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비밀]
● 아들에겐 하피첩, 딸에겐 매조도
● 아들, 딸에게 남긴 다산의 애틋한 필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전남 강진 유배 시절에 쓴 두 편의 글
다산이 쓴 가족 이야기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은 마을 사람 정여주(鄭汝周)의 부탁을 받고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랑스러운 효자 아들,
그 어려운 여건에서도 손자를 잘 키워낸 며느리.
정여주는 아들의 죽음과 며느리의 삶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방법을 찾던 중 강진에 유배 와 있던 정약용을 떠올렸다.
정약용의 학식과 품성을 빌린다면 아들과 며느리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으리라.
1811년 먼저 아들에 관한 글을 부탁해 받았고,
3년 뒤인 1814년 며느리에 관한 글을 부탁해 받았다.
정약용은 정여주의 아들과 며느리에 관한 내용을
그의 특유의 서체(書體)에 담아 담백하게 적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작품은, 서예 작품이 으레 그런 것처럼,
첫눈에 확 와 닿지는 않는다.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래도 좀 끈기를 갖고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글씨가 다소 특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묘한 끌림 같은 것이 있다.
뭐라고 할까, 어떤 율동감 같은 것이 하나둘 밀려온다.
정약용이 기록한 효자의 행적엔 이런 대목이 있다.
"몇 년 후에 그의 아버지가 멀리 장사하러 나갔을 때
편안히 지낸다는 편지를 집에 보냈다.
효자는 그 편지를 품에 안고 울었다.
어머니가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효자가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병을 앓고 계시나 봅니다.
글자의 획이 떨렸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니,
과연 그때 병이 위독하였다.
"(後數年其父遠服賈 寄家書曰平安孝子抱書泣其母怪而問之曰
家君殆有疾乎字·其不顫乎及歸而問之病則危矣)"
아들 정관일의 효심이 참으로 담백해 감동이 밀물처럼 찾아든다.
‘정효자전'의 내용을 알게 되면, 정약용의 글씨체가 좀 더 달리 보인다.
다시 한번 유심히 글씨체를 들여다보니,
반듯하고 정성이 가득하다.
정갈하면서도 투명해 보인다.
청순하고 경쾌해 보인다.
정약용의 글씨체가 정관일 부부의 담백한 심성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들은 그림이 아니라 글씨다.
그런 글씨의 매력이 여기 담겨 있다.
이런 점이 유배 시절 정약용 글씨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정효자전' '정부인전'을 써주면서 정약용은
남양주에 두고 온 아들과 딸, 부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배 시절이었기에 정관일 부부의 스토리는
정약용에게 더욱 실감 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정성껏 글을 써주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정약용의 글씨로 표현됐다.
참으로 절묘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정효자전' '정부인전'은 이렇게 글의 내용과 글 쓰는 사람의 마음과
글 쓰는 사람의 서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인 셈이다.
두 아들을 위한 메시지, 하피첩
‘하피첩' 1첩의 머리말을 보자.
"내가 탐진(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纁袡·시집갈 때 입는 붉은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랬고 황색마저 옅어져 서첩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를 잘라 마름질하고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전한다.
훗날 이를 보고 감회가 일어 어버이의 자취와 흔적을 생각한다면
뭉클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피첩이라 이름 붙인 것은 '붉은 치마'라는 말을 바꾸고 숨기기 위해서다.
"(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袡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帔帖 是乃紅裙之轉讔也)"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정약용이 가장 걱정한 것은 폐족(廢族)이었다.
서학(천주교)을 믿었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고 유배를 가야 했던 정약용 형제들.
이로 인해 집안마저 풍비박산(風飛雹散) 난다면 이보다 더 큰 봉변이 어디 있을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늘 근면과 수양, 학문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렇게 '하피첩'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하피첩'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훈계했다.
"경(敬)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라.
내가 너희에게 전답을 남겨주지는 못하지만
평생을 살아가는 데 재물보다 소중한 두 글자를 주겠다.
하나는 근(勤)이요, 또 하나는 검(儉)이다. 근면과 검소,
이 두 가지는 좋은 전답보다도 나아서 한평생 쓰고도 남는다.
포목 몇 자 동전 몇 닢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사대부가의 법도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바로 산기슭에 거처를 얻어
처사(處士)의 본색을 잃지 않아야 하고,
만약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해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야말로 유배객 아비의 절절함이었다.
딸을 향한 그리움, 매조도
사연을 먼저 보자.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돼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서첩 4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가경(嘉慶) 18년 계유년(癸酉年) 7월 14일에 열수옹(冽水翁)이 다산동암(茶山東菴)에서 쓰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候裙六幅 歲久紅琥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嘉慶十八年癸酉七月十四日冽水翁書于茶山東菴)."
‘하피첩'의 머리말과 내용이 흡사하다.
정약용은 왜 이렇게 딸을 위해 그림을 그린 걸까.
정약용은 원래 6남 3녀를 두었다.
그러나 천연두 등의 질병으로 인해 4남 2녀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고
2남 1녀만 살아남았다.
