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했었지 & 장미
바비킴(Bobby Kim)
한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혹시 병이 났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안절부절 했었지
한동안 못만났지
서먹서먹 이상했었지
혹시 맘이 변했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안절부절 했었지
밤이면 창을열고
달님에게 고백했지
애틋한 내사랑을
달님에게 고백했지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었지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었지
안절부절 했었지
한동안 못만났지
서먹서먹 이상했었지
혹시 맘이 변했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안절부절 했었지
밤이면 창을열고
달님에게 고백했지
애틋한 내사랑을
달님에게 고백했지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었지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었지
세상을 바꾼 노래 16탄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했었지'(1978)
대중적 인기와 비평적 성취를 거머쥔 흑인음악적 파격의 절정
1975년 겨울, 대마초라는 핵미사일 한방으로 한국 대중음악계는 초토화되었다. 그 초토화된 생태계는 트로트 고고라 불리운 비상식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최헌의 ‘오동잎’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낳았다. 생태계의 복원은 2년 후에 극적으로 찾아왔다. MBC 대학가요제의 대상 수상곡 ‘나 어떡해’와 곧이어 등장한 ‘아니 벌써’는 가요계에 새로운 공기를 주입하였다. 두 곡 모두 산울림의 골방 아지트에서 만들어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대마초 이전의 가요계와 아무런 인연도 없던 돌연변이 삼형제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마초 이전의 공룡 중 하나가 살아남아 산울림만큼 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는 ‘아니 벌써’만큼 파격이었다. 당대의 대중적 인기, 후대의 비평적 성취 모두를 완벽하게 거머쥔 1970년대 후반의 음악인은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단 둘뿐이다.
대중에게 폭넓게 인지되지 못했을 뿐, 사랑과 평화의 멤버들은 1970년대 초부터 그 바닥을 주름잡아온 프로들이었다. 기타리스트 최이철은 1960년대 말부터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고 아이들, (조용필과 콤비 플레이를 펼쳤던) 김트리오, 영 에이스, 서울 나그네를 두루 걸치며 이미 실력자 인증을 받은 상태였다. 드러머 김태흥 역시 미8군 무대와 아이들에서 최이철과 호흡을 맞추며 일찌감치 프로 연주인이 된 인물이었다. 보컬 이철호도 마찬가지다. 최이철처럼 10대 때부터 미군 클럽을 두루 거친 그는 브라스 록 밴드인 파이오니아스에 재직하던 중 영 에이스의 연주를 듣고는 곧장 그들에게 투신했다. 그리고 영 에이스가 대구의 모 클럽에 출연하던 시절에 키보디스트 김명곤이 합류하였다. 베이시스트 이남이도 영 에이스 시절에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렇게 5명이 대마초 파동 직후 사랑과 평화의 전신인 서울나그네를 이루었다. 대마초 따위는 아랑곳 않는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사랑과 평화는 이남이의 작명이었다.
‘한동안 뜸했었지’는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훵키(funky) 사운드로 사람들을 홀렸다. 물론 사랑과 평화 이전에 이런 음악을 도입했던 밴드가 있었다. 데블스가 있었고 사계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훵크가 아니라 소울에 가까웠다. 사랑과 평화처럼 싱코페이션으로 박자를 갖고 놀고, 째깍거리는 기타로 긴박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밴드는 없었다. 정교한 드러밍과 세련된 신시사이저 연주까지 빈틈을 허락하지 않은 장인들의 사운드였다. 이들은 김명곤이 영 에이스에 합류한 1974년 무렵부터 훵크를 연마해왔다. 사이키델릭이 대세였던 시절에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등을 접하고는 그쪽 방면의 음악을 꾸준히 섭렵해왔던 것이다. 그 결실은 마침내 대마초 파동 이후 3년 여의 인고를 견뎌내고서야 터져 나왔다.
흥미롭게도 ‘한동안 뜸했었지’는 이장희가 쓴 곡이다. ‘그건 너’를 부른 포크 진영의 거물이 밤무대의 프로 연주자들에게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기막힌 조합이었다. 이장희는 한창 잘나가던 시절부터 최이철의 밤무대 연주에 감복하여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그는 사랑과 평화를 데뷔시키기로 결심하고 곡을 써주었다. 만약 사랑과 평화가 이장희 없이 앨범을 냈다면 어땠을까?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y-Korsakov)의 ‘왕벌의 비행’을 재현해내는 초절정 기교에 여러 사람 뒤집어졌겠지만, 그것이 전국적 인기로까지 확대되진 못했을 것이다.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대겠지”라는 능청스런 노랫말을 능청스런 멜로디 위에 얹어낸 건 이장희 고유의 능력이었다. 이렇게 후원자는 발랄한 곡을 주었고, 당사자들은 실력과 앞선 감각으로 그걸 포장해냈으니,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사랑과 평화는 이듬해에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와 ‘장미’를 히트시키며 밤무대 뮤지션들의 오랜 역사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재차 입증했다. 그러나 아뿔싸! 핵폭탄이 한 번 더 떨어질 줄은 누구도 몰랐다. 1980년 8월, 2차 대마초 파동에 걸려든 사랑과 평화는 활동을 금지 당했다. 사랑과 평화에게 주었던 곡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도 못했던 이장희는(대신 아내와 아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미국으로 떠났다. 1차 대마초 파동 때문에 공식석상에 서지 못했던 음지의 멤버 이철호와 이남이는 끝내 햇볕을 보지 못했다. 각자 흩어져 당분간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사랑과 평화가 없어도 가요계는 여지없이 굴러갔다. 다만,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윤수일밴드의 ‘제2의 고향’이 사랑과 평화로부터 시작된 흐름 속에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1980년대 초는 꼭 1970년대의 연장 같았다 캠퍼스 밴드들이 신선함을 뽐냈지만 밤무대의 생존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 몇 년 후 김명곤은 나미를 만나 강도가 더욱 센 또 한 번의 파격을 준비한다. 그의 손길은 나미를 거쳐 이문세, 소방차, 신승훈으로 계속 이어진다.
