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먼저, 이번에는 한국독립군 세력의 무장투쟁에 결정적 타격 및 파국을 가져옴과 동시에 민족주의 독립운동 진영이 더이상 소련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하여 반공으로 기울게 했던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혁명구상이 비단 러시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웅대한 "세계혁명"에 있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당시 일제강점 하에 있던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혁명전략의 조선에 대한 공략 사례 중, 대표적인 예로 바로 레닌이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이자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창당했던 이동휘에게 독립자금 2백만 루블을 제공하기로 밀약한 후, 1차 착수금으로 60만 루블을 건네주었다가 이동휘가 개인적 용도로 착복하여 써버린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해임정의 공산주의파에 대한 자금지원등의 공작과 병행하여,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의 공산혁명전쟁을 확신했던 레닌정부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일본, 차이나, 몽고 등의 혁명적 성향의 청년들에 의한 국제원동혁명군(國際遠東革命軍)의 편성을 획책했으며, 한국인 부대를 그 주동세력으로 하기 위하여 1920년 7월에 상해임시정부가 소련의 모스크바에 파견했던 대표 한형권과 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협정의 내용은,
"1.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2. 한국임시정부는 잠정적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다.
3. 노농 소비에트 정부는 연해주와 만주의 한국독립군이 시베리아에 집결하여 훈련하는 것을 환영하고, 필요한 장비의 공급 및 보충을 책임진다.
4. 한국독립군은 러시아 영내에 있을 시에는 적군(赤軍)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표면상의 협정 내용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간도참변 등의 일제의 초토화전술에 쫓기던 한국독립운동에 있어서는 장미빛 청사진이요, 암흑 속에서 빛을 던져준 고마운 존재가 소련이라 여겨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닌 정부의 궁극적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 목적이란 백군의 잔존세력이 서구열강의 지원아래 러시아의 시베리아 및 극동지방에서 백군정부의 수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아직 이들을 모두 제압할 여력이 없던 소비에트 적군으로서는 적백내전에 이용하기 위한 대상물이 필요했던 것에 있었고, 가장 적합한 세력으로 낙점된 것이 만주일대의 한국독립군들이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해 '총알받이'가 필요했던 셈이지요.
국민당이 운영했던 귀주의 군학교를 졸업하고 상해임정을 방문했던 김홍일(金弘壹, 당시 23세 - 김대중의 홍삼트리오 중 하나가 아님을 유념하시길...^^)은 1921년 초에 노백린(盧伯麟) 군사업무총장에게 권하여 만주에 잔류해 있던 독립단체들을 영솔하여 국제원동혁명군의 편성에 참가시켰습니다.
이리하여 속속 소련의 자유시로 집결이 시작되게 됩니다....수많은 단체가 집결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독립군부대로는 "대한독립군단", "자유대대", "사할린부대"의 3개가 있었습니다.
첫째, 대한독립군단.
- 봉오동대전 및 청산리전투(대첩? 글쎄요...이범석의 증언을 비롯해 지나치게 과장된 점이 있지요)로 열이 뻗친 일본군 제19사단의 간도진공에 의해 곤경에 빠져있던 북만주 및 남만주 일대의 여러 부대는 상해임정으로부터 극동혁명군의 편성계획을 통지받자, 곧 호응하여 매서운 북풍도 무릅쓰고 북상을 시작합니다.
김홍일은 '독립군들은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이나마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라는 노백린의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시베리아 행을 결심했다"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들 대한독립군단은 만주 일대 곳곳에서 각자 분투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일시적 집합체였는데, 그 내역을 살펴봅시다.
