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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왜곡과정과 조선왕실 최대의 왜곡비밀 즉 조선왕조 최대 최고의 극비 아킬레스는 무엇인가. 이는 사서 왜곡과 고의적 정책적 인멸로 인한 사료빈곤으로 완전 폭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필자도 이에 대한 것을 가급적 소상히 알고 싶었으나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가 조선시대 태종의 역사수탈과 왜곡인멸이 김부식의 수탈에 못지 않을 정도로 많았으며 김부식의 역사수탈이 조선총독부의 20만 부 역사수탈에 못지 않았다는 연장선에서 실로 충격적인 조선왕조의 최고의 아킬레스건에 대한 윤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불가분 가야사 문제와 근자에 재야사학자 오재성, 이중재 2인이 주장하고 있는 대륙 백제, 대륙신라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대륙 고려사와 조선왕조의 비밀 등이 맞물려 있다. 여기서는 많은 부분 오재성 이중재의 쟁점을 그대로 소개하려 하며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려 한다. 또 세종 충녕의 죽마고우이자 절친한 학우로 신료로서 세종의 명을 받고 함경도 자신의 선산에서 대대적으로 사료를 소각처분하고 조선왕실의 비밀을 세조에게 밝히려 했다가 세조에게 죽은 김문기 가문에 전해지고 있는 조선왕실의 비밀과 유훈을 그대로 가감 없이 인용 소개하려 한다.
따라서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줄 이 부분은 일반 독자여러분이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독자여러분께서는 얼핏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적지 않은 곁가지들은 잠시 덮어두고 역사왜곡의 전체 대강만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이는 몇몇 곁가지 때문에 대강의 본질이 훼손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본래 본서의 의도가 아니다. 필자는 본래 해와 달을 그리고 우주 대자연과 함께 인류사가 어우러져 돌아가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려 했다. 본서가 의도하는 전체 그림 중에 이 부분은 사실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한 것이며 정묘한 묘사라기 보다는 크로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정도의 차원으로 소개하는데 그치려 함을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역사왜곡의 전체 대강만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김수로 가야사의 역사를 신라가 왜곡하고, 신라를 비롯한 3국사를 고려가 왜곡하고, 고려사를 조선이 비틀며 왜곡한 물고 물리는 왜곡과 인멸의 역사를 생각하면, 존주 화하사관을 세우기 위해 공자가 동이족의 영적 문서 사서삼경을 위조 개찬한 것과, 사마천이 역사왜곡을 통해 화하주의의 뼈대를 세우려 한 것과, 일본이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위조해 2600년 천황 만세일계의 역사를 드러내려 한 것을 우리의 왜곡사와 연관지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실의 비밀은 어느 정도씩 있는 법이며, 역사는 정통과 이단의 역사며 강자만이 스스로를 정통화 시킬 수 있다는 약육강식의 패권논리는 제민혁세(濟民革世)의 선천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지나사의 왜곡이 그들 민족에게 가려져 있고 일본 천황가의 왜곡이 그들 민족에겐 철저히 가려져 있다. 우리의 고려사와 조선사의 역사왜곡 또한 철저히 가려져 있다면 이 또한 과장이 될 것인가? 왜왕 아키히토가 「속일본기」를 거론하며 일본천황가가 백제왕실의 후예로 무령왕의 자식이 일본천황이 되었다는 발표를 했다. 왜곡된 일본사에서는 사실 엄청난 충격일텐데도 일본인들은 별로 피부에 안 닿는지 시큰둥한 표정이다.(관련기사 아래참조)
관련기사1.
"백제왕 자손이 옛 천황 생모"
[도쿄=오대영 특파원]아키히토(明仁.사진) 일본 국왕이 고대 한.일간의 교류사실을 강조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은 23일 가진 특별 기자회견에서 한.일 양국의 인적.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일 국왕이 직접 일 왕실과 백제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과 한국민 간에는 예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자세히 나와 있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초빙돼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양국의 문화교류는 훗날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면서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당시 일본에 오경(五經)박사가 대대로 초빙됐으며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궁내청 악사(樂師) 중 당시 한국에서 이주해온 사람의 자손도 있으며, 대를 이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그러한 (긍정적인)교류만이 전부는 아니었다"면서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왕은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양국민의 이해와 신뢰감이 깊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dayyoung@joongang.co.kr>
관련기사2. [시론] 일왕가(日王家) 백제 유래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720년)나 고사기(712년)등 고대 사서를 근거로 고대부터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일왕(日王)은 아마테라스 오카미(天照大神)로부터 한 계통으로 계승된 소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한 군주라고 전해지고 믿어져 왔다.
***萬世一系의 군주라 믿어
2차 세계대전 전이나 전쟁 중에는 절정에 다다라서 1억 신민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만세일계의 일왕에 의해 통치되는 국체를 자찬하고 국가의 자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만세일계의 황통사상에 대한 비판은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왕조가 몇번인가 바뀌었고, 왕실이 백제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패전 후 학문의 자유가 허용되자 1952년 와세다대학의 미즈노 유(水野祐)교수가 일본에서 왕실은 만세일계가 아니고 세번 교체되었으며 현 일왕가는 만세일계 중의 26대 일왕으로 되어 있는 게이타이 일왕에서 시작되는 세번째 왕조에 속한다는 소위 삼왕조 교체설을 주장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설은 우익들의 테러 위협과 반론 속에서도 큰 줄거리는 학문적으로도 정착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인지돼 있다.
그러나 현 일왕가가 백제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확산돼 갔다. 심증은 있으나 아직까지도 학자들은 연구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아키히토(明仁)일왕이 23일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간무(桓武)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왕실이 백제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모계(母系)의 백제설을 제기해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와 장래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방한 등을 염두에 두고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내지는 일본 왕실과의 우호관계를 환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왕의 발언은 그 의도와는 달리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묵시적으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공론화하기를 꺼리던 일왕가의 백제유래설에 대해 금기시돼온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학문적으로도 연구할 수 있고, 공론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아키히토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한.일 양국에서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만세일계의 황통사상에 대한 금기 중의 금기의 일부를 일왕이 앞장서서 깨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진보적인 아사히(朝日)신문만이 이 사실을 보도하고 여타 신문들은 한국신문의 보도를 인용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일왕가는 물론이고 모계가 백제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조차도 매스컴이 직접 공론화하기를 꺼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을 각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학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바탕으로 간무(桓武)일왕(737~806)의 어머니는 물론이고 15대 오닌(應神)일왕 (5세기 초)이나 26대 게이타이(繼體)일왕 (507~531), 35대 및 37대의 사이메이(齊明)일왕(642~645, 655~661)등의 백제인설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일선동조론 등 경계해야
한국의 매스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일왕가가 백제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싶은 것이다. 일본의 매스컴은 한국에 대한 고대의 콤플렉스를 공론화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한국의 매스컴은 일본에 대한 근대에서의 콤플렉스를 고대에서의 우월성을 통해 해소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한국의 매스컴이 주의해야 할 점은 과거 한일합방의 역사적 근거도 양민족의 조상이 같다는 설을 배경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대에 백제와 일본이 어떠한 틀속에서 왕가간의 특수한 관계가 생겨났는지를 밝혀야지 단순히 양국 왕실 사이의 특수한 혈연관계만을 강조한다면 또다시 일선동조론과 같이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이론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김현구(고려대 교수 ․일본고대사)-
자료3.
자료 1,2의 기록보다 약간 업그레이드 된 최근의 기사를 보자. <img src=http://newsweek.joins.com/200203/521/image/cover2002521.jpg><img src=http://www.nwj.ne.jp/public/toppage/20020320/images/tophyoushi.gif>
ꡒ내 몸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ꡓ
아키히토 일왕, ꡒ간무 천황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 후손ꡓ 충격 발언.
일본인은 민족-문화 형성에 미친 한국 유산을 바로보기 시작했다(George Wehrfritz 도쿄 지국장, Hideko Takayama 기자)
-일본 왕자 시라카베(白壁)의 둘째 부인은 백제 왕족의 후손이었다.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여인은 남편이 서기 770년 고닌(光仁)천황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살아 남았다. 그런데 황후와 태자가 천황을 해치는 주문을 걸었다는 죄로 투 옥되자, 다카노노 니가사의 아들이 태자가 되고 781년 일본의 50대 천황으로 등극했다. 그가 바로 간무(桓武) 천황이다.
생물학적으로 간무 천황의 절반은 한국인이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일본인들은 왕실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이 사실을 숨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역사적․문화적․혈통적 증거도 감추었다. 일본이 이처럼 한국과 공유한 역사를 부인하는 태도는 양국 관계에 계속 악영향을 미쳤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과거사 망각증을 일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수탈과 강제노역․종군위안부 등 한반도 강점기에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과거에 너무 집착한다고 못마땅해한다. 이렇게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오는 6월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양국의 오랜 긴장관계를 해소하려고 시도한 인물은 뜻밖에도 일왕 자신이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지난해 12월 68회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ꡒ나 자신과 관련해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ꡐ속일본기ꡑ에 적혀 있어 한국과의 緣을 느낀다ꡓ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 왕실이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키히토의 발언은 시기로 봐서도 다분히 계산적인 듯하다. 일본 왕실 관측통에 따르면 아키히토는 지난해 일본의 전시 만행 부분을 왜곡한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던 우익들의 목소리를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잠재우려 했다. 아키히토가 한국인들의 對일본 기여를 인정한 것은(음악․유교․불교 3가지를 언급했다)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달래려는 노력이었다. 왕실의 한 측근은 ꡒ천황은 진심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하길 원한다. 그 발언은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ꡓ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키히토의 발언이 13년 재위 기간 중 가장 의미심장하며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지난 50년간 일본이 전쟁기록을 숨긴다고 비난해온 한국과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일왕 자신이 이 오랜 설전을 끝내기 위해 직접 나서서 ꡒ역사를 기억하라ꡓ고 말하고 있다. 그의 전략은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명이 이웃 나라, 특히 한반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함으로써 주변국의 신뢰를 얻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은 가위 혁명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의 한 젊은 역사학자는 아키히토가 한국과의 혈연을 언급하자 충격을 받았다며 ꡒ일본의 현재 분위기에서 그 문제는 금기시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ꡓ고 말했다. 사실 일본 궁내청은 왕가의 무덤 2백30개를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며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계속 거부해왔다.
학자들은 궁내청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은 왕실의 한인 혈통에 관한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본다. 일본 교과서는 한인들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실과 관련된 소문을 즐겨 보도하는 TV의 낮 프로그램도 아키히토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주류 언론조차 그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한국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학자들이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최근부터다. 이것은 문화교류가 늘어나면서 양국의 연관성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이제 인류학자들은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1세기 초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생각한다. 언어학자들은 일본 왕실 의식에서 사용되는 말이 신라어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니가사 황후가 살던 시기에 교토(京都) 주변에서 사는 사람 중 백제 유민이 약 30%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교토大 우에다 마사키(上田正昭․74) 명예교수는 지금도 이와 관련된 연구의 가장 큰 결점이 기술․사상의 전래에만 집중하고 사람에 관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ꡒ아키히토의 발언은 백제의 여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중요하다ꡓ고 말했다. ꡒ그녀는 누구였던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녀의 가족은 왜 일본으로 왔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 사람들의 생애가 들어가야 역사가 흥미로워진다.ꡓ
일본의 건국신화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쪽의 규슈(九州)섬 다카치호(高千穗)라는 마을 아래에 골짜기가 있었고,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사악한 남동생과 싸운 후 그 골짜기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추방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후 아마테라스는 쌀의 신 니니기(瓊瓊杵)를 비롯한 자신의 자손들이 땅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다.
아마테라스는 일본 고유종교인 신토(神道)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으며, 그녀의 5대손 진무(神武)는 일본의 초대 천황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규슈의 이 골짜기에 내려가 시냇가에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돌멩이에 적은 다음 돌탑을 쌓는다. 2차대전 전에 발간된 한 여행 안내책자에는 ꡒ일본 제국의 왕실은 세계 여느 나라와 달리 하늘과 땅에서 시작해 영원히 계속된다ꡓ고 서술돼 있다.
이에 반대하는 이론이 전후에 제기됐다. 이 신화는 이민족의 침입을 뜻하거나, 이민족이 갖고 온 것이라는 설이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東京)大 교수는 1967년에 이 가능성을 연구했다. 이것은 2천년 전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에서 호전적인 몽골리안 기마민족이 규슈로 건너 왔으며 이들이 일본인의 지배층을 이룬 덴손(天孫)족이라는 연구에 근거한 이론이다.
최근에는 저명한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가 이 이론을 연구했다. 그는 쌀의 신 니니기가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온 덴손족으로 쌀 재배법과 새로운 문화를 도입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그 영향으로 원시적인 조몬(繩文) 부족시대를 끝내고 야요이(彌生)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일본에 온 도래인들이 다카치호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서기 300년 이후에는 사이토바루(西都原)에서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는 수백개의 열쇠구멍 모양의 무덤이 있다.
가장 큰 무덤은 한반도․만주에서 발견된 왕가의 무덤과 비슷하다. 그보다 작은 무덤 몇개는 1910년에 발굴됐고, 여기서 진흙으로 만든 고대 중국식 배 모형과 한국에서 발굴된 것과 유사한 금동제 말안장이 발견됐다. 우메하라는 ꡒ쌀을 재배하는 지식을 갖고 들어온 야요이인들이 조몬인과 섞여서 지금의 일본인이 탄생했다ꡓ고 결론지었다.
7세기 일본 제국의 형성에서도 그와 비슷한 한국인들의 영향이 밝혀졌다. 교토大 우에다 교수는 이것을 언급한 최초의 학자다. 1965년 그는 백제인 니가사가 간무 천황의 어머니이며, 나라(奈良)의 거대한 동불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료학자들은 그를 비난했으며, 극우주의자들은 수차례 그를 협박했다. 그는 ꡒ한 우익 인사는 나에게 ꡐ천벌을 받을 것ꡑ이라는 협박장을 보냈다ꡓ고 회상했다.
최근 들어 여러가지 발굴이 이뤄지면서 한반도의 이주민․기술․문화가 그 시대 문명의 중심을 형성했다는 그의 이론이 지지를 얻고 있다. 660년께 백제 유민 10만명이 야마토(大和)에 들어오면서 불교․한자․도자기 제조술․주조술을 전래했다. 일본 문명화의 중심지로 묘사되는 7세기의 아스카(飛鳥)는 여러 민족․문화가 하나로 융화된 국제도시였다.
이 지역의 무덤은 한반도식이다. 1972년 발굴된 다카마쓰즈카(古松塚) 고분에는 고구려의 복장을 한 남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여행 가이드는 이 무덤 주인인 이름 없는 귀족은 한국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런 사실이 논란을 일으켰느냐는 질문에 그는 ꡒ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ꡓ고만 말했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사실은 한반도가 일본에 끼친 영향 중 주된 것이 바로 인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은 17세기 들어 나타난 일본이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300년부터 이주가 있음을 확인했고,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의 3분의 1에서 많으면 절반까지가 어느 정도는 한인의 피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하고 1604년 수도를 에도(江戶)로 옮긴 뒤 쇄국정책을 썼던 시절에도 한인들은 계속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과 문화를 전파했다. 무관․유학자․화가․악사․의관들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배로 도착한 뒤 말을 타고 6개월 이상 걸려 에도에 도착하곤 했다. 조선통신사는 약 2백년 동안 모두 12차례 일본에 파견됐다.
그러나 모든 교류가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은 한반도를 침략해 해변 마을을 약탈하고 도공(陶工)들을 납치해갔다. 모두 합해 5만여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잡혀갔고 그중 도공들은 일본 엘리트층을 위해 도자기를 제조했다.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의 작은 마을 히가시이치키(東市來)에 가마를 가진 도예가 심수관(沈壽官)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ꡐ사쓰마ꡑ(薩摩) 도기를 창시한 심당길(沈當吉)의 14대손이다. ꡐ사쓰마ꡑ란 이름은 그 선조들을 납치한 군벌이 살았던 고을의 이름(현지명은 ꡐ가고시마ꡑ)이다. 아직도 한국 姓을 지키고 있는 그는 ꡒ우리의 역사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인내심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ꡓ고 말했다.
지금의 재일동포들은 그들이 일본에 도착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런 강인한 의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했다. 한국인들은 창씨개명을 해야 했고 강제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백50만명의 한인 노동자들을 일본으로 끌고가 광산․농장․공장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현재 재일동포의 대다수는 종속된 상태는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 60만명에 이르는 강제 노역자와 그들의 후손들은 거주권을 갖고 있지만 선거권이 없다. 40대의 한 저명한 재일교포 학자는 학교를 마치고 취직이 안돼 ꡒ야쿠자냐 교수냐ꡓ 둘 가운데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한 젊은 재일동포(35․웹 디자이너)는 마늘 냄새가 난다고 멸시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ꡒ어머니는 일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출신을 숨기기 위해 일본 이름을 쓴다ꡓ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이런 피해의식은 월드컵과 관련해서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겉으로는 협력을 내세운 공동개최이지만 결국은 누가 앞서는지를 가리는 시험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양국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 서로 경쟁했으며 공동개최로 결정이 난 뒤에도 서로 독자적인 조직위원회를 유지했고 대회 타이틀 표시에서 어느 나라의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하는지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결국 결승전을 일본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Korea-Japan으로 결정났다).
네덜란드인으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거스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이 일본팀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는 ꡒ우리가 프랑스에 4-0으로 지고, 일본이 그 얼마 전에 프랑스에 5-0으로 졌다면 우리 선수들은 프랑스에 진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런 비교가 터무니없다ꡓ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은 세계의 이목을 의식해 월드컵 대회 시작 전에 양국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주 양국은 한․일 관계사에 초점을 맞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달 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식에 일본 왕실에서 누가 참석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일본 궁내청은 일왕의 방한계획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외국어大에서 일본문화사를 가르치는 홍윤기(洪潤基) 교수는 아키히토 일왕이 개막식에 참석하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ꡒ한국으로서는 어쩌면 아키히토의 방문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보다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ꡓ고 말했다.
일본의 여러 전문가들은 아키히토의 발언이 ꡒ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ꡓ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니가사의 능이 있는 교토의 한 지역에 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가사 황후는 1천2백년 전에 만들어진 그녀의 능 곁에 살고 있는 이웃 주민들에게도 여전히 미스터리다.
산꼭대기의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어 꾸불꾸불한 산길로 접근할 수 있는 그 능은 등산객들과 개를 데리고 산책나온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산행 기점의 표지판은 ꡐ간무 천황 모친의 묘ꡑ로 표시돼 있다. 꼭대기에 도달하면 ꡐ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ꡑ이라는 표지판이 그녀의 이름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주민들로부터 들을 수 없다. 이 지역에서 30년 이상 거주해온 한 주부는 ꡒ그녀가 한인이라고? 난 그런 사실을 몰랐다ꡓ고 말했다. 이제는 일본인들이 한인 황후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시기가 왔다.- (With B. J. Lee in Seoul)
韓-日고대사의 비밀
일본 천황의 몸 속에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일본의 옛 문헌들에 나타나 있다. 홍 윤 기(한국외국어대 일본문화사 교수․for NWK)
-ꡐ일본 천황이 한국인ꡑ임을 밝혀주는 일본 고대의 문헌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ꡐ신찬성씨록ꡑ(新撰姓氏錄:서기 815년 편찬)에 그 사실이 나와 있다. ꡐ신찬성씨록ꡑ은 9세기 초 일본 왕실에서 만든 일종의 ꡐ왕실 족보ꡑ로, 이 고대사 책을 보면 제30대 ꡐ비타쓰(敏達) 천황(572~585년 재위)이 바로 백제 왕족ꡑ이란 기록이 나타난다. 그 왕실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간무(桓武) 천황으로, 비타쓰 천황은 간무 천황의 6대조이기도 하다.
여기서 간무 천황의 친어머니인 백제여인 화신립(和新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신립이란 여인은 8세기 당시 일본 왕실의 조신이었던 백제 왕족 화을계(和乙繼)의 딸이다. 그 무렵 일본 왕실의 시라카베(白壁) 왕자와 화신립 낭자가 결혼했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바로 야마베(山部) 왕자이며 그가 바로 훗날의 간무 천황이다. 화신립의 부군인 시라카베 왕자는 나이 61세에 비로소 왕위에 등극한 고닌(光仁)천황(770~781년 재위)이다.
고닌 천황은 제49대 왕이고 그의 아들인 간무 천황은 제50대 왕이다. 고닌 천황의 황후 화신립의 姓은 고닌 천황에 의해 뒷날 백제식 복성을 사용해 ꡐ고야신립ꡑ(高野新笠․다카노노 니가사)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 왕족과 귀족들은 당시 대개 복성을 썼는데 이것은 본국 백제에서 상류 계층이 흔히 복성을 썼기 때문이다. 간무 천황의 아버지 고닌도 백제인이라는 내용이 담긴 고대 문헌이 있다. 서기 1157년께 일본 왕실의 조신이었던 후지와라노 기요스케(藤原淸輔․1104~77년)가 쓴 책 ꡐ대초자ꡑ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한편 ꡐ신찬성씨록ꡑ은 간무 천황이 쓰기 시작하다 세상을 뜨자 그의 제5왕자인 만다친왕(萬多親王․788~830년)이 완성한 책이다. 이 왕실 족보를 보면 일본 왕실에 고대 한국인들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특히 백제 왕족인 비타쓰 천황은 나라(奈良) 땅에서 ꡐ백제대정궁ꡑ(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내용이 ꡐ일본서기ꡑ에 나온다.
또 ꡒ비타쓰의 친손자인 제33대 조메이(舒明) 천황도 나라땅의 백제강(百濟川) 옆에 백제궁(百濟宮)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세웠으며, 백제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ꡐ백제대빈ꡑ(백제왕실의 3년상)으로 장사를 지냈다ꡓ는 기록(ꡐ일본서기ꡑ․720)이 나온다.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는 ꡒ조메이 천황은 ꡐ백제천황ꡑ(百濟天皇)으로 불렸을 것ꡓ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일본 천황들이 백제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일본 왕실 문서가 있다. 서기 927년 모두 50권으로 편찬한 ꡐ연희식ꡑ이 바로 그것으로, 그 책엔 일본 천황궁에서만 제사를 지내는 신주(神主)인 제신(祭神) 세분이 등장한다. 한분은 신라신(園神)이고, 두분은 백제신(韓神)이다. 이 제사는 천황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왕궁 안의 신전에서 직접 제사를 지낸다. 무엇 때문에 일본 천황들이 신라신과 백제신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인가. 그들 천황의 조상이 고대 한국인임은 이 왕실 제사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주축문의 제목도 바로 ꡐ한신ꡑ(韓神)이다.
특히 백제인인 간무 천황은 서기 794년에 오늘의 교토(京都)땅으로 천도해 ꡐ헤이안궁ꡑ을 세웠다. 그리곤 궁전의 북쪽 땅에 ꡐ백제왕 사당ꡑ인 ꡐ평야신사ꡑ(平野神社)를 짓고 제사를 올렸다. 이 사당에선 백제 제26대 성왕을 비롯해 구도왕․비류왕․근초고왕 등 네명의 왕과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화신립 황후(히매신)까지 모두 다섯분의 백제 왕족들을 제사지냈다. 그 제삿날은 해마다 4월 2일이며 이를 ꡐ평야제ꡑ(平野祭)라고 부른다는 것도 일본 왕실 법도로 전해 내려온다.
아키히토는 기자회견에서 일본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ꡒ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ꡐ일본서기ꡑ 등에 상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나 초대받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문화며 기술이 전수됐습니다.ꡓ 아키히토의 이같은 발언은 자못 진지하기까지 하다.
한편 도쿄大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가 ꡒ천황씨 자신이 조선에서 온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들을 조정에 등용한 것ꡓ이라고 밝힌 것도 진솔한 연구 결과로 판단된다.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아직 완전히 시정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그같은 언명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여기서 논리적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언론보도를 잠시 스케치하고 넘어가자.
-아시아는 원래 우리 땅? 한국고대史 새로 쓰는 사람들… 그 깜짝主張 즐거운 想像
참 당혹스런 역사해석을 듣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가야는 중국에 있었다. 왜(倭)는 원래 대만에 있다가 열도로 자리를 옮겨 일본이 됐다. 이성계(李成桂)의 부모는 여진인으로 출생지 함주는 함흥이 아니고 하남성(河南省) 통허현이다. 이성계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1427년 황해도 해주로 들어와 한반도에 조선왕조를 세웠다.
이는 재야사학자 이중재(66․한국상고사학회장)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시 그의 말-. "그때 한반도는 국가체제도, 지방행정도 없는 황무지, 즉 평민들이 살던 구석 땅이었다. 중국에 남은 고려는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했다."
박용숙(62․동덕여대 회화과)교수의 가설을 대하면 더 숨이 가쁘다. 한민족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개막한 수메르족이다. 그들은 1천8백년간 환인시대를 유지하다 기원전 2333년 침공해온 아카드의 사르곤과 결합한다. 사르곤은 수메르의 여신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고, 그 후손은 제국의 최고 지배계층이 된다. 이 사르곤이 곧 환웅(桓雄)이며 중국역사의 황제(黃帝)와 동일 인물이다.
한민족의 일부는 서쪽으로 가 미케네 문명을 일으키고 원래 땅에 남은 사르곤의 연합제국은 고조선과 부여(페르시아 제국)로 이어져 기원전 7세기까지 계속된다. 이후 부여 태자 고열가가 지금의 이란 땅 하그마다나에 북부여(메디아 제국)을 세우고 자칭 천제 해모수(解慕漱)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 동부여(일명 부여별종)를 세운다. 동부여에서 고구려가 나타나며 여기서 다시 백제․신라로 이어진다. 朴교수의 말대로라도 한반도는 역시 공백이다. <관계기사 35면>
잠시 호흡을 가다듬자. 이들의 역사확장은 끝이 없어 보인다. 본의 아니게 고대 한반도가 역사의 완전한 변방으로 몰리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또 대부분의 경우 역사의 단절된 부분에 대한 연결고리를 만드는데는 허술하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의 말처럼 이들을 일단 가상(假想)학파(might-have-been school)라고 부르면 어떨지.
이중재씨와 비슷한 역사관을 펴고 있는 재야사학자 정용석(44)씨를 통해 새로운 역사해석의 의미를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세들이 자존심 충만한 후예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확장정신 또는 광역정신이 필요하다. 누구라도 지금의 정사(正)에 부정(反)의 역사논리를 들이댐으로써 나중 합(合)의 새로운 역사관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간혹 이런 파괴론을 '세기말'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재야 또는 비주류 사학들의 입장은 다르다. '바로잡아 달라'는 역사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의 말을 되살리면 어떨까. "착잡한 현실속에서 우리를 이끌어준 안락한 공식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새 디딤돌을 찾아낼 때까지 마치 사실(事實)의 대해(大海)에 빠진 것과 같다."
사실(史實)도 그렇다. 역사해석의 열망은 사실적 총체로서의 역사와 역사서(歷史書)로서의 역사 사이에서 진동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자칫 신비주의․냉소주의의 양극단을 오갈 우려를 낳는다. 게다가 어느 시대건 위서(僞書)파문이 있어 역사를 제대로 읽기가 난망하다.
내친 김에 더 달리자. 역사의 '지평 넓히기'가 뭐 나쁘랴. 박용숙교수는 한민족의 강역을 지금의 이라크․터키․시리아․레바논 등이 자리잡고 있는 서남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한다. 고구려는 서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리디아․페르시아 제국, 백제는 이란동부의 파르티아 왕국, 신라는 파키스탄 인근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가야는 인더스강 하류에 자리잡았다.
이중재․정용석씨의 경우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역사를 시간적으로는 1만년 이상, 공간적으로는 중국대륙 전체와 서역․몽골․바이칼호 지역과 동남아까지 옮긴다. 문헌대조와 해석을 통한 한국․중국 지명의 1대1 대응은 꽤나 현란하다. 예컨대 이중재씨 주장대로라면 신라의 경주는 중국 간쑤(甘肅)성 경양현이며 백제의 공주는 허난성 웅진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와 김유신(金庾信) 묘는 장쑤(江蘇)성 오현에 있다. 의주는 허난성 급현이며 압록강은 여기에 흐르고 있다.
현직 국사교사 이희옥(李熙玉․60․서울 중앙중학교)씨의 입장은 좀 다르다. 두 번의 역사날조로 한민족의 무대가 위축됐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삼국사기를 편찬(1145년)했던 김부식(金富軾)이 고의로 BC.3000년이던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3년, 기원전 2~3세기에 세워진 백제를 BC.18년에 건국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6세기 이후 국가모습을 갖춘 신라는 뒤늦게 중심에 위치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또 한번의 결정적인 역사왜곡은 8~10세기에 걸쳐 이 본에서 진행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멸망한 가야․백제․고구려계 영주․호족들이 대대적인 '역사만들기'작업에 나섰다. 그들의 손에 의해 없던 '일본'이 소설처럼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서 백제의 사서(史書)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재야사학자 정용석씨의 사례 한토막-. 그는 요즘 하루 18시간씩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입수한 '고려도경(高麗圖經)'(중국 북송 휘종시대 徐兢저)을 번역하면서 가벼운 흥분 상태다. 고려로 가는 북송의 사신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마카오 쪽으로 가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를 발판으로 일본정벌에 나선 중국 원나라의 출병 근거지도 광시(廣西)성 합포로 그려져 있다. 하루빨리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게 그들의 세계다.
역사는 말이 없고 오직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오랜 논란거리였다. 심지어 역사가가 갖춰야할 제일의 덕목은 무지라는 야유도 있다. 그래야 사안을 단순화하고 선택․생략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은 역사는 스스로 말을 한다는 논리를 폈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한마디로 글을 맺자. "그것이 진정 어떠했는가"(Wie eigentlich gewesen). 정말 그것이 궁금하다.
≪커버 스토리≫
한민족은 인류조상인 삼묘족의 후예
▶재야사학자 이중재씨
상고사학회 이중재 회장은 일본 메이지대 법과 2년 수료의 학력 소유자다. 51년째 한문 서적을 독파하면서 한민족 역사를 연구해 왔다. '한민족사' '상고사의 새발견' '한민족 우주 철학사상' '새 고려사의 탄생' 등의 저서에 이어 최근 '고대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펴냈다. 그의 주장 한토막―"한민족은 인류의 조상인 삼묘족 후예로 기원전 8936년에 반고환인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요순(堯舜)이 모두 우리 조상이며 주나라까지도 한민족의 나라다. 삼국은 주나라의 봉토국인 진(晋)이 분열된 한․위․조(韓․魏․趙) 세 나라에서 비롯됐다."
일본에 대한 역사해석도 특이하다. 중국의 위(魏)나라가 망한 후 흩어지면서 작은 위란 뜻으로 왜(倭)라고 불렸는데 신라와 백제에 흡수됐다는 것. 이들은 나중에 백제 유민과 손잡고 대만에서 나라를 세운 후 섬을 따라 이동해 지금의 일본땅으로 나라를 옮겼다.
백제를 공격한 말갈은 로마군이었다
▶미술사 전공 대학교수 박용숙씨
동덕여대 회화과 박용숙교수는 고대 한민족의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유사점을 근거로 우리 고대문명은 지중해 문명과 관련 깊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그는 이를 최근 펴낸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수메르 신화에서 알타이 신화까지'라는 책에 담았다. 박교수는 '삼국유사'등에 기록된 백제를 공격한 말갈군'을 파르티아를 공락한 로마군이라고 추정한다. 로마군의 공격에 밀려 고구려와 백제는 육로로, 신라와 가야는 해로로 한반도로 이동했다. 인근에 있던 중국도 이때 함께 옮겨와 역사를 현재의 중국땅에서 벌어진 것처럼 재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바로 삼국의 멸망
▶국사교사 이희옥씨
중앙중학교 국사교사 이희옥씨에게는 학교가 좁다. 교과서는 '오류투성이'건만 학생들에게 자신의 역사시각을 일방적으로 일러주기 곤란한 탓이다. 혼란을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항의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말 대신 삼국멸망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통일신라 역시 중국 당의 지배에 놓였기 때문이다.
고대 우리민족의 영토는 고구려와 부여가 만리장성 동북쪽 중국대륙을 전부 차지했고 한반도는 마한․진한․변한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이후 백제왕국은 마한지역을 재통일하며 등장했고 진한과 변한지역엔 가야왕국이 세워졌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역사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교사의 독특한 역사관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책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재야사학자 정용석씨
정용석시는 기상청에서 21년을 근무한 경력자다. 남들과는 달리 기상․지리․지질 등을 역사의 보조과학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참과 거짓의 역사 1․2․3'에 이어 최근 '일본은 열도에 없었다'를 펴냈다. '기후현상으로 본 삼국의 역사' '지각운동으로 고찰한 삼국역사'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진실과 왜의 비밀' 등 특이한 논문도 있다.
흥미있는 주장 하나―"경주라는 이름 자체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지금의 경주시가 신라의 천년고도라니! 식민사관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토함산은 어디 있어야 하는가. 화산이 폭발한 산이면서 휴화산이니 자연이 함산(含山)인데 그것은 대륙의 양자강 북쪽 안휘성 남부 함산현에 있다."
"史料비판 없는 我田引水 해석
일본 황국사관과 뭐가 다르냐"
조인성 교수의 매운 反論
경희대 사학과 조인성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한국사 시민강좌' 제20집에서 '국수주의 사학과 현대의 한국사학'이라는 글을 통해 특히 고조선사를 둘러싼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고조선의 강역을 넓히고 건국연대를 수천 년 당기는 것은 비학문적이라는 게 그의 지적. 다음은 조교수 글의 주요 대목이다(특별히 위 4인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님).
◇재야 학자들이 사료로 제시하는 8세기초의 '단기고사(檀奇古史)'. 17세기 중엽의 '규원사화(揆園史話)', 공민왕 12년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이들을 참조해 나온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은 1920년대 후반에야 나온 위서(僞書)다.
◇5공 출범 당시 일부 재야 역사학자는 전두환(全斗煥) 정권을 제5조국으로 이름했다. 환인의 나라 환국, 환웅의 나라,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각각 제1․2․3 조국이며 부여․삼국․고려가 제4조국이고 조선과 1~4공화국은 무조국(無祖國)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는 정통성 확보를 위한 극단적 민족주의의 발로다.
◇강역과 건국연대의 비과학적 확장은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신화․전설을 갖고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일․선(日․鮮)동조론을 들고 나와 침략을 고대사 복구라고 호도했던 일제 황국사관과 맥이 통한다.
◇지난 82년 일본 극우 사학자 가시마 노바리(鹿島昇)가 번역한 일본어 번역본 '환단고기'에 대한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의 평가-ꡒꡐ환단고기ꡑ는 조선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만몽․중국에서 서역까지를 무대로 한 상고사로 고대 일본민족의 걸음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ꡓ
◇육군본부 발간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83년) 중 한토막-"통일․번영을 위한 민족의 웅비(…)드넓은 만주벌판을 수복하는 일이다(…)대륙 수복 의지가 담긴 진취적 통일지향의 민족사관을 정립해야겠다." 이는 역사인식 왜곡의 우려를 남긴다.[1997년 5월 31일, 중앙일보]<허의도․채인택․강주안 기자>-
현재 고려왕건의 왕릉인 영릉은 사천성 성도 영릉로 웅장하게 세워져 그 비문과 함께 있다.
<img src=http://chinatour.co.kr/gallery/siquan/chengdu_wnagjianmiao.jpg>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개성에 있는 왕건 왕릉은 가짜로 후대에 역사왜곡으로 꾸며진 것이다. 필자는 이를 생각하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인근 소도시 마리(Muree>Mari) 市에 안치된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묘소를 파키스탄인들은 모두 평범한 일로 알고 있어도 막상 왜곡된 성서를 믿는 크리스챤들은 이를 사실로 믿지 못하는 현실과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다. 김문기 가문의 조선왕실의 비밀에 의하면 심지어 왕건은 대륙의 왕건을 흉내냈다고 한다. 그럴 경우 대륙의 왕건 고려와 한반도의 왕건 고려는 별개의 것으로 동시에 존재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단지 이와 관련해 왕릉에 대한 문제 몇 개를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다. 즉, 1958년 공산당 대 약진의 해와 1968년 문화혁명 당시 조상숭배, 사유재산과 유적지, 묘, 유물, 역사를 모조리 정리시키고 조상의 묘를 비롯 모든 왕릉이 모두 파헤쳐졌다는 사실이다.(「새高麗史」李重宰 著) 이 때 몇 몇 파헤쳐지지 않은 묘가 있으니 이것이 공자묘와 소호금천 씨 묘 및 진시 황릉이다. 이들을 파헤치지 않은 것은 마치 천황 가의 역사를 왜곡한 일본이 다까마쓰 총을 발견하고도 그들 황실의 뿌리가 송두리째 언론에 공개될 것을 두려워해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고분을 지금까지 발굴중단상태로 밀봉하고 발굴을 중단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이야 패망하고 끌려가서 북경근처에 누워있다 하지만 신라 41대 헌덕 왕릉이 산동성 곡부 동쪽 사수현 50리 지점에 있다는 사실은 대륙 사 시대를 보여주는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
「해동역사(海東繹史)」<원사고려전(元史高麗傳)>에 오대(五代) 시대에 이르러 고려 임금이 송악(崧岳: 개성 松嶽이 결코 아니다)에 천도하니 성은 왕(王)씨요 이름은 건(建)이라 하고, 동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개성부는 조선국 성(城)의 서남쪽 2백 리(80km)에 고려가 설치한 주(州)라 하고, 좌측엔 계곡, 우측엔 산이 있어 칭하기를 험고(險固)하다 하고(판문점위의 개성은 평평한 분지) , 또한 이르기를 송악(崧岳)은 당(唐) 천우(天祐) 초에 애꾸눈 승려 궁예가 이곳에 의지해 주량 정명(朱梁貞明) 5년 회남양륭연(淮南楊隆演)에 입공(入貢)하고, 후당(後唐) 청태(淸泰) 말 왕건이 궁예를 시해하고 대를 이어 거듭 이를 도읍으로 삼았으니, 이를 일러 동경(東京)이라 하고 또한 개경(開京)이라 하니 지금 이르기를 개경부라 한다.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咸興府) 서북에 있으니 요지(遼志)에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라 했다. (지금의 개경이 함경도 함흥의 서북에 있나? 한반도 함흥이 아니고 한반도 개경이 아니다. 대륙 사천성의 개경이요 함흥으로 반도의 지명은 고려 초중반 때 반도로 옮긴 것으로 고려사는 조선초에 철저히 왜곡, 개찬되었다) 고려는 경주발해(慶州渤海)를 두어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로 삼고 요(遼)는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으로 삼았으며 요(遼) 말에 고려수중으로 들어가 혹 이를 이르기를 촉막군(蜀莫郡)이라 했으니 도경군(圖經郡)이 개주(開州)의 동쪽에 있다. 명사에는 송악이 동경이자 평양(한반도 평양이 아님)이며 서경이라 나오고, 25사 중 교정보기 전 송사 고려전에는 개주는 촉막군이자 개성부로 하고 신라때 동주(東州)라 했으며 낙랑부(樂浪府)이자 호를 동경이라 하여 사천성 성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개성의 동쪽에 도경군의 이력을 가진 지명은 없다.
고려사 왜곡과 조선왕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한 역사왜곡의 중심 축에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그리고 세종 이충녕이 자리잡고 있으며 조역에는 태종이 아들 충녕의 영원한 보필자 겸 친구요 신하로 낙점해 벼슬을 하게된 김 문기(金文起)를 비롯해 태조 때의 정도전으로 해서 하륜(윤), 정인지 등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사서 편찬자들이 개입되어 있다. 특히 개국초 이성계의 개국명분을 합리화시켜주고 왜곡사서 고려사 편찬의 주역인 정도전을 보면, 1395년 1월 25일 삼사판사 정도전이 정당문학 정총과 함께 『고려사』를 지어 바치자 이성계가 이를 치하하며 정도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으며, 정도전 역시 술이 취하면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나라를 세운 것”이라 했다.
「삼봉집」에 의하면,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고 이 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크게 바뀌고 여말 신진 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닥친다. 당시 권세를 잡은 이 인임 일파의 친원 반명정책에 반대하던 친명 사대주의자 정 도전은 마침내 개경에서 쫓겨나 고달픈 유적(流謫)의 길에 오르게 된다. 처음에 나주(羅州) 부근의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고향에 4년 간 복거한 뒤 다시 삼각산(三角山)․부평․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한다. 우왕 9년에 함주(咸州)로 찾아가 이성계와 만날 때까지 10 년간에 걸친 유배․유랑생활이 정 도전에게는 가장 고달프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시기였던 셈이다.
회진현에서 소재동(消災洞)의 천민 부곡민(部曲民)과 생활하면서 그는 농촌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많은 시문(時文)으로 남겨 놓았다.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 심문천답(心問天答)․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와 같은 성리학 관계 저서,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 병서(兵書)가 저술된 것도 10년 간에 걸친 유배 시기였다. 이로 보면 같은 친명 사대주의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연이은 이신벌군(以臣伐君)은 정도전에게는 유교의 명분론을 토대로 친명 사대주의로 전환해 권력을 분점할 호기로 다가온 것이었다.
「삼봉집」에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 주도한 조선왕실의 개국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온다.
즉, 10년간에 걸친 유배․독서생활을 청산하고 우왕 9년, 함주(咸州)의 이성계를 찾아간 이후의 정 도전의 생애는 그대로 조선 왕조의 건국사(建國史)로 이어진다. 당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의 막하에 들어간다. 조선 왕조 개창의 사상적 지주는 정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계 휘하에는 정 도전 이외에 많은 문사(文士)들이 결집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성계 일파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정 도전이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의하면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가 군기가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 정연한 것을 보고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 듯 못하겠읍니까?’라고 찬탄하여 혁명의 뜻이 이미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이 성계를 만난 다음해에 그는 서장관으로정몽주와 더불어 명 나라에 다녀오고, 성균관 제주(祭酒)와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거쳐 우왕 14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한다. 그의 승진에는 이성계의 도움이 컸다.
우왕 14년(1388) 6월에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밀직 부사(密直副使)로서 전제 개혁운동을 주도하고 이를 단행하였다. 그는 전제 개혁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계민수전(計民授田)의 원칙에 의한 전제 개혁을 주도한 것은 그였으며, 그는 전제 개혁을 실천하는 제조관(提調官)의 자리에서 조 준(趙浚)․윤 소종(尹紹宗) 등을 시켜 전제 개혁 상소를 올린다.
1389년 11월에는 이성계․조준과 협의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피봉되고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한다. 이어 공양왕 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명 나라에 성절사로 가서 이성계의 공양왕을 세운 사실을 비호함 바 있으며, 공양왕 3년(1391)에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로서 5군(五軍) 제도를 파하고 3군을 설치하게 하여 이 성계가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도총제사, 조 준이 좌군총제사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올랐다.
그는 조선 왕조 개창 후에 3군 도총제부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고 그 책임자에 앉아 계속 병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한때 반대파인 이 색(李穡)․우 현보(禹玄寶)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마침내 역성혁명의 반대파 영수인 정 몽주를 죽이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권력을 거머쥔 정도전은 조선왕실의 정통성과 혈통을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려사를 새로 써서 바친 것이고 이에 이성계는 술만 거나하게 취하면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으며, 정도전 역시 술이 취하면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나라를 세운 것”이라 자화자찬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찬대로 건국후 태조 3년에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을, 태조 4년에「감사요약」(監司要約)과「경제문감」(經濟文鑑)을, 태조 6년「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각각 저술하고 한양 천도를 관철시켜 무학대사와의 좌향논쟁을 승리로 이끌고 궁전과 궁문, 그리고 도성문의 이름을 짓고, 도성 내외의 49방(坊)의 이름도 지었으며, 아울러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바치는 한편, 이성계의 창업을 기리기 위해 문덕곡(文德曲)․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 등 악사를 지어바쳤으며, 태조가 사랑하는 방석(芳碩)을 세자(世子)로 책봉하도록 전의하고 그를 보양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요동공벌을 둘러싸고 급진개혁을 반대하여 왕자들의 사병혁파를 유도해 방원의 무장을 해제하여 방석의 왕위계승을 하려는 온건개혁 성향의 고려 구신(舊臣)세력 변 계량(卞季良)․하 륜(河崙)․권 근(權近)등이 옹립한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의해 죽고 만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도전은 이같이 이성계를 만나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역사를 왜곡, 개찬하면서 까지 권력을 오로지 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후계구도까지 관여해 다루기 힘든 방원을 철저히 배제하고 다루기 쉬운 상대인 방석으로 후계를 있게 사주하다가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려사는 정도전 뿐 아니라 수 없는 개찬 과정을 거쳤으므로 향후 역사개혁시대를 맞이해 이에 대한 연구가 국내 사학계에 점화될 것으로 믿는다. 조선왕실의 혈통을 숨기고 정통성을 위해 고려사는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철저히 조작되었으며, 문종이 김종서에 의해 독살되고, 노산군은 왕위에 오르지도 손위도 하지 않았으며, 사육신은 철저히 조작된 것으로 시작되는 조선왕실의 비밀이 그 핵이다. 이러한 역사 비밀은 대륙 내 3국의 대륙사와 대륙 내 동이 제 족의 상고사 은폐 및 왜곡과 불가불 관계가 있다.
먼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대강을 정리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고려사는 북벌파 최영을 거꾸러뜨리고 위화도회군을 통해 이신벌군(以臣伐君)한 반역(反逆)정권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임의로 위조한 왜곡역사다. 그것은 「고려사」가 태조, 태종, 세종 때 (정도전, 하륜, 정인지 등이 주관) 주로 편찬된 것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거니와 단재 신채호가 지적했듯이 태종, 세종 때 역사에 유례 없는 역사수탈이 이루어진 것 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단재는 태종 때의 역사수탈 소각이 김부식의 역사수탈과 맞먹으며 김부식의 역사수탈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괴수 이마니시류(금서룡)의 20만 부 민족사서 수탈을 능가한다 했다.
선천 역사는 어차피 이단과 배반의 역사다. 또 약육강식의 영웅패권시대로 강자는 약자를 역적과 사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자신의 행적을 정의로 기록한다. 지나족의 역사가 공자와 사마천으로 역사가 왜곡되고 일본의 역사가 「일본서기」, 「고사기」로부터 위조되어 일본의 천황가로부터 줄줄이 위조 왜곡된다. 그리하여 중국정사 「춘추」를 편찬한 공자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수치스런 역사는 피한다는 필법으로 지나의 뿌리와 동이 제 족인 소위 주변 이방 오랑캐민족에게 얻어맞은 역사를 수치스럽다하여 모조리 삭제했다. 그리하여 근대중국의 유명한 문사이자 역사가 량치챠오(梁啓超)는 “모든 역사는 자민족의 목적을 위하여 자기중심으로 위조하여 사가(史家)의 신용이 떨어졌다. 이 악습이 공자에게서 시작되어 2천년 동안 유전되었다” 말하고 “적(狄:흉노 예맥의 동이족)이 위(衛)를 멸한 대사건을 삭제하여 기록치 아니하고 송태종이 거란병의 화살에 맞아죽은 것을 삭제했다”고 했다(「중국역사연구법」3장, 5장) 어느 시대건 새로운 역사시대에는 대대적인 역사수탈과 왜곡이 벌어지는 법이다. 가까이는 고려와 조선이 그랬듯이, 대륙의 지나족은 화하(華夏)족에서 오늘날 한(漢)족이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처음 시작된 진한(秦漢)시대에 가장 심했다. 이것이 분서갱유였다. 그리하여 량치챠오는 동서에서 전국시대, 진한시대는 일대 위서(僞書)가 출현한 시대라 말하고 “글을 그대로 믿는 것은 글을 보지 아니하는 것만 못하다”고 한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중국사의 위조를 비판했다. 오죽하면 량치챠오는 대만의 사부아(謝扶雅)가 “기록한 원인은 있으나 실증이 없는 것이 중국사의 특징이니 역사를 연구하는 자는 주의하라” 한 말을 재삼 상기시켰겠는가.(見 韓國의 再發見 伏草 崔仁)
상고사에 등장하는 우리 민족은 시대에 따라 하나의 종족명도 다양하게 변천해 나아간데다가 설령 동시대라 해도 다양한 이름을 가진 다양한 부족국가들이 혼재해 있었던 연고로 이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볼 사관이 부족하면 이방민족으로 바라보기가 아주 쉽게 되어있다. 다음에 등장하는 생소한 이름들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이름이니 독자들이 잘 기억해 두었다가 후일 다양한 역사서를 보면 역사이해를 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우리민족은 환단 9려(九黎:배달 환웅국을 각종 지나사서는 구려국으로 칭함), 단군조선 및 험윤(玁狁)-훈죽(薰鬻)-귀방(鬼方)-견융(犬戎)-북적(北狄)-흉노의 동이족 맥과 험윤이 진한(秦漢) 시대의 호족(胡族), 맥족(貉族), 흉노족(匈奴族)이 되었으며, 위진(魏晉) 시대에는 오환(烏桓), 선비(鮮卑)의 원 씨족이 되어(오환, 선비는 유연, 거란과 함께 크게 보아 동호계(東胡系)에 속함) 읍루, 물길 혹 말갈로(읍루, 물길 혹 말갈은 숙신계(肅愼系)에 속함) 벌어져 나아간 동이 북방 세력권과 산동, 산서, 호북, 호남, 사천, 절강, 광동 등 양자강을 중심한 형오(荊吳系), 백월계(百越系), 묘요계(苗猺系) 및 왜를 포함한 동이 9족 등의 양자강 동이 남방세력권과 부여족과 예맥족 및 단군조선 계열의 마한계 및 동이족 소호금천씨 후예인 가야족 등의 한반도 동방세력권으로 되어 있었으며 북방 세력권과 남방세력권이 유입된 동방세력권이 가장 늦다.(위의 각 종족명이 바로 상고시대 우리 겨레의 다양한 이름이다. 사관이 정립되지 않은 채 보면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름으로 스쳐가기 아주 쉬운 이름이다)
그러나 북방세력권이 멸망하고 남방세력권이 한(漢)으로 하이브리드 잡종화되면서 점점 이질화되어갔으며 북방세력권을 끊임없이 회복하려 했던 것이 바로 고토 회복정신인 따무르자(다물) 정신이었다. 대륙의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은 남방세력권이 독자적 세력으로 화하는 과정에 인멸, 왜곡되었으므로 근자에 대륙 3국설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새삼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동방세력권 반도사는 공자와 사마천에 짓눌려 대륙사를 왜곡하여 허공에 날린 것이며, 내부적으로는 고려의 김부식과 존명 사대주의자 조선의 이성계 일가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어 잊혀진 것이다. 여기에 멋진 역사왜곡의 인테리어를 한 것이 바로 이마니시류(琴西龍)의 조선사편수회에 의한 20만 부 사료수탈이다.
단재는 「동국거걸 최도통전에서」공민왕을 무어라 평가했느냐 하면 “일개 흐리멍덩한 녀석”이라 폄하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고려 말은 일제 식민지 치하처럼 왕조의 형세만 유지하고 있어서 원나라의 속국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고려의 왕들이 원나라 왕실에 의해 결혼하라하면 하고, 왕 노릇 그만두어라 하면 그만두고, 죽어라 하면 죽어야 했던 철저한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단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면은 의엿하게 고려왕조가 있고 3천리의 땅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른바 국왕은 적국이 마음대로 내쫓고 앉혔으며 소위 토지는 적국이 멋대로 갈라 빼앗았으니, 이 때는 국가가 망한 지 이미 오래였다. 이제 그 떼어준 토지를 말하건대 아래와 같다. 1은 서해도니(현 평양 이북일대) 원종때 떼어주고 2는 함길도니(현 함경도 절반)충렬왕때 떼어주었으며 3은 제주인데 원종때 떼어준 것이다. 또 적국의 내쫓김을 당한 임금을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1.충렬왕 2.충선왕 3.충혜왕 4.충숙왕 5.충목왕-
그러나 최영 장군을 만난 공민왕때 비로소 강서 여덟 병참을 공격 파괴하여 토지를 수복하고 북쪽 원의 적을 격퇴하여 주권을 완전히 돌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벌파 인당이 간신들의 참소로 죽고 최영은 쫓겨났으며, 홍건적 중 가장 강한 주원장마저 단기필마로 도망가게 한 최영 주위의 북벌파를 용렬한 공민왕이 모두 이 잡듯이 제거했으니 단재는 “고찰하건대 최영, 정총 양공이 현린의 말을 받아들여 정부를 개혁한 뒤에(반 북벌파 제거) 그 군사를 북쪽으로 향하였거나 또 (간신) 김용이 속인 밀지의 화가 일어나지 않아 최,정 양공이 홍건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세력을 남부에 심었으면 주원장이 어디에서 일어났으리오”라 한탄했다.
