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가요

[스크랩] 짝사랑 / 고복수

mistyblue 2012. 2. 18. 19:41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 단풍이 휘날리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을 헤메이는 서리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후유 한숨집니다

 

고복수의 '짝사랑'으로 느끼는 트로트의 서정성

 

 

     1.   짝사랑의 대상은 잃어버린 조국

 

        1934년 ’타향‘(타향살이)과 ’이원애곡‘이 실린 음반이 나와

        크게 히트함으로써, 신인가수 고복수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어서 나온 ‘휘파람’(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1934), 

       ’사막의 한‘(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1935),

        짝사랑(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1936) 등으로

        부동의 인기가수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그가 내놓은 대표 곡은 위에서 든 5곡 이외에 '그리운 옛날' 

         '불망곡' '꿈길천리'  '고향은 눈물이냐' ’풍년송‘

         (이은파와 듀엣으로 부른 신민요) 등으로 20여 년이라는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그의 가수생활에 비춰보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고복수 은퇴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남인수, 신카나리아, 황금심, 고복수

 

고복수는 1958년 은퇴공연을 할 때까지 20여 년간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인기가수로서의 활동을 이어가지만, 계속하여 신곡을 내놓고

         히트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향살이‘와 ’짝사랑’과 같은 기존의

         히트 곡을 무대공연 등에서 부름으로써 계속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인기가수로서의 지위를 누린 것이다.

 

         고복수가 무대에서 불러 인기를 끌었던 대표적인 곡은 ‘타향살이’

         ‘사막의 한’ ‘짝사랑‘ ’풍년송‘ 정도이었다.

 

         그 중 ’타향살이‘와 ’짝사랑‘은 고복수가 평생을 두고 우려먹은(?)

         노래인데도 대중들은 그 노래에 언제나 빠져들었고,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이라 남녀노소 구별 없이 누구나 생활 속에서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 만큼 ‘타향살이’와 ‘짝사랑’은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민족의 가슴 가슴에 새겨져 왔던 노래였던 것이다.

 

 

박영효가 가사를 짓고, 손목인이 작곡한  ‘짝사랑’은 고복수가 취입한

       마지막 인기곡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취입한 곡들도 있지만,

       다른 곡들은 음반 판매량으로 보아 대중들의 인기를 크게 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30년대 중, 후반에 우리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박시춘, 이재호,

      김해송과 같은 천재 작곡가들의 곡을 받은 김정구, 남인수, 백년설, 진방남,

      고운봉 같은 신진 가수들이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같이 하는 주옥같은

       명곡을 내놓음으로써, 고복수가 설 자리가 좁아졌기 때문이었다.

 

     ‘짝사랑’은 당시 꽃피워진 트로트의 전성시대를 대표할만한

      단조 트로트곡이다.

 

     일제 식민시대의 트로트 곡들이 이별의 슬픔과 탄식,

     타향살이의 설움과 망향,  희망 없는 인생사 탄식.  방랑과 좌절,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 등을 말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탄식, 저항의식이  적절하게

     억제된 시어로 깔려 있고,  대중들은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심정과

     그 쓰라린 마음을  노래로서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짝사랑’도 그러한 일제시대 트로트의 속성을 그대로 지닌 노래로서,

    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의 이치와 임에 대한 그리움과 서글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임은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나

    사랑하는 임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통탄해 마지않는

     잃어버린 나라였던 것이다.

 

     당시의 2천만 민족 모두가 짝사랑하고 있던 잃어버린 나라를

     박영호는 토속성 짙은 시어로 그려 내었고, 손목인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멜로디로 창작해 냈던 것이다.

 

      으악새가 알려주는 이 서글픈 가을의 소식을 접하니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낭만과 꿈의 시간이,

      또는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의 전통과 국권이 튼튼했던 조국의 건강한 모습이 새삼스럽게

      가슴 깊이 사무쳐 온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그것은  바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 죽어가고 있던

      나라의 운명과, 인권과 자유마저 짓밟히고 있던 동포의 처참한 신세를 상징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사나이의 괴로운 심정을

     나타내는 가슴 터질 듯한 심상(心象)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무튼 일제 강점기의 조국의 상실 또는 한 사나이의 절망적인 실연을

    상징화시킨 이 ‘짝사랑’은 으악새라는 메타퍼로 은유되는 민초(民草)들의

    우수(憂愁)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우수를 고복수는 선천적인 구성진 떨림과 탄식조의 목소리로

     흐느껴 우는 듯 바깥으로 고요히 흘려 내리고 있다.

 

     고복수의 ‘짝사랑’은 7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그것이 표현하고자 한

     절망과 비련을 가슴 깊숙이 스며오게 한다.

 

       이 ‘짝사랑’은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에 나라의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직면해 고독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참모들과 고뇌하며 술잔을 기울이며 즐겨 불렀던 18번으로 한때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가요이기도 하다. (정영도, 철학교수와 대중가요와의 만남, 화산문화, 2008, p.52)

 

 


      2. 으악새는 왜가리의 방언

 

   ‘짝사랑’의 노래 말에 나오는 ‘으악새’를 두고  그런 이름은

     가진 새가 없고 가을철에 우리나라의 들녘이나 산기슭에 희뿌옇게 활짝 피는

     억새풀이라고 하면서, 억새풀이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가 슬피 들린다는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 대세였었는데 근래에 와서 그 설이 뒤집혀졌다.

