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어? 이건 ‘국토(國土)’네, 이건 ‘토내(土內)’, 이건 ‘대(大)이고….’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1979년 2월24일 충북 충주의 향토답사모임인 예성동호회 회원들이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서있던 비석에서 옛 글자들을 읽어내고 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고구려 비석을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유창종·장준식씨 제공
예성동호회는 1978년 9월 당시 유창종 충주지청 검사(현 유금와당박물관장)와
장준식 충주 북여중 교사(전 충청대 교수) 등이 결성한 답사모임이었는데요.
그러나 이 예성동호회는 예사로운 향토모임이 아니었답니다.
동호회를 결성한 그해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문기와도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이 분들이 틈나는대로 발품을 팔아 충주 일대를 답사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황수영 박사(1918~2011)가 전부터
“이곳에서 진흥왕순수비가 발견될 수 있으니 만약 비슷한 고비를 보면 반드시 연락해달라’고
누누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충주 일대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각축을 벌인 요충지였으니까요.
예성동호회가 찾아낸 문화유산들.
1978년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1401호)을 찾았고,
고려 광종(재위 949~975)이 954년(광종 5년) 어머니 신명순성왕후(생몰년 미상)를 위해 세운
숭선사(사적 445호)의 위치를 알려주는 ‘숭선’명 기와도 확인했다.
|문화재청·충청대박물관 제공
■잇달아 국보 보물을 찾아낸 향토모임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1978년 1월 6일 단양 성재산(해발 323m)을 답사하던 장준식 교사(당시 단국대학원 재학중)가
신발에 묻은 흙을 털다가 그 유명한 단양 적성비(국보 198호)를 찾아냈으니까요.
적성비는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땅이던 적성(赤城·단양)을 점령한 뒤,
“신라의 척경을 도운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결성된 예성동호회 회원들은 장준식 교사를 본보기로 삼아
열정적으로 답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1979년 2월24일 의정부지청으로 발령받은 유창종 검사를 위한 송별회 및
기념촬영을 위해 답사에 나섭니다.
그러다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우뚝 서있던, 그리고 40여 일 뒤
‘충주 고구려비’로 명명된 ‘국보 중 국보’ 명문비석을 발견한 겁니다.
물론 발견 당시에는 얼만큼 중요한 비석인지는 알 수 없었죠.
동호회원들은 4월 5일 충주를 방문한 황수영 박사에게 이 비석과 비석 탁본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비에서 선입견 때문에 잘못 읽은 부분.
처음부터 ‘진흥왕순수비’로 여겼기 때문에 ‘고려’를 ‘진흥’으로 잘못 읽었다.
(①)그러나 자세히 보면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어렴풋 보인다(②).
선입견이 빚은 오류였다.
과연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대왕(大王), 국(國), 태자(太子)’와 같은 글자들이 드러났습니다.
황교수는 순간 외마디 비명일 질렀습니다.
“아! 진흥대왕(眞興大王)이다.”
석비 전면 맨 앞줄에 “○○大王”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왕”을 “진흥대왕(眞興大王)”으로 읽은 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꿈에 그리던 진흥왕순수비일 것”이라면서
“아! 혈압이 높아 흥분하면 안되는데….”라면서 연신 차를 마셨답니다.
황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 단국대 교수(1934~2017)에게 “자네가 조사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에서는 ’고려대왕’ ‘전부대사자’와 ‘제위’, ‘하부’ 등 고구려 왕을 지칭하는 표현과,
관직명, 그리고 고모루성, 우벌성과 같은 고구려 성의 이름이 보였다.
반면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신라매금’ 처럼 상대방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계속 보였다.
■“대박사는 안오고 소박사만 왔나봐”
조사단(단국대박물관)은 3일 후인 4월8일 이끼와 청태를 완전히 제거한 뒤
조심스럽게 뜬 탁본을 걸어놓고 비문해독에 나섰습니다.
조사단과 몇몇 자문위원들이 필획 하나하나 글자 한자한자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데도 비석의 국적조차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비석의 마멸이 워낙 심했다지만 뭔가 이상했습니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명이 주로 보였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고모루성’이 확인됐습니다.