음악취향 Y윤호준 (웹진 음악취향Y 필자)
꺼져가는 한국록 숨결을 이어간 70년대의 마지막 밴드- 사랑과 평화
삼형제 밴드 산울림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던 젊은이들에 의한 기습 봉기였다면, 70년대의 마지막 밴드 ' 사랑과 평화 '는 음악 말고는 삶에 승부를 걸 것이 없는 직업적인 대중음악가들이 야심에 찬 승부수였다.
유신 정권의 ' 가요규제조치 ' 이후 청년문화의 전위였던 밴드의 무대가 야간업소로 제한되었던 시대에, 그나마도 ' 찍히면 ' 갖가지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기타를 손에서 놓아야 했던 그런 암울한 시대에,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한국의 밴드 문화는 1976년부터 일기 시작한 트로트이 왕정복고에 줄줄이 가담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행진의 예광탄이 되었던 조용필의 < 돌아와요 부산항에 >의 노래 말대로 청년문화의 ' 형제 '들이 떠난 폐허 위에 트로트는 순식간에 ' 갈매기 '처럼 슬피 울기 시작했다. ' He6 'dhk ' 검은나비 '를 거친 최헌은 < 오동잎 > 부터 연이은 성공을 거두었고 트리퍼즈의 리더 김훈은 < 나를 두고 아리랑 >으로, 그리고 윤수일과 조경수는 각각 < 사랑만은 않겠어요 >와 < 아니야 >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와같은 총체적인 매너리즘의 상황에서 서구 록 음악의 ' 좋았던 시대 '인 60년대의 슬로건을 요약하는 ' 사랑과 평화 ' 라는 이름을 앞세운 밴드의 데뷔는 단지 그 자체로써 신선한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들이 내보인 음악이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록 음악의 원형질바로 파괴적이고 직설적인 몸부림의 미학은 아니었다. ' 사랑 '은 통속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었고 ' 평화 '는 권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일종의 휴전과 같은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하지만 정교한 리듬 감각으로 무장한 기타리스트 최이철과 재기 넘치는 사운드 효과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키보드 주자 김명곤은 불굴의 정신 대신 새로운 스타일을 탐구하고 제시함으로써 완강한 벽 앞에서 좌초한 한국 록 밴드의 맥락을 또 다른 골목에서 이어가고자 했다. 그것은 능수능란한 코드 진행과 조바꿈, 새털 같이 가벼운 펑키 리듬에 입각한 날렵한 악상, 마우스 튜브나 두대의 키보드에서 제출되는 다양한 음향 효과를 통해 여실히 증명된다.
천편일률적인 팝트로트나 대학가요제의 아마추어리즘에 만족할 수 없었던 젊은 수용자들이 이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 것은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이 앨범의 머릿곡이자 맹렬한 반응을 집중시켰던 < 한동안 뜸했었지 >가 야간 업소의 흥청거리는 구애의 분위기를 분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읽기에 따라선 ' 한동안 뜸 '했고 ' 속절없이 화풀이를 달님에게 해댈 '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응어리를 행간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앨범의 미흡함은 숨길 수 없다. 특히 베토벤의 운명을 위시하여 새곡이나 되는 서구 고전음악의 편곡 연주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6분이 넘는 < 어머니의 자장가 >와 뒷면의 첫 곡인 < 저 바람 >은 근 이십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예리한 향기가 번득인다. 하지만 < 장미 >와 < 얘기할 수 없어요 >를 담은 두번째 앨범을 마지막으로 이들도 대마초의 덫에 걸려 좌초하고 만다.
사랑과 평화는 이후 80년대 전반에 진행된 서구 대중음악의 본격적인 내면화 과정의 역사적 견제가 되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출처 : 한겨레신문 1995년 10월 26일
[대중음악 100대 명반] 12위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 했었지’
-잊혀진 한국 흑인음악의 원류-
"사랑과 평화요? 잘하죠.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게 멋진 보컬과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아요?" 이 정도다. 지금의 대중들에게 사랑과 평화라는 그룹은 이 정도인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끔 윤도현이 진행하는 음악프로에 나오고 익숙한 노래들을 부르면 “아, 그 노래?” 할 정도는 되고, 나이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보컬 이철호의 모습에서 노장의 저력을 실감하고…. 그냥 이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는 ‘그 정도’의 그룹이 아니다. 무슨 경로우대증이나 발급 받으면 만족할 만한 정도의 ‘포스’를 지닌 팀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상을 바꿔보자. 비틀스로, 스티비 원더로, 에어로스미스로, 유투로. 누가 그들을 “그냥 잘하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음악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요새 것이 음악이기나 해? 적어도 스티비 원더는 30년 전에 그것보다도 훨씬 멋진 것들을 다 만들어놨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사랑과 평화는 1970년대 말 마약사건 이후 하는 수 없이 주류가요계에 백기투항을 선언한(가요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될) 거의 모든 음악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지조를 지키며 살아남은 팀이다. 단순히 그들이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뛰어난 작업들을 남겼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묻혔다. 잊혀졌다. 산울림은 조명되었고 신중현은 복권되었지만 사랑과 평화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의 이철호가 김창완 만큼 대중적인 스타가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신중현 만큼 평론가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록 위주로 재정립된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도에서 흑인음악인 훵크와 소울을 구사했던 이들이 부여받을 방 한칸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78년의 사랑과 평화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가요 사상 최상의 결과물 중 하나를 분명 만들어냈다.
믿기 어려운가? 익숙한 A면 대신 B면부터 귀를 기울여보자. 훵크와 소울, 심지어는 재즈의 매력을 물씬 풍겨대는 ‘달빛’과 ‘저바람’은 이제는 사실상 맥이 끊긴 한국형 흑인음악의 원류이다. 너무도 충만한 리듬감에 절묘하게 어긋났다 다시금 맞아떨어지는 연주의 질은 쉽게 흘려버릴 수 없다. 다양한 이펙터와 디스토션 위를 오가며 현란하게 재주를 부리는 최이철의 경이로운 기타, 탄탄한 배킹과 꽉 짜여진 인터플레이를 보여주는 사보(SARVO)의 베이스와 김명곤, 이근수의 키보드 역시 대단하다. 진지하되 심각하지 않다. 진국이지만 텁텁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다.
