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 장수왕(413~491)의 대대적인 침공에
백제 수도 한성이 함락된다.
개로왕(455~475)은 아들(문주·475~477)에게
“반드시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라”는 유언을 남긴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한성백제 493년의 역사(기원전 18~기원후 475)는 그렇게 종막을 고한다.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
비운의 왕국이어서 그런가. ‘패배자’라는 낙인 속에 1500년 이상
꽁꽁 묻혀있던 한성백제의 역사는 그야말로 우연히, 극적으로 발견된다.
1996년 말 풍납동 현대 아파트 터파기 공사장에 잠입한 이형구 교수(당시 선문대)가
무수히 박힌 한성백제 문화층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이 이후 발굴조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이다.
그렇게 발견된 ‘풍납토성=한성백제 왕성’이라는 데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한다.
축조시기를 두고 아직 논쟁 중이지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관계는
어느 정도 정리된 듯 하다.
<삼국사기> ‘개로왕’조의 “고구려군이 ‘북성(北城)’을 7일 만에 빼앗고
(개로왕이 몸을 피한) ‘남성(南城)’을 공격해서…”라는 표현에 착안한 것이다.
‘북성=풍납토성’, ‘남성=몽촌토성’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보존상태가 완벽한 21호와 22호 주거지.
■백제 귀족들의 공동묘지 출현
여기서 20년 이상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한성백제 시대의 도성은 왕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한정된 개념이었을까.
왕성의 밖에는 한성백제 시대의 유적 유구가 과연 없는 것인가.
지금은 석촌동·방이동·가락동 고분군 등 일부만 노출됐지만
일제강점기까지 300기가 넘는 고분이 존재했다고 하지 않던가.
두 왕성의 밖에서도 분명 한성백제인들이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풍납토성 발견 이후 지금까지는 토성의 내부 발굴에만
주로 신경을 썼을 뿐이었다.
왕성 내부의 발굴·보존에도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난항을 겪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지하철 및 아파트 공사 등 각종 대규모 개발이 이뤄지는
왕성 밖까지 눈길을 돌릴 여유가 있었을까.
바로 이런 변명 때문에 왕성 밖의 한성백제는
도시개발의 소용돌이 속에 간과됐다.
주거지 3~4채가 재개발 재건축 등으로 중첩 조성된 한성백제 시대 도시 흔적이 나타난
그러던 2016년이었다.
풍납토성과 4㎞ 정도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택지개발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한성백제 시대의 유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릉지역(해발 40~50m)이었고, 고려시대 청동인장이 수습되었으며,
조선시대 민묘가 다수 존재했기에 사전 발굴조사는 불가피했다.
그런데 막상 조사에 들어가자 깜짝 놀랄만한 반전의 상황이 연출됐다.
한성백제 시대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줄줄이 엮여나왔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굴식돌방무덤은 52기에 달했다.
현재까지 조사된 한성백제 시기의 굴식돌방무덤이 100기 정도인데,
그것의 반이 넘는 대규모 고분이 감일동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잠실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확인되는 한성백제 시대 재건축·재개발의 흔적.
■백제 왕후 세력인 진씨 가문의 무덤?
출토된 중국계 청자(‘호랑이 머리 장식 항아리’ 및 ‘닭머리 장식 항아리’)의 연대를
가늠한 결과 4세기 중반~5세기 사이로 추정됐다. ‘
닭머리 장식 항아리’는 중국 동진 후기(396~421)로 파악되지만,
‘호랑이 머리 장식 항아리’는 동진 중기(약 341~395년)로 편년된다.
일부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엉덩이뼈)과 나무관재의 연대 측정결과
‘4세기 중반 정도’로 판정됐다.
따라서 감일동 고분군은 안정적으로 4세기 중반~5세기 사이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석촌동 고분군이 한성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왕릉)이라면
그보다 동쪽 외곽으로 4.5㎞ 떨어진 감일동 고분군은
그 시대 귀족들의 묘지로 판단했다.
그 고분에 묻혔을 귀족들은 누구였을까.
진주아파트 재건축 부지에서 확인된 1600년전 한성백제 시대의 주택들.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에 등장하는 ‘진정(眞淨·생몰년 미상)’이 우선 떠오른다.
진정은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로 한성백제 시대에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347년 진씨 가문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왕후의 친척인 진정을 조정좌평(법무부장관)으로 기용했다.
<삼국사기>는 “왕후의 친척인 진정은…
제 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 사람들이 미워했다”고 악평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 시대에 가장 유력한 외척세력이었던
진씨 가문의 무덤이 감일동 고분군 중에 존재하지 않을까.
