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야 할 고구려사 | |
번호 : 170 글쓴이 : Van돌이 |
조회 : 1237 스크랩 : 2 날짜 : 2005.02.06 21:41 |
많은 분들이 위,촉,오 삼국지에 대해서는 '정사'와 '연의'뿐만 아니라 많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역사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는듯 하여
글을 남깁니다. 고구려 중심적인 다소 편협된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 하더라도
중화사상으로 역사 자체를 다시 써버린 중국사관보다는 지나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아래 어떤 분의 '위 VS 고구려' 란 제목의 글과 답글을 보니 우리가 자긍심을 가지고
지켜야할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중국의 관점으로 즉 중화주의적인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고구려를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죠.^^;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비록 진실된 역사와는 거리가 멀지언정 자국민에게는 역사의
큰 자긍심으로 남아 있듯이 우리 역사도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우리의 고구려 역사 속으로 빠져 볼까요? ^^;
고구려와 위나라의 연합군이 연나라를 정벌한 이후 이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듯하더니 이내 위나라와 고구려는 긴장 상태에 들어갑니다. 즉 동북 지역의 세력 균형이
요동을 사이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중원 진출을 모색하려 하고
위나라는 요동에 실질적 소유권에 대한 정책을 바꾸지 않습니다.
위나라와 고구려의 요동 전쟁을 논하기 전에 우선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는 성향적으로 매우 호전적이며 상무적인 나라였습니다.
지형적으로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상황으로 다른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당시 동천왕은 태백산(현재 백두산) 주변에 있던 많은 소규모 부족 국가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북으로는 부여뿐만 아니라 남동으로는 동옥저까지 병합합니다.
고구려가 초기에 환도성에 수도를 정한 것은 넓은 강과 높은 산에 의지하여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실 국가적 기틀을 잡아가고 있던 고구려에게는 장기적으로
발전 저해 요소였습니다. 이에 동천왕은 요동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한반도와 중국의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국가 수입원을 증대시키고 요동의 곡창지대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에 동천왕은 적극적인 강병책을 채택하고 많은 인재가 동천왕 밑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이 중 한 명이 바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 바로 동부 고원지대 출신의 유유(紐由)였습니다.
삼국사기에 “242년 (동천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王遣將, 襲破 遼東 西
安平)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위나라의 대한 기록을 보면...
“241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고,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六安)을
공격하였다. 거기장군 주연(朱然)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사중(
였다. 이에 사마의는 번성을 구원하였다(오서 : 오주전)”
즉 위나라는 그런 고구려의 움직임에 대해 신경 쓸 겨를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천왕은 동시에 신라의 북쪽 지역을 공략하게 되는데 신라에서는 장군 우로를 보내
막으려 했으나 실패합니다.
동천왕의 서진과 남진이란 정책은 점차적으로 중국(위나라)에게 위협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위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유주자사 관구검(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는 임무를 부여하게 됩니다.
혹자가 '관구검'이란 장수가 위나라의 작은 장수라 과소평가 합니다.
당시 관구검은 사마의와 함께 요동에서 공손연을 정벌한 후 안읍후(安邑侯)에 봉해졌으며
식읍으로는 3천 9백호를 받았습니다. 이런 관구검을 누가 작은 장수라 하겠습니까?
사마의가 직접 지휘한 연나라 정벌에 야전 사령관으로 '관구검'이 나섰다는 사실은
결코 '관구검'이란 장수가 많이 알려진 위나라의 명장들 보다 작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위나라의 최고실세인 당대 최고 군사전략가 사마의가 직접 요동정벌을 지휘한 것이나
'관구검'이라는 당대의 명장이 이 지역을 방어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의 국가 이데올리기는 천손사상(天孫思想), 즉 하늘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상입니다.
광개토대왕비에 주몽은 하늘의 자손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고구려의 벽화에는 이 같은 천손사상을 대변하는 해와 달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이 주변국에 위험한 이유는 주변의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의 근본적인 목적은 중원 진출이었습니다.
큰 의미로 천손사상으로 중원의 이데올로기(중화사상)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한족의 중화사상에 대한 정면 도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드디어 246년 2월 위나라의 관구검은 각 군대의 보병과 기병 1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위서: 관구검전) 하지만 이 수치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과 고구려군의 1차 교전에서 6천여 명이 사살되는데, 그러면 4천여 명으로 2만 이상의
고구려군을 대파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사실 이 때 위나라군은 유주지역에서 차출된 병력(관구검의 직할부대)이 1만여 명이었던
것 같고, 요동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4~5만 이상의 위나라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 동천왕의 말 가운데는 “위나라의 대군이 고구려의 소군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위나라의 군세가 고구려에 비하여 매우 컸음을 의미합니다.
위나라의 적벽대전 당시의 병력과 비슷했을 겁니다.
정사(진수의 삼국지)에 나타나는 위나라 관구검의 병력의 수는 그 규모가 매우 축소 왜곡된
것으로 이것은 고구려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도 보입니다.
(아주 우스운 진수의 역사 왜곡이죠. 중화사상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
관구검이 현도로 진격하자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저지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한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172) 고구려의 노장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좌원에서 견벽청야(堅壁淸野 : 성벽을 굳게 하고 백성들을 모조리 성안으로 이주시키고 곡식
을 모조리 거둬들여 적의 군량미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의 지구전으로 한군을 궤멸시켰고
고국천왕은 한군을 포위하여 섬멸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천왕은 이와같은 지역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기반으로 비류수에서는 첫 접전을 승리로
이끕니다. 하지만 이후에 동천왕은 지키기에 만족하지 않고 방어하기 좋은 산악지역을
벗어나 평원으로 관구검을 추격하게 됩니다.