앨범을 수놓은 그 어떤 이름도 쉽게 지나칠 수 없지만 이 앨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장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김이환, 이경애, 이원호 등 무려 세 가지의 가명을 쓰며 앨범의 주요곡을 작곡한 웃지 못할 사건의 주인공이 된 이장희. 그는 진정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이 배출한 가장 스타일리시한 음악가였음을 이 앨범은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흑인 음악을 하고 있는 그 어떤 젊은 뮤지션들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철호와 박광수를 찾길 바란다. 그리고 잊혀진 한국 흑인음악의 원류를 더듬고 그 맥을 잇기 바란다. 그들이야말로 당신들이 숭배하고 떠받들어야 할 제임스 브라운이고 스티비 원더이다.
경향신문 > 경향섹션 > 엔터테인먼트
<김영대|웹진 음악취향Y 필자·선정기획|가슴네트워크>
한국 100대 명반 '사랑과 평화'
1집 수록곡을 보면 무려 4곡이 연주다.
곡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베토벤의 '운명'이나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처럼 클래식을 록에 접목하는 실험적 욕구 때문인가?
최이철 : 곡이 부족해서 연주음악을 많이 녹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평범한 대중가요보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연주곡들을 많이 시도해 보고 싶었다.
지금은 크로스오버가 각광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저것들이 클래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명곡을 망친다"는 따가운 눈초리가 분명 있었다.
그래서 음반 발표 후 욕을 많이 먹었다. "이게 무슨 음악이냐!" 뭐 그런 반응. 이런 일도 있었다.
1집 내고 2집으로 넘어갈 때 의상디자이너인 내 작은어머니가 우리 멤버들에게 인디언 복장의 독특한 의상을 만들어 주었다.
'가요탑10' 프로에서 3주간 연속 1위를 할 때 그 인디언 띠를 주렁주렁 달고 출연했는데 그걸 보고 오해한 기자가 일간지 1면에 "남자들이 귀거리를 했다"고 기사를 실어 팀이 해체될 뻔 했다.
그래서 악기 싸가지고 용인의 이장희씨 옛날 집으로 도망가 숨어 지냈다.
그때 2집 곡들을 다 만들었다.
자신이 참여한 사랑과 평화 음반 중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앨범은?
최이철 : 개인적으로 1집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앨범은 3집이다.
나는 항상 음반을 내놓고 후회를 한다. 왜 그때 이렇게 밖에 음악을 못했을까.
1집은 대중음악에 대한 개념도 없이 녹음을 했다.
그저 펑키라는 리듬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뜸 했었지'라는 곡에 접목을 해 본거다.
헌데 그 곡이 잠도 못 자게 피곤하게 만들 줄 정말 몰랐다.
밤업소 일을 새벽 4시까지 하고 집에 들어가 자다보면 매니저가 깨워 방송에 나갔다.
방송국에선 히트곡만 부르게 해 피곤했다.
그래서 멤버들에게 "우리 인기고 뭐고 다시 음악 하러 옛날로 돌아가자"고 했다가 "너 미쳤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난 지금도 '어머님의 자장가', '베토벤의 운명'이 더 좋다.
3집은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여러 생각을 쓴 앨범이다.
그때 처음 부른 '겨울바다'는 부산 해운대 여행 때 느낌을 쓴 곡이다.
김현식이 죽기 이틀 전에 리메이크했는데 나보다 더 애절하게 잘 불렀다.
나는 여행 중에는 곡을 못 쓴다. 좋은 가사가 있으면 외워서 집에 돌아와 곡을 붙이는 스타일이다.
작곡을 하려면 약간의 활력소가 필요하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남이 연주하는 것을 듣다보면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한다.
출처 :네이버 뮤직 한국100대명반 취재 中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3형제 밴드 산울림의 ‘아니 벌써’, ‘문 좀 열어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대중가요 판을 장악하고 있던 1978년 늦가을에 대중들은 같은 록이되 사뭇 괴상한 록 가요 한 곡에 일대 충격을 맞이한다.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의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곡이었다. 얼핏 듣기에도 세련되고 풍성한 곡이었지만 이전에 청취하지 못한 이질적인 곡조와 연주라서 생소했고 이상했다. 하지만 록의 수요자들과 뮤지션들은 즉각적으로 이 곡이 아무나 구사할 수 없는 빼어난 연주력의 결정체라는 것을 알았다. 나중 송골매가 된 밴드 활주로의 리더 배철수는 '프로 밴드 사랑과 평화를 보면 부러웠고 열등감이 가득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정말 환상적인 연주였다. TV로 생중계된 MBC <78 대학가요제>에서 경연이 끝나고 게스트로 출연한 그들이 들려준 ‘한동안 뜸했었지’와 ‘베토벤의 운명’에 우리 활주로 멤버들은 넋을 잃었다.'고 말했다. 실력도 물론이었지만 당시 음악관계자들이 사랑과 평화 음악에 깜짝 놀랐던 이유는 당시 기준에서 너무도 정교하고 세련된 퀄리티의 사운드 때문이었다.
많은 후배 밴드들은 사랑과 평화의 탁월한 실력을 숭배하며 따라간 것은 물론 1970년대의 획일화된 가요패턴을 뒤엎고 ‘한동안 뜸했었지’와 같은 펑키 록 가요를 실험해 뿌리내린 것에 무한 존경을 표한다. 단숨에 곡에 빨려 들어갈 만큼 재미있고 동시에 최상급 수준을 자랑한 ‘한동안 뜸했었지’가 대중가요 역사에 심어놓은 것은 한국 록의 자부심이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1978년 봄. 사람들은 또 한번 귀가 트이는 노래를 들었다.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였다. 제목부터 튀었던 이 노래는 이제까지의 가요와는 달랐다.
멜로디는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비트가 강한 리듬은 트로트 아니면 단순한 고고 리듬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손장단으로 따라 맞추기 힘들 정도였다. 붕어들이 껌벅거리는 듯한 악기 소리에 간주도 전에 없이 길었다. 하지만 묘한 자극은 몸을 들썩이게 했다. 음반은 대박이 났다.
