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여행기 / 이성규
1. 일정 : 08년 4월 8일 ~ 16일(8박 9일)
2. 주요 관광지 : “이스탄불” ~ (터키수도) “안카라” ~ “카파도기아” ~ (오스만터키때의 수도) “콘야” 경유 ~ “안탈야” ~ “보드롬” ~ “파묵칼레” ~ “에페소” ~ “트로이” ~
“다다넬스”해협 건너서 ~ “보스포로스” 해협 승선관광 ~ “이스탄불” ~ 귀국
* 관광버스로 돌아 본 거리 3,800km
3. 터키 개요
(1) 인구
06기준 터키 인구는 약 7천300만 명. 인구 증가율은 년 평균 2~ 2.5%로 높은 편임.
터키는 65세 이상 노령인구 비율이 약 5%대로 한국의 절반수준.
인구의 문자 해득률은 90% 수준으로 아랍권에서는 제일 높은 편임.
(2) 기타
[1인당 국민소득] 5,300불(06년 기준) [수도] : 앙카라.
[민족구성] 터키족(90%) 쿠르드족, 아랍 족 등 (10%)
[언어]우랄 알타이어 계통의 터키어로 語順이 한국어와 같아 배우기가 비교적 쉽다고 함. [종교]이슬람 98%, 기타 기독교, 유대교.
[사용화폐] 터키리라(YTL)로 1$에 1.3 YTL.
[주요산업] 국민의 70%가 농업에 종사함. 농업이 GNP의 34%. 수출의 84% 차지.
[관광수입] 연간 1,400만 명의 관광객, 세계 14위.
(3) 지리
터키 국토면적은 약 78만 평방km로 한국의 3.5배의 크기임.
위도 상으로 북위 36도 ~ 42도(한반도 33도 ~ 43도)에 위치해 있어, 년 간 기후는 한반도와 비슷한 4계절이 분명한 온난지대이나, 한국은 태풍과 장마가 년 중 행사와 같이 반복되지만, 아나톨리아반도(터키)는 주위에 大洋이 없는 지형적 영향으로, 태풍이나 장마가 거의 없다고 함. 다만 지층의 불안정으로 대략 3년 주기로 지진이 발생하며, 지진이 발생하면, 인명피해가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된다고 함.
지형은 西低東高로 동쪽으로 갈수록 높은 산맥과 산들이 있으며, 동부의 높은 산은, 5000m가 넘는 산들이 많으며, 제일 높은 산은 “아라랏”山이라고 함. 전국 평균고도는 1.130m 임. 학교에서 배웠던, “유프라테스” 강과 “티크리스” 강이 터키의 동부에서 발원한다고 함.
터키는 큰 호수들이 많은데 중부에 있는 소금호수는 염분이 30%로 세계에서 제일 짠 호수이며, 동부의 “반”호수는 제주도크기의 호수인데, 소다성분이 많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 한국과 터키의 시차는 6시간임.
여행기 순서
1. 이슬람의 나라
2. 케말 파샤
3. 한국과 터키는 형제 국인가?
4. 터키의 명암
5. 낙수
1. 이슬람의 나라.
터키 여행기는 말 그대로 여행기 일 뿐이다. 현지에서 본 것, 느낀 것, 그리고 가이드를 통해서 들은 것을 정리한 내용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정확하지 않더라도 내가 터키를 여행한 시점에서의 내 생각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어본다.
터키공화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현재 국민들의 종교 분포는 98%가 이슬람이고, 기타 기독교, 유태교 등이 있다고 한다. 이슬람이 많은 이유는 오스만제국 때부터 이슬람이 國敎였고, 유럽에 위치했던 기독교 국가들과 십자군 전쟁을 치루면서 이슬람에 대한 신앙이 더욱 견고해진 선조들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슬람의 나라에 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이슬람 종교가 인간에게, 특히 이슬람 나라인 터키 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첫날 호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시차 때문인지, 아니면 회교사원에서 아침예배를 알리는 방송 소리 때문인지, 잠이 깨어 밖에 나가보았다.
인적이 없는 새벽, 거리에는 가로등만 밝혀진 시간에, 살이 퉁퉁하게 찐 제법 큰 개와 고양이 네다섯 마리가 같이 어울려 있었다.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저놈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은 아닌 것 같다.
저들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려고 앉아서 손짓으로 오라고 했더니 처음 보는 이국인인 나에게, 개도 가까이 오고 고양이도 가까이 왔다.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 주었더니 가만히 내 호의를 받아드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이같이 사람을 보고 짖지 않는 개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를 터키를 다니면서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만났던 모든 동물들이 하나같이 순했다. 동물들이 순하다는 것은 그 동물을 대하는 터키 사람들이 순하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와 같이 행동하는 운전수와 운전보조원외에 터키인을 직접만나보지는 못 했지만, 길거리에서 보는 터키인들의 인상도 하나같이 선량해 보였다.
