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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태자가 신라왕에게 ‘무릎 꿇어라’ 명령했다”…제2광개토대왕비 ‘8자’의 비밀

mistyblue 2024. 11. 21. 12:49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어요.
일전에 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건흥(建興), 두 글자가 나타났다는 말이야,
아 눈이 번쩍 띄어서 전등불을 켜고 옆에 있는 탁본과 사진을 보니까, 그 글자가 나온다 말이에요….”

1979년 6월9일 충주 고구려 비문 판독세미나에 참석한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가

난데없는 ‘꿈의 계시론’을 소개했다.

그 해 2월 발견된 충주 고구려 비문의 해석을 위해 오매불망, 골몰하던 중

비석의 윗부분에서 ‘건흥’ 글자가 ‘현몽(現夢·꿈에 나타남)했다’는 것이었다.

이병도 교수의 나이는 84살이었다.

세미나에 모인 후학들은 난데없는 ‘꿈의 계시론’에 폭소와 함께 노학자의 학구열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당시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단국대 교수가 덧붙인다.

“…두계(이병도 교수의 호)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댁에 갔는데, 탁본을 내놓으시면서 ‘이거 봐라.

’건흥사(建興四)‘하고, 그 뒤엔 ’년(年)‘자가 붙을 거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정말 건(建)자, 흥(興)자, 사(四)자 같았습니다.”

1979년 2월 발견된 충주 고구려 비문의 윗부분. 발견된지 40년 만에 한 연구자가 이 부분에서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8글자를 읽었다.
이를 근거로 충주 고구려비문이 광개토대왕 연간인 ‘영락 7년(397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라 견해가 나왔다.
|고광의 동북아연구재단 연구위원 설명

 

■꿈의 계시

이 충주 고구려비(이하 충주비)의 명문은 1979년 2월24일 처음 발견됐다.

답사 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이 충북 중원(현 충주시) 가금면 입석마을에 서있던 비석에서 글자를 읽어낸 것이다.

이후 단국대 박물관이 중심이 되어 정식조사가 이어졌다.

당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했지만 비문의 내용을 파악하기란 매우 버거웠다.

오죽했으면 주민들이 “여기 대학자는 안오고, 소학자들만 모였나 봐!”하고 수근댔단다.

대강의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다.

‘①고구려 대왕이 신라 매금(왕)과 영원토록 형제관계를 맺고,

②고구려왕이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으며,

③고구려 지휘관이 신라 영토 내에서 군사 300명을 모집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구려왕이 ‘신라왕’을 ‘매금’, ‘신라’를 동이(오랑캐)로 낮췄다는 게 헥심이었다.

고구려가 천자국의 입장에서 신라를 제후국으로 여긴 것으로 파악됐다.

비석이 심하게 마멸되어있었기에 바문 해독은 어려웠다.
특히 비문의 첫번째가 어느 면인지부터 헷갈렸다.
글자가 잘 보이는 면의 첫 행이 연도를 가리키는 간지없이
‘오월중(五月中) 고려태왕(高麗太王)’으로 시작된 게 아무래도 수상했다.

대강의 내용은 파악했지만 ‘디테일’로 들어가면 ‘파면 팔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비문이 어느 면에서부터 시작하는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글자가 잘 보이는 면의 첫 행이 첫면을 가능성이 짙었다.

그러나 ‘오월중(五月中) 고려태왕(高麗太王)’으로 시작된 게 아무래도 수상했다.

그렇다면 ‘오월중’의 앞에 연대를 가리키는 간지 같은 글자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대목에서 이병도 교수의 ‘건흥(고구려 연호로 추정)4년’설이 등장한 것이다.

 

‘~오월중 고려태왕~’으로 시작되는 면의 윗 부분에 제목에 해당되는 글자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 경우 이 비석은 ‘고려 건흥4년 5월중 고려 태왕은’~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월중~’이 새겨진 면의 윗부분에 글자가 보인다는 이야기는

이기백 서강대·변태섭 서울대·이호영 단국대 교수 등도 언급하기는 했다.

1979년 6월9일 충주 고구려비 판독 세미나에 참석한 원로 역사학자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가
난데없는 ‘꿈의 계시론’을 소개했다.
꿈 속에서 ‘오월중’의 윗부분에서 ‘건흥’ 연호 두 글자가 보였다는 것이었다.

 

■개로=백제 개로왕?

그렇지만 ‘건흥’ 연호는 어떤 고구려 관련 사료나 금석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비석 건립 연도를 특정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비문 안에서 판독 가능한 날짜나 간지, 특정 인·직명 등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즉 ‘12월23일 갑인’, ‘신유년’ 등이 그것이다.