당시 기사에 ''리듬 사운드''라 표현된 사랑과 평화의 음악은 펑크(Funk)였다. ''70년대 초반 미국에서 유행했고 소울에서 가지를 쳐 디스코는 물론 힙 합에까지 영향을 미친 흑인 음악의 한 장르다. 박자를 쪼갠다고 할 정도로 세분화한 리듬이 흥겨움을 만들어내고 몸놀림을 부추긴다. 리듬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연주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다. 1960년대 박인수 등의 소울 음악에도 불구하고 흑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했던 당시로서는 낯설 수 밖에 없는 첨단의 음악이었다. 신중현의 ''미인''과 마찬가지로 저게 무슨 음악이냐는 비난도 샀다.
사랑과 평화도 신중현과 마찬가지로 미8군 무대에서 출발했다. ''70년대 중반 이남이(베이스/54), 이철호(보컬/50), 최이철(기타/49), 김명곤(키보드/2001년 사망), 김태흥(드럼/1983년 사망) 다섯 사람이 모인 하드 락스가 모태다. 일종의 승급 시험을 통해 출연 밴드의 급을 매기던 미8군 무대에서 하드 락스는 한국 밴드로는 유일하게 스페셜 A까지 올라갔다. 미국에서 발매한 신보를 남보다 먼저 접할 수 있던 덕에 당시 유행하던 코모도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애버리지 화이트 밴드 같은 펑크 밴드의 음악을 접한 이들은 새롭고도 어려워 보이는 음악에 이내 빠져들었다. 이철호는 노래를 듣고 코드를 그리고 미군들에게 부탁해 가사를 옮겨 받아가며 열심히 따라 했다고 말한다. 하드 락스는 일반 업소에서는 서울 나그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1976년 캐럴 음반을 내기도 했다. 1978년 좀 더 세련된 인상도 줄 겸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사랑과 평화를 심어 주자는 이남이의 제의로 사랑과 평화로 이름을 바꿨다.
음반을 낸 건 전적으로 이장희 덕분이었다. 동양방송 DJ 출신으로 대마초에 걸려 활동이 묶인 이장희는 나이트 클럽에서 이들을 눈여겨 보고 직접 작사, 작곡한 ''한동안 뜸했었지''를 주며 음반을 내자고 했다(하지만 음반에는 대마초로 공식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이장희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있다). 최이철은 "장희 형이 ''니네 스타되는 거 한번 보고 싶다.''며 건네 준 원곡은 전형적인 통기타 곡이었다. 별로 좋지 않아 음반에서 뺄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래서 펑크로 완전히 바꿔 불렀다."고 말한다. 내뱉듯 하는 이장희의 노랫말이 리듬과 맞아떨어지도록 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신중현이 한국적 멜로디를 고민한 반면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한국적 리듬이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김명곤은 최이철과 함께 한국의 장단과도 비슷한 펑크를 어떻게 표현할까 자주 토론했다. 최이철은 미국 음악을 답습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펑크 사운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국악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했다고 김명곤과의 협업을 기억한다. 가사 쓰기에 대한 제약이 남달랐던 시절 이들의 펑키 리듬은 자유롭게 음악을 하자는 믿음의 일환이었고 듣는 이들에게도 자유의 느낌을 전달했다.
연주에 대한 고민은 최이철이 주도했다. 노래도 악기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연주를 중시했던 그였다. 외국에 나갔다 오는 사람에게 부탁해 어렵게 마련한 토크 박스, 미니 무그 등 2천만원이 넘는 값비싼 첨단 악기들과 공동체 생활로 다진 연습은 반주에서 연주로 밴드의 역할을 새로이 인식하게 했다. 클래식 곡이긴 하지만 베토벤의 ''운명'',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등 연주곡을 최초로 음반에 실은 것도 그러한 고민의 결과다.
문제는 대마초였다. 음반 발매 직전 이철호와 이남이가 대마초로 구속되는 바람에 음반에는 타악기와 베이스 음만 남기고 빠져야 했다. 기타리스트였던 최이철이 보컬까지맡게 되었고 베이스 주자에는 급하게 섭외한 이탈리아인 사르보의 이름이 올랐다. 1979년 2집에서도 역시 이장희가 만들어 준 ''장미''가 같은 테마를 리듬을 바꿔가며 이어가는 연주로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고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도 히트했지만 그 해 8월 멤버 전원이 대마초로 구속되면서 데뷔 2년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다. 1975년 신중현 이후 연예인으로는 첫 구속이었다.
사랑과 평화는 1988년 다시 모여 이남이가 부른 ''울고 싶어라''로 재기했다. 하지만 이남이는 곧 솔로로 독립했고 1999년에는 원년 멤버인 최이철도 그룹을 떠났다. 현재의 리더는 1992년 5집부터 이름을 올린 원년 보컬 이철호. 2002년 12월 8년만에 신작을 발표했고 20년 넘는 세월 동안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과 정원영, 한상원, 후일 빛과 소금을 결성한 박성식과 장기호 등 무수한 인력을 공급한 것만 봐도 한국 최장수 록 밴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과 평화를 마지막으로 미8군에서 바닥부터 시작한 스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외국 음악을 할 수 없던 시절 배고픔과 설움을 달래며 음악으로 먹고살았던 프로 연주자들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동시에 밴드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나이트 클럽에도 한 명의 인건비로 라이브 이상의 음악을 틀어줄 수 있는 DJ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밴드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사랑과 평화가 시도했던 리듬 중심의 음악은 더더욱 찾아 볼 수 없었다.
