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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재즈에 대하여 22. 재즈 100년의 악기 섹소폰 2.

mistyblue 2012. 3. 28. 22:48

 

 

 

시드니 베세(Sidney Bechet), 츄 베리(Chu Berry), 베니 카터(Benny Carter),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이들의 이름은 곧 재즈이다.

색소폰 연주인들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탄생 과정을 알아보자. 색소폰이라는 악기는 재즈에서 쓰이기 이전에 고전 음악인 클래식에서 먼저 사용되어 왔으나 그다지 큰 비중을 두는 악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색소폰은 재즈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악기로 새롭게 태어났다.

아돌프 색소(Adolf Saxo)는 왜 색소폰을 만들었나?

색소폰을 처음 만든 아돌프 색소의 아버지는 벨기에의 디낭 출신으로 그 곳에서는 이미 관악기 제조사로 정평이 나 있는 유명한 악기 제조상이었다. 아돌프는 장인 정신이 투철한 악기상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가 어렸을 때 브뤼셀로 사업을 이전했고 그곳에서도 역시 그의 장인 정신은 많은 연주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성공적인 사업 확장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늘 아버지가 하는 일을 곁에서 지켜봐 온 아돌프는 악기 만드는 일과 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돌프 색소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악기를 배워 나갔는데 이는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 직접 그 악기를 테스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배운 아돌프 색소는 자신이 배운 악기들의 다양한 특색을 알게 되었고 각각의 악기마다 고유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자신이 배운, 그리고 당시까지 나온 금관, 목관 악기의 장점만을 살려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자 했다. 아돌프 색소는 악기를 배우면서 느낀 점, 즉 목관 악기의 음색과 금관 악기의 풍부한 음량을 하나로 만들 생각을 했고 결국 ‘색소폰’이라는 악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처음 만든 색소폰은 클라리넷처럼 12음계로 복잡하지 않은 대신 배음을 이용한 옥타브 음을 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옥타브 음을 내려면 관 자체가 기존의 클라리넷보다는 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무보다 쉽고 편한 금속으로 원추형의 큰 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몇 번의 실험 결과를 통해 소리를 내야하는 마우스피스는 금관 악기의 것을 사용하면 소리가 너무 가냘프고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터득한 후 나무를 깎아 만들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베이스 색소폰이라는 결과물이 탄생되었다.

아돌프 색소가 처음으로 만든 베이스 색소폰은 1842년 베를리오즈에게 보내졌고 1844년, 관현악단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선보였다. 이후 1846년 3월 20일에 특허를 따내게 되었고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곡에 처음으로 사용된다. 이후 아돌프 색소의 심혈을 기울인 실험은 꾸준히 계속되어 베이스 색소폰보다 조금 작은 색소폰을 만들 계획을 세운 뒤 큰 원추형의 관을 조금 작게 만들고 길이 또한 줄이게 된다. 이 악기가 현재 대중들에게 청아한 소리로 사랑 받고 있는 알토 색소폰이다. 알토 색소폰은 1853년경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윌리암 프라이의 교향곡에 사용되었다. 알토보다 조금 후에 나온 테너 색소폰은 비제의 ‘아를르의 처녀’에 사용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를르의 처녀''에는 테너 색소폰 독주가 있었는데 이 연주 이후 많은 테너 색소폰 연주 지망생들이 테너 색소폰을 구입하려고 아돌프의 집으로 찾아와 그의 집 앞에 긴 줄을 서는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탄생한 색소폰은 교향곡에도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지만 소리의 울림과 화려한 사운드로 군악대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향곡과 오페라 등 고전 음악에서는 점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색소폰은 1900년대에 들어와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고 남북 전쟁 이후 헐값에 불허 받은 악기로 연주하던 흑인 브라스 밴드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주로 댄스 밴드와 고적대에서 사용되기에 이르렀으며, 현재 우리 시대 대부분의 모든 음악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재즈에서 가장 활발히 연주되는 악기로 자리 매김 하게 된 것이다.

