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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재즈에 대하여 1.- 재즈의 역사와 흐름

mistyblue 2012. 3. 29. 21:39

 

 

     재즈에 대하여 1.- 재즈의 역사와 흐름



들어가는 말...


재즈는 유러피언 아메리칸 음악과 아프리카 민속음악으로부터 유래된 요소들의 융합을 통해 20세기 초에 주로 미국 흑인들에 의해 창조된 음악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해도 재즈는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 혹은 예술음악으로 단순히 분류하기 힘든 독특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적 인기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직접 나왔거나  그 주위에서 발전된 많은 음악스타일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국제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1. 서 문


재즈의 매력도 다른 음악과 마찬가지로 리듬, 멜로디, 하모니, 악기의 사운드 등이 특별히 결합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외에 세 가지 구분되는 특징이 재즈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해 왔다.

그 하나는 우선 스윙현상이며, 둘째는 '개인적인 관례(individual code)'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식견을 갖춘 청중들이 재즈 연주자들을 즉각적으로 판별해 내게 해주는 미묘한 요소들이다. 간혹 멜로디를 만들어 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별되는 연주자도 있지만 '개인적인 관례'야 말로 어택(attack:한 악구를 시작하는 행위 혹은 방식)의 예리함(sharpness), 디케이(decay:프레이즈의 끝부분에서 음을 줄여 나가는 방식)의 길이(length), 비브라토, 음도 변주(pitch variations), 목청의 억양으로 만들어지는 갖가지 뒤틀림, 뮤트 그리고 그밖에 다른 기술적 고안같은 보다 신비함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관례'는 연주자와 청중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매우 중요한 것이고 재즈 뮤지션 작품에 대한 어떤 논의에서도 고려되어 진다.

 

재즈의 세번째 특징은 바로 그 황홀한 작용이다. 재즈는  통상  실제이거나 혹은 모의인 잼 세션의 맥락에서 행해지고, 그것은 어느 정도  의식과  같은 면이 있다. 연주자들은 규정된 음표의 반복진행을 단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 그리고 다른 연주자들과 상호작용하여 일종의 식에 참여하는  것이며, 전도사처럼 '신성화된' 교회에서의 회중과 상호작용한다. 다른  의식에서의 경우와 같이 거기에는 준수되어야 하는 특정행동 유형이  있다.  즉 연주자는 다른 사람의 연주를 희생시키면서 스스로를 추진하지 않으며,  청중은 실로 자극되어 춤을 추거나, 발을 구르거나, 격려의 외침 혹은 박수세례를 제공하는 등 의식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서아프리카 춤 의식과 그것으로부터 유래된 미국 흑인교회의 관행 사이의 관계는 명백하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아마도 모든 음악연주에 어느 정도씩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재즈에 있어서 이것은 중심이며, 거의 필수적인 것이다.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 재즈연주는 대부분의 재즈열광자들에게 높이 평가될 수 없다.


재즈는 그 태동 이후 반세기 동안에 유럽음악의 4세기에 걸친 역사를  요약한 것으로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초기 뉴올리언즈 스타일의 헤테로포닉  폴리포니(heterophonic polyphony:다성 음악 중 각 성부가 짜여진 틀보다는 즉흥성에 의해 진행되는 형태)로부터 '30년대의 빅밴드 낭만주의를 거쳐 밥의 반음계주의 (chromaticism)와 '60년대 이후의 프리-폼(free-form) 실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분석은 간단한 듯도 하지만 재즈가 종종 젊음  특유의  반항, 그리고 서로 다른 세대의 연주자들 간의 긴장이 수반되는 가운데 급속한 변화의 경향을 보여 왔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전개과정 속에서 두 가지 패턴이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는 그것이 본래의 모태인 자유분방한  언더그라운드로부터 다양한 연예 비지니스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콘서트홀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재즈의 위신이 부상한 것은 전반적인  미국문화에서의 큰 변화의 한 부분이면서도 아직 결코 완전하지는 않다. 비록 오늘날  콘서트무대에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해도 재즈는 여전히 상업적인 클럽,  영화, TV와 라디오 등과 지속적으로 연계하며 대중적 연예 비지니스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다. 둘째는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측면-African 혹은 Black-과 보다 형식적이고 편곡된 요소-European 혹은 White- 사이에  있는 균형의 유동성이다. 재즈는 지속적으로 이 반대편 사이의 가상선을 가로지르고 또 가로질러 왔다.


II. 기원과 초기 역사


재즈의 발생은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18C, 19C 아프리카와 유럽의 요소로부터 나온 토착의 흑인 민속음악(black folk music)이고,  둘째는 플랜테이션(plantation)과 민스트럴(minstrel) 노래들, 랙타임과 블루스 등 하위 유형음악이 생겨난 것이며,  셋째는 불완전한 축측이나마 블루스,  랙타임 그리고 대중음악 주류와의 복합으로부터 재즈 자체의 출현이다.


1. 아프리카의 배경


태반이 서아프리카 출신인 흑인 수십만이 16C부터 신세계의 노예로  수입되었다. 이들의 음악은 하나의 문화 군에서 다른 것으로 변화했지만 어떤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기능적인 것이며, 종교적 의식과  무아지경의 춤을 수행하고, 사냥꾼들을 격려하고, 노동을 원활하게 하며,  심지어는 아기의 이가 처음 나는 것 같은 사소한 일들을 축하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거의 언어처럼 일상적인 삶의 부분을 형성하면서 문화화 되었다.

 

노예들의 음악적 유산이 주로 보컬이지만 연주음악도 많이 있었으며,  드럼은 주요 악기였고 지배적인 리듬 요소였다. 서아프리카 연주음악의  기초는 패턴, 박자 그리고 템포에 있어서 변화를 주는 리듬의 층들을 쌓아  올리는 것인데, 서로 다른 층들은 빈번히 2박에 대한 3박의 결과를 나타내지만  그 관계는 종종 보다 복합적이다. 하나의 리듬의 분절이 다른 것보다 빨리 가해지므로 두터운 짜임새가 창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되는 리듬들은  통상 자연발생적으로 즉흥연주 되는 것이 아니고 음악이 진행되면서 마스터 드러머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들이 서로를 지나침에 따라 리듬 층들이 잠기고 열리는 것이 이 음악의 주요한 특성인 것이다.

 

멜리즈마(melismas:하나의 음절이 여러 개의 음표에 걸려 있는 것)가  일반적이었지만 멜로디적으로는 비교적 단순했으며, 음계는 유럽적인 것과 비슷한 것을 사요하면서도 5음계를 선호했고, 뛰어 넘던지 혹은 간격을  넓히기 위해 음조를 올리거나 내림으로써 반음을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음조는 유럽적인 표준으로 볼 때 종종 부정확했다. 보컬음악의 대다수는 응답형식(call & response)이었고, 싱어들은 가끔 가성을 썼으며, 헤테로포니(heterophony)가 일반적이었다. 악기들은 사운드를 활기 띠게 하기 위해  금속, 조개껍데기, 뼈다귀 등의 덜컥거림과 흔들림에 맞추어졌다.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으로 끌려왔을 때 그들의 음악도 함께 왔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노예상인들의 정책적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며, 노예들이 육체적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선상에서 노래하고 춤추도록  권장 혹은 강제함으로써 그들을 절망과 자살로부터  보호(?)하였다.  신세계에 정착한 뒤에도 노예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유순하게 만든다는 가정 하에 음악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허용되고 장려되었다(하지만 어떤 때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는 큰북이 금지됐다. 노예 주인들이 폭동의  신호로 사용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8C 말엽까지만 해도 노예들은 뉴욕이나 뉴잉글랜드에서조차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아프리카의 것인 음악에 맞춰  의식적이고 열정적인 춤을 추기 위해 특정한  시간에  모여들었다.  왜냐하면 19C에 들어서까지 아프리카로부터 새로운 유입이 계속됐기 때문에 그  영향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의 기간까지도  뉴올리언즈의 플레이스 콩고에서는 옛 춤이 옛 음악(비록 아마도 수정된  형태일테지만)에 맞추어 유지되고 있었다.