정녕 그리했다면 북방 고토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주원장은 물론 이성계가 어디 있어 고려왕조가 망했겠으며 이성계에게 죽는 참변 또한 어디 있었으랴. 민족사학자 복초 최인은 이성계를 다음과 같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여 두 눈에 민족, 국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최영(崔瑩), 정몽주(鄭夢周) 등 반대파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세력이 만만치 아니했다. 이에 명나라를 등에 업은 것이다. 즉 명나라의 세력을 빌려서 반대파를 제거코자 하여 추악한 사대정책을 취하였다. 그는 최영이 만주를 정벌코자 한 것은 명나라를 반역한 것이라 하여 백주에 최영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이를 명제(明帝:주원장)에게 보고하는 추태를 부렸다.
또한 국호조차 스스로 결정치 못하고 명제(明帝)에게 조선(朝鮮), 화령(和寧) 중에서 하나를 지정하여 주기를 청하니 명제가 조선이 좋다 하므로 조선이라는 국호를 취하였다. 또한 명제는 한민족의 투쟁, 진취의 활동을 억제키 위하여 망건(網巾)을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망건을 쓰고 투쟁, 진취적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계는 명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망국의 망건을 쓰게 한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사대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사대사상을 고취하는 유교를 국교로 정했으니 유교는 중국의 국교로 중국이 인류의 중심이요 타민족을 중국에 예속된 것으로 가르쳐 이조의 백성은 중국을 천자국이요 조국으로 생각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3학사로 추앙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같은 이가 과연 애국자인가? 윤집은 자주독립의 정신을 말살한 이성계의 친명사대 조선의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명나라를 하늘과 같은 조정이라 하여 천조(天朝)라 하고, 우리와 더 가까운 혈족인 청나라가 주적 개념에 불과한 명을 치는 것을 노적(奴賊)이라 하여 노예도적이라 하고, 천조는 아국의 부모요 인척인 관계인 청을 우리 부모의 원수요 아국인을 명나라의 자식이라, 청이 부모인 명을 침략하는데 명의 자식인 아국인이 청과 화친함은, 우리의 부모인 명나라를 잊어버리는 수치스러운 일이라 한 바 있다.
복초 최인은 이신벌군(以臣伐君)으로 정권을 탈취한 역적 이성계가 정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고취했고 사대정책을 고취하기 위해 인류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 유교사상을 들여와 조선민중을 고리타분하게 선비화 노예화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왕실은 한민족 역대 왕실에서 지내온 천제(天祭)를 일개 제후국이 중국황실을 욕보이는 것이라 하여 내팽개쳤으며, 사대하여 스스로 굽혀 지나 연호를 쓰고 천제지자(天帝之子)의 국통을 이어받은 기존의 천자국의 왕실칭호를 제후국의 왕실칭호로 바꾸어 썼으며, 왕이 누런 황색 곤룡포 한번 못 입고 붉은 적색 제후 옷을 입었으며, 왕실로부터 학사(學士)라는 존호를 받은 소위 3학사-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는 명(明)을 부모와 같다 하여 천조(天朝)라 하고, 명을 대국이라 하고 스스로를 소국이라 자처했으며, 명(明)에 도발하는 청(淸)을 부모를 치는 적(賊)으로 간주했다. 또한 선조의 모든 비문과 귀중한 문서 첫 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명이 있으므로 조선이 있다)이라 하여 조선보다 명을 먼저 했다. 단재 신채호가 애석해 마지않은 불세출의 영웅-최영 장군을 벤 이성계가 북벌주의를 역적이라 매도하고 존명 사대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지 않을 수 없어 왕건의 혈통부터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바꿔치기 해 놓았으니 이것은 일찍이 최영에 대해 “최영은 미치광이로다. 조심하여 큰 것을 섬김은 선왕이 남긴 규범이거늘, 이를 불고하고 다른 이론을 감히 제창하는구나”라고 한 노예학자 정도전에 의해서다. 새로운 유교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역사를 필요했다.
이것이 몰고 온 것이 정도전, 정찬을 위시한 새로운 고려사의 개찬이었고 태종, 세종 때까지 끊임없이 자행된 역사수탈과 인멸이었다. 이것이 바로 태종, 세종 연간에 극비리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조선 판 분서갱유다. 고려의 왕씨 혈손들은 강화도로 보낸다는 명분 하에 한 밤중에 배에 태워져 수도 없이 수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려의 왕비들이 그때 죽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씨를 말리고 몇 안 남은 왕씨들을 너그러이 살려주는 척 하는 기사가 정종인가 세종 연간에 보이지만 이미 왕씨는 씨를 모두 말린 후였다. 단재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조선 판 태종의 분서갱유다.
그런데 태종이 못다 한 역사수탈을 극비리에 왕실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심복중의 심복 김문기를 시켜 세종이 그의 선산 함경도에서 고려 이전의 역사를 모조리 소각하고 맹목적 친명 사대주의에 입각, 존 중화 사대주의 사서를 남겨두고 집현전을 중심으로 역사왜곡의 문치시대를 개막했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3대 가륵 단군이 창제한 가림토(또는 가림다) 문자도 물론 서문에 해당하는 해례본 제자서만 첨부해 훈민정음 창제로 선포한 것으로 이것은 성군으로 알려진 충녕의 뜻깊은 공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사적 차원에서는 엄청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KBS 역사스페셜 추적보도에 의하면, 한글 창제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해 이미 고도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어문학자 세종이 직계 가족만을 데리고 만들었다고 한다. 유교적 사대주의로 신하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었던 세종은 삼강행실도 간행 문제를 계기로 몰래 세자인 문종, 세조, 안평대군, 둘째 딸 정의 공주 등 자식들을 데리고 10 여 년 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라는 것. 이것은 반도사관을 배경으로 추적해 본 것으로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자식들을 통해 연구하게 한 것은 훈민정음 자음, 모음의 창제라기보다는 당시 이미 고서에 전해지고 있던 가림토 문의 음성 론 음운론 등 제자 원리가 주였고 실제 훈민정음 서문에는 이 내용이 전부였다는 사실에서 더욱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물론 그 뿌리를 밝히는 사료들은 이 성계, 이 방원의 전례에 따라 깡그리 소각되어 허공에 사라졌다. 그 중에 세간에 남아 떠도는 사료들 마저 후일 세조에 의해 대대적으로 수거되어 사라진다. 심지어 세조의 아들 성종마저 사서를 거두어들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을 정도였다.
*성종 1년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ꡒ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ꡓ하였다.
이신벌군(以臣伐君)의 패역정권(悖逆政權)을 명분화 하기 위해 고려사는 철저히 위조되었는데 조선왕실을 위해 고려사는 은연중 비 정통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왕건 혈통의 조작인 작제건 신화이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지나 황실의 혈통으로 끌어부친 것. 잠시 그 내용을 스케치하고 넘어가자. 이 신화는 고려 의종 때 벼슬이 징사랑검고 군기감에 이른 김 관의의 저서 「편년통록」에 실린 것이라 하고 있으나 이 책은 이조 초엽 역사왜곡의 차원에서 소각 처리되었으니 그의 이름만 편의상 빌린 것인지 그 내막과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에서 세종은 사서편찬 신료들에게 왕건의 용과 용왕의 신화가 황당하지만 후세를 위해 그대로 실으라고 한 것으로 보아 태조 때의 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와 산천을 두루 구경하다가 부소산(扶蘇山:송악산) 골짜기에 들어가 스스로 성골장군이라 칭하며 아내를 맞아 눌러앉아 산다. 그의 집은 부유하였으나 아들이 없고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고 있었다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에 매를 잡으러 갔다가 날이 저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바위 굴 속에서 자게되었는데 그때 범 한 마리가 굴 앞을 막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열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범이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시험삼아 각자의 관을 던져 보아서 그 관을 범에게 물리는 사람이 나가서 일을 당하기로 하자고 하면서 모두 자기 관을 던졌다. 범이 호경의 관을 무는 지라 호경이 나가서 범과 싸우려고 하는데 범은 갑자기 없어지고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은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호경이 돌아 와서 평나 군에 보고하고 다시 산으로 와서 9명의 장사를 지내 주었다.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신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시 과부로서 이산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신-성골장군을 만나게 되여 서로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함께 신의 정치를 하려고 하는바 우선 당신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겠다고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산신과 호경은 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평나군 사람들이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는 동시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아홉 사람이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고 고쳤다. 그 후 호경은 옛 처를 잊지 못하여 항상 밤에 꿈과 같이 나타나서 처와 동침하였다. 산의 대왕<산신>이 된 호경과 부소산의 아내와의 사이에 강충(康忠)이 태어났다. 아들 강충은 서강 영안촌 부자집 딸 구치의(具置義)에게 장가를 들어 오관산 마가갑에서 살았다.
그때에 신라 감간 팔원이라는 사람이 풍수에 관한 방술을 잘 알았는데 팔원이 부소산 의 형세는 좋으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일 부소군을 남쪽으로 옮기고 솔을 심어 암석이 나타나지 않도록 만 하면 거기서 삼한을 통일하는 자가 출생할 것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강충은 그의 말에 따라 군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으로 이사하고, 전 산에 솔을 심어 군 명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그는 드디어 군의 상사찬으로 되고 마가갑 저택을 세전하는 재산으로 하여 거기로 왕래하면서 살았다.
수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마침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은 손호술이였다. 후에 보육(寶育)이라 개명하였다. 뒤에 보육(寶育)은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깨달음을 얻는다. 어느 날 꿈속에서 곡령산(鵠嶺山)으로부터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이 온통 물에 잠겨 은빛으로 빛나는 꿈을 꿨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형 이제건(伊帝建)은 "너는 반드시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이 될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 딸 덕주 (德周)를 그의 아내로 주었다. 덕주는 두 딸을 낳았다. 두 딸 중에 동생을 진의(辰義)라 불렀다. 미모가 수려하고 재주가 뛰어난 진의가 막 성년이 되었을 때에, 그의 형이 꿈을 꾸었는데 오관산(五冠山) 마루턱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그 오줌이 흘러 천하에 가득 차 보였다 그가 깨어나서 진의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진의가 비단 치마를 가지고 그 꿈을 사겠다고 하기에 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진의는 형에게 다시 그 꿈 이야기를 하라 하고 그것을 움켜서 품에 품는 시늉을 세 번이나 했다. 그랬더니 그의 몸이 움직이고 무엇인가 얻는 것 만 같았다. 진의는 그것으로 하여 자못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나라 숙종이 아직 즉위하기 전에 천하 산천을 두루 유람하기 위하여 명황의 천보 12년 계사-명황은 중국 당나라 현종 황제의 별명이요, 천보 12년은 753 년에 해당하다-봄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예성강 서포인 패강 서포에 당도해 진의의 집에 나타났다.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의 숙종은 보육의 작은 딸 진의와 하룻밤을 지내고 사내아이를 낳거든 이 활과 화살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므로 그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했다. 작제건은 활을 잘 쏘았다. 작제건은 다섯 살을 넘기자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남편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단지 그의 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대답했다. 작제건이 자라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진의는 아들에게 남편이 두고 간 활과 화살을 주었다.
그것을 받은 작제건은 기뻐하며 매일같이 활과 화살을 가까이 하여 신궁이 되었다. 그는 그 해 열 여섯 살 때 중국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갑자기 배가 멈추어 서 버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뱃사람들이 점을 쳐보니 "고려 사람을 배에서 떼어 버려라."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를 본 작제건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때 서해 용왕이 늙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작제건을 구해 주고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것은 부처로 변신해 자신을 괴롭히는 여우를 물리쳐 달라는 것이었다. 작제건은 다음날 부처로 변신한 여우를 활로 쏘아 잡아 주었다. 용왕은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의 딸을 작제건에게 주었다. 용왕의 딸을 아내로 얻은 작제건은 육지로 올라와 살림을 차렸는데 용왕의 딸은 우물을 파고 용으로 변해 몰래 용궁을 왕래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모습을 작제건이 엿보자 그녀는 영영 떠나 버렸다.
그 뒤 작제건은 속리산에서 불경을 읽다가 죽었다. 작제건과 용녀(龍女) 사이에서 난 아들 중 맏아인 용건은 나중에 이름을 왕융이라고 고쳤다. 그는 꿈에서 본 미인과 비슷한 여인을 길에서 만나 아내로 삼았다. 부인의 성씨를 몰라 꿈에서 만난 부인이란 뜻으로 몽부인이라 불렀으나, 나중에 삼한(三韓)의 어머니가 되어 성을 한씨라 했다. 하루는 왕융이 자신이 살던 송악의 옛집 대신에 남쪽에 새로 집을 지으려 했다.
그 때 당(唐)에서 풍수지리를 배워 온 승려 도선이 지나다가 새로 집을 지으려는 왕융을 보고 말했다. "기장을 심을 땅에 어째서 삼(蔘)을 심었는가?" 이어 도선은 주변 땅의 지맥을 살피더니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맥이 북방의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온 명당이니 내 말대로 이 터에 집을 지으면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이오." 왕융이 그의 말을 좇아 집을 지으니 과연 그 다음해에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이었다.-
작제건 신화중에 등장하는 보육과 진의의 꿈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김춘추를 둘러싸고 보희와 문희간에 서형산 꼭대기에서 오줌누는 꿈을 사고 파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삼국유사가 고려사가 쓰여진 시기에 개찬된 것을 비교하면 동일한 사료편찬자가 고의로 왜곡 편찬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KBS 사극 왕건 태조는 왕건의 혈통을 “이들의 조상은 고려사의 기록이 미진하여 확연치는 않다. 당귀인이란 왕건의 조상은 아마도 장보고처럼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옛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가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라 하여 다음과 같이 얼버무려 방영한 바 있다.
-해설: 왕륭, 태조 왕건의 아버지로서 왕건이 등극한 이후 세조로 추존되는 사람이다. 이들의 조상은 고려사의 기록이 미진하여 확연치는 않다. 다만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이고 왕륭 의 선대는 작제건이며, 그 윗대는 당귀인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당귀인이란 당나라의 귀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왕건의 조상이 당나라에서 건너왔으며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재당신라인, 즉 한반도의 후예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난민들이 당나라로 건너갔었다. 그들은 주로 해상무역업에 종사했는데 훗날 신라로 돌아오니 그 대표적인 예가 장보고이다. 당귀인이란 왕건의 조상은 아마도 장보고처럼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옛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가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1>에 “오토건간”이라는 수중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자자 빙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수중세계 왕궁인 용궁이 등장하는 작제건 설화는 용궁이 등장하는 《삼국유사》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수로부인이 임해정(臨海亭)에 해룡에게 납치되었다가 귀화하여 해중(海中)의 일을 말하는 가운데 칠보궁전이 있었고 음식이 맛있고 향기로웠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고려사》고려세계(高麗世系)에 기재된〈작제건설화(作帝建說話)〉에 용녀가 개성으로 나와 작제건과 함께 살면서 침실 밖에 한 우물을 파고 이 우물을 통하여 서해용궁을 내왕하였다.
작제건은 용녀의 부탁을 저버리고 용녀가 황룡으로 변하여 우물로 들어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용녀를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진성여대왕 거타지조(眞聖女大王居陀知條)에 이미 기재되어 있는데 구비설화 중 〈욕신금기설화(浴身禁忌說話)〉에도 용녀취처(龍女娶妻)의 화소가 등장한다. 이들 원전들이 바로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개찬된 것으로 보아 그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단재 신채호가 지적한대로 「삼국사기」는 동서에 “궁예는 병사와 함께 기쁨과 고통, 일하고 쉬는 것을 같이 하며, 주고 빼앗고 하는데 있어서도 공적으로 하고 사사로이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라고 한 궁예를 폄하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 “일찍이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여 흥주의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신라왕의 초상이 있는 것을 보고는 칼을 빼어 이를 쳤는데, 그 칼로 쳤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라고 한 대목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왕실의 정통성을 위해 바로 윗대를 흠집 낸 명백한 역사왜곡이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것뿐인가? 복초 최인의 제자 김 정권씨는 삼국사기는 반역정권 이성계에 의해 김부식의 고려국 시대의 것을 한 권도 찾아볼 수 없도록 해버렸고, 이성계 시절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개찬된 진 의귀, 김 거두의 삼국사기는 무엇이 모자랐는지 다시 없애버렸으며, 중종 7년 만에 이 계복에게 세 번째 간행하게 책을 일본 도꾜 대학과 조선사학회 등에서 복사하여 일제시대에 내놓은 것이 오늘날 이병도 역주본 과 김 종권의 완역본 삼국사기라 했다. 김부식이 쓴 책은 원명이 「삼국사」이고 역모와 반역과 사대주의와 왜식 식민사학자에 의해 임의로 생략되고 왜곡되며 수 차례 고쳐져 변신되었다는 얘기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오늘날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실전 된 김부식의 삼국사를 정도전이 주도해 이본(異本)으로 개찬, 복구해 놓았다가 다시 세종 때 춘추관에서 대폭 손보았으나 많은 문제점이 있어 반포(頒布)하지 않았던 것을 양성지가 대폭 손질한 위서다. 그나마 양성지의 삼국사기는 실전되어 중종 때 다시 개찬 간행되었다가 상기 김종권씨가 지적한 대로 일제의 기기사관으로 변조된 문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엄밀히 말하면 그 모태는 김부식이면서도 김부식의 작품이 아닌 위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김부식의 입김이 완전히 배제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부식의 원죄가 면제될 수도 없다.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책은 송나라 휘종 때의 서긍이란 사람이 고려인종 원년 1123년에 고려 송도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들은 것을 존중화주의 입장 에 서서 고려를 폄하해 기록한 일종의 견문보고서다. 그런데 전 40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보면 기존의 일제 식민지사관의 연장선상인 반도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기절초풍할 내용이 간간이 나온다. 고려를 향해 자신들이 출항하고 있는 지금의 절강성 항주부근 명주도 매잠이 고려 땅이라고 서술하고 있는가 하면 고려 동쪽의 경계가 금나라라 하여 연경(북경)을 포함한 하북성이 고려라 하고 있고(반도사관의 금은 고려의 서북지방) 고려의 왕성인 수도가 소림사로 유명한 하남 성 등봉 현에 있는 숭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한다.
가령 동서 권 35는 자신을 포함한 고려사신 서긍 일행이 절강성 해안을 지나면서 해도의 정경과 느낌을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배를 탄 자신들이 지나가는 곳에 협계산이 있는데 이 산은 중화와 동이를 구분하는 경계라서 협계산이라 명명했다는 것이며 그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어 쌍계산이라고도 한다 했다. 또 협계산 근처에 다섯 개 섬으로 이루어진 오서(五嶼:큰 섬크기순으로 각기 도(島),서(嶼),섬(섬),초(礁)라 함 )가 있는데 정해현 동북쪽 소주의 큰 바다 가운데 군산과 마도에도 오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항주만의 소흥현 동북해안가 마산지역 마도에도 오서가 있으나 여기서는 주산(舟山) 군도(群島) 즉 군산지역 섬산무리의 하나를 말한다. 또 절강성 임해시 동남쪽 해안에 있는 백산 가까이 흑산이 있는데 흑산은 옛날 여행중이던 사신의 배가 묵었던 곳으로 관사가 아직 남아 있으며 고려의 죄인들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동서 권 33을 보면 고려 땅 군산(郡山)의 정체에 대해서도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사신이 고려 땅 군산에 들어가니 순시선 10 여 척이 있는데 모두 돛대 위에 표시를 밝히는 기를 꽂고 있다. 뱃사공과 순시병졸은 푸른 옷을 입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징을 치고 다가오는데 돛대 위의 작은 깃발에는 홍주도순(洪州都巡:홍주를 순시하는 배), 영신도순(永新都巡), 공주순검(公州巡檢), 보령(保寧),회인(懷仁), 안흥(安興), 기천(曁川), 양성(陽城), 경원(慶源)이라는 글씨를 쓰고 펄럭거린다.
여기서 홍주는 강서성 파양호지역과 남창시 주변이며, 영신은 강서성 서남부 영신현(영신강이 길안을 거쳐 파양호를 흘러든다), 공주는 강서성 중앙부 낙안현 지역의 공계로 옛날 공파라 한 지역이며,보령은 사천성 문천현지역,회인은 당송때는 해주라 한 곳으로 산동성 덕평현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강소성 공유현지역으로 흡수된 지역이며, 안흥은 호북성 강릉현 동쪽 30리 지점의 현이며 기천은 강소성 강음현 지역이며,양성은 1)하남성 등봉현 지역 2)강서성 영풍현 지역이며, 경원은 광서성 의산현 지역으로 송대의 광남서로지역이다.
동서 「고려도경」 권 30 편에 고려에 박산로라는 향로가 있는데 박산은 하남성 석산현 동쪽에 있는 박산을 말한다. 동서 권 24를 보면 토산품을 설명하면서 고려의 광주(廣州),양주(楊州),영주(永州) 등 3주에는 소나무가 많고 나주도(羅州道)에도 역시 있으나 3주의 풍부함만 못하다 한 구절이 있다. 그런데 고려도경의 역자 정 용석,김종윤 양씨는 광주를 광동성 불산시 지역으로 지금의 광주 특별시를 포함하는 광동, 광서지역으로, 양주를 양자강 구강시,진강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강서성, 절강성 북부지역과 강소성, 안휘성 남부지역으로, 영주를 영수, 영산이 있는 호남성 남부지역 영릉현 지역으로 각기 비정하고 있다.
또 동서 권 22에 고려는 나라안에 밀이 적어 나라안의 모든 장사꾼들이 경동도(京東道)로부터 밀가루를 사온다고 했는데 경동도를 북송의 서울 변경(개봉) 동쪽인 하남성의 동쪽지역과 산동성 서부지역 및 안휘성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고려도경」에서 북송 사신인 서긍 스스로 절강성의 전단강 유역을 고려땅이라 고백하고 있듯이 「고려도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성항은 임진강위의 예성강을 말함이 아니라 예성항과 벽란은 같은 지역에 있었으며 벽란 지역은 지금의 절강성 오흥 지역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정,김 양씨의 해설에 의하면 북송사신이 고려를 가기 위해 항해한 해도를 따라가 보면 예성항에 정박하기 전, 급수문을 지났다고 하고 있는데 이 급수문은 지금의 홍콩과 주애 사이의 만 입구 호문(虎門)에 있으며 예성항은 곧 광동성 광주시지역 근처의 만 주변의 한 항구라 비정할 수 있으며 바로 이곳에 오문(마카오)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선화봉사 고려도경』 움직이는 책 刊 정 용석,김 종윤 역) 이 쪽 계통의 책으로 오재성의 <조선족의 뿌리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한민족문화사><우리 역사는 黎(리)민족사: 黎(리)민족사 연구회 刊> 한국 상고사학회 회장 이 중재의 <한민족사: 평화사 刊><새로 밝혀진 새 고려사 :명문당 刊 >의 일 독을 권한다.
아직은 처음 실마리를 잡아나가는 단계라 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학자들을 동원해 가칭 『고대사 재정립연구회』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본격적인 학술연구와 대대적인 역사바로잡기 정책을 펴야하리라 본다. 해방이후 우리는 한번도 역사정립 정책을 수행한 적이 없는 연고로 상고사 추적과 재정립은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공산국가라 역설적으로 지방자치제가 철저하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예산을 투입해 조직적으로 중국 전역의 도서관, 박물관 등을 뒤지며 학술탐사에 착수하면 모종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 본다.
참고로 「십팔사략」을 볼 것 같으면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수도 변경(개봉)이 함락된 뒤, 금으로 끌려가 죽는 소위 정강의 변의 주인공으로 북송을 마무리 한다. 이때 북송은 고려의 원조를 받아 금을 치고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금으로부터도 요와 같이 교빙하자고 사신을 보내와서 중립을 지킨다. 흠종의 아우 강왕이 남경에서 고종으로 즉위하니 이때부터 소위 남 송 시대인데 도읍을 절강성 임안(항주)으로 옮겼다. 또한 원래 금(아골타)과 송(휘종)은 서로 약조하되 요의 중경(몽골의 대정府)을 금이 취하고 북경인 연경을 송이 취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상 금이 연경을 취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언급되고 있는 고려의 국경은 당시 연경을 제외한 하북성 이동지방의 금과 좌측의 요를 제외하면 한반도를 포함해 발해만 주위의 북송 아래는 모두 고려가 된다는 점이다.
오 재성과 이 중재씨는 사료고증을 통해 신라, 백제가 기존의 왜곡된 반도사관이 말하는 것처럼 한반도 안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서 장개석이 대륙전체가 조선땅이라 말한 것처럼 중국대륙내부에(말이 대륙내부지 사실상 대륙 거의 전체) 드넓은 대륙내 신라, 백제가 있었다고 조목조목 사료고증을 해가며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위, 촉, 오 유비, 조조, 손권이 쟁패했던 삼국시절 역시 백제의 품안에서 일개 제후국의 입장에서 싸웠노라 말하고 있다. 그는 「고려도경」에 보이고 있는 하북성 북쪽과 몽고 실크로드에서 활동하던 북방계 동이인이었던 선비 모용외의 아들 황(皝)이 백제와 싸웠다는 놀라운 기사를 예로 들고 고려가 처음 개국한 곳이 중국의 내륙지방인 사천성이라 말한다.
그런데 한국 고고학회 회장인 한양대 김범모 교수는 허왕옥의 출자에 대해 아유타국과 쌍어문에 관한 여러 가지 답사와 사료고증을 통해 허왕옥이 온 아유타국은 인도가 아닌 사천성이라 결론내리고 있다. 필자는 8 년전 SBS에서 주최한 일본 고대사 탐방단에 합류했을 때 요즘 백제사에 대한 연구로 개가를 올리며 중진 사학자로 자리잡고 있는 이 도학 교수와 예의 김 병모 교수와 함께 답사를 하며 김 병모 교수로부터 이에 대해 직접 들은 바 있고 또한 답사 팀에게 일본 고대사의 실체에 대해 대신 가이드 겸 강의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한국사 연구는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인 시작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복 하면 조선 한복만 알았지 고려한복을 모르는 세상이 지금 아닌가.
그런 면에서 늦은 감이 있지만 식민사학자 이병도 학파인 이기백의 제자 서강대 이 종욱 교수가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를 통해 한국의 고대사 연구가 식민지 사관을 못 벗어났다고 실증사학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이제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신호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재명명덕하고 재지어지선 함이 큰 학문함의 목적인 바에야 더욱 더 용기 있게 기존의 잘못된 학설을 과감하게 뒤집어엎는 용기가 학자에겐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재지어지선인 홍익인간이며 민족정기를 곧추세우는 가장 실사구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백암 박은식 선생이 왜 나라는 망해도 겨레는 망하지 말아야 하며 또 겨레가 망하지 않기 위해선 역사를 잃지 말아야한다고 했겠는가. 즉, 학자의 목적인 큰 학문의 목적은 밝은 덕을 밝히고 지극한 선에 이르는 것이다. 학문이 공도(公道)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학문이며 죽은 학문을 하는 자는 죽은 학자일 수밖에 없다. 민족 사혼의 중추를 부러뜨리고 민족정기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 병도도 죽음에 임박해서는 평생 부정해온 단군의 실체를 비로소 인정한 바 있지 않은가.
「고려도경」에 의하면 모용외 아들 황이 백제에게 망한 뒤 모용보가 고구려 변방인 요령성 열하 지방 평주에서 고구려 제후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고구려 19대 광개토 대왕과 백제 17대 아신왕 때로 패수에서 서로 큰 전쟁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 중재는 서안에서 낙양을 거쳐 개봉까지의 강을 패하, 패수라 하고 강이 너무 커서 일명 대동강이라 했다고 하여 국내 패수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오순제(한국고대사문제연구소 소장)는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
1.연(燕)나라가 가장 강했을 시기는 소왕(昭王:기원전311-279년) 때로 진개가 공격하여 빼앗은 땅이 조선으로부터 천리, 동호로부터 천리를 빼앗은 것이다. 연나라는 빼앗은 땅을 보호하기 위해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그 땅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한 것이다.
2.「사기(史記)」「몽염열전(蒙恬列傳)」에『진시황 26년에 몽염이란 장수로 30만을 거느리고 북쪽의 융적(匈奴)을 쫓아버리고 하남(河南:Ordos)의 땅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의 험함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이르렀는데 그 길이가 만여 리에 달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경주, 회남자, 여씨춘추, 설원, 염철론 등에서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쪽의 끝을 요동, 갈석산, 요수에 달했다고 하였는데, 특히 갈석산(碣石山)은 진시황과 그 아들 호해가 다녀간 곳으로 요동(遼東)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 근처의 흑산두(黑山頭) 부근에서 15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장방형의 궁전의 초석, 석비를 세웠던 터를 발굴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진나라 당시의 반와당, 공심전, 명문와, 우물터 등이 나오고 있어 이곳이 갈석궁(碣石宮)임을 증명하였다. 그런데도 이병도는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좇아 중국의 어떤 학자가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그린 지도를 작성하는 해프닝을 벌인 적도 있다.
3.일제하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과 현 사학계의 이병도는 만번한에서 문현을 대동강, 번한현을 평북 박천, 패수를 청천강, 왕검성을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다. 천관우는 문현을 요녕성의 개현, 번한현을 평북 박천, 패수를 압록강, 왕검성을 평양으로 보았다.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인 신채호는 만번한은 개평과 해성 부근, 패수를 헌난수, 왕검성은 개평으로 비정하였다. 정인보는 패수를 고려하, 요동고새를 산해관, 요수를 난하, 상하장은 산해관에서 고려하 사이로 보았다. 문정창은 패수를 난하, 왕검성은 북진으로 보았다. 최동은 패수를 고려하, 만번한은 산해관에서 소능하 사이, 요동고색은 창여지방, 왕검성은 해성으로 비정하였다.
최근에 윤내현 교수가 패수를 난하, 만번한은 난하 부근, 위만조선의 수도를 북진으로 보았다. 한편 북한(北韓)의 이지린은 패수를 대능하, 왕검성을 개평으로 비정하였다.
4.연나라 당시 만번한인 상하장은 육주하(六州河)와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 사이로 현재도 그 안에는 황지(荒池)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것은 후일 공손강가 둔유의 남쪽 황지로 대방군을 삼았다고 한 그곳이 된다. 위의 두 강 사이의 거리가 86여 리이며 그 당시 패수(浿水)였던 중전소동사하에서 요동의 옛 요새인 산해관(山海關)까지의 거리는 25여 리로 말을 달려 달아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그러므로 이 당시 패수는 중전소동사하가 되며, 위만은 기준에게 망명하여 두 강 사이 백여 리의 땅에 봉해졌는데, 그곳에 살고 있던 중국의 피난민들을 선동하여 기준을 멸망시킨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충실히 이어받은 이병도는 평양의 대동강(大洞江) 남쪽의 벌판에 있는 자그마한 토성을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고 하였고, 청(淸)나라 말기 저명한 지리고증학자(地理考證學者)인 양수경(楊守敬)은 사마천이 쓴「사기(史記)」에는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동강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문정창은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고 하였는데, 이 토성은 물이 얕고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해 있어 적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고 논박했다. 그래서 필자는 왕검성을 현재의 대능하(大凌河) 동쪽의 북진인 광녕(廣寧) 지방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이상 1994년 3월 28일, 해동신문 『새로 쓰는 우리역사』]
「고려도경」 권 31편을 보면 고려 보제사에 백동 일만 오천근을 주조해 만든 큰 종이 있는데 이층누각인 중루에 설치했더니 소리가 너무 커서 글안(거란)의 왕 선우가 싫어해 이 절로 옮겼다는 기사가 나온다. 보제사는 반도 내에 있지도 않았고 글안(거란)은 신강성에서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지방에 있었으므로 그 아래 서장 감숙성이 고려 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천성 성도엘 가면 고려 왕건의 왕릉이 그곳에 서 있다. 김문기 가문의 비밀이 전해주는 것처럼 동명이인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해서 궁국적으로는 사학자들이 규명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직 누구도 단정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매도할 단계는 아니다. 연고가 없는 진시황이나 주원장의 왕릉을 한반도에 세워줄 리 없는 것처럼 연고도 없이 그곳에 왕건의 왕릉이 서 있을 리 있다고 보는가? 그곳에 서있는 왕건 왕릉의 묘비석의 기록을 한 번 보자. 만일 재야 민족사학자 들의 동일인 주장이 맞다면 다음의 사천(쓰촨)성 성도의 왕건 능묘의 비석을 보면 왕건의 고려 역사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종 이충녕에 의해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할 정도로 왜곡되었는지 곧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동명이인이라면 좀 더 뒤에 김문기 가문의 조선왕조 비밀을 밝히면서 드러나겠지만 독자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사천성 왕건의 영릉(永陵)의 묘 비석 기록
아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쓴 비석이므로 지나정부) 역사상 오대십국(五代十國)(公元 907년 당(唐)이 망하고 979년에 이르러 송(宋)이 북한(北漢)을 멸(滅)함), 이때는 당조(唐朝) 말년으로 번진(藩鎭) 할거가 계속 발전된 때이었다. 북방 5대(代)인 후량(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및 후주(後周)와 한족(漢族)과 소수민족 정권이 부단히 번갈아 교체되어 전란이 그치지 않고, 사회 동탕(動蕩:움직임)이 불안하여, 생산이 매우 큰 파괴를 당했다. 10국의 9국이 남방에 있었는데(오(吳), 남당(南唐),전촉(前蜀),후촉(後蜀),남한(南漢),초(楚),오월(吳越),민(閩)과 형남(荊南)), 각기 한 쪽 모퉁이를 의거해 경계를 지켜 백성을 쉬게 했다. 대략 잠시의 대규모전쟁으로 의업과 공상업이 비교적 북방에 발달했다. 관중과 중원지구의 명신(名臣) 사족(士族)이 난을 피해 남으로 내려와 할거한 약간의 주현(州縣)의 번진(藩鎭)이 서로 결합해, 구성을 완료하니, 각 개가 한 쪽으로 치우쳐 수명이 짧은 천자의 소(小) 조정(朝廷)이었다. 동시에 문인 재사 및 양공(良工), 교장(巧匠)이 촉진되어 남방문화 예술이 발전되었다. 그 중에 오(吳), 남당(南唐)과 전촉(前蜀), 후촉(后蜀)은 당조(唐朝) 지방경제의 “양일익이(揚一益二)”(회남(淮南)의 양주(揚州) 제1(第一), 검남(劍南)의 익주(益州) 제2(第二))의 기초가 상(上)으로, 비교적 기타 각국 경제와 문화는 발달을 요했다.
왕건(王建)은 공원(公元) 891년 성도(成都) 임서천(任西川) 절도사(節度使)로 들어옴. 907년 황제로 즉위(蜀). 925년에 이르러 후당(后唐)이 정벌하러 옴. 그 아들 왕연(王衍)이 나아가 항복함.(후당 이존욱에게 전촉왕 왕건 망함)
전촉(前蜀) 정권의 통치, 실제 공력(共歷) 35년 서천(西川) 및 산남(山南) 서도(西道)지방 동쪽에 거함. 왕건(王建)의 자(字)는 광도(光圖)로 허주(許州) 무양인(舞陽人)이다(일설에 陳州 項城人이라함) 어린 시절 무뢰(无賴)했으며, 표도(剽盜:날치기)를 업으로 삼았고, 중죄(重罪)를 지어 옥살이(系獄)를 했다. 뒤에 (허창을 다스리는) 충무(忠武)군졸이 되었다.(忠武軍鎭陳, 許二州, 治許昌) 많은 장교 중에 특출나서 채주군(蔡州軍) 우후(虞候)에 뽑혀 부임했다. 881년 등주(鄧州)와 채주(蔡州) 병(兵)에 있는 충무 군졸을 일부 나누어 합병해 8도(都)로 편제하고 도장(都將) 일 천 인을 두니 왕건은 8도(都) 도두(都頭)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는, 당(唐) 희종(僖宗)이 촉(蜀)으로 도망쳐 달아났을 때이다. 884년 그와 진휘(晋暉) 등이 각 소속 부(部)를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가니 부르기를 “수가오도(隨駕五都)”라 했다. 희종이 장안(長安)으로 돌아오니 장군(왕건)의 신책(神策)이 군(軍)을 평안한 시절로 만들었다. 886 년, 희종(僖宗)이 흥원(興元)으로 도망쳐 달아나자, 그를 요령벽주자사(遙領壁州刺史)로 파견해 부병(部兵) 술삼천(戌三泉) 진휘(晋暉) 등을 거느리고 흑수(黑水)에 주둔해 잔도(棧道)를 수복(修復)했다. 오래지 않아 실권을 지닌 환관 역인(점치는 관리)들이 5장(5將)을 내보냈는데, 그를 이주자사(利州刺史)로, 진휘(晋暉)를 집주자사(集州刺史)로 파견해 내보냈다. 887년, 그는 산남(山南) 서도(西道) 절도사(節度使)의 부름을 거부하고, 군을 모집하여 낭주(閬州)를 습격하고 자사(刺史)를 내쫓았다. 자칭 방어사(防御使)가 되었다. 윤 11월 서천(西川)의 부름에 응하여 정예병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행군했다. 녹두관(鹿頭關)에 이르러 또 거부를 당했다. 이에 한주(漢州), 덕양(德陽)을 쳐서 빼앗고 성도(成都)로 나아가 공격하고 한주로 돌아와 주둔했다. 888년, 다시 팽주(彭州), 접착(接着)을 공격하고, 서천(西川) 제주(諸州)를 크게 약탈했다. 소종(昭宗)이 즉위했다.
이와 관련해 이중재의 <새고려사>의 실마리 부분을 간단히 이해하면 의문이 풀린다.. 즉, 글안(거란)은 동호 족으로 동호 족이란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후 망해 동쪽으로 흩어졌다 이동해 생긴 동이족이다.(키르키즈 위그루족) 진나라가 망한 후 생긴 나라가 글안과 신라인데 신라는 섬서성 서안 위 기산현에 계림이라 하고 도읍했다. 계림은 현재 중국지도에 보면 서안 위에 있는 순화현이다.이 순화현이 바로 신라의 경주이다.(세종실록지리지 경주편 참고)
이미 대륙 삼국에 대한 내용은 재야 민족 사학자 오재성이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에서 통치자 칭호와 국호의 사용 연대 및 수도와 국호의 연구로 대륙 내 광복신라(江淮新羅)와 독립신라(동신라:반도와 만주)를 말하고, 고구려는 광복신라와 독립신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대륙신라인 광복신라(江淮신라)에게 패망했다고 말한 바(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통일신라는 광복신라로 당과 연합해 고구려 멸망) 있거니와, 같은 재야 민족 사학자 이중재는 「새 고려사」에서 「명사(明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해동역사(海東繹史)」, 「오대사(五代史)」 고려전, 「고려사 지리지」, 「송사」 고려전 강역, 「진서(鎭書)」의 한국땅 지명을 인용해 고려가 대륙에 있다고 단언한다.
필자는 그의 주장을 100% 지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륙사에 대해 이러한 연구가 목하 진행중임을 독자들이 알았으면 해서 소개한다. 이러한 주장을 인지하고 임혜상, 서량지의 대륙사를 들으면 역사에 문외한인 독자들도 대충 그 밑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오재성의 광복신라와 독립신라(동신라)에 대해 간단히 조감하면 다음과 같다.
-< 고구려는 광복신라(江淮신라)와 독립신라(東신라:반도와 만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광복신라(강회신라:대륙신라)에게 패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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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coo2.net/html/main.html-
백제는 한(漢)나라가 망한 후 삼국시대에 중국대륙을 점령했다는 사실이, 삼국지와 오호(五胡)시대의 송서(宋書), 당대(唐代) 이연수의 남사(南史),송대 사마광의 자치통감, 두우의 통전 등에 기술되어있지만 한국의 역사서에는 그러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없다.(「上古朝鮮三千年史」崔在仁 著) 대륙백제와 대륙신라는 본서의 의도가 아니므로 상기 동서에서 대륙백제의 흔적을 간단히 스쳐 더듬으면,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3대 기루왕(己婁王) 45년(121년)에 고구려 태조대왕이 요동과 현도와 낙랑태수와 싸웠을 때 기병 1만을 원병했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백제라고 기술되어있지 않고 마한(馬韓)이라고 기술되어있지만, 마한은 온조왕 27년(AD8)에 이미 백제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후한서의 마한의 기록은 백제로 보아야 한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중국의 한(漢)나라가 망한 후 삼국시대 위(魏)나라 명제(明帝)때인 고이왕(古爾王) 6년(235)에 낙랑의 관리통역 잘못으로 고이왕이 격노하여 낙랑과 대방을 토벌했는데, 대방태수 궁준(弓遵)은 전사하고 낙랑과 대방 두 군은 드디어 멸망했다고 기술되어있다. 이러한 삼국지의 기록을 놓고 식민지사관의 대부인 두계 이병도는 말하기를, 삼국지 위지의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백제와 싸우다가 궁준은 전사하고 대방과 낙랑 두 군이 드디어 멸망했다는 기록은 표현상의 과장이고 실상은 백제의 항복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이병도 국사대관)
그렇지만 백제의 국력은 실로 놀라운 국력이었다. 백제 12대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평양성을 공격했다. 그 후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구수(仇讐)의 사이가 되어버릴 정도로 강성했던 국력이었다. 이러한 백제국의 국력을 오호(五胡) 시대의 송서 이만전(夷蠻傳) 동이백제조를 보면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고 있을 때, 백제 역시 요서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백제가 점령했던 곳은 진평군(晋平郡)이었다는 기록이다. 둘째, 당대(唐代)의 이연수(李延壽)가 쓴 남사 동이전백제조에는,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었는데 진대(晋代)에 이미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있었고 백제 역시 요서의 진평(晋平) 두 군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자치백제군을 설치했다.
셋째,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위나라가 병력을 파견하여 백제를 친 곳이 백제 식민지인 요서 진평 두 군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魏兵追擊百濟 爲濟所敗 晋世百濟 亦據有遼西晋平二郡也) 넷째, 두우통전(杜佑通典) 변방이백제조(邊方夷百濟條)에는, 진(晋)대의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있었다. 백제 역시 요서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진평 두 군이며, 진평은 지금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라고 주를 붙이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이렇게 기술되어있다. 최치원이 서기 866년에 당나라로 가서 부성(富城) 태수로 있을 때 당나라 조정의 태사시중에게 제출한 상소문에, 백제의 전성기에는 백만 병력으로 남쪽의 오월을 침략하고, 북쪽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 제(齊) 노(魯) 나라를 흔들었던 백제는 중국의 거대한 벌레같았다고 했다.
구당서 백제조에는 이러했던 백제의 경계가 기록되어있기를, 백제의 본국은 동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해를 넘어서는 월주(越州:절강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른다고 했다.(百濟東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至高句麗)
이상의 대륙백제와 관련해 이중재의 대륙사 고증의 핵심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이 주장이 모두 옳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후 말하고자하는 대륙사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각론적인 지명비정(比定)의 시시비비를 떠나 대국적인 대륙사를 파악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리 역사는 상고사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원점부터 재출발해야 함을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1.고려 도읍지
「명사(明史)」기록에 의하면, 조선은 기자가 도읍 했던 나라이다. 기자가 도읍 했다면 산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후일 망명하여 남으로 내려가 섬서성 서안(西安)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서안, 장안(長安)성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당연합군의 작전으로 고구려는 동쪽 또는 북쪽으로 옮겨가 기원 후 668년에 만주에 있는 통화(通化)현과 환인(桓仁)현에서 망하고 말았다. 그 후 당나라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서안(西安)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옛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살고 있던 땅은 송악이었다. 송악은 말할 것 없이 동경(東京)이며 평양(平壤)인 동시에 서경(西京)이다. 여기서 서경은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명사(明史)에는 평양은 서경 즉 섬서성 서안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은 천산과 곤륜산을 기준했으므로 유럽은 요서(遼西)였으며 서안은 동경이었다. 명사에서 송악은 동경이며 동경은 평양이고 평양은 서경 즉 서안이다. 평양이 서경에 있을 때 나라 북쪽에 있는 이웃나라는 글란(거란)이며 서쪽에 있는 부족국가는 여직(女直:여진)이다. 명사(明史)에는 거란과 신라의 선조가 진(秦)이라 나온다.(진의 시조는 동이족이고 진의 황실 영(嬴)과 진시황 정(政)의 실제 성인 여불위의 여(呂)씨 성은 강태공 여상(呂尙)의 여(呂)씨 성처럼 신농의 후예 강(姜)씨 성이 여(呂)라는 땅에 봉해져 생긴 동이족 후예라는 건 앞서 밝혔다: 필자)
위(魏)가 망한 후 위나라 사람들은 큰 무리는 신라로 작은 무리는 백제로 또 한편은 대륙의 남으로 내려가 왜(倭)국을 건설하고 백제 땅 안에서 속국으로 자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란에서 백제가 쇠약해지자 지금의 대만으로 옮겨간다.(오재성의 고증과 일치) 841년 당나라 무후(武后) 때 백제 후예들이 왜를 일본으로 부르게 했다.(문무왕때 일본으로 바꾸었다는 기존의 반도사관과 약간 차이가 있다)
「고려사절요」에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은 분명히 사천성 재동현(梓潼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이곳 지명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한다. 태조 왕건이 처음 도읍하면서 한주(漢州)라 했으므로 한주(漢州)가 최초 송악군이라 기록하고 있다.(조선왕실의 비밀을 전하는 김문기 가문에 전해지는 개경(송악) 허도(虛都:거짓수도) 주장과 일치한다) 그 후에 도읍을 서경(西京)으로 옮기면서 송악군을 동경이라 했다. 분명히 동경은 서경이었으므로 송악군의 이름을 사천성에서 서경으로 옮긴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태조가 처음 등극하면서 사천성 한주(漢州)인 송악군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는 고려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때는 촉(蜀)나라이며 연호는 처음부터 후량(後梁)이라 사용했다. 그러다가 태조 19년 들어 후진(後晉) 고조인 천복(天福) 원년을 사용했다.(후량이 후당에게 망하고 후진은 거란에게 망함 )
태조 왕건은 촉(蜀)나라로 출발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다. 촉 나라가 망한 후 태조 왕건은 촉 나라 왕이 아닌 신라의 대장군 격이 되어 견훤의 무리를 타파한다. 그 후 신라가 기원 후 935년에 망하자 그 때 태조의 등극으로 고려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936) 그때가 태조 19년이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호는 후량(後梁),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송(宋)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는 전자와 같이 혈통의 뿌리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2.「고려도경」의 건국설: 대륙 만이(蠻夷) 선우, 가한이 고려건국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이(蠻夷)는 스스로 군신과 같은 혈족이라고 했다. 그들의 호는 선우가한(單于可汗)이다. 기자가 봉해진 때부터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 고조 12년 연(燕:본래는 동이족의 하나) 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무리를 취합하고 뭉쳐서 만이(蠻夷)들과 함께 규합해 나라를 만든 곳이 조선의 땅이다....주몽이 천자의 아들이라 외쳐 고기와 자라를 타고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흘승골성(紇升骨城:어떤 사서는 낙양 근처라 하고 어떤 사서는 서안이라 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하남성과 섬서성 지방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이니 주몽 일행은 흘승골성에서 살고 국호를 지어 고구려라 하고 고(高)씨라 했으며 한편 고려라 했다. 한무제가 망한 뒤 조선은 고려 즉 고구려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한(漢)나라를 격파한 왕망(王莽)은 고구려(高句麗)로 아름을 바꾸었다.(후한서 고구려전 참고) 그리고 왕망의 손자 우거(右渠)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이란 조선사군이며 고구려현이다. 특히 고구려현에 속하는 것은 원도(元菟)군이다. 원도군이란 현도(玄菟)군을 말한다. 현도군의 군장 즉 소국의 임금은 북을 하사하고 북과 기녀와 예악의 부서를 두게 했다. 이 부서에 속하는 사람들도 조정에서 입는 옷을 입고 고을 현감의 명에 따라 관청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왕망이 병사를 일으켜 흉노를 베고 항복을 받았다. 고려인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도적들을 변방으로 쫓았다. 광무 중흥시 고려관리를 북방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상 고려도경에서 보듯이 고려건국에서는 기자의 도읍지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때 대륙에 있었던 만이(蠻夷)의 후예들인 단우(單于:선우)와 가한(可汗)의 부족국가들과 함께 고려가 건국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선우와 가한은 고려와 한 혈통임을 보여준다. 기자가 세운 땅에 고구려와 고려가 건국했음을 보여준다.(기자가 반도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3. 「고려도경」이 전하는 계보명단
조선 태조, 태종, 세종 연간에 왜곡, 개찬된 「고려사」는 건(建:왕건),무(武:혜종),요(堯:정종),소(昭:광종)이래 공양왕 요(瑤)에 이르는 34왕을 말한다. 남송 서긍의 「고려도경」은 17대 해(楷:인종)까지 고려사 세계와 일치해 끝내고 있다.(당시 책이므로) 「고려도경」에서는 고려보다 송이 천자국인 것처럼 되어 있으면서도 고려의 속국이 송나라인 것처럼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섬서성 서안(서경)이 도읍인 강대국 고려에 눌린 동쪽 하남성(하남성 개봉현 수도) 동쪽과 안휘성, 산동성 일대의 조광윤의 북송은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방지역으로 쫓겨갔다. 고려는 북송보다 53년 먼저 세워졌으며 북송보다 200년 뒤에 망했다.
4.신라유민이 서역 돌궐로 도망했다는 기록
「고려도경」 시봉(始封)에서는 고구려의 선조 주(周) 무왕때 기자가 주나라와 같이 세운 것이 조선이다. 그러기에 조선의 적자 즉 실제 본부인의 자식이며 실제 아버지의 성씨도 함께 지니고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周),진(秦),한(漢)나라 고조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선조가 이어왔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자 준(準)왕은 조선왕이었던 왕만(王滿)이다. 왕만은 연(燕)나라 노관의 반란으로 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전에는 산서성 태원(太原)이 진번(眞番)이었던 것을 왕만이 남으로 내려와 피난민과 무리를 규합하여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니 이것이 한(漢)나라다.
한나라는 섬서성 서안(西安) 즉 장안(長安)성에 도읍을 정한다는 기록이다. 고려도경 시봉에는 고구려가 그러하고 고구려 후손인 고려가 서안에 도읍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려도경은 서안 즉 섬서성 장안성이 옛 조선 즉 고조선의 땅이라고 적고 있다. 또 고려 때 신라유민들은 멀리 돌궐이 있는 곳 청해성(靑海省)과 신강성(新彊省) 등지로 분산되어 도망갔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돌궐과 말갈은 고(高)씨이며 오래도록 끊어져 있다가 후당 동광 장종때 다시 복권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말갈이다. 돌궐과 말갈은 같은 시대에 지역만 다를 뿐 대륙에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신라, 백제가 말갈과 많은 전쟁을 치른 사실이 「삼국사기」 <본기>에 기록되어있다.
선비족의 후예였던 말갈과 돌궐은 대륙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엄청난 활동을 했다. 말갈의 선조는 물길(勿吉)과 숙신(肅愼)이다. 고려도경 왕씨 계보를 보면 고려 때 송나라뿐만 아니라 글란(거란)과 요 그리고 금나라 등도 고려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로 기록되고 있다. 만약 고려가 한국땅에 없었다면 몽고와 원나라의 싸움터는 현 중국대륙이다. 어떤 사서들은 고려가 삼한통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한은 한 집안이라고 삼국사기 본기에 적고 있다. 모든 정사는 고려가 삼한통일을 했다고 적고 있다. 고려 17대 인종때 중국 전대륙인 삼한을 통일한 바 있으므로 강대국인 고려를 코리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5. 신라의 패망과 고려의 출현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와 당나라는 강토를 양분해 가졌다. 고구려가 있던 땅은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리고 서안과 낙양 밑 쪽 광활한 영토는 신라(오재성이 말하는 소위 江淮 광복신라)가 가졌다. 당이 망한 뒤 경순왕은 후당(後唐)시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말았다. 나라를 내어준 대가로 낙랑공주를 태조 왕건에게서 하사 받았다. 이때가 경순왕 8년 가을 9월이었다. 그때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은 산서성 운주계(運州界)이며, 30여 군과 현이다. 운주계란 하남성과 산서성의 접경지 위쪽이며, 하현(夏縣) 아래 안읍(安邑:현재는 運城)이다. 후진은 고구려와 같은 혈통으로 고구려를 망하게 한 것은 나당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의 씨족 일부는 당나라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지만 직계혈통은 당나라에서 뿌리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양서(梁書), 원사(元史), 명사(明史), 해동역사, 북사, 송사,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각종 사서를 살펴보면, 신라 경순왕은 당나라 무후(武后) 이법(李法)의 외손자로 되어있다. 「삼국사기」 경순왕 편 본문에 경순왕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으로 (당나라) 효종(孝宗) 이창(伊滄) 벼슬을 한 이(李)씨라 하고 백제 의자왕 편에 경순왕이 당나라 무후의 손자라 했으므로 효종은 당나라 무종의 아들로 당과 신라는 외가댁 혈족관계이다. 당나라가 섬서성 장안성에 도읍 했을 때 신라는 서안 서쪽에 있는 기산(岐山)인 계림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나라 수도 인접지에 신라 경주가 있었기 때문에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최치원이 당에 수학한 것이나 혜초가 실크로드를 간 것은 신라가 대륙이고 같은 혈통관계라 가능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대륙에 함께 있었으므로 왕건은 신라를 산서성 안읍(安邑)에서 항복 받을 수 있었고 고려는 당나라와 신라가 망한 후 후당이 생길 때 함께 후진(後晉)의 씨족으로서 또 고구려의 후예로 당당히 대륙서안을 기준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6.고려의 뿌리
태조 왕건의 뿌리는 정확한 문헌이 없을 정도이다.「제왕운기(帝王韻紀)」 세계도(世系圖)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의 조상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다. 고려시조는 사찬(沙粲)이다. 사찬의 후예가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당나라 숙종황제와 정화황후에게서 태어난 경강대왕(의조:왕건 조부)에 이어 세조(왕융:왕건 부친)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이다. 당나라 숙종은 당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이형(李亨)이며 연호는 지덕원재(至德元載)이다. 이형은 후당 시 토번의 성을 함락시키고 7군을 거느리고 3 성(城)을 장악한 사람이다.