땅 속에 꽁꽁 숨어있던 한성백제의 역사는
또한번 택지개발, 즉 아파트 공사 과정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방이동 올림픽콤플렉스 부지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들.
■한성백제판 재개발·재건축
그것은 말 그대로 ‘또한번의 시작’에 불과했다.
2019년부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외곽에서 벌어진 각종 공사현장에서
심상치않은 유구가 쏟아져 나왔다.
왕성(풍납토성·몽촌토성) 외부에 한성백제 주민들이 살았던 흔적이었다.
첫 테이프는 2019년 풍납토성에서 북동쪽 90m 떨어진
‘천호역 역세권 청년주택 사업부지 공사현장’이 끊었다.
노출된 유구와 유물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주거지 6기와, 다양한 용도의 구덩이 10기, 도로유구 1기 등이 확인됐다.
그러나 유구의 양상이 심상치 않았다.
1차로 주거지와 구덩이 등이 조성된 위에
2차로 다시 주거지와 구덩이 등의 유구가 만들어졌다.
2개의 문화층이 중첩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리에 있던 주거지와 구덩이 위에 재개발,
혹은 재건축 건물 등을 올렸다는 얘기다.
또 풍납토성과 연결되는 도로(폭 160㎝, 길이 22m)의 흔적이 보였다.
도로에서는 수레바퀴 및 사람의 발자국 흔적도 나타났다.
이 취락이 4세기 중반부터 100년 정도 존속한 것으로 추정됐다.
방이동 서울올림픽콤플렉스 부지에서 확인된 중첩 주거지들.
2021년 풍납토성 동성벽 외곽에서 벌어진 풍납동 복합청사
신축공사장에서도 심상치않은 유구가 터져나왔다.
18평(880㎝×664㎝) 규모의 주거지와 함께
구덩이, 경작·도로·도랑 등 91기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이번에는 3개의 생활면이 중복 노출됐다.
한번 조성된 주거지와 구덩이 등의 생활공간 위에
재차, 3차에 걸쳐 각종 건물이나 시설물을 올린 것이다.
또 창고 등의 용도로 쓰인 대형 구덩이(잔존 810㎝×364㎝)의 경우
조성-폐기-조성-폐기 등 시차를 두고 다양한 공간이
여러 차례 중복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역시 여러차례 재개발 및 재건축이 이뤄졌던 흔적이었다.
서울올림픽 콤플렉스에서 확인된 부뚜막과 고래의 흔적.
■68평 건물 위에 23평, 21평 건물이…
2020년부터 방이동 서울 올림픽 스포츠 콤플렉스 조성사업 부지에서는
더 극적인 유구가 나타났다.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가 38동이 확인되었고,
다양한 용도의 구덩이 231기, 도랑 모양의 유구 38기,
도로 유구 1기 등이 노출됐다.
화재로 폭삭 내려앉은 건물 2동도 보였다.
어떤 주거지에서 화덕자리와 부뚜막이 보였고,
고래(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나가는 길)가 확인됐다.
역시 사각형·오각형·육각형 주거지와 구덩이가 촘촘하게 조성되어 있었고,
일부는 2중, 3중 중첩되어 있었다.
풍납토성 발굴 이후 토성 내부의 조사에만 매달렸다.
하이라이트는 이 올림픽 콤플렉스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잠실 신천동 진주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연출됐다.
이곳은 저습지에 자리잡은 입지였던 데다,
설령 유적이 존재했다 해도 기존의 아파트 단지 때문에
훼손 가능성이 많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올해(2022년) 1월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존 아파트 건물 사이 사이의 땅 밑에서 기적적으로
한성백제 시대 마을 유적이 보이지 시작했다.
기존 아파트 건물을 아슬아슬 피해 드러난 한성백제 시대 유구는
주거지 68기, 구덩이 363기, 도랑 34기, 도로 1기 등 총 472기에 달했다.
2019년 풍납토성 외곽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시대 중첩 유구.
이 중 보존상태가 완벽한 21호와 22호 주거지는
넓이가 대략 68평(21호·23.08m×9.76m)과 62평(22호·18.55m×11m) 정도였다.
21호는 가장 넓은 주거지라는 점에서,
22호는 바닥면을 다진 흔적과 부뚜막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로 꼽힌다.
주거지 뿐 아니라 창고 혹은 폐기물 공간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 구덩이 또한
363기가 확인됐다.
또 최대폭 8m 가량의 도로가 98m 정도 뚫려있었다.
백제시대 수레바퀴 자국과, 근현대의 운송수단인 경운기 및
트럭 바퀴자국이 같은 방향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 유적 역시 주거지와 주거지, 주거지와 구덩이, 구덩이와 구덩이,
주거지와 도로 등이 여러차례 중첩되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가장 규모가 크다는 68평 주거지(21호) 위에
재차 23평(10.4m×7.36m) 짜리 건물이 들어섰고,
다시 그 위에 31평(12.3m×7.54m)짜리 건물이 조성됐다.