대략  노예해방(Emancipation)  이전  미국  흑인의  3/4  정도가   대농장(plantation) 노예들이었다.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에 살면서 그들은 옛 문화를 간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불가피하게 북미의 종교, 언어,  통과의식 등의 민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변용이 전면적일 수는  없었으며, 새로운 문화는 당연하게도 옛것으로부터의 정서와 기능이 스며든  것이었다. 흑인들은 유럽식의 악기와 음악방법- 전음계(8음계), 포분박자, 대중가요의 형태 등 -을 채택하면서도 그것들을 아프리카적인 효과를  재생산하기 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부족음악이 반음을 피해왔던 것처럼 노예들은 유사한 효과를 위해 전음계에서 3도, 7도, 때로는 5도 음계를  반음보다 더 미분화한 정도로 낮춤으로써 5음계에 맞추려는  경향을  보였다. 소위 블루 노트(blue note)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음악인들이 덜컥거림으로써 악기의 소리를 활력있게 하고 가성을 사용한 것처럼  노예들은 가성 혹은 음악의 극적 감정의 시점에서 목의 톤으로 목소리를 거칠게 했다. 다시한번 아프리카 음악에서와 같이 이러한 미국 흑인  민속음악은 노동, 춤, 혹은 종교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의도된  기능적인  것이었고, 미국 백인의 비교될 만한 음악에 비해 더욱 보편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었다.


재즈적인 관점에서 볼 때 노예음악의 가장 중요한 양상은 서부  아프리카음악 카운터리듬(counterrhythms)의 재창조이다. (비록 카운터리듬이  유러피언- 아메리칸의  콘서트 음악에서도 발견되긴 하지만 결코 필수적인  성격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미국 백인 지방 음악에는 대개 없다.) 옛 영향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흑인들은 명백하게 정해진 기조 박자로 그들 음악  대부분을 떠받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손뼉, 댄서의 발걸음, 북 혹은 도끼와 망치의 타격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유럽음악은 군대행진곡을 제외하고 명백한 기조박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박자는 음악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지속적인 박자가 주어짐으로써 그들은 자제하거나  공격하거나 또는 잡아늘이거나 응축함으로써 리듬에 변화를 줄 수 있게 되었고  아프리카의 정교한 카운터리듬과 유사한 것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정교하게 작업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연주에 의해 성취되는 리듬효과라는 점에서 본래의 민속적인 것과  구별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노예음악이 이러한 리듬적 특징을 얼마만큼 보여주고  있는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초기 흑인음악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백인들의 경우 이러한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교육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음으로 인해  박자에 있어서의 그러한 미묘한 변주들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흑인 뮤지션들 사이에서 통상적인 관행이었음을  암시하기에 충분한 리듬의 복잡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9C 흑인 음악음 몇 개의 범주로 나눠지게 됐다. 노동요(work songs), 스피리츄얼스 (spirituals:흑인영가), 그리고 필드 할러(field hollers:들판에서의 외침)가 그것이며, 이러한 유형들은 모두 앞서 언급한 리듬적 고안을 사용하는 하나의 음악적 관습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예컨데  흑인교회음악과 춤음악은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것이다.



2. 플랜테이션 노래, 랙타임, 블루스


재즈 진화의 두 번째 단계는 19C 흑인민속음악이 다른 양식들을  만들어냄에 따라 시작되었으며, 그러한 것들은 미국 뿐 아니라 여타 지역에서도 대중음악의 주류로 서서히 진입하였다. 미국 백인들은 그들의 한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흑인 소문화에 항상 흥미를 느껴왔고 실제로 매혹당해 왔으며, 그  한 표현으로 흑인음악에 관심을 가져왔던 것이다. 19C 초에  백인들은  아마도 흑인의 플랜테이션 음악풍으로 여겨지는 노래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한'농장요(plantation songs)'들의 대다수는 19C 동안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남북전쟁 이전에 농장생활의  오락으로  발생한 독특한 형식의 쇼이며, 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여 출연했다)와 관계된 것이었는데, 매우 유럽화(화성을 비롯한 유러피언-아메리칸 음악의 양식상의 요소들이 스며든)된 모습을 보였고, 흑인음악적임을 시사해 주는  것은  단지 음계상 6도음의 포괄적 사용에 의해  빈번히  암시되는  교회  마침(plagal cadences:버금딸림화음에서 으뜸화음으로 끝맺음. 유럽음악은 5도음, 즉 딸림화음에서 으뜸화음으로의 끝맺음이 일반적임), 그리고 이따금씩 보여지듯 원형적 리듬으로서의 당김음(syncopation:통상적으로 액센트가  붙지  않는 약박에 엑센트가 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농장요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곡가는  스티븐  포스터(Stephen Foster:1826-1864)였지만 그 외에도 수 백명이 더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흑인이었다. 흑인민속음악으로부터  만들어진  또  하나의  변형은  소위  흑인(spirituals)였는데, 피스크 쥬빌리 싱어즈(Fisk Jubilee Singers) 같은 콘서트 그룹에 의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C가 끝날 무렵에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있어 농장요와 흑인영가 모두 익히 알려진  음악이  되었다.

 

19C 흑인음악에서 한층 더 발달된 자손은 랙타임(ragtime)이었는데,노예해방(emancipation) 이후 흑인들이 여행의 자유를 얻고  뮤지션으로서  술집, 댄스홀, 그리고 매춘굴 등지에서 직업을 찾기 시작했을 무렵에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랙타임은 흑인의 밴조(banjo) 스타일이 피아노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발전된 듯하다. 유러피언-아메리칸 음악과 비교해 볼 때 랙타임은  명백히 아프리카의 크로스리듬 감각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는, 심한 싱코페이션의 사용을 보여주며 19C 말엽에 자신의 토양을 이루었던 술집으로부터 벗어나 미전역을 통해 놀랄 만큼 인기를 끌게 된다.


흑인민속음악으로부터 발생한 네 번째 유형은 블루스(blues)였다. 비록 몇몇 필자들이 블루스의 기원이 19C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예측하지만 사실상 20C이전에 이 음악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찾을 수가 없다. 블루스는 1900년 직후 뉴올리언즈와 미시시피 델타(Mississippi delta)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1912년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된  악보는  없다. 백인 주류 문화에서 블루스 유행은 1920년대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재즈는 랙타임,  블루스와 같은 흑인 민속형식이  다양한 파퓰러 음악들과의  융합을 거치면서 스스로 진화하였다. 

 

가장 초기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뉴올리언즈  재즈이다. 왜냐하면 뉴올리언즈가  전통적으로 재즈의 고향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후의 필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수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재즈가 남부  전반에 걸쳐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남서부를 지적했다. 하지만 뉴올리언즈는  물론이고 그외 지역에서의 개척자적 재즈  뮤지션도 변함없이 재즈가 그  도시로부터 왔음을 말하고  있다.

 

왜 재즈가 뉴올리언즈에서  결정되었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요소들이  그 도시를 유일한 곳으로 만들어 온 듯하다.  뉴올리언즈는 모든 종류의 음악에 있어 중심지였다. (미국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음악적이었던 곳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다른 지역의 흑인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보다 세련됨을  갖게 된다. 더욱이  거기에는 확립된  브라스 밴드의  전통이 있었으며, 그것은 군악대가  주둔했었던 남북전쟁(1861-1865)  기간을 거치며 강화되었다.  전후 재 편입(Reconstruction:남북전쟁  후 남부 여러 주를  합중국으로 통합한 일) 기간에  뉴올리언즈의 흑인들은 다른  지역에서 같은 입장에  있는 흑인들이 시가  박스 기타(cigar-box guitar)같은 촌스러운 수공악기에  보다 의존했던 반면에 음악적  지식이 있는 선생들과 밴드악기(재즈  기악 편성의 기초가 된)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뉴올리언즈와  그 주변에  특별히  존재하는 흑인 크리올(Creole)문화 또한 흑인인구의 음악적 세련화에 기여하였다. 초기 프랑스인 이주자들과의 혼혈의 후예들로서  흑인 크리올들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흑인으로 간주되었고,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인종 격리법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가능한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에 집착했으며  철저하게 유러피안 음악의 전통을 유지하려 했다. 게다가 그들은  강한 춤(dancing)의 전통을 갖고  있었으며 재즈에 특별한 리듬개념을 가져왔음직하다.  그들의 음악적 숙련은 그들 주위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흑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뉴올리언즈에서 재즈 진화의 마지막  요소는 아주 초기의 블루스의 존재이다. 이 음악은 세기가 전환되는  무렵 시골흑인들이 뉴올리언즈로 실질적인  이주를 시작했을 때  미시시피 델타지역으로부터 도시로의 도정을 보여주고 있다.


