 무령왕릉에선 국보 17점을 포함한 유물 수천점이 쏟아졌다.
특히 얇은 금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교한 금속 공예는 황홀한 예술성의 경지다.
엇비슷해 보여도 왕 관모장식(관 꾸미개)은 타오르는 여러 겹의 불꽃 모양이고
왕비 것은 막 피어오르는 연꽃을 닮았다.
총 5쌍의 금귀걸이와 2개의 금목걸이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儉而不陋, 검이불루)는
백제미의 진수가 배어 있다.
정교한 신수무늬거울(神獸鏡)과 은탁잔, 은팔찌의 자태까지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귀걸이.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글자를 새긴 용무늬 팔찌.
팔찌 안쪽에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다리’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새겼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이 같은 유물들은 묘지석의 절대편년에 힘입어 뚜렷한 역사성을 지니게 됐다.
나아가 후속 연구로 밝혀진 소재·양식 등은 당대 동아시아 무역교류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정재윤 교수는 “중국제 청자·동전꾸러미, 일본산 금송으로 된 관 재료,
동남아 원료인 구슬 유물 등을 통해 6세기 백제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도 “고대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신라 위주로 쓰인데다 백제 유적이 극히 적은 편인데, 무령왕릉 덕에 공주시와 백제사 고고학자들이
먹고 살 수 있다”며 웃음기를 섞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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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한·중·일 교류 밝힌 기념비적 발굴
권오영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6세기 전반은 백제, 양나라(중국),
일본 간에 유례없이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라면서 “한·중·일, 나아가 동남아까지
학문과 예술이 교류한 흔적이 무령왕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짚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백제역사지구가 등재됐을 때도
이 같은 ‘백제 유물의 세계성’이 적극 강조됐음은 물론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이렇게 화려하고 값진 유물을 무덤에서 내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2시간.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초고속 발굴’이었다.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벽돌이 걸린 때로부터 발굴단이 손을 털고 나온
7월 9일 오전까지 불과 5일.
누가 등이라도 떠민 걸까.
1971년 7월 발굴단을 휘감았던 강박은 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공주 송산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내부 보호를 위해 1997년 영구폐쇄됐다.
[중앙포토]
[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⓶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 입구의 막음돌 개봉 작업 중인 모습.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 모자를 쓴 이가 지건길 당시 학예사보다.
[사진 지건길 제공]
“시간에 쫓겨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마는, 그런 최악의 발굴을 거쳐서
최선의 유적이 나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죠.”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지건길(78)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회고다.
당시 28세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소속 학예사보였던 그는 7월6일
긴급 호출을 받고 충남 공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휘몰아쳤던 2박3일을 그는 “얼얼하고 몽환적인 순간들”로 기억한다.
최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을 때 “한국 고고학사의 기념비적 발굴이지만
또 한편으로 두고두고 욕먹게 한 아픈 실패담”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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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도굴되지 않은 백제왕릉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일단 본 기사에 곁들인 지 전 관장의 육성 인터뷰를 들어보자.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참변이 종합됐다.
첫째, 현장 공개.
둘째, 성급한 수습.
셋째, 준비 미흡이다.
반세기가 지난 2021년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같이 금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러모로 미숙했던 시절, 그들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최악의 수를 잇따라 뒀다.
당시 발굴단장이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생전에 “여론에 밀려 이틀만에
무령왕릉 발굴을 끝낸 것은 내 생애 최대의 수치”라고 뼈아픈 반성문을 남겼을 정도다.
지난 1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난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계추를 돌려 1971년 7월5일로 가자.
공주 송산리 5·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인부의 삽날에 느닷없이 벽돌이 걸렸다는 소식이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로 긴급 보고됐다.
김원룡 단장을 필두로 한 발굴단이 현장을 찾은 때가 7일 오전.
긴가민가하며 파들어간 무덤 입구가 완연히 드러나자
바로 옆 6호분과 똑같은 양식의 전축분(벽돌무덤)임이 분명해졌다.
눈치를 챈 한국일보 기자가 공주 현장에서 ‘새 백제왕릉 발견’이라는 특종기사를
8일자 1면 톱으로 냈다.