oimusic 2002년 12월호 김지영
생존자들이 부르는 승전가
25년 경력의 베테랑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가 정상의 위치에 군림했던 기간은 1978-1979년에 이르는 단 2년뿐이다. 그러나 이 2년은 한국 음악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영광의 2년이다. 당시의 한국 대중음악계는 산울림을 필두로 한 아마추어 대학 그룹들의 돌풍으로 대마초 사건 이후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사랑과 평화는 캠퍼스 그룹들의 전성기에 등장하여 미8군 무대 출신 프로페셔널 밴드의 자존심을 드높인 유일한 1세대 그룹이었다. 대마초 사건을 전후로 1세대 그룹사운드의 주역들이 대거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상황에서 이들은 끝까지 트로트로 전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적 지조를 지킨 것이다. 그 결과는 산울림과 함께 정상의 자리를 겨루는 인기 밴드로의 등극이었다. 물론 사랑과 평화의 성공을 단순히 ‘지조론’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설명이다. 이들의 성공이 지닌 진정한 의미는 1970년대 초 한국의 청년문화를 양분했던 포크 전통과 그룹사운드 전통의 이상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1세대 그룹사운드의 아킬레스 건은 창작력이었다. 사랑과 평화도 이 점에서는 다른 그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배후에는 포크 진영 최고의 송라이터 중 하나인 이장희가 있었다. 이장희의 탁월한 센스와 작곡능력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예리한 편곡과 연주능력은 1970년대 초를 대표하는 두 음악적 전통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이었다. “한동안 뜸 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 “장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 등 이장희가 만든 곡들은 사랑과 평화가 스타덤에 진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작품들이다. 당시 그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규제된 탓에 작곡자의 이름이 가명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곡들에서 나타나는 톡톡 튀는 가사와 투박한 선율을 이장희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오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 곡들에 깃들어 있는 사랑과 평화의 입김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들의 세련되고 정교한 훵키 사운드는 이장희의 소박한 원곡을 화려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작품으로 뒤바꿔놓는다. 만약 “한동안 뜸 했었지”를 이장희와 동방의 빛이 불렀다면 단순한 컨트리 풍의 색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978년에 발표된 사랑과 평화의 데뷔 앨범 [한동안 뜸 했었지]는 한 해 전에 등장한 산울림의 데뷔 앨범과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지금까지도 널리 불려지는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은 산울림의 “아니 벌써”에 이어 전국을 강타한 메가톤급 히트곡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곡이 처음부터 음악적 선진성이나 탁월한 연주력 등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이 곡의 히트는 오히려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명랑 쾌활한 분위기 등 ‘부차적인’ 요인들에 힙입은 바 크다. 여기에 최이철의 익살스러운 토크 박스 기타와 김명곤의 기상천외한 호루라기 연주(?)는 이 곡을 이색적이고 코믹한 분위기로까지 이끈다. 이는 진지한 아티스트로서 위험부담이 매우 큰 전략이다. 자칫 이들의 음악적 정체성이 ‘코믹’으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러한 위험을 정면돌파할 수 있는 실력과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로 대중들이 목격한 이들의 모습은 “한동안 뜸 했었지”의 반짝 스타가 아니라 대단히 진중하고 심각한 뮤지션들이었다. 게다가 베토벤(L. V. Beethoven)과 림스키 코르사코프(N. Rimsky-Korsakov)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이들의 실력은 관객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각색한 “운명”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편곡한 “여왕벌의 행진”은 사랑과 평화가 공연무대나 TV 등에서 항상 연주하던 고정 레퍼토리들이다. 그런데 이 곡들은 사실 이들의 오리지널 편곡이 아니라 월터 머피 & 더 빅 애플 밴드(Walter Murphy & The Big Apple Band)의 디스코 편곡을 음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연주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풀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월터 머피에 비해 신디사이저로 모든 것을 처리한 사랑과 평화의 버전은 상대적으로 싸구려 냄새를 많이 풍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당시의 관객들에게는 ‘딴따라’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운 광경이었을 따름이다. 어떤 점에서 사랑과 평화는 처음부터 이러한 충격을 의도했을 수도 있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의 이데올로기적 격차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 있던 상황에서 이 곡들을 연주한다는 것은 ‘우리는 딴따라가 아니다’라는 자기 선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곡들이지만 이 두 곡은 이런 의미에서 이들이 ‘음악성 있는 그룹’으로 인정받는데 크게 기여했고 그로써 자기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임을 다 했다.
[한동안 뜸 했었지] 앨범의 구성을 살펴보면 A면은 대중성에 B면은 음악성에 각각 치중한 흔적이 눈에 띈다. 이장희의 작품들이나 디스코화된 클래식 곡들처럼 세간의 화제를 모은 작품들은 모두 A면에 몰아져 있는 반면 B면에는 최이철 작편곡의 본격 훵크 넘버들로 채워져 있다. 이 앨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거의 A면에만 집중된 탓에 B면에 실린 곡들은 좀처럼 조명될 기회가 없었지만 사랑과 평화 음악의 진면목은 사실 A면 보다는 B면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B면의 오프닝 트랙 “저 바람”은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지향이 극명하게 표현된 숨은 걸작이다. 훵크의 이념을 따라 이 곡이 강조하는 것은 첫째도 리듬, 둘째도 리듬, 셋째도 리듬이다. 베이스와 키보드가 전면에 나서고 보컬이 후방에 배치된 사운드의 전경은 이 곡의 이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보컬의 멜로디 역시 리듬에 대한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극소화된 형태만을 유지한다. 와와 베이스와 거친 신디사이저 톤은 [Head Hunters] 시기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영향을 암시하지만 긴 즉흥연주 대신 단발적인 기타와 키보드 솔로로 곡을 축조하는 방식은 허비 행콕의 음악과 구별되는 독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저 바람”이 사랑과 평화 음악의 뼈대를 보여준 작품이라면 이어지는 “달빛”은 그것에 살을 붙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에서는 보컬이 다시 전면으로 복귀하고 화려한 즉흥연주가 후반부에 덧붙여진다. 이렇게 충분히 갖춰진 음악적 구조물은 사랑과 평화식 훵크의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들의 훵크는 야성적이고 지저분한 훵크가 아니라 지적이고 정돈된 훵크다. 훵크의 기본 정서인 관능적 쾌락주의가 배제되어 있는 대신 진지하고 학구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의 음악에서 연상되는 이름들이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아니라 허비 행콕이나 조지 듀크(George Duke)라는 사실은 훵크에 대한 이들의 접근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에게 훵크는 몸의 음악이라기보다는 머리의 음악이며 놀이라기보다는 탐구의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음악적 성향이 훵크보다 훵크 재즈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은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음악사에서 사랑과 평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수많은 굴절과 좌절로 얼룩진 한국 음악사의 여러 질문들은 이들의 존재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만약 대마초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1세대 그룹사운드들이 주류 가요계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포크 진영의 유능한 송라이터들이 좀더 활발하게 그룹사운드와 결합했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는 단 하나 뿐이다. 그 수많은 굴절과 좌절을 견뎌 이겨낸 밴드가 오직 이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과 평화는 진정한 의미의 생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뜸 했었지]는 이들의 음악 인생이 절정에 올랐던 시기의 기록물이다. 이는 또한 한국 포크와 1세대 그룹사운드의 끈질긴 생명력과 저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제 남은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질 수 있도록 이 앨범이 새롭게 재발매되는 일이다.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작품이 수십년 묵은 중고 LP로만 존재하는 현실은 그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20030417 | 이기웅 이기웅 keewlee@hotmail.com
음악하는 친구들은 「울고 싶어라」 때문에 3집이 망했다고 했다” -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 최이철 인터뷰
‘사랑과 평화’ 앨범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사랑과 평화’는 밴드마저 트로트에 경도된 시절에 난 데 없이 ‘펑키(Funky)’ 사운드를 가요에 심는, 돌발적 도발적 밴드였다. 최이철(59)은 그 시절,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평화’의 전성기를 이끌고 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기억된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만난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사랑과 평화’ 그리고 그 이전의 밴드 ‘서울 나그네’ 시절을 추억해냈다.