3. 재즈밴드의 원형들


  1900년경 뉴올리언즈에는  많은 수의  흑인 및  크리올 밴드가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적어도 네 가지 타입의  밴드가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우선은  존  로비쇼(John Robichaux)나 A.J.파이런(Piron) 등이 이끌었던  보다 숙련된 그룹들로 왈츠(Waltz), 쿼드릴(Quadrille),  그리고 감상적인 발라드,  또 필연적으로  랙타임을 링컨공원(Lincoln  Park:흑인들에 의해 후원됨)이나 부유한 백인들이  자주 출입하던 우아한 레스토랑과 클럽  등지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스트리트 밴드(street band)가 있었는데, 금관악기,  클라리넷, 그리고 드럼 등의  다양한 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행진곡,  찬송가, 유행가를 비롯해서  헨리 비숍(Henry Bishop)의 <Home, Sweet Home>과 셉티머스 위너(Septimus  Winner)의 <Listen  o  the Mockingbird> 같은  옛 애창곡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음악은 트롬본 혹은 클라리넷이 코르넷에  응답하거나 카운터 멜로디를 연주하는 고전적 뉴올리언즈 폴리포닉  스타일로 연주된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진정한 폴리포니(polyphony:메인  테마의 반복과 그에 대비되는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비교적  엄격한 다성음악)와 헤테로포니(heterophony:하나의  메인 테마와  그것과 비슷하지만 즉흥적으로  변형된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자유스러운 다성 음악)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있는 스타일이었는데 아마도 많은 관악기가  주선율을 둘로 하거나 그것에  화성을 덧붙이거나 응답하는 평행의 선을 거칠게 연주한 듯하다.

 

 

그 효과는 리듬 면에서는 자극적이지만 종종 불협화(cacophonus)했다. 거리의 퍼레이드  밴드(Parade Band:뉴올리언즈의 흑인, 크리올들에 의해 편성된  브라스 밴드의 별명, 통칭)들은  재즈의 산란실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버디  볼덴(Buddy Bolden),  벙크   존슨(Bunk  Johnson),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을 포함한 개척자적 재즈  뮤지션의 다수가 그 속에서 활동했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또  다른 두 가지 유형의 밴드가 1920년대에 출현한 진짜 밴드에 더 가까왔다.

 

 

스토리빌  (Storyville:뉴올리언즈 재즈의  온상이 된  공창지구)에  있는  뉴올리언즈의  쾌락지구는 유명한  펑키 버트 홀(Funky Butt Hall)이었다. 거의  모든 모퉁이마다 자리 잡고 있었던 홍키 통크(honky-tonk:싸구려 술집)는  거칠고 위험한 술집이었으며, 작은  댄스플로어, 도박실, 그리고 매춘부들이  고객을 상대하는 윗층의 방들로 이루어졌다.  홍키 통크에서의 특징적인 춤은 슬로우  드랙(slow drag:천천히 질질끄는  것)이었고, 블루스가 가장  적합한 음악이었다. 블루스와 몇 가지  다른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밴드는 둘 내지  네 사람으로 구성된 비공식적 그룹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속한  뮤지션들 중에는 루이 암스트롱,  젤리 롤  모튼(Jelly  Roll  Morton), 시드니  베셰(Sidney Bechet)같은 생식력 있는 뮤지션들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 재즈밴드들의 주요 모델이  된 것은 비록 다른 형태가 존재하긴 했지만 보통  바이얼린, 코넷, 클라리넷, 트럼본, 드럼, 더블베이스, 기타로 구성된  뉴올리언즈 댄스밴드였다. 광범위한 믿음과는  달리 이러한  밴드들은 좀채로  튜바나 밴조를 포함하지 않았다.  즉, 튜바는 주로 퍼레이드에  사용됐고, 밴조-1918년과 1931년  사이에 재즈에서 유행하게 하는 솔로악기로서 혹은  스트링밴드에서 주로 흑인들에 의해  사용됐다.

 

댄스밴드가 통상적으로  두개의 코넷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으며, 주선율은 코넷과  바이얼린에 의해  이루어졌다. 흑인  댄스밴드들은 1900년과 1915년  사이에 고전적인 뉴올리언즈  재즈밴드로 진화했다. 그들은  댄스를 위한  연주뿐만 아니라  피크닉과 장례식, 그리고 스포츠행사,  가게 개업을 선전하기 위해  스트리트 웨건(street wagon)에서  연주했고 스스로의 연주회도  가졌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퍼레이드 밴드나  홍키 통크의 '스팅크'(stink:악취, 고약한  냄새)밴드보다 많은 레퍼토리를 필요로  했으며, 모든 종류의 댄스뮤직(슬로우 드랙을  위한 블루스, 쿼드릴, 폴카, 그리고 다른  사교춤), 랙타임,  행진곡, 찬송가,  유행가에다가 클래식 작품의 테마까지도 연주했다. 비록  그 기능은 물론 때로는 서로 다른  종류의 뉴올리언즈 밴드의 인적  구성조차도 불가피하게 중첩됐지만 최초의 세련되지  않은 재즈를 만들어낸 랙타임과 블루스 그리고  다른 유행가 형식을 결합한  것은 다름 아닌 댄스밴드였던 것이다.


  4. 핫 뮤직의 출현


  뉴올리언즈의 흑인 밴드들은 매우 다채로운 음악을 연주했고 그것들은 19C 흑인 음악으로부터 나온 요소들로 음조에 억양이 붙여졌다.  아마도 세기의 전환 이후 곧바로 그러한 요소들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을 생산해내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되었을 것이다.  당시 이러한 변화의 정확한 성격이나 이유를 파악한 사람들은 별로 없다 할지라도 1910년대를 통해 새로운 음악이 태어났다는 인식이 자라나고 있었다. 

 

것이 처음부터 재즈라 불리운 것은 아니었으며 뮤지션들은 그들의 음악이 랙타임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고 'playing hot'이라는 표현을 썼다.  적어도 두 가지 과정이 진행 중이었는데, 첫째는 다른 형식의 음악, 특히 랙타임을 블루스로 변조시키는 것으로서 암스트롱이나 베셰같은 뮤지션들에게서 명백하게 나타나며 그들은 홍키 통크에서 자주 연주하면서 블루스를 자신들이 연주하는 다른 음악 속으로 가져왔다.  블루 노트, 슬러링(slurring), 굴곡음(bent notes), 그로올(growl:흐느끼는 음색), 그리고 가장 특징적이라 할 수 있는 기조 박자로부터 벗어난 멜로디같은 특색이 랙타임, 행진곡, 그리고 당시의 통상적인 파퓰러 멜로디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두 번째 과정은 2박자 행진곡, 특히 랙타임을 4/4기조 박자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모든 랙타임은 두 박자로 쓰여졌는데 이는 행진곡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필수적으로 2박을 요구했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서부터인가 뮤지션들은 4/4박자로 랙타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튼은 1902년에 랙타임을 연주할 때 4박자로 자신의 발을 구르면서 이것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스스로가 재즈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모튼의 역할이 무엇이었든 간에 뮤지션들은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전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백인 뉴올리언즈 더블 베이스 연주자인 스티브 브라운 (Steve Brown)은 말했다.  "홍등가에서 연주되는 음악의 유형은 슬로우 드랙, 배럴 하우스(barrel house : 원래는 벽쪽에 술통을 늘어놓았던 싸구려 선술집을 가리키지만, 초기 재즈 스타일을 뜻하기도 했음), 약간의 농장 음악, 그리고 <St. Louis Blues>같은 우리가 '범피'(bumpy : 덜컹덜컹하는)음악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랙타임에서 2/4박자로 연주되는 반면 4/4박자로 연주됐다."