1. 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지휘)
2. 대한독립단 (1920년 6월에 홍범도 부대 600명과 남만주 서로군정서의 이청천 부대 400명이 합류하여 창단했습니다)
3. 간도국민회(회장 구춘선)
4. 대한신민회(김성배)
5. 의군부 및 광복단(이범윤)
6. 혈성단(김국초)
7. 도독부(최명록)
8. 야단(野團, 김소래)
9.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0. 군비단(軍備團, 김홍일)
이 10개 단체 외에 기타 군소단체가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로서, 사회주의와는 일정정도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다만, 원동혁명군에서는 모든 성향의 단체를 망라하여 편성되었기 때문에, 원동혁명군 주도권을 장악했다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민족주의 진영의 연합 기운이 무르익게 된 시기를 놓치지 않았고, 드디어 통합에 이르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습니다. 그 병력은 3, 500여명에 이르렀고 3개 대대로 편성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총재 : 서일
부총재 :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 : 김규식(상해임정 및 해방이후 중도우파 진영이던 김규식과는 별도의 인물입니다)
참모총장 : 이장녕
여단장 : 이청천(실제 부대운용을 맡은 지휘관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실로 일제강점 이후 처음으로 각개전투를 벌이던 독립단체의 대동단결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조지훈씨가 저술한 "민족의 분노"에는 '중대장에는 김경천, 오광선, 조동식 등 독립전투의 명장이 많았다"라고 쓰고 있으나, 실제로 김경천(본명은 김광서(아명은 김현충))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독자적 행동과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청천의 영향력 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광선은 해방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준장을 맡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대한독립군단의 인명부에 이범석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약간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경천은 1887년 함남 북청 태생으로서 일본 육사 23기를 졸업한 후, 동경 기병 제1연대장 중위로 있었지만, 2.8선언 이후에 귀국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이후 이청천(일본 육사 26기)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그 파란만장한 무장독립투쟁 경력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김경천에 대해서는 일제시기 내내 만주에 자자했던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독립군들이 증언했으며, 독립투쟁의 후반부에는 실제로 김일성으로 개명을 했다는 유력한 기록이 많습니다....)
여하튼 대한독립군단은 결성 다음해인 1921년 1월에 집결지로 지정된 시베리아 자유시 일대에 집결을 끝낸 후, 치따정권(잔존 백군과의 완충지 목적을 위해 소비에트 정권이 설립한 지방정권입니다)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훈련에 힘쓰며 국제원동군으로의 편입을 기다렸습니다.
이 시기, 이청천을 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고, 때로는 적군의 백군진압전투에 동원되어 위용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대대'와 '사할린부대'도 자유시에 도착합니다.
'자유대대'는 제정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의 오하묵(吳夏默)이 거느린 고려공산당 일크추크파의 군대로서 일본군과 교전한 경력도 있던 부대였습니다. 그 병력은 1000여명이라고 칭해지며 대부분의 병사들은 러시아 태생으로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한인 2세들이었습니다.
'사할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의 한국인 교사였던 박엘리야가 조직했던 한인 빨치산으로서 극좌 과격파와 연합하여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도 참가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은 1920년 5월에 있었습니다. 미, 영 등 서구열강이 시베리아 출병군을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극동에 잔류했던 일본군은 3월 경,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빨치산을 기습했다가 패배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써 5월경 빨치산들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철수하던 일본 거류민들을 모조리 살해해버리지요...)
그 후, 국제원동혁명군은 기타 여러 군소단체가 집결하여 총인원이 7천명 이상으로 팽창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극좌부터 극우를 포괄한 양분된 성향의 여러 독립군부대를 어떻게 통합하는가에 있었습니다. 자유시참변이란 비극의 발발은 바로 여기에서 그 불씨가 일어납니다. 그 원인 은 물론 혁명군 내의 공산주의자와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민족주의진영을 와해시키려던 볼셰비키들이 제공했습니다.
현재 저 이북의 김정일 독재정권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당시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믿고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힘'의 확보"에 있었습니다. 힘의 표상은 곧 "군사력"이었고, 군사력을 장악하면 주도권은 당연히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공산주의파는 최대의 세력을 지니고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해산하여 그 군단을 자기들 쪽으로 흡수병합할 것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조선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공산혁명이 이루어지면,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담당시켰주겠다는 소비에트 정권의 밀약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레닌등 볼셰비키들은 당시 결코 한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원동혁명군을 편성했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 극동내의 백군잔존세력의 척결 및 향후 아시아혁명전쟁을 위한 혁명군의 창설에 그 근본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코민테른 극동총국은 1921년 5월 일크추크파 공산계와 상해임정파의 통일대회가 일크추크파의 압승으로 끝나자 고련공산당에 지령을 내려 적군장교 카르단 웰리 장군을 수장으로하는 "3인 군정위원회"를 조직시키고, 이 위원회를 원동혁명군의 좌익혁명군으로의 전환공작을 위해 자유시로 파견했습니다.