또하나 결정적인 ‘단서’로 등장한 글자가 바로 ‘개로(盖盧)’였다.

당시 연구자 대부분은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을 떠올렸다.

이 ‘개로’라는 이름은 신라 영역에서 군사를 모은 고구려 당주(지휘관) 사이에서 보였다.

다소 뜬금없는 등장이다.

비석 건립연도를 밝히기 위해서는 판독 가능한 날짜나 간지,
특정 인·직명 등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12월23일 갑인’, ‘신유년’, ‘개로’였다.
연구자들은 ‘개로=백제 개로왕’을 떠올렸고, 간지 등을 검토한 끝에
‘비석의 설립 연대=5세기 중 후반’설을 개진됐다.

 

그러나 이병도 교수는 “(고구려로 귀화하여 관직을 받은 백제 혹은 신라인이) 백제 개로왕과 공모해서

신라 영토 내의 사람을 모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고구려 관직을 받은 백제(혹은 신라) 간첩이 백제 개로왕과 공모했다는 것이다.

 

‘개로(盖盧)=백제 개로왕(蓋鹵王)’으로 보았으니 어땠을까.

이 비석은 최소한 개로왕 연간인 5세기 중반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견해가 정설처럼 떠올랐다.

예컨대 ‘12월23일 갑인’, ‘신유년’, ‘개로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연대로

481년(장수왕 69)을 찍은 견해가 그것이다.

그 중에는 비문의 ‘고려대왕’을 문자명왕(장수왕의 손자·492~519)로 보는 주장(이병도)도 있다.

이후 장수왕설이 주류를 이뤘고, 문자명왕설도 만만치않게 제기됐다.

충주비는 전체적으로 고구려-신라 양국의 우호 관계를 담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양국은 400년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에 지원군 5만명을 파병하는 등
혈맹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424년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양국 관계가 급속 냉각된다.

 

■장수왕? 문자명왕?

하지만 장수왕설과 문자명설에는 한가지 맹점이 남아 있었다.

충주 고구려 비석은 전체적으로 고구려-신라간 우호 관계를 맺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신라는 400년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에 5만 보·기병을 파병하는 등

4세기 이후부터 혈맹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펼치자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다.

신라는 433년(눌지왕 17) 전격적으로 백제와 화친을 맺는다.

나·제 동맹의 시작이다.

450년부터 고구려와 신라는 전쟁 상태에 빠진다.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백제와 손잡고 원군까지 파견한다.
이것이 개로왕 집권기인 455~475년 사이의 일이다.
그럴 때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관계를 맺는게 가능한 일인가.

450년 신라의 하슬라(강릉) 성주가 사냥 중이던 고구려 장수를 죽이자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이어 고구려는 454·468년 신라의 국경지역을 잇달아 괴롭힌다.

신라는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백제 개로왕을 위해 원군 1만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481년 신라 호명성을 침입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5세기 고구려-신라의 관계가 사실상 전쟁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마당에 고구려-신라가 형제관계를 맺는게 가능한 일인가.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424년 이전이라면 혹 모를까.

그러나 그때는 백제 ‘개로왕(455~475)’과는 무관한 시기다.

 

그렇지만 전쟁 중에도 이뤄지는 게 국가간 외교교섭이 아닌가.

아무리 고구려-신라 관계가 파탄지경에 빠졌지만

예속관계(형제국)는 유지했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물론 있다.

충주비는 5세기 중~후반 고구려-신라 간 긴장 속 암중모색의 결과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수왕설·문자명왕설이 1979년 이후 주류학설로 자리잡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1979년 발견 이후 21년만인 2000년 열린 판독회에서 ‘오월중’ 비면의 제목에 해당되는 윗부분에
‘연(年)’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견 당시 원로학자의 ‘꿈의 계시’에 나타난 글자가 실제로 등장한 것이다.
또 명문 중 ‘개로(盖盧)’는 백제 개로왕이 아니라 고구려군 지휘관(당주)로 지목되었다.
이로써 21년간 충주비의 해석을 가로막았던 ‘개로’의 덫에서 벗어났다.

 

■진짜 제목이 있다

그 사이 ‘충주비의 제목’과 관련된 논의도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84살의 원로학자가 ‘꿈의 계시’ 운운하며 우스갯소리처럼 소개했던 탓일 수 있다.

‘늙은 학자’의 꿈에 나타났다는 글자를 학술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제대로 판독되지 않는 글자를 두고 설왕설래 해봐야

시간낭비라는 관념이 들었을 수도 있다.