관구검은 위에서 알아주는 진법과 매복의 능한 장수였습니다. 평원에서의 전투는 진법이
무척 중요합니다. 비록 패주하는 군대였고 첫 번째 접전에서 3000이 전사했다고는 하나
4만의 병력이 평원에서 진법을 펼친다면 병력에서 열세에 있는 동천왕으로써는 패할 수밖에
없는 전투였을 겁니다.
관구검은 고구려군이 평원으로 몰려나오자 자신의 주특기인 진법을 이용하여 고구려군을
섬멸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에 사용된 진법은 방형진법(方形陣法)인데 병력을 네 군데의 모서리에 배치하고,
그 내부에 들어온 고구려군을 포위 섬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유인당한 고구려군은 관구검과 왕기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여 당시 2만여 명의 병력
가운데 죽은 자가 1만 8천에 이른다고 합니다(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
人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기)
그해 10월 고구려의 환도성이 함락되고 위장군 왕기의 추격으로 동천왕이 강계,장진,
황초령을 거쳐 남옥저 방면으로 피신했고 다시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했다.
이 때 고구려의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키게 됩니다.
이로써 고구려와 위나라의 요동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면 둘 중 어느나라가 전쟁 이후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을까요?
바로 고구려입니다. 요동전쟁 이후 위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자제하게 되어 고구려는
요동지역의 영향력을 조금씩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후 영토 확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정사'나 '연의'에서는 많은 이민족이 등장하지만 모두 한족의 역사적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해준 조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틀립니다. 위와 오에서 외교적으로
고구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으며 국가적으로는 평행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중원을 바라보고 대외 팽창정책을 과감하게 펼쳤던 민족이였으며 그 군사력은 중국 한족에
비교하여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한가지 예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많은 수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수레들은 중국 것과
틀리게 작고 가볍게 보입니다. 바로 전투에 쓰였던 거죠. 군사 기술도 중국의 것보다
어떤 면에선 앞서 있었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안악 3호 고분을 보면 고구려 군대의 모습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고분은 고구려-위 전쟁보다는 130여년 후인 대략 37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철갑기병,경기병,창수,환도수,부월수등의 모습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안악고분과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의 초급 교육기관인 경당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활쏘기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특히 고구려는 말 위에서 쏘는 각궁이 있었는데
이것은 활 길이가 짧아 다루기가 쉽고 화살도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명예롭게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예를 들면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태자였던 해명은 인접한 나라와의 국제관계 속에서
강경책을 고수하다 부왕에게 오해를 사서 자결할 것을 명령받자 땅에 창을 꽂아놓고 말을
달려와 창에 찔려 장렬하게 죽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유리왕기)고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결혼할 때 수의까지 같이 만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수의는 국가적 대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역사 바꾸기에만 능한 중원 한족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정신임에 틀림없습니다.
'천손 사상'.....고구려의 국가 이데올로기
고구려가 중원 진출에 성공했다면 중화 사상은 사라졌겠지요.
온갖 고초를 겪고 등극한 동천왕이 재위 기간 중에 국가적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위에 맞서다는 점, 동천왕이 죽자 근신 중에 따라 죽으려 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새 왕이 이에 대하여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하여 금지시켰으나 장례 당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 '정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죠.^^;
그리고 우리의 '삼국 사기'에서는 동천왕의 뛰어난 리더쉽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장렬한 유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신속하게 위군을 공격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게
된 것도 기록중에 하나죠.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중원의 한족들은 자기들 이익으로만 이민족을 대했죠. 신뢰가 없던
외교 정책이였습니다. 자기들 힘이 약하면 그들을 회유해 대신 싸우게 하고 나중에 자신들의
힘이 강성해지면 정벌하고.....예를 들어 제갈량이 강족을 이용해 위의 장안을 점령하려 했죠.
하지만 고구려는 틀렸습니다.
오나라의 손권이 위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로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사신을 죽여 연나라 정벌 후 동맹 관계에 있던 위나라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사실 고구려에게도 요동 진출을 위해서는 오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 이익이였을
겁니다. 하지만 국가간 대의를 지킨 고구려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요동은 위나라의 땅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중간 요충 지대에 불과했죠. 그 요충 지대가 고구려로 인해 사라지자
직접 고구려와 마주보게 될 위나라는 먼저 겁을 먹고 국가 총력을 다해 고구려를
침략한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결코 고구려가 위나라에 비해 작은 나라가 아니였음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중국일지는 몰라도 그 세상은 기껏해야 하늘 밑에 있음을
그들은 알까요? 아마 고구려인들에게는 중원의 한족이 우습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하늘의 자손들이기에.......^^ ----------------------------------------------------------------------------
우리는 저 떼놈들의 말도 안되는 역사에 열광합니다.
조조,유비,손권,제갈량....등등 인물에 열광하고....
하지만 고구려의 '동천왕'과 '유유'란 인물이 그들보다 뛰어남은 알지 못하고
우리들 스스로 깍아내리기까지 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동북 아시아의 중심은 고구려였습니다. 사실 중원의 한족의 역사의 반은 이민족의 역사에
포함됩니다. 금나라..원나라...
그에 비해 고구려는 그 명맥이 처음과 끝이 일치하며 '천손 사상' 의 국가적 이데올리기도
'중화 사상'이라는 자기 방어적이며, 불합리한 한족의 이데올로리기 하고는 그 차원이
틀립니다. 중국의 관점으로 고구려가 중원의 변방 국가로만 취급되어지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이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고구려가 얼마나 많은 중원의 왕조를 바뀌게
했으며 얼마나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는지 그리고 진정한 동북 아시아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당시 고구려인들은 알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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