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ON MY MIND
레이 찰스의 대표곡 중 하나인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는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자 언제나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던 미국 조지아 주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다. 데뷔 초기부터 오랫동안 그와 함께 했던 아틀란틱 레코드사를 떠나 대형 메이저 음반사인 ABC 파라마운트로 이적한 이후 첫 곡으로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발표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60년 팝차트 1위에 등극, '레이 찰스'에게 첫 번째 그래미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후, 조지아 주와 레이는 악연의 굴레에 묶이게 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여 조지아 주 어거스타 공연을 취소한 '레이 찰스'에게 조지아 주가 평생 공연금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결국 레이가 인종의 벽을 넘어서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미국의 국민적인 음악 영웅으로 성장하자, 79년 조지아 주는 '레이 찰스'에게 공로상을 수여하고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조지아 주 공식 노래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영화 <레이>에서!
'레이'는 이 곡을 통해 기존의 R&B나 블루스의 연주 방식을 타파하고 오케스트라와 대규모 합창단을 기용한 음악을 시도한다. 그 결과 여러 음악 장르를 오가는 '크로스오버'라는 새로운 음악의 장르가 창조되었고, 1960년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의 발표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흑인이며 맹인이었던 레이 찰스는 암흑 속에서 음악이라는 자신만의 빛을 찾아낸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뒷마당 풀장 안에서 놀고 있던 네 살짜리 동생은 순식간에 물에 잠겨 나오질 않았다. 놀란 소년이 어쩔 줄 모르며 엄마에게 뛰어갔을 때 동생은 튜브로 만든 조그만 풀장 안에서 익사했다. 동생보다 형이라고는 해도 고작 한 살 위인 다섯 살에 불과했던 소년은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의사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아이가 곧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선고했다. 어머니는 영원한 암흑 속을 헤매게 될 아들의 미래를 대비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물건들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곱 살 때 백내장을 앓은 소년은 결국 완전히 실명했다. 몇 년 후 수리공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공장 잡역부로 일했던 어머니마저 사고로 잃으면서 소년은 15세에 천애 고아가 됐다. 대공황기 플로리다주 흑인 빈민촌에서 자란 레이 찰스는 참으로 처참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도 7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60년간 음악 활동을 했다. 50년간 각종 음악 차트의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250번에 이르는 레코딩 작업을 했다. 레이 찰스는 '소울 음악의 대부'였고, 영혼의 목소리를 지녔던 기적의 인물이었다.
변절을 넘어 혁신으로
세 살 때 이웃집 카페 주인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꽤 일찍 음악과 만났던 찰스는 성 어커스틴 장애아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피아노반의 정원 초과로 클라리넷반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그때 클래식과 컨트리 뮤직, 재즈와 가스펠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의 음악 작업을 변절이라고 불렀지만 레이 찰스는 이때부터 모든 음악이 자신의 뿌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15세 이후로는 한 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레이 찰스는 블루스 밴드를 따라다니며 미국 전역을 방랑했다. 밴드에서 배운 음악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초월했다. 알토 색소폰, 트럼펫, 클라리넷, 오르간 등에 손을 대며 악기마다의 테크닉과 관련 곡들을 섭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혀갔다. 블루스 밴드를 따라 투어를 다니던 레이 찰스는 18세에 드디어 연주자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됐다. 그때 본명 레이 찰스 로빈슨에서 로빈슨이라는 성을 떼어냈다. 사람들이 자신을 당시 유명했던 프로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과 혼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이들이 레이 찰스를 존경했다. 그가 흑인과 맹인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아티스트는 레이 찰스 말고도 존재했다. 