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거스리의 "러들러 학살"
호주 시인 밴죠 패터슨 월칭 마틸다의 주인공도 파업의 주동자라는 이유 때문에 퀸즈랜드 회사로 부터 압박을 받자 물에 빠져 죽었고 존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에서는 먹고 살기위해 하루 일당이라는 굴레속에서 처절한 가난과 싸우며 죽어가는 이들의 비참함도 보여 줍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을 받는 동포 .. 그런 또 하나의 사람들이 한국에도 있다고 하지요
러틀로 학살은 1914년 4월 20일 콜로라도 러들로의
록펠러 가문 소유의 석탄.철도회사의 파업에서 어린이와 부녀자 13명이 자본가가 고용한 민병대에
의해서 학살 당하는 사건을 말합니다. 미국의 포크송 가수이자 사회변혁 활동가였던
우디 거스리 Woody guthrie는 러들러 학살
Ludlow Massacre 이라는 노래로
그 비참함을 남겼지요 우디 거스리는 1960년대 변혁운동에 나섰던 밥 딜런, 존 바에즈 등 포크송가수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읍니다. 거스리는 "This Machine Kills Fascists"
(파시스트를 죽이는 머신)라는 문구를
기타에 새기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러들로우 학살
A group of Ludlow strikers in front of the Ludlow Tent Colony Site
[1] 1914 년 4월20일 아침, 러들로(Ludlow). 콜로라도 민병대가 파업 중인 광부들을 향해 기관총을 갈겨댔다 사망자 17명.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다. ‘러들로 학살’을 야기한 강경 진압의 주인공은 록펠러. ‘자선가 록펠러’ 바로 그 사람이다. 광부들이 뭘 요구했길래 총질까지 당했을까. 그건 단순했다. 노동조합 인정과 임금 10% 인상, 사측의 노동법규 준수가 핵심이었다. (선구자 전태일 님이 생각나네 ....) 광부들의 일당은 1달러68센트. 다른 곳보다 20% 이상 적었다. 그나마 임금도 현찰이 아니라 회사 소유의 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으로 지급됐다. 사택인 오두막의 집세는 터무니 없이 비쌌다.
Armored car, known to the striking miners as the "Death Special"; note mounted M1895 machine gun
[2] 록펠러는 광부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이때가 1913년 9월. 광부들은 바로 탄광은 물론 사택에서도 쫓겨나 탄광 부근에는 거대한 천막촌이 생겼다. 협상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겨울을 지나 6개월 넘게 이어진 농성이 잉태한 새봄의 희망은 총알과 함께 깨졌다. 광부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최종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기관총좌가 몰래 설치되고 방화가 일어났다는 점. 기관총 난사와 불길 속에서 겁에 질려 피신하지 못한 여자 2명과 어린 아이 11명이 죽었다.
Cellar hole where women and children were trapped during the fire
법은 공평하지 않았다. 파업참가자 400명 중 332명이 체포된 반면 사측에서는 민병대 장교 한 사람만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보수 논객들은 사측의 행위를 ‘산업평화를 위한 일격’이라며 치켜세웠다. 러들로 학살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쳐 노동조건이 다소 나아졌다. 러들로에 뿌려진 어린 생명들의 피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록펠러 1세는 재산을 사회에 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늘날 록펠러는 ‘선행의 대명사’로만 기억된다. [오늘의 경제소사/4월20일] 러들로 학살
결국, 미국 광부조합을 발전 시켰다 Ludlow massacre monument
Ludlow Massacre Song by Woody Guthrie
Cover from the monthly publication The Masses, June of 1914,
drawn by John French Sloan. The artwork illustrated a Ludlow Massacre
article by Max Eastman entitled "Class War In Colorado."
파업이 일어난 것은 이른 봄이었지. 회사가 주인이었던 집에서 쫓겨나 우리는 옛 러들로에 세운 텐트로 이사했다네 나는 아이들이 몹시 걱정되었다네 병사들이 그 철도 다리를 지키고 있었네. 종종 총알이 날아와 내 발밑의 자갈을 맞추곤 했다네. 당신들이 우리 아이들을 죽일까 봐 너무 겁이 났지. 그래서 우리는 2미터 깊이로 굴을 팠었어. 아이들과 임신한 여자들을 그 굴안에서 재웠다네.
Soldiers of the Colorado National Guard deployed in Ludlow
바로 그날 밤 병사들은 우리 광부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의 조그만 텐트촌으로 들어와 텐트마다 기름을 부었지. 당신들은 성냥불을 댕겼고 불이 났다네 그리고 개틀링 기관총으로 우리를 쏘댔다네 아이들을 구하려고 뛰어갔지만 이미 불이 치솟아 뛰어들 수 없었지 13명의 아이가 당신들의 총에 죽었다네. 담요를 덮어쓰고 철조망 가까이에 가서 불이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사람들은 불길 속에서 짐을 빼내는 도중에도 당신들의 총알에 쓰러졌지. 그 끔찍했던 날, 우리가 시신을 묻고 장례식을 치렀던 그 때 그 사람들의 얼굴을 나는 절대로 잊지 않을꺼야.
우리는 콜로라도 주지사에게 대통령한테 전화하라고 말했죠. 방위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그러나 방위군은 주지사의 것이었죠. 당연히 우리의 제안을 웃어 넘겼어요 트리니다드란 마을에서 온 몇몇 여자들이 월센버그라는 곳까지 감자 수레를 끌고 갔지요 그들은 감자를 팔아 총을 샀어요. 이제 손에 손마다 총을 들게 되었던 거죠. 주 방위군 병사가 철조망까지 와 우리에게 덤벼들었죠. 우리에게 총이 있다는 걸 몰랐던 거죠. 우리 네드넥 광부들은 병사들을 닥치는대로 무찔렀어요. 그들이 날 살려라며 도망치는 것을 봤어야 했는데. 우리는 시멘트를 가져다가 당신들이 아이들을 죽인 굴에 벽을 쌓았다오. 나는 말했지 " 하느님 노동조합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곤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네
Coffins are marched through Trinidad, Colorado,
at the funeral for victims of the Ludlow massacre
출처 : (노래와 함께 하는) 깨달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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