 

비문의 제목이 그 비석의 성격과 설립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데도….

그렇게 20년 이상 지난 2000년 2월이었다.

40여명의 연구자가 4박5일간 충주비 현장에서 합숙하며 판독회를 열어 한 자 한 자 읽어나갔다.

그 결과 모두 19자를 새로 찾았다.

또 그때까지 판독이 나뉘었던 글자 중 6자는 판독 위원 전원 합의로 확정되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성과가 있었다.

그것은 판독 위원 전원이 비면의 윗부분에 ‘연(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병도 교수의 ‘꿈의 계시‘가 21년 만에 ’실제 글자’로 공식 확인된 셈이다.

그래서 ‘오월중(五月中) 고려대왕’이 새겨진 비면이 충주비의 1면으로 굳어졌다.

2019년 충주비 발견 40주년을 맞아 ‘3D 스캐닝’과 ‘RTI 촬영’ 기법으로 비문을 정밀 판독한 결과
의미심장한 결과가 나왔다.
그중 주목을 끈 것은 그동안 간지로 읽혀 연대 추정의 근거로 쓰였던 ‘신유년(辛酉年)’은
다소 엉뚱하게도 ‘공이백육십사(功二百六十四)’로 고쳐 읽었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사진 제공

 

■‘개로’, ‘신유년’의 덫에서 벗어나다

이와함께 그때까지 ‘백제 개로왕’ 읽었던 ‘개로’라는 글자가 도마에 올랐다.

2000년 연구자들의 판독은 달랐다.

‘개로’는 백제 개로왕이 아니라 ‘신라 땅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모집한

고구려 당주(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재해석됐다.

한마디로 비문 속 ‘개로(盖盧·고구려인)’와 ‘개로왕(蓋鹵王·백제왕)’은

국적이 다른 ‘동명이인’이라는 것이다.

1979년 이후 충주비 해석을 헷갈리게 했던 ‘개로’의 덫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19년이 지난 2019년 또 한 번의 진전이 있었다.

연구자들이 충주비 발견 40주년을 맞이해서 ‘3D 스캐닝’과

‘RTI 촬영(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을 활용해서 비문의 글자를 판독해갔다.

두 방식은 360도 돌아가며 다양한 각도에서 빛을 쏘아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 읽어내는 기법이다.

그 결과 23자를 제시했고, 5자를 확정했다.

이중 주목을 끈 것은 그동안 간지로 읽혀 연대 추정의 근거로 쓰였던 ‘신유년(辛酉年)’이었다.

하지만 2019년 판독결과 ‘신유년’은 다소 엉뚱하게도 ‘공이백육십사(功二百六十四)’로 읽혔다.

이로써 ‘개로’(2000)에 이어 ‘신유년’(2019)까지 충주비의 해석에 장애가 되었던 걸림돌이

또 하나 사라진 셈이다.

충주비가 제목 판독에 따라 ‘영락 7년(397) ’, 즉 광개토대왕 재위 시에 일어난 사건 기록이라면 어떨까.
즉 고구려가 신라와 형제관계를 맺으려고, 입조를 요구했지만 신라 내물왕의 기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광개토대왕은 397년 5월 태자(거련·장수왕)를 (충주 부근에 마련된) 궤영(고구려군 주둔지)에 파견한다.

 

■새롭게 읽은 ‘영락7년(397년)’ 제목

무엇보다 이 때의 판독에서도 비석 정면 윗단에 ‘칠(七)? 년(年)?’같은

비문의 제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그런데 연구자들의 공동 판독 결과와 별도로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발표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1면 제목 부분에서

가로로 쓴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8글자를 읽었다고

‘개인 자격’으로 발표한 것이다.

 

즉 이 충주 고구려비가 ‘영락 7년(광개토대왕· 397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라 본 것이다.

고 위원은 이외에도 ‘12월23일 갑인(十二月卄三 甲寅)’을 ‘12월27일 경인(庚寅)’으로 고쳐 읽었다.

이로써 1979년 발견 이후 학계를 풍미한 ‘장수왕설’ 및 ‘문자명왕설’과 함께 광개토대왕설이 속속 제기됐다.

 

얼마전 충주비 발견 45주년을 맞아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이 그중 하나이다.

최근 새로 판독된 ‘영락7년(397년)~’ 명문에 따라 ‘397년 무렵

고구려-신라 관계’를 논증한 글이다.(이용현 전 경북대 교수)

충주비는 397년 5월과 12월의 사건을 나눠 차례로 기록했다.

따라서 이 비석은 12월 27일 이후, 즉 397년 말이나 이듬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현 교수가 글을 토대로 충주비의 전체 내용을 요약해보자.