재즈에서 최고의 자리를 부여받은 색소폰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재즈에서 색소폰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앞서 언급했듯 1910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에는 주로 빅 밴드에서 사용되었다. 초기 뉴올리언즈 시대 최고의 연주인으로 평가받는 시드니 베세는 트럼펫이 지배하던 당시 재즈계에 화려하게 등장해 클라리넷과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를 통해 색소폰의 맛을 가장 확실히 전달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수많은 연주인들이 존경하는 알토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 이전에는 콜맨 호킨스라는 위대한 명인이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장난감 만지듯 주물렀고 팬들은 최고의 연주력을 겸비한 호킨스를 ‘색소폰의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표현했다. 1904년에 태어나 폭넓은 음역 대에 풍부한 사운드로 스윙한 호킨스는 스윙 시대부터 밥, 그리고 모던 재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색소포니스트들에게 교과서적인 인물이 되었다. 당시 빅 밴드에서의 색소폰 솔로는 콜맨 호킨스가 처음 시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복잡한 코드 진행과 남보다 앞서 나가는 생각, 즉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던 복잡한 화음 구조를 즉흥연주에서 선보이기 시작한 후 각각의 빅 밴드에서 색소폰 솔로이스트를 두기 시작했다.

호킨스의 긴 솔로에서의 멜로디 라인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이면서도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호킨스는 1923년부터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플래처 핸더슨 밴드에서 최고의 색소폰 솔로이스트로 활동한 후 30년대로 넘어와서는 소규모 캄보를 조직해 자신의 밴드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호킨스가 연주한 ‘Body And Soul’은 최고의 명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색소폰이 빅 밴드에서 그 위상을 확실하게 자리 매김하며 다양한 솔로이스트들이 활동할 때 등장한 인물 가운데 최고의 알토 색소폰 주자로 등극한 베니 카터는 다소 호킨스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자신만의 연주력으로 호킨스와 대적하는 연주인이 되었다. 베니 카터는 호킨스보다 조금 깊고 풍부한 음량으로 알토 색소폰이 주는 맛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연주인이라는 평을 받으면서 일목요연하게 연주하는 깔끔한 곡 해석력과 멜로디가 아름다운 즉흥연주를 구사했다.
특히 즉흥연주시 경쾌하고 지적인 맛을 잘 살리는 연주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호킨스가 화려한 즉흥연주와 알 수 없는 멜로디의 화음을 보여주었다면 베니 카터의 스윙은 모던 재즈 시대의 알토 주자들에게 풍부한 하모니를 통한 스윙을 연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베니 카터가 클럽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는 알토 색소폰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는 점이다. 트럼펫, 클라리넷은 물론 때로는 노래까지 불러 대중들을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게 해 함께 호흡하는 연주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베니 카터의 뛰어난 연주와 편곡 능력을 인정한 플래처 헨더슨, 베니 굿맨, 카운트 베이시 등은 자신들의 밴드를 위해 베니 카터에게 편곡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당시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베니 카터가 연주하는 ‘How Deep Is The Ocean?’ ‘This Can''t Be Love’같은 곡을 들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알토 색소폰에서 테너 색소폰의 시대로...

시대는 늘 변화를 거듭한다. 초창기 빅 밴드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던 클라리넷과 알토 색소폰의 위상에 눌려 늘 그늘 속에서만 존재하던 테너 색소폰은 벤 웹스터가 등장하면서 빛을 보게 된다. 벤 웹스터는 듀크 엘링턴이라는 위대한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기 시작했는데, 벤 웹스터 역시 콜맨 호킨스의 플레이에 영향을 받아 연주를 시작했으나 사실 그의 연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 인물은 레스터 영이었다. 레스터 영의 블로윙을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연주법을 개발한 테너 연주인인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20대에 들어서면서 처음 색소폰을 배웠다고 하니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찌 단 1년 간의 레슨으로 이렇게 연주 할 수 있겠는가. -벤은 영에게서 1년 간 레슨을 받고 무대에 섰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라는 말 외에는 도저히 다른 표현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의 색소폰 연주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발라드 연주를 펼치는 명인으로 알려져 있는 벤 웹스터의 테너 색소폰은 음을 길게 늘어뜨리는 비브라토 연주에서 그 독특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벤 웹스터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해 현재의 거의 모든 색소포니스트들이 사용하고 있다.

