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의 음반이라 요즘 PDA만한 크기에 자기보다 더 큰 건전지를 등에 짊어지고 소리내던 내 아버지의 트랜지스터 라디오같은 소리로 ”라 꿈빠르시타(La Cumparcita)"와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의 그 인상적인 춤장면에서 흘러나왔던 “간발의 차이(Por Una Cabeza)"가 나오면서 지금 나와는 다른 계절을 음미하고 있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생각해 본다.
영화 '여인의 향기'의 한 장면.
탱고(현지에서는 땅고라고 부른다)라고 불리는 춤곡은 우르과이가 원조다 아르헨티나가 원조다라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1920년부터 남미 최고의 도시로 성장하면서 우르과이는 탱고의 장(場)에서는 퇴장하게 된다. 탱고는 19세기 유럽 이민들이 급속하게 남미로 모여들면서 유럽의 춤곡 형식이 이식 변용되면서 발생된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재즈도 그렇고 탱고도 그렇고 신대륙에서 19세기부터 새롭게 발생된 음악은 유럽의 형식이 이식되기는 했지만 거의 대부분에서 흑인음악의 영향이 지배적인데 탱고 또한 그러하다.
탱고의 시작은 재즈만큼이나 모호한데 빈민 사회에서 발생된 음악이 문헌이나 자료가 남을리 없고 오히려 역설에 의해서 추정할 따름이지만 대체로 유럽의 왈츠 등 사교 춤곡의 신대륙적 변이에 스페인계 흑인들의 민속음악이 중심이 되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흑인음악의 영향이 지배적인데 19세기 흑인들의 축제인 ‘깐돔블레(Candomble)'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탱고 형성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뽀르떼냐 음악(Musica Portena, 항구의 음악)'이라는 애칭이 있을만큼 부두 노동자들과 빈민가에서 연주되던 음악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지중해풍의 레스토랑에서 턱시도를 차려 입은 연주자들이 현악 4중주 쯤의 편성으로 연주하는 우아한 탱고와는 거리가 먼 세속적이고 지극히 대중적인 음악이라는 점에서 신대륙 흑인음악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흔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아한 탱고의 모습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컨티넨털 탱고(Continental Tango)' 이며 이는 아주 정돈되고 부드러우며 오케스트라 편성이 많은데 격렬한 비트와 질퍽한 애환이 묻어난는 등의 원형적인 탱고와는 거리가 멀다.
탱고의 원형적인 편성은 바이올린2대와 베이스, 피아노 그리고 탱고가 아니면 이처럼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을까 생각되는 ‘반도네온(Bandoneon, 원래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악기이며 아코디온처럼 연주하는 손풍금)'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를 ’오르게스따 띠삐까(Orquesta Tippica)'라 부르며 재즈에서의 콤보(Combo)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특히 반도네온은 특유의 애수를 띤 음색으로 탱고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악기 연주의 특성상 탱고가 액센트가 강조되는 음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화음과 멜로디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악기인 탓에 한 대 만으로도 충분히 음악을 표현할 수 있어서 빈민들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술집에서는 많은 출연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탓에 큰 환영을 받기도 했다. 마치 기타가 단 한 대 만으로 집시들의 아픔을 연주하기에 충분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탱고는 점점 아르헨티나 대중들에게 삶을 대변하는 중요한 정서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카를로스 가르델’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등장시키게 된다.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외모에서 이미 탱고를 느끼게 하는 ‘카를로스 가르델’은 1935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000여곡의 탱고를 녹음한 탱고의 역사이자 증인이다. 처음 등장을 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탱고에 가사를 붙인다는 이유로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대중들의 깊은 사랑을 바탕으로 탱고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앞서 밝힌 ‘라 꿈빠르시타’와 ‘간발의 차이’ 등 대부분의 곡이 탱고의 바이블이 되었고 무성 영화 시절 우리 영화에 ‘변사’가 있었듯이 서양 영화에는 반주 악단이 있었는데 남미에서 개봉되는 대다수의 영화에는 탱고 악단이 반주를 담당했는데 악단의 가수들은 모두 ‘카를로스 가르델’의 창법을 모방했어야지 아니면 현장에서 대중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었다. 1930년대 영화가 토키방식으로 넘어가고 ‘카를로스 가르델’이 세상을 떠나면서 탱고의 열기는 시들해지고 오히려 미국의 재즈가 인기를 끌지만 탱고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아스또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등장이다.