당 숙종 황제의 아버지인 원덕대왕(742-756)은 천보 원년으로 출발하여 15년 만에 물러나고 숙종이 등극한다. 그 후 보응(寶應) 원년에 진(晉)나라에서 조서를 받고 진(震)국을 세운 사람이 발해왕 대조영이다. 한편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왕건은 대순(大順) 원년(890)에 사천성 공주(邛州:邛峽縣)에 있던 촉(蜀)나라를 취한다. 왕건은 당나라 때 촉 나라를 기원 후 890년에 갖게 되고 촉 왕이 되었지만 후당(923-936)이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42년 만에 망한다. 그러나 기원 후 939년 후진(後晉) 때 성을 이(李) 씨로 바꾸고, 기원 후 935년 신라 경순왕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고려로 등극한다. 왕(王)씨 성을 이(李)씨로 바꾼 것이 아니고 왕건을 그대로 두고 이 씨의 성씨인 것처럼 바꾸었다는 것이다.
정인지 고려사에는 (당나라 말기) 세조의 본처인 위숙(威肅)왕후 한(韓)씨 몸에서 정유생 정월 병술일에 태어났다고 하고 있다. 이때는 당나라 건부(乾符874-879) 4년 즉, 희종(僖宗) 이현(李儇)때로 878년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會昌)의 차자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또 정인지 고려사에서는 동진(東晉)때 사(司)씨인 원제(元帝)와 명제(明帝)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혈통은 후양(後梁)때 선제(宣帝)이던 숙찰이다. 숙찰은 대정(大定)의 후손이라 했기 때문에 왕씨라고 했다는 기록이다. 왕건의 선조는 진(秦)나라가 망한 후 동진(東晉)으로 왕통이 이어지고 그 다음은 후양에서 당나라로 내려왔음을 정인지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왜곡되지 않은 고려 왕건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왕건은 13세에 당나라 왕통의 기세로 사천성 공주(邛州:邛峽縣)에서 촉(蜀)을 세우고 20세 때인 907년 전촉(前蜀)의 왕 칭호를 받았으나 932년 같은 혈통의 후당(後唐) 이존욱에게 망하고 만다. 전촉이 망하자 맹지상(孟知詳)이 후촉왕으로 등극하나 936년 후진(後晉)에 의해 망하고 왕건은 본래의 이(李) 씨 성을 찾아 935년 다시 고려왕으로 등극한다. 전촉이 망한 932년부터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왕건은 대장군으로 활약했다.
현재 대륙에서 왕건은 혈통이 없고 시골출신이며 떠돌이 야인처럼 가르치고 있다. 아주 못된 불량배인 양 사서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천성 현지 가이드들에게도 왕건을 불량아로 취급해 교육시키고 있었다.(사천성 성도에 엄청난 규모의 왕건의 묘가 있다.(사진참조) 개성의 초라한 왕건 묘는 한마디로 가짜란 소리다) 한마디로 현재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저의가 뚜렷했다. 후진(後晉)은 5대 10국 시대 때이다. <국사년표(國史年表)>는 왕건이 890년 중당(中唐) 대순 원년에 촉왕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5대10국 때 석경당(石敬塘)이 글란(거란)병을 빌려 후당을 망하게 했다. 그리하여 국호를 진(晉)이라 하였다. 사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때는 후진(後晉)이라고 했다. 도읍은 하남성 개봉현에서 다스렸다. 후진은 산동성, 섬서성, 감숙성, 하북성, 산서성 남부이며 안휘성 북부지방이었다. 글란(거란)의 신하인 후진은 두 임군에 11년간 지속했으나 소멸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는 후진(後晉)의 씨족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제왕운기」는 당나라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참고:「고려사」역시 당 숙종에서 뿌리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로 강소성 소주(蘇州)에 혁거세 묘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왕의 무덤 중 31명의 왕릉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1명의 왕릉은 화장하거나 무덤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신라왕릉 묘지의 지명은 모두가 현재 중국대륙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이로 보면 경주의 왕릉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개 대륙의 선대 왕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가묘일 가능성이 크다:필자) 신라 35대 경덕왕때 현 중국 대륙에 있는 땅 이름을 중국대륙에서 고친 일은 있으나 경덕왕이 한국 땅에 이름을 옮긴 사실은 없다. 그러나 경덕왕이 고친 이름 중에 고려 6대 성종과 7대 목종 그리고 고려 8대 현종 때에 신라 경덕왕이 바꾸었던 땅이름을 한국에 옮겼을 뿐이다. 한국에 한자식 이름으로 지명이 정착된 것은 고려 27대 충숙왕 때이다.
한국에 있는 땅 이름은 대륙에 있던 것을 고려때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고려 이후의 한반도 지명을 보고 대륙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을 꿰어맞추다 보니 대륙에 있던 고려까지 한반도에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현재 고려사 뿐 만 아니라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을 보면 한국에 없는 지명이 70% 이상이다. 1931년 장려화(臧勵龢)가 펴낸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보면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땅은 모조리 만주에 있는 봉천으로 옮기고 봉천마저 심양으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봉천 아니면 요녕성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함주(咸州)의 경우 함흥으로 번역해 이성계가 함흥에서 태어난 것으로 번역했으나 함주는 중국 하남성 통허현(通許縣)으로 이 성계 부모는 여진족 사람이었다.
한반도로 지명을 옮기기 이전의 지명으로 삼국사기 견훤전을 보면 후백제 이야기가 아닌 본 백제 기록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즉 견훤전에 신라 김유신이 황산(黃山)과 사비성(泗沘城)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황산(黃山)은 하남 위례성이 있으며 동웅주(東熊州)와 서웅주(西熊州) 및 웅이현(熊耳縣)이 있었던 하남성 급현(汲縣)에서 40리 거리에 있다고 되어있다. 백제는 본래 대륙의 산서성 직산현으로 지도상 산서성 위례성으로 표기되어있다.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 세웠다 한다. 그런데 금마산이 운남성 곤명시 동쪽 25리라 되어있고 혹 익주(益州)일 것이라 했는데 익주는 감숙성 성현과 임담현 남쪽 강천성 또는 사천성 봉절현이라 했으나 이 곳 이름을 당나라가 사천성 성도로 고쳐 기록하고 있으나 백제가 바다를 넘었다 했으므로 아니다. 당나라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넜다면 분명히 섬서성 서안에서 하남성 낙양을 거쳐 개봉현에 이르는 하남성 패수(浿水)일 것이다.(일본에 백제천이 있듯이 광서성 남쪽 남영(南寧)시 밑에도 백제(百濟)라는 지명이 있어 대륙백제를 증명한다)
견훤이 빼앗았다는 거창(居昌)의 20 여 개 성에 대해, 경상도 거창(居昌)에는 옛날부터 현재까지 20여 개의 성이 없었으며, 그 곳은 대륙의 땅이름으로 거용현(居庸縣), 거용관(居庸關), 거소산(居巢山), 거소현(居巢縣) 등으로 지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견훤 또한 경북 상주 사람이 아니라 하북성 상주사람이며 그가 나타난 완산주는 완주로 산서성과 하북성을 당시에 이르는 직예성(直隸城) 완현(完縣)을 말하는데 지금은 북경 남쪽 보정시(保定市) 서남쪽 백리 이내에 있다. 하남 위례성(慰禮城)은 산서성(山西省) 직산현(稷山縣)으로 산서성 위례성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 견훤전은 후백제의 얘기가 아니고 본 백제의 기록이며 신라 김유신은 하남성 급현(汲縣) 40리 거리에 있는 황산(黃山:계백이 죽은 곳)과 사비성까지 왔다. 견훤과 궁예가 전쟁을 한 덕진포는 귀주성 사남현 동남1리고 견훤과 신라, 백제, 고려의 활동무대는 중원의 사천성으로 철원은 철주가 있는 감숙성 민현 동쪽이며 고려왕으로 추대된 왕건에게 지리산 대나무 부채를 보냈다 한 지리산은 대나무로 유명한 사천성, 운남성의 경계지역인 운남성 학경(鶴慶)이며 여진족인 이성계의 고향인 함주는 함흥이 아니라 중국 하남성 통허현(通許縣)이다. 한반도 예성강에 염주(鹽州), 백주(白州),정주(貞州)가 있었나? 예성강은 패수(浿水)로 견훤아들 양검이 강주(康州)도독이 되고 용검이 무주(武州)도독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다. 강주는 광동성 덕경현(德慶縣)이고 무주는 호남성 상덕현(常德縣)이다. 경상도 거창에는 20여 개의 성이 있지 않았으며 오강(烏江)의 지명은 반도에 없고 안휘성 화현(和縣)에 있는 곳이다. 청구(靑丘)는 산동성 광요현이며 견훤이 5000명 정예갑병을 데리고 공격한 의성부(義城府)는 사천성 광원현(光元縣) 호북성 경계에 있다.
견훤이 포로와 백성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전주(全州)는 전현(全縣)으로 호남성 영릉현(零陵縣)이다. 이 전주가 지금의 광서성 전주(全州)로 지명을 옮긴 것으로 지명사전은 밝히고 있다. 왕건이 주둔한 운주(運州)는 산서성 안읍(安邑)으로 경순왕은 이곳의 30여 군현을 왕건에 내주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후당 청태 원년에 견훤이 소식을 듣는 것으로 나온다. 또 신검이 이찬 능환, 파진찬 최승우의 보좌를 받아 아버지 견훤을 금강의 모친 고비와 일족들 및 시종들과 함께 유폐한 금산사는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서북에 있는 백탑 산중이라고 되어있다.(사실 전주 금산사 미륵불전에 일족 수십 명이 동시에 들어갔다는 기존의 주장은 불합리한 점이 많다: 필자) 왕건이 양검과 모사 이찬 능환을 유배한 진주(眞州)는 진부(眞符)로 사천성 무현(茂縣)서북을 말한다.
7. 고려사절요 기록
한주(漢州) 송악군은 사천성 자동현(梓潼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이곳 지명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한다. 왕건이 처음 도읍하면서 한주(漢州)라 했으므로 한주가 최초 송악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면서 송악군을 동경이라 했다. 분명히 동경은 서경이었으므로 송악군의 이름을 사천성에서 서셩으로 옮긴 것이 확실해진다. 태조가 처은 등극하면서 사천성 한주인 송악군에 도읍을 정할 때 국호가 고려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 때는 촉(蜀)나라이며 연호는 처음부터 후량(後梁)이라 사용했으며 후량이 후당에게 망하자 태조19년부터 후진(後晉) 고조인 천복(天福) 원년을 사용했다.
7. 백제 부속 왜
왜는 위(魏)가 망한 후 큰 무리는 신라로, 작은 무리는 백제로 그리고 또 한 편은 대륙의 남으로 내려가 왜(倭)국을 건설한다. 이때 왜국은 백제 땅 안에서 속국으로 자라게 된다. 왜국은 고구려, 신라, 백제의 전란에서 백제가 쇠약해지자 지금의 대만으로 옮겨간다. 기원 후 841년 당나라 무후(武后:會昌 원년) 때 백제의 후예들이 왜를 일본이라 고쳐 부르게 했는데 왜국은 백제유민과 위나라 유민의 결합체인 셈이다. 본래 위(魏)와 왜(倭)는 같은 뜻을 지닌 글자이다. 왜는 섬을 타고 내려갔는데 백제의 선조를 도이(島夷)라고 한다. 한편 백제의 선조는 멀리 간다고 하여 장이(長夷)라고 하며, 백제의 선조들이 워낙 먼 곳으로 이주해 가기 때문에 조이(鳥夷)라고도 한다. 조이란 새와 같은 동이란 뜻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선조가 조이(鳥夷)라고 하며 사학자들은 조이임을 밝히고 있다.
8. 왕건이 살던 곳은 촉군(蜀郡)
송사(宋史) 고려전에 왕건이 살던 곳은 개주(開州)라 했는데 개주는 촉막군(蜀莫郡)으로 한반도에는 이들 지명이 없다. 당나라 이후 성산(盛山)군으로 불려온 이곳은 그 이후 개주(開州)로 바뀌어 지금은 사천성 개현(開縣)으로 되어있다. 이곳은 상고이래 본시 예맥(濊貊)의 땅이며 고려가 있던 경주(慶州)이다. 촉막군 개주는 개성부라 했으며 신라 때 동주(東州)라 하고 호를 동경이라 했는데 백제 때에는 금주(金州)라 했으며 금마군이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개성현으로 되어있다. 촉나라가 사천성이었으며 고려의 선조인 당나라가 사천성이었다. 명사(明史)에서 고구려 당시 신라, 백제와 같이 있었던 땅은 송악이라 했으며 송악은 동경이자 평양이며 서경이라 기록하여 송사 고려전과 부합하고 있음을 본다. 이 내용은 원사(元史)와도 일치하나 원사는 고려왕 34대를 27대 왕으로 기록하여 28대 충혜왕부터는 첩목아(帖木兒:문서첩 꼭두각시) 나무아이로 보아 이미 망한 나라로 보았다.
9.대륙지명을 반도 옮기면서 역사왜곡
대륙의 지명이 한반도로 옮겨진 것은 거란의 침공이 많아지자 고려 6대 성종 때부터 8대 현종 때 대륙의 모든 행정지명을 그대로 한반도로 옮겨놓는다. 고려는 한국 땅에 도읍한 사실조차 없다. 고려사에 나오는 땅이름은 10개 중 한 두 군데만 한국에 있는 것처럼 되어있다. 예를 들자면 전주, 광주, 청주 등이다. 이런 이름은 고려가 대륙에 있으면서 일부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가령 경주(慶州)가 나오는 고려사 대목에 영주 하나정도를 빼면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대륙에서는 볼 수 있는 다음의 지명이 동시에 나온다. 삭주(朔州), 장주(長州), 복주(複州), 정주(定州), 진주(鎭州), 강주(康州), 운주(運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래주(來州), 곽주(郭州), 운주(運州), 양주(良州), 도주(道州), 정주(貞州), 영주(寧州), 가주(嘉州), 한주(韓州), 평주(平州), 영주(永州), 임주(林州), 신주(信州), 의주(宜州), 함주(咸州), 길주(吉州)
고려 15대 숙종 때 김위제(金謂磾)는 남경천도를 주장하는 상서를 올렸다. 고려사절요에서 김위제는, 도선비기에 고려의 땅에 삼경이 있는데, 중경이 있어 송악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있어 남경이 되고, 평양이 있어 서경이 되니, 11,12,1,2월은 중경에 머물고, 3,4,5,6월은 남경에 머물고, 7,8,9,10월은 서경에 머문다 한 기록을 배경으로, 개국 후 160 여 년에 빠져있는 남경을 만들어 천도해야 할 적기임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 있다. 결론만 밝히면 중경은 현재의 하북성 북경, 남경은 현재의 사천성 성도, 서경은 현재의 섬서성 서안이다. 고려 때 동 여진과 서 여진(흑수말갈 후예)이 있었는데 서 여진은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 내외몽고에 있었고 동 여진은 지금의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에 있었고 북경을 중심으로 발해만 주위에 북송이 있었으며 동여진 좌측, 북송과 감숙의 서 여진 위에 요(遼)가 포진하고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예종때 서여진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데 만일 고려가 한반도에 있다면 서역에 있는 서여진이 무엇하러 요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수 만리 길을 해마다 찾아올 필요가 있는가. 또 고려 예종때 동여진 공아(公牙)가 조공르 바치고 가므로 예종이 사신을 시켜 후히 대접하고 고려의 동쪽경계까지 전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가 대륙에 있다는 기록이다.
10. 고려왕건 혈통과 궁예, 견훤
-高 麗(AD.918~AD.1395년:475년):고려 건국지는 사천성 성도.
왕건의 묘 역시 사천성 성도에 있다.
① 왕건(王建)의 출생과 혈통
처음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는 왕씨계보(王氏系譜)에 의하면, 왕씨(王氏)의 선조는
개마고려대족야(蓋馬高麗大族也)라고 했다.
여기서 개마고려(蓋馬高麗)라 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에 있던 고구려(高句麗)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개마대산은 개마현(蓋馬縣)에 있다고 되어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 郡)에 속하고, 개마대산이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며, 평양성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지도를 보면 섬서성(陝西省) 서안에서 서남쪽 태백산(太白山)이 있는 부풍현(扶風縣) 일대에 개마대산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왕씨의 선조들은 고구려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자 건현(建賢)이란 사람이 군장(君長:군신의 장)이 된 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때, 권지국사(權知國事)로 후당 명종(明宗 AD.926~930년)으로부터 임명받아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 州都督充大義軍使)가 된 후에 고려왕으로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도경에서 보면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 州都督充大義軍使)가 고려왕(高麗王)으로 봉작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건원(建元 AD.343~344년)은 동진(東晋) 때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을 말한다.
※ 고려도경에서 보는바와 같이 왕씨의 가문은 본래 고구려의 큰 부족인 군신의 집안에서 파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姓)은 왕씨(王氏)가 아니라 고구려의 씨족(氏族)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왕씨의 성은 본래 고씨(高氏)의 집안인 것을 고려도경에서는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고려도경에 의하면 북송(北宋)의 태조(太祖)였던 조광윤(趙匡胤 AD.960~963년)의 아버지는, 후한(後漢) 3代 건우(乾佑) 유승우(劉承佑 AD.948~950년)이며, 유승우의 조상은 동진(東晋) 7代 강제건원(康帝建元) 사마악(司馬岳 AD.343~344년)이다.
말하자면 사마악의 후손이 후한 3대 건우(乾佑)인 유승우(劉承佑)로 이어지고, 유승우의 아들은 북송(北宋) 때의 조광윤(趙匡胤)으로 성씨(姓氏)가 바뀌면서, 다른 나라로 혈통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 성씨가 바뀌는 것은 어떤 나라에 등극할 때 그 나라 왕의 성(姓)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왕이 다른 성(姓)을 주는 경우도 같다.
예를 들자면 황제(黃帝 BC.2679년)의 아들이 25명이었는데, 성(姓)을 받은 아들은 고작 14명이라고 사기(史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는 김씨(金氏)로서, 신라왕의 대부분은 김씨(金氏)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는 고신씨(高辛氏 BC.2482년)로 황제의 증손자이다. 본래 황제의 성(姓)은 공손씨(公孫氏)라고 했는데, 후일 희씨(姬氏)로 바뀌었고, 아들들은 희씨 성이 아니라 엉뚱하게 다른 성씨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에서는, 성골장군(聖骨將軍)에서 시조사찬(始祖沙粲)으로 이어지고, 후당(後唐)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인 이형지덕(李亨至德 AD.756~758년)의 왕비(王后)인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이어져 왔다.
그 후 경강대왕(景康大王)에서 마지막 당세조(唐世祖)인 장종(蔣宗) 이존욱(李存勖) 동광(同光 AD.923~926년)에 이어, 태조왕건(太祖王建)으로 혈통이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타난 태조왕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씨(王氏)는 성이며, 건(建)은 죽은 후의 휘호이다. 왕씨는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였던 아버지 융(隆)의 장자이며, 왕건의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이때의 금성(金城)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임을, 후한서와 여러 정사(正史)에서 밝히고 있다. 당(唐)나라 희종(僖宗) 이현(李 ) 건부(乾符 AD.874~879년) 4년,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AD.874~884년) 3년인,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 14일에 태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본문에서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이라 했으므로, 한주(漢州)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고조선 때부터 삼한(三韓)과 삼국 때까지 한반도에는 한주라는, 한자로 된 지명은 없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한주(漢州)의 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때 두었던 곳으로, 당나라 때 이름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했다. 송(宋)나라 때는 한주덕양군(漢州德陽郡)이라 했으며, 원(元)나라 때 와서 한주(漢州)라고 했다.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에는 모두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였으나, 중화민국 때 와서 이름을 고쳐 광한현(廣漢縣)이라고 적고 있다.
※ 한주(漢州)를 당나라 때 덕양군(德陽郡)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61쪽에 있는 德陽郡을 찾아보았다.
덕양군은 후한 때 사천성(四川省) 자동현(梓潼縣) 북쪽에 두었다가, 그후 지명을 옮겼다. 그곳은 사천성 수녕현(遂寧縣) 東南이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주 송악군(漢州松嶽郡)은 중국대륙에 있는 사천성 성도(成都)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태조 왕건은 한주 송악군에서 태어났으므로, 묘 역시 사천성 성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기로 한다.
唐나라 세조의 장자(長子) 어머니는 당나라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 AD.756~758년)인 이형(李亨) 지덕(至德)의 왕후인 정화왕후(貞和王后) 한씨(韓氏)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당나라 세조는 당무후(唐武后)인 무종(武宗 AD.841~860년) 이전(李 )인 회창(會昌)이다. 그러니까 당나라 세조였던 무종(武宗)의 아들인 태조 왕건은 희종(僖宗 AD.874~877년)인 이현(李 ) 건부(乾符) 3년에 태어났다. 고로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正月 十四日에, 왕건은 당나라 혈통으로 한주 송악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혈손(血孫)으로 고려(高麗)를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인 한주(漢州)였던 송악군(松嶽郡)에서 건국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당(後唐)에게 망한 후 궁예(弓裔)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태조왕건이 전촉(前蜀)을 건국한 연대는 AD.918년으로, 거란(契丹) 태조(太祖) 신책(神冊 AD.916년)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태조왕건의 건국연대를 전촉(前蜀)을 세운 AD.918년으로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려는 고구려의 혈통을 이어 동진(東晋)에 이르고, 따라서 당나라 숙종인 원덕대왕의 장남으로 금성태수 융이었던 세조 무종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었다.
왕건의 아버지는 금성태수로 있다가 후당(後唐)의 왕으로 등극한 셈이다.
※ 한무제(漢武帝 BC.140~135년)는 우거(右渠)로서, 조선을 멸한 후 고려현(高麗縣)에 원도군(元 郡)을 속하게 했다. 그 후 왕망(王莽 AD.9~13년)은 군사를 일으켜 흉노(匈奴)를 주살하고 전한(前漢)을 격파한 후 신(新), 즉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그리고 후한(後漢)인 동한(東漢)이 실질적인 고구려로 내려왔다.
고려태조 왕건의 선조는 동진(東晋)을 거쳐 당나라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동안 나당(羅唐)에 의해 AD.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8년 후 고구려가 망한 후 당 숙종인 원덕대왕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무종(武宗)인 이전(李 ) 회창(會昌)이다.
또한 무종의 장남으로 태어난 왕건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2년에 고려왕으로 등극하여 26년간 재위하다 67세에 죽은 것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과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기록되어 있다.
※ 태조왕건의 계보와 건국은 이상과 같이 이루어졌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촉(前蜀) 나라 때 사천성 성도에서 도읍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 후 궁예(弓裔)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기원후 935년 고려는 송악인 개성(開城)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남송(南宋)과 북송(北宋), 그리고 거란을 차례차례 멸망시킨 후 삼한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려는 옛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에서 천자국(天子國)으로서서 위업을 떨치게 되었다. 고로 한국의 국제 칭호는 고려인 코리아로 현재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왕릉이 한반도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② 왕건의 활동무대와 지명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은 사천성 성도(成都)
※ 왕건은 기원후 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正月) 십사일(十四日),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남쪽인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태조왕건은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漢州松嶽郡. 唐改曰 德陽郡. 宋曰 漢州德陽郡. 元曰 漢州. 明淸皆屬. 四川省成都府.
한주송악군은 지금의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임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기록되어 있다.
※ 왕건이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한(後漢)에 의해 망한 후, 궁예의 장수로 활약할 무렵의 지명은 다음과 같다.
이 지명은 삼국사기․고려사․고려도경․삼국유사․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난 것을 정리해 본 것이다.
굳이 지명을 정리하고자 한 것은 과연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중국대륙에서 태조왕건과 궁예, 그리고 견훤(甄萱)이 활동했는지의 여부를 이 기회를 통해 확실히 해두려는 데 있는 것이다.
※ 남주(南州)는 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 서쪽이다. 당나라가 땅이름을 고쳐 초주(楚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다시 고쳐 남주군(南州郡)이라 했다. 그 후 다시 남주(南州)라 했고, 이곳은 현재 사천성(四川省) 기강현( 江縣) 남쪽 90리라고 했다. 남당(南唐) 시에는 땅이름을 고쳐 장주( 州)라 했다가, 다시 남주(南州)라 했다.
송(宋)나라 때 다시 고쳐 장주( 州)라 했다가, 송나라는 다시 기미주(羈 州)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옛 서주부(敍州府)의 경계라 했던 것이다.
※ 철원(鐵圓)은 철주(鐵州)로서, 조선의 평양(平壤), 즉 중국의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의 서북인 감숙성 민현(岷縣)의 동쪽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1쪽에 기록되어 있다.
철원(鐵圓)은 옛 고구려의 땅으로서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곳이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적고 있다.
※ 금성(金城)은 왕건의 아버지인 융(隆), 즉 세조였던 당나라 무종(武宗 AD.841~846년)이 금성태수로 지낸 곳이다. 금성은 금성군(金城郡)으로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옛 난주(蘭州)와 서영(西寧)의 두 주(州)를 뜻한다.
또한 금성현(金城縣)은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西南이라고, 중국지명대사전 543쪽에 기록되어 있다.
金城은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 무종(武宗)의 말에 따르면, 당나라 대왕(大王)들이 항상 욕심을 가지던 조선의 숙신(肅愼)이었던 변한(卞韓)의 땅이라고, 고려사절요에는 적고 있다.
※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靑州), 괴양(槐壤)과 당성(唐城) 즉 당나라 성 등을 태조왕건 20년에 군(郡)과 현(縣)을 모두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어서 광주(光州), 금성군(錦城郡) 즉 금성(錦城), 나주(羅州), 양주(良州)까지 정벌한 것으로 되어있다(고려사절요).
※ 광주(廣州)는 하남성(河南省) 노산현(魯山縣)과 양성현(襄城縣)으로 되어있는데, 후일에 광동성(廣東省) 곡강현(曲江縣)과 남해군(南海郡)으로 옮겨졌다.
※ 충주(忠州)는 사천성(四川省) 충현(忠縣)에서 다스린 것으로, 중국지명대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 청주(靑州)는 산동성(山東省) 익도현(益都縣)과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東南 80리와 강소성(江蘇省) 강도현(江都縣) 東北으로 기록되어 있다.
※ 괴양(槐壤)은 어디인지 기록이 없다.
※ 당성(唐城)은 당성현(唐城縣)으로 호북성(湖北省) 수현(隋縣) 西北.
※ 광주(光州)는 후위(後魏) 때 산동성(山東省) 액현(掖縣), 즉 지금의 산동반도 내주(萊州)이다.
※ 금성군(錦城郡)은 금현(錦縣)이며, 요(遼)나라 때 영락현(永樂縣)이라 했다.
영락현(永樂縣)은 하북성(河北省) 서수현(徐水縣)이며, 한편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東南 120리로 기록되어 있다.
금성(錦城)을 금주(錦州) 또는 조양현(朝陽縣)이라 했으며, 일명 설금현(設錦縣)과 도하현(徒河縣)이라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는 요서군(遼西郡)이라 했다는 기록이다.
※ 조양현(朝陽縣)은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 東南 80리와, 산동성(山東省) 장구현(章丘縣) 西北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양현(朝陽縣)은 지금의 서안(西安)이다(왕성(王城))
※ 도하현(徒河縣)은 교하현(交河縣)으로서 신강성(新疆省) 토노번현(吐魯番縣) 서쪽인 카자흐공화국까지 정벌한 것으로, 고려사 지명에 나타나 있다.
(예) 조선현(朝鮮縣)을 보면 한나라 때와 후한(後漢) 시까지 진(晉)나라가 있던 곳은 고려의 왕검성(王儉城)이라 했다. 이때 고려는 고구려이다. 즉 옛 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이며, 이곳은 평양(平壤)인 장안성(長安城)이며, 후위(後魏)의 무리들이 모두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현(朝鮮縣)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04쪽에 기록되어 있다.
왕검성(王儉城)은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하며, 일명 험독성(險瀆城)이라 하여, 조선 왕만(王滿)이 도읍한 험독현(險瀆縣)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251쪽에 적고 있다.
※ 나주(羅州)는 치염강(治廉江)이 흐르는 치수(治水)이며, 치수(治水)는 산서성(山西省) 삭현(朔縣)으로 東北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되어있다. 지금에 와서 황수하(黃水河)라 한다. 그러나 후일에 이르러 광동성(廣東省) 화현(化縣) 東北으로 지명을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 양주(良州)는 양성현(良城縣)으로, 강소성(江蘇省) 비현( 縣) 북쪽 60리인 것으로 되어있다.
※ 상주(尙州)는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 북쪽 경계 지역이며, 이곳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태어난 고향이다.
※ 정주(貞州)는 정풍주(貞豊州)로서, 귀주성(貴州省) 흥의부(興義府)로, 일명 정풍현(貞豊縣)이다.
※ 등주(登州)는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이다. 일명 동모군(東牟郡)이며, 지금의 산동성 봉래현(蓬萊縣)을 말한다(지명사전 926쪽).
※ 운주(運州)는 운성현(運城縣)으로서 산서성(山西省) 안읍현(安邑縣) 西南 15리이며, 일명 가염성(可鹽城)이라고 지명을 바꾸었다.
특히 운주는 신라 56대 경순왕 8년 9월에 운주계(運州界) 30여 개나 되는 군과 현을, 태조대왕에게 내주면서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운주계란 운주의 주위에 있는 군과 현을 말한다(삼국사기, 고려사 등 참고).
※ 청주축나성(靑州築羅城)은 옛 九州의 하나이다. 청주에 나성(羅城)을 쌓은 곳은 지금의 산동성 익도현(益都縣)에서 다스려졌다. 이곳은 산동성 교동도(膠東道)인 제남(濟南)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 웅주(熊州)는 하남성 노씨현(盧氏縣) 西南 70리에 있으며, 이곳은 웅이산(熊耳山)이 있는 지역이다.
※ 염주(鹽州)는 한(漢)나라 때 두었던 고성현(高城縣)으로, 지금의 하북성 염산현(鹽山縣)으로 南 40리이다. 염주(鹽州)는 후위(後魏) 때 둠. 수나라 때 지명을 염천군(鹽川郡)이라 했고, 당나라 때 다시 염주(鹽州)라 했다.
송나라 때는 다시 지명을 고쳐 서하(西夏)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영하(寧夏)의 염지현(鹽池縣) 북쪽이라 했다. 이곳은 고조선(古朝鮮)의 경계라 했으므로, 이때 고조선은 중심부인 서경(西京), 즉 서안(西安)의 북쪽이다.
지금의 섬서성 북쪽인 내몽고(內蒙古)와의 접경지대를 말한다. 그러나 염산현(鹽山縣)은 하북성 염산현으로 되어있다.
※ 위주(謂州)는 지명이 보이지 않음.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땅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아주(牙州)는 아산(牙山)으로 흠현(欽縣) 남룡문(南龍門) 동쪽 60리로 되어있다. 그러나 거아산(距牙山) 20리로 되어있는데, 거아산은 지명사전에 없었다.
한편 마안산(馬鞍山)으로 되어있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안산(馬鞍山)은 아산(牙山)으로 처음 있던 곳부터 순차적으로 지명이 옮겨진 것을 번호 순으로 엮어보려 한다.
① 감숙성 경천현(涇川縣) 西北. ② 감숙성 예현(禮縣) 北 15리. ③ 산서성 편관현(偏關縣) 東 70리. ④ 하남성 무양현(舞陽縣) 西南 40리. ⑤ 호북성 의창현(宜昌縣) 西北 60리. ⑥ 호북성 포은현(蒲圻縣) 西 2리. ⑦ 호북성 무창현(武昌縣) 南 90리. ⑧ 호남성 봉황현(鳳凰縣). ⑨ 산동성 봉래현(蓬萊縣) 南 15리. ⑩ 강소성 곤산현(崑山縣) 西北. ⑪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西北 10리. ⑫ 강소성 남통현(南通縣) 南 낭산(狼山) 西. ⑬ 복건성 장락현(長樂縣) 南. ⑭ 광동성 구룡(九龍) 北. ⑮ 광동성 오천현(吳川縣) 南 80리. 광동성 성치(省治) 北. 운남성 은안현(恩安縣) 西南 30리. 봉천(奉天) 금현(錦縣) 西南 50리. 길림성 길림현(吉林縣) 西南 70리.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길림성 길림현(吉林縣) 西南 70리. 흑룡강성(黑龍江省) 철려설치국(鐵驪設治局) 東北. 이와같이 지명이 옮겨진 것을 볼 수 있다.
※ 진주(鎭州)는 한나라 때 진주(鎭州). 후일 승격시켜 진정부(眞定府). 이곳은 하북성 정정현(正定縣)이다. 당나라와 오대(五代) 시에는 진정부(眞定府)이다.
특히 고려태조 왕건 때 홍유(洪儒) 장군과 유검필(庾黔弼) 장군이, 군졸 1,500명을 이끌고 진(陳)을 친 곳이 진주(鎭州)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고려사절요의 태조왕건 원년 6월에 적혀 있다.
※ 개주(開州)는 고려 경주(慶州)이며, 본시 예맥(濊貊)의 땅이며, 당나라가 이름을 고쳐 성산군(盛山郡)이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사천성 개현(開縣)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 예산현(禮山縣)은 호북성 응산현(應山縣) 東南으로 되어있다.
※ 平壤은 섬서성 서경(西京)인 장안성(長安城). 즉 지금의 서안(西安)으로 되어있다.
※ 강주(康州)는 당나라가 두었던 남강주(南康州)라고 했다. 그후 이름을 고쳐 진강군(晉康郡)이라 했다가 다시 강주(康州)라 했다. 송나라 때 승격시켜 덕경부(德慶府)라 했으며, 후에 고려의 강역이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광동성 덕경현(德慶縣)에서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 명주(溟州)는 강릉(江陵)이다. 호북성 강릉현(江陵縣)에서 다스렸다. 또는 호북성 형주부(荊州府)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이곳은 한나라 때 남쪽의 군(郡)으로 다스리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 일월사(日月寺)는 일월산(日月山)에 있으며, 이곳은 감숙성 서녕현(西寧縣)에서 다스렸으며, 사천성 바깥 입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월산(日月山)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며, 번이(番夷)들의 시장(市場)이 있던 곳으로 되어있다.
※ 서경(西京)은 섬서성 서안(西安)임. 즉 평양성(平壤城)과 장안성(長安城)이 있던 도시.
※ 순주(順州)는 호북성 수현(隋縣) 北 80리.
※ 백제 연산진(百濟燕山鎭)은 하북성 계현( 縣) 東南. 즉 백제가 있던 곳은 주(周)나라 소공(召公 BC.1152년)은 진당숙우(晉唐叔虞 BC.1115년)에 이어온 사람으로, 나라이름을 연(燕)이라 한 후 연산(燕山)이라 했다고 되어있다.
연산(燕山)은 흡사 긴 뱀과 같고, 1천리나 되며 이한(夷漢) 즉 한(漢)나라 사람으로 동이족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태조왕건 8년 10월에 고려 서대장군(西大將軍)이었던 유검필(庾黔弼)이 파견되어, 백제 연산진(燕山鎭)에 있던 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한 임존군(任存郡)을 공격하여 뭇 병사를 죽이고 3천 명의 포로를 잡은 곳이 백제 연산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로 백제 연산진은 지금의 북경(北京) 지방인 하북성 계현( 縣) 東南이라고 되어있다.
※ 역주진(歷州鎭)은 역현(歷縣)으로 하북성 고성현(故城縣) 北.
※ 용주(龍州)는 후위(後魏) 때 두었던 강유군(江油郡)이나, 서위(西魏) 때에는 용주(龍州)라 함. 즉 사천성 강유현(江油縣) 西北을 말한다.
※ 청주(靑州)는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西北 8리. 또는 산동성 낙릉현(樂陵縣) 西南 30리. 산동성 임치현(臨淄縣)과 산동성 교동(膠東)의 길이라고 되어있다.
※ 공산(公山)은 문산(文山)과 같은 곳으로 복건성 우계현(尤溪縣)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문산(文山)은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강서성 길안현(吉安縣) 東南 15리와 복건성 우계현(尤溪縣)으로 되어있다.
※ 해주(海州)는 본래 옥저국(沃沮國)의 땅임. 고려(高麗)의 사비성(沙卑城) 또는 비사성(卑沙城)이며, 혹왈 비사성(卑奢城)이다.
발해(渤海) 때 남경(南京)이며 남해부(南海府)라 했으며, 명현(溟縣)을 위주(爲州)에서 다스렸다.
금(金)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했고, 명나라 때는 해주(海州)라 했다. 이곳은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東海縣) 東北을 해주(海州)라 했다고 되어있다.
※ 청구(靑丘)는 신선(神仙)이 살던 곳으로 장주(長州)라 했다. 이곳은 산동성 광요현(廣饒縣)의 북쪽이라고 되어있다.
※ 경산(京山)은 호북성 경산현(京山縣) 東 10리로 되어있다.
※ 패강(浿江)은 패수(浿水)로서 한나라 위(魏)나라 시대 때의 패수(浿水)이다. 이곳은 압록강(鴨綠江)이며, 연(燕)나라 때에는 진번군(眞番郡)에 속했다. 조선(朝鮮)과 한(漢)나라와 더불어 어렵게 지켜졌으며, 당나라 때의 패수(浿水)이다.
도읍지가 있던 서경(西京)에는 평양성(平壤城)이 있었다. 백제국의 북쪽 경계에는 패수(浿水)가 있었고, 패수를 예성강(禮成江)이라 하며, 일명 임진강(臨津江), 대동강(大同江)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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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에는 도패대이수(渡浿帶二水)라고 하여,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라고 하고, 이곳에 이르면 미추홀(彌鄒忽)이며, 미추홀은 즉 지금의 조선의 인천(仁川)이라고 되어있다.
한반도에 있는 인천(仁川)이 미추홀(彌鄒忽)이 아니라,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있는 곳이 조선의 인천이며, 이곳이 미추홀(彌鄒忽)이라는 것이다.
※ 패수현(浿水縣)은 한(漢)나라가 두었던 패수(浿水)의 이름이며, 조선(朝鮮) 압록강(鴨綠江) 남쪽 물가에 있던 곳이 의주(義州)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한나라 때 요동(遼東)에 있던 낙랑군(樂浪郡)에서 다스렸다고 했다.
여기서 의주(義州)의 주위에 있는 곳에 압록강(鴨綠江)이 있다고 했는데, 의주(義州)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동쪽이다. 즉 의주(義州)의 주변에서 샛강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鴨綠江)이다.
※ 압록강(鴨綠江) 일대를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후부터 낙랑군(樂浪郡)에서 다스렸다고 했는데, 이때의 낙랑군은 하남성 낙양(洛陽)에 있었다.
※ 갑여산(甲如山)은 갑산(甲山)으로 산동성 치천현(淄川縣) 西南 30리로 되어있다.
※ 탕정군(湯井郡)은 탕산(湯山)으로, 섬서성 서경(西京)으로 경조(京兆) 완평현(宛平縣) 북쪽이라 했다. 그리고 소탕산(小湯山)의 남쪽에는 평양성(平壤城)이 가운데 있는 탕천(湯泉)이라고 되어있다.
※ 옥산성(玉山城)은 옥산(玉山)으로 직예성(直隸省) 만성현(滿城縣) 북쪽 15리로 되어있다.
한편 옥산(玉山)은 주(周)나라 때까지 서왕모(西王母)가 살고있던 곳으로 숙주(肅州), 즉 감숙성 주천현(酒泉縣․郡) 西 70리로 되어있다. 또한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산록이며, 이곳에 염전산(鹽田山)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백주(白州)는 한나라 때 남주(南州)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백주(白州)라 했다. 그후 다시 지명을 남창군(南昌郡)이라 했는데, 이곳은 사천성 만현(萬縣) 서쪽으로 되어있다.
※ 노주(路州)는 노현(路縣)으로, 한나라가 두었던 곳인데, 섬서성 서경(西京)인 경조(京兆)로 통하는 현(縣)으로서 동쪽 8리라고 되어있다.
※ 진주(眞州)는 사천성 무현(茂縣) 西北. 일면 진부(眞符).
※ 양주(陽州)는 양현(陽縣)으로 주나라 때의 양국(陽國)이다. 한나라 때는 양현(陽縣)이며, 옛 성(城)이 있던 곳은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東南 15리이다. 수나라가 도읍지를 옮겨 홍동현(洪洞縣)에서 다스리다가 이름을 고쳐 홍동(洪洞)이라 했다.
※ 황주(黃州)는 수나라가 이름을 고쳐 옥주(玉州)라 했다.
이곳은 옛날에 다스리던 곳이 호북성 황피현(黃陂縣) 동쪽이다. 수나라 때 이름을 고쳐 영안군(永安郡)이라 했다가, 다시 제안군(齊安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고쳐 황주(黃州)라 한 곳은 호북성 황강현(黃岡縣)이며, 원나라 때에는 고조선이 있던 서경(西京)의 경계라고 되어있다.
※ 과주(過州)는 과(過)나라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산동성 액현(掖縣) 북쪽으로 되어있다.
※ 경주(慶州)는 수나라 때 다시 찾아 홍화군(弘化郡)이라 했다. 당나라 때에는 안화군(安化郡)이라 했다가 다시 순화군(順化郡)이라 했다. 그후 다시 찾아 경주(慶州)라 했으나, 송나라는 경주안화군(慶州安化郡)이라 했다. 그후 승격시켜 경양부(慶陽府)라 했는데, 그곳은 감숙성 경양현(慶陽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숙주(肅州)는 감숙성 예천군(醴泉郡․縣)임.
※ 경성(京城)은 강소성 진강현(鎭江縣)에서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천(利川)은 이천현(利川縣)으로, 본래 만이(蠻夷)의 땅을 말한다. 원나라, 명나라 때 다스리던 곳이며, 청나라 때 이름을 고쳐 이천현(利川縣)이라 했는데, 이곳은 호북성 시남부(施南府)라 했다. 이곳이 속한 곳은 지금의 호북성 형남(荊南)의 길이다.
※ 삼한(三韓)은 주무왕(周武王)의 아들 대부한만(大夫韓万)과 성왕(成王)의 동생 진당숙우(晉唐叔虞)가 제후왕 때 합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후 주(周)나라 말기 진(晋)나라에서 한(韓)․위(魏)․조(趙) 나라가 독립하여 세운 나라가 삼한(三韓)이다.
★조(趙)나라는 산서성 조성현(趙城縣) 西南에 도읍했다. 이곳은 산서성 태원현(太原縣) 북쪽이다.
★위(魏)나라는 하남성 낙양(洛陽)에 도읍했다.
★한(韓)나라는 하북성 고안현(固安縣) 東南으로, 한(漢)나라 때 삼한(三韓)의 땅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05쪽에 적고 있다.
다시말해 진(晋)나라가 한(韓)이며, 위(魏)․조(趙)나라도 같다. 그후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들어와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남쪽 18리에 도읍했다.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BC.425~402년) 23년 진(晋)나라에서 한(韓)․위(魏)․조(趙) 나라가 나누어진 것이 삼한(三韓)이며, 평양(平陽)에 도읍한 곳은 산서성 임분현(臨汾縣)에서 다스렸다.
그후 하남성 우현(禹縣)으로 옮겨졌으나, 구한(九韓), 즉 아홉의 한국(韓國)으로 되었다가 진(秦)나라 때 망했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05쪽에서 한(韓:三韓)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 황룡사(皇龍寺)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AD.537년) 17년 癸酉 二月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황룡사(皇龍寺)를 세운 것으로 되어있다. 이곳은 울주(蔚州)인 곡포(谷浦)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하곡현(河曲縣)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4쪽에 의하면, 산서성 하곡현(河曲縣) 東南 7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로 황룡사는 산서성 하곡현 東南 70리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연산(連山)은 연주(連州)로서, 한(漢)나라 때 두양현(杜陽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隋)나라 때는 연현(連縣)이라 했으며, 남조(南朝) 때 양(梁)나라가 양산군(陽山郡)이라 했다. 수나라는 양산군(陽山郡)을 파하고 연주(連州)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연산군(連山郡)이라 하다가 연주(連州)로 고쳤다.
송(宋)나라 때 와서 연주연산군(連州連山郡)이라 하다가, 원나라 때 승격시켜 연주(連州)라고 했다. 청(淸)나라 때는 직예주(直隸州)라 했다. 이곳은 사천성 균연현(筠連縣)의 경계라고 되어있다. 한편 한(漢)나라 때 두양현(杜陽縣)이라고 했는데, 두양현(杜陽縣)은 호남성 침주( 州)이며, 이곳은 호남성 형양(衡陽)의 길목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산(連山)에 있는 연주(連州)는 지금의 호남성 침주( 州)임을 나타내고 있다.
※ 황산군(黃山郡)은 황산궁(黃山宮)으로, 한나라 혜제(惠帝) 때 세운 곳으로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西南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황산군(黃山郡)은 황산(黃山)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75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① 섬서성 무공현(武功縣) 북쪽. ② 산서성 호관현(壺關縣) 남쪽 28리. ③ 하남성 급현(汲縣) 西北 10리. ④ 산동성 액현(掖縣). ⑤ 하남성 확산현(確山縣) 東南. ⑥ 강소성 강음현(江陰縣) 북군산(北君山) 北 5리. ⑦ 강소성 무진현(武進縣) 西北 70리. ⑧ 안휘성 흡현( 縣) 西北. ⑨ 안휘성 합비현(合肥縣) 東 129리. ⑩ 호남성 안향현(安鄕縣) 北 60리. ⑪ 절강성 여항현(餘杭縣) 西南 25리. ⑫ 운남성 여강현(麗江縣) 西 2리
★ 백제의 계백장군과 당나라 소정방, 그리고 신라군이 맞서 싸운 곳이 황산(黃山)의 들이라고 했는데, 그럼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산은 과연 어느 곳인지, 연구가 필요함을 절감케 한다.
※ 평주(平州)는 진(晋)나라 때 나누어 둔 유주(幽州)라 했다. 이곳은 전 연(燕)나라 때 하북성 처용현(處龍縣)에서 다스려졌으며, 양평(襄平)이라고 되어있다. 후일에 지명을 옮겨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 동쪽 45리라고 적고 있다.
※ 원주(原州) 흥법사(興法寺)는 감숙성 고원현(高原縣)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외에 고려태조 왕건 때의 지명을 총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위주(爲州). ② 삼문산(三門山). ③ 삼능산(三能山). ④ 금산(金山)은 7군데나 된다. ⑤ 금산사(金山寺)는 감숙성 고란현(皐蘭縣) 西北이다. ⑥ 지리산(地理山). ⑦ 무주(武州)는 백제 땅으로, 호남성 상덕현(常德縣)과 산서성, 그리고 감숙성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⑧ 전주(全州)는 광서성 계림(桂林)이다. ⑨ 공산(公山)은 문산(文山)으로, 산동성 평도현(平度縣)과 강서성, 복건성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⑩ 고주현(故州縣). ⑪ 계림( 林)은 옛 신라의 이름이며,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9년에 시림(始林)이라 했으며, 감숙성 성현(成縣) 西南으로 되어있다. ⑫ 순주(巡州)는 서경(西京)에 있는 순주진(巡州鎭)이다. ⑬ 기주(基州)는 호북성 종상현(鐘祥縣) 남쪽이다. ⑭ 강주(剛州)는 강현(剛縣)으로,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東北 35리이며, 진(晋)나라 때의 강평현(剛平縣)이다. ⑮ 가은현(加恩縣). 고창군(古昌郡). 모산성(牟山城)은 백제 땅으로, 산동성 모평현(牟平縣) 東北 3리이다. 현도주(玄 州)는 서경(西京). 범주(犯州). 서천축(西天竺). 신흥사(新興寺)는 신흥군(新興郡)에 있으며, 이곳은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3리. 흥법사(興法寺), 세달사(世達寺), 흥교사(興敎寺), 흥선사(興善寺)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南 50리. 하주(下州). 목포(木浦). 도산성(島山城). 예산현(禮山縣). 대흥사(大興寺)는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오관산(五冠山). 배산성(拜山城). 부산(負山). 탕정군(湯井郡). 벽진군(碧珍郡). 곡성(谷城). 곡죽령(谷竹嶺). 진국성(鎭國城)은 진국군(鎭國郡)으로, 섬서성 화현(華縣). 통덕진(通德鎭). 흥덕진(興德鎭)은 흥덕현(興德縣)으로, 광서성 흥업현(興業縣) 南. 아차성(阿次城). 재암성(載巖城). 병산(甁山). 동주군(東州郡). 안수진(安水鎭). 능도(陵島). 연주(連州)는 연산(連山)으로, 사천성 균연현(筠連縣) 경계. 저산도(猪山島). 대우도(大牛島). 혹도(鵠島). 영청현(永淸縣) 혜산성( 山城). 아불진(阿弗鎭). 성주진(省州鎭).수완성(修完城). 예성강(禮成江). 양주(楊州), 천왕사(天王寺). 개태사(開泰寺). 탐라국(耽羅國). 선교사(禪敎寺). 백성군(白城郡). 외주(外州). 죽주(竹州). 당현(唐縣). 괴양(槐壤). 흥주(興州) 부석사(浮石寺)는 봉주(峯州)이며, 섬서성 약양현(略陽縣).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南 50리 번천(樊川) 北. 이천(利川). 치악산(雉岳山). 미리사(美理寺). 성산진(星山陳). 마리성(馬利城). 청천강(淸川江). 저족성(猪足城). 성천성( 川城). 부약성(夫若城). 거성(居城). 내성현(奈城縣). 악곡성(岳谷城). 어진현(御珍縣). 울도현(鬱島縣). 의성부(義城府). 주천현(酒泉縣)은 감숙성. 진보성(眞寶城). 한도강(恨島江) 등.
모두 합쳐 148개소의 지명과 성(城), 그리고 절과 강(江)으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태조왕건과 궁예(弓裔), 견훤(甄萱) 등이 활동한 지역과 강역 등을 보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중국에는 많은 지명을 옮기고 바꾸고 없애버리는 바람에, 더 많은 고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타나 있는 지명과 강역, 현군(縣郡), 그리고 절과 강(江) 등을 보면, 고려태조 왕건의 혈통과 활동무대가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중국대륙임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특히 궁예(弓裔)가 어릴 때 도망가 살았던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③ 궁예(弓裔)
어릴 때 도망가 살았던 세달사(世達寺)는 흥교사(興敎寺)로,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
※ 삼국사기 열전 제 10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사람이다.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AD.856~859년)의 빈(嬪)의 몸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음력 5월 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날 때 집 위로 흰빛이 무지개처럼 길게 하늘로 향한 것을 본 관리가 말하기를, 5월 5일에 태어날 때 이가 나 있었고, 연기같은 이상한 빛이 있었으므로 장차 나라에 불리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중사(中使)라는 관리를 시켜 궁예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 관리는 궁예를 취하여 강보에 싸 다락에서 아래로 던져버렸다.이때 유모가 궁예를 밑에서 받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궁예의 한 눈을 찔렀는데, 그대로 안고 도망쳤다. 궁예는 이때부터 한 눈을 실명한 채 10여 세가 되었는데, 노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위험스러워, 유모가 노는 것을 중지시켰다. 유모가 나라에서 버린 자식임을 실토하자, 궁예는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모는 이 일이 알려지면 궁예가 위험함을 느끼고 떠나자고 하자, 궁예는 눈물을 흘리며 그 길로 세달사(世達寺)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세달사(世達寺)인 흥교사(興敎寺)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236쪽에 의하면,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남쪽 50리로 되어있고, 번천(樊川)의 북쪽에는 당나라 때 세운 현장탑(玄 塔)이 있다고 되어있다.
