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의 청동제 그릇 밑바닥에 아로새겨진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이라는 명문,
그 분의 묘호가 빛났다.
해방 후 첫번째 ’우리 손 발굴’에서 이뤄낸 개가였다.
당시 신문(동아일보 5월25일)의 보도처럼 명문 유물의 착안점은 두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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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판박이
“(청동 그릇에) 만주 호태왕비문에서와 같은 명문이 있다.
약 1530년전 당시 서거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유업을 사모하여
제작한 그릇을 신라에 보낸 것….”
신문 보도에 나왔듯이 명문은 1880년 무렵 중국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비문을 쏙 빼닮았다.
두 명문의 필체는 물론 글자구성과 내용도 거의 같았다.
마치 동일인의 필적 같았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이름이 찍힌 청동제 그릇이
왜 신라의 수도 경주의 돌무지 덧널무덤에 고이 묻혀있었을까.
우선 ‘을묘년’의 간지가 눈에 띄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 서거 3년 후인 415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서거 3주기(혹은 3년상 후 안장 1주년)를 맞아
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려고 제작한 기념품일 가능성이 짙다.
연구자들은 ‘노서리 140호분’의 이름을 시그니처 유물(청동제 용기)을 딴 ‘호우총(壺우塚)’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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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복호의 유품
그럼 누가 언제 이 ‘광개토대왕’의 묘호가 찍힌 청동용기를 신라로 가져왔을까.
유력한 인물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내물왕(356~402)의 아들이자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복호(생몰년 미상)이다.
“412년(실성왕11)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복호가
418년(눌지왕2) 나마(17관등 중 11등) 박제상(363~419)과 함께 귀국했다”(<삼국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동용기를 가져온 인물도, 이 무덤(호우총)의 주인공도 복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맹점이 있다.
호우총의 연대가 출토 유물로 미뤄볼 때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명문이 찍힌 청동용기의 제작시기(415년)와는
1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복호설’을 따른다면 어떨까.
조상인 복호의 유품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던 직계 자손 무덤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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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째 ‘한정판’
이 16자 명문 중에는 16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있다.
우선 맨 마지막 부호(혹은 숫자)인 † 혹은 십(十)이다.
발굴단은 공식보고서에서
“이 †(十)자를 다만 여백을 채우는 의미로 보아야 할 줄 안다”고 얼버무려 놓았다.
한마디로 ‘해석불가’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을 숫자인 십(十)으로 읽으면 어떨까.
415년 광개토대왕 서거 3주기 기념품을 ‘리미티드 에디션’,
즉 한정판으로 제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용기는 ‘광개토대왕’ 이름이 찍힌 한정판(10번)이 되는 셈이다.
물론 그 또한 추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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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운동의 원조?
그보다 더 해석불능인, 알쏭달쏭한 부호 혹은 글자가 명문 윗부분에 있다.
부호라면 ‘#’으로, 글자라면 우물 정(井)자로 읽어야겠다.
#이라면 어떨까.
고구려가 ‘해시태그(hashtag·특정 단어 또는 문구 앞에 #를 붙여 관련 정보를 묶는 꼬리표) 운동’의 원조인 셈인가.
우스갯 소리지만 이 #(혹은 井)의 정체를 두고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설왕설래 중이다.
1946년 발굴보고서는 ‘†(十)’자와 마찬가지로 “#(井)자 역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고
여백을 메우는 한 장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좀 무책임한 것 같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일을, 굳이 ‘여백을 메우는 장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른 곳도 아닌 국립박물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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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상상력
이 #(혹은 井)과 관련해서 매혹적인 해석을 내린 이가 있었다.
소설가 최인호(1945~2013)였다.
최인호는 소설 <제왕의 문>에서 # 문양을 ‘하늘의 우물(井)인 백두산 천지’라 풀었다.
그러고는 정복군주 광개토대왕과 욱일승천하는 고구려를 상징하는 문양이라 했다.
소설가 다운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역사학계에서 최인호의 설을
‘그건 소설일 뿐이야’라고 치부할만한 견해를 펼친 연구자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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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井)자와 †(十)자는 물론이고 Ⅹ, 卍, 小, 工 같은
수수께끼 같은 문양(혹은 문자)들이 새겨진 일상 토기가 쏟아져 나왔다.