글ㆍ사진 | 이즘
1978년 겨울을 강타한 록밴드 ‘사랑과 평화’의 「한 동안 뜸했었지」는 잊을 수 없다. 딱 1년 전 ‘산울림’의 「아니 벌써」도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충격에 있어서 이 곡 또한 못지않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동안 뜸했었지, 웬 일인가 궁금했었지’ 대목을 소리 높여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이 곡의 재미와 동시에 밴드의 실력을 알아봤다. 전주만 들어도 ‘프로’연주자들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릴 만큼 ‘사랑과 평화’는 펑키 리듬을 표현해내는 숙련된 연주력과 노래로 충격파를 불렀다.
‘사랑과 평화’는 밴드마저 트로트에 경도된 시절에 난 데 없이 ‘펑키(Funky)’ 사운드를 가요에 심는, 돌발적 도발적 밴드였다. 최이철(59)은 그 시절,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평화’의 전성기를 이끌고 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기억된다. 홍대 상상마당에서 만난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사랑과 평화’ 그리고 그 이전의 밴드 ‘서울 나그네’ 시절을 추억해냈다.
-「한동안 뜸했었지」가 1978년에 늦을 가을에 나왔죠?
정확히 10월28일 날 앨범이 나왔어요. 이제는 전설이 된 TBC ‘쇼쇼쇼’ 프로였죠. 전우중씨가 PD로 있을 때, 3번 방송을 나갔는데 그 다음부터 정신이 없더라고. 사람 혼을 빼더라고요. 하루에 2시간 밖에 못 자고, 이불을 갖고 다니면서 활동을 했을 정도니.
- '사랑과 평화'와 그 전신인 '서울나그네'의 라인업이 거의 같았는데…
똑같은데, 건반이 한 명 더 늘어났죠. 원래는 김명곤이 했는데 그 후에 이근수이라고 한 명을 더 쓰게 되었어요. 그 때 멤버가 나(보컬, 기타), 김명곤(키보드), 이근수(키보드), 김태흥(드럼), 이남이(베이스) 이렇게 다섯 명이었는데 벌써 셋이 죽었잖아요. 이근수랑 나만 남고. 김태흥씨도 1983년에 자동차사고로 떠났고. 베이스는 그 이후로 많이 바뀌었어요. 이남이씨는 나중 신중현씨(엽전들)랑도 하시고.
- 1976년에 ‘서울나그네’가 있었고, 1978년 10월 ‘사랑과 평화’로 나오기 전까지 약 2년간의 공백동안 ‘산울림’이 등장합니다.
이게 ‘사랑과 평화’의 활동 개시에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나요. 산울림은 아마추어인데다가 학생들이었지요.
그 정도 시차는 아니고 동시에 나왔을 것이에요. 산울림이 1977년에 처음으로 「아니 벌써」로 나왔을 때 트레이닝이나 좀 하고 나오지(웃음) 그런 생각은 했는데. 나중에 네 팀이 같이 다녔어요. 우리(사랑과 평화), 산울림, 김트리오, 와일드 캣츠였죠. 그리고 조금 뒤에 나오긴 했지만 ‘송골매’랑도 같이 다녔고. 난 항상 산울림 음악을 높이 사요. 그 친구들 음악 실력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 친구 음악이 나와 딱 한번 들어도 산울림 색깔이 분명했다고 이야기하죠. ‘음악은 이게 중요한 것!’이라고 애들한테 지금도 그렇게 말하곤 하죠.
- 그럼 산울림 음악을 인정한다는 의미인가요?
그렇죠. 가사도 그렇고. 음악도, 편곡상이나 볼 때는.
- ‘서울나그네’ 시절을 들려주신다면.
1976년 ‘서울나그네’는 좀 말한 것처럼 사랑과 평화 1집 멤버에서 이근수만 없던 4인조였어요. 노래는 김명곤과 내가 둘이 했고. 옛날에 동아방송에 김병후 PD라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방송국 스튜디오를 빌려줘서 거기서 연습을 했어요. 매일 동아방송에 가서 연습하고 친해지다 보니까 나중에 방송 로고송 같은 것도 만들어주고 그랬는데. 밑에는 동아일보고 위에는 방송국이던 때.
- 그 분이 왜 ‘서울나그네’를 눈여겨봤을까요?
이장희 형이 라디오 진행을 했잖아요. 장희형이 우리를 소개시켜 준거지. 그렇다고 장희형이 우리를 제작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명동의 ‘로열 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하던 때, 누가 들어오더니 탁자에 모자를 탁자에 딱 올려놓고 콧수염 기른 양반이 술도 안 시키고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에요. 한동안 그러다가 또 그냥 가. 그러더니 언제는 나를 딱 부르더라고. 그때가 1974년으로 ‘서울나그네’ 하기 전에 ‘영 에이스’라는 팀에서 연주하고 있을 때였지.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 그 때 이장희씨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건 너」를 불러서 그런 거죠. 거기서 있다가 나중에 명동에서 ‘서울나그네’로 업소에서 공연을 하는데 거기도 매일 오셨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저를 보고 “너 스타 되는 거 한 번 보고 싶다, 레코딩 한번 하자.”고 그래요. 그런데 그때 레코딩 하는 밴드가 주위에 어디 있어요?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장희 형이 집까지 찾아와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엔 “합시다.” 그랬죠. 그러고 나서 레코딩을 시작했는데 아마 1978년 2월부터였을 겁니다.