고려공산당이 선택한 다른 두 명의 위원은 일크추크파의 중진이었던 최고려와 유동열이었고, 상해임정파는 배제되었습니다. 통일대회에서 패배했던 상해파는 그동안 보전했던 인맥 및 인재, 당명까지도 상실해버렸고, 이로인해 원래부터 상해임정의 군사력이었던 대한독립군단 마저도 공산계에 빼앗길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2)
위에서 논한 것처럼, 공산계의 민족주의파 와해 음모공작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3인군사위원회에 의한 좌익혁명군으로의 개편이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대한독립군단 중심의 민족주의파와 소비에트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했던 공산주의파가 정면에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공산계 내부의 파쟁싸움도 극렬했습니다. 특히 자유대대와 사할린부대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상호간에 숱한 피를 부르는, 그야말로 전쟁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자유대대와 사할린부대는 서로 전공을 허위과장하여 부풀리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일에 혈안이 되었고, 급기야 사할린 부대의 수장이자 악랄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박엘리야가 야밤에 반대파를 급습하여 수십명을 살상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한편, 이 무렵 국민당의 손문의 지지를 받으며 상해임정의 군무총장 노백린의 지도를 따랐던 김홍일은 1921년 3월에 상해를 떠나 백두산 인근의 장백현에 남아있던 군비단(255명)을 인솔하고 5월 10일에 러시아령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중에 천보산일대의 광산을 수비하던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35일이 넘는 어려운 행군이었습니다.
김홍일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유시에 모습을 나타냈던 때는 6월 2일이었습니다. 김홍일은 자유시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에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에 몹시 흥분하여 이상에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인군정위원이었던 유동열에게서 듣게된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너무나도 초췌한 모습의 유동열은 그에게,
"각 단체간의 의견 조정은 이제 완전히 불가능하다. 단체 중에는 스스로의 내부통제조차 안되는 부대도 허다하다. 일크추크파의 위원은 최고려지만, 그는 이미 자유대대 사령인 오하묵에게 제거되었다. 정세가 호전될 때까지 이곳을 피해 있길 바란다"
라고 매우 미안해하면서 실정을 설명했고, 김홍일은 그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여 망연자실한채로 북만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무렵 소비에트 정권의 태도는 더욱 교묘하게 변질됩니다. 1920년 가을부터 열린 러일 대련회의에서 일본은 시베리아에서의 철병조건으로서 한인 독립군의 체포 및 검거를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요시자와 공사와 북경주재 러시아 대표 카라한은 북경에서 북양어민협정을 체결하여 러시아는 니콜라예프스크 사건과 같은 불미한 사건에 대한 재발방지를, 일본은 러시아의 극동해역 어로활동의 안전조업을 서로간에 약속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요시자와 공사는 시베리아의 한인독립군의 즉시 해산과 단속을 요구했는데, 이에 카라한은 "시베리아에는 원동혁명군이 집결해있지만, 한국독립군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독립군이 연해주에 침입할 경우에는 결단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 측에 그 정보를 즉각적으로 제공하겠다"라는 약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는 일본의 영향력과 요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것을 이용해 눈엣가시같은 우파 민족주의성향의 독립군부대들을 궤멸시키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요컨대 당시 군사력이 빈약했던 소비에트 정부로서는 국제환경의 격변에 따라 일본과의 우호관계 회복과 시베리아 출병군의 철수를 가장 핵심적인 지상과제로 했기 때문에, 자유시에 집결했던 한인독립군 부대의 지위와 안전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어져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오직 그것을 급속하게 러시아 볼셰비키 적군의 산하조직으로 흡수시켜 완전히 통제할 필요성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 볼셰비키 정부의 지령을 받은 3인군정위원회는 국제원동혁명군의 대대적인 흡수와해안을 결정하기에 이르고 맙니다.
1. 산개한 각 단체를 모두 해체시켜 단일 빨치산부대로 혼합편입시킨다. 정규군으로의 편제를 쉽게하기 위하여, 그 간부는 모두 정규(러시아 정부의 사관학교나 군사학교, 또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지칭) 군사훈련을 이수한 경험이 있는 자로 제한한다.
2. 훈련은 일크추크와 톰스크 등의 '안전지대'에서 실시한다.
3. 정규군 간부로서 부적격하다고 인정된 기존의 지휘관은 파면하여 현지의 당 지부 및 교민회 학교로 이직시킬 것.
그러나, 대한독립군단에서 여기서 언급한 '정규' 군사훈련을 이수한 지휘관은 이청천, 김홍일 등 단지 2, 3명 뿐이었습니다. 반면 러시아 교민 출신들 및 구 제정러시아 사관학교, 볼세비키 군사학교 출신들이 상부를 차지하고 있던 자유대대에는 그 요건을 충족시키는 지휘관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편성목적에 담긴 의도는 분명하게 민족주의 성향의 여러 단체의 간부들을 제거하고 자유대대로 흡수하여 적군 산하조직으로 개편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할린대대는 볼세비키 정부의 방침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그 지휘관들이 대개 혁명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운 이들이 아닌, 맹동적 모험주의로 일관하던 무식한 하층민 출신이어서 이후 러시아의 선택에서 배제되게 됩니다.)
