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집기 경주여행 17. 노서리 고분 - 유네스코 문화유산
노동리에 단 세 개의 고분이 남아 있는 데 비해 노서리 고분군은 우선 그 숫자 면에서 노동리를 압도한다.
봉황대와 대비될 수 있는 거대한 무덤인 서봉황대(130호)가 있고
황남대총 같이 생긴 표형분(134호)이 있는가 하면,
1921년, 가장 먼저 발굴되어 신라 금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금관총(128호),
1926년에 북구라파 저 먼 나라 스웨덴에서 동양의 은둔의 나라까지 왔던
황태자 구스타프 6세에 의해 발굴되어 서봉총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129호 고분,
광개토대왕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호우총(140호), 표형분이라지만 다른 이름을 가진 은령총 등
모두 14기에 달하는 고분이 있는 곳이 바로 노서리 고분군이다.
노동리 고분군과 함께 대릉원 담장 밖에 있어서 마치 무료 입장 고분공원과 같은 곳이다..
잔디밭에서 모여 팀웍을 다지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팔짱 낀 연인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산책하는 동네 어르신들도 곧잘 보인다.
동네 아이들이 뛰놀기도 하고 개구쟁이들은 고분위에 올라 장난치기도 한다.
1988년 노서리 고분 안내판
(노동, 노서리 고분군) : 지도는 다음 지도를 이용하고 각 고분의 명칭은 직접 찾아서 사진 찍은 것과
지도를 일일이 대조하여 정리하였다.
데이비드총, 옥포총의 정보는 다음 블로그 '토함산 솔이파리'(솔뫼님)에서 얻었다.
금관총 (128호분)
금관총은 1921년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고분이다. 그래서 신라금관의 대명사 같이 불려왔던 것이 바로 금관총이다.
기록들에 의하면 주막집 개축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굴 이후 무덤은 그루터기만 남긴 채 잘려져서 무덤이 있었던 자리만 보여주고 있다.
남의 나라 무덤을 파헤친 일제는 굳이 그 무덤을 원래 모양대로 복원할 마음도 생각도 없었나보다.
일제시대에 파헤쳐진 경주의 무덤은 모두 그런 모양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어떤 무덤들은 아예 흔적조차 잘 모르게 없애 버렸다.
지금은 고분 구역이 깨끗이 정비되어 있지만 일제 시대, 아니 그 후 정비 작업 이전까지도
이 지역은 민가들이 밀집되어 사람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금관총 금관과 금제 허리띠는 사진을 직접 찍을 기회가 없어서 문화재청 사진을 빌려 온다
금관은 국보 87호이고 허리띠는 국보 88호이다.
금제 관모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직찍.
세고리 자루칼 : 경주 박물관에서 직찍.
금장식
곡옥
가슴걸이
몽고발형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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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瑞鳳塚 : 129호분)
후일 1950년에 즉위하여 스웨덴 국왕이 된 구스타프 6세가 황태자 시절이었던 1926년,
아시아를 방문 한 것을 일제가 외교적목적으로 이용하여 이미 발굴 중이었던
129호분 발굴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금관 등을 발굴한 것을 계기로 서봉(서전+ 봉황)총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나라를 잃은 그 시기, 문화재들은 그렇게 파헤쳐지고 유린당했다.
서봉총은 금관총과 마찬가지로 봉문이 깎여 나간 채 무덤의 형태만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이 형태가 표형분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표형분 중 북동 방향인 것이 서봉총, 남서 방향인 것이 발굴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총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서봉총금관 : 보물 제 339호(사진: 문화재청 자료)
서봉총 출토 유리그릇
청동자루솥
호우총(壺杅塚 : 140호분)
호우총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해방이후인 1946년 최초의 신라고분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호우총과 은령총이다.
두 무덤은 표형분의 형태였다고 하나 지금 남은 것은 원형이 아니라 각진 모양의 호우총의 밑둥만 남아 있다.
자전거가 걸쳐진 호우총 : 1988년
호우총에서 발굴된 두껑 달린 청동 그릇 하나.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이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쓰여진 그릇의 발굴은 국내 사학계에 엄청나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여러가지 학설이 발표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신라 무덤에서 발굴된 그릇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대한 글이 있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도 글씨체가 광개토왕의 비문에 쓰여진 그 예서체와 꼭 닮은 글이니...
호우총의 호우 : 사진은 다음 블로그 '토함산 솔이파리'(솔뫼님)에서 얻어 옴.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 5만을 보내어 신라를 도왔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학자들은 위의 을묘년을 415년으로 보고 있고 고구려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광개토대왕이 돌아간 것이 412년이니 광개토와 비문과 거의 비슷한 호우의 문자로 봐서 415년 을묘년으로 보는 것이다.