2차례의 재개발·재건축이 이뤄진 것이다.
어떤 주거지는 무려 4번이나 재개발·재건축된 사례도 보였다.
풍납토성에서 4㎞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에서
■황제국을 자처한 근초고왕의 위용
비단 천호동(청년주택)-풍납동(복합청사)-방이동(올림픽 콤플렉스)-
신천동(잠실 진주아파트) 뿐이 아니다.
현재 공사 중인 방이2동 청사와 한미 제2타워 부지 등에서도
한성백제 시대 주거지의 중첩 유구가 계속 확인 되고 있다.
이와같은 유적들의 연대는 안정적으로 보면 4세기 중반~5세기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백제의 최전성기라는 근초고왕 재위(346~375) 시절과 중첩된다.
근초고왕이 누구인가.
369년(근초고왕 24) 고국원왕(331~371)이 이끄는 고구려 침략군을 무찌른 뒤
한강 남쪽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벌인 바 있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군대 사열 때 황색깃발을 사용했다”고 했다.
황제의 색깔로 통하는 황색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백제=황제국’임을 뽐낸 것이다.
감일동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계 청자. 중국 동진 시대의 청자로 보인다.
2년 뒤(371년)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의 반격을 패하(예성강 지류)에서 막아낸 뒤
내친 김에 평양 정벌에 나선다.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당시 백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당대 중국 사서의
‘백제의 요서 경략’ 기사가 웅변해주고 있다.
<송서>와 <양직공도>, <양서> 등은 “고구려가 요동을,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믿지 않은 이들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에게 올린 편지를 보라.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
남으로는 (백제가)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고구려가)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굳이 ‘요서경략’ 논쟁을 제기할 필요는 없겠다.
감일동 고분에서 출토된 부뚜막형 모형토기.
다만 근초고왕 시절의 한성백제가 삼국 가운데 첫번째로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어떤 연구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정벌을 마친 뒤(371년)
“도읍을 한산 옮겼다(移都漢山)”는 <삼국사기> 기록에 주목한다.
즉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몽촌토성 발굴에서
4세기 중반 이전의 유구·유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도한산(移都漢山)=몽촌토성 축조’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외곽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사이 중첩되어 조성된
마을(취락) 유적과 감일동 고분군 등의 출현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최전성기를 이룬 백제의 도성(한성)에 엄청난 인구가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대단위 도시개발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지금도 서울 시민들이 금싸라기 땅에 살면서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요즘 잇달아 발견되고 있는 유적은 가히 ‘한성백제판
도심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증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외곽에서 한성백제인들의 취락유적이 잇달아 확인되고
■왕성 밖 한성백제인의 삶은?
최근에는 그간의 발굴성과와 고지형 분석 등을 토대로 1600~1700년 전
한성백제의 도성(한성) 경관을 복원하는 작업을 펼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왕성(풍납토성·몽촌토성)은 도성이라는 틀 속의
중심 구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왕성 밖은 어떨까.
이제는 왕성 밖 주민들의 생활 및 생산·물류 공간,
그리고 석촌동(왕과 왕족) 및 감일동(귀족) 고분 같은
묘역까지 도성의 범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풍납토성 발견 이후 토성 내에서만 맴돌던 한성백제의 개념이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넓혀지고 있다.
지금 왕성 외곽에서 속속 발견되는 1600~1700년전 도시,
즉 한성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한성백제인들이 살았던 바로 그 공간 위에서
현대인들이 터전을 잡고 살고 있다는 예가 아닌가.
(이 기사를 위해 권오영 서울대·김낙중 전북대·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허의행 수원대 학술연구교수, 한성백제박물관의 정치영·박중균·최진석·이혁희·이홍주 선생,
김아관 고려문화재연구원장, 도원문화재연구원·경상문화재연구원·비전문화재연구원,
김진성 하남역사박물관 학예실장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허의행·박중균·이혁희·이홍주·지민주·김범철·서길덕 외,
<백제왕도 한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개관 10주년 특별전시 연계 학술대회 발표집),
한성백제박물관, 2022년 10월28일
고려문화재연구원, <하남감일동 유적Ⅰ-총론>(학술조사보고서 92집), 2022
고려문화재연구원, <하남감일동 유적 Ⅲ-백제고분군 사진>(학술조사보고서 94집), 2022
하남 역사박물관, <교류와 융합의 타임캡슐-감일 백제 석실분>(특별전 도록), 2021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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