※ 궁예의 출생한 연도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필자가 조사해 보니, 후당(後唐) 대순(大順) 2년에 궁예 나이 28세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연대를 추적하여 고증해본 결과 후당(後唐) 대순(大順)의 연대가 AD.890년이며, 대순 2년에 궁예 나이 28세로 죽은 것을 계산해 보니, 그가 태어난 해는 AD.865년이었다.
간지(干支)로 따져보면 기유년(己酉年) 음력 5월 5일 생으로 밝혀지는 셈이다.
④ 견훤(甄萱)
상주(尙州)는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쪽 경계이며, 열하파림(熱河巴林)의 동북 140리
※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尙州加恩縣)에서 출생한 것으로, 삼국사기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상주(尙州)가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상주(尙州)는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쪽 경계이며, 열하파림(熱河巴林)의 동북 140리에 있다.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서 농사꾼이라 했다. 들에서 밭갈이를 할 때 아이를 나무 밑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고 했다.
견훤의 성은 이씨(李氏)로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힘은 장사였다고 되어있다.
견훤은 당나라 소종(昭宗) 때 경복(景福) 원년(元年)은 기원후 892년이며, 신라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이라면, 역시 AD.892년에 해당된다. 고로 견훤은 AD.892년 임자생(壬子生)에 해당된다.
견훤은 진(晋)나라 천복(天福) 원년인 45세 때 멸했는데, 진나라 천복원년은 AD.936년이다.
※ 견훤이 활동한 지역을 살펴보면, 경서남주현(京西南州縣), 진주(珍州), 무주(武州), 공주(公州), 한남군(漢南郡), 완산주(完山州), 금마산(金馬山), 철원(鐵圓), 지리산죽전(地理山竹箭), 대야성(大耶城), 진례성(進禮城), 조물성(曹物城), 거창성(居昌城).
전주(全州), 등주(登州), 성산진(星山陳), 미리사(美理寺), 평양(平壤), 패강지수(浿江之水)란 패강(浿江) 또는 패수(浿水)의 뜻을 말한다.
부산(負山), 금성(金城), 갑여산(甲如山), 조어성(造於城), 연산군(燕山郡), 마리성(馬利城), 경산(京山), 강주(康州), 오강(烏江), 청구(靑丘), 양산(陽山), 악곡성(岳谷城),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순주(順州), 하지현(下枝縣), 예성강(禮成江), 염주(鹽州), 백주(白州), 정주(貞州), 저산도(猪山島), 운주(運州), 웅진(熊津), 금산(金山), 금성(錦城), 양주(楊州), 이천(利川), 황산(黃山), 고주현(故州縣), 진주(眞州) 등이다.
※ 견훤이 태어나서 활동한 지명이 많이 있는데, 지명 중에 한반도에 지금까지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륙백제, 대륙신라에 대한 비정은 간략하게나마 앞서 재야 민족사학자 오재성의 입장을 밝힌 바 있지만 이와 관련해 다음 송준희의 문제제기를 하나 제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 장보고 관련 지명도 >
<img src=http://www.coo2.net/files/장보고1.27gif.gif>
< 지명설명 >
- 무령 :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되었던 곳
- 정해위 : 청해진 추정
- 법화원 : 정해위 북쪽에 장보고 관련 절인 법화원이 현존
- 진해 : 염장에게 피살당한 장소
- 사, 연수 : 절친한 친구였던 정연 살았던 곳
- 서주 : 장보고 관련 지명
- 무주 : 염장은 무주사람
▣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장보고(? ~ 841)에 대한 기록은 두목(杜牧)의 『번천집』과 『당서』에 있었고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을 인용했다.
1.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고려강역에는 없었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3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고보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수서인용)"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
현재는 장보고(? ~ 841)의 기록을 고려땅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으나
김부식(1075 -1151) 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서 高麗땅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혹자는 김부식이 조사를 아니해서 그럴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장보고가 유명하였다면 소문이 없을 수가 없다. 장보고와 김부식의 사이 연대차이는 310년으로 이순신(1545~1598)과 현재 우리와의 년대 차이(403년)보다 적다. 만약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없어서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 이로 미루어 보면 장보고가 반도에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은 그만두고 소문도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반도에서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당서』東夷 강역 내에 있었을 것이다. 반도에는 소문도 기록도 없어서 중국 기록을 인용했다 하였는데 중국 기록에는 어디에 있는가 ? 중국 기록에는 『당서』 신라 기록에 있고 두목의 『번천집』에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같은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신라본기의 기록은 어떤 중국 기록을 인용하였을까 ?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영호징이 쓴 『신라국기』를 인용하였을 것이다. 『당서』에 있다는 것은 『당서』의 동이전을 포함한 『25사』의 동이강역을 벗어나서 장보고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3. 장보고 기록에 있는 지명은 중국에만 있다.
장보고와 관련된 기록에 있는 지명이 중국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무령은 덕안 서쪽에 있고, 서주는 항성 주류성 동쪽에 있고, 泗와 漣水는 동명 백마하 항서 덕안 동쪽에 있고, 진해는 덕안 동쪽에 있다. 武州와 발음이 같은 撫州는 무령 덕안 남쪽에 있으며, 완도는 산동성에 있는데 백제의 諸城 城陽의 동쪽에 있다.
4. 淸海鎭은 장보고 때 생긴 이름이 아니라 신라에서 제사 지내는 곳 중의하나.
우리가 청해진하면 장보고의 군사 주둔지로써만 살펴온게 사실이다.
또 문성왕 13년 2월 청해진을 파하고 그 곳 백성들을 碧骨郡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주 청해진이 황무지로써 인식되어 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군사적인 것이었다면 신라에 있어서는 청해진은 사독제를 지내던 곳 중의 하나였으니 예사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사적인 것은 상쇠되어도 제사를 지내는 것조차 폐지하겠는가? 또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하였으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四瀆祭를 지내는 곳이 동쪽으로는 吐只河 남쪽으로는 黃山河, 서쪽으로는 웅천하, 북쪽으로는 한산하 그리고 俗離岳 推心 上助音居西 鳥西岳 北兄山城 淸海鎭에서 지냈다.]고 하여 청해진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정에서 지내는 제사의 풍습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던 청해진이 사독제를 지내던 곳이므로 신라의 본래 관경(영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百濟땅으로 추정되어온 지금의 완도가 제사를 지내는 신라의 신성한 곳이었을까 ?
만약 완도가 청해진이라면 군사적인 유적지 뿐만 아니라 제를 지낸 유적지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
5. 신라방은 반도신라에서 진출한 신라인의 진출지가 아니고 [25사]동이전에있는 사로 신라를 숨기기 위한 명칭
지금까지는 신라방은 반도에서 신라인이 진출하여 모여 사는 거류지로 알려왔으나
동이전 위치 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하고 古今지도에 맞추어 보면 사로 신라가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일식 관측지와 5월이전 홍수기록과 일치하는 신라를 감추기 위하여 반도에서 진출한 신라방으로 왜곡한 것은 아닐까 ?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반도에서 진출한 것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민족은 고조선 이전 九黎시대 부터 신라 말까지 요의 동쪽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인 것이다.
더 이상 사로 신라를 숨기고 황해 동쪽신라인의 활동으로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6. 전남 완도가 청해진이 아니라 산동성 완도(灣島)나 그 북쪽 靖海衛가 청해진일 가능성이 있다.
청해진을 '淸海今之莞島'라는 기록에서 전라남도 완도로 비정하여 왔는데 청해진의 기록과 일관성을 보이는 곳은 전남완도가 아니라 산동성 완도에 가깝다 할것이다.
그러나 완도보다는 동북쪽에 있는 청해위가 청해진에 가깝지 않은가 ?
靖海衛를 淸海鎭으로 볼수 있는 것은
첫째 衛 나 鎭은 군사적인 명칭이다
둘째 靖海衛 의 靖海가 淸海鎭의 淸海와 비슷하다.
셋째 정해위 북쪽에는 적산원의 흔적이 있고 자급자족을 할수 있는 전답이 있다고 한다.
넷째 정해위 서쪽에 百濟지명이 있다.
다섯째 정해위 서쪽에 고조선 九黎관계 지명이 있다
이로 미루어 산동성 완도 동북쪽에 있는 정해위가 전남 완도보다 청해진의 조건에 합당한 것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7. 『삼국사기』 잡지 地理에 今이란 어느때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 현존 필사본의 필사시대는 조선시대인가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단어의 시대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본기에는 유일하게 청해진에만 今이 표기되어 있으나 지리에는 今이란 단어가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15세기 필사본이니 그 때를 나타내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많은 지명 중에 유일하게 "淸海今之莞島"라는 기록이 있으니 필사시대로 의심을 할수도 있다. ( 주 : 中宗 壬申年刊本(世稱 正德本) )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고려시대인가 ?
『삼국사기』가 김부식시대에 편찬되었으니 이 시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 주 :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서기1145년) )
今이란 ? 『삼국사기』가 원본을 인용했으니 원본의 집필시대인가.?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참고한 사료가 집필될때 그 시대를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今이란 ? 唐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집필할때의 당시인가.?
당나라때 당나라 사람인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집필하였으니 그 시대의 今일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는데 당나라말기 인물인지 아니면 후당의 인물인지 알 수 없으나 장보고 기록으로 보아 후당인물로 보이는데 이때의 今일수도 있다.
왜 유독 청해진만 今이라는 표현을 빌어 완도라고 표현 하였을까 ?
혹여 대륙신라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필한 것은 아닐까 ?
이또한 "삼국사" 정본이 발견될 수 있다면 쉽게 풀릴수 있는 부분 일진데 ~ ~
<img src=http://www.coo2.net/files/장보고1.gif>
< 장보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
1.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의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대입하고 고지도 (송나라대의 우적도 )에 맞추어 본결과 현재의 중국에 동이의 나라 韓이 있고 駟盧, 斯盧, 伯濟가 있으니 바로 신라가 있다는 뜻이다
2. '당서' 동이전 위치배열도에 삽입한 것이 현대 중국지도에는 일치하지만 반도에는 백제 및 高句麗 패망때의 지명이 없다는 것이다.
3. 김부식의 高麗에는 '삼국사기'가 쓰여지기 이전에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도 소문도 없다고 한점
4.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당서' 및 杜牧의 '樊川集'에 있는 것이 원본이라는 점
< 결 론 >
왜는 7세기이전 양자강 이남에서 삼국과 같이 활동하였던 같은 동이족의 일부였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의 합작품으로 우리는 지금 지리적 개념에 혼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장보고 시절 왜구가 출몰하였다고 하는 바 그왜가 현재의 일본이 아니다는 것이다.
당연히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가 지금의 대만으로 축출당하면서 잃어버린 왜국의 땅을 찾기 위해 양자강 유역으로 다시 진출하려고 하는 수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대만으로 축출을 당하였으니 양자강 유역의 고토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
장보고를 더 이상 반도에서 산둥 반도로 진출한 인물로 변경시키지 말고 우리민족의 활동 강역이 대륙임을 떳떳히 밝혀 위대한 동이민족의 후예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이상 송준희 글)
이상에서 제기한 대륙 청해진의 주장은 정용석이 주장하는 대륙사에 대한 문제 제기(「고구려, 백제, 신라의 터전 중원」청노루 刊,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동신 刊 참조)와 결코 다르지 않다. 가령 정용석은 대륙을 쓸었던 슈퍼메뚜기의 명확한 기록을 인용해 현재의 반도사관에 의하면 남해 차차웅조의 경주 초토화 기록이 같은 연조의 고구려, 백제 기록에는 메뚜기 피해가 전혀 없었으므로 지형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먼저 도착한 불합리성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신라에 2 번의 강력한 화산폭발과 잦은 지진(46회의 소 지진과 10회의 큰 지진;고구려는 19회지진, 백제는14회 지진중 큰 지진은 4회) 발생을 들어 현재의 경주 토함산은 화산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진이 오히려 대륙의 섬서성에 많이 일어났음을 들고 있다. 또 삼국의 가뭄과 홍수를 비교하여 백제만 혹심한 가뭄을 겪고 신라, 고구려는 가뭄이 없었던 사실과 신라만 홍수가 진 기록을 예로 들어 대륙 삼국을 주장하고 있으며, 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린 기록을 근거로 한반도에 그런 기후대는 없으며 일년 중 10개월 동안 서리가 내리고 7개월 동안 눈이 내릴 수 있는 곳은 대륙의 넓은 스텝기후대와 건조기후대라 결론 내리고 있다. 그 외에도 정용석은 하남 위례성이 한반도가 될 수 없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을 누비고 싸웠다고 말한다. 김춘추는 정벌군 총사령관 소정방 밑에서 우이도(嵎夷道) 행군 총관으로 일개 야전군 사단장으로 참여해 애초에 신라가 백제를 정벌한 것이 아니라 당고종 이치가 소정방을 정벌책임자로 보내 그를 돕는 일개 사단장 연락만 했으며, 김춘추가 책임을 맡은 우이(嵎夷)라는 지명 역시 서경 요전에 나오는 전통적인 지명으로(命羲仲宅嵎夷 曰暘谷) 지금의 산동성 봉래시라 하고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서안의 동쪽 우이라는 곳에서 동에서 서 쪽으로 출발했고, 당나라 및 다른 제후국의 지원병은 서쪽에서 동쪽 또는 동남쪽의 백제 땅으로 진군했다고 말한다.
권력의 속성은 어떠한 집권자가 특정한 유형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으면 아랫것들은 본능적으로 그 냄새를 맡고 지속적인 권력향유를 위해 그를 충족시켜줄 아이디어를 내놓는 법이다. 그것이 천리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다음 조박의 상소는 바로 친명사대주의자 이 성계에 걸맞는 정책이니 바로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조선호텔 앞에 있는 원구단은 저물어 가는 조선 왕조말기, 청에 대한 조선의 종주권을 배제하기 위해 일본에 의해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광무 연호를 선포했던 씁쓸한 곳이다.
*태조1년 조박(趙璞)의 상소: 북벌파를 치고 등장한 반역정권의 수장 친명사대주의자 이성계의 비위를 맞추어 친명 사대주의 사상으로 천자로 자처하여 천제를 지낸 고유의 원구단을 없앨 것을 상소하여 없앰 “원구(圓丘)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이외 참고자료
* 야대에서 고려사를 강하다가 이 극기가 불교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고 말함(유교의 명분을 합리화 함)
야대(夜對)에 나아가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다가, ꡐ홍경(洪慶)이 중국 민부(쮆府)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部)를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에 이르렀는데, 왕(王)이 몸소 이를 맞았다.ꡑ 함에 이르러서 좌부승지(左副承旨) 이 극기(李克基)가 아뢰기를,
ꡒ이것이 고려[前朝]가 망한 까닭입니다. 창업(創業)한 임금이 비록 바른 것으로써 자손(子孫)에게 가르친다 하더라도 잃지 않는 자가 적거든, 하물며 이렇게 계통을 전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때부터는 숭신(崇信)함이 더욱 두터워지고, 사사(寺社)가 여염(閭閻)의 반(半)이나 되었으며, 전장(田莊)이 관부(官府)보다 많았으며, 세가(世家) 대족(大族)으로부터 종실(宗室)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말계(末季)에 이르러서는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마침내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가히 경계할 바입니다. 다행히 우리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革罷)하여 열에 하나만 남겨 두었고, 노비(奴婢)와 전택(田宅)도 모두 다 관청에 몰입(沒入)시켰으니, 이는 가히 본받을 만합니다.ꡓ
하였다.
*성종 12년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다가, 절을 짓고 탑을 쌓았다는 말에 이르러서, 검토관(檢討官) 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 ꡒ고려가 불법(不法)을 숭신(崇信)한 것은 전적으로 태조(太祖)가 주창한 것이며, 이 때문에 신돈(辛旽)이 5백 년의 왕업(王業)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세종(世宗)은 성군(聖君)입니다만, 내불당(內佛堂)을 창건한 것은 끝맺음을 잘못한 것입니다.
다음은 최영을 위시한 북벌파를 물 먹이고 친 명 사대주의를 호도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고려를 도매금으로 난도질할 필요가 있으니까 고려말의 북벌 파 우 왕 정권을 비 정통으로 몰아가는 사관정립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신돈의 아들이 우 왕이라는 역사왜곡이다. 대명제국이 있어 조선이 존재한다는 유명조선(有明朝鮮)의 사대주의 사관에 입각하면, 일개 제후국의 우 왕이 감히 천자 국인 명을 친다는 것은 역모에 불과하므로, 우 왕의 북벌은 존 중화 사대주의의 유교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이다. 참 그럴싸한 논리니까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 역사의 왜곡처럼 왜곡의 역사는 또 다른 역사왜곡을 불러오는 거고.
정도전을 비롯해 이성계 주위에 몰려든 상기 조 박 같은 썩은 유가 지식층이 이성계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잘 인식하고 그의 통치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 주는 대가로 권력을 얻었다. 이것이 태생적 한계를 지닌 숭유억불의 조선 초기 통치이데올로기였다. 우 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의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조 기록에서 성종이 그 정답을 내렸다. 그리고 북벌파 우 왕을 비롯해 같은 북벌파 최 영과 신 돈을 비틀어보려 한 세종 충녕의 사관을 엿보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종이 야대(夜對)에서 신우, 신돈의 행적을 논하는 대목: 우는 신 돈의 아들인가? 에 대한 성종의 대답; 신 돈이 신임하는 능우(能祐)란 자가 타인(他人)의 아들을 취하여 신 돈의 아들이라 속인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ꡒ이제 이 전(傳)을 보건대, 우(禑)는 신돈(辛旽)의 아들이 아닌 것 같다.ꡓ하니, 현 석규가 말하기를,ꡒ이 승손(李承孫)은 세종 조(世宗朝)에 벼슬하고, 세조(世祖)에게 역사(歷仕)하여 이상(貳相)이 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ꡐ우리 증조(曾祖)에게 아이가 있었으니, 이가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을 적에 이름을 능우(能祐)라는 자가 있어, 신 돈이 신임하던 터였는데, 은밀하게 말하기를,「도첨의(都僉議)가 아들을 낳아 나에게 부탁하여 기르게 하였는데, 불행히 죽어서 내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이제 이 아이를 보니 모양이 닮았는데, 이 아이를 받들어, 첨의(僉議)에게 색책(塞責)을 하여야겠다.」하므로, 이승손의 증조(曾祖)가 화(禍)가 몸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도망하였다.ꡑ 하고 하는데, 이 승손은 독실(篤實)하여 근거 없는 말을 하지 않으며, 부자(父子)가 서로 전(傳)하였으니, 진실로 무언(誣言)이 아닐 것입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이 승손(李承孫)이 친히 보았다더냐?ꡓ하니, 현 석규가 말하기를,ꡒ친히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집에서 대대로 서로 전하는 말이라 합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능우(能祐)는 타인(他人)의 아들을 취하여 신 돈의 아들이라 속인 것이 명백하다.ꡓ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1년 4월 고려조에서 태조 이성계를 치하하는 교서: 태조1년 반야를 죽인 이유(반야는 공민왕의 노국공주 인덕왕후를 비롯해, 혜비 이씨, 익비 한씨(노국공주사후 왕비), 정비 안씨, 신비 염씨와 함께 6부인 중 하나로 우왕을 낳았다. 신비와 혜비는 공민왕의 명에 의한 홍 륜 등의 강간에 강력 반발해 물리쳤으며 공민왕 사후 머리 깎고 승려가 되었다. 후사가 없던 공민왕은 노국 공주 인덕왕후가 산고로 죽자 자주 술에 취하고, 김 흥경(金興慶), 홍 륜(洪倫) 등 미색의 남성과 남색을 즐겼으며, 심지어 홍 륜 한 안(韓安) 등을 불러 왕비들을 강간토록 하고, 후사가 생기면 자기자식으로 삼으려 했다. 마침내 익비 한씨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소식을 전한 내시 최 만생에게 왕비와 동침한 홍 륜과 그 일당을 죽이라 밀지를 내린다. 그러나 최 만생은 거꾸로 홍 륜과 공모해 공민왕을 죽이고 말았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병하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교서(敎書)를 공신(功臣)에게 내려 그 공로를 칭찬하고 내구마(內廐馬) 1필, 백금(白金) 50냥, 비단과 명주 각 5단(端), 금대(金帶) 한 개를 내리고 이내 내전(內殿)에서 위로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태조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ꡒ아아! 비상(非常)한 변고를 제거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人才)를 기다리게 되며, 만세(萬世)의 공을 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한이 없는 보수(報酬)를 받게 마련이다.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는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대실(大室)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거의 5백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 이인임(李仁任)이 몰래 현릉(玄陵)에게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인도하여 상상(上相) 자리를 차지하고는, 임금에게 원망을 돌아가게 하여 마침내 갑인년의 변고를 초래하여 사자(嗣子)가 없게 하였다. 인임(仁任)은 이에 <여불위(呂不韋)가> 진(秦)나라를 도적질한 계책을 써서, 현릉조(玄陵朝)의 요망스런 중[僧] 신돈(辛旽)의 소생인 우(禑)로써 거짓으로 현릉의 궁인(宮人)이 낳은 아이라고 일컫고 이를 왕으로 세우니, 현릉의 모후(母后)가 불가하다고 했으며, 재상(宰相) 이수산(李壽山)의 종친(宗親)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인임이 따르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했으며, 누른 안개[黃霧]가 사방에 차 있어 햇볕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禑)가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현릉을 장사할 적엔 무지개가 태양을 둘러쌌으며, 증제(烝祭)를 주관할 적엔 올빼미가 대실(大室)에서 울고 번개가 치고 땅이 진동했으며, 그가 현릉의 아버지인 의릉(毅陵)의 기일(忌日)에 재계할 적엔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천둥과 번개하며 우박이 내렸으며, 그가 작(爵)을 물려받을 적엔 바람이 조묘(?廟)와 침원(寢園)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뽑고, 대실(大室)의 망새[鷲頭]가 부러지고, 묘문(廟門)이 넘어지고, 어름(御쬎)에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혼령이 위엄을 보여 우(禑)를 끊으려고 한 것이다. 우(禑)의 어미 반야(般若)를 죽여 증언(證言)할 사람을 없애었는데 사평(司平)의 새 문[新門]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죽은 후에 살이 썩어 없어진 뼈를 장사하여 우(禑)의 어미라 하였는데, 널[柩]을 안치한 장막이 하룻동안에 두 번이나 화재가 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만세(萬歲)에 우(禑)가 반야(般若)의 아들임을 보이는 것이다.
우(禑)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었는데도 그 어미의 명씨(名氏)가 정해지지 않으니, 재상(宰相)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ꡐ세상에 그 아비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혹 있을 수 있지마는, 그 어미를 분변하지 못한 사람은 나는 듣지 못하였다.ꡑ하여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현릉의 모후(母后)가 힘써 구원하여 죽지 않게 되었다. 김유(金庾)가 우(禑)는 왕씨(王氏)가 아님을 황제에게 말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선뜩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禑)의 아내는 인임(仁任)의 질녀(姪女)인데 창(昌)을 낳았으니, 이에 왕씨(王氏)의 흥복(興復)될 희망은 끊어졌다. 인임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처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15년이나 되었는데, 우(禑)가 또한 광패(狂悖)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꾀하여 삼한(三韓)의 백만 백성들을 징발하여 다 죽이려고 하였는데, 경(卿)과 부관(副官) 조민수(曺敏修)가 행군(行軍)이 압록강을 지날 때, 경(卿)이 여러 장수들에게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매여 있다는 계책으로써 깨우쳐 군사를 돌이켰으니, 이것은 경이 우리 백성들의 이미 죽은 것을 다시 살게 한 것이오. 사직이 망하지 않은 것은 다만 경에게 힘입었소. 경의 용맹은 삼군(三軍)에 으뜸가고 직위는 양부(兩府)에 높았으며, 공명(功名)은 세상에서 뛰어났으나 자랑하지 않았소. 《강목(綱目)》과 《연의(衍義)》를 읽기를 좋아하여 유후(留侯)․강후(絳侯)․무후(武侯)․양공(梁公)의 충성에 감동한 까닭으로, 군사를 돌이켰던 그 즈음에 흥복(興復)을 의논하니, 민수(敏修)도 또한 그렇게 여기었소. 그러나, 이미 돌아와서는 그 친척 인임(仁任)과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경(卿)의 의논은 저지시키고 창(昌)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총재(?宰)가 되었으니,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일이 한 번의 큰 기회를 잃게 되었소. 경은 속으로 견디고 참아 관직에 종사하면서 공의(公義)로써 민수(敏修)를 개유(開諭)하고, 이에 대간(臺諫)의 인선(人選)을 철저히 하여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켰소. 이에 헌사(憲司)에서 민수를 탐욕이 많아 법을 남용(濫用)했다고 탄핵하여 쳐서 제거하였소.
경은 밤에 생각한 일이 있으면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고, 현인(賢人)을 구하기를 목마름과 같이 하며, 악(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여, 모든 백성들의 조그만 이익도 반드시 일으키고자 하고, 조그만 해로움도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며, 언로(言路)를 열어 민정(民情)을 통하게 하고, 일민(逸民)을 천거하여 공도(公道)를 널리 폈소. 지난번의 뇌물로 분경(奔競)하는 기풍과 금전으로 관직과 옥사(獄事)를 거래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초야(草野)에는 천거되지 않은 현인(賢人)이 없고, 조정에는 요행으로 차지한 직위가 없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휘권[鉞]을 주고, 주군(州郡)을 순시하여 출척(黜陟)을 행하매, 번진(藩鎭)이 감히 구적(寇賊)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목수(牧守)가 감히 백성을 해하지 못하며, 여러 소인의 사설(邪說)을 배척하여 사전(私田)을 여러 도(道)에서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塗炭) 속에서 구제하여, 넉넉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지경으로 올려 놓았소. 규전(圭田)․채전(采田)의 법을 채용하여 서울에 벼슬하는 사람에게 전지(田地)를 공급함으로써 군자(君子)를 우대하고 수위(守衛)를 엄하게 하니, 관작을 주되 사정(私情)이 아니고, 형벌을 쓰되 노(怒)한 것이 아니오, 경의 성심(誠心)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고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명백하여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다 함께 보는 바이니, 그 경영해 하는 일이 왕씨(王氏)를 흥복(興復)시키는 터전이 아닌 것이 없었소.
기사년 겨울에 창(昌)이 보낸 청조사(請朝使) 윤승순(尹承順)이,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으로 보낸 것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ꡐ고려의 왕위는 자손이 끊어져서 이성(異姓)으로써 왕씨(王氏)로 꾸몄으니 삼한(三韓)을 대대로 지킬 좋은 계책은 아니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陪臣)이 관위(官位)에 있어 군신(君臣)의 본분(本分)을 지킨다면, 비록 수십 대(代)나 조회하지 않더라도 또한 무엇이 걱정되겠으며, 해마다 와서 조회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싫겠는가? 동자(童子)는 경사(京師)에 올 필요가 없다.ꡑ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현릉(玄陵)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한 시기에 남보다 앞서 신하라 일컬어, 천하 사람들에게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제사(祭祀)가 끊어진 것을 민망히 여겨 왕씨(王氏)의 신자(臣子)에게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간절하기 때문이었소. 창(昌)의 외조부(外祖父)인 이임(李琳)이 총재(?宰)로서 황제의 조칙을 숨기고 발표하지 아니하여, 흉악한 꾀가 헤아릴 수가 없었으니, 신씨(辛氏)의 변고는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발생하게 되었소. 왕씨(王氏)는 이미 솥 안의 물고기처럼 되어 존망(存亡)이 호흡(呼吸)에 달려 있었는데, 경이 만번 죽을 고비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몸소 대의(大義)를 잡아 지켜, 우리 왕씨(王氏)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정하니, 덕부(德符)․몽주(夢周)․용기(湧奇)․장수(長壽)․석린(石璘)․조준(趙浚)․박위(朴츂)․도전(道傳) 8명의 장수가 서로 따라 도와서 11월 15일에 천자의 조칙을 현릉의 정비(定妃)의 뜰에 선포하고, 나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여 현릉의 후사(後嗣)로 삼아, 한 사람도 처형(處刑)하지 않고 새벽에서 조반(朝飯) 때가 되기 전에 16년 동안 왕노릇을 한 신씨(辛氏)를 제거하였소. 그 인친(姻親)과 지당(支黨)들이 온 나라에 뿌리가 서려 얽혔으나,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보고는 간담이 떨어져 면모(面貌)를 고치고 향순(向順)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며, 햇빛은 봄과 같았소. 위로는 31대(代)를 서로 계승하던 차례를 잇게 되고, 아래로는 천만억(千萬億) 대(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열어 놓았으니, 경의 흥복(興復)한 공은 강후(絳後)와 오왕(五王)에게 비길 바가 아니오.
경은 대대로 충의(忠義)를 쌓아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했는데, 덕(德)이 후하매 유광(流光)이 경의 몸에 나타났으며, 문식(文識)과 무략(武略)을 다 갖추었으니 왕좌(王佐)의 재주요, 나라만 위하고 집은 잊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요, 천지와 조종(祖宗)께서 홀로 도타이 낳았[篤生]으니 삼한(三韓)의 안위(安危)에 주의(注意)한 바이오. 현릉(玄陵)에게 지우(知遇)되어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양경(兩京)을 수복하고, 요망스런 중[僧]을 몰아내어 왕씨(王氏)를 편안하게 하고, 나씨(納氏)을 달아나게 하여 사막(沙漠)에 위엄을 떨쳤고, 왜구를 패퇴시켜 서해를 보전하고, 인월(引月)에서 공격하여 부상(扶桑)을 겁내게 했는데, 경은 현릉의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종묘(宗廟)의 절사(絶祀)를 슬퍼하여 해가 지는 곳[虞淵]에서 해를 붙잡기를 맹세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은 천지에 통하고, 지극한 충성은 조종(祖宗)에 통하였소.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대함은 삼한(三韓)의 마음을 감복시켰고, 지극히 인애(仁愛)하고 지극히 은혜로움은 만백성의 환심을 맺게 하였소. 하늘은 대순(大順)을 돕고 사람은 대신(大信)을 돕는 까닭에, 흥복(興復)이 이같이 쉬웠던 것이오. 경은 이에 현릉의 지우(知遇)를 진실로 갚게 되었소. 옛날에 주공(周公)이 국가에 훈공이 있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동방에 제후(諸侯)로 삼았으니, 내가 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모토(茅土)를 나누어 대대로 봉후(封侯)하게 하고, 얼굴을 그리고 공(功)을 새기며, 자손에게 무궁한 세대까지 유사(宥赦)하게 하오. 내가 원자(元子)를 거느리고 이 일을 종묘에 고하오. 아아! 경이 우리의 억조 백성을 살리고 우리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건국하게 한 공로는, 변변치 못한 포상(褒賞)으로써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는가? 경이 중흥(中興)의 원신(元臣)이 되어 명망은 배태사(裵太師)와 같으나, 임무는 상(商)나라 아형(阿衡)보다 무겁도다! 경륜(經綸)을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어 만세(萬世)의 법칙으로 삼고, 준수한 인재를 좌우로 구하여 우리 조정을 무겁게 함으로써, 나의 덕이 적은 사람을 보필하였소. 우리의 사직(社稷)을 보전하게 하니,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이 만년 동안에 조상의 제사와 함께 제향(祭享)하게 된다면, 나의 덕이 적은 사람도 함께 빛이 있겠소! 경의 자손도 경의 충량(忠良)을 법받아 영세(永世)토록 잊지 않고서, 나의 후사왕(後嗣王)을 보필하여 나라와 더불어 함께 경사를 누린다면 좋지 않겠는가?ꡓ
하였다. 또 군사를 돌이킨 공을 기록하여 교지(敎旨)를 내려 포장(褒獎)하고 전지(田地) 1백 결(結)을 내려 주었다.-
조선 태조 이방원의 혈통은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명을 건설한 주원장과 함께 다름 아닌 여진족의 신분으로 대륙과 반도의 왕국을 건설해 제위에 오른 인물로, 두 인물 모두 동일하게 자신의 혈통을 숨긴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킬레스는 반도사관으로 보면 큰 흠이 될 수 있으나 대륙사관으로 시각을 넓혀보면 여진족은 발해의 중심종족이기도 했던 바로 같은 동이족으로 큰 흠이 될 수 없다. 임진왜란때 구원하러 온 이여송이 바로 여진족이었음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공자와 사마천이 지나족 존 주 사대주의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그 뿌리가 되는 동이족의 역사를 깎아 내리고 왜곡 필삭 했거니와 일본은 그 중심이 되는 천황가의 혈통을 숨기기 위해 고천원 신화로부터 신무동정으로 해서 2600년 만세일계로 역사를 두 배 길이로 뻥튀기를 하며 위조했다. 어쩌면 인류역사의 본질이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 일상사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에 비해 고려와 조선왕조의 비밀은 약과일 수도 있다.
하긴 여진족의 핏줄을 가진 대명제국의 황제 주원장이 본 마당 대륙에서조차 한(漢)족으로 신분을 숨기는 터에 역시 당시 존중화 사대주의의 반도사관으로 보면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사실은 경천동지 할 사건임에는 틀림없어서 주원장과 같이 그 혈통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노출된 조선초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병자년에 벌어진 소위 사육신 사건이다.
사육신은 김종서가 문종을 독살했음을 알리고 조선왕조의 혈통과 관련해 역사왜곡에 대한 복잡다단한 역사수탈과 왜곡편찬, 개찬에 전말을 폭로하려던 것이었는데, 사육신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세조는 태종과 김문기, 세종만 알고 있는 왕실 가문의 아킬레스건의 비밀을 알고, 사육신을 죽이는 것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묻어버린다. 그런데 이성계 가문에는 치명적인 유전병이 있는데 정종, 양녕, 효녕, 문종, 노산군(단종), 일찍 죽은 세조 큰아들 등이 바로 그 희생자들이었다.
세조가 소위 노산군 복위라는 엉터리 대역죄로 변질된 사육신사건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핵심을 알자 세조는 이 사건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말았지만 문종이 독살당하자 노산군은 즉위한 적도 없고 세조에게 손위(遜位)한 적도 없이 비밀리에 신병을 요양하다가 돌연 신병을 비관했는지 내관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자살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유전병은 당시 유일하게 왕실의 핵심비밀을 알고있던 김문기도 채 몰랐던 왕실의 흠결사항이었다.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단종애사의 왜곡사는 숙종(숙종24년조)이 왜곡한 것이다. 처음에는 시정기(時政記)로 하였지만 세조의 명으로 노산군 일기를 실록으로 편찬하였고 후세의 숙종이 단종실록으로 개명하여 노산군 일기의 일부인 <유응부가 세조에게 올린 상소>를 삭제했다. 유응부 상소는 계유정난을 극찬한 내용이었다.(이는 단종 복위의 반역으로 몰고가는 정당성을 주기 위해 삭제한 것) 세조실록에는 어느 곳에도 사육신 용어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붙들려 죽은 사람은 여럿이었고 '사육신'이라는 말은 없었다. 당시 두 살이던 남효온 (南孝溫)이 훗날 '육신전(六臣傳)'을 씀으로써 '사육신'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그 뒤 남 효온 등은 '생육신' (生六臣)이 돼 사육신과 대비되었다.
후세 숙종, 영조, 정조가 자신들에게 필요하고 명분론에 휩싸인 유생들이 절실하게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필요했던 절의를 명분으로 사육신을 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세조가 예종에게 바친 훈사(訓辭)를 이용해 오늘의 난신이 후일의 충신이라고 세조가 말했다고 사실을 조작하여 이용하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했다( 見 세조 2년 6월 9일 조서) 즉, 사육신이 충신이라는 평가에 대해 세조의 계유정난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육신의 비유교적․반시대적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숙종이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국가가 관리하도록 한 것은 본래 세조의 성덕(聖德)을 빛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여섯 신하를 처벌할 때 이들이 당세에는 난신(亂臣)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라고 했던 세조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비밀을 마지막으로 알았던 세조는 그런 입장에서 말한 충신이 결코 아니었다. 숙종 24년 9월 전현감(前縣監) 신규(申奎)의 상소문은 당시 현실정세 속에서 단종의 양보는 불가피했고 선양(왕위를 물려줌)이 중국의 사례에 못지 않게 훌륭한 일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여섯 신하의 변이 뜻밖에 발생하여 세조가 상왕의 은혜에(찬탈이 아니라 선양받은 것) 보답하고자 한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며, 사육신들의 음모가 결국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단종 복위와 관련, 사육신이 택한 방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집현전 출신으로 유능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한 사육신이 자신들의 계획을 현왕인 세조를 살해함으로써 실현하고자 한 것은 비유교적․반시대적이라고 지적한다. 즉, 연산군․광해군과 같은 소위 포악한 군주들도 폐위와 반정 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
숙종이 사육신의 관직을 복원하고 서원까지 내린 것은 세조의 영명함과 성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이는 당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조선은 침체된 사회분위기와 국정을 일대 쇄신하기 위해 여러 시책들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정신적․사상적으로 절의와 명분이 강조됐는데 사육신은 그 대표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사육신의 내막은 왕실의 비밀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럼 그 내막을 알아보자.
다음은 고려 현종(顯宗)인 지웅의 친구이자 이성계를 도운 김목경의 손자 김문기 가문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다. 김 문기는 고려 왕조의 비밀과 이성계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김목경의 가문 혈손으로 태종 이 방원이 장차 후일 충녕의 보필자로 낙점하여 충녕의 어린 시절부터 충녕의 학우로 인연 맺게 하여 충녕의 측근으로 극비명령을 실행한 사람으로 충녕 사후 세조때 이 비밀을 밝히려다 4육신의 병자년 사건에 얽혀져 죽은 사람이다. 필자와 충녕 세종의 학우이자 측근 신료 김문기의 21대손 김기태와 나눈 대화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2001.12.16일 뜻하지 않게 전화가 걸려와 두어 시간 통화한 대화)
안원전:지금 춘추는 어떻게 되시고 생업은 뭘로 해 오셨습니까.
김기태:44년생으로 농협에도 근무했고 농사도 짓고 두루두루 했습니다.
안원전:가문의 전후관계를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김기태:우리 가문은 21대손이라 칭하지 않고 장손으로만 따져 10대손입니다. 맞 장손만 따지죠. 전 조부 사후 2년 뒤 태어났으며, 아버님 몰래 어머님으로부터 가문의 비밀을 듣게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안원전:유훈을 받은게 정확히 몇 살때입니까.
김기태:13살때입니다.
안원전:8살때라고 한 것은 무업니까.
김기태:그건 잘못된 겁니다.
안원전:왕건 도종을 우리가 알고있는 도선이라 하셨는데...
김기태:도선국사는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에 대한 기록은 모두 거짓말 역사입니다.왕건은 대륙에 가 있다가 들어와 중국의 혜능 등 고승의 일화를 듣고 흉내내고자 했습니다.
안원전:고려사의 기록이 전부 날조된 것이라는 것은 이미 저도 잘 알고 있는 터입니다.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나오는 것 만 봐도 잘 알 수 있고. 그런데, 가문에서 전해지는 선생이 말하는 대진국은 대조영의 대진국 발해와 어떻게 됩니까.
김기태: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대진국의 시조는 온조왕이고, 동진국의 시조는 동명왕입니다.
안원전:세종이 제일 겁낸 것이 가야가 지나 한족이라는 사실이라 했는데 제가 보기엔 세종이 같은 동이족인 소호금천씨의 후예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 후손-왕망의 후예들이 후한 광무제를 피해 들어와 9가야 알사건과 김수로왕 구지가 사건을 지나 한족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요.
김기태:...전해준 글을 읽어보시죠...
안원전:황제를 내세운 친 중화사관 중심이 아닌가 하는데...
김기태:안선생님은 좁은 테두리인 민족에 빠질 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는 가문의 역사를 내려받은 것 뿐이고 제 비밀을 전 할 분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기자일 꺼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바로 그 분이 안 선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원전: 조선왕조의 핵심키인 김문기 가문의 비밀이므로 있는대로 전하겠습니다. 밑도끝도 없이 말하면 황당해 하겠죠.
김기태:정신문화연구원 모 교수와 문화일보를 비롯한 언론계 인사들에게 말했더니 미친놈취급하는지 일언반구도 없습디다.
안원전:대웅은 어딥니까. 또 개루왕은 누굽니까
김기태:대웅은 백제고 남이국은 남쪽에 있던 왜입니다.여진족이 세운게 동진이며, 개루왕은 의자왕입니다.
이외 한시간 이상 김문기 선생의 모동 이야기 및 적지않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지면상 생략...(2001년 12월16일 양력)
조선왕조의 비밀을 알고 있던 유일한 증거자 김문기 가문의 후손 직계후손 김 기태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약500년 전부터 장손(손자에서 손자로)에게만 비밀히 지켜온 유훈이 저(9대)에게까지 내려와, 연구하니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고,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알려진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알리려 합니다. 이는 연구한 것이 아닌, 그저 영적인 지시에 의해 쓰여졌을 뿐입니다. 절대 개인의 논리가 아님을 밝힙니다. 잘못된 역사를 알리고 진실된 하늘의 역사를 공개하여 천도를 행하도록 하는 이 역사는 연구한 것이 아니라 천신 님들이 내게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고, 지금도 계속 깨달음을 주시고 계십니다.
제가 유훈을 받은 것은 8살 때이고 약 50 여 년 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약 3년 전, 불현듯 생각났고, 신기하게도 그 많은 유훈의 내용들이 갑자기 생생히 떠오르며 그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라면 도저히 못했을 엄청난 진실들이 쏟아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할아버님들이 제게 들어오시게 되어 직접 제가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어디를 가라면 가고, 또 그곳에서 여기가 이러한데, 역사는 이렇게 써있다 하시고, 다른 할아버님들께서도 들어와 많은 것을 얘기해 주십니다. 하지만 아직 공개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충치하나 없던 치아가 모두 헐어 빠져나가는 고통이 있지만 제 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繼 勳
살아서도,
죽어 혼(魂)이
되어서도,
내 무덤을 지켜 라!
계 훈
1. 나의 핏줄은 장손뿐이다
1. 자식은 하나만 낳아라
1. 벼슬을 하지 마라
1. 과거를 보지 마라
1. 유학(儒學)은 하지 마라
1. 문자(文字)를 만들지 마라
1. 생업(生業)은 농(農)을 하라
1. 장손은 모동(茅東)을 떠나지 마라
1. 장손은 문상(問喪)을 가지 마라
1. 장손은 매년 자식중에 하나를 한성으로 보내라
1. 모동(茅東)은 나의 영지(領地)이며 영지(靈地)이다
1. 동지들의 시신(屍身)을 거두어라
1. 내 혼(魂)과 장손들의 혼(魂)은 연결(連結)되어 있다
1. 장손은 나의 혼령(魂靈)이 보호(保護)한다.
1. 내 무덤을 지켜라!
신(神)과 역사와 환생(還生)
인간은 책을 통한 지식으로 인간이 이승을 정복하고 과학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급기야는 신(神)이 없다고 지식인들이 이승의 모든 인간을 속이고 있다. 과학이 이루어낸 물질(物質)이 인간의 육신을 편리하게 하고 이승의 모든 인간이 이 과학 문명의 수혜(受惠)를 누리고자 광분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을 복제하여 영원하고자 한다. 자주 일어나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神)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이 재앙을 막는다고 광신(狂信)하고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신비가 과학으로 풀렸다고 인간들은 자만하고 있다.
이십세기에 등장한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승에 전해지고 있는 사서(史書)들이 모두 왜곡되고 위조된 사기문헌(詐欺文獻)인줄 알면서도 인간들이 출세와 명예 그리고 부귀를 얻고자 책을 만들어 세상을 속이고 있다. 학문(學問)과 학자(學者)는 인간들을 속이고 속는 자들이다. 고대(古代)에서 현재까지 학자들이 저술한 모든 문헌들은 신(神)과 환생(還生)그리고 역사(歷史)를 인간의 육신(肉身)에서 보고 왜곡하여 기록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승을 인간들이 모두 파괴하여 놓고 환생의 도를 어지럽혀 놓았다. 이제 인간들을 멸망시키고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다시 환생의 도를 닦고자 한다. 천상(天上)께서 천명(天命)하신 천기(天機)이다. 이승에 있는 모든 핵무기를 폭발시킨다. 북이 남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대대적인 남침을 하여 통일을 한다. 미국이 멸망하고 북도 멸망한다. 이승의 육지가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가락의 일부만 섬으로 남는다. 선조(先祖)의 땅 가락과 불노 그리고 모동은 천명을 받고 천도를 닦았던 곳이다. 삼천 오백여 년 전 현 중국대륙의 황하 강에서 하(河)나라의 왕이었던 황제(黃帝)께서는 서역의 여와(女渦)왕의 침범으로 전쟁보다는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고자 다른 땅으로 이동하였다. 동으로 새로운 땅을 구하여 자리잡은 곳이 가락(伽洛)이다.
왕국을 한(漢)이라 하고, 천도(天道)인 환생의 도(道)로 교화하였다. 황제(黃帝)를 한가야(漢伽倻)대왕 이라고도 한다. 황제께서 천도를 깨우쳐 교화하였으니 드디어 환생에서 벗어나 신(神)되어 천상(天上)에 오르셨다. 황제(黃帝)의 신격(神格)은 천신(天神)이시다. 황제의 무덤은 문무대왕의 무덤에서 오 분 여 올라가면 있다. 한(漢)의 마지막 왕은 경지 대왕이다. 대진(大震)의 도선이 중국의 왕건을 자칭하고 중국의 역사인 고려를 흉내 내어 대진을 멸망한 다음 위계(僞計)로 경지 대왕을 살해하여 황제께서 세우신 천명의 왕국 한(漢)을 멸망시켰다.
심 상공(沁 相公)이 경지 대왕의 시신을 불로동에 모시었고 후손들이 이 인근에서 천도를 닦았다. 심 상공의 손자 연(淵)이 천명을 받고 천도를 행하여 천상의 신이 되었으므로 후손인 김문기(金文起)에게 이승이 저승의 환생의 도를 이루어 천상의 신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김문기는 세조에게 고려의 도종 즉 왕건이 대진족의 왕조(王朝)와 (여진족의 동진 왕조는 요(遼)가 멸망 시켰다) 대웅족의 왕조, 한의 왕조( 남이족의 왕조는 한의 성덕 대왕이 멸망 시켰다)를 멸망시키고 역사를 중국의 역사를 가지고 왜곡시켰다고 알리고 세종이 다시 인멸하고 고려의 역사도 왜곡시켰다고 밝혔다.
이 인간세상인 이승은 인간이 생로병사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저승에서 이승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환생하여 천도를 닦게 하여 신이 되어 천상에 오르게 하는 것임을 밝혔다. 이에 놀란 세조는 김문기와 그의 제자들인 박중림 등 열 명을 노산군 복위라는 사건을 만들어 처형하였다. 김문기가 맏손자 김효현에게 천기를 알려주고 모동에 자신의 시신을 남몰래 옮겨 무덤을 만들고. 이 곳을 지키며 천도를 닦으라고 하였다. 김효현은 할아버지 김문기가 김계훈 이라고 개명하여 이 이름으로 천도를 행하였다 김계훈이 김문기가 문자로 기록하지 말고 문자도 배우지 말며 문서를 작성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였으나 문서하나를 만들어 후손에게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내 놓게 하였다. 그 문서가 바로 감결(鑑訣)즉 정감록(鄭鑑錄)이다.
정감록(鄭鑑錄)은 이십세기 말에 사는 후손에게 김문기가 선조이며 김문기의 무덤이 있는 모동으로 빨리 들어와 천명(天命)을 받고 천기(天機)를 문사(文士)들에게 알리라는 암호이다
정감록의 내용은 우리의 역사가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하여 경지 대왕에 이르기까지 이 천 오백여 년 동안 천명으로 천도를 행하였고, 왕건에 의한 역사왜곡은 고려조에서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어 모든 이 땅의 백성들이 천명과 천도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배역(背逆)의 책으로 선조들의 역사를 모욕(侮辱)한 것이니 이는 천신(天神)이신 황제를 모욕한 것이요 천장(天長)이신 문무대왕을 모욕하고, 천상의 모든 신(神)들을 모욕한 것이니 이는 천도인 환생을 모욕한 것으로 천벌인 조상벌(祖上罰)로 다스렸다.
이년 전부터 이 무서움을 알리었으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읽지도 듣지도 생각도 아니하고 무시하였으니 이는 인간들이 만든 지식의 속임수에 빠져들어 허상(虛像)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정감록은 이십일세기는 없다고 하였다. 인간이 신을 모욕하였고 신을 무시하였으며 환생의 도인 부부 도(夫婦 道)를 혼탁(混濁)시켜 성의 상품화와 성의 자유화가 인간의 권리인줄 망상하여 어린아이부터 늙은 이 까지 미쳐 날뛰고 있다. 이에 환생의 극벌(劇罰)로 인류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천지개벽(天地開闢)하여 인간들의 혼(魂)을 반혼 반귀(半魂 半鬼)로 만들어 새로운 세상으로 환생시키는데 죄업이 무거운 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초목(草木)으로 나머지는 들짐승 날짐승과 벌레등으로 환생되는 데 물로도 환생된다.
인간이 멸망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매 천상의 모든 신들이 도로서 영력(靈力)으로서 조화(造化)로서 인연 있는 후손들 중에서 깨달은 자가 있으면 환생의 무서운 벌을 면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살아 있다. 역사는 신의 역사이고 환생의 영광이다. 이제 역사의 진실을 하나 하나 밝히고자 한다. 제일 먼저 밝힐 것은 소위 단종 복위 사건이다. 단종이란 왕은 조선조에 없었다. 문종의 아들 노산군은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 영월에 있는 노산군의 묘는 확실히 노산군의 시신이 들어 있다. 그러나 노산군은 살아서 영월에 간 것이 아니고 죽어서 간 것이다.
노산군은 세조가 죽인 것이 아니다. 자살한 것이다. 그것은 병자년 초에 일어난 일이며 당황한 세조는 극비리에 심복인 홍윤성을 시켜 영월에 무덤을 만들었다. 곧바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이 일을 극비로 숨겼고 모든 사실을 꾸민 것이다. 세조는 애초에 노산군을 보호하여 성년이 되면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 동안 왕권 강화에 온힘을 다하려고 하였다. 정신 박약아인 노산군이 부왕인 문종마저 잃고 또한 김종서의 감금과 삼촌인 안평대군의 위압적인 태도에 겁을 먹었고 생의 허무함에 죽음의 길을 간 것이다. 당시의 신하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왕위 계승권자인 노산군이 삼촌인 수양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수양이 왕위에 오르자 김문기 선생을 비롯한 박중림,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이휘, 유응부, 유성원 선생 등은 세조에게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대권을 노산군 에게 돌려 줄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병자년 6월 초1일에 세조에게 건의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날 열릴 예정이었던 조회가 열리지 않아 다음을 약속하였으나 성삼문이 고집하여 집현전에서 토의하게 되었다. 결론이 나지 않아 다음에 모일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김문기 선생과 박중림 선생은 집에 돌아갔으나 나머지 이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밤을 세워 토의하였다.
아침 일찍 대궐에 들어왔던 김질 이 집현전에 성삼문 등이 밤을 세웠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들어오다가 노산군 왕위계승과 세조의 등극이 부당하다는 소리를 엿듣고 깜짝 놀라 그의 장인인 정창손 에게 말하였다. 정창손은 이것을 기회로 생각하고 세조에게 달려가 역모가 있다고 고하였다. 김질이 문밖에 있다 달아나는 것을 본 성삼문은 큰일났다 생각하고 이개 에게 김문기 선생에게 알리라고 보냈다. 출근하던 김문기 선생은 사색이 되어 달려오던 이개 를 보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였다. 이개 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김문기 선생은 이개를 집현전으로 돌려보내고 집으로 되돌아와 맏손자인 효현 에게 천명을 전달하였다.
이 천명이 계 훈(繼 勳) 이고 효현의 아명을 버리고 김계훈이라 하였다. 김계훈은 노산군과 같은해 4월 2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석으로 병자년 당시 거창현감으로 6월 12일 세조가 보낸 도사에게 목이 베어 살해되었다. 어머니는 권영금으로 태종의 외 증손녀로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아 몸이 쇠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천명을 들은 김 계훈은 충복인 막 쇠 와 같이 몸을 피하였다. 의금부부근에서 동정을 살피던 김 계훈과 막 쇠는 6월 5일 두 사람의 시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누구인지 수소문한 결과 박팽년 선생과 유성원 선생임을 알았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두 분의 시신을 모시고 남산에 와 묻었다. 6월 8일 서소문 밖 저승고개를 넘어 처형장에 들어온 김문기 와 박중림, 성승. 성삼문, 하위지, 이개, 이휘, 유응부 등의 순서로 목을 베었다. 삼일동안 이분들의 시신을 남산으로 모시고 와 묻어 주었다. 그리고 김문기 선생의 시신을 모시고 안음현 모동으로 들어와 지정된 장소에 묻고, 거창현으로 가 아버지 김현석 선생의 시신을 찾아 모시고 모동의 김문기 선생의 무덤앞에 묻었다. 그리고 오백여년 동안 계 훈(繼 勳)을 지키며 살았다. 이곳에는 대대로 후손들이 만들어 놓은 비결들이 있다.