수상했습니다.
고구려 관직명과 고구려성 이름이 보이는데 정작 고구려라는 명문은 보이지 않고….
또한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 ‘모인삼백’, ‘신라매금’ 등 마치 상대편이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이 판독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비석이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혼돈에 빠진거죠.
하도 해석이 안되자 토론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수근수근댔습니다.
“아니 서울에서 대학자들이 안 왔나봐. 소학자들만 와서 해석을 못 하는 거 아니냐?”
충주 고구려 비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표현.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는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또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다.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고려대왕이지 어째서 진흥대왕이야?”
비석 해석을 두고 골머리를 썩일 때인 오후 3시 김광수 교수(건국대)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김교수는 현장에서 ‘진흥대왕이 어떠니 저떠니’하고 설왕설래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단칼에 정리했습니다.
“도대체 뭔 소리들 하는거야. 저게 어떻게 진흥대왕이냐. 고려대왕이지.”
김광수 교수의 한마디에 좌중은 순간 얼음이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잠시후 “아! 아! 맞아”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진흥왕’이라는 선입견에 꽂혀있던 이들이 무릎을 친 거죠.
고려대왕, 즉 고구려 임금이 주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뒤늦게 도착해서 선입견이 없던 김교수가 본대로 ‘고려대왕’을 읽어낸 겁니다.
시골 마을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돌덩이가 일약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비로
탄생되는 역사적이고도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은 마침내
“이 비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던
충주에 세운 고구려의 비석”이라고 발표합니다.
1979년 당시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이 학계 자문위원 및 원로들에게 조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의 마멸이 워낙 극심해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조차 판독에 애를 먹었다.
지금도 전체 500여자 중 200여자 정도만 읽을 수 있다.
■‘꿈의 계시론’을 개진한 이병도
그후 쟁쟁한 학계원로와 연구자들이 비문 해석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여가 지난 1979년 6월9일
이병도·이기백·변태섭·임창순·김철준·김광수·진홍섭·최영희·황수영·정영호 등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여 막 발견된 충주(중원) 고구려 비문의 해독에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와, 잘 연결되지 않은 문장을 두고 고뇌에 찬 해석을 하고,
또 다른 이와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명문은 확인됐지만 비문의 마모가 너무 심했습니다.
비석 앞 부분은 50%만 확실했고, 문맥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5% 뿐이었습니다.
하도 비문해석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자 차문섭 교수(단국대)는
“주민들 말마따나 우리는 대박사가 아니라 소박사들만 모였나 봅니다.
원 이렇게 못해서야 원!”라고 자책해서 한바탕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83살이던 이병도 박사는 ‘꿈의 계시론’을 개진했을까요.
“비문 첫 꼭대기에 액전(제목)이 있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단 말이야…아! 그래 눈이 번쩍 띄어가지고…
‘건흥(建興)’ 두글자는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틀림없어요.”
1979년 83살의 이병도 박사가 학술대회에서 “꿈속에서 고구려비문이 보였다”면서
“비석의 윗부분에서 제액(비석의 제목)이 있었고, (장수왕의 연호인)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한 내용을 실은 동아일보 1979년 6월14일자
■“고구려, 신라는 영영 형(고구려)처럼 동생(신라)처럼 지내자”
당대 내로라는 학자들은 일단 비문의 대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문을 작성할 무렵의 고구려·신라의 주종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거죠.
즉 ‘고려대왕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대목을 보죠.
즉 “고려왕은 신라매금(왕)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해서 고구려왕이 신라왕(매금)을
오랑캐의 뜻인 ‘동이’로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주변국으로 여긴 것이 아닐까요.
‘동이매금지의복(東夷寐錦之衣服)’과 ‘상하의복(上下衣服)’,
‘대위제위상하의복(大位諸位上下衣服)’이라는 표현도 주목거리입니다.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대목이니까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어떨까요.
‘신라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당주(군부대의 지휘관)’라는 뜻이죠.
1979년 단국대박물관이 뜬 충주 고구려비의 탁본.