- 음반 만드는데 소요된 시간은?
오래 걸렸죠. 우리는 멤버가 작곡을 다 했으니까. 그리고 그 때는 2채널이잖아. 틀리면 전부 몽땅 다섯 명이 들어가서 다시 연주하고 노래해야했으니까. ‘원 테이크’였단 거지. 다들 워낙 잘하니까 연습 조금 해보고 들어가면 거의 한방에 끝나다시피 했어요. 다만 작곡하는 시간이 있다 보니까 오래 걸렸죠. 그 때 주위에 ‘데블스’, ‘템페스트’같은 팀들이 있었는데 솔직히 우리는 그런 팀의 음악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냥 트로트스타일을 싫어했어요. 「한동안 뜸했었지」를 편곡했을 때도 최대한 뽕짝 냄새가 안 나게 하려고 전주랑 간주 부분도 신경을 많이 썼죠. 주위 사람들은 우리가 괴상한 음악 한다고 싫어했어요. 아줌마들이 뭐라고 했냐면 바가지 엎어놓고 긁는 소리 같다는 거야. 베이스 소리가 그렇게 나왔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신경 안 썼지(웃음).
- 당시 대중들의 열띤 반응에 흡족했나요?
「한동안 뜸했었지」를 발표하고 나서 2달 활동했는데 그해 연말 TBC에서 7대가수상을 받았잖아요. 너무 바빠지게 된 거야. 음악도 다 재미도 없어지게 되고. 전에 음악 했던 미8군은 자유롭잖아요. 빨개 벗고 연주하기도 하고. 나중에 멤버들 모아놓고 음악도 재미없고 그러니 미8군으로 다시 들어가자 그랬더니 다들 나보고 미친놈이래.(웃음) 한창때 「한동안 뜸했었지」를 하루에 네다섯 번 불렀으니까 얼마나 지겨웠겠수.
- ‘사랑과 평화’ 1집에 수록된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연주를 하는 팀이 있나 경이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김명곤이 그 때 건반을 치는 것을 보면 무슨 벌레가 연주하는 거 같아. ‘따라라라라라라’ 하면서. 그 친구가 아코디언을 또 잘해요. 자기 아버지 것으로 연주했는데 손가락이 날라 다녔어요. 예스(Yes)의 「Long distance runaround」는 정말 죽였지. 명곤이한테 고마운 게 또 뭐냐면 조용한 곡을 할 때 실력이 나오는 거야. 스탠더드 재즈 같은 것. 나나 멤버들도 옆에서 연주하다보니까 같이 하게 되는 거야.
- 고 김명곤씨는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하네요.
김명곤은 처음에 만났던 게 1974년도일거야. 대구에 있던 명곤이 옆방에 살았는데 소주를 네다섯 병 혼자 마시고 있는 거야. 하루는 연주를 보니까 정말 잘하는 것이에요. 아버지가 전주MBC 악단장이었다 하더라고. 동갑(1953년생)이고 서로 알아보니까 친해졌어. 그러다보니 우리 멤버들(영 에이스)보다 명곤이랑 더 친해진 거야. 코드워크에 밝은 친구였고 그러다보니 그룹 알기를 우습게 알았지. 내가 하루는 시간 좀 내봐라 해서 내 방에 데리고 가서 헤드폰으로 버디 마일스(Buddy Miles)노래를 들려줬어요. 그때 뭉치게 된 거지. 결국에는 베이스로 김태욱, 명곤이(건반)랑 나(기타)랑 김태흥(드럼) 4인조로 뭉쳤어요. 1972년에. 김태흥씨는 나랑 처음 음악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같이 했어요. 그때부터 미8군에서 음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인기 참 많았었지.
- 「한동안 뜸했었지」는 이장희가 만든 곡은 분명한데 편곡자는 누군가요?
이장희씨가 작사 작곡을 하고, 편곡은 내가 했죠. 그런데 재킷에 잘못 나왔어. 그래서 장희형에게 따졌지. “형, 밤새 동안 잠도 안자고 내가 편곡해서 만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도 했지만, 판도 다시 찍고 해야 하니까 귀찮아서 그대로 나온 거죠. 그래도 그 형이 양심이 있는 분이라 저작권 협회에 이야기해서 편곡자는 제 이름으로 되어있어요.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도 장희형 곡이고, 편곡은 내가 하고. 나머지 곡들은 김명곤이랑 내가 작곡한 것들이고. 장희형이 그때 대마초 사건에 걸렸기 때문에 본명으로 안 하고 아들 이름인 이원호로 작곡자 명을 썼었어요. 우리도 걸려서 겪어봤지만 장희 형은 당시 3년간 연예활동 중지였어요.
- 김태흥씨에 대해 얘기하신다면.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 같이 살았어요. 네다섯 살 때부터. 어렸을 때 8군에 들어갔을 때 같이 드럼 치던 친구가 시원치 않았어요. 그런데 태흥이형이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Leiber and Stoller)의 「Kansas city」를 완전 다르게 연주하는 거야. “바로 저거다”해서 “같이 해볼래요?” 그랬죠. 내가 연주한 것을 봤는지 형도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더라고. 한마디로 형 드럼은 굉장했어. 더 좋았던 것은 그 형이 해병대 군악대에 들어갔다 오더니 장르 폭이 훨씬 넓어진 거였지. 펑키 스타일 곡을 무대에서 연주하면, 앨범의 곡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날아다니더라고.
- 개인적으로 최고의 연주 라인업은 언제였다고 생각하나요?
사랑과 평화 1기요. 남이형보다는 사르보랑 할 때. 나랑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사람이 김명곤과 사르보인데 사르보는 우리나라에 베이스 기타를 때리면서 연주하는 그거 퍼뜨린 인물이에요. 이탈리아 출신이었지. 미8군에 또 유명한 프랑코 노마노라는 친구도 있었지. 나이도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에요. 원래는 피아노인데 베이스도 정확하게 치더라고.