그 고구려에서 만든 청동 그릇이 신라까지 와서 왕인지 왕족인지의 무덤에 같이 묻혔다면 중요한 연유가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당시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좀 보기로 하자.
신라 내물왕 37년(392년)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고구려에 보냈고
실성은 46년(401년) 볼모에서 돌아와서 47년(402년) 내물왕이 돌아가자 이어서 왕위에 오른다.
실성은 왕 11년(412년)에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다시 내물왕이 자기를 볼모로 보낸 것에 원한을 품고 내물왕의 아들 눌지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면서
고구려에 있을 때 알던 사람에게 눌지를 죽이라고 연락했으나 부탁을 받은 고구려인은
눌지를 만나보고 오히려 그 사실을 이야기 해준다.
실성왕 16년(417년)에 눌지가 오히려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시기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재위기간(391~412) 및 장수왕의 초기 시기가 된다.
그리고 신라본기의 기록을 보면 왜인이 끊임없이 수도인 금성까지도 침범하던 때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라가 제대로 유지되기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다.
또 하나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18대 실성왕 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왕(실성왕)은 전왕(내물왕)의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서 이를 죽이고자 했다. --중략--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눌지에게 어진 행실이 있음을 알고 창끝을 뒤로 돌려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417)
신라의 왕위를 좌우할 정도의 힘이 고구려에게 있었으니 고구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알 수 있다.
사기에는 고구려로 인질로 갔던 눌지왕의 동생 복호가 눌지왕 2년인 418년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고
학계에서는 그 때에 호우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고 호우총이 눌지왕제 복호의 무덤이라고 추측하는 것 같다.
호우총에서 발굴된 부장품들이 왕릉급보다는 조금 아래라고 평가되는 것도 왕제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이라고 판단하는 근거중의 하나이다.
금귀고리 : 호우총
금드리개 : 호우총
금귀고리 : 은령총
그 외의 노서리 고분
노서리 고분군에는 위의 별칭이 있는 고분들 외에도 여러 기의 고분이 있다.
서봉황대라고 이름 붙여진 130호분.
앞의 그루터기만 남은 것이 서봉총이고 멀리 왼 쪽의 무덤이 132호분이다.
봉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돌만 몇 개 남아서 횡혈식 석실분의 흔적을 남기는 131호분은 사진이 없어 생략하고...
오른 쪽이 132호분. 서봉황대와 대형표형분 사이의 크지 않은 무덤이다.
모텔 건물 앞에 있는 작은 무덤이 133호분인 마총이다.
132호분
133호분 : 말뼈가 나왔다고 해서 마총인데 일인들이 붙인 이름대로인 모양이다.
말은 주인공이 아닌 순장품인 것이 확실할텐데 신라왕족이나 귀족 쯤 되는 이의 무덤의 이름을
말무덤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생각하면 적지않이 불쾌한 생각이 든다.
대형 표형분인 134호분
멀리 나무 뒤에 있는 큰 고분이 서봉황대이다.
1988년 비슷한 방향에서 : 멀리 있는 서봉황대, 왼쪽이 134호 표형분이고 오른 쪽이 135호분이다.
1988년 사진 : 왼 쪽이 135호분이고 정면에 보이는 것이 134호 표형분이다.
왼 쪽이 135호분, 오른 쪽이 136호분이다.
135호분
136호분
신라에서는 흔치 않은 횡혈식 석실분이라는 쌍상총(137호분)
부부의 합장묘라고 한다.
노서리 고분군의 유물.
국립 중앙박물관이나 경주박물관에는 출토지가 경주 노서동 무덤이라고 표기가 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 표기로는 구체적으로 몇호분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노서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만이라도 알게 되니 다행이다.
많은 도굴 문화재들이 출토지를 제대로 몰라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금목걸이(보물 456호) : 노서동 무덤
금팔찌(보물 454호) : 노서동 무덤
금귀고리(보물 455호) : 노서동 무덤
노서리 고분군과 유물...
사연도 많을 경주의 무덤들은 말없이 누워 있다.
그 안에 수많은 비밀을 감춘 채...
분명히 하나 하나의 무덤 주인공들은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그 이름이 실려 있을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 주인공들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아니 억지로 연결시켰더라도 잘못했을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최근에 발간된 고 이근직 교수의 유저 '신라왕릉연구'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직 책을 사보지는 못했지만 신문 기사만 보아도 관심을 가져야 할 연구인 것 같다.
계속합니다.
다음 블로그 '옛정자 그늘.'
http://blog.daum.net/oldpavilion
파빌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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