‘고려대왕’ 등의 기록이 그나마 잘 보이는 한 면 빼놓고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거나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출처:고구려연구회의 <중원고구려비연구>, 학연문화사,2000에서)
■“영락 7년(397년) 명문 읽어냈다”
지난 2000년 관련학계 연구자 55명이 4박5일간 모여 잘 보이지 않는 비문을 판독하기 위해 분투해서
겨우 19자(2000년)를 더 읽어냈는데요.
그럼에도 비문의 실체에 다가가기까지는 부족했죠.
특히 비석의 건립연대가 지금까지도 논쟁거리인데요.
여전히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설, 장수왕(413~491)설,
문자명왕(492~519)설 등이 혼재합니다.
그런데 2019년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을 맞이해서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는데요.
두 방식은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래요.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읽어낸 글자들.
고 위원은 ‘영락 7년, 즉 397년 광개토대왕 7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고 해독했다.
|고광의 위원의 논문에서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대사학회 연구자들은 이 기법으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두차례에 걸쳐 판독회를 열어서 총 19곳에서 23자를 제시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결론은 비석의 앞면 윗단 부분에 비문의 제목(제액)에 해당되는
글자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재차 합의했습니다.
그 부분은 1979년 당시 이병도 박사가 ‘꿈의 계시’ 운운하면서 비석의 제목,
즉 제액이 존재하고 그곳에 글씨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 의견을 모으지 못한채 유보했습니다.
그런데 연구에 참여한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흥미로운 판독결과를 발표합니다.
즉 연구자들이 합의하지 못한 글자를 8자 읽었다는 논문을 발표한 겁니다.
즉 가로쓰기 형태의 비석제목에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가 보였다는 겁니다.
즉 비석은 ‘영락 7년(광개토대왕· 397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라는 겁니다.
①고광의 위원이 읽은 ‘영(永)’자.
두계 이병도는 1979년 당시 ‘꿈에서 나타났다’면서 ‘건흥’으로 읽었던 글자다.
②‘락(樂)’자. 두번째 글자의 상부와 하부의 형태를 결합해서 읽었다.
③‘칠(七)’자. ‘영락7’이라면 397년을 의미한다.
④‘년(年)’자. 광개토대왕 비문의 ‘年’자와 비슷한 형태라 한다.
|고광의의 논문에서
먼저 고위원은 제액의 첫번째 글자를 ‘영(永)’자로 판단했답니다.
이 글자는 광개토태왕비나 천추총에서 발견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전돌의 ‘永’자와 비슷한 형태”라는거죠.
또 두번째와 세번째 글자는 ‘낙(樂)’과 ‘칠(七)’자가 확실하고 네 번째 글자는 ‘연(年)’자라는 거구요.
다섯번째 글자와 여섯 번째 글자는 ‘세재(歲在)’가 확실하다는 거죠.
고광의 위원은 그 다음 글자에서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합니다.
이 판독이 맞다면 이 충주 고구려비석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요.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 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며
이 비석을 세운 연대는 ‘397년 이후’라는 얘기가 되겠죠.
광개토대왕의 재위기간이 391~412년이니까 비석의 건립연대는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까지’로도 소급해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첫번째 ‘광개토대왕비’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고광의 위원은 ①②를 두고 ‘세재(歲在)’로 읽힌다고 했다.
③은 세로로 쓰여진 ‘정유(丁酉)’ 간지를 읽었다는데요.
이렇게 가로로 썼다가 세로로 쓰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있다고 한다.
|고광의의 논문에서
■제2의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신라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신라 자비왕) 때
이미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10년(400년)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는 5만 보기병을 파견, 왜병을 쫓아낸 적도 있죠.
이번 고광의 위원의 판독이 맞다면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국 사이이고,
밀월관계를 맺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발표를 수용하는 연구자들도 있더라구요.
물론 아직까지 학계의 검증이 필요하겠죠.
최첨단 판독 기술이 개발된다면 보이지 않던 비문을 더 읽어낼 수 있겠죠.
총 500여자 중에 어렴풋 읽어낸 글자까지 포함해도 200여자에 불과하니까요.
소학자라는 비판을 들으면서 꿈의 계시까지 동원해서
비문을 읽어내려던 연구자들의 분투를 기대해봅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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