‘물 먹은’(낙종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 기자들이 도처에서 몰려들었다.
아기를 들쳐 업은 새댁까지 공주 시민 수백명도 고분 주위를 에워쌌다.
부풀어오르는 흥분과 기대감.
8일 오후 상황에 떠밀리듯 위령제를 지내고 무덤 진입을 시도할 즈음,
발굴단은 이미 현장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김원룡 단장께 ‘이래선 안 됩니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해야 됩니다’라고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하늘같은 스승님이 서두르는데 방법이 없었다(두 사람은 서울대 사제지간).
학문으로 배운 것과 현장은 너무 달랐다.”(지건길)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 무덤 입구 개봉에 앞서 발굴단이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요즘은 발굴 시작 전에 위령제를 관례이지만 당시 경황 없이 진행된터라
작업 중에 뒤늦게 제상을 차렸다.
당시만 해도 무덤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를 때다.
제상엔 북어 세마리와 수박 한덩이가 올랐다고 한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이 같은 ‘판단 착오’엔 발굴단의 경험 부족도 한몫했다.
한반도 고분이 본격 조사된 것은 알려진대로 일제강점기다.
광복 후 신라 호우총 발굴(1946) 등이 이뤄지긴 했어도
일본인·미국인 전문가의 조력을 얻어야 했다.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했던 조유전 박사는『발굴 이야기』(1996)에서
“1970년대만 해도 한해 유적 발굴 건수가 많아야 20건 안팎이었지만
80년대 들어 50건 넘었고, 90년대 들어선 100여건에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이들 대부분이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도로 개발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구제발굴(방치할 경우 파손 위험이 있는 유적을 발굴)이었다.
지 전 관장도 공주 파견에 앞서 소양강 댐 구제발굴을 마치고 온 터였다.
1971년만 해도 학술 혹은 문화재 조사 목적 하에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접근하는
고고학적 발굴 방식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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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으로 퍼서 가마니에 담아 유물 수습
게다가 발굴단이 설마 하며 들어가 본 무덤은
1500년 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노다지’ 그 자체.
도굴되지 않은 백제 고분만 해도 기적인데,
널길 위에 놓인 지석은 심지어 무덤 주인공이 제25대 무령왕이라고 알려줬다.
당시만 해도 무령왕에 대한 정보가 많진 않았지만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를 감행한
26대 성왕의 아버지란 사실만으로도 흥분할 만했다.
맨 먼저 무덤에 들어갔던 김원룡 단장과 김영배 국립공주박물관장이
그야말로 얼이 빠진 안색으로 나온 이유다.
꽁무니에서 이를 지켜보던 지 전 관장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구나 직감”했고
기자들 역시 난리가 났다.
서로 먼저 내부를 찍겠다고 나서는 통에 발굴조사상 전무후무하게
‘실측조사에 앞선 사진기자들 입실’이 이뤄졌다.
1971년 7월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내부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이들을 맞은 석수(진묘수).
그 앞에 지석(묘비석)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무덤 주인공이 백제 25대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뒤쪽으로 150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내린 관재가 보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한바탕 야단법석 끝에 이제야 발굴단 차례.
이미 흐트러진 무덤 안에서 촬영도, 실측도, 유물 수습도 정석대로 이뤄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바깥의 아우성에다 일생일대의 ‘대박’을 만난 전율에 발굴단은 유물을 쓸어담다시피 싸고 날랐다.
밤샘 작업 내내 물 한모금 못 마신 채 몽롱한 상태였지만.
아무도 졸음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만큼 혼미하고 급박했다.
“굵은 거, 크게 눈에 띄는 것만 차곡차곡 유물상자에 집어넣고,
나머지 것들은 광목으로 싸서 들어냈다.
자잘한 것들은 실측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공사용) 오삽으로 퍼서 포대 가마니에 담았다.
다 수습하는 데 12시간이나 걸렸나.
고고학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사실상 도굴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어지러운 무덤방 모습. 왼쪽에 왕비 베개가 반쯤 묻힌 게 보인다.