그 시기의 흑인 트롬보니스트인 윌리엄 리즐리(William Ridgely)는 버디 볼덴이 투 비트(Two-beat : 재즈에서 제2, 제4박에 액센트를 넣는것)로 랙타임을 연주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빠른 4박자를 두 부분으로 분할하여 2박의 효과를 내는 오늘날의 밴드와는 다소 다른 사운드였다."  다른 뮤지션들도 같은 말을 해왔다.  그렇게 잘 규정되고 명확하게 인식된 차이점이 랙타임과 새로운 핫 뮤직 사이에 있었다.  동시에 19c 흑인 음악관에 유래한 기조 박자와 일치하지 않게 멜로디를 놓는 관행이 랙타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연주자들이 새로운 4/4박자를 균형이 잡히지 않게 분할하기 시작한 것이며 이러한 테크닉은 재즈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었다. 

 

재즈 뮤지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엑센트와 지속시간을 매개로 - 비록 연주자들의 스타일에서, 재즈 역사상의 각기 다른 세대에서 상당한 변형이 존재하지만 - 8분 음표를 불균형하게 연주했다.  이러한 프레이징(phrasing) 방식은 재즈에 있어서 지극히 중대한 현상인 스윙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초기의 재즈 레코딩에서도 세련되지 않은 형태로나마 존재하며 1910년경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더 일찍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블루스 리듬 또 랙타임에의 새로운 4/4박자 어프로치와 연결되었는지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어쨌든 재즈는 세 가지의 전개과정으로부터 생성된 듯하다. 즉 첫째, 블루스 리듬을 가하고 랙타임, 다른 유행가와 댄스 음악에 음조의 억양을 주는 것, 둘째, 랙타임과 다른 박자 형태에 4/4기조 박자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셋째, 고르지 않은 8분 음표의 사용이 그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음악이 즉각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1920년대 뉴올리언즈 연주자들의 녹음들에서는 랙타임과의 밀접한 관련이 여실히 나타나며, 딱딱하고 약간은 어색한 리듬을 보여준다.  그러나 1920년대와 그 이후의 기간 동안 재즈는 랙타임의 규칙적인 흔들림으로부터 1930년대 스윙 연주자들의 유연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라인으로의 진화를 꾸준히 계속해간 것이다.


5. 뉴 올리언즈 재즈 뮤지션들


 최초의 재즈 뮤지션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버디 볼덴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랙타임과 블루스를 연주했던 게 확실하다.  비록 새 재즈적 감각의 흔적이 있긴 해도 말이다.  볼덴 이후 새로운 음악을 스스로 시험해 보려는 열의를 가진 핵심적인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름이나 어느 정도의 연대, 밴드의 이름과 약간의 일화 등을 제외하고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이 재즈 뮤지션의 첫 세대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이들은 트롬보니스트 윌리 코니쉬(Willie Cornish), 드러머 디디 챈들러 (Dee Dee Chandler), 세련되고 잘 교육된 '고상한' 오케스트라의 리더로 추앙받던 존 로비쇼(John Robichaux), 클라리네티스트 프랭크 루이스(Frank Lewis), 그리고 공식적으로 훈련된 뮤지션들이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가르친 티오 패밀리(Tio Family) 등이다.  이들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출생한 그룹으로서 바로 암스트롱, 베쉐, 자니 도즈(Johny Dodds), 키드 오리(Kid Ory), 그리고 킹 올리버(King Oliver)들이며 재즈 역사상의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그외의 다른 이들 즉, 버디 페팃(Buddy Petit), 트롬보니스트 프랭크 듀젠(Frankie Dusen), 그리고 드러머 베니 윌리엄즈(Benny Williams)는 결코 녹음되지 못했고 그들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알려졌다.  물론 재즈가 흑인들의 음악으로부터 뉴올리언즈 흑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지만 백인 뮤지션들도 거의 초창기부터 부차적이지만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랙타임과 친숙했었고, 거리에서, 링컨 파크에서, 그리고 흑인 스토리빌의 홍키 통크에서 새로운 핫 뮤직을 들을 수 있는 풍부한 기회를 갖고 있었고 많은 백인들의 흥미를 끌어들였다. 

 

1910년경 닉 라 로카(Nick La Rocca), 폴 메어즈(Paul Mares), 래리 쉴즈(Larry Shields), 리온 로폴로(Leon Roppolo),  파파 잭 레인(Papa Jack Laine), 그리고 브루니스(Brunies) 형제들 같은 젊은 백인 뮤지션들이 칭찬받을 만한 재즈를 연주했다.  비록 이들 백인들이 재즈를 창조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 할지언정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유러피언-아메리칸의 음악적 전통에서 그들은 헤테로포니보다는 포리포니와 친숙했으며 흑인 재즈맨의 것보다는 콘서트 음악에 더 가까운 공식적 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이 가장 잘 아는 폴리포니는 존 필립 수자 (John Philip Sousa : 1854 ~ 1932)와 다른 이들의 밴드 음악이었으며, 아마도 코넷이 멜로디를 이끌고 클라리넷이 그 주위에서 카운터멜로디를 제공하며 트롬본이 제 5도음과 으뜸음을 강조함으로써 연결 고리와 화성적 뒷받침을 공급하는 고전적 뉴올리언즈 스타일을 향해 나아가게 한 것은 이러한 백인들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재즈 발전에 있어서 백인이 흑인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흑인 밴드들이 리듬적으로 더 자유롭고 블루스에 더 가깝고 더욱 특유의 재즈 필링으로 연주했다.  또한 그들의 교회의식, 춤, 부두 의식으로부터 옮겨온 황홀경을 음악에 가져온 것은 확실히 흑인이며 그것들은 아프리카의 몰아적인 의식으로부터 왔다.  그들이 재즈를 고양된 감정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했음은 거의 명백하다. 

 

흑인들은 또한 재즈 연주에 있어 "개인적인 관례"의 개발에 보다 영향력을 행사했다.  백인의 음악적 관행은 씌어진 것이든, 기억된 것이든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정확히 재생하는데 근간을 두고 있다.  반면 흑인들은 그러한 전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음악을 개인적인 표현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백인 뮤지션들이 만들어낸, 백인 청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재즈에 있어서 흑인적 요소가 덜 뚜렷했음을 볼 때 이것은 정확하다.


초기의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빈번히 친목 댄스 모임, 백인 전용의 뉴올리언즈 레스토랑, 강 유람선 그리고 사적인 파티와 무도회 외에서 연주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초기 재즈는 흑인 청중과 무용수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즈가 만약 미국 전체 인구의 1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가난한 흑인들의 지지에만 의존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백인 청중을 필요로 했으며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백인들이 있었다.  1915년경 미국 백인들은 수십년을 이어온 농장요, 흑인 영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랙타임에 의한 새로운 재즈 음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되있었다.  뉴 올리언즈를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은 1920년대를 통해 자라나기 시작한 그 음악을 들었고 흥미를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III. 재즈의 확산


1. 재즈, 문화 주류로의 진입


재즈가 오로지 스스로의 힘만을 가지고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것은 아니었으며, 1890년과 1920년 사이에 미국 문화를 뒤흔들었던 격렬한 사회적변화의 한 부분으로서였다.  감정적인 측면을 제어하면서 근로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던 오래 된 미국 윤리가 1890년대에 들어와 개인적 행복을 위한 바람직한 통로로서의 즐거움과 자기 표현을 강조하는 새로운 이상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곧 새로운 사회 문화적 시설물들, 즉, 댄스 홀, 카바레, 레스토랑 그리고 극장의 발달을 이끌어냈다. 비록 그러한 것들이 뉴욕의 텐덜러인(Tenderloin)같은 암흑가나 샌프란시스코의 바르바리 코스트(Barbary Coast : 1960년 이전에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의 악마굴, 매춘, 도박의 거리)같은 보헤미언 지역, 그리고 흑인 특수 거주 지역 같은 곳에서 저급한 형태로 오랜 동안 존재했었지만, 세기가 바뀔 무렵 백인 중산층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모양새를 갖추게 됐으며 미국 문화의 주류로 통합되었다. 