 

     으악새를 줄여보면 악새 또는 왁새가 되는데, 왁새(또는 웍새)는

     왜가리의 중부 지방 또는 관서 지방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황새목 백로과의 새인 왜가리는 봄에 우리나라에 와서 새끼를

     번식시키면서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되면 남쪽 오스트레일리아 쪽으로

      돌아가는 철새로서, 돌아갈 시기인 가을이 되면

     '와-악 와-악(또는‘워-억 워-억)하고 구슬피 운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흔한 여름새이며 번식이 끝난 일부 무리는 중남부 지방에서

     겨울을 나면서 텃새가 되기도 한다. 한국·중국 등 세계 각지에 분포하며,

     호반, 소택지, 논, 간석지 등에서 서식한다. 

 

     얕은 물속에서 물고기, 개구리, 가재 등을 잡아  먹으면서  교목의 꼭대기에

     집을 만들며, 4∼7월 번식기에 집단으로 번식하는 새이다.

 

 


 ‘짝사랑’을 작사한 박영호는 이 노래에서 ‘으악새’ ‘뜸북새’ ‘조각달’

 ‘들국화’ 등과 같이 주변에서 쉽게 대하는 자연적 소재와 계절의 변화를

   사랑의 추억과 연계시켜 가을을 맞이하는 서글픈 심정을 

 ‘이즈러진 조각달’ ‘임자없는 들국화’ ‘서리맞은 짝사랑’등으로

   형상화시키고,  ‘출렁출렁’‘살랑살랑’ ‘휴우휴우’등과 같은 

  실감나는 시어로 구성하여, 누구나 공감이 갈 수 있는 노래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3. '짝사랑'을 작사한 박영호


  ‘짝사랑’의 작사자를 김능인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대하는 대부분의 가요곡집에도  작사자가 김능인으로 표기되어 있다.

   기존의 노래책에서 곡을 선별하여 편집한 우리들의‘

   한밤의 사진편지 독자 함께 걷기 노래책’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작사자는 엄연히 박영호이다.

    왜 작사자가 바뀌었는가 하면 박영호가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다.

 

    6.25 사변 이후 월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시, 소설, 노래 할 것 없이

    남한에서 소통되지 못하도록 했다. 노래는 작곡자가 월북한 것은

    물론 작사자가 월북한 것도 금지되었다.

 

    노래의 3 당사자 즉, 작곡자, 작사자, 가수 중의 어느 한분이 월북했다면

    어김없이 그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던 것이다.

 

    월북 작가의 금지곡은 작곡가보다도 작사가에 의한 노래가 많았다.

    작사가들은 대부분 문학가이었기에 이들의 문학작품이 금지되면서

    노래도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사랑을 받던 노래를 살리기 위해서 작사자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고 가사를 약간 바꾸거나 하여

    노래를 살리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금지곡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월북 전까지 가장 많은 노래 말을

    지어 내었던 조명암(본명 조영출, 예명 이가실, 김다인, 김운탄, 1948년 월북)과

    박영호(다른 이름, 처녀림, 1946년 월북)가 작사한 노래였다.

 

   ‘알뜰한 당신(이부풍 작사)'‘고향초(김다인 작사)'‘고향설(추미림 작사)'

   ‘꿈꾸는 백마강(김용호 작사)'‘목포는 항구다(박남포 작사)’등은 조명암이

     작사한 것이고, ‘연락선은 떠난다(박남포 작사)'‘짝사랑(김능인 작사)'‘

     번지없는 주막(추미림 작사) 등은 박영호가 작사한 것이다.

 

    ‘짝사랑’은 작사자가 월북작가 박영호이어서 당연히 금지곡으로 되었어야

      했지만, 고복수가 처음 부른 후 계속하여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 노래를 살리기 위해, 음반사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들이 작사자를

      1930년대 말에 이미 사망한 김능인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위에 있는 추미림, 박남포는 반야월(가수 진방남)의 다른 이름이고,

      김다인은 조명암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박영호도 김다인이라는

      이름을 썼던 경우도 있었기에 가요계에서는 박영호와 조명암이 작사한 곡을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곡이 몇 곡 있어 밝혀야 할 과제로

      두고 있다고 한다.

   진주성 밑 남강변에서; 왼편부터 남인수, 구완회(작사가), 미상, 박영호

 

박영호(1911-1953)는 강원도 통천군 출신으로서 원산에서 성장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없다. 북한에서 간행된 최창호 저“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이 책은 2000년 서울에서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일월서각)라는 이름으로 출판됨)에서는

        원산에서 광명보통학교를 마쳤으며, 와세다 대학 문과 강의록으로

        대학과정을 터득하고 문학창작의 길에 나섰다고 한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프로레탈리아 연극활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구속되기도 했다.

 

        원산의 프로연극 단체 조선연극공장에서 ‘팔백호 갑판장’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 초, 중반에 연극시장, 신무대. 조선연극사, 연극호,

        황금좌 등의 단체를 거쳤고,  1930년대 중, 후반에는 청춘좌, 성군,

        고협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1930년대 중, 후반을 대표하는 몇 명의 중요한 대중극 작가에 꼽히며,

      ‘산돼지’ ‘등잔불’ 등의 대표작들을 발표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목적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2년‘세기말의 노래(이경설)’로부터 시작하여

      ‘짝사랑(고복수)'‘연락선은떠난다(장세정)'‘울어라문풍지(이난영)’

      ‘오빠는풍각쟁이(박향림)’‘유랑극단(백년설)’‘번지없는 주막(백년설)'

      ‘망향초 사랑(백난아)’등 수많은 히트곡을 냄으로써, 조명암과 함께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사사가로 손꼽힌다.

 

         해방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에 둘째 부인인 작가 이선희와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조선연극동맹 초대위원장을 지냈으며, 6.25 사변 때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53년 3월에 종군작가 활동 중에 전사했다.

 

              폐결핵을 앓던 중에 1952년에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이영미 외,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 일월서각, 2000.)


 

 

 

출처 : Music It`s My Life 쿤타 킹
글쓴이 : 쿤타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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