상면 봉황 장식은 따로 발견돼 이후 복원해 붙였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당시 1500년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난 무덤방 바닥에 풀뿌리가 뒤엉킨
왕의 금제 관식(관 꾸미개, 표시 부분)이 보인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만약 오늘날 이와 같은 ‘노다지’ 고분이 발견된다면?
“수습에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문화재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발굴조사단 구성부터 달라진다.
유재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장은 “지질학, 환경학, 금속·석재·목재 등
다양한 재질의 보존처리전문가와 생물학, 화학 등 전문가가 초기 단계부터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무덤 개방 시 미지의 미생물 등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방진복, 마스크 등 착용도 필수적이다.
입구를 전면 개방하기 전에 내시경을 넣어 관, 유물 등 위치를 파악하는 과정도 거친다.
수습할 때도 풀뿌리로 얽히고설킨 유물들은 잔가지 하나하나 가위로 잘라내며
층층이 촬영·기록·수습한다.
유물 전체를 흐트러짐 없이 확보하기 위해 모의 출토를 하거나
수십t 규모의 주변 흙더미 전체를 퍼올리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절차가 자리잡게 된 게 무령왕릉의 패착 때문이었다.
국보급 유물이 와르르 쏟아진 데 따른 환희가 가실 즈음, 학계와 언론에서
너도나도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보다 발굴단 스스로 뼈저린 자책에 시달렸다.
“발굴 당시만 해도 잘못이라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지만,
‘유물 발굴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해야 된다’는 인식이
차츰 학계에 퍼져갔다.
나 역시 2년 뒤 책임자로 참여한 경주 천마총 땐 1년 가까이 신중을 기해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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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역사…후배들이 거울로 삼길”
왜냐하면 “아무리 잘 된 발굴이라도 결국 유산의 파괴행위이기 때문”(지건길)이다.
유적·유물은 결국 죽은 자의 흔적. 한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다.
게다가 무덤은 죽은 이를 안치한 곳이지만, 그걸 만든 이는 또 다른 사람이다.
발굴 과정에서 세세하게 기록한 것들이 먼 훗날 첨단 기술과 결합해 뜻밖의 정보를 더해 줄 수 있다.
제사 그릇에 들러붙은 찌꺼기가 당대 사람들의 식재료를 알려주는 것처럼.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유적·유물의 정보가 촘촘할 수록 더 많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지고,
이 모든 게 후손에겐 자산이고 자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요즘은 아예 문화유적이 가진 콘텐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십수년짜리 장기 발굴이 추진될 정도”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무령왕릉 땐 무방비 개방, 천마총 땐 엄격한 통제였다면 요즘 경주 쪽샘지구 44호분의 경우
개방형 전시관을 조성해 관광객들이 발굴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발굴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우리 시대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무령왕릉 발굴 2년 후인 1973년 7월 경주 155호분(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단 일행.
왼쪽부터 남시진 지건길 최병현 박지명 김정기(단장) 소성옥 김동현 윤근일.
[사진 지건길 제공]
“과거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역사는 역사다.
무령왕릉라는 거울이 있었기 때문에 2년 뒤 천마총 같은 성공적 발굴이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젊은 학예사들이
수장고 유물들을 새롭게 보존처리하고 연구해서 성과를 내고 있단 점이다.
윗세대의 과오가 거울이 돼 후배들이 잘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든 나쁘든 무령왕릉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꾸준히 하나의 거울 역할을 할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하나 더.
지 전 관장은 당시 발굴단 막내로서 현장 촬영 담당자였다.
급하게 호출 받아 최신식 카메라를 챙겨갔지만 사용법을 익히지 못한 탓에,
무덤 내부 사진을 인화했을 땐 쓸만한 게 절반도 되지 못했다.
그나마 각 언론사 기자들이 찍었던 게 이후 보고서·사진집 제작 때 결정적 근거가 됐다.
괴테가 말한대로 역사는 ‘신의 신비스러운 작업장’이 아닐 수 없다.
〈3편에 계속〉
취재·글=강혜란 기자, 영상=심정보·이세영
theother@joongang.co.kr
※참고도서: 『직설 무령왕릉』(김태식 지음, 메디치), 『발굴 이야기』(조유전 지음,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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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글=강혜란 기자, 그래픽·영상= 심정보·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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