 

하위문화로부터의 소산인 예술 유형의 이러한 진행과정은 점차적으로 불온한 면이 삭제되고 20C 미국 생활을 통해 계속 되풀이되면서 주류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즉, 랙타임에서 발생했고 특히 세인트루이스 부근의 흑인 매춘굴과 술집에서 터키 트로트(turkey trot : 재즈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사교댄스)와 찰스턴(charleston : 1920년대 미국 남부에서 유행했던 4/4박자의 활발한 춤)같은 춤과 함께 천한 술집, 카바레와 극장에서 진화된 재즈는 1920년대에 이르러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1차 대전이 끝날 즈음에 미국 백인들이 새로운 생활양식을 발견하면서, 극장, 브로드웨이 무대, 댄스홀, 틴 팬 앨리(Tin Pan Alley), 그리고 재즈 밴드가 발흥하고, 전문적인 연예 산업 속에서 견고히 자리 잡게 됐으며, 이러한 것들이 미국인의 생활에 있어 지배적인 관습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재즈는 1920년대에 그 이름을 빌려주었다고 해도 좋을만큼 새로운 정신의 중심에 있는 듯했고 이 시기를 통상적으로 '재즈 시대' (the jazz age)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사회적 조류는 흑인들 그리고 특히 흑인 연예에 대한 관심의 급속한 증가에 수반됐다.  미국의 흑인들은 - 백인과 흑인 지식층 양쪽에 의해 - 새로운 이상을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해방된 의미심장한 사람들로 보여졌으며, 그들의 예술, 음악, 습속은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이정표로 보여 졌다.  필연적으로 이것은 흑인 음악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했으며, 거기에는 흑인 쇼 비지니스에 대한 관심의 고조가 있었다.  농장 음악, 영가, 민스트럴 음악들은 일반적으로 수 십년 동안 백인 미국인들에게 유행했었으나, 이 음악은 백인들에 의해 상당히 개조된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보다 진정한 흑인 양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경향이 생겼다.  유비 블레이크(Eubie Blake)와 노블시즐(NobleSissle)의 브로드웨이 히트작 [Shuffle Along](1921)은 '20년대의 끝 무렵에 극에 달한 흑인 뮤지컬 극장에 대한 수요를 유발시키게 된다.  재즈의 확산에 기여한 또 다른 요소는 1920년에 제정된 금주법이었으며 이는 주류의 판매를 불법으로 하는 것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단지 술을 마시고 싶었기 때문에 금주법에 대항하기도 했으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새로운 이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옛 빅토리아 왕조식의 억압의 잔재로 보았다.  그리하여 금주법 시대의 불법적인 무허가 술집과 카바레들이 낭만적인 것으로 그리고 재즈가 그들의 활동에 적절한 음악적 배경으로 간주되었다.

 

재즈의 확산에 특히 중요한 것은 1910년경에 시작된 사교 춤 열기였다.  19C의 릴(reel:스코틀랜드의 활발한 춤)의 쿼드릴(quadrille :남녀 4쌍이 추는 일종의 스퀘어 댄스)이 갖는 비교적 복잡함과는 달리 새로운 트로트(trot), 탱코(tango), 그리고 원 앤드 투 스텝은 남녀 한 쌍을 위한 단순한 춤이었으며 파트너끼리의 밀접한 육체적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댄스 붐은 재즈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시설물을 차례로 만들어냈다.  즉, 댄스홀과 카바레이다.  더욱이 이 춤들은 모두 음악을 필요로 했다.  댄스 붐의 가장 초기에 어떤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으나, 뉴욕과 필스 그 밖의 지역에서도 거의 확실하게 파퓰러 곡들을 랙타임 형태로 연주했던 흑인밴드(밴조와 드럼의 사용이 현저히 나타나는)가 유행했음은 명백하다. 

 

트로트도 또한 들쭉날쭉한 리듬(그러한 리듬들은 1910년 이후 랙타임에서 뚜렷이 증가된 것으로 기록되어져 오고 있다.)의 음악을 요구했고 재즈가 상당한 정도로 불규칙한 리듬에 기초했기 때문에 댄스 밴드들은 새로운 춤을 위한 이상적인 것으로 그러한 리듬을 채택했다.  게다가 그것은 신사회의 사회적 분위기에 합치되었으며, 1차 대전 이후의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 재즈는 낡은 도덕률에 대항하는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재즈의 대중화는 소리 녹음의 발달에도 힘입은 바 크며 그것이 만들어낸 문화는 1910년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미국 가정에 일반화되었다.  레코드 제작사들은 수천 개의 새로운 디스크가 사람들로 하여금 집에서 춤을 출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많은 재즈 혹은 재즈 지향적인 음악은 이러한 수단을 통해서 대중 속을 퍼져 나갔다.  이와 같이 재즈는 여러가지 경향들의 - 기술적, 지적, 예술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인 - 광범위한 정렬 속에서 평행하게 조용히 움직여 나아갔던 것이다.


2. 뉴올리언즈로부터의 전파


  재즈는 댄스 붐의 상승과 거의 동시에 뉴올리언즈로부터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곳을 떠난 최초의 재즈 뮤지션들은 도시를 순회하는 흑인 보드빌 미스트럴 쇼(Vaudeville Minstrel Show)에 참가했던 이들이었다. 

 

뉴올리언즈 밖에서 나타난 최초의 진짜 흑인 밴드는 1908년 캘리포니아로 떠난 빌 존슨(Bill Johnson)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의 그룹인 오리지날 크리온 밴드(Original Creole Band)는 보드빌 순회공연에 합류했으며, 1915년에는 타운 토픽(Town Topic)이라 불리우는 브로드웨이 레뷔에서 연주했다.  비록 아주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다른 재즈 뮤지션들이 뉴올리언즈를 떠나도록 자극하였다.  젤리 롤 모튼은 캘리포니아로 갔고 1917년에 버디 페팃과 그룹을 끌어 들였다.  킹 올리버는 1918년에 시카고로 가서 1920년에 스스로의 밴드를 결성했다.  키드 오리는 1919년에 LA로 갔으며, 곧바로 뉴 올리언즈로부터 데려온 뮤지션들과 함께 밴드를 조직했다. 

 