전통 또는 정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연유 가운데 가장 우선하는 것은 귀찮은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혁명가들은 그 귀찮음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아냈는데 바로 무시하는 일이다.
‘아스토르 삐아졸라(Astor Piazzolla)’는 탱고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인물이며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그만큼 혁명적인 발상과 사상으로 음악을 변화시킨 이는 없다. 이미 Part 1에서 밝힌바처럼 탱고는 밑바닥에서 발생된 음악이지만 전통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해서 애초에 남성들끼리의 춤이었던 탱고에 여성과 함께 춤을 추는데도 주저했었고 가사를 붙여 노래하는데도 주저했던 바가 있다. 그런 탱고에 이질적인 분위기를 수용했으니 ‘아스토르 삐아졸라-이하 삐아졸라-’는 비난과 소외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삐아졸라의 행보는 당연하게 보여지는 일면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복잡한 화성체계를 탱고에 수용하는 일이다. 현재 우리가 근사하게 감상하는 음악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화성체계를 지니고 있어서 알아들음의 울타리 안에 있는데 이는 감상자 입장에서 그러한 것이고 음악을 창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보다 진보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데 평생을 소비할 것이다. 삐아졸라는 천성적인 진보의 정신과 태생적인 혁명의 정신을 수많은 작품 속에서 펼쳐 보인 것이다.
13살의 삐이졸라가 반도네온을 들고 처음 인정을 받은 연주는 그의 아버지가 초청한 대가수 ‘카를로스 가르델’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였다. 정형적이지 않고 과격하기까지 해서 당시의 탱고 애호가들에게는 시끄럽게까지 느껴질 법한 삐아졸라의 연주에 ‘카를로스 가르델’은 점잖게 충고하기를 ‘너의 반도네온 연주는 훌륭하지만 탱고는 갈리시아 풍에 가깝다.’ 이 말은 스페인의 서북부에 위치한 갈리시아 지방의 집시들이 연주하는 격한 음악을 빗대어 한 말인데 사실 삐아졸라의 연주는 갈리시아 음악보다는 재즈에 가까웠다는 것이 후일 그의 회고며 그는 자신의 음악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악’이라 부르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
삐아졸라는 192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근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세살 때 가족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 이주인 탓에 환경이 좋을리 없었던 삐아졸라는 뉴욕의 노동자 지역에 거주하면서 이탈리아와 아일랜드계 마피아들이 거리를 장악할 때 그 일원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마치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어린 시절처럼) 유명한 권투선수로 성장하는 ‘록키 마르시아노’의 똘마니 생활을 하기도 한다. 야구에도 재능을 보여 동네 야구기는 하지만 총망받는 투수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삐아졸라의 부모는 이발사와 미용사로 일했지만 삐아졸라가 음악가로 성장해 주길 바래서 10살이 된 삐아졸라에게 반도네온을 선물하고 피아노를 가르친다. 어린 건달의 시기에 삐아졸라는 주변에 소품처럼 존재하던 탱고를 반도네온으로 연주한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이미 그에게는 탱고만큼이나 재즈와 바흐가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피아노와 반도네온으로 거쉬인과 바흐를 연주하곤 했다. 앞서 말한 카를로스 가르델과의 만남은 이러한 시기에 삐아졸라를 공식적으로 데뷔시키는 기회가 되는데 악단의 단원으로서가 아니라 카를로스 가르델의 영화에 어린 반도네온 연주자로 참여하게 된다. (스페인어권 음반이나 영화시장은 무시할 수 없는 구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영어권 문화상품이 불황이면 항상 미국의 메이저 문화산업은 스페인어권을 공략하게 된다. 20세기의 말엽에 히스패닉음악이 지배적이었던 까닭도 바로 그러한 이유다. 그러할 것이 공통된 언어권에서 히스패닉만큼 많은 인구를 가지고 구매력을 지닌 집단도 드물기 때문이다. 삐아졸라가 영화에 데뷔한 당시도 스페인어권 영화 열풍이 불던 때이다.)