알토 색소폰에서의 맑은 비브라토 대신 테너 색소폰이 주는 묵직한 톤의 비브라토는 당시 대중들에게 색다른 맛을 전해 주었는데, 적당한 미디엄 템포의 연주에서는 풍부한 스윙감과 조금 거친 맛의 후두음을 사용하기도 하고 솔로 연주 시에는 테너 색소폰 한대로 모든 사운드를 대신 할 만큼 꽉 들어찬 사운드를 구사했다.

듀크는 벤 웹스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해 좀 더 화려한 솔로를 구사하도록 했고, 벤은 좀 더 악보에서 탈피해 우회하는 법을 연구하여 직접적인 선율적 접근법을 시도하는 다양함을 선보였다. 이러한 연주는 결국 앙상블의 중요성과 솔로의 중요성 두 가지를 하나의 연주력으로 응집시키는 데에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벤의 레가토 사운드는 발라드 스타일에서 화려하게 등장한다.

40년대 듀크의 오케스트라를 최고의 밴드로 만든 인물 벤 웹스터, 이는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벤 웹스터는 듀크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다가 50년대에 들어와 소규모 캄보를 조직해 활동했고 프랑스와 덴마크로 건너가 활동하기도 했다. ‘Over The Rainbow’ ‘Blues For Lucky Lovers’같은 곡을 통해 그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벤 웹스터의 활동 시기에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오케스트라는 역시 카운트 베이시 악단이다. 거기에는 ‘테너 색소폰의 대통령’이라는 애칭을 가진 레스터 영이 존재했다. 일명 ‘프레지던트’라 불리던 레스터 영은 늘 시대를 앞서가는 연주력을 과시했는데 당시 그의 빠른 프레이즈는 그 누구도 앞지를 수 없었고 특히 즉흥 연주에서는 듣는 이들을 전기에 감전시키듯 차갑고 무서울 정도로 간결한 화성을 구사했다. 그러나 레스터 영의 백미는 바로 흐느적거리는 듯한 연주법이다. 레스터 영 역시 벤 웹스터가 보여주는 발라드에서의 비브라토를 자신만의 독특한 무기로 개발해 좀 더 가볍고 나른한 비브라토와 상냥한 아가씨의 미소처럼 아름다운 연주, 그리고 명쾌하고 매끄럽게 진행되는 솔로를 선보였다.

1934년, 캔사스에서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캔사스 시티에 투어를 온 플래처 핸더슨 악단에서 활동하던 콜맨 호킨스는 캔사스 시티에서 가장 유명한 서브웨이 클럽에서 캔사스 일대의 유명한 연주인들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레스터 영이다. 몇 일 밤을 지새우며 펼쳐진 이 두 사람의 배틀은 지금도 유명한 이야기 거리로 남아 있다. 뉴욕의 신사 콜맨 호킨스와 캔사스 시티의 최고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 이 두 인물은 쉬지 않고 서로의 자존심 대결을 위해 여섯 명의 피아니스트가 나가떨어질 정도로 격전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이 배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앞서 언급했던 영화 <캔사스 시티>를 보면 더욱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레스터 영의 역할을 맡은 조슈아 레드맨과 호킨스 역을 담당한 크레이그 핸디의 불꽃 튀는 접전은 영화에서 더욱 자세히 보여진다. 박력 있는 톤과 하모니 중심의 비브라토를 선보이는 콜맨 호킨스와 높은 음역에서 부드러움을 살려주는 레스터 영은 현재의 모든 색소포니스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나 군대 문제는 있는 것이다.