그 중에는 감결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정감록이라 불리 운다. 정도령이 나오고 앞으로 정씨 세상이 된다는 등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감결을 풀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감결이 우리 민족의 역사이며 천기이기 때문이다. 감결은 김문기 선생의 맏손자 김 계훈 선생이 할아버지의 천도를 듣고 행한 것을 비결로 만들어 오 백년 후의 후손에게 깨우치려 한 것이다. 이 감결의 내용이 성삼문 선생 등이 절손(絶孫)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세조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나오는 정 감(鄭 鑑)은 모동의 김문기 선생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심(沁)은 바로 세상에서 불리 우는 마의 태자의 본이름이다. 마의 태자는 왕건이 조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왕자를 상공(相公)이라고 하였다.
연(淵)은 마지막 상공이신 심(沁)의 손자이다. 김문기 선생이 바로 심 상공의 직계 후손이다. 김문기 선생의 아버지는 김보(金 普)이고, 할아버지는 김목경(金牧卿) 이다. 김목경은 연의 칠 대 손이다. 연(淵)은 바로 한나라의 마지막 왕 경지대왕의 증손자이시다. 한나라의 위대한 대왕이시며 천명을 받아 대진(大震)의 곤명 왕을 멸하였고, 대 웅 (大熊)의 개루 왕을 멸하셨던 대(大) 한(漢)의 영웅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문무 대왕이시다. 경지 대왕은 문무 대왕의 23대 손이시다. 왕건은 우리 한(漢) 나라의 모든 기록을 파멸하였고 역사를 위조하였다. 또 일연은 삼국유사라는 괴서(怪書)를 지어 왕건의 역사왜곡을 진실인양 꾸미었다. 왕건과 일연은 문무대왕을 훼손하기 위해 김유신과 또한 김춘추라는 가 인물을 만들었고, 문무 대왕 능을 김유신 묘로 둔갑시켜 놓았다. 문무 대왕의 손자인 성무 대왕 능을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이라고 꾸며 놓았다. 이들은 또한 문무대왕의 아버지이신 흥무 대왕 능을 진평왕이라 날조하고 선덕여왕의 아버지라고 꾸몄으나 우리 한나라에는 여왕은 없다.
만덕 대왕은 문무대왕의 고조이시다. 선덕 여왕이라 능에 써놓았으니 역사의 왜곡이 어찌 이 것 뿐이랴 모두 중국 대륙에 있는 역사로 개조한 것이다. 문무 대왕은 우리 한(漢)의 개국시조이신 황 제(黃 帝)의 87대 손이시다. 황제는 천명을 받고 천도를 행하려 동쪽으로 이동하여 이 곳 완산에 도읍을 정하시고 자손들에게 천도를 행할 것을 명하셨으나, 후손들은 허상의 도에 빠져 천명을 어겼으니 어찌 나라를 유지 할 수 있겠느냐. 왕건이 허도(虛道)로써 중생을 속이고 대진(大震)의 마지막 왕 미지왕을 살해했고 궁예로 둔갑시켰으며, 대웅(大熊)의 마지막 왕 경애 왕을 살해하여 견훤이라 둔갑시켰다. 우리 한나라를 신라로 둔갑시켜,
경지대왕을 불국사에서 살해하여 대왕의 목을 안압지에 던지었다.
대왕의 목과 시신을 수습하여 왕건의 눈을 피해 대구에 안장하였다. 한을 품은 심 상공은 동화사의 중이 되었으나 이내 환속하여 우리 한나라의 중흥을 꿈꾸었으나 허상임을 알고 천도를 행하려고 영주에 자리잡고 자손을 엄히 가르쳤다. 손자 심은 할아버지의 훈도에 따라 방방곡곡을 돌며 도를 행하였으니 그 자취가 마이 산의 돌탑과 운주사 의 천불 천탑 이다.
이 역사의 진실이 허상의 눈에 어두운 중생들에게 천상의 경고임을 알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천상이 있고 저승이 있으며 초라한 이승이 바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에 주인인 혼이 들어 있다.
환생을 깨달은 신들의 역사.
신들이 역사를 알려 주셨다. 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김 문 기 (金 文 起)》
태조 이성계와 김목경
김문기(金文起)는 태조 7년10월8일(戊寅年) 한양(漢陽) (현 중구 오장중학교 후문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보(金普)는 종부시(宗簿寺)관리로 자(字)는 김평우(金平瑀)이고, 할아버지 김목경(金牧卿)은 자(字)가 김관기(金관其)이다. 김목경은 대대로 대구와 영천에서 살아오다가 가문에서 지켜오던 군위 석굴에서 수도하던 승려(僧侶) 지웅(志雄)을 만나 교우(交友)하였다. 고려가 망하여 원(元)의 속방(屬方)이 된지 칠 십여 년 동안 고려 왕족들은 몽골인들의 눈을 피해 승려가 되어 각지를 떠돌고 있었다. 지웅도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속명이 왕신(王辛)이었다.
원이 망하자 원왕과 관리들이 몽골로 급히 도망쳤다. 고려인들은 고려를 재건하고 왕으로 추대한 것이 지웅 즉 왕신 이었다. 왕신이 고려의 현종(顯宗)이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고려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 고려사는 고려를 완전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신(현종)을 공민왕으로 왕신의 승명(僧名)을 신돈으로 조작한 것이다. 현종의 부름으로 한양에 온 김목경은 전적(典籍)관리로 있었다. 현종의 공신들이 실정(失政)을 계속하자 벼슬에 뜻을 버린 김목경은 야인으로 돌아와 칩거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김목경을 불러 개혁에 동참을 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김목경은 태조 이성계를 도운 것이다.
태종이 직접 뽑은 충녕의 학우(學友) 김문기
이런 배경의 김문기가 태종의 눈에 들어 충녕을 보필하고자 직접 뽑은 것이다. 충녕은 정축생(丁丑生)으로 김문기보다 한 살 위였다. 같이 뽑힌 개국일등공신 조준의 손자는 병약하여 충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병사하였다. 김문기는 아명(兒名)이 생남(生男)이고 호(號)가 사선(士善)이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김문기에게 밀명(密命)을 내렸고, 밀명을 수행 중에 사용하던 이름이 사발(士發) 그리고 사철(士哲)이다. 국내에서는 사철을 사용하였고 중국 대륙에서는 사발을 사용하였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태종은 김문기를 불러 고려조에서 왕에게만 비밀히 전해지는 문서를 주며 연구하여 세종을 돕되 죽어서 까지 비밀을 지키라고 하였다.
이 비밀 문서는 고려를 만든 도종(道宗)이 사왕(嗣王)에게 몰래 건 내준 자신의 출생과 고려를 세운 비화를 적은 비록(秘錄)이었다. 도종은 고려사에서 조작한 태조 왕건(王建)을 말한다. 왕건은 대진족(大震族)으로 괴산의 작은 절(현 각림사) 주지인 도광이 하녀를 겁탈하여 낳은 사생아이다. 왕건이 도광의 고향 김천 직지사에서 성장하면서 학문을 익혔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물을 배우며 많은 승려들과 교우 하였다.
대진국(大震國)과 금성(金城)그리고 금화(金化)
대진국은 온조(溫祚) 대왕이 이천 오 백 여 년 전에 압록강변 금성에 도읍하고 개국하였다. 성씨를 금(金)으로 하였다. 금성이 현 의주(義州)이다. 극명왕(戟銘王)은 여러 차례 한(漢)을 침범하여 영토를 빼앗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급기야 아우 김유신(金庾信)의 계책을 받아들여 문무대왕의 서자(庶子)인 무극을 포섭하여 문무대왕을 시해하였다. 대노(大怒)한 문무대왕의 아들 천무대왕(天武大王)이 대군을 소집하여 대진을 정벌하려하자 대진의 조정은 극명왕을 생포하여 한 나라에 넘겨주어 천무 대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계획하였다. 이를 사전에 눈치챈 극명은 수하를 거느리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동진(東晋)이 대진을 정벌하러 수만의 군대를 보내오자 대진의 문주왕(文周王)은 금성(의주)를 포기하고 금화(金化)로 천도(遷都)하였다. 이 금화가 철원이다. 대진이 이천 삼백여 년 동안 지켜오던 그들 선조의 땅을 빼앗겼던 것이다. 왕건이 문주왕의 신임을 얻어 정사에 참여하였을 때는 개성도 동진의 땅이었다. 왕건은 모사(謀事)의 달인으로 문주왕을 꾀어 한의 경덕왕(景德王)을 암살하였다. 한의 경덕왕은 후에 왕건이 고려왕이 되어 시해한 한의 마지막 왕 경지대왕의 아버지이다. 왕건은 문주왕을 독살하였고 뒤를 이은 대진의 마지막 왕 미지 왕(美摯王)을 살해하고 고려를 세운 것이다.【평양과 개성은 한번도 도읍 한 땅이 아니다. 고려 도종이 조작한 것으로 중국의 사서를 인용 한 것에 불과하다.】
동진(東晋)과 함주(咸州)
동진은 여진족의 동명왕(東明王)이 개국한 나라이다. 동명왕은 성이 이(李)씨이다. 도읍한 함주는 만주의 목단강 유역이다.황제가 한족을 이끌고 동진 할 때 일부가 만주부근에 남아 야인(野人)들과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생긴 부족으로 한족의 피가 조금 섞였으나 한족은 아니다. 동진은 강성한 고구려의 침략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부여(夫餘)를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요(遼)와 분쟁으로 위기를 느끼자 남하하여 대진을 쳐 개성 밑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대진이 왕건에 의해 멸망하자 동진도 요에 의해 멸망하였다.
대웅(大熊)과 개주(開洲)
대웅은 개주를 도읍지로 하였다. 현 부여이다. 개주를 벗어나 다른 곳에 도읍 한 적이 없다. 한때는 충남일대와 전북의 일부 그리고 경북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영토를 빼앗겨 부여 부근의 충남일대를 영토로 하여 나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대웅 은 뚜렸 한 시조가 없다. 여러 부족이 왕을 번갈아 가며 하다가 겨우 소왕국을 만들었다. 한의 문무대왕에게 패해 일본으로 도망간 개루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한 신하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개루왕은 정(鄭)씨 가문이다.
한의 광덕 대왕의 사위가 된 무(武)왕은 개루왕의 후손으로 정씨이다. 광덕 대왕의 힘으로 대웅의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신의 조국 대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역사 그것도 변방의 역사에 있었던 고구려의 대를 계승하였다는 고려의 도종은 대웅을 염탐하고 있었다.대웅의 신덕(神德)왕이 죽자 경애(景哀)왕이 대를 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도종은 경애왕을 암살하고 대웅을 멸망 시켰다.
남이(南夷)와 웅천(熊川)
웅천은 지금의 김해(金海)이다. 남해대왕이 웅천에 도읍하고 남이(南夷)를 개국하였다. 남이가 융성하였을 때는 부산일대와 경상도일대 그리고 전라도 해안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현 고령지방에 있던 소왕국(小王國) 서라벌(徐羅伐)을 정복하였다. 바다에 익숙했던 남이는 일본까지 진출하여 영토일부를 차지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남이는 끈임 없이 한(漢)을 침입하여 괴롭혔다. 남이의 성왕(星王)은 한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가락까지 쳐들어 왔다. 이에 한의 성덕대왕(聖德大王)은 성왕을 건천으로 유인하여 건천성에서 섬멸하였다. 남이의 왕자와 일부 신하들은 일본으로 도망하지 못하여 일본의 식민지는 와해되었다.
김해의 수로왕이라는 능은 남이(南夷)의 청루 대왕 능이다. 세종 21년10월4일 경상도 관찰사 이선(李宣)이 치계(馳啓)하기를, ꡒ신이 순시차로 김해(金海)에 이르러 친히 살펴보온즉, 읍내성[邑城] 서편 길 옆에 가락국 시조(駕洛國始祖) 수로왕(首露王)의 능침(陵寢)이 수전(水田) 가운데에 침몰되어 있었는데, 혹은 길을 내어 짓밟으며 혹은 마소를 방목(放牧)하기도 하오니, 다만 마음가짐이 소홀하고 행위가 무례한 것뿐이 아니옵고, 금제(禁制)하는 법률도 있사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수로왕이 비록 해변 한구석에서 나라를 세웠고, 또 알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사오나, 나라 다스리기를 1백여 년이나 하였으며, 나라를 계승한 것도 거의 수백 년이나 되었으니, 신라나 백제의 시조에 비하오면 그 공이 비록 우열은 있사오나, 상고 시대에 있어서 농사를 힘쓰는 것으로 나라를 창립하여 백성들이 그 은덕으로 한편에서 편안히 살았사오니, 비옵건대,
신라 시조를 숭앙(崇仰)하던 예전(禮典)에 의하여 그 제도와 예절을 참작하여 능 옆 사방 50보 안에 있는 밭은 모두 묵히게 하여 갈고 심는 것을 금지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구역의 경계를 정하고 표석을 세우게 하옵시되, 수호하는 1, 2호(戶)를 선정하여 때때로 소제하게 하와 포장하는 예절을 베풀게 하옵소서.ꡓ 하매, 예조로 내려보내니, 예조에서 아뢰기를,ꡒ수로왕 능침에 표석을 세우고 수호하는 사람을 두게 할 필요는 없으나, 단지 사면(四面)으로 각각 30보씩을 한정하여 밭 갈고 나무하는 것을 금하게 하옵소서.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려(高麗)와 한성(漢城)
도선(道詵)은 당(唐)에서 돌아오자 대진의 정세를 분석하고 동진으로 들어가 정세를 엿보았다. 도선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대진으로 돌아온 뒤에 문주왕의 초빙에 응하여 동진의 정세와 대진의 옛 강토를 회복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비웃음과 문주왕의 우유 부단에 실망하였다. 이 후 한(漢)으로 들어 간 도선은 관리들의 눈을 피해 선교(禪敎)를 전도하며 절을 세우기도 하였다.
호태 왕 비석을 세우다.
야심에 눈이 어두운 도선은 문주왕을 다시 찾아가 대진의 옛 도읍지인 의주 부근에 대진 땅임을 알리는 비석을 세워 놓고 오겠다고 하였다. 문주왕의 신임을 받아 권력을 쥐겠다는 속셈이었다. 도선은 심복들인 승려들을 이끌고 동진 땅이 된 의주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못하여 문주왕의 고조(高祖)인 동천왕능 인근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대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아니 하고 당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사서를 인용한 비문으로 만들어 놓고, 도선이 이 땅을 수복한 뒤에 자신의 위명(威名)을 떨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도선은 고려를 세운 뒤에 한 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다.
도선이 고려를 금화에서 세우다.
도선은 선교(禪敎)의 승려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쥔 뒤 왕 미지(美摯)를 시해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왕이 된 도선은 승명을 버리고 당나라에 있었던 왕건(王建)을 숭모하여 자신도 왕건이라고 하였다. 왕건은 금화에서 고려를 건국하였지만 다른 곳으로 왕궁을 옮기지 않았다. 왕건은 당에 유학 가서 배운 풍수(風水)에 조예가 깊고 심취하고 있었다.
평양은 도읍지가 아니었다.
왕건은 대진의 모든 역사를 없애고 대진을 고구려로 하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이름만 지어놓았다. 이 평양의 지명은 후대에 현 평양 땅으로 명명한 것이다. 왕건은 자신의 왕명을 도종(道宗)이라 하였다. 이는 자신이 불도(佛道)를 해탈하여 석가가 되었고, 선도(禪道)의 창시자라 하며 사위(嗣位)를 받는 자는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물을 파괴하고 신라로 조작하다.
한(漢)의 기(氣)를 꺾는다고 가락의 왕릉을 흙으로 덮었고, 사찰들을 허물고 가락의 한족을 몰아 냈다. 가락은 백여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한(漢)도 불교를 숭상하였지만 한족의 전통은 천도(天道)와 천신(天神)에게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불도(佛道)보다 천신의 천도를 더 중요시하였다. 한 나라 천신의 주요 제사 터인 합천(현 영암사지―이 곳은 의상 대사가 주석 하였고 석탑에는 의상의 사리가 있다.)의 사사(寺社)를 파괴하였다. 현 원주 부론의 법천사지도 천신의 제사 터인 것을 혁파하였다. 그리고 비문을 갈아 없애 놓고 중국의 사서를 이용하여 지광국사의 현묘탑으로 하여 신라 탑 비인 것처럼 새겨놓았다.
선승들의 승군
왕건의 선승들을 한 나라 각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고려백성으로 선도하는 한편 반란을 방지하고자 선승들이 승군(僧軍)들을 조직하게 하고 지휘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개국의 일등 공신인 선승들이 권력을 가지자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알았지만 이들을 제거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을 알았다.
도종(道宗)의 자식은 없다.
왕건은 자신이 수태(受胎)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많은 비빈(妃嬪) 들이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거의 그의 공신들인 선승들의 자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왕건은 알고 있었지만 내색 할 수는 없었다.만일 공개하고자 한다면 왕건이 죽음을 당하고 애써 이룩한 고려는 멸망한다는 것을 왕건은 계산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는 것뿐이다. 왕건은 이렇게 무섭고 교묘(巧妙)한 사술(詐術)의 명수이다.
도종의 유훈
왕건은 장자(長子)를 사왕(嗣王)으로 하여 유훈을 만들어 주고 비장(秘藏)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말하고 대진을 멸하여 고구려의 대를 계승하는 이유와 한(漢)의 모든 것을 없애고 신라로 조작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땅의 과거 역사를 삼국의 고구려 신라 백제로 할 것과 유물유적은 삼국의 명칭으로 하라고 하였다. 대진(大震)이 북으로는 압록강의 유역에서, 남으로는 한강의 유역까지 통치하였지만, 중국과 만주에서 일어난 강대한 국가들이 남진하면 이들을 막으려 대진 족은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재산을 빼앗겨 굶주리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그러나 한족들은 대진 족이 외적을 막아 싸우는 동안 평화를 누렸으면서도 대가는 고사하고 인사도 할 줄 모르는 오랑캐이다. 이 한족들은 자신들이 천신의 후손이라 하면서 우리 대진 족을 북이(北夷)라고 멸시하였다. 북쪽의 만주나 중국에서 강대한 국가가 일어나도 고려가 중국 땅에서 강대한 국가였던 동이(東夷)족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하면 누가 깔보고 쳐들어오겠는가 하였다.
한족들을 하층민으로 하여 농사에 전념하도록 하고, 관리와 승려로는 절대 뽑아서는 안 된다. 대진 족이 승려와 지방 관리까지 도맡아 하되, 여진족을 포용하여 하급관리로 채용하여 한족과 대웅 족 그리고 남이 족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하였다. 한의 영토였던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절을 짓지 말고, 대웅의 부여에도 절을 짓지 말라고 하였다. 고려의 도읍(都邑)으로 금화(金化)는 이익이 없고 또한 불편한 곳이니 천도(遷都)를 하되 한의 영토였던 곳은 안 된다.
옛날 도읍인 금성(金城)은 이미 쇄기(衰氣)하였으니 북쪽도 안 된다.평양과 개성은 도읍지가 아니니, 평양을 허도(虛都)로 만들어 놓고 고구려의 수도로 하고, 개성은 고려의 허도(虛都)로 하라 하였다. 고려의 도읍지로는 대진의 영토였던 한강에 있다. 한성(漢城)에 도읍 하라. 그리고 한성(漢城)과 한강(漢江)이라고 명명하라 이는 고려 땅에서 천신(天神)에게 수 천년동안 제사하여 음복을 받은 것이 한족이므로, 이 한(漢)자를 사용하면 천신(天神)의 음복(陰福)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지막에 써놓기를 왕건이 선도(禪道)를 깨달아 생불(生佛)이 되었으니, 죽으면 바로 화장(火葬)을 하고, 사리가 많이 나올 것이, 사리를 김천 직지사의 삼층석탑 옆에 또 하나의 석탑을 만들어 봉안(奉安)하라 하였다. 그리고 왕건의 가짜 능(陵)을 허도(虛都)인 개성에 만들라고 하였다.
선종(詵宗)의 한성 천도
왕건 즉 도종(道宗)이 죽자 사왕(嗣王)으로 선종(詵宗)이 왕위에 오르니 두 번째 이다. 선종은 한성(漢城)으로 천도(遷都) 하였다. 한성으로 도읍 한지 얼마 후 선종에게 괴이(怪異)한 일이 있었다. 왕비가 아이를 낳았는데 손이 없고 얼굴에 눈, 코, 입이 없었다. 아이는 죽어 나왔다.
진광종(震光宗)
제 4대인 진광종(震光宗)은 한족을 아주 멸시하였다. 가락의 이름을 경주로 개칭하고 한족들을 동원하여 능들을 흙을 부어 산처럼 만들었다. 이어 진광은 한의 절 탑을 들어내어 사리와 봉안 품들을 수거하여 왕궁에 보관하였다. 한족에 대한 학대와 멸시로 분노가 극에 오른 한성의 어느 절 노비였던 가도(假賭)가 노비들을 충동질하여 주지 승을 살해하였다.
이어 관아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관리들을 살해 한 다음 왕궁까지 쳐들어가 진광종을 살해하였다. 궁성을 불지르고도 성이 모두 불타오르자 이들은 고려가 멸망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권력자인 선승(禪僧)들과 대소 관원이 급거 개성에 모여 승군(僧軍)을 편성한 다음 한성으로 보내 토벌하였다. 잿더미의 한성을 재건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임시도읍하고 제5대 왕으로 황신종(凰薪宗)이 왕위에 올랐다.
황신종(凰薪宗)
황신종은 유화 정책으로 일부 한족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선승들은 한족 등의 불평분자들을 색출하여 북방으로 옮겼다. 동진이 이미 요에 의해 멸망되어 황해도 이북지방이 요에 접수되었으나 사람이 없어 황폐하여 있었다. 금이 침입하다. 만주에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야인족과 여진족과 합쳐 금(金)을 세웠다.
금은 고려에게 동진의 땅을 반환하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가 고구려의 대를 계승한 나라로 오히려 압록강 변의 땅을 돌려 달라고 하였다. 이에 (금의 입장에서) 고구려를 사칭(詐稱)하는 고려에 분개한 금의 왕은 고려를 정벌하러 대군을 보냈다. 고려는 한성이 함락되기 전 항복을 하고 사과하였다. 왕건의 유훈으로 고구려를 사칭한 고려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금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 금의 침략으로 고려는 피폐하였다. 금이 망하고 송이 건국되었다.
공평종(恭平宗)과 고종(高宗)의 왕위 싸움
혜종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왕운(王暈)과 왕초(王椒)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왕운이 왕위를 자신하고 대진의 도읍지인 금성으로 천도할 것을 선언하고 금성으로 떠났다. 이 왕운이 공평종(恭平宗)으로 조정의 반대를 묵살하였던 것이다. 선승과 조정신하들은 대경 실색하고 왕초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종(高宗)이다. 금성에 가는 도중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왕운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고종을 치고자 군사를 모집하였다. 왕운의 부하가 고종의 선승들로부터 밀명을 받고 왕운의 목을 베었다.
고려의 신분제도 골품제(骨品制)
고려시조 도종은 당에 유학하여 선교를 배운 승려들을 이용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불교국가이며 최고 권력은 승단(僧團)에서 나왔다.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 승려들은 도종의 명으로 한의 각 지역에다 종문(宗門)을 개설하고 주석 하면서 백성을 교화하며 한편으로는 승군을 강화하고 권력을 행사하였다. 각 종문의 선사들이 모여 왕위의 계승을 결정하고 국가 대사를 결정하였다. 고려는 대진족 중심의 승려국가로 골품제와 구 두품제의 신분계급사회이다. 왕건의 사왕(嗣王)출신과 왕건의 공신 승려들의 사자(嗣子)출신을 부처가 된다하여 성골(聖骨)이라 하였고, 왕건의 후손과 일반 공신들의 후손을 보살이 될 것이라 하여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고승들을 구 품에서 칠품으로 하고, 대진 족 중에서 관리를 뽑아 육 품에서 사 품까지로 하고, 삼 품 이하는 여진족에서 뽑았다. 각종 노역(勞役)은 한족(漢族)과 대웅족(大熊族) 그리고 남이족(南夷族)이 하였고, 또 이들을 노비(奴婢)로 만들기도 하였다.
고려의 승군 위안부 화랑
승려들이 문란하고 권력을 마구 휘둘러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그칠 줄 몰랐다. 한족들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진족과 여진족부녀자에게까지 성폭행이 일어났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승려들의 폐해(弊害)를 줄이기 위해 화랑(花郞)제도를 만들었다. 대개 한족의 미모(美貌)의 계집애를 승군의 규율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징집하여 승단에 배속하였지만 사실은 승려들의 성 노리개로 뽑은 것이다.
승려들의 권력이 부패하고 정도(正道)를 잃어 백성들의 원망이 높고 특히 권력의 중앙에 진출이 막혀 있는 일반 신하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이러 하던 차 왕궁의 하위 계급에 있던 정중부가 젊은 선승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일반 문무직의 신하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이들과 싸움이 벌어 졌다. 싸움이 확대되자 선승들은 승군들을 동원하여 정중부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모두 처형하였다. 그러자 민심이 흉흉하여 승려들에게 반감을 가졌다.
권력 승에 대한 문신들의 반란
당시 육 품으로 일반인으론 최고위에 있던 김충이 명종( 宗)에게 승려들의 정치개입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골품제와 승군의 폐지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명종은 김충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소문무 관원들이 옥을 파하고 김충을 구출한 다음 궁으로 쳐들어가 명종을 살해하고 선승들을 주륙(誅戮)하였다. 김충은 자신과 친밀한 왕전(王塡)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경종(高敬宗)이다.
고경종은 골품제를 폐지하고 승군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종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종족을 고려 백성으로 하는 동일화 정책을 펴서 관리를 차별 없이 등용하는 과거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지명(地名)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를 실시하였다. 고려시조 도종이 고려를 불교국가로 만들어 승려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였고 북방의 국가들이 역사를 사칭한 죄를 물어 고려 강토를 여러 번 유린하였다. 승려들이 불도를 외면하고 권력에 빠져서 고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여 상하민심이 흉흉하였다.
지눌 대사의 민심 잡기와 승풍 바로잡기
민심을 잡고자 고심하던 고경종은 김충으로부터 지눌이라는 선사가 고려불도를 외면하고 개성 근교의 산중에서 홀로 여러 해 동안 수도하고 있는데 도력이 높으니 이 선사를 불러 고견을 듣자고 하였다. 지눌은 고경종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불승(佛僧)들을 재교육시키는 한편 엄한 계율로 불도(佛徒)들을 교화하였다.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회하며 승려와 신도들을 불심에 기울이게 하였다. 순천 송광사는 이때 잠시 들렸었고 그 외의 인연은 없다. 지눌의 노력에 고려사회는 차츰 안정되었고, 개성인근의 암자에서 말년을 보낸 지눌이 입적(入寂)하였다. 세속의 나이 89세이다. 지눌은 한족(漢族)의 후손으로 성은 박씨로 하였다.
원이 고려를 멸망시키다.
고려가 건국이래 군사조직을 승군으로 하여 일반군사들은 유명무실하였었다. 고경종의 승군혁파로 무관조직을 만들어 무사를 양성하였다. 이 무사들은 북방에 살던 대진 족과 여진족 출신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왕명보다는 권세 가에 충성을 하였고 차츰 사병화가 되었다. 국가의 근간인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중국의 북방에서는 여러 종족이 나라를 세웠다가 망하는 역사가 반복하고 있었다. 그중 몽골 족이 세운 원(元)나라는 고려의 기회주의에 분노하여 대군(大軍)을 보내 고려를 멸망시켰다. 고려가 송(宋)에 치우쳐 원나라가 요구한 사서(史書)를 보내지 않고 묵살한 사건이 있었다. 고려 시조 도종의 잘못된 유훈이 결국에는 고려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북방의 여러 종족들의 원한을 품게 하였고 중국도 좌시 하지 않는 중대한 문제였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옛 영토가 고구려의 후손들과 여러 종족들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나라도 이 문제에 대해 고려의 해명을 듣고 싶었으나 묵살한 것이다. 원의 대군은 순식간에 쳐들어와 고려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도읍인 한성을 점령하고 고려왕 효종(孝宗)을 붙잡아 참수하였다. 고려는 시조 도종이 건국하여 효종까지 32대 사백 삼년 동안 존속한 것이다. 원의 장수는 효종의 아들 왕주(王綢)를 왕으로 세웠다. 충선왕(忠宣王)이다. 그러나 원나라 황제가 보낸 원왕(元王)이 충선왕을 원나라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고려가 멸망 한 후 이 땅은 원의 속방(屬邦)이 되어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원왕(元王)들이 통치하였다. 명(明)에 의해 원(元)이 망하자 원 왕과 몽골 족들이 급히 도망쳐 몽골로 사라졌다. 이 때 그들의 사초를 가지고가 자세한 기록은 없다.
원이 망하고 고려를 재건하다.
현종(顯宗)은 여진족
원왕이 도망치자 고려의 벼슬아치들이 고려를 재건하고자 고려왕의 후손을 찾았다. 고려 왕건의 후손으로 찾은 것이 승려(僧侶) 지웅(志雄)으로 속명이 왕 신(王辛)이었다. 왕신을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현종(顯宗)이다. 현종이 왕이 되어 몽골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인재들을 과거를 불문하고 많이 등용하였다. 원나라 당시 원경(元京)에는 고려인은 물론 고려로 귀화하지 않고 함경도와 만주 등지에 남아 있던 여진족들이 모여들어 권문세가의 눈에 띄어 관리가 되겠다고 배회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이 망하자 고려의 한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때 이 인임도 한성으로 돌아와 관리로 등용되었고, 지위도 올라갔다.
현종을 만나보고 깜짝 놀랐다. 이 현종이 이 인임의 먼 일가로 조상이 여진족이었다. 지웅이 일찍이 출가하면서 자신이 왕건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하였고, 또 왕건의 후손으로 행동하고 다녔으며, 문서도 조작하여 지니고 있었다. 현종도 놀라 이 인임의 입을 막으려고 지위도 올려 대우하였다. 원이 망하고 명이 중국에 들어섰으나 북만주 일대에 명의 손길이 제대로 못 미쳐 무주공산이 되어 치안이 불안하자 일부 야심을 가진 자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무장하고 각 지방을 약탈하였다.
이 들 일부가 고려로 들어와 약탈 방화하여 현종의 조정이 개혁의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현종이 여진족의 후예임을 알고 더욱 현종의 고려를 깔보았고, 대규모로 침투하여 개성까지 쳐들어 왔다. 명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만주일대의 치안을 확보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종은 자신이 여진족이며 가짜 왕건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돌자, 이 인임의 짓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인임이 만주의 야인들과 내통하여 고려를 침입하여 현종을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하였다는 이유로 이 인임을 처형하였다.
이때 여진족 출신의 관리를 이 인임의 일당이라고 처형하였다. 조정의 중신들은 야인을 소탕하여 화근을 뿌리 뽑자며 만주에 출병할 것을 현종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력으론 역부족으로 탁상공론 일뿐이다. 남쪽에서는 고려 개국이래 하층계급으로 몰락한 한족과 남이족 등이 현종의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어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인임의 정변이후 이성계는 자신도 여진족이므로 현종의 숙청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성계는 현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불안한 이성계는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궁성에 잠입하여 현종을 시해하였다. 그리고 현종의 아들 왕양(王讓)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을 반대하던 최영을 비롯한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이 왕양이 순종(舜宗)이다.
왕건이 숨긴 역사의 현장을 가다.
한(漢)과 가락(伽洛)
한(漢)나라는 가락에 도읍 하여 이천 오 백 여 년 동안 존속한 나라로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왕국이다. 가락은 현 경주의 옛 이름이다. 시조(始祖) 한가야(漢伽倻)대왕은 이름이 림( )이다. 성은 수( )씨이다. 중국 대륙에서 문명을 떨쳤던 한족(漢族)의 하(河)나라가 서역의 서만(西蠻)족이 대거 침공하자 하(河)의 태군대왕(太君大王)은 싸움을 피하여 동진(東進)하였다. 따르는 한족(漢族)은 육십 여만 명으로 약 삼분의 일정도 였으나 일부는 만주에 남았고 또 일부는 함경도로 떨어져 나가 경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십 오륙 만명이었다. 경주를 가락으로 하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하의 태군 대왕이며 한의 시조이신 한가야 대왕이 중국에서 자신들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黃帝)이다.
여와가 바로 황제의 하 나라를 침공한 서만의 대왕이다. 이 여와 족의 후손 무왕이 주(周)나라를 개국한 것이다.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도 왜곡 조작한 것이다. 경지 대왕(擎摯大王)은 고려 도종(왕건)이 술수(術數)를 써 왕사(王寺)에서 살해되었다.(왕사는 현 불국사이다) 경지 대왕 능은 대구 불노동 고분군(古墳群) 안에 있다. 문무 대왕 능은 현 김유신 능으로 되어 있다. 김유신은 대진의 극명왕의 동생으로 문무대왕을 진천으로 유인하여 시해(弑害)를 하게 한 자이다. 현 진천 태령산 밑의 김유신 생가로 되어 있는 곳이 문무 대왕이 시해 당한 곳이다.
문무 대왕의 이름은 태( 太)이다. 문무대왕은 대웅(大熊)의 진흥왕(眞興王)이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물리치고 전주까지 추격하여 진흥왕을 죽이고 전주를 함락하고 영토로 삼았다. 진흥왕의 아들 개루왕(蓋屢王)이 다시 한(漢)을 공격하자 문무대왕이 반격하여 섬멸하였다. 이에 놀란 대웅의 신하들이 반기를 들자 개루는 일본으로 도망하였다.일본으로 도망간 개루는 와신상담 끝에 재기하여 일본의 왕이 되었다.이 개루가 일본의 시조라고 불리 우는 초대 천황이다.
이성계의 순종
순종은 명목상의 임금으로 이성계가 모든 권력을 갖고 왕권을 행사하였다. 이성계는 순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사실상의 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였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군대를 보내 진정시켰고, 원왕 조정의 신료(臣僚)들과 대소 사찰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였다. 이러한 이성계의 전횡(專橫)에 불만을 품은 불교의 선승들과 정몽주를 비롯한 문신들이 순종에게 이성계를 조정에서 내보내어 왕권을 회복하라고 주청(奏請)하였다.순종이 정몽주에게 은밀히 밀서를 보내어 이성계를 체포하여 일당을 숙청하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앞장서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성계에게 밀고되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성계는 정몽주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얼마 후 순종을 살해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명나라에 정도전을 보내 이성계가 중국 당나라의 변방인 신라의 후손이며, 고려가 이미 왕씨가 절손 되어 망하였으므로, 고려의 온 백성과 신민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고려이전의 옛 사서를 상고하니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으므로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고, 조선는 대대로 중국의 속방으로 사대(事大)하고, 중국황제의 신민(臣民)으로서 조공(朝貢)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후예이다.
이성계는 동진(東晋)의 여진족으로서 함흥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성계의 선조 들은 동진의 도읍에서 살았으나, 이성계의 조부가 도읍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함흥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이웃과 불화가 생겨 오랜 다툼 끝에 이웃을 죽이게 되자 만주로 도망쳤다. 홀로 남은 이성계의 아버지는 이웃들과 왕래를 하지 않고 외롭게 살다가 부인이 이성계를 낳고 일년도 안되어 죽자 어린 이성계를 데리고 만주로 들어가 이곳 저곳을 방황하다가 원의 수도에 이르러 먼 일가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원이 망하자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는 고려로 들어가기로 하고 원경(元京)을 떠났다. 가는 도중 이성계의 아버지가 급환(急患)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을 염(殮)할 사이도 없이 도적 떼가 들이닥쳐 이성계를 비롯한 일행을 잡아 떠났다. 도적들은 사람을 붙들어 노예로 파는 자들이었다. 이 도적들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이성계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시신은 없어진 뒤였다.고려로 돌아와 관리가 되어 권력의 중심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던 이성계가 드디어 조선을 개국한 것이다.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인 것이다.
이성계의 혈통에는 정신질환이 유전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유전되어 오는 병이 있었다. 정신병과 간질로 장남이 이것으로 죽었고 차남도 이 증세가 있었으나 심한 것은 아니다.태조는 태종을 후계자로 정하고 모든 정사를 태종의 자리를 굳건히 하는데 힘썼다. 태조의 개국과정을 미화하고 고려의 혼란과 고려왕들의 문란하고 퇴폐한 생활로 조작하여 고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조작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방이 되어 몽골 족의 지배를 받은 것을 숨겼다. 고려시조 도종의 유훈을 조작하여 진실을 숨겼다. 고려가 불교국가로 승려들이 집권한 사실도 없애고 고려이전의 역사를 중국의 사서들로 위조하기도 하였다.
정도전을 토사구팽 하다.
태조는 오랜 동안 자신을 도운 정도전을 의심하였다. 정도전이 태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태조의 남모를 비밀을 없애고 사실을 왜곡하여 조작하고 개국을 도운 일등공신이지만 태종이 정도전을 신하로 부리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에겐 정도전이 걸림돌인 것이다. 이러할 때에 태조의 비와 태종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사소한 의견이 서로 오해를 한 것이다.
이 오해가 증폭되어 태조의 침실까지 이르자 태조는 이것을 이용하여 한성을 나왔다. 개국 공신인 충복들로 하여금 정도전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자신의 왕비와 왕자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이 무서운 살육현장을 태종은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고 아버지 태조의 잔인하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태종은 역사의 무서움을 알았고 왕권에 걸림돌이라면 자신의 자식도 서슴없이 죽여야 된다는 태조의 무정(無情)에 가슴아팠다.
양녕의 유전병
이것이 태종의 가슴에 못이 박혔고 훗날 양녕과 효녕을 살려둔 계기 가 되었다. 양녕과 효녕이 정신질환이 유전되어 발병되곤 하였지만 심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왕위에 올라 통치하기엔 적합치 않아 양녕을 폐 세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았고 이어 선위하여 세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세종의 자식들에게는 다행하게도 유전병이 없었다.
노산군 에게도 유전병이.
그러나 장자인 문종의 아들 즉 노산군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정신병이 유전되어 있었다. 상심한 세종은 노산군을 인적이 드문 궁궐 한편에 유페 하여 놓고 치료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또한 극비로 함구령을 내려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세종의 각별한 신임과 비밀임무를 수행한 어릴 적부터 수학동기 김문기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
김종서의 시기
세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김종서는 천성이 시기심이 많아 세종의 측근인 김문기를 질투하여 모함을 세종과 문종에게 하였다. 김문기는 조정의 관직을 대부분 의정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이는 세종의 명으로 의정부에 적을 두되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세종의 밀명을 받아 수행하며 수시로 세종과 독대 하여 토론하였다. 이 밀명은 고려조와 고려조이전의 역사 왜곡과 중국 사서들과의 관계 등을 연구하고 현지를 답사하는 일이었다. 세종과의 관계를 눈여겨본 김종서는 김문기를모함하였으나 세종이 묵살하자 내심으로 원한을 산 것이다.
이어 문종에게도 김종서는 김문기를 모함하여 지방에 한직으로 보낼 것을 간하였다. 문종은 세종과 김문기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김문기가 권력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인 것을 세종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문종의 실수
그러나 문종은 김종서의 집요한 건의에 김문기를 찾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이 간곡하게 내린 유언인 신하를 믿되 속까지 믿지 말며 어려운 일은 김문기와 상의하되 속마음을 말하지 말라하였었던 세종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유언을 잊고 김종서를 신뢰하여 마침내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문종이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세종이 말한 속마음이란 바로 노산군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세종은 노산군을 치료하여 문종의 대를 잇게 하려는 원념(願念)이었고, 노산군의 심신상태(心身狀態)를 신하들이 알게되면 종사(宗社)가 위태롭기에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노산군의 신병(身病)을 문종은 김종서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문종을 김종서가 독살하다.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김종서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문종을 독살한 것이다. 그리고 노산군을 자신의 감시 하에 두고 세종의 아들들을 이간하는 공작을 단행하여 안평대군을 휘하에 두었다. 수양대군을 비롯한 대군만 살해하면 김종서의 나라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은 이성계의 조선을 구한 것이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아들로 대단한 효자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실행하였고 더구나 왕위를 넘보거나 왕권에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문종을 도와 문종의 왕권 유지를 돕고있었으나 문종이 갑자기 죽고 김종서가 문종의 유시를 빌미 삼아 권력을 쥐고 자신을 비롯한 종친들의 대궐 출입을 막으며 안평대군과 자신을 이간(離間)하여 불화를 낳게 하자 종사의 앞날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종서를 찾아가 살해하고 그 일당을 잡아 처형한 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김종서의 일당으로 체포된 자 중에 문종의 환관으로 김종서에게 포섭되어 내통하고 있던 자를 국문하자 뜻밖에도 문종의 독살이 밝혀 진 것이다. 수양대군이 이 사실을 함구하게 한 다음 여러 가지고민 끝에 김종서도 죽였고 문종의 능까지 조성되어 있어 이 사실을 공표 한다면 왕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심하고 비밀로 하였다.
노산군이 자살하다.
김문기는 노산군이 정신질환에 간질까지 있어 극비리에 치료와 요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은 백관들의 조회에서 노산군이 아직 어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니 자신이 노산군을 대리하여 정사를 할 것이며 노산군이 열 여섯 살이 되는 병자년에 왕위에 올라 문종의 대를 잇게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백관이 환영하였다. 그러나 노산군의 차도가 나아지기는커녕 병이 악화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노산군을 친자식같이 정성을 다해 돌봤으나 애쓴 보람도 없게 되었다.
노산군이 시중드는 자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목을 메어 자살한 것이다. 수양대군의 놀람은 이만 저만 아니었으나 이 모든 것을 극비로 하여 심복인 홍윤성에게 노산군의 시신을 영월로 이송하여 장사 지내었다. 김문기의 역사가 천도임을 알리려던 계획은 노산군 복위사건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대소 신료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김문기도 이 사실을 모르고 수양대군이 병자년이 되어 봄이 다되도록 조회도 열지 않고 노산군 왕위 문제에 함구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궁내에 돌아다니고 있어 수양대군에게 만나 줄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김문기는 그 동안의 모든 사실을 박중림과 홍윤성에게 말하고 노산군의 왕위문제와 자신의 가문이 멸족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역사의 진실 즉 이 땅의 모든 역사가 조작되어 있고 세종과 자신이 이 사실을 덮으려고 모든 실록을 다시 꾸몄으며 전조(前朝)의 왕실이 비밀히 간직하였던 사서들을 함흥으로 가지고가 불태워 없앴다는 것을 조회에서 밝히겠다고 하였다. 이에 홍윤성은 침묵을 지키다가 유월 일일에 조회가 열릴 것이라고 하며 자신은 이 때 참여하지 않으며 자신의 역할이 후일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박중림으로부터 김문기의 말을 전해들은 박팽년과 성삼문은 자신들도 동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회가 열리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자 김문기는 다음 조회 때에 하기로 하고 모임을 갖지 말고 헤어질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지만 이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토론에 여념이 없던 차에 김질의 눈에 띄어 정창손과 음모(陰謀)하여 이들이 역모(逆謀)하였다고 수양대군에게 고발한 것이다. 6월2일 출근하던 김문기는 길에 서 기다리던 이개를 만나 집현전에서 박팽년 등이 체포되었음을 알았고 집으로 돌아와 맏손자 김효현에게 계훈으로 유언하고 충복인 막쇠와 함께 남의 눈에 띠지 않게 집에서 빠져나가도록 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밤늦게 서야 의금부 도사들이 들어 닥쳐 압송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박팽년이 옥사하자 김문기는 수양대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은 고문으로 피투성이인 김문기를 궁안 자신의 거처로 불러 술상을 차려 주고 사람을 물리 쳤다. 자신의 아버지 세종을 생각하여 김문기를 대우한 것이다. 수양은 김문기가 역모를 하였다는 고변을 믿지 않았다. 김문기는 세종과 자신이 하였던 역사의 진실을 모두 없앤 과정을 말하였다. 역사는 신의 것으로서 인간이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여 없애면 그 무서운 조상벌로 징벌한다고 구체적인 고사(古史)를 인용하여 말하였다.
수양대군의 반응은 세종의 비밀을 알고 있는 김문기 등을 처형하고. 부녀자의 절개는 지켜 주겠다고 하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수양대군은 한참 후에 김문기를 바라보며 자신도 어쩔 수없이 이 무서운 사실을 없애야 하므로 김문기 등을 처형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종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부녀자들에게는 수치스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이 때 수양대군에 의해 처형당한 박중림 성승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이휘 유응부 외에 끝까지 밝히지 않는 동료는 홍윤성과 최항이 있다. 홍윤성은 참가하지 않고 뒤처리를 하겠다고 하였으며 최항은 상중(喪中)으로 시골에 있었다.
그렇다면 김문기는 누구인가?
김문기(金文起)는 태조 7년 10월8일(戊寅年) 한양(漢陽) (현 중구 오장중학교 후문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보(金普)는 종부시(宗簿寺)관리로 자(字)는 김평우(金平瑀)이고, 할아버지 김목경(金牧卿)은 자(字)가 김 관기(金관其)이다. 김목경은 대대로 대구와 영천에서 살아오다가 가문에서 지켜오던 군위 석굴에서 수도하던 승려(僧侶) 지웅(志雄)을 만나 교우(交友)하였다. 지웅은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속명이 왕신(王辛)이었다. 원이 망하자 원왕과 관리들이 몽골로 급히 도망쳤다. 고려인들은 고려를 재건하고 왕으로 추대한 것이 지웅 즉 왕신 이었다.
왕신이 고려의 현종(顯宗)이다. 현종(顯宗,992~1031)은 고려 제8대왕으로 1009년으로부터 1031년까지 재위한 왕으로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었던 왕이다. 기록상 현종은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이다. 아버지는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인 태조의 여덟 째 아들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대종 왕욱의 딸 황보씨로-헌정왕후(獻貞王后: 孝肅太后) 둘 사이의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났다. 목종이 병약하여,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현종을 죽이려고 애를 썼다.
그들에 의해 억지로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우거하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하여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현종은 원정왕후 김씨를 비롯한 13명의 부인에게서 5남 8녀를 얻는다. 이중원성왕후 김시와 원혜왕후 김씨는 나중의 제9대 10대, 11대의 왕인 덕종, 정종, 문종을 낳았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1018년(현종 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 (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귀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현종의 대 거란정책은 거란 의 제 2차 침입(1010년)과 제 3차 침입(1018년)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제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江東) 6주의 반란을 요구하여 제3차 침입을 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하였고 퇴각하다 강감찬(姜邯贊)에게 귀주(龜州)에서 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하여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고려는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현종은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세로 생을 마감한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조선 왕조실록 초기 왕조에 등장하는 김문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종 18년 <종사랑 예문 검열(從仕郞藝文檢閱) 신(臣) 김문기(金文起)>라는 글이 춘추관 보고서에 처음 보인다. 태종에 의해 스카웃된 문기가 이 해에 첫 관직에 발령난 기록이다.
*세종 12년 김문기(金文起) 대교(待敎)로 삼다.
*세종 13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김문기를 보내어 《태조실록(太祖實錄)》․《공정실록(恭靖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을 충주 사고(忠州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
* 세종 18년 김문기(金文起)를 좌헌납(左獻納)으로, 민효열(閔孝悅)을 우헌납(右獻納)으로, 이종검(李宗儉)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삼았다.
*세종 19년 김문기(金文起)로 사간원 좌헌납을, 이사검(李思儉)으로 경상좌도 도절제사 겸 판울산부사(判蔚山府事)를 삼았다. 유수강(柳守剛)을 의정부에서 사연(賜宴)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이 잔치에 기생들이 여러 상신(相臣)의 좌우에 벌려 앉으니, 영의정 황희(黃喜)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고,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에게 이르기를, ꡒ공연(公宴)에서 기생들이 좌우에 벌려 앉는 것은 예전에도 이런 예(例)가 없었으니, 예조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ꡓ
하였다.
*세종23 앞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유의손(柳義孫)․응교(應敎) 김문(金汶)․경창부 소윤(慶昌府少尹) 김문기(金文起) 등이 문과의 한성시(漢城試)를 뽑을 때, 거자(擧子) 두 사람이 같은 성명(姓名)을 가졌었다. 의손(義孫) 등이 그 거취를 잃어 아비의 이름을 잘못 쓴데다가 기타 분수(分數)를 잘못 계산한 것도 몇 사람이나 있게 하였으므로, 유사(攸司)에 내려 이를 핵실(劾實)하게 하였다.
*세종24 의정부와 육조(六曹)에서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와 예조 좌랑 박적선(朴積善)을 보내어 하전(賀箋)을 올리고 이내 안장 갖춘 말과 옷의 겉감과 안집을 바쳤다.
*세종26 의정부에서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세종26 유수강(柳守剛)을 의정부에서 사연(賜宴)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이 잔치에 기생들이 여러 상신(相臣)의 좌우에 벌려 앉으니, 영의정 황희(黃喜)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고,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에게 이르기를, ꡒ공연(公宴)에서 기생들이 좌우에 벌려 앉는 것은 예전에도 이런 예(例)가 없었으니, 예조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ꡓ 하였다.
유수강(柳守剛)을 의정부에서 사연(賜宴)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이 잔치에 기생들이 여러 상신(相臣)의 좌우에 벌려 앉으니, 영의정 황희(黃喜)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고,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에게 이르기를, ꡒ공연(公宴)에서 기생들이 좌우에 벌려 앉는 것은 예전에도 이런 예(例)가 없었으니, 예조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ꡓ하였다. 유수강(柳守剛)을 의정부에서 사연(賜宴)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이 잔치에 기생들이 여러 상신(相臣)의 좌우에 벌려 앉으니, 영의정 황희(黃喜)가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고, 사인(舍人) 김문기(金文起)에게 이르기를, ꡒ공연(公宴)에서 기생들이 좌우에 벌려 앉는 것은 예전에도 이런 예(例)가 없었으니, 예조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라.ꡓ 하였다.
*동년 봉상시 윤(奉常寺尹) 김문기(金文起)를 평안도에 보내어 산양회(山羊會)에 도적이 들어온 상황과 지위원군사(知謂原郡事)가 산양회 만호(萬戶) 등과 군기(軍機)를 잃어 버린 죄를 핵실하게 하고, 이어 문기에게 하교(下敎)하기를, ꡒ금년에 적(賊)이 두 번이나 침입하였는데 한번도 그들과 싸우지 못한 것은 매우 한스럽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이 상륙(上陸)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도주(逃走)하였으니, 전번의 일에 비교하면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 적정(賊情)을 정탐한 사람들의 공로의 등급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ꡓ 고 하였다.
*동년 평안도 경차관(敬差官) 김문기(金文起)가 치계(馳啓)하기를, ꡒ신(臣)이 이산(理山)에 이르러 친히 접전(接戰)한 곳을 살펴보니, 그 군사를 숨겨 두었던 상태가 매우 소활(?闊)한 구석이 많았으며, 우리 군대가 웅거하여 있던 곳은 높고 험하거나 초목이 무성한 곳이 아니어서 싸움하기에 매우 편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장(邊將)이 또 적(賊)을 유인하여 육지 깊숙히 끌어들이지 않고 적이 겨우 육지에 오르자마자 먼저 이쪽에서 급히 공격하였기 때문에 섬멸시키지 못하고 적으로 하여금 도망쳐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또 복병(伏兵)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화포(火砲)를 방사(放射)하여서 모두 군기(軍機)를 잃고 다 무찔러 죽이거나 잡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적선(賊船) 4척이 침몰하고 적병도 죽었으며, 나머지 적병들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패하여 달아났으니, 적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공로가 꽤 현저합니다. 그러나, 공과 과실(過失)이 서로 같으므로 그들의 공로를 사정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엎드려 상지(上旨)를 기다립니다.ꡓ 고 하니, 유서(諭書)를 내려 회답하기를, ꡒ적을 방어한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賞罰)은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정하겠으니, 각 사람의 공과 과실을 자세하게 갖추어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ꡓ 하였다. 경차관 김문기(金文起)가 산양회(山羊會) 추파 구자(楸坡口子)의 적정 정탐인(偵探人)의 공로의 등급을 논평하여 보고하니, 즉시 병조에 전지하기를, ꡒ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고자 하니, 산양회 만호(萬戶) 박유(朴츝)와 지리산 군사(智異山郡事) 정윤덕(鄭允德)․군졸(軍卒) 박숭무(朴崇武)․노전(盧典)․김청(金淸)․안이인(安以仁), 사용(司勇)․김유생(金有生)․안오상(安五常)․김춘량(金春梁)․백운(白雲)․송세우(宋世雨)․김을생(金乙生)의 공로를 구분해 계달(啓達)하라.ꡓ 고 하였다.
