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이 내 신~세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
[민족의 설움 타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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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 |
조국을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한맺힌 설움을 달래주던 타향살이!
그 노래를 불러주던 고복수가 세상을 떠난지도 28년이 흘러갔지만 중국땅 소련땅에서 살고있는 우리교포들은 타향을 부르면서 아직도 고향땅을 그리고 있다.
1991년 KBS에서 인솔한 최희준, 방미, 현숙, 양수경등의 소련 교포위문 공연단이 알마타이에서 공연할 때 고복수 아들 고영준이 타향살이를 노래하였다.
'타향이라 정이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 4절까지 노래하는 동안 교포2세 3세가 다같이 따라서 불러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감동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한다.
1934년 작곡가 손목인의 작품으로 작사가인 금능인은 동요창작과 보급운동을 하던 인물로 본명은 승응순이다. 노래의 원래 제목은 "타향"이나 가사의 첫 구절인 타향살이가 제목으로 변하여 굳어졌다.
힛트된 "타향"은 국내보다는 중국 만주지방으로 간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불러졌다. 기록에 의하면 1927년 만주지방으로 이민간 조선인이 100만명이며 고향을 떠나 함경도 등 산악지대에서 화전민이 된 사람이 120만이나 되었다.
" 젖꿀이 흐르는 내 땅 버리고 남의 집 종사리 왠말이런가 해마다 봄오면 고향간다고 십여년 벌어도 갈길이 아득 울어라 울려라 애?은 소리" <1932년 농민:내신세>
많은 조선인들은 가혹한 일제식민지 수탈에 못이겨 자작겸 소작을 부치던 생활을 청산하고 조상대대로 지켜온 고향을 뒤로하고 만주벌판과 러시아로 떠나갔다.
나중에 돈벌어서 먹을 만하면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국땅 고향땅을 찾아오리라 하면서 북으로 떠나 "타향"을 부르면서 설움을 달래었다.
"타향"에는 민족의 설움이 서려있고 한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담겨져 있다. 1940년 만주 하얼빈의 극장공연에서 고복수가 "타향"을 부르자 객석에서 다같이 합창을 하면서 눈물의 바다를 만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30대의 여인이 무대뒤로 찾아와서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편지 한통을 전하면서 전쟁에 남편을 여위고 부모형제를 만나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세라면서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 이튿날 한여인의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전날 찾아온 그 여인이었다. 비보를 접한 고복수는 순진하고 순한 천성에 밤새 잠을 못이루고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최초 가수 선발에서 가수로 입문]
1933년 부산에서 열린 콜럼비아 가수선발 경남예선에서 1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934년 2월 서울 결승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흰 고무신에 바지저고리와 검정두루마기 차림의 고복수는 유달리 큰키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2등으로 입상한 고복수는 15원으로 구두와 양복 한 벌을 사입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취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OK레코드 이철 사장이 스카웃하였고 그해 5월에 "타향" "이원애곡" 으로 데뷔하면서 이 데뷔곡이 즉시 힛트하였다.