초기단계-이미 1910년 정도만큼 이른 시기-에 웨스트 코스트에서 재즈연주가 활발했음은 분명하다.  올리버의 그룹은 1921~2년에 LA와 샌프랜시스코에 있었고 흑인 밴드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재즈 레코딩인 키드 오리의 "Suhshine"은 1922년에 LA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은 1915~6년 탐 브라운과 자니 스타인이 이끌던 뉴 올리언즈 출신의 두 백인 그룹에 의해 만들어졌다.  백인 연예인들과 모험적인 군중들이 자주 출입하던 카페와 카바레에서 일하면서 그들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몇몇 멤버 교체 후, 1917년에 스타인의 그룹은 오리지날 딜실랜드 재즈 밴드(Original Dixieland Jazz Bend)로 이름을 바꾸고 닉 라로카를 새 리더로 하여 연예인들, 부유층 인사들 그리고 대규모의 여행자 무리들로 혼합된 이들을 고객으로 하는 우아한 브로드웨이의 "롭스터 팰러스" (lobster palace)인, 레스토랑 라이젠베버(Reisenweber)에서 연주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시카고의 다소 불명예스러운 카바레로부터 라이젠베버로 오리지널 딕실랜드 재즈 밴드가 이동한 것은 앞서 언급한 텐덜러인으로부터 연예계의 주류로 들어가게 된 일반적 움직임의 한 부분이다.  밴드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17년 2월에 빅터에서 최초의 재즈 녹음을 했다.  이 레코드는 히트하였고, 1917년 말에 이르러서 재즈는 주로 백인인 많은 청중을 끌어들이는 전국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재즈가 유행하게 됨에 따라, 미국 전역의 뮤지션들이 스스로의 추구때문이거나 아니면 유행에 따르기 위해서 재즈의 물결에 끼어들게 됐으며 오리지널 딕실랜드 재즈 밴드를 모델로 하는 밴드를 결성하여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필 나폴레온(Phil Napoleon), 미프 몰(Miff Mole)그리고 프랭크 시노렐리(Frank Signonelli)들로 구성된 그룹은 이기를 끌게 됐고 1922년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수 십개의 레코딩을 하게 됐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 오리지날 멤피스 파이브(Original Memphis Five)였다.  중서부에서 그룹은 오리지날 딕실랜드 재즈 밴드의 레코딩에서 라로카의 코넷 연주를 모방하기 시작했던 빅스 바이더벡(Bix Beiderbecke)을 중심에 두고 울버린즈(The Wolverines)로 일하기 시작했다.  멤버 중의 일부가 다녔던 시카고의 학교에서 이름을 따온, 오스틴 하이 스쿨 갱(Austin High School Gang)이라 불렸던 또 다른

그룹은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지미 맥파틀랜드(Jimmy McPartland)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 그룹들 중 가장 유력한 팀의 하나는 레드 니콜즈(Red Nichols), 미프 몰 그리고 지미 도시 (Jimmy Dorsey)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주로 레드 니콜즈와 파이브 페니즈(Five Pennies)로서 레코딩했는데, 1920년대 후반부터 추종자와 모방자를 낳았다.  니콜즈는 특유 유럽에 영향력이 있었고 그의 레코딩을 1920년대 후반에 입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룹들의 뮤지션들은 모두 백인이었지만 시카고의 알 위(Al Wynn)이나 멤피스의 버스터 베일리(Buster Bailey)같은 흑인들 역시 새로운 음악을 배우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1923년경에는 오리지날 딕실랜드 재즈 밴드를 본 따서 만든 그룹들이 미국 전역에 걸친 카바레와 댄스 홀에서 일하고 있었다.  재즈의 유행은 불가피하게 다른 밴드들과 개개의 뮤지션들을 뉴올리언즈로부터 끌어내었으며, 그들 중에는 백인인 아카디언 세레네이더즈(Arcadian Serenaders)와 뉴올리언즈 리듬 킹즈(New Orleans Rhythm Kings) 같은, 중서부의 젊은 뮤지션들과 올리버나 모튼 등의 흑인들에 의해 찬사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같은 기간 동안 많은 뉴올리언즈 뮤지션들이 시카고로 이동했다.  그들이 그곳으로 가게된 것은 갱들엑 의해 지배되고 있던 시카고가 규제가 적으며 많은 카바레와 댄스 홀들이 재즈맨들의 핫 뮤직을 요구하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도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북부 도시들로 흑인들의 대량 이주가 일어났고 시카고가 그 중심지였는데 결과적으로 흑인 음악 특히 블루스를 위한 대규모의 청중이 그 곳에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들 이주자들은 블랙 벨트(Black Belt)라 불리우던 사우스 사이드 지역에 운집했다.  사우스 사이드는 1920년대의 대부분을 통해서 시카고에 특유의 풍조를 부여한 악덕의 실질적인 본거지였으며 생산력 있는 뉴올리언즈 재즈맨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즉, 올리버는 링컨 가든(The Lincoln Gardens),페킨(The Pekin)그리고 플랜테이션(The Plantation)에서, 지미 눈 (Jimmie Noone)과 얼 하인즈(Earl Hines)등은 네스트(The Nest)와 에이펙스(The Apex)에서, 암스트롱은 선셋(The Sunset)에서 모튼 또한 다양한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 지역에 밀집되어 있던 이들 클럽들과 댄스 홀들은 대부분 "블랙 앤드 탠스"(black and Tans : 흑인과 백인이 다 드나드는 나이트 클럽 따위)였고, 주중의 밤은 주로 흑인, 주말에는 대략 75% 정도가 백인인 청중을 끌어들였다.  당시 젊은 백인 뮤지션들인 바이더벡, 굿맨, 프리맨, 크루파와 그 밖의 다른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팬과 함께 왔고 또한 그곳에서 스스로도 뉴 올리언즈 스타일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엇다.  1920년대 전반에 결쳐 시카고의 "웨스턴"(western)밴드들은 뉴욕이나 그 밖의 다른 곳의 밴드보다 더욱 진보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시카고의 밴드들의 음악은 비록 헤테로포니적인 감각을 갖고 있긴 했지만 대체로 고전적인 뉴올리언즈 폴리포닉 재즈였다.  그것은 주로 솔로의 영역이 별로 없는 앙상블 음악이었고 두터운 짜임새와 흔들리는 스윙 효과에 의존했다.  그것은 반드시 즉흥 연주되지는 않았는데 연주자들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부분들로부터 연주했으며 악보보다는 기억에 의해 일정한 한계 안에서 장식하거나 변화를 주었다.  솔로의 경우 얼마간 같은 것을 매일 밤 연주하는 경향조차 있었다.

 

이러한 밴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킹 오리버의 크리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였다.  1920년 빌 존슨(Bill Johnson)에 의해 결성되었던 오리지날 크리올 밴드(Original Creole Band)의 후예로서, 그들은 시카고와 그외 지역의 주요 흑인 또는 혼용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밴드가 1923년에 최초로 흑인들에 의해 녹음된 재즈를 담은, 생명이 싹트는 일련의 레코드들을 제작해냈다는 사실이다.  비록 올리버가 결국은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자들을 만들어냈지만 이러한 초기 레코딩의 청중은 주로 흑인들과 몇몇 백인 뮤지션들이었다.  실제로 백인 뮤지션들의 다수가 그룹으로 끌어들여져서 링컨 가든(흑인 댄스 홀이었던)의 매니저들은 특별히 그들을 위해서 수요일에 "미트나이트 램블즈"

(midnight rambles)라는 코너를 개설하기도 했다.


  재즈 중심지로서 시카코의 전성기는 짧았다.  1928년에 혁신주의자들의 정부는 그 곳의 불법적인 카바레와 댄스홀들을 일소했고 다음 해에 뮤지션들은 뉴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밖으로의 이동은 보존되고 있던 옛 뉴올리언즈 스타일로부터도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시카고가 품었던 밤의 환락은 10여년 동안 음악으로 울려 퍼졌지만 다른 도시들, 특히 뉴욕에서는 그러한 음악이 좀 체로 연주되지 않았었고 댄서들에게 있어서는 낯설고 다소 구식으로 들렸다.  1930년 이후 1940년대의 뉴올리언즈 재즈 리바이벌 때까지 이 스타일의 음악은 아주 적은 수만이 녹음되었을 뿐이다.


3. 암스트롱과 바이더벡


  올리버가 재즈 발전에 기여한 또 다른 위대한 점은 뉴올리언즈에서 자랐고 그 곳의 홍키 통크에서 고된 견습기간을 거쳤던 루임 암스트롱을 후원했다는 것이다.  1922년에 올리버는 그의 크리올 재즈 밴드에 참여시키기 위해 암스트롱을 시카고로 데려왔다.  여기서의 그는 단지 밴드의 한 멤버로 보였지만, 1924년 뉴욕에 있는 플레처 헨더슨(Fletcher Henderson)의 오케스트라에 재즈 스페셜리스트로서 가입하게 되어, 레코딩에서나 백인 전용 클럽이며 밴드의 주요 출연 장소인 로즈랜드볼룸(Roseland Ballroom)에서의 연주에 있어서나 그에게는 광범위한 솔로의 공간이 주어졌다. 

