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에 사용되는 다양한 악기들 가운데 지금 소개하는 트럼본은 어설프게 연주했다가는 무대에서 쫓겨나 다시는 오르지 못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악기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어려운 만큼 그 음색이 주는 감흥은 한번쯤 트럼본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트럼본이라는 악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극으로 치닫는 저음부의 매력 트럼본은 다른 악기와는 다르게 서로 겹쳐진 두 관의 길이를 조정하면서 연주하는 악기이다. 트럼본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트럼펫 역시 관의 일부분의 길이를 조정하면서 연주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연주되고 있다. 둥그런 원통으로 된 금관악기인 트럼본은 슬라이드 식과 밸브 식 두 가지로 나뉜다.
슬라이드 식은 직선으로 된 원통형이 2중 관으로 되어있고, U자 관의 구부러진 곳에는 가늠쇠가 있으며 관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밸브 식은 직선부분에 3개의 피스톤 장치가 있어서 손가락으로 눌러 관의 길이를 바꾸어 준다. 트럼펫보다 낮고 웅장한 소리를 들려주는 트럼본의 저음역은 극에 치닫는 듯한 저음부를 묘사해 있어 스케일이 크고 특히 발라드를 연주할 때 매우 부드럽고 온화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트럼본이 지니고 있는 화성적 역할은 선이 뚜렷한 공명으로 서정적이다. 트럼본은 초창기 재즈에서 매우 큰 역할을 담당했고 뉴 올리언즈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악기로 군림하고 있다. 초창기 재즈에서의 트럼본은 반주자나 그 외의 악기들이 만들어 내는 코드의 도움으로 단순한 박자를 유지시키는 역할에 충실했지만 스윙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역할이 중요해졌고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뉴 올리언즈 시대의 트럼본은 콘트라베이스 대신 튜바와 함께 저음부를 담당했지만 키드 오리가 연주하는 방식처럼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와 간혹 툭툭 끊어서 연주하는 색다른 연주법으로 자연스럽게 그 위치가 높아지게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이끌던 Hot Five와 Hot Seven 시절에 명 연주를 펼친 키드는 루이 암스트롱이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음을 트럼본으로 똑같이 소리내어 더욱 유명해진 최고의 트럼보니스트이다.
스윙 시대의 트럼보니스트 이러한 초창기 트럼보니스트들의 영향을 받은 스윙 시대의 트럼본 주자들은 더욱 빠른 연주와 기교를 바탕으로 트럼본의 위치를 높이는데 일조 했는데, 특히 30년대 중반의 튜바 주자였던 존 커비는 단순한 리듬을 연주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멜로디부터 리듬에 이르기까지 트럼본의 영역을 더욱 다양하게 넓혔다. 특히 존 커비의 솔로 연주는 다른 악기 파트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하모니의 대가로 군림했다. 글렌 밀러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지휘자 겸 트럼보니스트로 활약해 명성을 얻었고, 글렌 밀러에게 영향을 준 토미 도시는 독특한 저음부의 빠른 연주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30년대에 많은 발전을 이룬 트럼본은 40년대로 넘어와 트럼펫, 색소폰과 함께 솔로 대열에 합류해 큰 인기를 얻었는데 당시 잭 티가든은 온화한 연주와 노래로 큰 인기를 얻었다. 잭은 그다지 훌륭한 테크닉을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부드러운 연주로 정평이 나 있었고 특히 노래를 함께 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듀크 엘링턴 밴드에는 다양한 능력을 겸비한 연주인들이 많았다. 듀크는 그러한 연주인들을 위해 특별히 곡을 만들어 주었는데 트럼본 주자인 샘 낸톤을 위해서도 많은 곡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샘 낸톤은 즐겨 쓰던 모자를 이용해 연주 시 관의 앞부분을 소음기처럼 사용하여 소리의 높낮이를 조정하면서 고혹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시기의 빅 밴드 트럼본 주자들이 이 소리에 반해 대부분 솔로 중간에 모자를 소음기처럼 사용했다. 샘과 함께 듀크의 밴드에서 활약하던 발라드의 대가 로렌스 브라운은 샘의 연주와는 정반대로 듀크에게 신임을 얻었고, 버스터 쿠퍼는 매우 자극적이고 끈적이는 연주로 블루스의 매력을 발산시킨 대가이다.