‘궤배(?拜·무릎 꿇는 인사법)’는 고구려식 예법(<삼국지>)이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396년 58성 700촌을 빼앗긴 백제왕(아신왕)이
궤왕(?王), 즉 광개토대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충주비에서도 고구려가 충주에 이른바 궤영이라는 임시 군영을 만들어 놓고
신라왕의 궤배를 요구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무릎 꿇어라!’

고려 태왕(광개토대왕·391~412)은 조왕(고국원왕·331~371) 때부터

신라 매금(왕)과 영원히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했다.

그에 따라 광개토대왕은 신라 매금(내물왕·356~402)의 입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의 요구를 기피했다.

그러자 광개토대왕은 397년 5월 태자(거련·장수왕)와 함께

관료들을 (충주 부근에 마련된) 궤영(고구려군 주둔지)에 파견한다.

 

‘궤(궤)’는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고구려 예법’(<삼국지> ‘동이전’)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396년 58성 700촌을 빼앗긴 백제왕(아신왕·392~405)이 궤왕(跪王),

즉 광개토대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서했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왕에게도 천자-제후 관계를 다지려고 충주 부근에 임시 외교공간을 조성해놓은 것이다.

그곳에서 신라왕에게 “고구려 태자에게 무릎을 꿇는 예를 올리라”고 요구한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는 전쟁을 통해, 신라는 외교를 통해 천자-제후 관계를 맺도록 강요한 것이다.

충주비에서 ‘어린(夭) 태자’로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광개토대왕은 어린 태자를 외교무대에 내보내 신라왕을 상대하도록 한 것 같다.

 

■태자(장수왕)의 충주 행차

광개토대왕의 태자라면 거련(장수왕)을 가리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장수왕은 394년 태어났고, 409년(광개토대왕 18) 태자로 책봉됐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397년의 일을 기록했다는 충주비의 태자가 장수왕이라면 불과 4살 때,

그것도 태자 책립 이전의 얘기가 아닌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의 사적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연대는

당대의 자료인 <광개토대왕비문>과 비교하면 2~5년 정도 차이가 난다.

 

단적인 예로 <광개토대왕비문>는 관미성 등 백제의 58성 700촌을 빼앗는 해를 396년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392년조에 그 같은 사실을 기록한다.

4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중국 사서에 따르면 397년 무렵 태자(장수왕)의 나이는 10살 정도로 추정된다.

이 대목에서 충주비에서 태자를 수식하는 단어로 ‘어리다’는 ‘요(夭)’자를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광개토대왕이 어린 태자를 신라와의 외교무대에 등장시켜 신라왕을 상대하도록 만든 것이다.

397년 5월 궤영을 설치한 충주에 행차한 고구려 태자는
“신라왕은 앞으로 계속 고구려에 입조하라”고 재촉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신라 내물왕은 할 수 없이 신료들을 이끌고 12월 고구려 태자를 찾아왔다.
고구려 태자가 충주 궤영에 행차한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내물왕의 굴욕외교

397년 당시 신라 내물왕은 재위 42년 째를 맞고 있었다.

60살에 가까웠거나 그 이상의 고령이었을 것이다.

10살 내외의 고구려 어린 태자가 60살 안팎의 신라왕을 외교 맞상대로 삼았다는 뜻이다.

신라로서는 ‘굴욕 외교’로 여겼을 법 하다.

 

궤영에 행차한 고구려 태자 일행은 신라 왕과 신하들에게 의복 등 갖가지 물품을 하사한다.

천자(황제)가 제후에게 내리는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고구려 문자명왕(491~519)과 안장왕(519~531)이

북위와 양나라에게 책봉을 받으면서 의관과 의복 등을 받았다.

고구려 역시 의복 하사로 천자국(고구려)-제후국(신라)의 관계를 단속해놓고 싶었을 것이다.

 

고구려 태자는 그와 동시에 “신라왕은 앞으로 계속 고구려에 입조하라”고 재촉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러자 신라 내물왕은 신료들을 이끌고 12월27일 고구려 태자를 찾아온다.

‘5월 중’ 태자가 충주 궤영에 행차한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신라왕 일행이 찾아온 곳은 충주 궤영이 아니라 우벌성이었다.

우벌성의 위치는 연구자 마다 달리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벌’이 신라 지명의 어미였으므로 ‘우벌성’이라 기록한 397년에는

여전히 신라땅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가 설치한 궤영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려야 하는 수모는 피하고 싶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한 물밑 접촉의 결과, 극적인 타협점을 이끌어낸 것이다.