 

암스트롱은 즉각적으로 뮤지션들 싹터 오르는 재즈 팬 집단에 의해 특별한 그 무엇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연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름다운 음색, 다른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보다 그를 훨씬 앞에 놓이게 하는 명인다운 테크닉, 멜로디를 창조해내는 놀랄만한 생산력, 실로 비교의 상대가 없는 스윙감각, 그의 음악에 스며들어 있는 개성적인 존재감 등이다.  우선은 헨더슨 밴드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그의 음악에 경외하였고 흑백 모두에 결친 다른 많은 뮤지션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진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1925년에 시카고로 돌아온 암스트롱은 소위 핫 파이브(Hot Five)시리즈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 레코드들은 그를 보다 더 세상에 알려지게 했으며 1928년경 시리즈가 완성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것이 되었고 재즈 세계에서 선도적인 인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핫 파이브의 아주 초기 녹음들은 보가질적으로 뉴올리언즈 스타일에 근간을 두고 있었으나 암스트롱은 그가 대중들에게 상업적으로 호소력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레코드 제작자들에 의해 트럽펫터와 가수 양쪽 면에서 점차적으로 전진해 나아갔다.  시리즈가 끝날 무렵 다른 연주자들은 반주와 약간의 솔로 교대를 제공했을 뿐, 레코딩은 오로지 암스트롱을 위한 것이 되었다. 

 

암스트롱의 천재에 압도당한 재즈 뮤지션들은 트럼펫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 연주자들까지도 그의 솔로를 모방하면서 그를 본받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올리버나 모튼의 세심하게 유기화된 앙상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암스트롱처럼 솔로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재즈는 즉흥 연주된 앙상블 연주를 계속 포함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솔로이스트의 음악이 되었다.  솔로이스트로서 암스트롱은 코드 진행에 반하는 즉흥 연주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이는 재즈에 있어서 주요 솔로 방법이 되었다. 

 

초창기 시절 그는 오리지날 멜로디 라인에 밀착하거나 혹은 그것을 조금 풀이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됨에 따라 점차 멜로디를 대체적으로 포기하고 멜로디 주위에서 맴돌기 보다는 곡의 화성에 근거하여 오리지날 작품을 비행시키는 곡예에 모험을 걸게 된다.

 

비록 암스트롱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연주자였지만, 재즈 전개의 이차적인 줄기도 있었다.  뉴올리언즈 밖의 많은 젊은 백인 연주자들은 오리지널 딕실랜드 재즈 밴드와 뉴 올리언즈 리듬 킹즈로부터 재즈를 배웠고, 암스트롱은 물론 올리버조차도 들어보기 전에 자신들의 스타일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불가피하게 흑인 연주의 특징인 블루스적 역양이 적은 대신 화성적인 다양성을 가지고 보다 정제된 타입의 재즈를 연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계열의 선두는 미드웨스트로부터 온 뮤지션들이었고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빅스 바이더벡(Bix Beiderbecke)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닉 라로카에 기초를 두고 형성했으며, 이 후에는 암스트롱과 블루스 가수들에게서 영향력을 흡수했지만 그의 연주는 보다 초기의 전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바이더벡은 1920년대에 있어서 오로지 암스트롱 다음으로 흑백재즈 뮤지션 양쪽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와 그의 동료 및 후배들을 통해 내려오는 끊어지지 않는 줄기는 오리지날 딕실랜드 재즈 밴드로부터 오늘날의 전통적 재즈와 그에 유사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추적될 수 있다. (많은 필자들이 이 음악에 "시카고 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적용시켜 왔지만, 사실 그것은 단지 뉴올리언즈 스타일의 변형이었다.)


  4. 심포닉 재즈의 융성


 뉴올리언즈 재즈 스타일의 광범위한 유행의 와중에서도 다른 이들, 특히 퍼디그로페(Ferde Grofe)는 재즈에의 새로운 접근 방법 개발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로페는 클래식 음악을 철저하게 교육받았고 이른 나이부터 댄스홀, 극장, 홍등가 등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1914년경에 그는 샌프랜시스코의 세인트 프랜시스(St. Francis) 호텔에서 댄스 밴드를 이끌고 있던 드러머 아트 힉맨(Art Hickman)과 함께 팀을 결성하였다.  당시 사실상 모든 댄스 뮤직은 대개 바이올린, 피아노, 드럼, 그리고 아마도 한두 개의 목관 악기들로 구성된 비교적 무명의 그룹에 의해서 연주되고 있었다. 

 

그러한 앙상블들은 쓰여진 편곡대로 연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필요한 만큼의 변주와 함께 곡의 멜로디를 반복했을 뿐이었다.  이때 그로페에게 밴드가 대위법이나 악기의 화성적 울림같은 심포닉 음악으로부터 끌어들인 요소를 갖춘 편곡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재미있는 댄스 뮤직을 연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나중에 재즈 작곡의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원칙, 즉 악기의 화성적 사용법 - 이 경우 멜로디의 주요 표현 수단으로서 두 개의 색소폰 -, 그리고 근본적으로 대위법적 방식인, 서로 다른 악기를 맞대응시키는 연주 기법을 이용하면서 댄스밴드를 위한 편곡을, 필시 힉맨을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1919년 트럼펫, 트롬본, 두 개의 색소폰, 그리고 리듬 섹션으로 구성된 힉맨의 오케스트라는 웨스트 코스트 지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컬럼비아에의 레코딩을 통해 - 당대의 유니크한 댄스 밴드로 -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1918년에 즈음하여, 역시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고 재즈에 관심을 갖고 있던 또 한사람의 뮤지션인, 폴 화이트맨(Paul Whiteman)이 힉맨과 함께 한 그로페의 작품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그를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피아니스트 겸 편곡자로 고용하면서 힉맨의 성공과 겨루기 시작했다.  화이트맨은 결코 재즈 연주를 스스로 배운적이 없었으나 감별할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프로모션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뉴 저지(New Jersey)의 애틀랜틱(Atlantic)시의 명망있는 무대에 그의 오케스트라를 출연시킬 수 있도록 관리했고, 그 곳에서의 즉각적인 성공은 빅터(Victor)와의 레코딩 계약을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그로페의 편곡으로 화이트맨 밴드는 인기를 더하게 됐으며, 특히 오케스트라의 녹음인 <Three O'clock in the Morning> (1922. Vic. 18940)의 경우 3백 5십만장이 팔려나갔고 이는 미전역에 있는 축음기 두 대당 하나씩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화이트맨은 자신의 새로운 음악에 "심포닉 재즈"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스스로 "재즈의 왕"임을 공언하였다.  그는 20C대중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가 되었고, 불가피하게 모방하기 시작했다.  1923년경에 있어서 재즈라는 말은, 대중의 마음속에, 화이트맨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들어내는 심포닉 재즈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뉴올리언즈 스타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1925~7년의 기간 동안 절정에 이르렀으며, 당시 암스트롱(핫 파이브와 함께)과 모튼(레드 핫 페퍼스와 함께)은 이 장르에서 가장 뛰어난 레코딩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도 역시 심포닉 재즈의 물결이 옛 스타일을 압도했으며 1920년대의 후반에 이르러 뉴올리언즈 재즈는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즉 진 골드켓(Jean Goldkette),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벤 폴락(Ben Pollack), 그리고 플레처 헨더슨 같은 뮤지션들이 이끌던 새롭게 떠오르는 밴드들은 그로페의 선례에 따른, 쓰여지거나 암기된 편곡을 수단으로 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킹 올리버조차도, 자신의 뉴올리언즈 밴드가 북부의 뮤지션들 사이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었지만, 그의 라인업에 색소폰 파트를 추가시켜 새로운 스타일을 연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5. 스트라이드와 블루스 피아노


 피아노는 별도의 반주가 필요없이 혼자만으로도 연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재즈 밴드에서의 다른 악기에 비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재즈 악기로 서서히 발전해 왔다.  일찌기 두 갈래의 전개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스트라이드 스타일의 랙타임으로 부터 진화하였다.  스트라이드란 왼손으로 하나의 음(혹은 옥타브)과 코드를 변갈아 치는 동안에 오른손이 전형적인 랙타임 스타일의 피아노 음형을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의 스트라이드는 사실 랙타임 보다 즉흥 연주적인 감각과 재즈의 새롭고 더욱 자유로운 리듬이 스며든 것이었다.  즉 세련되고 두터운 구조를 갖춘 음악이었다.  피아노 연주의 두 번째 전통은 블루스를 피아노로 옮긴 것이 뚜렷하며 남부의 시골과 도시 흑인 구역에 있는 거친 술집에서 일하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흑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단순하고 되풀이되는, 통상 단일 음들로 구성된 왼손 베이스와 역시 반복적인 오른손의 단선율들을 사용했다. 그 형식은 보통 12소절 블루스였고, 이러한 연주의 전통은 배럴하우스 (Barrelhouse)와 부기우기(Boogin-Woogie)로 알려진 스타일들을 구축했다. 