얼 하인즈의 빅 밴드에서 활동하던 트러미 영은 지미 런세포드 악단에서 트럼본을 연주하면서 화려한 테크닉과 유머러스한 보컬로 인기를 얻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베니 그린(젊은 피아니스트가 아님)은 영의 영향을 받은 트럼보니스트로 하드 밥 시대까지 꾸준한 활동과 계발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트럼본의 거장 J.J. 존슨 그러나 역시 밥 시대부터 하드 밥 시대의 트럼보니스트로 J.J. 존슨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 재즈 팬들에게 트럼본의 ‘신’으로 군림하는 존슨은 밥 시대에 들어와 트럼펫과 색소폰의 솔로 연주에서 트럼본의 위치가 좁아지는 것을 느끼고 하루 15시간 이상을 연습하며 테크닉과 서정미를 공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 40년대 후반들어 클럽에서 연주를 할 때 발라드에서는 녹아드는 아름다움을, 빠른 밥 연주에서는 민첩하고 다양한 테크닉을 선보여 인기를 얻었다. 아마 현재까지의 트럼보니스트 가운데 가장 화려한 연주를 들려준 연주자로 평가받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40년대 초반까지 트럼본은 밥 스타일을 연주 할 때 즉흥연주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존슨은 즉흥연주를 들려주었고 트럼본의 다양한 표현을 세인들에게 각인시켜 트럼본의 위치를 더욱 높게 만들었다.
존슨과 함께 트럼본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한 연주인으로 역시 카이 윈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카이 윈딩 역시 존슨과 흡사한 연주 방식으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존슨보다는 좀더 화려하고 밝은 연주로 쿨 재즈를 선보였다. 카이의 연주는 화사한 봄날 아침과 같은 느낌이 특색이고, 50년대 초반에는 밥을 연주하면서 테드 다메론과 활동하기도 했다. 카이의 초창기 연주를 들어 보고 싶다면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한 명반 을 들어보길 바란다.
음반사에서는 J.J. 존슨과 카이 윈딩을 그저 바라만 보지 않고 두 사람을 함께 연주시켜 음반으로 일궈냈다. 상술이 뛰어난 미국인들은 두 연주인을 이용해 다양한 듀엣 앨범을 발매하여 큰 이득을 취했지만 두 연주인들은 그다지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명예 하나만으로도 재즈사에 위대한 인물로 기록 될 것이다.
21세기에도 계속되는 트럼본의 도전 J.J. 존슨과 카이 윈딩의 영향을 받은 인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개성 있는 연주로 재즈사에 이름을 남긴 연주인은 지미 클리블랜드이다. 지미는 당시의 트럼보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주로 즉흥연주를 들려준 인물로 1955년 Emarcy에서 발매된 앨범 를 들어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미와 함께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커티스 풀러 역시 화려한 연주와 뛰어난 멜로디 구성으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커티스는 재즈 트럼본에 블루스와 소울을 접목시켜 인기를 얻었다. 조지 루이스는 시카고에서 아방가르드 재즈 연주인들과 함께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재즈 트럼본의 새로운 컬러를 만드는 작업을 했고, 알베르트 맹겔스돌프 역시 조지와 함께 실험성이 뛰어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소니 롤린스, 리 모건 등과 함께 연주하던 그래첸 몽커 3세는 하드 밥을 연주하다 갑자기 뉴욕을 떠나 시카고로 자리를 옮겨 아방가르드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하드 밥을 연주할 때보다 더 많은 인정을 받았다.
J.J. 존슨의 영향을 받은 연주인 슬라이드 햄프턴은 우디 허맨, 프레디 허바드 등과 연주하기 시작했고 60년대 말까지 꾸준하게 클럽 연주를 들려주었다. 마살리스 가문의 막내인 델피요는 젊은 트럼본 주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며 마살리스 가문의 이름을 더욱 빛내고 있다.
다른 악기보다 그다지 연주인의 숫자가 많지 않은 트럼본은 어떻게 보면 비 인기 악기이지만 재즈 연주에서의 소리만큼은 다른 그 어떤 악기보다 더욱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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