1930년대말, 삐아졸라 집안은 전쟁의 기운으로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는데 삐아졸라는 반도네온의 연주력 하나로 탱고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재즈풍의 즉흥연주와 기존의 탱고에서 사용되지 않던 화성의 사용 등은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고 급여도 받지 못하고 여러 악단을 전전하다 자신의 악단을 만들지만 연주자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50장에 가까운 음반을 녹음하면서 기존의 탱고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악단의 편성도 실험적인 구성을 하지만 대중과 동료들의 철저한 외면으로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향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삐아졸라는 현대음악 수업과 연주활동을 병행하면서 예의 수많은 창작 활동을 전개하는데 ‘컨티넨탈 탱고’의 우아함만 알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삐아졸라의 탱고는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삐아졸라의 탱고는 자국에서는 이질적인 음악이었지만 유럽에서는 탱고의 진보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는데 반도네온 중심의 전통 뿐만 아니라 피아노나 목관악기, 현악기 등 기존의 유럽 클래식 악기를 메인으로 탱고곡을 발표하기도 한다.
삐아졸라의 탱고를 세계적 첼리스트 요요마가 연주한 앨범 'Soul of the Tango'
1955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삐아졸라는 유럽에서의 경험과 수업을 바탕으로 한층 진일보한 탱고를 소개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냉담했고 1960년대 들어 당시의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도 삐아졸라의 탱고를 진보의 이데올로기와 결부시켜 비난을 했으며 비평가들은 든든한 정부의 후원으로 삐아졸라를 연일 비판하게 된다. 이즈음 아르헨티나 전역은 삐아졸라의 이름을 알게 되고 오히려 이러한 비난은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에게 삐아졸라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발매된 삐아졸라의 음반은 젊은 탱고팬들에게 수집의 대사잉 되었고 삐아졸라의 공연은 항상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유럽은 마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아르헨티나의 수호신처럼 삐아졸라를 소개했으며 삐아졸라의 전통을 자신들이 수업시킨양 보도했지만 삐아졸라는 이 때쯤 또 한 번 진보를 위해 유럽을 향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탱고를 완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탱고를 소개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많은 비난 가운데 삐아졸라는 자신의 영역 속에서 조국의 음악을 세계적인 코드로 완성시켰고 1974년 파리에서 열린 공연은 탱고가 감상과 유희를 넘어 서 유기체처럼 존재하는 음악임을 유럽인들에게 인식시킨다. 이제부터 삐아졸라는 자신의 세계에 여러 장르의 음악인들을 초대하기 시작하는데 재즈와 클래식, 대중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음악인들과의 조우를 통해 ‘삐아졸라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여기에는 칸초네 가수 ‘밀바’가 참여하기도 하고 재즈 비브라폰 주자 ‘게리 버튼’이 참여하기도 하며 첼리스트 ‘요요마’가 참여하기도 하며 유럽을 넘어 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음악가로 자리매김 한다.
1985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 온 삐아졸라는 더 이상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를 비난하던 정권은 오히려 그에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영광스러운 시민’으로 추대하게 된다. 삐아졸라는 아르헨티나에서 ‘누에바 탱고(Nueva Tango, 새로운 탱고)’의 완성을 자축하며 열정적 활동을 하던 중 1990년 뇌를 다치는 사고를 당한 후 회복하지 못하고 1992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월드비트의 수많은 명인들 가운데 삐아졸라만큼 음악적 탐구를 수행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반도네온의 열정적인 음색과 그가 표현해 낸 복잡함의 세계 속에서 탱고는 대안이 아니라 주류로서 음악계에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삐아졸라의 탱고를 들으면서 비난과 역경 속에서 견뎌 낸 그의 의지보다 서두에 밝힌 바처럼 무시할 수 있을만큼의 자기 세계를 가진 삐아졸라를 느껴본다. 올드 가드 탱고와 재즈, 바흐와 현대음악을 섭렵하면서 표현한 음악 속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선술집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며 구걸을 하던 어린 소년이 나왔던 영화 장면을 떠 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