 

스트라이드와 정반대로 그것은 리듬으로나 화성적으로 덜 세련됐다.  두 가지 전통 사이에 처음에는 접촉이 거의 없었다.  스트라이드 스타일은 1920년대 중반에 북동부 도시들에서 제임스 P. 존슨(James P, Johnson), 윌리 스미스(Willie "the Lion" Smith), 럭키 로버츠(Lucky Roberts), 그리고 존슨의 제자격인 팻츠 월러(Fats Waller) 등의 아주 숙련된 연주자들에 의해 절정을 이루게 되며, 반면 배럴하우스와 부기우기 스타일은 주로 남부와 중서부에서 연주되었다. 

 

두 전통은 모튼이나, 가장 널리 알려진 얼 하인즈(Earl Hines)같은 피아니스트들의 작품 속에서 합체되었다.  하인즈는 오른손에 많은 영역에 걸친 옥타브와 단일 음들을 사용하는 테크닉을 발전시켰고, 왼손의 슬라이드패턴은 고르지 않은 코드의 단편들과 선율이 함께 어우러지는 형태로 대체되었다.  그는 암스트롱이나 지미 눈과 함께 만든 레코딩들로 인해 1920년대 후반에 대단한 주목을 받게되고,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1930년대에 테디 윌슨(Teddy Wilson)은 하인즈 스타일을 다소 매끄럽고 보다 정제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윌슨은 랙타임과 스트라이드에서 전형적인 반복적인 피아노 음형보다는 오른손으로 단일음 라인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왼손으로 그는 때로는

스트라이드하고 때로는 컴핑(Comping : 솔로 라인을 증강시켜주고 즉흥 연주에 유용한 코드와 리드를 제시함. 보조음 또는 반주)하면서, 기능면에서 볼 때 화성보다는 리듬적인, 간결한 코드들과 함께 불규칙적인 연주를 강조했다.  1935년 이후 윌슨은 매우 인기 높은 트리오 및 베니 굿맨의 콰르텟과 함께 일하였고, 그를 통해 하인즈식의 연주는 랙타임에 근거한 옛 스트라이드 방식을 밀어내고 재즈 피아노에의 표준적인 접근 방법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6. 연예 산업과 언론 속에서의 재즈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재즈는 홍키 통크, 파티 그리고 저급한 카바레 등지에 국한된 특별한 음악이 아니라 범죄 조직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지배되고 있던 완전히 상업적인 연예 산업 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인기 있는 음악이 되었다.   고전적 뉴올리언즈 재즈 레코딩을 만들었던 뮤지션들은 카바레, 극장, 댄스홀, 그리고 보드빌(Vaudevill : 통속희극, 민스트럴 쇼에서 파생한 노래, 춤, 촌극 등을 조합한 일종의 레뷰)무대 등의 댄스와 쇼 밴드에서 생계를 꾸렸다.  즉 그들의 음악은 대부분 춤이나 영화 혹은 연극을 위한 배경 음악 등의 반주 기능을 맡았었던 것이다.

 

1920년대의 기간 동안에 재즈의 주요 청중은 백인이 되었다.  1924년경 엘링턴과 헨더슨이 이끌던 밴드는 백인 전용의 클럽에서 주로 연주하고 있었고 암스트롱, 눈, 올리버 그 밖의 다른 이들의 팀도 1926년 안팎 이후로 같은 상황에 있었다.  비록 극장과 댄스홀에서 흑인 청중을 위한 연주도 계속했지만, 이 밴드들에게 있어서 백인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더욱 수지맞는 일이었다.  그들은 또한 정규적으로, 몇몇 경우에는 매일 밤, 역시 백인 청중을 위해 클럽 연주를 통한 방송 출연도 하였다.  1920년대가 끝날 무렵이 되자 재즈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를 확립하는 큰 걸음을 확고히 디디게 됐다.  그것은 미국 쇼 비지니스의 주류가 되었고, 그 지도적인 인물들이 점차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며 몇몇은 상당한 수입도 얻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재즈가 당시 미국 대중들에게 의해 업신여겨지고 무시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재즈가 뉴올리언즈 밖으로 알려지게 된 때인 1917년에 미국 언론은 이를 쓰기 시작했고 1920년대 동안 수 많은 신문과 잡지에 기사로 등장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에게 용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 모두 재즈를 변화하는 윤리와 관계된 것으로 보았고, 불가피하게도 기성세대는 그것이 젊은이들의 품행을 타락시킨다고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론의 관심은, 호의적이지 않은 수는 있지만, 중립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재즈는 인기가 있었고, 언론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즈에 대한 보도의 많은 부분이 잘못 알려졌으며 화이트맨 같은 이들의 심포닉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더 깊이 있는 이해의 징후도 보였다.  1920년만큼 이른 시기에 재즈 팬들과 대학캠퍼스의 레코드 수집가들은, 비록 세련되진 않으나마, 음악에 대한 심미안을 개발시키고, 진짜와 사이비를 구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1920년대를 통해서 많은 아티스트와 지식인들이 새로운 미국의 정신에 대한 반응의 한 부분으로서 재즈를 듣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조예를 갖추고 사려 깊은 기사들이 [The Bookman], [New Republic], 그리고 [Literary Digest]같은

잡지들에 종종 실리기 시작했다.  1925년경부터 일반적인 음악 대중을 목표로 한 잡지인 [Orchestra World]가 재즈에 주목했다.  그리고 1927년 로버트 도날드슨 대럴(Rovert Donaldson Darrell)이 쓴 아주 유명한 글이 [Phonograph Monthly Review & Disques]에 실려 암스트롱, 엘링턴, 그리고 다른 중요 재즈 명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제공했다.  대럴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활자화된 의견을 발표한 최초의 재즈 작가였다. 말하자면 그는 [Disques]에서의 글을 통해 폭 넓은 해설로 엘링턴의 <Black and Tan Fantasy>를 발굴해 낸 최초의 작가였으며 유럽인들이 엘링턴에게 주목하게끔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럴은 최초의 진정한 재즈 비평가로 여겨질만 하다.

 

 모든 사람들이 쇼비지니스 속에서 위치를 확고히 해내가는 재즈를 행복한 마음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다.  몇몇 팬들과 마찬가지로 일군의 뮤지션들은 그것을 새롭게 용인할 만한 스타일로 보면서도 순수한 뉴올리언즈 형식의 퇴화로 여겼고, 그것에 저항함을 분명히 하면서 어떠한 청중 앞에서건 옛 방식대로 연주하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튼 그때에 소수에 불과했다. 현재의 유리한 위치를 점령한 입장에서 볼 때 재즈는 예술로 그리고 뮤지션들은 예술가로 여겨진다.  그러나 1920년대에 있어서 소수의 재즈 뮤지션들- 흑인들 중에서도 아주 조금인 -은 힘들고 매우 경쟁적인 직업 속에서 생계를 꾀하려는 쇼비지니스 전문가는 결코 아닌 것으로 스스로를 보았으며, '매진'이라는 말 따위는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었던 것이다.

 

 

 

 

 

출처 : 김학권과 재즈
글쓴이 : 변산바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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