그리고 외교적으로 일본과의 친밀화를 꾀하던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 간섭의 구실을 제공하지 않기 위하여 연해주 및 만주로부터 부대들을 멀리 시베리아 서쪽으로 이동시킬 의향을 갖고 있었음도 아울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철저한 한국독립군의 와해분쇄를 전제한 것이었고, 결국 한국의 민족해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가이기주의 전략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렇듯 조선 민족독립의 지원자라 믿어 의심치않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처절하게 이용당하고 생존마저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 대한독립군단은 마침내 "자유대대"와 물리적 대립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그 끝은 파멸이었습니다.
(3)
드디어 김홍일이 돌아가고 난지 얼마후인 6월 28일, 이 갈등과 대립이 폭발하고 자유시에서 소비에트 적군과 자유대대의 대한독립군단에 대한 불시습격으로 "무력충돌- 즉 자유시참변"이 발발하여 대한독립군단은 사망자 최소 800 - 1,000여명, 부상자 수백명,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종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이가 1천 2백여명을 넘어서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건의 경위와 비밀문서는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탈출한 이들의 증언 및 학자들이 사건의 전후경과를 검토하여 추정한 숫자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일례를 들면, 조지훈씨는 "소비에트 적군의 공격으로 대한독립군단에 사망자 272명, 체포자(강제노동소 수용자) 917명, 행방불명자 250여명, 익사 31명의 희생이 발생했고, 이청천도 일크추크파에 체포되었지만, 상해임정의 항의를 받은 레닌에 의해 구사일생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민족주의 독립운동진영이 처음으로 통합하여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은 차마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극악한 배신극과 비열한 기습때문에 괴멸적 타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그 힘은 결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는 이 '자유시참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성격이나 정의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가장 유력한 설로는 "적군개입설"과 "적군 단독공격설"이 있습니다.
1. "적군개입설"
김홍일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정부에 버림받은 사할린부대와 대한독립군단의 만주로의 탈출기미를 탐지한 적위군은 곧바로 엄중한 경계망과 감시망을 펴기 시작했다. 독립군 및 사할린부대가 연해주와 만주의 일본군과 충돌한다면 러시아는 외교 이득상의 크나큰 손해를 입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적위군 사령부는 3인군정위원회를 통하여 조속히 모든 부대를 무장해제한 후, 일크추크로 강제 이송시켜 해산하도록 결정했다. 이윽고 무장해제의 디데이가 임박하자 자유대대는 급속히 무장을 해제하여 충실히 그 결정을 따랐고, 그 과정에 러시아 적군들이 개입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그 성격상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던 사할린부대의 대원들이 사격전을 시작했고, 또한 사할린부대를 대한독립군단보다도 더 눈엣가시로 여기던 자유대대가 곧바로 재무장하여 소련 적위군의 무력과 연합하여 무차별 포격과 사격을 가했다. 제1선에서 저항했던 사할린부대는 거의 전부가 살상되었고, 제2선에서 싸웠던 대한독립군단도 대부분 살상, 체포되는 치명적 대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리하여 염원했던 통일된 항일 무력육성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말할 것도 없이 소련과 한인공산당의 음모때문이었고, 공산당이란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가장 흉악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일치단결하여 싸워도 독립의 달성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먼 이국에까지 가서도 생각조차 못할 동포살상을 자행했음은 얼마나 구차하고 처참한 비극이란 말인가!"
김홍일은 살육극을 피해 피신해온 김규면, 장기영, 이용, 한운용 및 사할린 부대장 박엘리야 등과 '한국 의용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6백여명을 통솔하는 의용군 사령부를 창설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반적인 흐름 즉, 대한독립군단의 대타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볼 때, 그의 "적군개입설"은 가장 사건의 진상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2. "적군의 단독공격설"
또한 여러 역사서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사료들을 들어 "적군의 단독공격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조지훈 "민족의 분노" (180페이지)
" 소련정부 대표 카라한과 일본공사 요시자와가 북경에서 북해의 어업권을 협정했을 때, 요시자와가 '귀하의 영역에서 일본에 적대하는 한국독립군을 육성한다면, 양국의 우호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혁명 후의 쇠약기에 있었던 노농소비에트 정부는 일본과의 불화를 경계하여 '한국독립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겠다'라고 약속했다.