레스터 영은 징집 통지서를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연주 생활을 계속 하다가 급기야는 클럽 무대에서 헌병대에게 이끌려 군대에 가게 되었고, 제대 후 레스터 영의 연주는 신인 보다 더 못한 이상한 연주와 괴팍한 사운드로 감상자들의 귀를 괴롭혔다. 이렇게 위대한 연주인은 대중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말았다.

레스터 영이 모든 것을 넘겨 준 다음 세대의 대표적인 색소포니스트는 재즈 역사를 거론할 때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찰리 파커이다. 재즈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역사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알토 색소폰의 진정한 명인이다.

기존의 것을 탈피한 찰리 파커 등장

찰리 파커의 연주는 힘이 넘치고 독창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 밥이라는 장르를 만든 인물로 찰리 파커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특정한 장르를 혼자의 힘으로 이룩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비 밥의 탄생 배경에는 반드시 찰리 파커 주변 인물들의 도움도 포함되는 것이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는 40년대 초반 소규모 캄보를 조직해 클럽 활동을 했고, 이 밴드에서 찰리 파커는 기존에 연주되던 호킨스 식 방법론과 레스터 영 식의 호흡법 등을 완전히 탈피해 색다른 연주법을 선보였다.

특정 멜로디 라인이 있으면 그 선율 위에 또 다른 선율을 입혀 연주하기도 하고 현대 음악에서 그 방법론을 모색해 거꾸로 연주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곡이라도 공연 때마다 주 선율을 다르게 연주했다. 이는 당시로서 매우 획기적인 방법이었는데 기존의 코드 진행을 완전히 바꿔 화성 체계로 교체하는 일대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 찰리 파커이다. 당시의 감상자들은 찰리 파커만의 독특한 멜로디에 의한 화성을 난폭한 야생마의 질주처럼 느꼈으나 늘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찰리의 연주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생활과 약물에 의한 정신 이상은 자신이 판 웅덩이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찰리 파커의 연주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찰리 파커라는 인물과 그의 친구들이 창조한 비 밥이다. 스윙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그리고 베이스의 거장 오스카 페티포드, 드럼의 케니 클락 등은 매일 연주가 끝나면 클럽에 남아 잼 세션을 벌였는데, 이 때 찰리의 독특한 선율과 디지의 하이 톤으로 휘져어 버리는 연주가 일대 혁명이 되어 비 밥이라는 색다른 장르로 탄생된 것이다.

찰리 파커 이후 대부분의 색소포니스트들은 찰리 파커의 영향으로 기존의 멜로디 라인을 좀 더 난해한 선율로 바꿔 연주하기 시작했고, 50년대로 넘어와 웨인 쇼터, 행크 모블리, 루 도널드슨 같은 연주인들에 의해 다듬어지기 시작해 세련된 연주 스타일이 창조되었다. 50년대는 그야말로 하드 밥의 전성기였다. 하드 밥이라는 이름 속에 꽃피운 또 다른 펑키 재즈는 그루브감이 충만한 연주로 사랑 받았다. 웨인 쇼터는 1959년 아트 블레이키가 이끈 재즈 메신저스에 가담하면서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는 극적인 사운드 변화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웨인 쇼터는 대부분의 색소포니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연주법인 비브라토를 사용하지 않는 연주인으로 유명해졌고, 그러한 그의 스타일은 후에 웨더 리포트라는 그룹에서 확실히 자리잡는다.

재즈의 역사를 다시 쓰는 콜트레인과 롤린스의 등장

이번에는 찰리 파커 이후, 살아 생전에 다 하지 못한 연주를 사후 세계에서 계속할지도 모르는 위대한 재즈 맨 존 콜트레인과 현존하는 최고의 테너 맨 소니 롤린스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자. ‘트레인’이라고도 불리는 존 콜트레인은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단순히 재즈에 사용되는 악기가 아닌 예술을 창조하는 악기로 승화시킨 위대한 인물로 혼이 살아 숨쉬는 연주와 뛰어난 테크닉으로 재즈계를 평정했다. 소니 롤린스 역시 찰리 파커 이후 가장 위대한 연주인으로 손꼽히는데 소니 롤린스가 천재형이라면 존 콜트레인은 노력형으로 거론된다.