경남 울산에서 큰 잡화상을 하던 여유있는 집 아들로 태어난 고복수는 어릴때부터 노래를 좋아하여 교회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고,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는 학예회 마다 언제나 뽑혀나가서 창가를 불렀다. 외삼촌이 사 준 유성기(축음기)로 노래를 배우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부산에서 실업학교 재학 중에 부모 몰래 60원을 훔쳐서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1936년 연말에 나온 "짝사랑"이 계속 힛트하여 1937년의 고복수의 인기는 계속되었다. [부부 가수의 탄생] 1940년에는 가수 고복수의 활동이 극단에 몸을 담고 극장에서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도악극단에서 공연된 춘향전에는 이도령역으로 노래와 연기를 하고 춘향에는 빅터 전속가수 황금심이었다. 고복수와 3년간 열애에서도 고난의 계속이었다. 고복수와 손을 끊으라는 아버지의 호통과 몇 번의 가출까지하며 겨우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구전민요라고 알려져 있는 "울산 큰애기"는 고마부 작사 이면상 작곡으로 황금심이 취입하였다. 고복수의 고향이 울산이란 것을 알고 이면상이 황금심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1957년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에는 "팬이여 안녕"이라는 타이틀로 고복수 은퇴공연이 있었다. 100여명의 연예계 인물이 총출동하여 2개월 전국 순회공연까지 하여 수입금전부를 고복수에게 전달하였다. 어질고 순한 고복수는 1972년 2월에 식도염과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는데 연예협회의 주관으로 이봉조, 김세레나, 신카나리아, 신성일등 연예인들의 "타향살이" 노래속에서 장례식이 치루어 졌다. 고복수의 고향 경북 울산시 울산동에는 고복수노래비가 1991년에 건립되었는데 고복수 흉상과 "타향"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고복수 대표곡] 타향 (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짝사랑(1936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황금심 대표곡 ] 알뜰한 당신(1937년 빅터레코드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 [고 복 수 노래 ] 1. 타향살이 몇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2. 부평같은 내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3.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렸만 4. 타향이라 정이들면 내고향 되는 것을 1. 온길천리 갈길 천리 꿈길도 천리 2. 도라가리 말만하고 안간지 몇해 4. 옷소매를 여미면서 비는 마음은 1.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2.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3. 아 단풍이 휘날리니 가을인가요 [황 금 심 노래] 1. 때묻은 소매자락 바람에 떤다 2. 흩어진 머리카락 달빛에 젖는다 3. 찢어진 치마폭에 눈물이 번진다 1.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2. 가버린 옛생각이 야속한 옛생각이 3. 희미한 등불아래 처량한 등불아래 1. 야자수 그늘밑에서 둘이서 놀던 그때가 2. 흐르는 달빛 아래서 사랑을 풀던 꿈이여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노래 가사중에 으악새에 관하여 한동안 설왕설래 말이 있었다. 으악새라는 새가 없고 억새풀을 뜻한다는 설과 상징적인 새라는 설로 분분하였지만 가고 없는 작가의 뜻을 알수가 없다.
1939년 8월에 나온 음반 "피장파장" 이후의 고복수 노래는 보이지 않는데 미성의 가수 남인수, 김정구등 신진가수 등장으로 음반취입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반도 악극단은 출연진으로는 김용환, 박단마, 손일평, 이몽녀, 이인근, 김미라등과 연미복에 죠우넥타이 차림의 밴드 20여명으로 구성된 화려한 무대를 자랑하였다. 이 무대의 이도령과 춘향이는 무대밖에서 3년의 밀애 끝에 1941년 결혼하여 부부가수가 탄생하였다.
고복수와 황금심은 연예계에서 스캔들없이 살아온 잉꼬 부부였다. 황금심은 서울 태생으로 전문학교에 다니던 언니를 따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에 구경 갔다가 무대의 가수에 매료되어 축음기로 노래를 배우는 중 OK레코드 제작부장의 눈에 띄었고, OK레코드사 사무실에서 사장 이철, 작곡가 손목인, 박시춘, 가수 고복수의 심사에서 가수로 합격하여 "지는 석양 어이하리" "왜 못오시나요" 두곡을 취입하였다.
황금심은 본명이 황금동이 남자이름 같다고 이철 사장이 황금자라는 예명으로 취입시켰다. 이후 OK레코드에서는 부모의 승낙을 받아서 전속계약을 맺자고 독촉하였으나 엄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중 OK레코드와 빅터레코드에 작사를 하던 이부풍에 이끌리어 피아노 1대와 전속금 일천원을 받고 "알뜰한 당신"과 "한양은 천리원정"을 취입하였다.
1937년 12월에 발표된 "알뜰한 당신"이 힛트하자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머리까지 깍이고 집에 구금되고 말았다. 16세의 황금심은 단식을 하면서 고집을 꺽지않자 어머니의 간청으로 가수의 길을 계속하게 되면서 본명 황금동과 OK에서 취입시 황금자 이름 대신 작사가 이부풍이 지어준 황금심으로 빅터 전속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9년, 3년 간의 연애 끝에 10살 아래 19살의 빅타레코드사
신인가수 황금심과 결혼을 했다.