이것에 의해 독립군은 6월 22일에 적위군으로부터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고를 받았다. 독립군은 레닌의 피압박 민족해방이론에 위배된다고 항의했지만, 6월 28일에 적군은 2중, 3중으로 독립군을 포위하고 대포와 중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차별 공격했다. 독립군은 최후의 한사람까지 민족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사투할 것을 결의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 김승학 "한국독립운동사" (388-395페이지)
" 자유시참변은 북경에서 북해어업협정을 체결했던 노농 러시아 대표 카라한과 요시자와 공사와의 밀약에 의해 소련군이 최우선제거대상으로 생각했던 조선독립군단을 무장해제시켰던 결과였다."
- 강문수(자유신 참변 생존자)의 "상신서" 및 김두정(역시 당시 독립단원출신)의 "조선공산당 소사"
"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러시아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암암리에 공격음모를 교묘하게 계획한 일이었다"
이외에 '파쟁설'과 '동지공격설' 등이 있지만, 신빙성에는 많은 의문이 있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자유시참변 이후, 구사일생하여 탈출한 이들의 경황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우선 자유시에서 탈출한 대한독립군단의 각 대표 15명(홍범도, 이청천 등)은 7월 하순 경에 영고탑(목단강 남쪽지역)에서 회의를 거쳐,
"자유시사건은 '재러 대한민족회'의 일파인 문창범, 김하석, 원세훈(후일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김일성의 남침 뒤에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되어 인민재판학살에 앞장 선 자입니다) 등이 소련의 볼세비키 정권에 책동하여 일으킨 참극이었다. 우리들은 그들을 타도할 때까지 싸우고야 말것이다"
라는 피맺힌 성토문을 결의하여 공표했습니다.
또한 그때까지 고려공산당수 이동휘를 지지하고 있던 홍범도, 김좌진, 이용 등은 공식적으로 이동휘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공산주의자는 러시아 볼세비키의 괴뢰이며, 볼세비키는 조선독립군을 내란음모에 이용하고 있을 뿐이며, 목적을 달성하면 가차없이 숙청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라고 성토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교육사업 등으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며 동분서주하던 김좌진 장군은 한밤중에 고려공산당원 박상실의 흉탄에 쓰러지고,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연행되고 맙니다.)
요컨대 자유시참변을 비롯해 이후 독립운동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함으로써 통일의 길로 가고 있던 독립운동의 전선은 완전히 사분오열되어 버렸고, 그 분열상은 결국 해방이후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만한,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는 독립운동사의 가장 비극적 단면의 하나가 "자유시참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자유시참변에서 희생된 대한독립군단의 호국영령 1천 3백여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님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한반도의 분열이 종식되고 자유평화통일이 이루어져 평화와 국운융성의 기운이 온 나라를 뒤덮는 그 때가 된다면, 분명히 이역만리에서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민족독립만을 위해 싸우다 가신 님들의 그 애국애족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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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하사변
▲흑하사변(黑河事變)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레닌의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 1920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측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펴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해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으며, 총재인 서일(徐一)을 비롯해 독립군의 중진들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이 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좀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위협이 적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어 연해주의 이만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연해주에 거류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문창범(文昌範)·한창해(韓滄海)와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박승길(朴承吉) 등은 그 해 12월 초에 연해주로 들어온 독립군이 한 곳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하바로프스크의 적군 제2군단본부와 교섭하였다.
이리하여 국민의회는 자유시에 군대 주둔지를 마련하는 한편 독립군에 사람을 파견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인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허재욱(許在旭)의 총군부(總軍府), 안무(安武)·정일무(鄭一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이청천(李靑天)의 독립군과 군정서(軍政署), 전부터 시베리아에서 무장활동을 해오던 김표돌·박공서(朴公瑞)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그리골리의 독립군단, 임표(林彪)·고명수(高明秀)의 이항군(尼港軍), 오하묵·최고려(崔高麗)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등이었다.
수 개의 무장군이 자유시에 집결하여 대군단의 결성과 군비 확장의 기회가 왔으나 각기 사정이 다른 여러 부대의 집결은 자연 뜻하지 않은 분쟁을 가져왔다. 즉, 적군의 제2군단 제6연대장으로서 흑하지방 수비대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러시아에 귀화한 오하묵과, 이항군이라는 적계(赤系)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박일이야 사이에 군권장악을 위한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1921년 1월 이용(李鏞)·채영(蔡英) 등은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결성하고 당시 흑룡주(黑龍州) 일대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 군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동정부 군부에서는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에, 그레골예프를 참모부장에 임명해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이항군의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라 개칭하고 독립군 및 자유대대 등 모든 무장단체는 사할린의용대의 관할 하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얼마 후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극동정부 군부는 그레골예프를 연대장으로, 박일이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그레골예프와 박일이야는 즉시 군대 관리에 착수하였다. 우선 부대 주둔지를 자유시 서북방에 위치한 마사노프로 정하고 각 부대를 이 곳에 이동시켰다.