지안(集安)과 변경 지역(남한) 등 고구려는 물론이고 백제나 신라 영역에서도….
그러니 더욱 해석이 난감해졌다.
호우총 청동용기에는 ‘광개토대왕’ 명문과 함께 뭔가
심오한 철학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 틀림없는 #(井)와 †(十)를 아주 정연하게 새겨져 있지 않은가.
그렇게 지체높은 명문용기와, 아무렇게나 각종 부호(글자)를 ‘찍찍’ 그어놓은 일상 토기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는 걸까.
그렇지만 1946년 발굴 이후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井) 혹은 †(十)을 다룬 ‘단독 논문’이 사실상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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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건의 #유물
그런데 최근 한국목간학회가 주최한 한·중·일 학술대회에서 반가운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고구려 연구자인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고구려 유적의 #자 출토 현황과 그 의미’ 논문이었다.
필자는 ‘#(井)’을 주제로 쓴 단독 논문을 처음 봤기에 학술대회장에서 여교수의 발표를 경청했다.
여교수는 호우총 청동용기 뿐 아니라 지안의 국내성은 물론 남한 지역에서 출토·수습된 ‘#(井)’자를 총정리했다.
“고구려 초기 도읍지인 국내성 지역에서 132건(최대 229건), 남한 지역 50건(최대 56건) 등
182건의 ‘#’ 유물이 확인됐다.
국내성에서는 ‘글씨 새긴 돌(석각·3건)’, ‘구름무늬 막새(권운문와당·4건)’, 기와(125건) 등
다양한 유물에서 #’자가 확인되지만, 남한지역의 사례는 모두 토기에 새겨진 것이다.”(여호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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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과 새
자료 정리와 함께 기존의 연구 성과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즉 부호설(#)과 문자설(우물 정·井)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호우총 #(井)과 †(十)을 그저 ‘여백을 메우려는 장식 부호’로 치부했던
1946년 발굴단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장식 부호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부호에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이른바 ‘벽사(피邪)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음(陰)의 사악한 기운을 굴복시키는 숫자인 ‘구(九)’를 단순화한 기호라는 것이다.
또 최인호 소설가의 ‘#=광개토대왕 상징 기호설’과 함께
‘#=하늘과 연관된 부호’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지안(集安) 산성자 산성 출토기와에서 보이는 새 문양에 착안한 견해다.
새는 예부터 하늘계와 지상계를 연결해주는 전령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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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대부#’과 ‘대부井대부井’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문자, 즉 ‘우물 정(井)’자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특히 문자설을 따른다면 ‘우물 정(井)=물과 비’를 연관짓기 쉽다.
즉 비나 물을 관장하는 신 혹은 용왕과 관련된 명문이나,
물을 중시하는 농경의례와 제사 등 주술적인 목적으로 해석한다.
김해 예안리에서 출토된 ‘정물(井勿)’ 명문을 두고 ‘井(우물)+勿(물)’,
또는 ‘井(우물)+勿(ㄹ)’와 같은 이두 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문자설’은 아차산 시루봉 유적(고구려) 등에서
‘井(#)’가 ‘大夫(대부)’라는 글자와 함께 출토됨으로써 힘을 얻었다.
즉 시루봉에서는 ‘大夫#大夫#’으로 이어지는 명문 토기가 출토됐다.
물론 이 명문은 ‘대부#대부#’, 즉 ‘글자(대부)+부호(#)+글자(대부)+부호(#)’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자(대부)+글자(정·우물)+글자(대부)+글자(정·우물)’ 등으로
6자 전체를 하나의 문구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대부정(大夫井) 대부정(大夫井)’으로 읽어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정(井)’은 우물이 지니는 생명성과 보편성을 상징하는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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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길=#’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제기된 ‘#(井)’ 관련 견해를 정리한 여호규 교수는
본격적으로 ‘자신 만의 학설’을 설파한다.
즉 호우총 명문(415)에 등장하는 ‘#(井)’의 기원을 찾는데서 출발한다.