정약용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날 때 막내딸은 여덟살이었다.
그런 딸을 두고 귀양살이 떠나는 아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정약용은 강진에서 늘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 딸이 잘 자라 1812년 드디어 시집을 갔다.
귀양살이 12년째, 딸의 나이 열아홉.
신랑은 정약용의 친구 윤서유의 아들이자 제자인 윤창모였다.
아비의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딸을 위해 그린 것이 바로 '매조도'다.
'정효자전'을 써주고 2년 후, '정부인전'을 써주기 1년 전이다.
이번엔 그림에 적힌 시를 감상해 보자.
"저 새들 우리 집 뜰에 날아와/
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
매화향 짙게 풍기니/
그 향기 사랑스러워 여기 날아왔구나/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주렁주렁 매실도 열리겠지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蕡其實)."
결혼한 딸과 사위가 자식 많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면서도 따스하다.
그림 속 참새 두 마리는 딸과 사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매조도'는 그림인지 서예인지 다소 헷갈린다.
글씨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림보다 글씨가 더 눈에 확 들어온다.
글씨는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깔끔하다.
글씨가 큼지막해 기우뚱한 모습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 기우뚱한 모습에서 아련함이 묻어난다.
화면 위쪽의 매화와 참새 그림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글씨는 보는 이를 더 슬프게 한다.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 가운데 이보다 더 보는 이의 가슴을
아련하게 적셔주는 작품이 또 어디 있을까.
이 '매조도'의 분위기는 그림보다 글씨체가 이끌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매조도'의 서체는 '정효자전' '정부인전'의 서체와 흡사하다.
정갈함, 담백함, 애틋함 그리고 물결치듯 다가오는 율동감까지 말이다.
하피첩의 流轉
정약용은 '매조도'를 그려 딸과 사위에게 주었다.
2004년 어느 날 수원의 주택 철거 현장 쓰레기 더미.
인테리어업을 하는 이모 씨는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의 리어카 바닥에 깔려 있는 고문서 세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씨는 고문서에 대해선 아는 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에게 "폐지를 내줄 테니 그 고문서를 달라"고 했다.
이씨는 그렇게 고문서 세 권을 손에 넣었다.
그는 2006년 4월 KBS '진품명품(珍品名品)'에 감정을 의뢰했다.
그 과정에서 이것이 정약용의 '하피첩'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씨는 감정가로 15만 원 정도 예상했지만 감정위원들은 1억 원을 제시했다.
얼마 후 '하피첩'은 김민영 당시 부산저축은행 대표에게 넘어갔다.
김 대표는 유명한 고서전적류(古書典籍類) 컬렉터였다.
김민영 대표가 구입한 뒤 2010년 '하피첩'은 보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이 파산하면서 김 대표의 재산 가운데 하나인
'하피첩'이 예금보험공사에 압류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하피첩은 2015년 9월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나왔다.
치열한 경합 끝에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5000만 원에 낙찰받았다.
윤지충의 순교와 정약용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고 얼마 뒤인 2021년 10월,
정민 한양대 교수는 백자 사발에 쓰여 있는 글씨가
정약용의 글씨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백자 사발 묘지명의 글씨와 정약용의 생전 필체를 비교 분석한 결과,
정약용의 해서체(楷書體)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정약용 형제들은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정약종은 순교를 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를 갔다.
정약용의 어머니가 윤지충의 고모였으니,
정약용은 윤지충과 4촌 사이였다.
윤지충의 참형에 정약용은 매우 슬퍼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애도의 마음을 담아 백자 사발에 글씨를 써주었을 것으로 정민 교수는 추정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더 진행돼야겠지만 정민 교수의 주장이 관심을 끈다.
해서체는 강진 시기의 정약용 글씨체와는 좀 다르다.
좀 더 격식을 갖추고 있다고 할까.
이런 사실은 정약용의 유배 시절 글씨체가 매우 특징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정약용의 그리움
남양주의 부인 홍씨는 왜 유배객 남편에게 자신의 치마를 보냈을까.
정약용은 그 치마를 오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1810년 '하피첩'을 만들고 '매조도'를 그렸다.
아들과 딸이 무척이나 그리웠을 것이다.
그 사이사이 1811년과 1814년,
정약용은 강진 사람 정여주의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글을 써주었다.
정여주의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글로 옮겨준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정약용의 글씨체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렇기에 '하피첩' '매조도' '정효자전' '정부인전'의 글씨체 분위기는
흡사할 수밖에 없다.
정약용의 글씨는 담백하고 애틋하다.
어떤 글씨는 가분수 같기도 하고 어떤 글씨는 뒤뚱거리는 오리 같기도 하다.
다소 힘겨운 듯 보이지만 그런 글자가 여럿 모여 있으니
유쾌한 율동감으로 다가온다.
묘한 매력이다.
기분이 좋다.
싱그럽다.
보고 또 보노라면 정약용의 삶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의 글씨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은 그리움, 미안함 같은 것이리라.
이광표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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