'알뜰한 당신', '삼다도 소식'
으로 유명한 황금심은 30년 넘는 부부생활 중에 공석 사석을 가리
지 않고 언제나 고 선생님으로 남편을 호칭했다고 전해진다.
일제말기에는 부부가 함께 무대공연을 하였고, 8.15해방 되면서 전옥이 운영하는 백조가극단에서 함께 공연하였다.
그후 고복수는 50년대 조양악극단을 운영하고 황금심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8.15해방이후의 힛트노래로는 "삼다도 소식" "뽕따러 가세" "장희빈"등이 유명한 노래이다.
은퇴한 고복수는 운수업을 하였으나 일평생 무대밖에 모르는 실정이라 실패하고 말았다.
1960년에는 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하여 국도극장에서 상영하였으나 4.19 학생의거로 어수선한 시국에 또 한번 실패하여 출판사의 외판사원이 된적도 있었다.
황금심은 노환으로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고 아들 고영준은 현재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해마다 11월에 고복수 가요제가 울산에서 열리고 있어 고복수를 기념하고 있다.
이원애곡(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휘파람(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사막의 한(1935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꿈길천리(1935년 OK레코드 남풍월 작사, 손목인 작곡)
여창에 기대어(1938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조자룡 작곡)
안오시나요(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문호월 작곡)
만포선 천리길(1939년 빅터레코드 화산월 작사, 문호월 작곡)
외로운 가로등(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추억의 탱고(1939년 빅터레코드 이경주 작곡) 타향 (1934년 OK레코드 금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향 떠나 십여년에 청춘만 늙고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호들기를 꺽어불던 그때는 옛날
가도그만 와도그만 언제나 타향 꿈길천리(1935년 OK레코드 남풍월 작사, 손목인 작곡)
천리길이 멀다마소 님만 계시면
폭풍우가 구질어도 나는 가겠네
가시성이 험난해도 나는 가겠네
가람가에 조각돌도 모래가 되고
그옛날의 푸른 언덕 장미가지도
잎새조차 시들은지 이제 몇핸가
꿈길천리 님계신곳 언제나 갈가
산과 물이 아침저녁 말이 없으니
물어볼 곳 조차없는 적막한 신세 짝사랑(1936년 OK레코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메입니다.
잃어진 그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섯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 살랑 맴을 돕니다.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매이는 서리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한숨집니다. 여창에 기대어(1938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조자룡 작곡)
객창에 시달린 몸 객창에 시달린 몸
한숨만 긴데
정든 산천 정든 사람 다 버려두고
만리타향 여기까지
왜 내가 왔나 왜 내가 왔나
떠돌아 지친 마음 떠돌아 지친 마음
한도 많은데
이름모를 낯선 땅에 외로이 와서
문설주를 부여잡고
왜 내가 왔나 왜 내가 왔나
가슴에 엉킨 사정 가슴에 엉킨사정
풀길 없는데
설음 많고 눈물 많고 하소연 많은
의지가지 없는 몸이
어데로 가나 어데로 가나 외로운 가로등(1939년 빅터레코드 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울리고 떠나간 그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밤도 깊은 이거리에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마음속을 너마저 울어주느냐
거리에 시드는 가슴속을 왜 이리 아프게 하나
길모퉁이 외로이 선 서글픈 가로등이여
눈물에 피는 한송이 꽃은 갈곳이 어느 편이냐
죄없이 떨리는 내설음을 뉘라서 알아주려나
심지불도 타기전에 재가 된 내사랑이여
이슬비 오는 밤거리우에 이대로 쓰러지느냐 추억의 탱고(1939년 빅터레코드 이경주 작곡)
뚜렷이 내눈앞에서 애끓는 설음만 짜낸다
아- 지금은 추억만 남았다.
창앞에 보슬비 소리 울고만 싶구나
아직도 나의 가슴은 그시절 노래를 부른다.
아 이제는 추억만 남았다.
외로운 내 노래소리 눈물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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