* 세종27 전 수 봉상시 윤(守奉常寺尹) 김문기(金文起)가 계모의 상(喪)을 만나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가 추천하여 도진무(都鎭撫)로 삼으니, 문기가 상서(上書)하기를, ꡒ신의 어미가 일찍 죽으오매 나이 열 세 살 때부터 계모에게 자랐사오니, 은의(恩義)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신은 독자이므로 상사(喪事)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먼 지방으로 부임하오면 실로 마음이 아프고 민망스럽거늘, 하물며, 신은 본디 옹졸하고 약하여 무사(武事)에 익숙하지 못하오니, 신의 임명을 바꾸옵기를 바라옵니다.ꡓ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에게 안마(鞍馬)․활․화살․옷 1습(襲)과 갓․신을,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起)에게도 옷 1습과 활․화살 등을 내려 주고, 좌승지 유의손(柳義孫)에게 명하여 모두 고기를 먹도록 권하고는 보내게 하였다.
*세종29 이조 판서(吏曹判書)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ꡒ함길도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基)는 평소에 이질(痢疾)을 앓으니 오래 군무(軍務)를 맡기기에는 마땅하지 않사옵니다.ꡓ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황보공(皇甫恭)으로써 체대하게 하였다.
1. 집현전(集賢殿)과 문사(文士)
【 집현전은 세종이 역사왜곡과 자신의 후손들이 왕권을 흔들림 없이 영속화하기 위하여 만든 기관으로 훈민정음과 고려사를 비롯한 실록과 지리지, 오례의 등은
세종의 비밀 조직인 환관들이 사초를 만들었고, 이 만든 사초를 형식적으로 중국의 사서들과 비교하여 세종에게 추인을 받았던 세종의 심복 기관입니다
병자년 6월2일 집현전에서 일곱 분의 문사들이 전날(6월1일)부터 밤새워 가며 세종의 역사조작과 노산군의 왕위 계승문제 등을 토론하고 있었는데 출근하던 김질이 문밖에서 엿 듣고 정창손에게 달려가 그와 함께 모의한 것이 소위 노산군 복위 사건입니다
그러나 세조는 이미 이것이 허위 즉 참소(讒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조가 비밀이 있었기에 이것을 크게 이용한 것입니다
6월2일 아침 집현전에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이휘, 유성원,
유응부 선생 등이 체포되었고,
유성원 선생은 이 자리에서 저항하다가 자살하셨습니다】
집현전은 세종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정종 1년3월13일 조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집현전을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다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集賢殿)에 모이게 하였다. 대사헌 조박(趙璞)이 상언(上言)하였다.
ꡒ집현전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회복하여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예문 교서(藝文校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되, 문신 4품(品) 이상으로서 관각(館閣)의 직책을 띤 자는 날을 번갈아 모여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케 하소서.ꡓ
임금이 심히 허락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대사헌(大司憲) 조박(趙璞), 중추(中樞) 권근(權近)․이첨(李詹)으로 제조관(提調官)을 삼고, 문신 5품(品) 이하로 교리(校理)에 충당하고, 7품(品) 이하로 설서(說書)․정자(正字)에 충당하였다.
세종 2년3월16일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직전(直殿)․직각(直閣)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官司)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 집현전에서 이들이 체포되었기에 집현전관원들이 전부 끌려가 형벌을 받았으며 또한 집현전이 폐쇠가 되었고, 남효온을 앞세운 육신전을 보고 후세의 역사학자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보지 못하였기에 집현전 학사들의 쿠데타 운운하는 망발을 지금까지 하는 것이다.】
세조 2년 6월 2일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죄줄 수 없다고 하다 어떤 사람이 고(告)하기를,
ꡒ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두려워하는 빛이 있으니,
반드시 음모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ꡓ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이런 때에 어느 사람인들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더구나 양성지로 말하면
온 관사(官司)의 사람들이 잡혀갔으니,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느냐?
양성지는 나를 따른 지 오래이니, 반드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ꡓ 하였다.
구치관(具致寬)이 말하기를,
ꡒ양성지에게 만약 다른 마음이 있었다면, 근일에 윤대(輪對)할 적에 그가 어찌
밀책(密策)을 즐겨 올렸겠습니까?ꡓ 하니, 신숙주(申叔舟) 등이 말하기를,
ꡒ양성지가 유성원(柳誠源) 등과 혐의가 져 있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알고 있는 터입니다.ꡓ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나도 또한 알고 있다.ꡓ 하고, 또 말하기를,
ꡒ이 일에 대하여서는 내 이미 실정을 알았다. 옛날에 방현령(房玄齡)이 태종(太宗)을 배반하였다고 고발한 자가 있었을 때에 즉시 고발한 자의 목을 베었었다. 지금은 말하는 자를 막을까 염려하여 다만 <그 말을> 물리칠 뿐이요, 죄줄 수는 없다.ꡓ 하고, 드디어 구치관을 시켜 양성지를 불러 천천히 그 일을 말해 주고 두려워하지 말게 하니, 양성지가 명을 받고 감격하였다 .
【조선 왕조 실록에서 이 양성지 만이 삼국사기라고 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세종과 사관(史官)들은 삼국사 라고 하였지 삼국사기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삼국의 역사를 실종시켰고 왜곡 조작한 것을 세종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관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정도전을 토사 구팽 하였으며 김종서의 야욕은 계유정난으로 끝났고,
세조는 열 분의 문사들을 처형 하므로서 이성계로부터 이방원 그리고 이도의 근심을 종결시켰으나 역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神)들의 것이므로 천상의 재앙은 피할 수 없어 이도의 가문에 내린 조상벌(祖上罰)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조선 판 분서 갱유(焚書坑儒)로 세종이 김문기로 하여금 한반도의 고대 사서들을 불태워 없앤 것이 분서(焚書)이고, 세조가 이 김문기를 비롯한 문사들을
처형한 것이 갱유(坑儒)입니다. 역사를 문자(文字)로 회롱 한자는 공자를 시작으로 현대에까지 예외 없이 조상 벌로 다스린다는 것은 이 미 사서(史書)를 통하여 알고 있을 것입니다. 】
세조 2년6월6일 명하기를,
ꡒ집현전(集賢殿)을 파하고, 경연(經筵)을 정지하며, 거기에
소장(所藏)하였던 서책(書冊)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하라.ꡓ 하였다.
1. 병자년의 진상(眞相)
문종이 죽은 후 왕위 계승권 자인 노산군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김종서는 제일단계로 세종의 심복이며 서로 사갈시(蛇蝎視)하던 김문기를 함경도관찰사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미 김문기 등이 완성하여 놓은 세종실록을 자신이 유리하도록 조작하고 김문기를 음해(陰害)하는 내용을 집어넣었다 세종실록을 왜곡한 것이다. 제 이 단계로 왕자들을 이간(離間)시켰다. 세종은 신하들을 마음속으로 믿지 않았다 특히 유년시절부터 같이 수학(修學)하며,
왕실의 비밀을 털어놓고 세종의 비밀을 말없이 수행한 평생동안 친구였던 김문기에게도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세종은 자신의 아들들인 수양대군 등에게 철저하게 교육한 것이 장자인 문종을 도우라고 하였다 신하들을 겉으로는 신뢰하되 마음속까지 신뢰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믿을 것은 오직 핏줄뿐이라고 훈육하였다. 김종서의 뜻대로 걸려든 것이 안평대군 이용이었다. 이 당시 대소 신하들이 그리고 집현전의 관원들까지 김종서를 미워하였으며, 김종서가 왕위에 오를 것을 걱정하였다. 김종서의 야욕(野慾)은 수양대군의 용단(勇斷)으로 허물어 졌다. 수양대군의 그림자에는 항상 신숙주가 있었다. 신숙주가 얼마나 뛰어난 지략가 인가는 한명회와 권람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숙주가 이들 또한 조종하고 있었다
또한 실록으로 사실을 조작하였으니 신숙주의 교활함은 따라갈 자가 없다. 계유정난으로 세종이 우려하였던 신하들의 반란은 사전 차단하였으나 수양대군은 꿈에라도 왕위를 탐내지 않았다 더구나 어린 조카 노산 군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병자년 6월2일 상황까지도 그 후도 마찬가지이다. 수양대군은 왕위를 손위(遜位) 받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산군의 왕위를 찬탈(簒奪)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노산군을 위해(危害)하거나 죽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걱정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산군은 불행하게도 왕위를 수행할 수 없는 비 정상인이었다. 그런 노산군이 병자년 2월 초순에 자살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에는 실제로 왕이 아닌 시나리오 만 있는 왕이 둘이다.
정종과 단종(후세 숙종이 노산군 일기를 조작하였다)이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정략적으로 사서를 조작하여 왕족의 비밀을 은폐하고 승계한 왕의 업적으로 만든 것이다. 정종실록은 태종을 위해서 만들었고, 노산군 일기는 세조를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두 사람이 공통된 병으로 정상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계 가계에 내려오는 유전병이 있다는 점이다. 이성계의 가문이 철저하게 숨겼던 유전병은 정신병인 자폐증과 간질 그리고 정박아이다. 정종도 양녕도 효녕도 그리고 노산군도 이 유전병의 환자들이었다. 그리고 세조의 아들도 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세종의 심복이신 김문기도 이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하니 왕들의 비밀은 무섭기조차 한 것이다.
김문기는 노산군을 한번도 본적 이 없었다하니 다른 신하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은 정례 조회(朝會)에서 노산군이 만 16세가 되면 보위에 오르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 당시의 신하들도 찬성하였고 모든 정사는 수양대군이 왕으로 대행(代行)하였다. 병자년에 접어들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노산군의 건강이상과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소리가 조금씩 궁중 안에서 들리기 시작 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병자년이 되어 조회를 한번도 열지 않아 의혹이 있던 차 6월 1일 조회가 있다는 관보가 있었다 이에 김문기는 이 조회 때 이 땅에 있었던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고려를 세운 도종(道宗)이 이 땅의 역사를 중국의 사서(史書)를 이용하여 왜곡하고 조작하며 또 사실(史實)을 중국의 사실과 부합하도록 만들었고 모든 유물(遺物)을 파괴하고 훼손시켰던 것이다. 이를 다시 후세에 고려의 김부식이 위사(僞史)인 삼국사를 편찬하였고, 일연이란 중이 불교의 설화를 이용하여 삼국유사라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요서를(妖書)를 지어 놓은 것이다. 이 역사를 바로 잡아 천도(天道)를 행하여야 할 태조 이성계가 이것을 다시 기정 사실화하여 고려사를 정도전에게 비밀히 찬술케 하였다.
그리고 태종도 가세하였고 세종은 아예 태조 이성계위의 모든 역사를 은폐시키려고 공자의 유학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도(道) 즉 유교의 핵심이념은 위선(僞善)과 역사왜곡으로, 공자는 춘추를 필삭(筆削)한 것이다. 말이 좋아 필삭 이지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한 것이다. 공자의 이념 즉 필삭은 천자를 위하여서는 역사를 가감(加減)또는 손익(損益)해도 된다는 것으로, 이것이 후세에 이어 내려와 사가(史家)들이 거리낌없이 역사를 왜곡하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세종이 이 역사의 사기꾼 공자를 꿰뚫어 본 것이다. 유교가 위선(僞善)임을 알고 있었지만, 역사를 숨기는 데는 유교 밖에 없으므로 유교를 장려한 것이다.
세종이 고려 왕실에 비장(秘藏)되었던 도종 이전의 사서와 고려의 사서 그리고 고려왕들의 실록을 김문기에게 비밀리에 명을 내려 함경도 자신의 선산에서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이러한 사실을 수양대군에게 말한다는 것은 곧 멸문지화(滅門之禍)임을 알고 있었지만 박중림을 비롯한 일곱 분의 비장한 결의는 뜻을 굽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6월 1일 열리기로 한 조회가 돌연 무기 연기되어 모두 허탈하였다. 김문기가 이들을 위로하며 다음 기회를 보자고 하며 달래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의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이휘, 유응부, 유성원등은 집현전에 모여 밤새워 토론하였고 이튿날 아침 일찍 출근하던 김질이 집현전 문밖에서 노산군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 그의 장인과 모의하여 역모로 고변한 것이다.
조선을 개국한 것은 이성계이지만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은 세종이다. 그러나 세종은 뒷마무리를 끝내지 못하였다. 이성계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공유한 정도전을 태조가 무참하게 살해한 것을 알고 있었던 세종은 김문기를 없애기로 결심하였다. 성삼문을 이용하기로 하고, 김문기가 비록을 알고 있다고 은근히 말하였다. 김문기는 찾아온 성삼문이 세종이 말한 것을 듣고 전혀 아는 바 없다고 시치미를 땠다. 세종은 다시 박중림에게 같은 말을 하여 김문기를 잡을 계략이었으나, 김문기가 입을 굳게 다무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세조는 조선을 재 창업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계유정난으로 김종서를 죽이지 않았다면 조선은 망하고 김종서의 나라가 될 뻔한 것이다.
세조에게 김문기는 세종이 은폐한 모든 과거 역사를 진상을 밝혀 진실로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상의 무서운 재앙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세종의 비밀을 알고 있는 김문기와 제자들을 처형하였고, 모든 책들을 징발하여 불태워 없앴다. 세종을 대신하여 역사 조작의 뒷마무리를 한 것이다. 세조는 대단한 효자로 아버지 세종의 뜻에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다. 세조가 불교에 심취하고 사리분신에 광적일 정도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세조 자신이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세종의 언관들은 몇 마디라도 하였지마는, 세조의 언관들은 몇마디는 커녕 하례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의 권력은 대단한 것이다. 일상의 정사는 언관이 소위 바른말을 하도록 하였지마는, 그러나 왕권이나 왕위에 흠이 가는 일에는 절대로 왕이 마음대로 하였다. 모든 신민 들에게 침묵이 강요된 것이다. 세조의 금언령은 무서웠다 노산군과 김문기 등을 후세까지 거론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공자를 존경하는 척 하였지 마는, 중대한 결정을 할 때는 공자를 앞세워 핑계를 댔다. 고려사를 조작할 때도 그러하였고, 며느리 둘을 내 쫒을 때도 그러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고려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 고려사는 고려를 완전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신(현종)을 공민왕으로 왕신의 승명을 신돈으로 조작한 것이다. (이성계 태조 총서- 태조 이성계 선대의 (위조된)가계. 태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 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하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성품이 호방(豪放)하여 사방(四方)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
김문기(金文起)는 태조 7년10월8일(戊寅年) 한양(漢陽) (현 중구 오장중학교 후문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보(金普)는 종부시(宗簿寺)관리로 자(字)는 김평우(金平瑀)이고, 할아버지 김목경(金牧卿)은 자(字)가 김관기(金관其)이다. 김목경은 대대로 대구와 영천에서 살아오다가 가문에서 지켜오던 군위 석굴에서 수도하던 승려(僧侶) 지웅(志雄)을 만나 교우(交友)하였다.고려가 망하여 원(元)의 속방(屬方)이 된지 칠 십여 년 동안 고려 왕족들은 몽골인들의 눈을 피해 승려가 되어 각지를 떠돌고 있었다.
지웅도 고려 왕족의 후손으로 속명이 왕신(王辛)이었다.원이 망하자 원왕과 관리들이 몽골로 급히 도망쳤다. 고려인들은 고려를 재건하고 왕으로 추대한 것이 지웅 즉 왕신이었다. 왕신이 고려의 현종(顯宗)이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고려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 고려사는 고려를 완전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신(현종)을 공민왕으로 왕신의 승명을 신돈으로 조작한 것이다. 현종의 부름으로 한양에 온 김목경은 전적(典籍)관리로 있었다. 현종의 공신들이 실정(失政)을 계속하자 벼슬에 뜻을 버린 김목경은 야인으로 돌아와 칩거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김목경을 불러 개혁에 동참을 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김목경은 태조 이성계를 도운 것이다. 이런 배경의 손자 김문기가 태종의 눈에 들어 충녕을 보필하고자 직접 뽑은 것이다. 충녕은 정축생(丁丑生)으로 김문기보다 한 살 위였다. 같이 뽑힌 개국일등공신 조준의 손자는 병약하여 충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일찍 병사하였다. 김문기는 아명(兒名)이 생남(生男)이고 호(號)가 사선(士善)이다. 충녕이 왕위에 오르자 김문기에게 밀명(密命)을 내렸고, 밀명을 수행 중에 사용하던 이름이 사발(士發) 그리고 사철(士哲)이다.
국내에서는 사철을 사용하였고 중국 대륙에서는 사발을 사용하였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태종은 김문기를 불러 고려조에서 왕에게만 비밀히 전해지는 문서를 주며 연구하여 세종을 돕되 죽어서 까지 비밀을 지키라고 하였다. 이 비밀 문서는 고려를 만든 도종(道宗)이 사왕(嗣王)에게 몰래 건 내준 자신의 출생과 고려를 세운 비화를 적은 비록(秘錄)이었다. 도종은 고려사에서 조작한 태조 왕건(王建)을 말한다. 왕건은 대진족(大震族)으로 괴산의 작은 절(현 각림사) 주지인 도광이 하녀를 겁탈하여 낳은 사생아이다. 왕건이 도광의 고향 김천 직지사에서 성장하면서 학문을 익혔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물을 배우며 많은 승려들과 교우 하였다. 이때 승명을 도선이라고 스스로 지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서 왕건의 기록을 읽고 자신도 왕건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것이 후에 고려를 건국한 밑바탕이 되었다. 세종이 왕이 되었지만 일반적인 정사(政事)외에 무섭고도 무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태종도 손을 대보지도 못한 것으로 아들 세종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김문기를 어릴 때부터 세종의 심복으로 만들어 주었던 일뿐이었다. 태종도 세종도 무섭고도 무거웠던 짐이 바로 고대(古代)에서 전조(前朝)에 이르는 역사와 심지어는 태조와 자신들의 조상내력이었다. 고려의 도종이 중국의 사서(史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조국 대진(大震)을 배반하고 삼백여 년 전의 중국에 있었던 고구려를 왕건의 조국으로 하여 계승한다고 역사를 왜곡하여 놓았고, 이를 안 태조 이성계도 고려를 완전히 조작하여 놓았으니 이를 신하들이 알거나 중국의 명나라가 안다면 조선의 운명은 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땅이 과거 모두 제 역사를 간직하지 못하고 조작되어 있고 유물까지 훼손되고 멸실 시켜 놓았는데, 이를 복원하고 바로잡는 것은 모두의 공멸(共滅)을 뜻하므로 세종은 이 역사의 증거물을 없애는데 주력하였다. 조선이 영원히 살길은 경주의 역사를 완전하게 없애고 왕건이 이미 꾸며 놓은 중국에 있었던 유당 신라(有唐 新羅)의 역사로 하여 중국대륙을 신봉하는 길뿐이므로 사대(事大)하고 유학을 숭상을 하는 것이라고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은 결심하였다. 고려의 왕건이나 조선의 세종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바로 경주의 역사이다. 경주 역사가 중국에 알려 지면 대륙의 대군이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세종은 김문기에게 전조의 비록(秘錄)을 주어 연구하게 하고 중국의 사서(史書)를 비교하게 하였다. 세종의 평생동지 김문기에게 밀명(密命)을 내려 고대 각 왕조를 답사하여 사실 유무를 확인하고 사서의 조작과 위조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김문기는 한(漢)의 가락(伽洛)과 남이(南夷)의 웅천(熊川) 그리고 서라벌(徐羅伐)을 답사하였다. 또한 대웅(大熊)의 개주(開洲)도 조사하였다. 이어 대진(大震)의 마지막 도읍지인 금화(金化)를 답사하였다. 두만강 가의 대진의 도읍지인 금성(金城)도 조사하였고 동진(東晋)의 땅 함경도 일대를 조사하고 세종에게 복명 하였다. 다시 김문기에게 밀명을 내렸다. 중국으로 잠입하여 당(唐)나라 때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와 왜의 옛 땅을 조사하여 복명하라고 한 것이다.
동진의 함주(咸州)와 부여의 졸본(卒本)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그리고 신라의 동경(東京)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공주와 왜의 김해는 답사하지 못하였다. 세종이 만리장성을 넘지 말라는 특지(特旨)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도종이 중국에서 있었던 당과 고구려, 신라, 백제간에 있었던 대륙역사를 고려 왕건 당시의 한(漢)을 신라로 가락(伽洛)을 동경(현 경주)으로 하고, 남이(南夷)를 왜로 웅천(熊川)을 김해로 하였으며, 서라벌(徐羅伐)을 가야로 하였다. 대웅(大熊)을 백제로 개주(開洲)를 부여로 하였고, 대진(大震)을 고구려로 금성(의주)을 평양으로 금화(金化)를 철원으로 하였다. 동진(東晋)을 발해로 하였고 도읍지를 함주로 하였다. 세종이 김문기에게 건네준 비록(秘錄)은 고려의 실록과 한(漢)의 사서 그리고 대웅(大熊)의 기록 및 대진(大震)의 일부 기록 등이었다.
또 공평종(恭平宗)이 김부식에게 편찬토록 한 삼국사(三國史)와 삼국유사(三國遺事)그리고 고구려의 사서 등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에 있었던 나라로 왕건이 조작한 고구려의 사서가 있었다. 세종은 김문기에게 이 비장(秘藏)의 기록들을 연구하게 하고 현지를 직접 답사하게 하여 역사의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세종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경주의 신라가 한(漢)나라이며 시조가 황제(黃帝)라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수로의 혈통이 이미 문무왕릉 비문에 드러났듯이 ‘투후제천지윤7엽(秺侯祭天之胤7葉)’이라 하여 동이혈통인 소호금천씨의 후예 휴도왕(휴도왕)의 아들로 망국 후, 한무제때 표기장군이 된 김일제의 후손 왕망의 후예들이 후한 광무제에게 패망하고 유입된 사건으로 성립된 왕조를 신비의 6가야 알 사건으로 왜곡 변조된 역사를 지나 한(漢) 왕실의 역사로 잘못 오인한 결과였다. 투후는 한무제가 망하라의 모반사건을 사전에 탐지한 공로로 표기장군 김일제에게 내린 벼슬명으로 문무왕의 조서에도 수로왕이 자신의 15대조가 된다 했고, 삼국사기 김유신전 기록에는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 후예라 하여 김씨 성을 가졌다 하고, 김유신의 비(碑)에 소호씨의 자손이 곧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이며 수로는 신라와 동성(同姓)이라 했다.
전조(前朝)의 왕실에서 비전(秘傳)된 사서(史書)를 불태워라. 세종은 과거의 조작되고 왜곡된 모든 역사를 모두 없애기로 결심하고, 김문기에게 밀명을 내려 모든 사서들을 함경도로 밀송(密送)하여 불태워 없앴다. 태종은 환관(宦官)을 여진족(女眞族)에서 뽑아 왕명을 비밀리에 수행하는 조직을 만들었고, 이들을 세종에게 인계하여 전조(前朝)의 사초(史草)를 만들게 하였다.
세종은 고려사를 완결하여 놓고 이들에게 언어(言語)를 연구하게 하였다. 조선은 한(漢)족(가야)과 여진족(女眞族) 그리고 대진족(大震族)과 남이족(南夷族), 대웅족(大熊族)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백성들의 통합(統合)이다. 이 통합을 이루려면 언어 즉 말이 통하여야 한다는 것을 세종은 깨달았던 것이다. 고려가 이것을 못하였기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왕실과 백성이 이간(離間)되어 있어서 원(元)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사 백 년만에 멸망한 것이다. 세종은 드디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여진족의 말을 이용하여 여진족출신의 환관들이 만든 것이다.
세종의 조상은 동진(東晋)의 유민(遺民)이다. 동진을 발해(渤海)라고 왜곡하였지만 동진도 엄연히 중국의 역사가 아닌 이 땅의 역사이다. 요(遼)에게 망할 때까지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가 그들의 땅이었다. 동진의 백성을 여진족(女眞族)이라고 한다.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은 여진족으로 함경도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조상도 조작하고 미화하여 놓았으나 실록의 기록은 모두 거짓이다. 고려 도종이 이 땅에 있었던 나라들을 멸망시켜 놓고,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로 사서를 만든 것은 중국이 중화로 이 땅을 동이(東夷)로 여겼고, 무관심과 무지로 이 땅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이 알았으며 이들의 심복인 극소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김문기에 의해 삼국사와 삼국유사의 원본을 불태워 없애 지금은 없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거짓 인 것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유래(由來)를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조작된 내용으로 정사(正史)로 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논(論)하는 것은 왕건과 김부식 그리고 일연의 죄와 같다. 김문기는 조선 안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명나라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였다. 고려의 왕건은 남이의 도읍지 웅천의 지명을 김해(金海)라 하였고 남이국(南夷國)을 중국사서에 있는 왜(倭)로 하였다. 그리고 동쪽의 유구국을 일출(日出)하는 곳이라 하여 일본(日本)이라 이름하였다.
일본의 일본서기등 사서(史書)는 모두 위서(僞書)이다. [조선의 세조 이후 잠상(潛商)과 몰래 수집하여 가져간 삼국사, 삼국유사, 고려사, 삼국사기 등을 이용하여 일본의 역사를 위조한 것이다. 일본의 고대 종족은 대화(大和)족으로 유구국을 건국하여 내려 왔으나 힘이 미약한 소왕국 이었다. 일본에 남이부(南夷府) 남이가 유구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들었다. 유구에 남이부(南夷府)를 설치하고 남이의 왕자와 왕제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대웅의 개루왕이 한의 문무대왕에게 패하여 실권하고 유구로 망명하여 남이부에 의탁하고 세력을 키웠다. 기회를 엿보던 개루는 남이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남이부를 장악하고 유구국에 있는 한반도의 유민(流民)들을 통합하였다.
대진의 곤명이 문무대왕의 시해를 사주한 혐의로 실권하여 유구국으로 망명하여 오자 개루는 곤명과 담합하여 호의를 베풀던 유구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싸움도 재대로 하지 못한 유구왕은 유구의 먼 섬으로 도망하였다. 개루가 왕위에 올랐으나 곤명왕과 남이부의 반발이 커, 합의하기를 서로 왕위를 순번으로 하기로 하고 혼인으로 결속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명은 개루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개루의 정부는 유구의 역사를 은폐 조작하였다. 개루가 위서 일본서기가 말한 초대 천황이다. 일본의 이름도 고려 왕건이 부른 대로 일본국이라 하였다. 이후 조선이 역사를 중국역사로 조작한 것을 알고 이들도 조선의 위서들을 수집하여 일본의 역사를 대대로 조작하고 은폐하여 왔다.】
문종 1년11월22일
정분이 웅신진을 웅천현으로 하고 인민에게 관사를 지어 줄 것을 청하다. 정분(鄭?)이 아뢰기를, ꡒ지금 경상도 웅신진(熊神鎭) 거주민 40여 인의 장고(狀告)에 인하여 신이 몸소 친히 이 진(鎭)을 살펴보았더니, 내이포(乃而浦)에 항상 거주하는 왜인(倭人)뿐만 아니라 여러 섬의 객왜(客倭)도 폭주(輻輳)하여 환란(患亂)이 호홀(毫忽) 간에 달려 있습니다. 실로 요해지(要害地)인 까닭에 국가에서 진(鎭)을 설치하고 군대를 두어서 성원(聲援)으로 삼고, 군사를 엄하게 하여 위엄을 보이게 하니, 그 염려가 지극합니다. 그러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수령(守令)을 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이 관사(館舍)도 없이 다만 진군(鎭軍) 1백여 인만을 인솔하고 기울어져 무너진 초가집[草屋]에 기숙(寄宿)하니, 고단(孤單)하고 약함을 보이게 되므로, 도리어 왜인(倭人)들이 가볍게 보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생기게 할 뿐입니다.
그 곳의 주민은 전적으로 관에서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변이 생겨서 모이라고 호령(號令)하여도 보존하여 지키기가 어려우니, 국가에서 진을 설치한 본의(本意)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김해(金海)의 웅신(熊神)․완보(莞補)․천읍(川邑) 3현(縣)과 창원(昌原)의 산려(山餘) 3마을[里]은 모두 본읍과 큰 산이 막아서 스스로 하나의 경계를 이루었으니, 하나의 읍을 따로 설치할 만합니다. 청컨대 3현과 3마을을 합하여 하나의 현을 만들어서 웅천(熊川)이라 호칭하고, 첨절제사로 하여금 현감을 겸하게 하고 관사를 지어서 인민을 모아 보호하며, 군대를 엄하게 하여 굳게 지켜서 강한 것을 적에게 보여 주면 오랜 세월 동안의 아주 안전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ꡓ 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내려 정부(政府)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예종 1년6월29일
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는데, 《고려사(高麗史)》를 반포하는 일입니다. 만약 근대(近代)의 일이 있어서 유전(流傳)할 수 없다면, 지금 명(明)나라도 《원사(元史)》를 행하니, 어찌 그 이목(耳目)이 미칠 것을 헤아리겠습니까? 만약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삭제하고서 행하면 가할 것입니다. 비단 지경 안에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사략(史略)》과 같이 중국에 전하거나 일본에 전해도 또한 좋겠습니다.
숙종 8년7월11일
통신사(通信使) 윤지완(尹趾完) 등이 치계(馳啓)하기를,ꡒ사신(使臣) 일행(一行)이 지난달 18일에 길을 떠나 24일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주(島主)가 잔치를 베풀어 접대(接待)하고 별지(別紙) 1폭(幅)을 써서 보냈기 때문에, 그 글을 베껴서 성상께 보냅니다. 그 별폭(別幅) 가운데 의견을 말한 것이 무릇 다섯 조목으로서, 모두 일행(一行)의 뜻을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는데, 그 중 축전주(筑前州)에서 서적(書籍)을 잠상(潛商)한다는 한 가지 항목은 비록 실상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ꡓ하였다.
그 조목에 이르기를, ꡒ무신년․기유년 무렵에 우리 나라 축전주(筑前州)의 호민(豪民)이 배를 위장하여 귀국(貴國)과 몰래 통상(通商)하면서 금지한 물건들을 무역(貿易)하였는데, 그 무리가 수십 인이었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모두 책형(쾛刑)을 당하였고, 많은 수량의 가산(家産)은 몰수하여 관아의 창고로 운반하였는데, 그 가운데 귀국(貴國)의 서적이 또한 많았다고 합니다. 일찍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세상에 간행(刊行)하였었고, 또 듣건대 《여지지(輿地誌)》 및 《대전(大典)》 등의 책을 관아의 창고[官庫]에 보관하였다 하니, 이번 동도(東都)에 머물러 계실때 간혹 시강관(侍講官)으로 하여금 가서 여러 가지 의문을 증명(證明)하게 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사실대로 대답해 주시기를 바라며, 만약 그것이 성조(盛朝)의 국금(國禁)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부탁하는 바는 아닙니다.ꡓ하였다.
세조는 김문기의 진술에 의해 단군 기자 등의 조선이 가짜로 알고 단군을 기록한 책들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이로서 단군에 관한 책은 없다. 세조 3년5월26일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ꡒ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 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虱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ꡓ하였다.
예종 1년9월18일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ꡒ《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ꡓ 하였다.
성종 즉위년12월9일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ꡒ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ꡓ 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
한반도의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기록으로는 조선왕조실록만이 유일한 사서(史書)이다. 고려이전의 기록으로는 중국 사서를 이용하여 조작한 삼국사와 삼국유사가 있었지만 이것마저도 조선의 세종이 조작하고 또한 원본을 없앴고, 고려실록도 없앴으며, 고려사를 완전 조작하여 만들어 고려와 삼국의 역사를 인멸하였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고려 시조 도종의 역사 왜곡이 중국의 침략을 일으킬 수 있었던 태풍 같은 무서운 힘이 잠재되고 있어 조선의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의 힘으로는 미약하여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중국이 침략하는 구실이 되고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땅은 중국 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렇지 않는다 손치더라도 백성들이 조상이 서로 다른 종족임을 알게되고, 내란과 반란으로 조선은 멸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사정으로 세종은 고려 도종이 조작한 역사에 필삭을 하고 조작하여 인멸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다. 세종이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종족의 통합이었다. 통합은 언어가 같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훈민 정음을 창제한 것이다. 세종은 중국의 사서들이 조작되고 왜곡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공자가 춘추를 조작하고 왜곡한 것을 알고 있었고, 김부식의 삼국사가 이 땅의 역사가 아니라 조작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세종은 이를 빌미 삼아 고려의 역사를 완전히 창작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실록과 왕건이 손에 넣었던 한(漢:가야)의 사서(史書) 대진(大震)의 사서(史書)등을 불태워 없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은밀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면 실록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숨겨 있는 역사를 바로 볼 때가 된 것이다.
세종의 사관(史觀)
세종 13년1월25일 상참을 받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일식(日食)하는 곳을 강독하다가 말하기를,ꡒ내가 삼국사(三國史)에 쓴 것을 보니, 일식의 기사를 혹 한 나라에선 썼는데 두 나라는 쓰지 않았고, 혹 두 나라에선 썼는데 한 나라에선 쓰지 않았으니, 태양의 일식은 비록 침침한 구름이 가렸다 하더라도 어찌 세 나라 가운데 혹은 보이고 혹은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김부식(金富軾)․하윤(河崙)․권근(權近)이 역사를 편수하였는데, 그 쓴 것이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ꡓ하니, 좌대언 김종서(金宗瑞)가 대답하기를,ꡒ사필(史筆)
에 의해 편수하기 때문에 세 나라가 각기 다른 것입니다.ꡓ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ꡒ옳은 말이다.ꡓ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가 한반도(韓半島)의 한(漢) 대진(大震) 대웅(大熊)의 역사가 아니고 중국의 역사였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로 조작한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또 말하기를,ꡒ전조(前朝)의 역사를 편수한 자가 종(宗)을 고쳐 왕으로 일컬었으니, 이는 너무나 그 진상을 멸실(滅失)시킨 것이다. 초(楚)나라가 침람 하게 왕으로 호칭한 것을 공자(孔子)가 이를 낮추어서 자(子)라 호칭하고, 오히려 말씀하기를, 나를 알고 나를 죄책 할 자가 오직 이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역시 공자가 노(魯)나라 역사의 직필(直筆)에 필삭(筆削)을 가한 것을 비난하고 있은 즉, 전조의 역사를 편수한 자가 종(宗)을 고쳐 왕(王)으로 일컬은 잘못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한 뒤에 전조의 역사를 개수(改修)하려 하는데 어떤가.ꡓ하니, 김종서가 대답하기를,ꡒ옳은 말씀입니다.ꡓ하였다. 【공자의 춘추 직필은 주 왕실을 위하는 것이라면 역사를 왜곡 조작 하도 된다는 뜻으로 세종은 알고 있었고 후대를 위하여 고려사도 왜곡 조작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주나라의 여와 족이다.】
세종 6년11월4일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가 《시경(詩經)》 시월편(十月篇)을 강하였다. 주전(朱傳)의ꡒ일식과 월식은 비록 떳떳한 돗수가 있으나, 임금이 덕을 닦아 정치를 잘 하면 먹을 것도 먹지 아니한다.ꡓ는 데에 이르러, 말하기를,ꡒ이 말이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삼국사략(三國史略)》을 보니, 신라에는 일식이 있었는데, 백제에서는 쓰지 아니하였고, 백제에는 일식이 있었는데, 신라에는 쓰지 아니하였다. 어찌 신라에서는 일식이 있는데, 백제(百濟)에는 일식이 없었다 하겠는가. 아마도 사관의 기록이 자상한 것과 소략 한 것이 다르기 때문인가 한다.ꡓ하니, 시강(侍講) 김돈(金墩)이 대답하기를,ꡒ그렇습니다. 음(陰)․청(晴)이 달랐으면 달랐지 어찌 노(魯)나라에서는 일식이 있었으면서 제(齊)나라에서는 일식이 없었으며, 제나라에서는 일식이 있었으면서 노나라에서는 일식이 없었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ꡓ하였다.
【삼국사와 삼국사략이 있었고 일식을 가지고 위서(僞書) 임을 암시하고 있다. 세종은 세종6년과 세종13년에 두 번씩이나 삼국의 일식을 거론하므로 서 삼국사가 위서(僞書)임을 말하고 있다.】
세종 지리지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것 중에는 각 지방의 내력과 지명을 삼국사와 고려사에 부합되게 하는 것이다. 세종이 각 지방을 답사하게 하고 얻은 정보와 중국사서들을 이용하여 세종 지리지를 편찬하여 놓으므로 서 조선의 이씨 왕조가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고, 반역의 싹을 아예 없애 버린 것이다. 지리지를 편찬함에 있어 삼국사와 김부식을 일부만 사용한 것도 이러한 세종의 원려(遠慮) 에서이다.........(이로써 대륙사관의 3국 설을 주장한 국내 재야사학자 이중재, 오재성의 지명 비정(批正)이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서문
우리 나라 지지(地志)가 대략 《삼국사(三國史)》에 있고, 다른 데에는 상고할 만한 것이 없더니, 우리 세종 대왕이 윤회(尹淮)․신장(申檣) 등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의 연혁을 상고하여 이 글을 짓게 해서, 임자년(1432)에 이루어졌는데, 그 뒤 <주군이> 갈라지고 합쳐진 것이 한결같지 아니하다. 특히 양계(兩界)에 새로 설치한 주(州)․진(鎭)을 들어 그 도(道)의 끝에 붙인다.
삼국사에서 동국사략으로 그리고 동국통감으로 편찬
태종 2년6월8일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권근(權近)․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삼국사(三國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태종 3년8월30일 하윤․권근․이첨이 새로 편수한 《동국사략》을 바치다.좌정승(左政丞) 하윤(河崙) 등이 새로 편수(編修)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바치었는데, 윤(崙)이 참찬(參贊) 권근(權近)․지의정(知議政) 이첨(李詹)과 더불어 편수하였다. 세조 4년9월12일 임금이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하였다. 임금이 우리 나라의 서기(書記)가 탈락(脫落)되어 완전하지 못하므로, 삼국사(三國史)와 고려사(高麗史)를 합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쓰고자 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취(取)하여 해마다[逐年] 그 아래에 모아 써넣게 하였다.
세조 9년9월5일 최항(崔恒)․양성지(梁誠之)․송처관(宋處寬)․이파(李坡)와 동부 승지(同副承旨) 김수령(金壽寧)에게 명하기를,ꡒ우리 나라의 역사가 착란(錯亂)하여 통일이 없으니, 내가《동국사략(東國史略)》․《삼국사(三國史)》․《고려사(高麗史)》등의 책을 참작(參酌)하여 거기에서 빼거나 보태어서 억지로라도 한 책을 만들어 이름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이라 하고, 장래에 밝게 보여 주어 고열(考閱)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니, 경들이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ꡓ 하고, 이어서 최항․양성지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또 은천군(銀川君) 이찬(李?)에게 명하여 최항 등이 편찬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수교(?校)하게 하였다.【세조가 한 이 말이야말로 한반도 역사왜곡의 진실을 토설(吐說)한 것이다. 】
성종도 역사왜곡을 하다.
성종 7년12월17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노사신(盧思愼)․우찬성(右贊成) 서거정 (徐居正)․이조 참판(吏曹參判) 이파(李坡)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짓고 전문(箋文)을 붙여서 바치니,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에게 명하여 공궤(供饋)하게 하고, 이어서 노사신 등에게 우리 나라 문사(文士)들의 시문(詩文)을 모아 양성지(梁誠之)가 지은 《지리지(地理志)》에 첨가하여 실으라고 명하였다. 성종의 묘지문에서 지리지(地理誌)를 찬(撰)하게 하여 이름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하였으며,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撰)하게 하셨다. 연산 5년10월14일 삼창을 받고 경연에 납시니, 지사(知事) 이세좌(李世佐)가 아뢰
기를,ꡒ《삼국사(三國史)》․《남북사(南北史)》․《수서(隋書)》․《오사(五代史)》를 모두 인쇄하여야 하겟사 온데 그 중 《남북사》는 성종조에서 이미 집람(輯覽)을 만들어 의문되는 점을 다 해석하였사오니 전하께서 하람 하시어야 하옵니다.ꡓ하였다.
삼국사와 동국사략의 실전(失傳)
세조 12년11월4일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가 상소(上疏)하기를,ꡒ 제가(諸家)의 병법(兵法)과 사기(史記)와 지도(地圖)를 모두 집록(輯錄)하도록 하여 일대(一代)의 전고(典故)를 이루게 하고, 이어서 전강(殿講)하는 날 혹은 주연(酒宴)의 여가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속편강목(續編綱目)》과 《동국사략(東國史略)》과 《고려사(高麗史)》등의 책을 진강(進講)하도록 하여, 전대(前代)의 성패(成敗)를 상고하여 당금(當今)의 치도(治道)를 논하게 된다면 매우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ꡒ병법(兵法)과 사기(史記)는 <소용되는 것만> 뽑아서 기록하기가 어렵겠다.ꡓ하고, 이어서 신숙주(申叔舟)에게 이르기를,ꡒ양성지가 찬술(撰述)한 《동국도경(東國圖經)》은 내가 장차 목판(木板)에 새겨서 보겠다.ꡓ하였다.
예종 1년6월29일 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는데, 그 상서는 이러하였다. 오늘부터 계속하여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통감(通鑑)》을 강(講)하는 것을 마치고, 다음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자경편(自警編)》․《정관정요(貞觀政要)》․《송원절요(宋元節要)》․《대명군감(大明君鑑)》․《동국사략(東國史略)》《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국조보감(國朝寶鑑)》, 또 사서(四書) 가운데 《논어(論語)》, 오경(五經) 가운데 《상서(尙書)》를 강하여 항상 관람하시면 심히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습니다.
선조 32년4월14일 홍문관이 아뢰기를,
ꡒ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을 건립하는 일에 있어서, 관청에서 했는지 백성들이 하였는지 전대의 일들을 상고해 보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사적에 있어서는 《삼국사(三國史)》나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해 보았지만 서로 흡사한 예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혹 상고할 곳이 있다고 하나 문적(文籍)이 산실되어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ꡓ 하니, 전교하기를, ꡒ전례를 다시 고찰하여 아뢰라.ꡓ 하였다.【동국사략은 양성지의 상소문을 끝으로, 삼국사는 선조32년의 홍문관이 아뢰기를 끝으로 실전(失傳)되었다. 】
병자년의 문사들에게서 몰수한 서책 들
세조 2년11월4일 사간원에서 직무의 고열을 위해 난신 에게 서 적몰한 서책을 줄것을 청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ꡒ본원(本院)의 직책이 간쟁(諫爭)을 맡고 겸하여 서무(庶務)를 살피는 것인데, 모든 주사(奏事)에 있어 고열(考閱)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난신(亂臣)의 집에서 적몰(籍沒)한 《사서(四書)》《경(經)》《좌전(左傳)》《소미통감(少微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통감강목(通鑑綱目)》《통감속편(通鑑續編)》《대학연의(大學衍義)》《원류지론(源流至論)》《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예부운략(禮部韻略)》《옥편(玉篇)》《고려사(高麗史)》《삼국사(三國史)》《동국사략(東國史略)》《대명률(大明律)》《원육전등록(元六典謄錄)》《속육전등록(續六典謄錄)》등서(等書)를 주소서.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삼국사의 기록
태종 9년4월23일 천둥과 벼락에 대한 일을 계문(啓聞)한 것으로 인하여, 임금이 말하였다.ꡒ내가 《삼국사(三國史)》를 보니, 어떤 여자가 간통(奸通)한 일로 옥(獄)에 갇혔었는데, 옥문에 벼락이 쳐서 탈출하여 도망한 일이 있었다.ꡓ 태종 17년8월17일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정사(政事)를 보았다. 임금이 유정현(柳廷顯) 등에게 이르기를,ꡒ병신년에 가뭄이 대단히 심하였는데, 변계량(卞季良)이 원단(圓壇)에 기우(祈雨)하자고 진언(陳言)하고 상서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므로 내가 비를 바라는 지극한 마음에 그 청을 들어 따랐는데, 지금 삼국사(三國史)를 보니, 제후(諸侯)로서 원단제(圓壇祭)를 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ꡓ하니,변계량이 대답하기를,ꡒ전조(前朝)에서 원단제(圓壇祭)를 행하였으니,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전조에서도 어찌 상고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심한 가뭄을 당하여 하늘에 기도하여 비를 비는 것이 신의 뜻에는 옳다고 생각합니다.ꡓ하였다. 임금이,ꡒ내가 삼국사(三國史)를 두루 보았는데 제후로서 참람(僭濫)한 예(禮)를 행한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다. 태종 17년12월4일 계사(啓事)하던 여러 신하들이 나가니,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일렀다.ꡒ내가 《경서(經書)》․《통감(通鑑)》․《송사(宋史)》․《원사(元史)》․《삼국사(三國史)》․전조사(前朝史)를 훑어보니, 환관(宦官)이 비록 임금에게 충성한 자도 있었으나, 임금에게 아첨하여 나라를 망친 자가 항상 많았다.
세종 27년6월7일 《삼국사(三國史)》에, ꡐ연기 같은 기운이 있음은 모두 상서로운 것이다.ꡑ하였으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문맹(蚊?)을 가리켜 말한다 하였으나, 문맹이라고 말하는 자는 망령되다고 하였다. 근래에 흥천사에서 요망한 기운이 있으매, 모두 상서로운 기운이라 하여 부처가 빛을 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온 나라 백성이 다투어 달려가기에 또 수양(首陽)에게 명하여 가 보게 하였더니, 바로 문맹이 모여서 날으는 것이라 장차 가물 징조인데, 사람이 잘못 본 것이었다. 세종 30년1월16일 신이 역대의 서적이나 사기(史記)를 보옵건대, 사람끼리 서로 잡아 먹은 것을 쓴 데가 많 삽고, 또 우리 나라로 말씀하면 《삼국사(三國史)》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은 것을 쓴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옵니다마는, 흉년끝에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은 형편상 필연적으로 그리 되는 것이옵니다.
세종 30년7월21일 후는 말하기를,ꡒ신라에서 금갑(琴匣)을 쏜 일은 입으로만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천재(千載) 후에도 듣는 자가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장래에 번질 것을 삼가지 않아서 내원당(內願堂)이 장본(張本)이 된 것입니다. 이는 신라 말엽의 일이니 논할 것은 없으나, 처음에 내원당이 없었다면 이 일이 어디로 좇아 나왔겠습니까. 청하건대, 삼국사(三國史)를 드리라 하여 친히 보소서.ꡓ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내 아는 것이 없고 또 미혹하여 금갑(琴甲)의 일은 일찍이 알지 못하였다.ꡓ하였다.
성종 9년8월18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박건(朴楗)이 치계(馳啓)하기를, "울산군(蔚山郡)의 백성 신금(申金)의 집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등 위에 세 발이 있어 같은 자리에서 났습니다.ꡓ하였는데, 전교하기를,ꡒ이는 요물(妖物)이다. 예전에도 있었는가? 전사(前史)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만약 사관(史官)이 기록한다면 그 모양을 친히 보지 아니할 수 없다.ꡓ하니, 우부승지(右副承旨) 이경동(李瓊仝)과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대답하기를,ꡒ《삼국사(三國史)》에 많이 실려 있으나, 그 반응은 별로 없었습니다.ꡓ하였다.
성종 15년10월9일 전교하기를,ꡒ이제 《문한유선(文翰類選)》을 보니,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이 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ꡐ임금이 사장(詞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는 아니되지만, 또한 알지 아니할 수 없다.ꡑ고 하였고, 또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은 음란(淫奔)한 시(詩)인데, 선유가 혹은 진강(進講)할 수 없다고 말하고, 혹은 진강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또 《삼국사(三國史)》도 역시 괴탄(怪誕)한 말이 많다. 그러나 야대(夜對)에서 역시 진강 한다. 내가 《문한유선》에서 소시(小詩)․사운(四韻) 같은 것을 제외하고 《삼국사》를 진강 한 뒤에 아울러 강(講)하고자 하는데, 승정원의 뜻은 어떠한가?ꡓ하니,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비록 야대(夜對)라고 하더라도 사장(詞章)을 진강하는 것은 적당치 못할까 합
니다.ꡓ하였다.
신돈에 대한 역사
세종 20년7월8일 춘추관에서 아뢰기를,ꡒ사신(史臣)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사(高麗史)》를 엮을 때 위조(僞朝) 신우(辛禑) 부자에 관한 기사에 이르러서는, 이를 모두 배척하여 우(禑) 또는 창(昌)이라 썼습니다. 신등이 삼가 상고하온 즉, 한(漢)나라 여후(呂后)는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 혜제(惠帝)를 삼았는데도 뒤에 《한사(漢史)》에서 제(帝)라 썼고,《자치통감(資治通鑑)》과 《강목(綱目)》에서도 역시 제라고 썼으며,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은 그의 시종(始終) 사적이 모두 우(禑)와 같사온데 《남사(南史)》에서 이를 폐제(廢帝)라고 일컬었고,《자치통감》에서는 표제(標題)에 창오왕이라고 일컫고 기사 서술에는 모두 제(帝)라 썼으며, 《강목》에도 역시 송나라 군주로 상례 그대로 썼는가 하면, 무릇 참호(僭號)를 도절하여 점거한 자까지도 오히려 아무 주(主)라고 일컬으고, 일찍이 그 이름을 마구 척호(斥呼)하지 않은 것은 대개 사실 그대로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강목》에 정통(正統)이 아닌 자는 두 줄로 주(註)를 나누어서 반드시 이름을 썼으며, 위 문제(魏文帝) 조비(曹丕)와 오 태제(吳太帝) 손권(孫權)의 유례가 그것이며, 정상적인 시호[諡]가 없는 자도 또한 이름을 썼으니, 진(晉) 해서공(海西公)을 제혁(帝奕) 태화(太和) 원년으로 쓴 유례가 바로 그것이니, 이는 하나의 변례(變例)인 것입니다. 지금 우(禑)는 비록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공민왕(恭愍王)이 자기 아들이라고 지칭하고 대신들에게 부탁하였으며, 원(元)나라 황제의 작명까지 받았고 14년간이나 왕위에 있었사온즉, 더구나 다른 참호를 도절한 자와 비유할 바가 아니온지라 군주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우와 창이 이미 그 정통이 아니고 봉해 준 시호도 없사온즉, 오로지 창오왕에다 비할 수도 없을 것 같사오니, 그 표제에의 칭호는 위제(魏帝) 조비(曹丕), 진제(晉帝) 혁(奕)의 예에 의거하여 폐 왕우(廢王禑), 폐왕 창(廢王昌)이라 일컬으고, 재위(在位)하였을 당시의 사실을 서술함에 이르러서는 창오왕의 예에 의하여, 당시 신민들의 일컫던 것과 사가(史家)가 쓴 그대로 혹은 왕(王), 혹은 상(上)이라 일컬어서 그 사실을 인몰(湮沒)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 하오리까.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1년4월6일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ꡒ전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할 때에 한(漢)나라 소제(少帝)와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위조(僞朝)의 신우(辛禑) 부자(父子)를 모두 왕으로 칭하였는데, 삼가 상고하옵건대, 소제(少帝)와 창오왕(蒼梧王)을 비록 본사(本史)에 제(帝)로 칭하고 강목(綱目)에도 또한 폄출(貶黜)한 것이 없으나, 그러나, 강목에 고후 여씨(高后呂氏) 원년(元年)에 관한 유우익(劉友益)의 서법(書法)에 소제(少帝)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지만 태자(太子)라고 쓰고 소제(少帝)라고 써서 고침이 없었으니, 한(漢)나라 조정의 대신을 죄준 것이옵고, 여씨(呂氏)로 기원(紀元)을 하고 다른 사람의 아들로 하지 아니함은 정통(正統)을 어렵게 여긴 것이옵니다.
