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 술렁
일본 고분 닮은 얼개·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 받은 왜인?
일 우익 임나일본부설 근거 삼을라 우려
최근 발굴 조사된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 내부 돌방(석실)의 모습.
주검을 놓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현문이 정면에 보이고
납작한 판석 여러 개를 놓은 바닥면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가 보인다.
1990년대까지 두 차례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단일 무덤이 새해 벽두 마침내 열렸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에 놀라워했고
곧장 흙에 덮여 다시 묻힌 것에 허탈해했다.
1월 국토 최남단 해남에서 들려온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이 유적은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이다.
6세기 전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무덤의 바깥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1500여년 만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무덤 돌방은 일본 규슈섬의 바깥 해안과 아리아케 내해 일대에서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 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다.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입구에서 본 내부 공간.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조성하고
위쪽 천장에 덮개돌(개석)을 놓는 전형적인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석실 무덤 얼개를 띤다.
천장과 벽체에는 역시 일본 고대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조사단은 후면 봉토를 파고 무덤방과 통하는 널길(연도)로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조사 결과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을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만드는 고대 규슈의 석실분 특유의 얼개가 뚜렷했다.
천장과 벽체에도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빛 주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출토품은 대부분 도굴됐으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유물이 상당수 수습됐다.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뚜껑 달린 접시(개배) 10점이 대표적이다.
일부 개배 안에선 조기 등 생선뼈와 육류 등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덩어리도 검출됐다.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다.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돌문짝(문비석)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 입구의 사다리꼴 현문과 내부 모습.
내부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를 넘고 천장까지의 높이는 2m에 달하는 큰 공간이다.
하단부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깬돌을 차곡차곡 올려 벽체를 쌓는
고대 서일본 규슈지역의 무덤 석실과 얼개가 똑같다.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도랑 포함), 높이 9m에 이른다.
황남대총 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보다 큰 국내 최대급 무덤이다.
겉모습은 일본에서 고대 국가가 정립될 당시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 모양새다.
전방후원분은 봉분의 앞쪽은 네모진 방형,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특징을 따서
일본 학자들이 지은 명칭이다.
일본 무덤 형식인 전방후원분이 고대 해상로 길목인 전남북 해안 일대에
10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1990년대 잇따라 확인됐다.
일본 우파 세력은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학계에서 묻힌 이의 출신지가 한반도인지 왜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해남 북일면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겉모습.
앞쪽은 네모진 방형이고 뒤쪽은 둥근 봉분 모양인 고대 일본 특유의 무덤
전방후원분의 전형적인 모양새다.
장고봉 고분도 논란 속에 풍상을 겪었다.
80년대 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엔 자연 지형인 언덕으로 간주했다.
80년대 중반 강인구 전 영남대 교수가 발굴 허가를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불허로 외형 실측밖에 할 수 없었다.
1986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보존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90년대 두 차례 도굴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지난해 가을에야 시작했다.
장고봉 고분 발굴 현장. 오른쪽 봉분에 보이는 구멍이 무덤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판 발굴 통로의 입구다.
하지만 무덤 석실은 2월 말 다시 묻혔다.
연구원 쪽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5~9월 무덤 주구(도랑)의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조사 내용은 한반도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지난 20여년간 백제 정부의 통제를 받는 왜인 관료·용병이란 설과
일본에 이주했다가 현지 무덤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마한인 또는 백제인이란 설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철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 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장고봉 고분의 주요 출토품들.
원래 묻은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이번에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와 아궁이틀 조각,
철제 갑옷과 철촉의 파편 등이 상당수 나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조언을 새겨볼 만하다.
“장고봉 고분은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지만, 묻힌 이를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외형, 구조, 유물 등을 당대 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해요.
민족주의를 넘어 고대인의 관점까지 생각하며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마한문화연구원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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