- 최이철 기타 연주의 생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 그저 주어진 대로 연주하는 것? 나는 음을 많이 나열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마다 느낌이 다른 연주가 아닐까 싶어요. 지금도 그래 지금도. 똑같은 노래를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감이 달라. 음은 똑같이 칠 수 있다고 해도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서 연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나도 어릴 때부터 코피도 흘리고 일어나자마자 기타치고 연습하고 그랬는데, 그게 내가 뭐 계획을 세우고 “이것을 떼겠다.” 하고 연습한 게 아니라 좋아서 친 것이에요.
- 2집은 1980년에 나오고 3집이 1987년에 나오지요. 공백이 길었습니다.
멤버십이 깨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잘못했지 왜냐하면… 솔직히 이야기해도 되나. 옛날에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 재벌 집 아들이 많이 놀러왔어요. 그 친구들이 오면 (이)남이 형이 술을 있는 대로 먹으니까 인사불성이 돼서 베이스를 자꾸 이상하게 치는 거예요. 그래서 “나 안 해” 그랬죠. 그러니까 남이 형이 마지막 날, 타워 호텔에서 “내가 노래하나 만들었는데 이거 한번 해보자.”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키가 뭐에요”하니까, A 키라면서 그때 ‘울고 싶어라’를 불렀어요. 코드도 간단했고. 그게 1980년도 10월 달이었을 것이에요.
- 그 사이에는 무엇을 했나요?
일단 음반 활동을 못했죠. 그 대신에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업소를 전전했어요. 방송금지가 되어서. 1983년 대마초 사건 때문에. 1983년에서 1987년에는 음반활동을 못했고. 야간업소도 원칙적으로 안 되었는데 공개적으로만 하지 않았으면 공연은 할 수 있었어요.
- 나중 「울고 싶어라」가 히트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1986년에 큰애 백일이었을 때 남이 형이 찾아오셨어요. 잔치다 보니까 음악 하는 분들이 많이 모이셨는데 남이 형이 다시 음악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말했죠. 그래서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겨울바다」처럼 재즈적으로 변형해서 부르던 차에, 남이 형이 「울고 싶어라」는 꼭 한번 넣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넣은 것이에요. 당시 송창의 MBC PD가 앨범을 듣더니 “방송 한 번 합시다.”라면서 「울고 싶어라」를 찍더라고.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미국 공연을 잠깐 갔다 왔는데 보니까 「울고 싶어라」가 차트 2위까지 올라가 있더라고요. 결국에는 「한동안 뜸했었지」처럼 매일 또 그 곡을 하니까 미쳐버리겠더라고. 음악 하는 친구들은 3집이 그 노래 때문에 망쳤다고 했지.
- 사랑과 평화 1집은 펑키 사운드였습니다. 펑크 하는 아티스들한테도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요.
옛날에는 늙어 죽을 때까지 록만 할 줄 알았는데. 미 8군에 주크박스가 있었어요. 그런데 미국 애들은 음악 듣는 게 거의 몇 곡만 가지고 계속 들어. 게다가 도넛판이 들어오려면 미군 부대에서는 한 1주일 만에 들어오는데,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1년 정도 걸렸어요. 우리는 금방 들었던 거야. 그때 뭐 코모도스(Commodores) 그런 팀들 많이 들었고. 훨씬 전에 소울 뮤직 중에서는 윌슨 피켓(Wilson Pickett),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을 많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을 지금 보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 매일 주크박스에 그런 노래들이 나오니까 김명곤이랑 양쪽에 앉아서 그냥 그 자리에서 따가지고 연습하는 거야. 또 실력이 있으니까 그 다음날 음악을 하고 그래서 미국 애들은 너무 좋아했지. 주크박스로 듣는 걸 실제로 해주니까.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 그룹들이 해 온 것이지.(웃음)
- ‘사랑과 평화’ 앨범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내가 한 것은 1996년 6집까지였는데 나는 앨범 만들 때마다 후회하죠. “왜 이렇게 했을꼬…”하고. 그중에서 「울고 싶어라」 있는 3집. 그건 정말 좋았어요. 수록곡 중에서 「노래는 숲에 흐르고」, 「작은 섬 모두어」가 좋았어요. 요즘 들어서 공연하러 돌아다니면 직장인 밴드가 많이 보여요. 근데 보니까 그 곡들을 연주하더라고. “아니,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곡이 좋아서 알고 있었다고 하대요.
- 주변이 다 형들이었는데도 최이철 씨가 리더를 맡았습니다.
음악에는 확실히 흐름이 있잖아요. 그 흐름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팀의 리더가 중요한 것이에요. 리더가 지킬 것은 지키고 중간을 잡아주고 해야죠. 대인관계는 형들이 하더라도 음악만큼은 내가 했지. 음악 가지고 싸우기도 많이 했어. 연주 끝나고 삼겹살 먹으면서도 싸우고. 남이 형이 술 마시면 그걸 잘해. 인생이야기 같은 것을 많이 하고. 그런데 그 이야기 끝까지 들어준 것은 나밖에 없어.(웃음)
-거북이가 「한동안 뜸했었지」를 리메이크를 했지요. 듣고 나서 느낌이 어땠는지요?
랩도 나오고 새롭긴 했는데, 결정적인 게 없잖아요. 코러스 ‘밤이면 창을 열고~’ 이 부분을 왜 뺐을까 싶더라고. 사실은 처음에 리메이크 한 줄도 몰랐어요. TV를 잘 안보니까. 나중에 주유소에서 기름 넣다가 알게 된 거에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더라고.(웃음)
- ‘아이돌’부터 시작해서 ‘서울나그네’ ‘사랑과 평화’를 거쳐 40년 동안 음악을 해온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입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아쉬움이 있다면, 그렇게 ‘사랑과 평화’로 거의 반평생을 보냈는데 내가 팀을 잘못 이끌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더욱 격상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런 것이 가장 아쉽지요.
인터뷰: 임진모, 홍혁의
정리: 임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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