한편, 한인군사위원회가 재노령 무장부대를 관할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교섭해 재로한인무장군을 통괄할 수 있는 권한을 자기들에게 위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과 탄생된 것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였다.
후에 정식 군정의회를 조직할 것을 전제로 우선 임시군정의회를 세웠다. 총사령관에 소련인 갈난다라시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 임시참모부장에 유수연(兪洙淵), 위원에 김하석(金夏錫)·채성룡(蔡成龍)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군정의회의 병력 강화를 위해 적군 5군단 내의 기병[코카서스 기병] 600명과 동군단 내에 소속된 합동민족군[한인부대] 600여 명을 부속시켰다.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이르쿠츠크 공산당 정치학교 제1회졸업생 16명을 대동하였다.
이들 군정의회 간부들은 1921년 4월 14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17일 치타에 도착하자, 극동공화국정부 군부총장에게 군정의회 성립 경과를 통고하고 각 무장단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부총장은 적군 제2군단에 무장군의 인도를 명하고 치타에 있던 한인부(韓人部)를 해체하였다. 5월 2일 자유시에 도착한 군정의회는 무장군의 자유시 집결을 서둘렀으나 사할린의용대를 비롯한 마사노프에 주둔 중인 한인군사위원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군정의회는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에 이와 같은 사정을 보고했으나 당시 병력면의 열세에 처해 있던 군정의회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뒤 5월 28일 합동민족군 600명이 자유시에 도착하고 6월 2일에는 마사노프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군 440여 명이 자유시로 합류하였다.
6월 6일에는 총사령관 갈난다라시빌리와 의원 유동열(柳東說)·최고려 일행이 코카서스기병 600여 명을 인솔하고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정세는 일변해 군정의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일본과 소련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때 일본 측은 소련영토 내에 일본에 유해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면서 이의 취소를 주장하였다.
소련도 혁명 후 쇠약해진 국력으로 일본과 불화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였다. 결국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가 내려졌다.
완강히 반대하는 의용군에 대해 군정의회는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할 것을 결정하고, 6월 28일 2대의 장갑차와 30여 문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의용군을 공격하였다.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다. ≪재로고려혁명군연혁 在露高麗革命軍沿革≫에는 의용군 측이 사망 36, 포로 864, 병자로 불참한 자 15, 박일이야가 전투 중 인솔하고 도망한 자 34, 행방불명 59명이며, 군정의회측은 사망 2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간도 방면 11개 단체 성토문에는 의용군 측 전사 72, 익사 37, 산중에서 힘이 다해 사망한 자 250여 명, 포로 917명, 군정의회 측은 적군 1명만이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조선민족운동연감 朝鮮民族運動年鑑≫7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범도(중앙)
참변으로 인해 20여 년 동안 한국 독립운동사를 빛냈던 홍범도의 부대는 삽시에 없어졌다. 호랑이 잡던 포수 출신 독립군 대장 홍범도는 찬바람 이는 러시아의 소도시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죽었다. 소련에게서 백만 루불의 자금을 받았던 공산주의자 이동휘도 몰락을 거듭하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했다. 일본 정예 육사 출신 장군 지청천은 소련군에게 체포, 투옥되었다가 훗날 임시정부의 석방 노력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동휘
여기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음습한 야합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본과 소련 혁명정부는 북경에서 이미 밀약을 맺어 놓고 있었다. 일본은 물자가 부족한 소련에게 캄차카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을 넘기는 대가로 소련 영내 한국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귀신처럼 야합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속성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약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을 나눠 먹는 식으로 합의 보는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민비와 고종이 러시아를 이용하려다 뒤통수를 맞아 일본에게 목숨과 주권을 빼앗겼던 역사가 지척에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마저 또 소련을 이용해보려다가 일본의 공작에 궤멸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만 것이었다.
≪참고문헌≫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大韓民國公報處, 1978), 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朴永錫, 一潮閣, 1982), 自由市慘變에 대해(申載洪, 白山學報 14, 1973).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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