수십 년간 미국 연예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레이 찰스는 미국 음악계에서 누구보다도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와도 구분된다. 흑인들의 희로애락을 대변했던 소울 뮤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업적은 레이 찰스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리듬 앤드 블루스를 가스펠과 결합시켜 소울 뮤직의 혁신을 꾀한 그의 대담함은 확실히 남달랐다. 50년대 히트곡인 'I’ve Got a Woman'과 'What’d I Say'는 그야말로 화끈했다. 이 곡들은 얌전한 신도들이 얼굴을 붉히며 들고 일어날 만큼 리듬과 가사에서 교회 음악의 전통과 형식을 파괴하며 소울 음악의 효시로 자리 잡았다. 레이 찰스는 험난했던 자기 삶의 모든 순간을 음악에 담으며 즐겼다. 60년대 스타의 반열에 올라 전성기를 열어간 이후로도 그가 만들어낸 팝 음악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숱하게 많다. 1962년 레이 찰스는 백인 가수들의 전유물이던 컨트리와 웨스턴을 새롭게 해석한 앨범 ‘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을 발표하며 자신의 명성을 시험대에 올렸다. 흑인 가수가 컨트리 음악을 리메이크하다니. 장르는 구분돼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은 물론 그의 팬들과 안티팬들까지 모두 분노했다. 음악 관계자들은 “무리하고 유치한 시도”라고 질타했다. 주변에선 레이 찰스의 리듬 앤드 블루스 팬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당시 1백만 장이 넘게 팔리는 히트 앨범이 됐다. 앨범의 대표곡 ‘I Can’t Stop Loving You’는 라디오를 틀 때마다 울려나왔다.
천재적으로 살아가기
레이 찰스는 천재였지만 단명은커녕 오래 살았다. 리듬 앤드 블루스, 컨트리 팝, 재즈, 로큰롤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넘쳐났기 때문일까. 그만큼 숱한 사건 사고도 저질렀다. 인종 차별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했지만 마약의 유혹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위대한 예술가는 17년에 걸친 헤로인 중독으로 세 번에 걸쳐 구속됐고, 정신병원에도 수감됐다. 음악이 없었다면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1978년 펴낸 자서전 <브러더 레이>에서 레이 찰스는 "나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다. 음악은 내 피처럼 나의 일부”라고 말했다. 90년대 초 드디어 마약을 끊고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그런 그의 인생은 P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그 와중에 일곱 명의 여자를 만났고 두 번 결혼 후 이혼했으며 공식적으로만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는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와는 친구였고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연주를 거부했을 만큼 소신을 지니고 있었다. 열세 번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리듬 앤드 블루스, 소울의 거장 레이 찰스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가슴에 끌어안았고 험난한 인생사를 지닌 어떤 이들보다도 폭넓은 삶을 살았다. 깊은 울림을 지닌 그의 보컬은 특별함 이상의 특별함을 지닌 ‘영혼의 소리’로 평가받았다. 그의 음악적 감성, 그의 레코딩 작업은 숱한 연주자들에게 천재가 주는 감흥이 무엇인지 일깨웠다. 삶 자체가 천재적인 존재, 그것이 레이 찰스였다.
대다수 전설의 인물들과 달리 자신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때 레이 찰스는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자신을 연기할 배우 제이미 폭스를 시험했다. 직접 곡을 연주하고 폭스가 따라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자신의 행동과 버릇을 따라 하며 연주를 한 폭스를 흡족해 했던 찰스는 영화 <레이>가 막 완성된 시기, 세상을 떠났다. 지독히도 절묘한 타이밍이랄까. 2004년 6월 10일 레이 찰스는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급성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인 2004년 3월 완성된 유작 앨범 ‘Genius Love Company'는 또다시 히트 앨범이 됐다. BB 킹, 엘튼 존, 윌리 닐슨, 보니 레이트, 벤 모리슨, 다이앤 리브스, 노라 존스 등 유명 뮤지션들이 참여한 마지막 유작 앨범에서 그는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이 앨범은 2004년 영화 <레이>와 함께 ’레이‘ 붐을 일으키는 데도 톡톡히 기여했다.
말년의 레이 찰스는 행복했다. 비벌리힐스에 대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LA의 스튜디오에서는 그와 작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오랜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예정된 공연을 취소한 적이 없었던 그가 2004년 3월에 예정돼 있던 마지막 공연을 끝내 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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