여교수의 시선을 잡아끈 자료는 고구려의 초기 도읍인 지안에 조성된
서대묘와 천추총, 태왕릉 등이었다.
서대묘는 4세기 전반, 즉 331년 서거한 미천왕릉으로 추정된다.
천추총과 태왕릉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세 고분은 호우총보다 적어도 30~80년 먼저 조영된 왕릉급 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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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가장 먼저(4세기 전반) 조성된 서대묘의 장대석에서 ‘대길(大吉)’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운수 대통’ ‘만사형통’을 의미하는 ‘길상구’이다.
그런데 서대묘보다 늦은 시기(4세기 후반)에 조성된 천추총과 태왕릉의 계단석과 지대석(건축물 터에 쌓은 돌)에는
‘대길(大吉)’이 아니라 ‘#(井)’가 새겨져 있다.
즉 4세기 전반까지 고구려 왕릉급 무덤에 쓰인 길상구가
‘대길(大吉)’에서 4세기 후반이 되면 ‘#’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여교수는 이 논리를 보강하는 자료로 국내성 유적에서 확인된 ‘구름무늬 막새’(권운문 와당)를 선보인다.
즉 314~324년 제작된 구름무늬 막새(지안제2소학교와 국내성터 남문 안쪽 출토)의 한가운데 원 안에
‘대길’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또 서대묘 출토 ‘구름무늬 막새’에도 ‘대길(大吉)’을 연상시키는 ‘대(大)’와 ‘길(吉)’자가 역시 원 안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고분들보다 50년 이상 늦게 조성된 천추총 출토 ‘구름무늬 막새’의 원 안 명문을 보라.
‘#(井)’ 문양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시차를 두고(4세기 전반과 후반) 제작된 ‘구름무늬 막새’의 원 안 문양이
‘대길’에서 ‘#(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떨까.
‘#(井)=운수대통(大吉)’의 의미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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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
그렇다면 남한 지역인 아차산 시루봉 보루에서 출토된 항아리 명문인
‘大夫#(井)大夫#(井)’은 어떤 의미일까.
여호규 교수는 이 명문의 ‘#(井)’은 독립적인 부호(#)가 아니라고 추정했다.
즉 ‘大夫#’는 세 글자가 아니라 ‘대(大)’와 ‘夫+#’로 된 두 글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大夫+#’은 ‘대길(大吉)’의 이체자로 보았다.
그러니까 ‘夫+#=吉’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시루봉 보루에서 출토된 ‘대부+#’ 명문 역시도
‘운수대통’을 뜻하는 ‘대길(大吉)’이라는 것이다.
항아리를 제작하면서 ‘운수대통 하라’ ‘만사형통 하라’는 축원 글귀를 새겼다는 것이다.
어떤 근거일까.
여교수는 350년 무렵 제작된 국내성 출토 막새의 명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즉 ‘夫一’이라는 글자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것을 ‘부일(夫一)’, 두 글자로 읽었다.
그런데 중국 연구자 가운데는 ‘부일(夫一)’의 두 글자가 아니라 한 글자,
즉 ‘夫+一’이며, 그것을 ‘길(吉)’의 고어체로 해석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자의 해석이 맞다면 ‘길(吉)’은 350년 무렵 ‘夫+#(井)’으로 자형을 변형하여
새롭게 창안한 글자인 것이다.
그것이 때에 따라서 ‘夫+一’나 혹은 ‘#(井)’ 등으로 부호화 해서 표현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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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교수는 또하나의 근거를 댄다.
“시루봉 보루 출토 항아리의 ‘大夫#大夫#’ 명문에서 ‘#’는 ‘夫’자와 반대 방향으로 거꾸로 새겼다.
혹시 항아리의 명문을 새긴 이가 우물 정(井)자를 정식으로 새긴 것이 아니라
‘夫’자와 한 글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대 방향에서 거꾸로 새긴 것은 아닐까.
‘夫+#’자라고?
그리고 이 ‘夫+#’는 ‘길(吉)’이라는 단어의 이체자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견해의 한계가 있다.
‘길(吉)’의 이체자로 꼽은 ‘夫+#’을 아직까지는 어떤 자전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발표자 본인도 고백했다.