고후(高后) 8년에다가 윤기신(尹起莘)의 강목 발명(綱目發明)에도 또한 말하기를, ꡐ강목에 써서 조금도 깎은 말[貶辭]이 없고 참 효혜제(孝惠帝)의 아들인 것 같이 한 것은, 한(漢)나라 조정의 장신(將臣)과 상신(相臣)들의 죄를 나타낸 것이라.ꡑ하였으니, 그렇다면 강목(綱目)에 소제(少帝)로 칭한 것은 제(帝)가 된 것을 관여한 것이 아니고, 본사(本史)에 소제본기(少帝本紀)를 짓지 않았으니 뜻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오왕(蒼梧王)은 《송서(宋書)》 본기(本紀)에 쓰기를, ꡐ폐제(廢帝)의 휘(諱)는 욱(昱)이고 명제(明帝)의 장자(長子)인데, 대명(大明) 7년 정월 신축(辛丑)에 위위부(衛尉府)에서 나서 태시(泰始) 2년에 세워 태자(太子)를 삼았다.ꡑ 하였고, 본기(本紀)의 끝에 이르러 쓰기를, ꡐ이보다 먼저 민간의 와전(訛傳)된 말에, 큰 집에는 아들이 없고 진 대비(陳大妃)가 본래 도아(道兒)의 첩(妾)이니, 도로(道路)에서 하는 말이 혹은 도아(道兒)의 아들이라 한다.ꡑ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명제(明帝)가 창오(蒼梧)로 아들을 삼아 통(統)을 이었기 때문에 본기(本紀)에 또한 명제의 장자라고 쓴 것이고, 태후(太后)가 창오(蒼梧)를 폐할 때에 명령하기를, ꡐ욱(昱)이 적장(嫡長)으로 황통(皇統)을 이어 올랐는데, 어찌 지극히 흉패(凶悖)할 줄을 뜻하였으랴.ꡑ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다만 포악하고 잔학한 죄를 수(數)한 것뿐이요, 다른 성(姓)이라고 해서 끊은 것은 아닙니다. 강목(綱目)에 주(主)라고 일컬은 것은 그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강(綱)에는 황(皇)에 쓰고 목(目)에는 도아(道兒)의 아들이라고 쓴 것입니다. 하물며, 창오(蒼梧)를 도아의 아들이라 한다는 말을 특히 민간 도로의 와전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제(少帝)와 창오(蒼梧)를 함께 끌어다가 우(禑)․창(昌)의 증거로 삼을 수 없음이 분명하옵니다.
우(禑)로 말하면 그 어미 반야(般若)는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데, 일찍이 궁인(宮人)이 된 일이 없고, 공민왕(恭愍王)이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갔었을 때, 돈이 우(禑)로 양자를 삼아서 후사(後嗣)를 세우기를 청하매, 왕이 곁눈으로 보면서 웃었더니, 돈이 왕의 마음에 허락된 것을 알고, 이에 오일악(吳一?)을 시켜 원장(願狀)을 낙산사(洛山寺)에 쓰기를, ꡐ제자(弟子)의 분신(分身)인 모니노(牟尼奴)가 복(福)되고 수(壽)하여 나라에 머무르기를 원한다.ꡑ 하였으니, 역적 신돈의 찬탈(簒奪)의 꾀가 이미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공민왕 19년에 이르러 우의 낳은 지가 이미 6살이 되었는데 오히려 후사가 없는 것을 근심하여 의릉(毅陵)을 개장(改葬)하려 하였고, 왕의 말년에 익비(益妃)가 임신하매 기뻐서 말하기를, ꡐ내가 일찍이 영전(影殿)이 부탁할 곳이 없을까 염려하였더니, 비(妃)가 이미 임신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랴.ꡑ 하였으니, 이것은 왕이 비록 우로 후사를 삼기를 허락하였더라도 그 마음은 죽을 때까지 아들로 삼으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가 장차 취학(就學)할 때에, 태후(太后)가 아직 어리다고 칭탁하여 허락하지 않았고, 우를 세울 때에 태후와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宗親)을 세우려 하는데, 이인임(李仁任)이 권병(權柄)을 오로지하려 하여 내외(內外)의 정론(正論)을 어기고 끌어다가 세워 왕을 삼았으니, 이것은 태후와 대신이 또한 아들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전에 사기(史記)를 편수(編修)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ꡐ중국 황제의 명령이 있다.ꡑ 하였으나, 우가 선 지 11년 뒤에 비로소 책봉(冊封)을 하였고, 책봉한 이듬해에 황제가 말하기를, ꡐ자주 약속(約束)을 청하나 짐(朕)이 여러 번 허락치 않은 것은 정(正)히 분수를 지키도록 한 것인데, 청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쫓는다.ꡑ 하였고, 창(昌)이 중국에 조회를 청하매, 중국 황제가 말하기를, ꡐ왕씨(王氏)가 죽음을 당하여 제사(祭祀)가 끊어진 뒤에 다른 성(姓)으로 왕을 삼는 것은 삼한(三韓)의 대대로 지키는 좋은 법이 아니라.ꡑ 하고, 또 말하기를, ꡐ동자(童子)가 반드시 중국 서울에 올 것이 없다.
과연 어질고 지혜 있는 신하들이 직위에 있어 군신(君臣)의 분수를 정한다면 수십 년 중국에 조회하지 않더라도 그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ꡑ 하였으니, 중국 왕제가 우의 부자(父子)에 대하여 끊은 것이 깊습니다.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에 온 나라의 군(君)들과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ꡐ우와 창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 수 없고, 또 천자(天子)의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거짓[假]을 폐하고 참[眞]을 세워야 한다.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는 태조(太祖)의 정파(正派)이니 공민(恭愍)의 후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ꡑ 하고, 드디어 정비(定妃)의 분부로써 왕을 받들어 위(位)에 나가 정통(正統)을 잇고,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우․창을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았다가 조금 뒤에 법으로 형(刑)에 처하였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실상 이 의논을 주장하셨으니, 참람하게 도둑질한 죄를 성토(聲討)하여 하늘이 준 벌로써 끊은 것이 엄하셨나이다.
지금 만일 오히려 우와 창을 왕으로 하여 역적의 자손으로 하여금 32대(代)의 서열(序列)에 섞어서 분별이 없게 한다면, 다만 대의에 어그러질 뿐이 아니라, 태조의 명분을 바로잡으신 의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후(諸侯)를 폐하고 두는 것은 천자에게 있는 것이온데, 하물며, 우가 타성(他姓)으로서 도둑질로 점유하여, 위로는 천자(天子)의 끊은 바 되고, 아래로는 국론(國論)의 폐한 바 된 것이겠나이까. 한(漢)나라 왕망(王쭄)이 속임수를 쓰고 간사한 꾀를 부리어 거짓을 가지고 곧 참이라 일컫고서, 모두 태후(太后)를 빙자해 가지고 위(位)를 도둑질하여 임금 노릇을 10여 년이나 오래 하였으나, 《한서(漢書)》에 그 이름을 배척하여 쓰고, 내리쳐 열전(列傳)으로 만들어서 참람하게 도둑질한 죄를 드러내었나이다. 우는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으로서 왕위(王位)를 도둑질로 점유하여, 부자가 서로 전하면서 지극히 흉하고 지극히 악하여 죄가 왕망보다 더하온데, 어찌 왕이라 일컬어서 명분을 어지럽힐 수 있나이까.
전자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역사를 편수할 때에 우와 창을 이름으로 썼고, 그 뒤에 하윤(河崙)․유관(柳寬)․변계량(卞季良) 등이 다시 다듬고, 윤회(尹淮)가 거듭 편찬할 때에도 또한 모두 그대로 하였사오니,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랬겠나이까. 비옵건대, 지금 《고려사》를 편수함에 있어서 우․창 부자를 모두 《한서》 왕망의 예(例)에 의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난적(亂賊)을 징계하여 만세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려사 개찬과정의 실루엣
-배극렴이 왕대비를 위협해 공양왕을 폐하고 옥새를 빼앗아 이성계의 잠저로 가서 옥새를 주고 만조백관을 불러 새 왕조 왕위 계승을 기록하는 내용부터 보자.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를 알현(謁見)하는데 태조가 강비(康妃)와 더불어 물에 만 밥을 자시고 계시는 중이므로,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北門)으로 해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ꡒ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입니다. 고려는 시조(始祖)가 건국(建國)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 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때에 권신(權臣)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자기의 총행(寵幸)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妖僧]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공민왕의 후사(後嗣)라 일컬어 왕위를 도둑질해 있은 지가 15년이 되었으니,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는 이미 폐(廢)해졌던 것입니다. 우(禑)가 곧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公)이 맨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천자(天子)의 국경을 범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사를 돌이키니, 우(禑)는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두려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에 이색(李穡)․조민수(曹敏修) 등이 신우(辛禑)의 처부(妻父)인 이임(李琳)에게 가담하여 그 아들 창(昌)을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두 번이나 폐(廢)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왕위(王位)로써 공(公)에게 명한 시기이었는데도, 공은 겸손하고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아니하고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했으니, 거의 사직(社稷)을 받들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일에, 신우(辛禑)의 악(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인데, 그 무리 이색․우현보(禹玄寶) 등은 고집하고 미혹(迷惑)하여 깨닫지 못하고 신우(辛禑)를 맞아 그 왕위를 회복할 것을 모의하다가 간사한 죄상이 드러나매,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하여 그 무리 윤이(尹츺)․이초(李初) 등을 몰래 보내어 중국에 도망해 들어가서, ꡐ본국(本國)이 이미 배반했다.ꡑ고 거짓으로 호소하고는,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장차 본국(本國)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 과연 행해졌다면 사직(社稷)은 장차 폐허(廢墟)에 이르고 백성도 또한 멸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간관(諫官)과 헌사(憲司)가 소(疏)를 번갈아 올려 계청(啓請)하기를, ꡐ이색․우현보 등이 사직(社稷)에 죄를 얻고 백성에게 화(禍)를 끼쳤으므로써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습니다.ꡑ 하여...
*세종31년: 세종은 신돈의 아들 우, 창이 왕위를 도둑질했다하여 왕망보다 더 악한 자이므로 왕으로 일컫지 않고 고려사에 우와 창이란 이름을 썼다. 고려사 내용대로라면 당 숙종의 혈통인 고려 왕건의 역사가 왜곡과 위조의 역사를 넘어서서 지나족의 이방인 역사라면 오히려 신돈과 반야의 혈통이 들어선 것은 가(假)의 역사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충녕은 왕실의 비밀스런 아킬레스와 연계하여- 우왕과 최영의 북벌주의의 명분을 근본뿌리부터 뽑아내고 싶었던 방원(태종)의 숙원대로 왕조 출발부터 하자가 있었던 고려 왕건의 혈통을 신성시하는 작업을 물려받아 매듭지어야 했다. 이 신성화 작업은 태조 이 성계 때의 정도전으로부터 태종 이방원 때의 하륜(河崙)․유관(柳寬)․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등을 거쳐 용의 혈통이 되고 당시 대명사대주의의 일환으로 지나족의 황실혈통으로 둔갑하는 작제건 신화의 주인공으로 가다듬어졌으나 자기모순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에 온 나라의 군(君)들과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ꡐ우와 창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사(宗祀)를 받들 수 없고, 또 천자(天子)의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거짓[假]을 폐하고 참[眞]을 세워야 한다.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는 태조(太祖)의 정파(正派)이니 공민(恭愍)의 후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ꡑ 하고, 드디어 정비(定妃)의 분부로써 왕을 받들어 위(位)에 나가 정통(正統)을 잇고,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우․창을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았다가 조금 뒤에 법으로 형(刑)에 처하였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실상 이 의논을 주장하셨으니, 참람하게 도둑질한 죄를 성토(聲討)하여 하늘이 준 벌로써 끊은 것이 엄하셨나이다. 지금 만일 오히려 우와 창을 왕으로 하여 역적의 자손으로 하여금 32대(代)의 서열(序列)에 섞어서 분별이 없게 한다면, 다만 대의에 어그러질 뿐이 아니라, 태조의 명분을 바로잡으신 의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후(諸侯)를 폐하고 두는 것은 천자에게 있는 것이온데, 하물며, 우가 타성(他姓)으로서 도둑질로 점유하여, 위로는 천자(天子)의 끊은 바 되고, 아래로는 국론(國論)의 폐한 바 된 것이겠나이까. 한(漢)나라 왕망(王쭄)이 속임수를 쓰고 간사한 꾀를 부리어 거짓을 가지고 곧 참이라 일컫고서, 모두 태후(太后)를 빙자해 가지고 위(位)를 도둑질하여 임금 노릇을 10여 년이나 오래 하였으나, 《한서(漢書)》에 그 이름을 배척하여 쓰고, 내리쳐 열전(列傳)으로 만들어서 참람하게 도둑질한 죄를 드러내었나이다. 우는 역적 신돈(辛旽)의 자식으로서 왕위(王位)를 도둑질로 점유하여, 부자가 서로 전하면서 지극히 흉하고 지극히 악하여 죄가 왕망보다 더하온데, 어찌 왕이라 일컬어서 명분을 어지럽힐 수 있나이까. 전자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역사를 편수할 때에 우와 창을 이름으로 썼고, 그 뒤에 하륜(河崙)․유관(柳寬)․변계량(卞季良) 등이 다시 다듬고, 윤회(尹淮)가 거듭 편찬할 때에도 또한 모두 그대로 하였사오니,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랬겠나이까. 비옵건대, 지금 《고려사》를 편수함에 있어서 우․창 부자를 모두 《한서》 왕망의 예(例)에 의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난적(亂賊)을 징계하여 만세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ꡓ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1년1월4일
춘추관(春秋館)에 전지하기를,ꡒ전에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소략(疎略)한 실수가
있어서 다시 편찬하게 하였더니, 요(遼)에서 세자에게 면복(冕服)을 준 일을 또 빠뜨렸으
니, 이제 다시 교정하되 비록 한 글자와 한 가지 일이라도 빠져서 고쳐야만 할 일은 모두
다 표를 붙여서 아뢰라.ꡓ하였다.
세종 31년1월28일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을 불러, 《고려사(高麗史)》의 개찬(改撰)에 대한 것을
의논하고 인하여 춘추관에 전지하기를, ꡒ《고려사》가 자못 소략(疎略)한 데 지나치니,
이제 다시 고열(考閱)하여 갖추 자세히 보태어 넣으라.ꡓ하고, 드디어 우찬성 김종서․이
조 판서 정인지․호조 팜판 이선제(李先齊)와 창손에게 감장(監掌)하기를 명하였다.
세종 31년2월1일
김종서(金宗瑞)를 의정부 우찬성 지춘추관사 겸 판병조사(知春秋館事兼判兵曹事)로 삼
고, 임금이 권제(權?)․안지(安止) 등의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보태고 깎은 것이
공정하지 못함으로써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는데, 이때 안지가 지춘추관사로 있다가
종서로 대신하게 하였다.
세종 31년2월5일
춘추관에서 《고려사(高麗史)》를 고쳐 편찬하기를 논의하였는데, 의논이 일치하지 아
니하였다. 사관(史官) 신석조(辛碩祖)․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이석형(李石亨)․김예
몽(金禮蒙)․하위지(河緯地)․양성지(梁誠之)․유성원(柳誠源)․이효장(李孝長)․이문형(李
文炯) 등은 의논하기를, ꡒ사기(史記)를 짓는 체(體)는 반드시 기(紀)․전(傳)․표(表)․
지(志) 등이 있어서, 사적(事跡)을 갖추 실어 각각 조리가 관통(貫通)됨이 있어야 하니,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 이후로 모두 이 체를 이어받아서, 고치는 이가 없고, 편년법
(編年法)은 본사(本史)를 은괄(?括)하여 보기 편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사를 짓지 아니하고 곧 편년에다 갖추 싣고자 하니, 서술하기가 심히 어렵고,
따로 세계(世系)와 지리(地理)가 있으니, 쓸데없이 덧붙임이 심하며, 또 범례(凡例) 안
에 조회․제사․가구 경행(街衢經行)․춘추 장경도량(春秋藏經道場)․생신 수하(生辰受賀)․
왕자 탄생․사교 예물(賜敎禮物)․인일 반록(人日頒祿)․연향 중국 사신(燕享中國使臣) 등
과 같은 것은 모두 예사 일이라 하여, 약(略)하여 쓰지 아니하고, 다만 처음 보는 것만
썼으니, 만약 본사(本史)가 있고 편년(編年)을 짓는다면 가하거니와, 이제 본사가 없는
데 이처럼 요약(要略)하면 자못 사체(史體)를 잃은 것이오니, 원컨대, 역대 사가(史家)
의 구례(舊例)에 의하여 기(紀)․전(傳)․표(表)․지(志) 등을 남김없이 갖추 쓴 뒤,이에
편찬한 편년(編年)에다가 다시 깎고 보태어 따로 한 책을 만들어서, 본사(本史)와 아울
러 전하게 하면, 옛 사람의 역사를 닦는 제도에 거의 합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ꡐ고려의 사적이 본래 거칠고 빠진 것이 많아서, 기․전․표․지
등을 만들고자 하여도 일을 성취하기가 어렵다.ꡑ고 하나, 전사(前史)의 열전(列傳)에
한 사람의 일을 겨우 두어 줄만 쓴 것이 있으니, 여기에서도 마땅히 전(傳)을 세워야
할 사람이 있으나, 사기에 행한 사적을 잃어서 전을 실을 수 없는 것과, 사적(事迹)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은 비록 빠뜨릴지라도 해가 되지 아니하며, 진실로 제작(制作)하는
일이 제도에 합당함을 얻으면, 일의 어렵고 쉬움과 더디고 빠른 것은 다시 의논할 필
요가 없습니다.ꡓ하고,
어효첨(魚孝瞻)․김계희(金係熙)․이물민(李勿敏)․김명중(金命中) 등은 논의하기를,
ꡒ사기를 짓는 체는 반드시 기․전․표․지를 세우는 것이 진실로 상례(常例)이지만, 다
만 염려되는 것은 일을 쉽게 성취할 수 없어 수년 안에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
니다. 또 체례(體例)가 빠지고 간략하여 옛 사람의 지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비록 이
룩될지라도 도리어 볼 만한 것이 못될 것입니다.
송조(宋朝)의 일로 보건대, 본사(本史) 외에 전문(全文)이 있고, 또 속편(續編)이 있
으니, 원컨대, 《송사(宋史)》 전문의 예에 의하여 지금 편찬한 《고려사》에다 다시
교정을 더하여 예전대로 반행(頒行)하고, 기․전․표․지의 저작을 만일 아니할 수 없다
면 아직 후일을 기다릴 것입니다.ꡓ 하니, 지관사(知館事) 김종서(金宗瑞)․정인지
(鄭麟趾)가 두 논의를 가지고 아뢰매, 효첨 등의 논의에 따랐다.
종서와 인지가 동궁에 들어가 뵙고 아뢰기를,ꡒ편년체(編年體)에 시사(時事)를 갖추
기록하려고 하면 뜻을 통하지 못하는 예(例)가 많으니, 석조 등의 논의에 따르기를
원하옵니다.ꡓ하니, 동궁이 들어가 아뢰매, 임금이 기․전․표․지로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다.
길재와 정몽주에 대한 세종과 설순, 안숭선의 사관토론
세종 12년11월23일
상참을 받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ꡒ춘추관에서는 충신의
성명을 벌써 뽑아 보냈느냐.ꡓ하니, 시강관 설순(첁循)이 아뢰기를,ꡒ고려의 말년에는 주서
(注書)였던 길재(吉再) 뿐입니다.ꡓ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ꡒ태종께서 재(再)를 부르시니, 재는 《시경(詩經)》 한 편의 강의를 드
리고 돌아갔으니 이는 스스로 기자(箕子)가 홍범(洪範)을 진술한 것에 견준 것이다.
당시에 《시경》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재가 감히 강의를 드렸단 말인가. 정말 오활
한 노릇이다.ꡓ하니, 안숭선(安崇善)이 대답하기를,ꡒ신도 이것을 보고 오활하다고 생각하
였습니다.ꡓ하고, 순(循)이 아뢰기를,ꡒ재는 박학한 사람이 아니고 《시경》과 《서경》을
알았을 뿐입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그의 행동은 가치가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사간(司諫)을 추증(追贈)하고 또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ꡓ하였다. 순이 아뢰기를,
ꡒ재는 위조(僞朝)에서 벼슬하였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재는 집안이 좋은 사람
이었는가.ꡓ하매, 순이ꡒ한미한 집안에서 일어났습니다.ꡓ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ꡒ전조의 대가(大家)의 귀족들은 모두 우리 왕조에 벼슬하였는데,재는 미천한 선비로서 벼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도잠(陶潛)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도잠은 작은 벼슬로 진(晉)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런즉 그의 행적은 마땅히 포창하여 후세에 전해야 될 것이다.ꡓ하였다.또 이르기를,ꡒ최
도통사(崔都統使)는 공민왕 때에 있어 큰 공로가 있었다 하는데 사실인가.ꡓ 하니, 순이
아뢰기를,ꡒ최영(崔瑩)이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였고, 현릉(玄陵)이 죽은 뒤에 왕씨
(王氏)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당시의 재상은 영을 두려워하여 신우(辛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이 돌아와서 신우를 세운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었으나, 벌써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ꡓ하니, 임금이ꡒ영은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대
의를 들고 나와서 우(禑)를 쫓아내고 왕씨를 세웠으면 어떻겠는가.ꡓ하니, 순(循)이 대답하
기를,ꡒ우가 벌써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또 요를 공격하는 일을
일으켰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이색(李穡)도 여러 번 죄를 주기를 청하는 탄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의리를 아는 학자로서 신씨(辛氏)에게 아부하였는가.
ꡐ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되겠느냐.ꡑ고 물었을 때,그는ꡐ선왕(先王)의 아들이 있다.ꡑ고
하였으니, 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씨(王氏)를 세
우지 않고 우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줄을 알
고 일부러 우를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ꡓ하니, 순이 대답하기를,ꡒ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것은 곧 회군(回軍)한 뒤의 일이요, 그 때에는 임금 노릇 하시려는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습
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ꡒ그러면 어째서 우를 세웠을까. 왕씨의 직계 혈통으로는 누가 있었는
가.ꡓ하니, 순이 아뢰기를,ꡒ직계 혈통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다만 공양왕(恭讓王)이 있었
을 뿐입니다.ꡓ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ꡒ현릉(玄陵)은 어째서 신돈(辛旽)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임금의 자리에 세우고 왕씨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하였을까.
옛적에,차라리 다른 성을 세울지언정 같은 성은 세우지 않는다.ꡑ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뜻과 마찬가지로다.ꡓ하니, 순이 아뢰기를,ꡒ이색(李穡)이 이르기를, ꡐ세상 사람이 나를
풍도(馮道)라고 하지만,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ꡑ하였습니다.ꡓ하였다. 임금이 말하
기를,ꡒ그 사실이 바로 풍도(馮道)와 같다.
색(穡)은 진(晉)나라 때의 사실을 이끌어 말했으나, 진(晉)나라 때에는 북방의 오랑캐가
강성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으니,이것을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다.ꡓ하고, 또
말하기를,ꡒ길재(吉再)의 절조는 포창할 만하다. 정몽주(鄭夢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ꡓ
하니, 순이 일어나서 대답하기를,ꡒ신이 그가 충신이란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춘추관(春秋
館)에서 이에 대한 공문을 보내 온 것이 없고, 성상께서도 명령하시지 아니하여, 신은 감히
청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ꡓ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ꡒ몽주(夢周)의 일은 태종께서 그가 충의를 위하여 죽은 줄을 아시고 벌
써 포창하고 상을 내리셨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느냐.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ꡓ
하고, 또 말하기를,ꡒ이숭인(李崇仁)의 재주는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이 모두 그를
지나치게 칭찬하였다.
처음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 근(近)이 숭인(崇仁)을 변호한 글을 삭제했는데,
근과 계량이 이를 다시 편찬할 때에, 추가하여 써 넣었으나, 그 사실은 실정보다 지나쳤노
라. 이 역사는 역시 완성되지 못한 책이니, 만일 이것을 고쳐서 꾸밀 때에는 그것을 없애야
될 것이다.
근(近)이 《도은집(陶隱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를 극히 칭찬하였고, 또 벼슬을 추증(追贈)한 뜻을 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닌 얘기다. 계량이 근에게 묻기를, ꡐ어째서 추증하지도 아니한 사실을 썼느냐.ꡑ한즉,대답하기를, ꡐ지금 추증했다고 쓰면 뒤에 반드시 추증될 것이다.ꡑ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큰 실언이다.
계량도 숭인을 가리켜 ꡐ어질다ꡑ고 하였으되, 태종께서 보시고 ꡐ이것은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다.ꡑ 하시므로,계량이 대답하기를,ꡐ어질다[賢]는 것을 <그러면> 재(材)로 고치겠습니다. 하였다. 근과 계량은 모두 숭인을 색(穡)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ꡓ하니, 설순이 아뢰기를,ꡒ정도전(鄭道傳)이 숭인이 문장에 능한 것을 질투하여 그를 죽게 만든 것이요, 충의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색도 그의 문장을 칭찬하였습니다.ꡓ하였다.
고려사의 한계와 개찬의 필요성
세종 5년12월29일
지관사(知館事) 유관(柳觀)과 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에게 명하여《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저술한 《금경록(金鏡錄)》을 근거로 하여 37권을 편찬하였더니, 정도전이 말하기를,ꡒ원왕(元王) 이하는 비기어 참람 하게 쓴 것이 많다 하여, 즉 종(宗)이라고 일컬은 것을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호칭한 것을 생일(生日)이라 썼으며, 짐(朕)은 나[予]로 쓰고, 조(詔)를 교(敎)라 썼으니, 고친 것이 많아서 그 실상이 인멸된 것이 있고,또 운경(云敬)은 도전의 부친으로, 별다른 재능과 덕행도 없었는데도 전(傳)을 지어 드러내고, 정몽주(鄭夢周)․김진양(金震陽)은 충신(忠臣)인 것을 가차없이 깎고 몰았으며, 오직 자기의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그 옳고 그른 것을 정한 것이 <그네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왔고, 착하다고 한 것과 악하다고 한 것이 예 역사를 그르쳐 놓았다.ꡓ하고,진산군(晉山君) 하윤(河崙)이 이르기를,ꡒ도전의 마음씨의 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ꡓ하고, 조정에 건의하기를,ꡒ옛날 역사에 상고하여 거기에 붙여 쓸 것은 더 써넣고, 없앨 것은 삭제하여야 한다.ꡓ고 하더니,그만 이것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무술년에 임금이 유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校正)을 가하도록 하니,유관이 주자(朱子) 강목(綱目)을 모방하여 편집하려고 하였으나,계량이 말하기를,ꡒ여사(麗史)가 이미 이인복과 이색과 정도전의 손을 거쳤으니 경솔히 고칠 수는 없다.ꡓ하고, 그 편수함에 미쳐서는 옛 그것을 답습하여,태자(太子)의 태부(太傅)․소부(少傅)․첨사(僉事)를 세자(世子)의 태부․소부․첨사로 하고, 태자비(太子妃)를 세자빈(世子嬪)으로 하며, 제칙(制則)을 교로 하며, 사(赦)를 유(宥)로 하고, 주(奏)를 계(啓)로 하였고, 아직 지주(知奏)는 고치지 않았으나, 자못 당시의 사실을 잃었던 것이다.ꡓ하고,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양봉래(梁鳳來)․정사(鄭賜)․강신(康愼)․배인(裵寅)․김장(金張) 등이 계량에게 고하기를, ꡒ태자 태부(太子太傅) 등의 칭호는 당시의 관제(官制)이요, 제(制)․칙(勅)․조(詔)․사(赦)도 당시에 호칭하던 바요, 비록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고는 말하지만, 《춘추(春秋)》에 교제(郊?)와 대우(大雩)를 같이 전하여 <그 후세의> 감계(鑑戒)가 되게 하였으니, 어찌 이를 고쳐서 그실상을 인멸되게 하겠소.ꡓ 하니, 계량이 그렇지 않다 하여, 도리어 이 뜻으로써 윤회에게 고하여 임금에게 주달[轉達]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ꡒ공자(孔子)의 춘추(春秋) 같은 것은 제왕의 권한을 의탁하여 한 왕의 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참람하게 왕(王)으로 일컬은 것은 깎아 내려서 자(子)라고 썼고, 성풍(成風)의 장사에 천자로서 과람한 부의를 했다 하여, 왕이라 이르고 천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니,이와 같이 취할 것은 취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며, 빼앗고 주는 것이 성인의 심중의 재량으로부터 나왔는데, 좌씨(左氏)가 전(傳)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형(荊)나라와 오(吳)나라와 어월(於越)나라를 한결같이 자기들이 호칭대로 좇아, 왕이라 쓰고 일찍이 고치지 않았으며,《주자강목》같은 것도 비록 춘추의 필법[書法]을 본받았다 하나,그 주에는 참람 하게 반역한 나라가 명칭을 도절(盜竊)한 것도 또한 그 사실에 인하여 그대로 기록하였으니, 그 기사(記事)의 규례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리라.
오늘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이에 성인이 취하고 버리신 본지를 엿보지 못할 바엔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바르게 기록하면, 찬미하고 비난할 것이 스스로 나타나서 족히 후세에 전하고 신빙할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과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후일에 와서 고쳐서 그 사실을 인멸케 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종을 고쳐서 왕으로 일컬을 것도 사실에 좇아 기록할 것이며, 묘호(廟號)․시호(諡號)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맣고, 범례(凡例)에 고친 것도 이에 준하여야 할 것이다.ꡓ하였다. 계량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ꡒ도전이 참람히 비의(比擬)한 것을 고쳤사오나, 도전(道傳) 때에 와서 비로소 고친 것이 아닙니다.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종으로 일컬은 것을 왕으로 썼고, 또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을 때에, 칙천황후(則天皇后)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서 당(唐) 2년, 3년으로 썼기에, 신도 또한 위로 주자의 필법을 법받고, 아래로 도전의 뜻을 본받아, 무릇 참람하게 비의한 일은, <전에> 고치지 않은 것도 또한 있는 데 따라 고쳤습니다.
또 이미 고친 바 있는 참람된 일을 다시 쓴다면, 지금 사관들이 반드시 <이를> 또 본받아 쓸 것이니, 그 사실을 그대로 쓴다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ꡓ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ꡒ경의 말에는 내 능히 의혹을 풀지 못하겠다. 주자의 강목은 이 책과는 다르다. 주자 강목은 명분을 바로잡고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만대의 아래에서도 일성(日星)과 같이 환히 밝은 것이 있으나, 이 글에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의 구분이 없는데, 그대로 쓰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 사실을 보고 알겠는가. 경이 또 말하기를, ꡐ익재가 처음에 시작한 일이라.ꡑ고 하니, 내 비록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않겠으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ꡐ앞사람의 과실을 뒷사람이 쉽게 안다.ꡑ고 하였거니와, 경이 말한 것같이 지금의 사관이 그것을 보고서 쓸 것이라는 것은, 즉 사실 그대로 쓴다는 말이니, 사실을 사관이 그대로 쓴다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ꡓ 하고, 드디어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아울러 도전이 고친 것까지도 모두 구문(舊文)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유관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ꡒ삼가 상고하오니, 한나라와 당나라․송나라의 제도에 있어, 서한(西漢) 시대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와 태종 효문 황제(太宗孝文皇帝)와 세종 효무 황제(世宗孝武皇帝)와 중종 효선 황제(中宗孝宣皇帝)만 종의 존호를 올렸고, 그 나머지는 모두 종으로 일컫지 않았으며, 동한(東漢)에 있어서는 세조 광무 황제(世祖光武皇帝)와 현종 효명 황제(顯宗孝明皇帝)와 숙종 효장 황제(肅宗孝章皇帝)와 목종 효화 황제(穆宗孝和皇帝) 이외에는 또한 종으로 칭호하지 않았으며, 당나라에서는 고조(高祖)이하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고, 송나라에서는 태조 이하로 또한 모두 종으로 칭호 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서 이것을 법 받아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또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으니, 이는 참람한 일입니다. 그러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은 모두 묘호(廟號)이므로, 이번에 혜왕(惠王)․정왕(定王)으로 칭호를 고쳤습니다. 묘효로써 시호[謚]를 삼는 것은 그 진실을 잃는 것 같아서, 전조사(前朝史)의 시말(始末)을 상세히 상고하오니, 태조의 시호는 신성 대왕(神聖大王)이요, 혜종의 시호는 의공 대왕(義恭大王)이었으며, 정종 이하도 모두 시호가 있었습니다. 재위(在位)의 끝나는 해에 이르러서는, 왕이 아무 전에서 훙(薨)하다 하고, 시호를 올리기를 아무 왕이라 하고, 아무 능(陵)에 장사하고, 묘호는 아무 종(宗)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종에 이르러서 원나라 조정에서 추후해서 충헌왕(忠憲王)이라 시호하였고, 원종(元宗)도 추후해서 충경왕(忠敬王)이라 시호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으로부터 그 이하는 모두 원나라 조정의 시호를 받은 것이오니, 비옵건대, 전조사(前朝史)에 있어 태조를 신성왕(神聖王)이라 고치고, 혜종을 고쳐서 의공왕(義恭王)이라 하며, 정종이하는 모두 본래의 시호로써 아무 왕으로 칭호하면, 거의 사실을 속이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오니, 엎디어 바라건대, 하감(下鑑)하시고 재량 선택하소서.ꡓ하였다. 임금이 또 윤회에게 명하기를,ꡒ전조사에 천변(天變)과 지괴(地?)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다시 실록을 상고하여 다 싣도록 하라.ꡓ 하니, 윤회가 사관들로 하여금 초출하여 등사하게 하고, 윤회가 경연에서 강의를 마친 뒤에, 천변․지괴의 단자(單字)와 지관사(知퉓事) 신 유관의 글을 진정(進呈)한다고 한 것을 다 읽어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ꡒ이와 같은 미소(微小)한 별(星)의 변동은 기록할 것이 못된다.
고려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 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혜종 의공왕이라 하고,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 그 태후․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 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고칠 것이요, 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ꡓ라고 하였다.
세종 6년8월11일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ꡒ역사의 법은 옛부터
있었다. 당나라와 우나라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 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隋)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전 세상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만에 37권이 성취되었으나,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더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라 하시니,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觀)이 말씀을 올리기를,ꡐ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이다.ꡑ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ꡐ공자의 《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을 봉(풧)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와 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ꡑ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반드시 저소손(?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 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으니,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ꡓ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단종의 진상(眞相).
단종이라 함은 후세 숙종이 왜곡한 것이다. 단종이 아니라 노산군이다. 노산군은 문종의 왕위 계승자이지만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단종 1년11월14일 성삼문이 경연의 신하들과 차를 마시고 담소하기를 청하다 경연관(經筵官)이 진강(進講)을 마치자, 좌사간(左司諫) 성삼문(成三問)이 아뢰기를, ꡒ옛날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제후(諸侯)의 조회를 받은 것은 천하의 마음을 정하기 위한 바입니다. 지금 주상께서 유충(幼沖)하시어 궁중에 깊이 거처하시면서 여러 신하들을 한 번도 접견하지 않으시니, 인심이 정하여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초하루와 16일에 백의(白衣)로써 근정문(勤政門)에 납시어 군신들의 조참(朝參)을 받으시면, 군신들이 용안(龍顔)을 뵈올수 있어 인심이 거의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ꡓ 하니, 전지하기를, ꡒ내가 마땅히 대신에게 의논하겠다.ꡓ 하였다. 성삼문이 다시 아뢰기를, ꡒ경연은 조정(朝廷)과 견줄 바가 아니므로 간혹 때때로 특별히 우대(優待)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사다(賜茶)․사좌(賜坐)의 예(禮)가 있었습니다. 신이 지난해부터 간혹 하루나 이틀 걸러서 매양 들어가 진강 하였으나,용안을 우러러 뵈올 수 없었으니, 청컨대 고례(古例)에 의하여 사좌(賜坐)하소서.ꡓ 하니, 전지하기를, ꡒ내 마땅히 따르겠다.ꡓ하였다.
[노산군은 유전병으로 왕위에 오르지도 빼앗기지도 손위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정기(時政記)로 하였지만 세조의 명으로 노산군 일기로 실록을 편찬하였고, 후세의 숙종이 단종실록으로 개명하였고 노산군 일기의 일부내용인 유응부가 세조에게 올린 상소를 삭제하였다. 유응부의 상소는 세조의 계유정난을 극찬한 내용이다.] 세조 1년8월27일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ꡒ근래 《세종실록(世宗實錄)》․《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으로 인하여 시정기(時政記)를 찬집(纂集)할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 실록이 완성되어 가고 있으니, 청컨대 임신년 5월 15일 이후의 시정기를 찬집토록 하소서.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숙종 24년 대왕의 시호를 순정 안장 경순 돈효로 추상하다. 무인년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청하였으므로 추복(追復)이 있었는데, 임금이 이미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묻고, 또 종친(宗親)과 문무(文武)의 대소 관리 4백 90여 인을 소집하여 정의(庭議)하게 하였더니, 그 의논에 이동(異同)이 없지도 않았지만, 성상이 그 구련(拘攣)을 초월한 식견으로 단행하여 의심치 않으매, 여러 신하들이 공경함을 명명(明命)같이 하여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대왕의 시호를 추상(追上)하여 ꡐ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ꡑ라 하고,묘호(廟號)를 ꡐ단종(端宗)ꡑ이라 하며, 능호(陵號)를 ꡐ장릉(莊陵)ꡑ이라 하였다. 왕후의 시호는 ꡐ정순(定順)ꡑ이라하고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며,능호를 ꡐ사릉(思陵)ꡑ이라 하였다. 대체로 청시(請諡)와 상시(上諡)하는 예절은 한결같이 이장(彛章)을 따랐으며, 12월 25일에 임금이 친림한 가운데 신주를 쓰고, 이튿날 새 신주를 명정전(明政殿)에서부터 노부(鹵簿)와 의위를 갖추어 가 종묘로 나아가 뵈임을 예법과 같이 하였다.
이어서 신주를 받들고 영녕전(永寧殿)의 악차(幄次)로 나아갔다가 27일에 이르러 서익(西翼)의 제 3실(第三室)에다 제부하니 위차는 문종 대왕의 아래이었다. 임금이 친히 향사를 행하였다. 처음에 대왕은 영월(寧越)에 장사지내었고, 왕후는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더니, 이
때에 이르러 모조리 그전대로 증수(增修)하고, 모조리 인산(因山)의 제도에 따랐다. 이듬해 3월 초1일에 대왕의 능을 봉(封)하고, 2월 20일에 왕후의 능을 봉하였다.
그전의 신주(神主)는 일찍이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후손 집 사묘(私廟)에다 모셨었으나, 대례(大禮)가 이미 정해짐에 따라, 명하여 방제(旁題)를 쓰게 한 다음 권도로 시민당(時敏)에 옮겼더니, 부묘(附廟)의 예가 끝나자 사릉(思陵)에 매안하였고, 그리고 장릉(莊陵)의 옛 사당에도 또한 두 개의 위판(位版)이 있었던 것을 본릉에 매안하게 하고, 아울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일에 임하게 하니, 대체로 수백 년의 광전(曠典)이 일조에 처음으로 거행되었다. 정성과 문채를 둘 다 극진하게 하니, 유울(幽鬱)함을 잘 씻어 참으로 종묘에 빛이 더하여지고, 그리고 백세에 할 말이 있을 만하게 되었다.
그 뒤 6년 만인 갑신년에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ꡒ그전의 사기인 단종 기서(端宗紀書)에 있어서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라 하였습니다. 당시에 사실에 의거하여 쓴 글을 비록 감히 의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책면(冊面)의 표제(標題)만은 이제 그대로 함이 옳지 못하오니, 청하건대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 고치소서.ꡓ하고, 또 청하기를, ꡒ추복(追復)한 사실을 모아 따로 한 기록을 만들어 열성 실록(列聖實錄) 부록(附錄)의 예를 본받으소서.ꡓ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기어 바로 청(廳)을 설치하고 편찬하기를 명하였다. 대
신으로 그 일을 영솔하게 하니, 이렇게 되어 삼가 중종조[中廟朝] 이후로 모든 숭식(崇飾)한 것은 먼저 위에다 실어서 임금이 오늘의 거사가 실로 계술(繼述)의 뜻에서 나왔고, 전적으로 일개 소신(小臣)의 말에 말미암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내었다. 또 복위(復位) 때의 상소와 의논과 시책(諡冊)․축(祝)․고유(告由)․반교(頒敎) 등의 글을 유별(類別)로 차례로 편입하여 그 시종을 나타내고, 합쳐서 이름하기를, 《단종대왕실록부록(端宗大王實錄附錄)》이라 하였다. 실록이 이미 이루어지니, 명하여 여러 사각(史閣)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니, 임금께서 융숭을 부르고 공렬을 표양한 뜻이 여기에 이르러 더 남은 유감이 없다 하겠다. 신이 마침 외람하게도 태사(太史)에 있었으므로 그 일을 뒤에다 기록하게 하므로, 신이 명을 받고 조심조심 그 대강을 모아 삼가 위와 같이 썼고, 그리고 녹중(錄中)의 서차(序次)와 범례(凡例)는 모두 품의하여 재가를 받고 취지(取旨)를 거친 것이므로 한마디도 그 사이에 덧붙임이 감히 없다고 하겠다.
[갑신년 11월 계묘(癸卯)에 대제학(大提學) 신(臣) 송상기(宋相琦)가 삼가 썼다.]
1. 계유정란과 세조의 손위(遜位)를 선생은, 세종과 문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권을 넘보는 왕자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 틈에 수양대군이 당시 재상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죽이고,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죽이면서 정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가 언관이 됐을 때는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였다. 그리고 언관은 유교이념의 수호자라고 자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집권은 언관들의 탄핵 표적이 되어야 했지만, 그것이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계유정난의 김종서 일당에 대한 기록은 생략합니다 다만 성삼문이 김종서 일당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실록을 보시지요 성삼문이 안평대군 이용의 아들 이우직을 베라고 간청하였는데 수양대군 쿠데타 운운하십니까!]
그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1. 왜 사육신(死六臣)이라 하는가 !
병자년에 역사의 진실과 천상(天上)의 천기(天機)인 환생(還生)의 도를 위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도 감수(甘受)하였던 진정한 선비 열 분의 문사(文士)를 모욕하고 폄하(貶下) 하지 맙시다.
이 분들은 어린 노산군을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다.이 분들은 유교의 이념을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 분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것은 21세기의 우리 인간들에게 천상의 재앙으로 인간들을 불태워 없애고 새로운 천지로 만들고 있음을 경고하려고 한 것이다. 이 열 분들은 김문기. 박중림. 성승. 박팽년. 성삼문. 이개. 이휘.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으로 환생의 업보가 멸하여 마침내 신이 되시어 천상에 오르셨다.
세조는 신숙주와 정인지와 더불어 세종실록과 노산군일기 그리고 자신의 세조실록을 조작하고 왜곡하여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지만 인간들의 일은 항상 저승의 신장들이 신병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밝히는 것이니 비밀이란 없는 것이다. 세조는 병자년의 문사들을 실록에서 무섭게 형벌을 가한 것으로 만들었고, 당시의 신민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았고 논의되지도 않았다. 선조 때에야 비로소 병자년의 사건을 알게 되었다.
세조 2년6월2일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ꡒ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박중림(朴仲林))였습니다.ꡓ 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성격이 출세에 조급하여 스스로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이름은 남의 앞에 있으나 오래도록 제학(提學)과 참의(參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아비 성승(成勝)은 본래 이용(李瑢)과 가까이 지냈는데,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사람을 죽이고 관직이 떨어져 고신(告身)과 과전(科田)을 거두었으나, 이용(李瑢)이 자기 당류(黨類)들에게 말하기를, ꡒ성승이 가장 나를 따르고 있다. 만약 변(變)이라도 있게 되면 의당 내 말[馬]앞에 설 사람이다.ꡓ 하고, 바로 계청(啓請)하여 환급(還給)하였다. 이 말이 남들에게 퍼졌으므로 성삼문이 그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였다. 박팽년은 사위 이전(李?)의 연고로 항상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일찍이 <세조에게> 견책을 받았으므로 원한을 품었었고, 이개(李塏)와 유성원(柳誠源)은 품질(品秩)이 낮은 것에 불평 불만하여 진달(進達)하려는 생각에서 마침내 서로 깊이 결탁하여 급급히 왕래하였는데, 정적(情迹)이 이상하여 남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는데, 그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모의하기를, ꡒ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ꡓ하였다.
김문기는 세조시 도진무가 아니고 공조판서 였습니다. 함길도 도진무의 직명으로 박종우와 함께 간 것은 세종의 밀명으로 모든 사서를 불태워 없애가 위하여 함길도로 갔던 것이다.
*세종 27년5월2일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와 도진무 김문기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朴從愚)에게 안마(鞍馬)․활․화살․옷 1습(襲)과 갓․신
을, 도진무(都鎭撫) 김문기(金文起)에게도 옷 1습과 활․화살 등을 내려 주고, 좌승
지 유의손(柳義孫)에게 명하여 모두 고기를 먹도록 권하고는 보내게 하였다.
◎공조 판서
세조 1년7월22일 김문기(金文起)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세조 2년6월4일 김문기의 공조판서를 해임하고 성봉조로 하였습니다.
성봉조(成奉祖)를 공조 판서로, 홍윤성(洪允成)을 예조 참판으로, 홍원용(洪元用)
을 호조 참판으로, 강곤(康袞)․박형(朴炯)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봉석주
(奉石柱)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안숭직(安崇直)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강희안(姜希顔)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조석문(曹錫文)을 승정원(承政院) 좌부승
지(左副承旨)로, 윤자운(尹子雲)을 우부승지로, 한계미(韓繼美)를 동부승지로, 이비
(李쯻)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삼았다.
6월2일 당시의 직책입니다
공조 판서 김문기(金文起). 예조 참판(禮曹參判)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하였는데 김문기는 박팽년과는 족친도 인척(姻戚)도 아닙니다. 다만 박팽년은 김종서와 족친 입니다. 신숙주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단종 1년 7월28일 김종서가 말하기를 박중림은 신(臣)의 친척인데, 참으로 대사헌의 직임(職任)을 감당할만하기 때문에 추천한 것이고, 또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ꡓ하였다.
◎ 6월9일 세조의 교서입니다. 왜 사육신입니까!
세조 실록 어느 구석에도 (死六臣)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후세 숙종 영조 정조가 자신들에게 필요하고, 명분론에 휩싸인 유생(儒生)들이 절실하게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필요하였던 절의(節義)의 명분으로 (死六臣)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조가 예종에게 내린 훈사(訓辭)를 이용하여 오늘의 난신(亂臣)이 후일의 충신(忠臣)이라고 세조가 말했다고 사실을 조작하여 이용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세조 2년6월9일 의정부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역신(逆臣)을 주륙(誅戮)한 것을 하례하였다. 그 전문은 이러하였다. ꡒ천도(天道)가 거짓이 없어서 죄인들이 이미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으며, 은택(恩澤)이 넘쳐 흘러 은명(恩命)이 아래에 반포되니, 기뻐하는 소리가 먼 곳에까지 퍼지고 기쁜 기운이 넓게 오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사사로이 신하는 장(將)이 없어야 하는데 천고의 떳떳한 가르침이 밝고 국가의 법제에 정한 것이 있으니, 두 가지 마음을 품은 자는 반드시 주륙하게 되는 법입니다. 오로지 대의(大義)가 그러한 까닭이 불궤(不軌)는 용서 못하는 것입니다. 전자에 역도들이 서로 선동하여 흉포한 계략을 행하려 하였으므로, 성주(聖主)께서 비록 간악한 자들을 삼제(芟除)하였다 하지만, 뭇 추악한 자들의 여당이 남아 있어 마음에 보복할 것을 품고 장차 국가에 화(禍)를 끼치려고 하니, 그 뜻이 흉악하고 잔악하여 군부(君父)에 대하여 감정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리(逆理)와 순리(順理)는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며 귀신을 속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불일간(不日間)에 하늘까지 넘치는 악을 바로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날리고 우뢰가 엄하여 요사한 기운은 확청(廓淸)되고, 하늘과 별이 질서 있게 돌면서 현묘한 변화가 묵묵히 운행되고 있으니,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천년의 운수를 타고나고 덕은 백왕(百王)의 으뜸이십니다. 천토(天討)의 위세를 딛고 일어나 공손히 행하고 신무(神武)의 측량할 수 없는 천품을 타고나 더욱 귀신과 사람의 소망을 위로하고, 영구히 종묘와 사직의 안정을 굳혔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 성대한 공렬(功烈)을 얻어 보게 되었으므로, 대궐 뜰에 줄지어 서서 칠덕(七德)의 노래를 화답하여 부르고 호배(虎拜)로 아름다움을 선양하며 성상의 만년의 수(壽)를 빕니다.ꡓ
이어서 사면령을 중외(中外)에 반포하니,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ꡒ지난번에 이용(李瑢)이 모역(謀逆)할 때, 널리 당파를 심어 중외에 반거(盤據)하였으므로 흉포한 도당이 진실로 많았지만, 내가 차마 모조리 처벌하지 못하고 그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문에 부쳤는데, 남은 도당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서로 이어서 난(亂)을 도모하므로, 그때 그때 주륙(誅戮)하여 제거하였으나, 근자에 또 여당(餘黨) 이개(李塏)가 흉악한 마음을 품고 감정을 풀고자 하여 난(亂)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그의 도당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허조(許?)․박대년(朴大年)이 같은 악당으로 서로 선동하여, 장신(將臣)인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박쟁(朴?)․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성삼고(成三顧) 등과 비밀히 결탁하여 우익(羽翼)을 삼고, 권자신(權自愼)․윤영손(尹令孫)․조청로(趙淸老)․황선보(黃善寶)․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권저(權著)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禁)에 연통하고,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날짜를 정해 거사(擧事)하여서 장차 과궁(寡躬)을 위해(危害)하고 어린 임금을 옹립하여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흉포한 모략과 간악한 계략을 꾸며 그 죄역(罪逆)이 하늘을 뒤덮었다. 다행히 천지 신명(天地神明)과 종묘 사직의 도움을 받아 대악(大惡)이 스스로 드러나 모두 그 죄를 받았다. 마땅히 적족(赤族)의 벌을 가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씻어야 할 것이나, 오히려 너그러운 법에 따라서 같은 악당만 주륙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죽임을 용서해 주었다. 다행히 죄인을 이제 잡아 문득 하늘의 벌을 주었으니,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펴서 신민(臣民)과 경사를 함께 하여야 하겠다. 경태(景泰) 7년 6월 초9일 새벽 이전에 모반 대역(謀反大逆)과 모반(謀叛)한 자손으로서 조부모와 부모를 죽이려고 도모하거나 구타 또는 욕설을 한 자,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謀殺)한 자,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한 자, 고독(蠱毒)과 염매(?魅)한 것,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도모한 자와 그리고 강도(强盜)․절도(竊盜)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이 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죄를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가 있기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주겠다. 아아! 포악한 자를 죽이고 간악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모두 나라의 떳떳한 법을 실행하는 것이요,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깊은 은혜를 기리는 것이다.ꡓ
조선왕조실록이 숨겨놓은 역사의 비밀
(12)
◎ 재궁(梓宮)을 내다 버린 것이 아니다.
세조 3년6월26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ꡒ현덕 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어미 아지
(阿只)와 그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모반(謀反)하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는데,그 아비
권전(權專)이 이미 추후하여 폐(廢)하여서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으며, 또 노산군(魯山
君)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어 이미 군(君)으로 강봉(降封)하였으나, 그 어미는 아직도
명위(名位)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마땅하지 않으니, 청컨대 추후 하여 폐(廢)하여서 서인
(庶人)으로 만들어 개장(改葬)하소서.ꡓ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육신전(六臣傳)》은 박계현이 지은 것이다 !
선조 9년6월24일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고 상이 괴이하게 여겨 토론에 부치다. 상이, 경연관이 아뢴 바에 따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가져다 보고 나서 삼공을 불러 전교하기를, ꡒ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
지난날 우리 광묘(光廟)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문묵(文墨)을 희롱하여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아조(我朝)의 죄인이다. 옛날에 최호(崔浩)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노산 군(魯山君)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유년에 출생하여 계유년까지 그의 나이가 13세인데도 16세로 기록하였으며, 광묘께서 임신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었는데 여기에는 부음(訃音)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위지(河緯地)가 계유년에 조복(朝服)을 벗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광묘께서 즉위하여 교서(敎書)로 불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하위지가 갑술년에 집현전(集賢殿)에서 글을 올린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왜곡되고 허탄함은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가슴아픈 것은 뒷사람들이 어떻게 그 일의 전말(顚末)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번 그 글을 보고 곧 구실(口實)로 삼는다면, 이 글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치기에 적당한 것이 될 것
이다. 또 한가지 논할 것이 있다.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 이미 몸을 맡겨 임금으로 섬기고서 또 시해(弑害)하려 했으니 이는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그런데도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아조를 섬기다가 필부(匹夫)의 꾀를 도모하여 자객(刺客)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이에 의사(義士)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열장부(烈丈夫)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ꡐ헛되이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덕을 갚는 것만 못하다. 성삼문(成三問) 등은 그 마음에 잠시도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있었으므로 아조(我朝)를 섬긴 것은 뒷날의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ꡑ라고도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공을 이루는 것만을 귀히 여기고 몸을 맡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삼인(三仁)도 반드시 서로 모의하여 머리를 굽히고 주(周)나라를 섬기면서 흥복(興復)을 도모했을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은 자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제 드러내서 아울러 논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각기 군주를 위하는 것인데 이들은 아조(我朝)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ꡓ 하였다. 회계하기를,ꡒ신들이 삼가 비망기(備
忘記)를 보니 놀라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육신전》에 대해서 경연 석상에서 아뢴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가 애통하고 간측한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에 합당한 일입니다. 다만 이 글의 잘못된 점과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진실로 성유(聖諭)와 같더라도 여염(閭閻) 사이에 드물게 있는 책이며 또 세월이 오래되어 점차 없어져 가는 끝인데 만약 수색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나서 끝내는 이익 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요망스러운 책을 진실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서로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한다는 법이 일단 내리게 되면 풍속이 각박한 이런 때에 고알(告쳿)하는 길이 이로부터 열리게 되고 무고(誣告)하는 폐단도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중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들으면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중지될 것입니다.ꡓ 하니, 답하기를, ꡒ그렇게 말하니 지금 우선은 따른다.ꡓ 하였다.