신라 내물왕은 충주 궤영이 아니라 우벌성에 와서 고구려 태자를 만났다.
소백산맥 이남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벌성(위치 미상)은
397년 당시에는 신라영역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내물왕은 충주에 마련된 고구려 궤영에 가서 무릎을 꿇는 예를 올리지 않은 것 같다.
|이용현 교수 설명

 

■태자=신라 실성왕이라도…

어쨌든 397년 12월 우벌성에서 외교 교섭을 마무리 지은 고구려는

당주(지휘관)들에게 명을 내려 신라인 300명 이상을 모집한다.

고구려군 지휘관 중에 ‘개로’가 포함되어 있다.

1979년 충주비 발견 이후 20년 이상 백제 개로왕으로 오인한 바로 그 사람이다.

고구려는 그때 모집한 인원들로 군대를 편성·운영했다.

이것이 ‘영락 7년(397년)’설에 근거한 이용현 교수의 충주비 해석이다.

 

물론 같은 ‘397년설’을 따르지만 다소 차이가 나는 견해도 있다.

예컨대 비문에 등장하는 태자를 장수왕이 아니라

392년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귀국(401)한 후 신라왕이 된

실성왕(402~417)일 가능성을 제기한 연구자도 있다.(이재환 중앙대 교수)

그러나 그 역시 ‘충주비’의 조성이 광개토대왕 연간은 400년을 전후한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견해다.

우벌성에서 신라와 외교 교섭을 마무리 지은 고구려는 신라 주둔 지휘관들에게 명을 내려
신라인 300명 이상을 모집한다. 고구려군 지휘관 중에 ‘개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형제에서 원수로

‘영락7년=397년’설을 전제로 할 경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충주비의 표현대로 4세기말 고구려-신라가 형제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그랬다.

<삼국사기>는 “392년(내물왕 37)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실성(훗날 실성왕)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고 했다.

고구려가 강성했기에 맺은 외교교섭이라면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형제의 맹약 같은….

 

또 광개토대왕 비문은 “399년 왜가 신라를 쳐들어오자 신라 내물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원군을 청했다”고 했다.

급기야 이듬해인 400년 고구려가 원병 5만명을 보내 서라벌을 침략한 왜군을 몰아냈다.

이 대목에서 광개토대왕 비문에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예전에는 조회하지 않았던 신라 매금(왕)이…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직접 조공했다”는 것이다.

충주비의 내용과 부합된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예전에는 조회하지 않았던 신라 왕이…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직접 조공했다”고 전했다. 충주비의 내용과 부합된다.

 

이후 고구려-신라 관계는 가파른 상하관계로 치다른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427년 이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신라가 백제와 손을 잡은 이후 파탄난다.(<삼국사기>)

이것이 397년 전후로 한 고구려-신라 관계이다.

어떤가.

84살 노교수의 ‘꿈의 계시’가 언급되고(이병도),

혹 영원히 풀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절망(임창순 금석학자)했던 충주 고구려비였다.

그런데 지금와서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인가.

그곳에서 풍기는 체취가 광개토대왕의 것인가.

사족을 달자면 금석문을 제대로 해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충주비 에피소드를 보면 알 수 있다.

‘공264(功二百六十四)’를 엉뚱하게도 ‘신유년(辛酉年)’으로 잘못 읽는다든지,

‘개로(盖盧)=백제 개로왕’으로 단정함으로써 연대 추정에 얼마나 많은 혼선을 빚었던가.

 

그럼에도 눈을 부릅뜨고, 심지어 꿈에서까지 나타날 정도로 불철주야 분투하는 연구자들이여!

최첨단의 장비를 동원해서라도 한글자 한글자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물론 오늘 소개한 기사도 향후 판독에 따라 얼마든지 잘못된 해석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기사는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용현 전 경북대 교수, 홍성화 건국대 교수,

이재환 중앙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고광의, ‘충주 고구려비의 판독문 재검토-제액과 간지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제98호, 한국고대사학회, 2020

이용현, ‘충주 고구려비에 보이는 4세기말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충주 고구려비 발견 45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

예성문화연구회ㆍ동아시아고대학회 공동학술세미나, 2024

이재환, ‘영락 7년’ 판독에 기반한 충주 고구려비의 내용 검토와 충주 지역의 접경성‘,

<목간과 문자> 27호, 한국목간학회, 2021

단국대박물관, <중원고구려비 조사보고서>, 1979

고구려연구회, <중원고구려비 연구>(고구려연구 10), 학연문화사, 2000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충주 고구려비 연구>(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118), 2020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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