하지만 이 논문에는 1946년 발굴 이후 본격 연구 없이 단편적으로 다뤘던 주제를 두고
수십년간 고민해온 연구자의 분투가 녹아있다.
“‘2005년부터’였습니다.
중국측이 고구려 고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펴낸 4권의 고구려왕릉 보고서에 나온
대길(大吉), #(井)자 유물의 사례를 보고 준비해왔습니다.”
20년 준비한 논문 한 편이란다.
길(吉)의 고어체(夫+#)를 찾지 못했지만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단다.
이 논문이 1946년 발굴자가 ‘그저 여백을 메우는 장식 부호’로 치부했던
‘호우총 #(井)자의 비밀’을 탐구하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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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공용의 기호
여기서 드는 한가지 궁금증 하나.
415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찍힌, 귀하디 귀한 청동그릇에 새겨진 ‘#(井)’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훗날에는 일반 백성들이 뭇 토기에 낙서처럼 쓱쓱 새겨넣을 정도로 대중화 했을까.
여호규 교수의 견해를 긍정한다면 이 대목에서 ‘입춘첩’을 떠올리게 된다.
4세기 초중반~5세기 초반까지 왕릉급 무덤,
그것도 광개토대왕의 제사 때 사용된 ‘길상구’가 어느 순간에는 대중화되었다는 것.
점차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었고,
그것이 이웃나라인 백제나 신라, 일본 등 주변국에도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
그래서 #(井)은 동북아 공용의 상징부호가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https://blog.kakaocdn.net/dn/cx94sk/btsHGVXdIco/l0rSW3YklStDAL4oHHwfO0/img.jpg)
■정(井)은 하늘, 십(十)은 땅?
이 대목에서 필자가 들춰본 <주역>의 구절을 소개해본다.
“…우물은 고칠 수 없으니(不改井) 마셔도 없어지지 않고,
놔둔다고 넘치지도 않는데(无喪无得) 오고 가는 이 모두 길어 먹으니(往來井井)
두레박 줄이 짧아 물을 퍼올리지 못하고 쪽박을 깨버리면 흉하다.”(<주역> ‘수풍정’)
무슨 말인가.
물이 나오는 원천은 고치면 안되듯 모든 제도나 법령 등은
백성의 민생안정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井)은 통하는 것’이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모든 백성들이 고루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마지막까지 백성을 위한 마음을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1889~1958)은
“비어있는 정(井)의 중심에 음양이 교차하는 십(十)을 넣으면 전(田)이 되니
자연의 이치와 인간만사가 이 속에 있다”고 해석했다.
결국 <주역>을 풀면 정(井)은 하늘이고 십(十)은 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호우총의 16자 명문의 맨 위와 맨 마지막의 #(井)과 †(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백성을 위한 광개토대왕의 마음씨가 녹아있는….
(이 기사를 위해 여호규 한국외대·이병호 동국대·김재홍 국민대 교수,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심광주 한국성곽연구소장,
이용현 전 경북대 교수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여호규, ‘고구려 유적의 #자 출토 현황과 그 의미’,
<제3회 한·중·일 목간연구 국제학술대회-동아시아 고대의 주술과 문자>,
한국목간학회·중국사회과학원 간백(簡帛) 연구중심·일본목간학회 공동주최, 2024
고광의, ‘남한 출토 고구려 토기 명문 연구’, <목간과 문자>27호, 한국목간학회, 2021
김재홍, ‘신라 왕경출토 명문토기의 생산과 유통’, <한국고대사연구> 73, 한국고대사학회, 2014
박찬규, ‘집안지역에서 최근 발견된 고구려 문자자료-1990∼2003년 조사보고를 중심으로’,
<고구려발해연구> 19, 고구려발해학회, 2005
백종오, <고구려 기와의 성립과 왕권>, 주류성출판사, 2005
심광주,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출토 명문자료에 대한 검토’, <목간과 문자> 4호, 한국목간학회, 2009
국립박물관, <호우총·은령총 발굴조사보고서>, 을유문화사, 1948
서울대박물관·구리시 등, <아차산 시루봉 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02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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