마일스 사단에서 나온 존 콜트레인(이하 : 트레인)은 곧바로 몽크와 합류해 배움의 길에 들어서 다양한 공부를 한다. 마일스와 함께 만들어 낸 선법(旋法, Mode)은 음계를 형성하는 일정한 음의 조직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일정한 음의 조직 위에서의 즉흥연주를 뜻한다. 그는 당시 마일스와 함께 만들어 낸 모드 주법과 몽크에게 배운 다양한 패턴을 응용해 자신만의 사운드를 정리해 나간다.

이 시기 트레인은 몽크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는 피아노를 가지고 색소폰이 낼 수 있는 기법을 연주하고 또 당시 그 누구도 상상 할 수 없는 콤핑을 구사하면서 내게 그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고 회고하고 있다. 그만큼 몽크는 트레인에게 있어 대단히 큰 인물이었고 위대한 존재였다. 몽크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트레인은 훗날 재즈 평론가 아이라 기틀러에 의해 이름 붙여진 ‘Sheets Of Sound’를 연주하게 되는데 이는 쉬지 않고 연주하는 끊임없는 프레이징을 뜻한다. 음의 표현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연주하는 곡의 음을 세분화하여 잘게 쪼개어 연주하는 것인 만큼 몽크에게서 받은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이 연주를 들고 나온 트레인은 기인으로 불릴 만큼 환상적인 연주력을 자랑했다. 불과 2, 3년 전 마일스의 뒤에서 묵묵히 연주하던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연주력을 가지고 등장한 것이다. 어쨌든 ‘Sheets Of Sound’는 트레인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면 현존하는 최고의 테너 맨 소니 롤린스(이하 : 소니)는 어떤가? 그는 한마디로 살아 있는 신화이다.

소니의 곡들 가운데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곡들이 많다. 그렇다고 재즈의 정신인 스윙과 즉흥연주를 대충 넘기지 않고 진정한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누구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게 연주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소니의 연주가 모두 쉬운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난해한 프레이즈나 즉흥연주가 다른 세상의 음악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으니 말이다.

소니는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모든 연주 패턴을 자유로이 바꿔가면서 연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템포, 코드 체인지와 멜로디 변화에 대한 순간적인 대응력, 그리고 아이디어를 갖추고 변화무쌍한 연주를 들여주는 것이다. 소니는 주특기인 레가토 스타일 대신 종종 스타카토 프레이즈를 구사해 타 연주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처럼 존 콜트레인과 소니 롤린스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많은 색소포니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스탠리 터렌타인, 덱스터 고든, 스탄 게츠 같은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트레인과 소니의 다양한 연주 패턴은 쿨 재즈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가운데서 서해안 일대로 활동하던 알토 색소포니스트 아트 페퍼는 그들의 연주 패턴을 받아 들여 쿨 사운드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아트 페퍼는 알토 색소폰이 가지고 있는 중간 톤과 하이 톤의 감미로운 사운드에 테너 색소폰의 낮은 음역을 플러스하여 색다른 사운드를 연출했는데 그 영향은 그의 중기 활동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70년대 아트 페퍼는 50∼60년대의 여성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해 호방한 사운드의 남성적인 이미지로 재기에 성공했고, 이러한 사운드의 변화는 기존의 아트 페퍼 팬들에게 큰 충격이기도 했지만 그의 연주력으로 모든 것이 무마되기도 했다. 아트 페퍼의 연주는 트럼펫 사운드와 자주 비교되는데 특히 중간 음역의 비브라토는 쿨 재즈에서 가장 대표되는 사운드로 뽑히고 있다.

이렇게 서해안 일대를 장식했던 쿨 재즈 사운드에도 트레인과 소니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고 동부에서는 조 핸더슨과 같은 연주인이, 그리고 서해안에서는 테너 맨 스탄 게츠가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스탄 게츠는 재즈에 보사노바를 가미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출처 : 김학권과 재즈
글쓴이 : 변산바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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