선수 9년6월1일 경연에 나아가 《육신전》에 관해 논하다.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입시하였다. 이어 아뢰기를,ꡒ성삼문(成三問)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육신전(六臣傳)》은 곧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것이니 상께서 가져다가 보시면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ꡓ 하니, 즉시 《육신전》을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ꡒ엉터리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나는 앞으로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ꡓ하였다. 뒷날 영의정 홍섬(洪暹)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정을 극도로 말하였는데, 몹시 간절하여 듣는 이가 측은하게 여겼으며, 상도 노여움을 거두고 중지하였다.
* 군간이라고 모욕하여 사육신의 진상을 모르는 남효온
성종 9년4월15일 남효온이 혼인, 수령의 선발, 내수사의 폐지 등에 대해 상소하다.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의 상소는 이러하였다. 그 하나는, 소릉(昭陵)을 추복(追復)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은 하늘이 준 용지(勇智)로써 일월(日月)같은 밝음을 가지시고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큰 어려움을 깨끗하게 타개하여 집을 나라로 만들어서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다가 다시 안정되었고 이 백성이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뜻밖에 다스리는 교화가 바야흐로 흡족하게 되자 재앙이 그 틈을 일어가서, 병자년에 군간( 奸)이 난(亂)을 일으켜서 중외(中外)가 경동(驚動)하여 우리 사직(社稷)이 거의 기울었으나, 곧 잇달아 복주(伏誅)하여 거의 베어서 없앴는데, 남은 화(禍)가 소릉(昭陵)에 미쳐서 20여년 동안 폐함을 당하여 원혼(寃魂)이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니, 신이 모르기는 하나, 하늘에 계시는 문종(文宗)의 영(靈)이 홀로 제사를 받기를 즐겨하시겠습니까?
역사를 모독한 당대 최고 문장가 남효온의 죄는 왕실의 비밀을 모르고 설친 것
연산 4년8월16일 남효온에 대한 평가.
남효온(南孝溫)이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큰 뜻이 있었다. 성종조(成宗朝)에 상서(上書)하여 일을 말하다가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스로 그 뜻을 세상에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방임하여 얽매이지 않아 시속과 더불어 오르내리지 않았고, 노․장(老莊)의 고허(高虛)한 논을 본받아서 혜강(?康)․완적(阮籍)의 방달(放達)한 행동을 하였으며,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초매(超邁)하여 고체(固滯)한 누습이 없었다.
더욱이 시에 능하여 당(唐)나라 시인의 풍격이 있었는데, 불공평한 세상에 격분하여 유리하여 이단(異端)이 되어 죽음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했으니, 진실로 우리 도의 죄인이라 하겠다. 연산 5년10월7일 우리 나라의 글 잘하는 사람의 시․문을 인쇄하는 데에 남효온의 것을 빼다. 윤필상 등이 또 아뢰기를, ꡒ근래 우리나라 글 잘하는 선비가 지은 시․문(詩文)을 명하여 모두 인출하게 하셨습니다. 남효온(南孝溫)의 시․문도 인출하라고 명 하였 사오나, 남효온은 김종직의 제자로 행동이 또 괴이하여 추강거사(秋江居士)라 자호(自號)하고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뜻이 있사오니, 지금 그 시․문을 함께 인쇄함은 불가하옵니다.ꡓ 하니, 그대로 좇았다.
남효온은 <행동이> 질탕(跌蕩)하고 검속함이 없었으며, 그 문장도 취할 만한 것이 많았다.
근세의 김종직이 문장에 제일 오묘한 <이치를> 얻었는데, 남효온의 작품을 보고는 추허(推
許)하기를 마지않았다. 윤필상 등이 김종직을 미워하므로 그 제자까지 이 말을 하여 저지하였던 것이다. 연산 10년5월30일 국상 때 놀며 잔치한 사람과 궁중 일을 전하여 말한 사람들을 잡아 가두게 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남효온(南孝溫)이란 이가 있어 널리 배워 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성종조에 일찍이 글을 올려 일을 말한 뒤로는 거짓 미쳐 벼슬하지 않고, 자호(自號)를 추강 거사(秋江居士)라고 하였다. 문장을 공부하였는데, 시가 고고(高古)하여 당(唐)나라 문인들의 기풍이 있었다. 때로 총(摠)과 함께 놀면서, 현금부(玄琴賦)를 지어 찬양하였고, 《추강집(秋江集)》이란 저서(著書)가 있다.】
연산 10년11월9일 춘추관이 하계증 등의 형 집행에 대해 상세히 아뢰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ꡒ소릉(昭陵:문종 비의 능으로 경기 안산의 소릉은 세조때 폐해 海濱으로 이장했다가 중종때 현릉(顯陵:문종릉)으로 다시 이장했다) 복위에 관한 상소는 남효온(南孝溫)이 한 것인데, 아비는 남전(南힜), 아들은 남충서(南忠恕)이며, 형제간은 없습니다.ꡓ하였다. 연산 10년11월9일 남효온의 아들 남충서를 잡아들이다. 전교하기를,ꡒ남효온의 아들 남충서를 잡아오라.ꡓ하였다.
연산 10년11월13일 성중온 등을 익명서 사건으로 형신하고, 남효온 등을 극형에 처하게 하
다. 전교하기를, ꡒ 남효온(南孝溫)은 난신(亂臣)의 예로 부관 능지(剖棺凌遲)하여 가산을 몰수하고,그 아들은 참형에 처하여 효수(梟首)하되,ꡐ아비 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한 죄ꡑ라고 찌를 써달라.ꡓ하였다. 연산 11년2월24일 죄인 남효온의 집을 오천 부정 이사종에게 내리게 하다. 전교하기를,ꡒ죄인 남효온(南孝溫)의 집을 오천 부정 이사종(烏川副正李嗣宗)에 내리라.ꡓ 하였다. 중종 6년3월14일 참찬관 이세인이 성종조 문사들의 유고 개간을 아뢰니 따르다. 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세인(李世仁)이 아뢰기를,ꡒ지금 글을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갖추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조에 문사들을 교육 양성하여 인재가 크게 성하였으니, 최숙정(崔淑精)․성현(成俔)․조위(曹偉)․유호인(兪好仁)․박은(朴誾)․김맹성(金孟性)․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들이 모두 한 때의 명현이요,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아니지만, 또한 한 때의 문사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 유고(遺稿)가 모두 묻히고 없어져 전하지 않으니, 후의 사람들이 무엇으로 일시 문장의 성함을 알겠습니까? 크게 정치 체제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민멸(泯滅)하여 전함이 없게 할 수 없습니다. 위의 몇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선인의 유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니, 청컨대 모아 거두어서 편집하여 개간(開刊) 전파함이 매우 마땅한가 합니다.ꡓ 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전에 이미 명하여 이 사람들의 문집을 모아 편집하여 개간하게 하였으니, 다시 명하여 속히 간행하게 하여야 하겠다.ꡓ하였다.
중종 8년1월23일 상참을 받고 계복을 듣고 조강에 나아가다. 특진관(特進官) 김전(金詮)이 아뢰기를,ꡒ남효온(南孝溫)이 화(禍)를 당한 뒤부터는 전연 소릉의 추복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언로(言路)가 크게 열렸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니, 이 논쟁이 어느 때인들 없어지리까!ꡓ 하였으나, 상이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조 의릉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 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家)나 되었다.
일찍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倭寇)를 방비했는데, 조금 후에 원(元)나라 야굴대왕(也窟大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침략하니, 목조는 두타 산성(頭陀山城)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곧 덕원(德原)이다.】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동북(東北)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고원(高原)을 지켜 원(元)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雙城) 이북【쌍성은 곧 영흥(永興)이다.】 지방이 개원로(開元路)에 소속되었고, 원(元)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철령(鐵嶺) 이북 지방을 취(取)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붙좇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께 따라오니, 산길(散吉)이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산길이 친히 옥배(玉杯)를 목조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ꡒ공(公)의 가인(家人)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서로 친하는 지극한 정리를 알겠습니까? 부족하나마 옥배(玉杯)로써 나의 정을 표시할 뿐입니다.ꡓ하고, 이내 서로 함께 맹세하기를,ꡒ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ꡓ하였다.
목조는 이에 동종(同宗)의 딸을 산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목조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지나서 시리(時利)【곧 이성(利城)이다.】에 이르렀는데, 그 천호(千戶)가 군사로써 막으므로, 목조가 귀순(歸順)한다는 뜻을 말하니, 천호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목조도 또한 소와 말로써 그에게 보답하고, 마침내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이때가 송(宋)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1254)이요, 원(元)나라 헌종(憲宗) 4년이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이다.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알동 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金牌)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南京等處)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알동(斡東)은 남경(南京) 동남쪽 90여 리(里)에 있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알동의 서북쪽 1백 20여 리에 두문성(豆門城)이 있고, 또 그 서쪽 1백 20여 리에 알동 사오리(斡東沙吾里)가 있으니, 사오리(沙吾里)는 여진(女眞) 말로서 참(站)이다. 참(站)이 관동 알동의 관내(管內)에 있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평야(平野)에 큰 토성(土城)이 있고, 남경(南京)의 평야에도 또한 큰 토성이 있으며, 그 북쪽 7, 8리에도 또한 큰 석성(石城)이 있으니, 모두 목조가 관령(管領)한 군민(軍民)이 거처하던 곳이다.
목조는 비록 알동에 거처하였으나, 여러 성(城)에 왕래하여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알동의 동남쪽 30여 리에 해도(海島)가 있는데, 자고라(者考羅)라고 한다. 북쪽으로 육지에 연하였는데, 목조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 지원(至元) 원년(1264) 갑자 5월에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 천호(斡東千戶)에 충원(充員)되었다. 지원(至元) 11년(1274) 갑술 12월에 훙(薨)하니, 공주(孔州)【곧 경흥부(慶興府)이다.】 성(城) 남쪽 5리(里)에 장사하였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府) 달단동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德陵)이다.
처음에 목조가 때때로 현성(峴城)에 가니, 여러 여진(女眞)의 천호(千戶)와 다루가치(達魯花赤)들이 모두 교제(交際)하기를 원하므로, 마침내 그들과 함께 놀았다. 여러 천호(千戶)들이 예절을 갖추어 대접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고, 반드시 소와 말을 잡아서 연회를 베풀고는 문득 수일(數日)을 유련(留連)하였으며, 여러 천호들로서 알동(斡東)에 이른 사람이 있으면 목조도 또한 이같이 접대하였다.
익조(翼祖) 때에 이르러서도 이대로 따라 행하고 고치지 않았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ꡒ이행리(李行里)【익조.】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ꡓ 하였다. 이에 거짓으로 고(告)하기를,ꡒ우리들이 장차 북쪽 땅에서 사냥하고 오겠으니 20일 동안 정회(停會)하기를 청합니다.ꡓ 하니, 익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기일이 지나서도 오지 않으므로, 익조가 친히 현성(峴城)에 가니, 다만 노약(老弱)과 부녀(婦女)들만이 있고 장정(壯丁)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여자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ꡒ그 짐승이 많은 것을 탐내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ꡓ하였다. 익조가 이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할멈이 머리에 물동이[水桶]를 이고 손에는 한 개의 주발[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 익조가 갑자기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자 하니, 할멈이 그 주발을 깨끗이 씻어 물을 떠서 바치고, 이내 말하기를ꡒ공(公)은 알지 못합니까? 이곳 사람들이 공을 꺼려하여 장차 도모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간 것이고, 사냥하려고 간 것은 아닙니다. 3일 후에는 반드시 올 것인데, 귀관(貴官)의 위엄과 덕망이 애석하므로,
감히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ꡓ하였다. 익조는 황급히 돌아와서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가산(家産)을 배에 싣고 두만강(豆滿江)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기는 손 부인(孫夫人)과 함께 가양탄(加陽灘)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알동(斡東)의 들에 적병이 가득히 차서 오고, 선봉(先鋒) 3백여 명은 거의 뒤를 따라왔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적도(赤島)의 북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의 넓이는 6백 보(步)나 될 만하고,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약속한 배도 또한 이르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북해(北海)는 본디 조수(潮水)가 없었는데, 물이 갑자기 약 백여 보(步) 가량이나 줄어들어 얕아져서 건널 만하므로, 익조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白馬)를 같이 타고 건너가고, 종자(從者)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이르니,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하였다. 북방 사람이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ꡒ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ꡓ하였다.
익조는 이에 움을 만들어 거주하였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알동(斡東)의 백성들이 익조의 있는 곳을 알고,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 장꾼과 같이 많았다. 모두 섬 가운데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직도(稷島)․추도(楸島)․초도(草島)의 재목을 베어 배 10척을 만들어 지원(至元) 27년(1290) 경인에 다시 수로(水路)로 해서 의주(宜州)에 돌아와 거주하니, 공주(孔州)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왔다. 그들이 거주하던 땅을 지금도 적전(赤田)이라 일컬으니, 그들이 적도(赤島)에서 온 때문이다.
모년(某年) 9월 10일에 익조가 훙(薨)하였다. 안변부(安邊府)의 서곡현(瑞谷縣) 봉룡역(奉龍驛) 북동(北洞)에 장사지냈으니, 곧 지릉(智陵)이다. 처음에 익조는, 함주(咸州)의 토지가 평탄하고 넓고 비옥하기 때문에 알동(斡東)의 백성들로서 남으로 오는 사람을 함주(咸州)의 귀주(歸州)․초고대(草古臺)․왕거산(王巨山)․운천(雲天)․송두(松豆)․도련포(都連浦)․아적랑이(阿赤郞耳) 등에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함주(咸州)를 일컬어 알동 일언(斡東逸彦)【여진(女眞)에서는 백성을 일언(逸彦)이라 한다.】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도조가 안변(安邊) 이북의 땅을 다 차지하였으나 함주(咸州)로 옮겨 거처한 것은, 남방으로 온 백성과 가까이 하고, 또 목축(牧畜)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도조의 꿈에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ꡒ나는 백룡(白龍)입니다. 지금 모처(某處)에 있는데, 흑룡(黑龍)이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하니, 공(公)은 구원해 주십시오.ꡓ 하였다. 도조가 꿈을 깨고 난 후에 보통으로 여기고 이상히 생각하지 않았더니, 또 꿈에 백룡이 다시 나타나서 간절히 청하기를,ꡒ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ꡓ하면서, 또한 날짜까지 말하였다.
도조는 그제야 이를 이상히 여기고 기일이 되어 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보니, 구름과 안개가 어둑컴컴한데, 백룡과 흑룡이 한창 못 가운데서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흑룡을 쏘니, 화살 한 개에 맞아 죽어 못에 잠기었다. 뒤에 꿈을 꾸니, 백룡이 와서 사례하기를,ꡒ공의 큰
경사(慶事)는 장차 자손에 있을 것입니다.ꡓ하였다. 지정(至正)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 (義陵)이다.
세종 15년2월26일
임금이 안숭선으로 하여금 세 의정에게 밀의(密議)시키기를,ꡒ태조와 태종의 유복지친(有服之親)이 함흥 땅에 많이 사는데,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자 변고(變故)를 많이 당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태종께서도 겸양(謙讓) 하시와 벼슬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과인에 이르러서도 복(服)을 다한 친족에게 벼슬을 다 주기 어려웠다. 당 고조(唐高祖)는 동성(同姓)을 널리 봉(封)하자 봉덕이(封德츺)가 그르다고 하였고, 송 신종(宋神宗)은 은혜가 단문(袒聞)의 친족에게 미쳐서 이름을 주고 벼슬을 제수하자,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일컬었으니, 지금 태조․태종의 유복지친에게도 모두 벼슬을 주고 또 전토를 줌이 어떨까.
또 한창수(韓昌壽)의 아우 융전(隆田)은 바로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동생인데, 첨설 사재 부정(添設司宰副正)으로서【다만 그 직(職)을 주고 그 벼슬에 근무하지 아니하는 것을 첨설이라고 한다.】함흥에 물러가서 늙었고, 그 형 검한성윤(檢漢城尹) 금강(金剛)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여 죽은 뒤에 추증(追贈)하였으니, 지금 융전에게 동지돈녕(同知敦寧)을 주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옛날 환조(桓祖)의 후손이 종친의 반열(班列)에 있었는데, 하윤(河崙)이 태종조 때에 말하기를, ꡐ태조의 후손으로부터 종친의 반열에 두어 원근(遠近)과 친소(親疎)를 분별하소서.ꡑ하여, 태종께서 드디어 법을 세워 분별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종친으로 종친의 반열에 두기에 마땅하지 못한 사람을 내가 다 알지 못하여, 혹 임명해 쓸 때에 빠뜨렸으므로 충의위(忠義衛)에 붙이고자 하나, 만일 혹 불가하다면, 별도로 붙일 곳을 설립하는 것이 어떨까.ꡓ하니, 황희․권진 등이 아뢰기를,역대(歷代)를 상고하건대, 혹은 종척(宗戚)을 중히 하여 일과 권세를 전임하고, 혹은 친한 연고를 혐의하여 벼슬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종친을 친목함은 천리(天理)와 인정에 합하는 지극한 도리입니다. 만일 재능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같이 서용하고, 진실로 그 재주가 없으면 작(爵)을 준 뒤에 시골에 한가롭게 물러가 살게 함이 가하옵니다. 또 함흥의 진황 전지(陳荒田地)를 한 사람마다 3, 4결(結) 혹은 4, 5결을 주고 전조(田租)를 없애어 특별한 은혜를 내리옵소서. 또 융전(隆田)에게 벼슬을 주는 일은, 또한 전하의 사의(私意)가 아니고, 실은 종척을 돈목(敦睦)하는 공의(公義)이오니, 마땅히 벼슬을 더하여 은의(恩義)를 보일 것입니다.
충의위(忠義衛)는 오로지 공신(功臣)의 후손을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또 별도로 붙일 곳을 설립하면 다른 날에 자손이 많아서 후폐(後弊)가 생길까 두렵사오니, 그것보다는 예전대로 재능(才能)이 있는 이를 골라서 쓰는 것이 가하옵니다.ꡓ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모두 좇고, 태조․태종의 유복지친을 기록해 아뢰도록 명하였다.
삼수갑산 야인과 삼국유사
검토관 최홍제(崔弘濟)가 글에 임하여 아뢰기를, 고구려 때 당(唐)나라 군사가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칠 적에는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창졸간에 10만 병마(兵馬)를 구득하여 구원했고,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백제를 칠 적에도 6만 병마를 썼습니다. 이때에 당해서는 삼국(三國)이 서로 대립하여 국토가 협소했는데도 군액(軍額)이 오히려 이러했습니다. 지금 우리 국가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죄상을 묻기로 한다면, 13만의 병마를 어찌 쉽게 구득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온 나라 군사를 출동시킨다 하더라도 6만 군사도 구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종 30년10월9일 유보는 아뢰기를,ꡒ변경 방비에 관한 일도 잘 살피셔야 합니다. 가덕도(加德島)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은, 비록 태평 시대라고는 하지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포(滿浦) 건너편에 와서 사는 야인(野人)들은 타일러도 떠나지 않으면 죄를 성토하고 몰아내야 합니다. 이 일도 우려스럽긴 하지만 이는 변방의 일입니다. 함경도에는 귀화한 야
인이 내지(內地)에 많이 삽니다. 북청(北靑)의 무해대(無海臺)【지명(地名)임.】에는 귀화한 야인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으므로 더욱 우려됩니다.
지난날 제포(薺捕)에 왜노(倭奴)가 많이 와서 살 적에 조정에서는 뱃속의 병처럼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러다 경오년의 난(亂)이 일어났었는데 국가에서 제압하였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함경도에 많이 살고 있는 야인은 왜노보다도 많습니다. 만일 그들이 기회를 봐서 일어난다면 화를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노는 주사(舟師)여서 칼만 사용할 수 있을 뿐 활은 잘 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인은 육전(陸戰)이 그들의 장기(長技)이니, 휘몰아 쳐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미리 조처해야 됩니다.ꡓ 하고, 특진관(特進官) 윤희평(尹熙平)은 아뢰기를,ꡒ북청의 무해대에는 귀화인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을 물리치고 육진(六鎭)을 설치하였지만 함경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이 아닙니다. 이른바 남옥저(南沃沮)는 곧 오늘의 오도리(烏道里)【호족(胡族)의 일종임.】이고 예맥(穢貊)은 곧 오늘날의 강원도 땅입니다.
춘천(春川)에서 맥국(貊國)의 도장[印]을 얻었다고 하니, 이곳은 예맥 땅인 것입니다. 지금 경흥(慶興)으로 물러나 사는 골간우지개(骨間亐知介)【호족의 일종임.】가 바로 그들인데 말을 타고 휘몰아쳐 오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전조(前朝)말에 고원(高源)과 덕원(德源) 사이로 들어왔었습니다. 덕원에 철관(鐵關)【지명임.】이란 곳이 있는데 여기로 온 것입니다. 우리 태조 대왕과 이인우(李仁佑)가 이들을 평정하였지만 그곳은 본래 우리 땅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의 도읍은 지금의 삼위(三衛)【모련위(毛憐衛)와 건주위(建州衛) 등임.】에 있었으며, 동옥저(東沃沮)는 곧 백두산 동쪽 갑산(甲山)과 삼수(三水) 땅입니다. 북청의 무해대와 경성(鏡城)의 청암(靑巖)에는 귀화한 야인이 옛부터 살았습니다. 용성(龍城)의 물이 갈라져서 한 줄기는 수을온(殊乙溫)으로 흐르고 한 줄기는 청암으로 흐릅니다. 청암의 야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에 전념하며 살아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경성은 성이 튼튼하고 성 밖으로는 긴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백성의 전지는 야인의 전지와 서로 섞여 있어 함께 농사지어 먹고 삽니다. 수확을 미처 거두지 못하고 들어올 경우에는 곡식을 야인에게 맡기고 옵니다. 야인도 지금은 우리 나라 사람과 같고 글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원과 경흥 등지에 사는 야인과 서로 왕래하여 혼인을 맺습니다.
요즈음은 문천(文川)에까지 옮겨 와 사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호복(胡服)을 입고 말타고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혹 황해도 등의 지역으로도 나와서 백성들이 말리려 널어놓은 곡식을 빼앗아 가는 등 제멋대로 날뜁니다. 그대로 두면 강원도에까지 이를 것이고 이어 하삼도(下三道)에까지 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추쇠(推刷)해도 되겠습니다만, 만일 무해대와 청암 등지에서 편안하게 사는 자들을 추쇄한다면 반드시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ꡓ 하고, 보는 아뢰기를, ꡒ지금은 비록 이러하나 오호(五胡)의 난(亂)을 거울삼아야 합니다. 오호가 마음을 바꾸어 귀화할 때는 백성과 같았지만 끝내 중국을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만들고 말았습니다.ꡓ 하니, 상이 일렀다.
ꡒ이런 일은 천천히 도모해가면 가능하지만, 급하게 조처하면 소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ꡓ광해 즉위년8월16일 비변사가 함경 감사 장만(張晩)의 진폐 차자(陳弊箚子)에 대하여 회계하기를,ꡒ함경도는 <관동과 이어진 지역으로 곧 삼국 시대 신라의 경계입니다. 정몽주(鄭夢周)의 연자루기(燕子樓記)에서도 참고할 수 있거니와, 신라 성덕왕의 순수비(巡狩碑)도 아직 황초령(黃草嶺)에 남아 있어 사적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고구려의 땅이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신라 중엽 이후로 고구려에 편입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대가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후가 몹시 춥고 토지가 척박한데다, 또 호인(胡人)의 부락과 강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지만,그러나 여느 때는 번호(藩胡)와 고기 및 소금을 무역하여 입에 풀칠을 하여 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호인의 부락마저 다 비고 초서(貂鼠) 따위의 물건을 매매할 길이 없어서 떠돌며 고생하는 모양이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합니다.
삼수(三水)․갑산(甲山)에 있어서는 지세가 높고 기후가 추워서 곡식이라고는 귀리뿐인데, 때로는 7월에 서리가 내려서 이것마저 전혀 수확하지 못할 적도 있어, 식생활의 어려움은 육진(六鎭)보다도 더 심하고 큰 산과 깊은 계곡만이 수천 리를 뻗어 있을 뿐이니, 지지(地誌)에 이른바 1보(步)의 평지도 없다는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방어를 육진보다 조금 허술히 하였던 것이나, 지금의 사세로 말한다면 지대가 노추(老酋)의 소굴과 가까워서 우예(虞芮)․여연(閭延) 일대에서 몰래 별해(別害)로 진출하여 함흥(咸興)을 지레 공략할 경우, 참으로 관북 지역 복심(腹心)의 걱정거리입니다. 외적이 쳐들어 올 우려가 북도에 더 있기 때문에 지난날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육진의 예에 따라 상의원에 공납하는 초서(貂鼠)․호피(狐皮)․토초피(土貂皮) 역시 절반으로 줄였던 것으로, 군민(軍民)이 입은 혜택은 실로 컸습니다. 그리고 본도의 남․북 두 도가 군민이 줄어든 수가 이미 십분에 이르러서, 이른바 내버린 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불교의 허탄(虛誕)한 이야기로 고려 도종의 역사 왜곡을 미화한 것이
다. 조선조의 사관들은 이 광망(狂妄)한 이단서(異端書)를 취급하지 않았다.
삼국유사는 사서(史書)가 단연코 아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왕건이 한(漢)나라를 완전히 없애려한 뜻을 받들어 만든 책으로 일연이 불가(佛家)의 설화를 인용한 것이다. 세종이 삼국유사를 이용하려 하였으나 너무나 황당하여 폐기하였다. 다만 삼성혈(三姓穴)의 전설을 지리지 제주목에 기록한 것이다. 이 삼성혈은 왕건이 조작한 것으로 한(漢)나라의 대성(大姓)인 고(高)씨, 부(夫)씨, 양(梁)씨의 득세(得勢)를 방지하기 위하여 제주에다 설화로 조작한 것이다. 이 사실을 세종이 또한 이용하여 지리지에 기록한 것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
세종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 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列擧)하였는데 탁라(?羅)가 네 번째에 있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 병진【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4년.】에 탐라국 사자(耽羅國使者)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東城王) 20년 경신【남제(南齊) 태조(太祖) 건원(健元) 2년.】에 탐라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한다 하여 왕이 친정(親征)하여 무진주(武珍州)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ꡓ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ꡒ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라.ꡓ하였다. 백제가 망하니,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 임술【당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좌평은 백제의 벼슬 이름이다.】
단종 즉위년6월28일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 윤(慶昌府尹)
이선제(李先齊)가 상서하였다. ꡒ신이 들으니 황해도 인민의 병이 갑자기 여항(閭巷)에서 발생하여 사방에 전염해서 북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남으로 기현(畿縣)에 이르러, 사망이 서로 이어 민호(民戶)를 싹 쓸었다 합니다.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무오년․기미년 간에 집현전에 입직(入直)하는데 봉산군(鳳山郡)에 사는 서리(書吏) 오성우(吳成祐)가 직소(直所)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황해도 인민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ꡐ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ꡑ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ꡐ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쪸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장연․재령․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ꡑ 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세종께서 마음에 극히 아프게 여기어 전의 부정(典醫副正) 김여생(金麗生)을 보내어 그 도의 의원 5인을 거느리고 마을에 돌아다니며 여러 방법으로 구료(救療)하고 또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ꡐ문화․장연․황주․재령․신천 등지 주현(州縣)에 모두 여제단(쪸祭壇)을 설치하고 전물(奠物)을 풍성하게 갖추어, 여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재계하고 제사를 행하여 여기(쪸氣)를 사라지게 하라.ꡑ 하였으니, 그 구제하는 법이 사책에 펴서 있으므로 성려(聖慮)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오랠수록 병은 더욱 치성하여 다른 지방에 파급되고 남김없이 전염하여 죽으니, 만연하는 해(害)가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마음에 이리저리 생각한 지가 오랩니다. 지금 사초(史草)를 편수하는데 무신년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觀)이 상서하기를, ꡐ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입니다.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인데 단군 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재[嶺]가 높고 커서 연접하였는데 그 산 허리에는 신당(神堂)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북쪽 벽에 단인 천왕(檀因天王)이 있고 동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이 있고 서쪽 벽에는 단군 부왕(檀君父王)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삼성당(三聖堂)이라고 칭하고 그 산 아래에 사람이 사는 곳도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칭합니다. 당의 안팎에는 까막까치가 깃들이지 않고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이 산 아래에 삼성당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그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을의 동쪽에 장당경(藏唐京)이라고 이름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단군이 처음 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기자(箕子) 사당에 합하여 있어야 한다.」 고 합니다. 대개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아울러 섰는데 기자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이니, 어찌 아래로 기자 사당에 합하겠습니까?ꡑ 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 경기 광주목
일장 산성(日長山城)은 주치(州治)의 남쪽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3천 9백 93보(步)요, 안에 군자고(軍資庫)와 우물 7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줄지 아니한다. 또 밭과 논이 있는데, 모두 1백 24결(結)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ꡒ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한산(漢山)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ꡓ고 하였다.】
◎ 경기 부평도호부 인천군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ꡒ주몽(朱蒙)의 두 아들, 큰 아들 비류(沸流)와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북부여(北扶餘)로부터 10인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는데, 백성들이 많이 좇았다. 드디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바라보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니, 열 신하가 간(諫)하기를, ꡐ오직 이 한남(漢南)의 땅이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땅이 열리고, 서쪽으로 큰 바다가 막혀서, 천험(天險)의 지리(地理)로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ꡑ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갈라 가지고 미추홀로 돌아가고, 온조는 열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오랜 만에 비류가,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지 못하고 돌아와서, 위례성의 도읍이 안정되고 인민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서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ꡓ 하였다.】
◎ 충청도 청주목 직산현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재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는데, 고구려가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신라 때에도 그대로 따라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백제 시조 온조왕 사당[百濟始祖溫祚王廟]【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 금상(今上) 11년 기유 7월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 충청도 청주목 연기현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삼국사(三國史)》의 신라(新羅) 4독(瀆)에 ꡒ웅천하(熊川河)ꡓ라고 쓰고서, 중사(中祀)에 실었는데, 본조(本朝)도 그대로 따라서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
◎ 충청도 공주목
명산(名山)은 계룡(鷄龍)이요,【주(州) 동쪽에 있다.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ꡒ신라가 5악(岳)을 만드는데, <계룡을> 서악(西岳)으로 삼아서 중사(中祀)에 실었다.ꡓ고 하였다. 본조에서는 소사(小祀)로 하고,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아래 산허리에 작은 못이 있는데, 잠연(潛淵)이라 한다. 아가리는 작고 안은 넓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사람이 나무나 돌로 메우면, 그 이튿날 나무와 돌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 땅속에 용신(龍神)이 있어서 구름 기운을 타고 드나든다 하여, 가뭄을 만나 비를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다.】
◎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김부식이 이르기를, ꡒ경덕왕이 우화현(于火縣)을 우풍현(虞風縣)으로 고치고, 율포현(栗浦縣)을 동진현(東津縣)으로 고쳤는데, 지금 고쳐서 울주(蔚州)에 합속(合屬)시켰다.ꡓ 하였다.】
별호(別號)는 공화(恭化), 또는 학성(鶴城)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본군(本郡)의 정(呈)에 일컫기를, ꡒ본디 계변성(戒邊城)인데, 신라 말기에 학(鶴)이 와서 울기 때문에 신학성(神鶴城)이라 고쳤고, 고려 태조 때에 고을 사람 박윤웅(朴允雄)이 큰 공이 있어서, 하곡(河曲)․동진(東津)․우풍(虞風) 등의 현(縣)을 병합하여 흥려부(興麗府)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낮추어서 공화현(恭化縣)이라 하고, 또 고쳐서 지울주사(知蔚州事)로 하였다.ꡓ고 하나, 《삼국사(三國史)》와 《고려실록(高麗實錄)》에는 기재되지 아니하였으니, 그 옳고 그름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육익(六翼)》에 이르기를, ꡒ예전에는 화성군(火城郡) 또는 흥려부(興麗府)로 일컬었다.ꡓ고 하였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의성현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ꡒ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쳐서 고구현(高丘縣)으로 하였는데, 지금은 의성(義城)에 합속(合屬)되었다.ꡓ고 하였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진보현(眞寶縣)
《삼국사(三國史)》를 상고하건대, ꡒ경덕왕이 칠파화현(漆巴火縣)을 고쳐서 진보(眞寶)로 하여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지금의 보성(甫城)이며, 또 고구려의 조람현(助攬縣)을 고쳐서 진안(眞安)으로 하여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지금의 보성부(甫城府)라.ꡓ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진보․진안 두 현이 합하여 보성부(甫城府)가 된 것이다.
◎ 경상도 상주목 합천군
해인사(海印寺)는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다.【교종(敎宗)에 속하며, 밭 2백 결을 주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ꡒ산형(山形)은 천하에 뛰어났고, 지덕(地德)은 해동(海東)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정수(精修)할 땅이다.ꡓ 하였다. 절에 최치원(崔致遠)의 서암(書岩)․기각(碁閣)이 있는데,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ꡒ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해인사에 숨어 자유롭게 노닐면서 늙어 죽었다.ꡓ고 하였다.】
◎ 강원도 춘천도호부 인제현
서화(瑞和)는【《삼국사(三國史)》에는 화(禾)로 되었다.】
◎ 경기 양주도호부 고양현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ꡒ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ꡓ고 하였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ꡒ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ꡓ고 하였다.】
◎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이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ꡒ조선(朝鮮) 유민(遺民)이 산골짜기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이 되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세째는 취산 우진촌(칪山于珍村), 네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으로서, 이것이 진한 육부(辰韓六部)가 되었다. 육부 사람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높여서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가 신라 시조가 되었다.
세째 임금 유리왕(儒理王) 8년에 이르러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인해 성(姓)을 주었으니, 양산은 양부(梁部)로, 성(姓)은 이(李)로 하고, 고허는 사량부(沙梁部), 성은 최(崔)로, 우진은 본피부(本被部), 성은 정(鄭)으로, 대수는 점량부(漸梁部), 성은 손(孫)으로, 가리는 한지부(漢祗部), 성은 배(裵)로, 명활은 비습부(比習部), 성은 설(薛)로 하였다.ꡓ고 하였다.】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바로 경주 이씨이다. 하늘에서 내린 성이 3이니, 박(朴)․석(昔)․김(金)이다.【박씨는 김부식이 이르기를, ꡒ고허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록나정(楊麓蘿井) 곁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가서 본즉, 말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와서 거두어 길렀더니, 10여 살에 미쳐,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육부의 사람들이, 그 나온 것이 신이(神異)함으로써 함께 높여서 이를 임금으로 삼아 세우니, 이가 바로 박혁거세이다. 진인(辰人)이 호(瓠)를 ꡐ박(朴)ꡑ이라고 하는데, 당초의 큰 알이 박과 같기 때문에 ꡐ박ꡑ으로 성을 삼았다.ꡓ고 하고, 석씨는 김부식이 말하기를, ꡒ다파야국(多婆耶國)은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거리에 있었는데, 처음 그 나라 임금이 여국(女國)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애기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으매, 임금이 말하기를, ꡐ사람이 알을 낳음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ꡑ고 하였다. 그 여자가 차마 버리지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아울러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내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니,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취하지 아니하였다. 또 진한(辰韓) 아진 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곧 박혁거세 39년이다. 바닷가의 노모가 노끈으로 궤를 끌어당겨 해안에 매어놓고, 궤를 열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드디어 가져다 길렀더니, 장성함에 미쳐, 신장이 9척이요, 풍채가 빼어나고 밝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ꡐ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니, 처음 궤가 떠 올 때에한 마리의 까치가 지저귀며 따랐으니 마땅히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는 없애고 석(昔)으로 성씨를 할 것이며, 궤 속에 간직한 것을 벗고 나왔으니 탈해(脫解)로 이름함이 마땅하다.ꡑ고 하였다.
처음에는 고기잡이로 업을 삼으매, 어멈이 말하기를, ꡐ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골상(骨相)이 남과 다르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움이 마땅하다.ꡑ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신을 다하고, 겸하여 지리(地理)에 통하니, 남해왕(南解王)이 그 어짊을 듣고, 그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다. 장차 죽을 적에 그 아들 유리(儒理)에게 이르기를, ꡐ너의 박(朴)․석(昔) 두 성은 아들과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은 자로써 서로 왕위를 잇도록 하라.ꡑ고 하였다. 유리가 장차 죽을 때에 미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ꡐ탈해는 선왕(先王)의 고명(顧命)이 있고, 또 어짊이 왕위를 이음이 마땅하다.ꡑ고 하여 탈해가 이에 임금 자리에 서니, 이가 신라 네째 임금이다.ꡓ고 하였다.
김씨는 김부식이 이르기를, ꡒ탈해왕 9년에,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나무 사이에서 닭의 우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날이 밝자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가 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와서 열어 보게 하니, 어린아이가 그 안에 있는데, 용자(容姿)가 기위(奇偉)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ꡐ이는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줌이 아닐까 보냐.ꡑ 하고, 거두어 길러서 이름을 김알지(金閼智)라고 하였는데, 장성함에 미쳐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금궤에서 나온 까닭으로 성을 김으로 하였다. 김알지의 7세손 김미추(金味雛)가 신라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조분왕이 아들이 없어서, 그의 동생 첨해왕(沾解王)으로써 왕위를 잇게 하였더니, 첨해왕도 또한 아들이 없으므로, 국인(國人)이 김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이다.ꡓ 하였다.】문하 시중 낙랑후 문렬공(門下侍中樂浪侯文烈公) 김부식(金富軾)【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 금오산(金鰲山)【본부(本府)의 남서쪽에 있다. 신라 시조의 궁전(宮殿) 유기(遺基)가 있는데, 후인(後人)이 그 터에 창림사(昌林寺)를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이견대(利見臺)【동해(東海) 바닷가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ꡒ왜국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므로,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근심하여 맹세하기를, ꡐ죽어서 용(龍)이 되어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ꡑ고 하더니, 장차 죽을 적에 유명(遺命)하기를, ꡐ나를 동해 바닷가의 물 가운데에 장사하라.ꡑ고 하였다. 아들 신왕(神王)이 그대로 좇아 장사지낸 뒤에 추모(追慕)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에 나타나 있었다. 그러므로 ꡐ이견대ꡑ라고 이름을 지었다.ꡓ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ꡒ대왕바위ꡓ라고 일컫는다. 대(臺) 밑으로 70보 가량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돌이 사각(四角)으로 있어, 높이 솟아 사문(四門)과 같으니, 이것이 장사(葬事)한 곳이라고 한다. 김부식이 이르기를, ꡒ문무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유명(遺命)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돌 위에다 장사지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하고, 인하여 그 돌을 가리켜 대왕바위라고 한다.ꡓ 하였다.】
◎ 경상도 경주부 청도군(淸道郡)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ꡒ신라에서 구도성(仇刀城) 경내의 솔이 산성(率爾山城)․오도 산성(烏刀山城)․가산현(茄山縣)【경산성(驚山城)이라고도 이른다.】 등 3성(城)을 대성군(大城郡)으로 만들었는데, 지금 청도(淸道)에 합속(合屬)시켰다.ꡓ 고 하고, 또 이르기를,ꡒ경덕왕이 오야산현(烏也山縣)을【구도(仇道)라고도 한다.】 고쳐서 오악(烏岳)으로 하고, 경산현(驚山縣)을 형산현(荊山縣)으로 하고, 솔이산현(率已山縣)을 소산(蘇山)으로 하여,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지금 청도군에 합속하였다ꡓ 고 하였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인동현(仁同縣)
김부식(金富軾)의 《신라지리지(新羅地理誌)》에는,ꡒ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이 넷인데, 수동현(壽同縣)은 본디 사동화현(斯同火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ꡓ고 하였으나, 지금 경토(境土)로써 이를 상고하건대, 수동(壽同)을 인동(仁同)으로 고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신녕현(新寧縣)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ꡒ경덕왕이 매열차현(買熱次縣)을 고쳐서 민백현(쮈白縣)으로 하였는데, 지금 신녕현(新寧縣)에 합속(合屬)시켰다.ꡓ고 하였다.】
◎ 평안도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ꡒ《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은 산의 둘레를 따라 성바퀴를 삼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하였다.ꡓ 하고, 또 이르기를, ꡒ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해행(海行)하여 남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패강(浿江) 어귀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新羅)의 서북(西北)을 얻었다.ꡓ 하였고, 또 수 양제(隋煬帝)의 동정 조서(東征詔書)에 말하기를, ꡒ창해(滄海)를 배로 천리(千里)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ꡓ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가 됨이 명백하다. 그런데, 《문헌통고》에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전해 듣기를 잘못한 것이다.
◎ 평안도 평양부
인종(仁宗) 13년 을묘【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에 서경(西京)의 중[僧] 묘청(妙淸)과 유참(柳?)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모반(謀叛)하여, 군사를 보내어 절령도(컏嶺道)를 끊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모든 관료(官僚)를 두고, 그 군사를 ꡐ천견충의(天遣忠義)ꡑ라 하니, 이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 등을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평(討平)하고,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分司)․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또 경기(京畿)의 4도(道)를 삭제하였다.
-도선의 예언, 이상한 일[靈異]. 본군 사람의 속설에 전하기를, ꡒ고려 때 사람 최씨의 경원 가운데에 오이 하나가 열렸는데, 길이가 한 자나 넘었으므로, 온 집안 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었다. 최씨의 딸이 몰래 이것을 따먹었더니, 저절로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꾸짖고 대숲[竹林]에다 버려 두었는데, 예니레 만에 그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가 와서 날개로 이를 덮고 있었다. 부모에게 여쭈어 가서 보이니, 이상하게 여겨서 데려다가 길렀다. 장성하게 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ꡓ 한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ꡒ도선이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일행 선사(一行禪師)에게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산(山)을 답사(踏査)하는데,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혹령(鵠嶺)에 이르러 세조(世祖:왕건 부친)의 집을 지나다가, 그 새로 집짓는 곳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ꡐ피[?]를 심을 땅에【우리 말에 피[?]와 임금[王]은 음(音)이 다르나, 뜻이 같은 까닭이다.】 어찌 삼[麻]을 심는고.ꡑ 하고, 말을 마치자 가니, 부인이 이 말을 듣고서 들어가 세조(世祖)에게 고하였다. 세조가 황급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뒤쫓아 가서 만나보니, 옛부터 서로 아는 듯하여 같이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함께 구령(鳩嶺)에 올라가서 산수(山水)의 맥(脈)을 살펴보았는데, 도선이 위로 천문(天文)을 바라보고 아래로 시기의 운수[時數]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ꡐ이 땅의 맥(脈)이 임방(壬方)인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根幹)이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니, 마땅히 수(水)의 큰 수[大數]를 쫓아서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하늘과 땅이 큰 수[大數]에 부응할 것입니다. 만일 이 비결(秘訣)대로 하면 반드시 거룩한 아들[聖子]을 낳게 될 것이니, 마땅히 그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할 것입니다.ꡑ 하고, 인하여 비봉(秘封) 한 통을 만들어 겉봉에 쓰기를, ꡐ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배(百拜)하고 미래(未來)에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 대원 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드립니다.ꡑ 하였다. 세조가 즉시 이 비결을 좇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이듬해에 과연 태조(太祖)를 낳았다.ꡓ 한다. -
이미 대륙 삼국에 대한 내용은 재야 민족 사학자 오재성이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에서 통치자 칭호와 국호의 사용 연대 및 수도와 국호의 연구로 대륙 내 광복신라(江淮新羅)와 독립신라(동신라:반도와 만주)를 말하고, 고구려는 광복신라와 독립신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대륙신라인 광복신라(江淮신라)에게 패망했다고 말한 바(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통일신라는 광복신라로 당과 연합해 고구려 멸망) 있거니와, 같은 재야 민족 사학자 이중재는 「새 고려사」에서 「명사(明史)」, 「송사(宋史)」, 「요사(遼史)」, 「해동역사(海東繹史)」, 「오대사(五代史)」 고려전, 「고려사 지리지」, 「송사」 고려전 강역, 「진서(鎭書)」의 한국땅 지명을 인용해 고려가 대륙에 있다고 단언한다.
-< 고구려는 광복신라(江淮신라)와 독립신라(東신라:반도와 만주)의 두 지역을 상실하고 광복신라(강회신라:대륙신라)에게 패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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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coo2.net/html/main.html-
이중재의 대륙사 고증의 핵심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1.「명사(明史)」기록-조선은 기자가 도읍 했던 나라이다. 기자가 도읍 했다면 산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후일 망명하여 남으로 내려가 섬서성 서안(西安)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서안, 장안(長安)성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당연합군의 작전으로 고구려는 동쪽 또는 북쪽으로 옮겨가 기원 후 668년에 만주에 있는 통화(通化)현과 환인(桓仁)현에서 망하고 말았다. 그 후 당나라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서안(西安)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옛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살고 있던 땅은 송악이었다. 송악은 말할 것 없이 동경(東京)이며 평양(平壤)인 동시에 서경(西京)이다. 여기서 서경은 섬서성 서안(西安)이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은 천산과 곤륜산을 기준했으므로 유럽은 요서(遼西)였으며(이중재는 서안은 동경이었다. 명사에서 송악은 동경이며 동경은 평양이고 평양은 서경 즉 서안이다. 평양이 서경에 있을 때 나라 북쪽에 있는 이웃나라는 글란(거란)이며 서쪽에 있는 부족국가는 여직(女直:여진)이다.
*고려 왕건이 대륙 왕건을 흉내냈다는 주장에 대해: 대륙 내 3국 설과 대륙 내 고려 설을 제기하고 있는 오재성, 이중재의 학설은 많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김문기의 후손 김기태씨의 가문에 조선왕실의 비밀로 전해지고 있는 내용 중 고려 왕건이 대륙 내 왕건을 흉내냈다고 하는 주장은 아직 필자로서도 정확히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즉 대륙 3국과 대륙고려를 상정하면 대륙의 왕건은 동일인이어야 하지만 김문기 가문의 비밀은 이것이 동명이인이라 주장하고 있기에 혼란스러워 하는 말이다. 아무튼 이중재씨는 대륙 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見 「새고려사」50쪽 이하)
신라의 패망과 고려의 출현: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와 당나라는 강토를 양분해 가졌다. 고구려가 있던 땅은 당나라가 차지했다. 그리고 서안과 낙양 밑 쪽 광활한 영토는 신라(오재성이 말하는 소위 江淮 광복신라)가 가졌다. 당이 망한 뒤 경순왕은 후당(後唐)시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말았다. 나라를 내어준 대가로 낙랑공주를 태조 왕건에게서 하사 받았다. 이때가 경순왕 8년 가을 9월이었다. 그때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 곳은 산서성 운주계(運州界)이며, 30여 군과 현이다. 운주계란 하남성과 산서성의 접경지 위쪽이며, 하현(夏縣) 아래 안읍(安邑:현재는 運城)이다. 후진은 고구려와 같은 혈통으로 고구려를 망하게 한 것은 나당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의 씨족 일부는 당나라이다. 그러므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지만 직계혈통은 당나라에서 뿌리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양서(梁書), 원사(元史), 명사(明史), 해동역사, 북사, 송사,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각종 사서를 살펴보면, 신라 경순왕은 당나라 무후(武后) 이법(李法)의 외손자로 되어있다. 「삼국사기」 경순왕 편 본문에 경순왕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후손으로 (당나라) 효종(孝宗) 이창(伊滄) 벼슬을 한 이(李)씨라 하고 백제 의자왕 편에 경순왕이 당나라 무후의 손자라 했으므로 효종은 당나라 무종의 아들로 당과 신라는 외가댁 혈족관계이다. 당나라가 섬서성 장안성에 도읍 했을 때 신라는 서안 서쪽에 있는 기산(岐山)인 계림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나라 수도 인접지에 신라 경주가 있었기 때문에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최치원이 당에 수학한 것이나 혜초가 실크로드를 간 것은 신라가 대륙이고 같은 혈통관계라 가능한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대륙에 함께 있었으므로 왕건은 신라를 산서성 안읍(安邑)에서 항복 받을 수 있었고 고려는 당나라와 신라가 망한 후 후당이 생길 때 함께 후진(後晉)의 씨족으로서 또 고구려의 후예로 당당히 대륙서안을 기준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뿌리: 태조 왕건의 뿌리는 정확한 문헌이 없을 정도이다.「제왕운기(帝王韻紀)」 세계도(世系圖)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의 조상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다. 고려시조는 사찬(沙粲)이다. 사찬의 후예가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당나라 숙종황제와 정화황후에게서 태어난 경강대왕(의조:왕건 조부)에 이어 세조(왕융:왕건 부친)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이다. 당나라 숙종은 당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이형(李亨)이며 연호는 지덕원재(至德元載)이다. 이형은 후당 시 토번의 성을 함락시키고 7군을 거느리고 3 성(城)을 장악한 사람이다.
당 숙종 황제의 아버지인 원덕대왕(742-756)은 천보 원년으로 출발하여 15년 만에 물러나고 숙종이 등극한다. 그 후 보응(寶應) 원년에 진(晉)나라에서 조서를 받고 진(震)국을 세운 사람이 발해왕 대조영이다. 한편 후진(後晉)의 씨족이었던 왕건은 대순(大順) 원년(890)에 사천성 공주(邛州:邛峽縣)에 있던 촉(蜀)나라를 취한다. 왕건은 당나라 때 촉 나라를 기원후 890년에 갖게 되고 촉 왕이 되었지만 후당(923-936)이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42년 만에 망한다. 그러나 기원 후 939년 후진(後晉) 때 성을 이(李) 씨로 바꾸고, 기원 후 935년 신라 경순왕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고려로 등극한다. 왕(王)씨 성을 이(李)씨로 바꾼 것이 아니고 왕건을 그대로 두고 이 씨의 성씨인 것처럼 바꾸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륙에서 왕건은 혈통이 없고 시골출신이며 떠돌이 야인처럼 가르치고 있다. 아주 못된 불량배인 양 사서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천성 현지 가이드들에게도 왕건을 불량아로 취급해 교육시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현재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저의가 뚜렷했다. 후진(後晉)은 5대 10국 시대 때이다. <국사년표(國史年表)>는 왕건이 890년 중당(中唐) 대순 원년에 촉왕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5대10국 때 석경당(石敬塘)이 글란(거란)병을 빌려 후당을 망하게 했다. 그리하여 국호를 진(晉)이라 하였다. 사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때는 후진(後晉)이라고 했다. 도읍은 하남성 개봉현에서 다스렸다. 후진은 산동성, 섬서성, 감숙성, 하북성, 산서성 남부이며 안휘성 북부지방이었다. 글란(거란)의 신하인 후진은 두 임군에 11년간 지속했으나 소멸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는 후진(後晉)의 씨족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사서는 기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제왕운기」는 당나라에서 뿌리가 내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참고:「고려사」역시 당 숙종에서 뿌리내린 것으로 되어있다)
「고려도경」의 건국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이(蠻夷)는 스스로 군신과 같은 혈족이라고 했다. 그들의 호는 선우가한(單于可汗)이다. 기자가 봉해진 때부터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 고조 12년 연(燕:본래는 동이족의 하나) 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무리를 취합하고 뭉쳐서 만이(蠻夷)들과 함께 규합해 나라를 만든 곳이 조선의 땅이다....주몽이 천자의 아들이라 외쳐 고기와 자라를 타고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흘승골성(紇升骨城:어떤 사서는 낙양 근처라 하고 어떤 사서는 서안이라 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하남성과 섬서성 지방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이니 주몽 일행은 흘승골성에서 살고 국호를 지어 고구려라 하고 고(高)씨라 했으며 한편 고려라 했다. 한무제가 망한 뒤 조선은 고려 즉 고구려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한(漢)나라를 격파한 왕망(王莽)은 고구려(高句麗)로 아름을 바꾸었다.(후한서 고구려전 참고) 그리고 왕망의 손자 우거(右渠)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이란 조선사군이며 고구려현이다. 특히 고구려현에 속하는 것은 원도(元菟)군이다. 원도군이란 현도(玄菟)군을 말한다. 현도군의 군장 즉 소국의 임금은 북을 하사하고 북과 기녀와 예악의 부서를 두게 했다. 이 부서에 속하는 사람들도 조정에서 입는 옷을 입고 고을 현감의 명에 따라 관청에 이름을 올리게 했다. 왕망이 병사를 일으켜 흉노를 베고 항복을 받았다. 고려인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도적들을 변방으로 쫓았다. 광무 중흥시 고려관리를 북방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