우리 일행이 “다다넬스” 해협을 배를 타고 건널 때 저의 아내가 우리가 앉은 맞은 편 의자에 검은 히잡(이슬람 관습에 따라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기 위해 쓰는 옷)을 쓴 터키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대화하는 두 사람은 상대국인 터키말도 모르고 한국말도 서로 모르는 여자 둘이서 손짓과 얼굴표정만으로 대화를 했다. 아내는 터키 여자 분에게 가지고 있던 사탕을 드렸고, 그분은 집사람에게 흰색 구슬의 목걸이를 주었다. 그리고 한국어와 터키어로 된 주소와 전화번호를 서로 주고받았다. 써 준 주소를 상대방이 읽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와 가이드에게 터키 여자 분이 써 준 내용을 읽어 달라고 하니, 고맙다는 내용과 주소와 전화번호라고 한다.
터키에 가기 전 언론의 보도사진에서 ‘히잡’을 쓴 이슬람 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종교와 전통에 억매여 있는 불쌍한 여자들이라는 선입관을 가졌었는데, 이 같은 종전의 선입관은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보는 터키인들의 선량한 인상, ‘히잡’을 썼지만, 마음은 개방적인 터키 여인, 개와 고양이들까지도 순한 나라, 이 같은 상황의 배경에는 이슬람 종교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슬람 종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었지만, 가이드를 통해서 아는 것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이드의 답변 가운데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신도들)은 저들의 종교가 생활이고 인생” 이라는 간단한 말속에 답이 있는 것 같다.
무슬림은 꼭 지켜야 할 5가지 의무가 있다고 한다.
1. 유일신인 “알라”를 믿고 선지자인 “마호멧”을 믿을 의무
2. 하루에 5번(날이 새기 직전, 오전, 정오, 오후, 해가 진후) 메카를 향해 기도 드릴의무.
터키는 마을마다 회교사원이 있어, 예배시간이 되면 20~30분간 스피카를 통해 장엄하게 느껴지는 예배 곡을 방송한다.
기도는 원칙적으로 회교사원에 가서 드려야 하지만, 형편이 안 되면, 집이나 직장에서 드려도 된다고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한국교회들이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듯 무슬림들도 회교사원에 모여서 같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법적인 공휴일은 일요일로 정해졌다고 하니 일주일에 금요일에 예배를 위한 휴일과, 일요일의 법적공휴일, 2일의 휴일이 있는가?
3. 선행의 의무가 있는데, 실생활에서 선행의 의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선행은 가난한 자나 어려운 사람을 돕고, 불상한 동물들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선행을
뜻하는데, 선행을 하면 “알라”가 보상해 준다고 믿는다.
4. 1년에 한 달 정도 되는 라마단 기간(이슬람 월력으로 9월)에 낮 동안에는 물도 먹지
않는 금식을 해야 할 의무. 해가 진 이후에는 식사를 할 수 있단다.
5. 평생에 한번은 메카성지 순례를 해야 할 의무.
이 같은 5가지 의무를 다 이행 하려면 죄를 지을 마음의 여유도, 죄를 지을 시간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그날이 지나기 전에 기도로 용서를 빌거나, 선행을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죄는 신앙적인 죄와, 죄는 아니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으로 구분되는데, 신앙적인 죄에 해당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 음식을 버리는 것, 거짓말, 도적질, 자살 등이며,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속하는 것은, 음주, 흡연 등이라고 한다.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들이 살이 찌고 순한 것은 죄를 지은 무슬림들이 그날이 가기 전에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선행을 통해, 용서를 비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먹을 걱정, 맞을 걱정 없으니 동물들이 순할 수밖에...
무슬림이 운영하는 은행은 같은 무슬림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같은 근거는 구약성경에 “너의 형제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은 코란 외에 구약성경과 신약의 4복음서를 모두 성경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이슬람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의 자손이며, 당연히 장자의 권위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예수님을 인정하되 다만 선지자로만 인정한다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멧도 ‘알라’의 전달자라고 믿는다고 한다.
무슬림의 가정생활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1부 다처제를 인정하는데, 한 남자가 여자를 4명까지 거느릴 수 있다고 한다. 첩을 얻으려면 정실의 처에게 먼저 동의를 얻어야 한다. 형이나 동생이 죽고 그 부인들이 살아가기 어려우면, 한국식으로 말하면, 형수나 계수를 처로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제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형제가 죽어 그 부인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때 과부가 된 부인을 보호하기 위해 이 같은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한다. 1부 다처제는 남자의 입장보다 오히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가정에서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다보면, 가정의 위계질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은 부인을 때릴 수 있다고 한다. 때릴 수 있는 경우가 72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여자의 기본임무인 자식에 대한 교육을 잘 못 할 경우, 음식을 잘 못 할 경우, 부인들 간에 질투로 불화가 있을 경우 등이라고 한다.
매를 맞는다는 것은 서구식 기준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불법이지만, 이슬람의 전통과 교리에 적응해온 여자 본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작년도 터키의 여론조사기관에서 여자를 상대로 “여자가 잘못해서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잘못하면 매를 맞아야 된다는 답변이 86%나 되었다고 한다.
헌법에는 남녀평등과,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저들의 종교와 전통이 헌법에 앞서는 것 같다.
여성들의 사회적인 활동은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관광지에서 표를 파는 여자, 질서를 담당하는 여자경찰, 등등...
가정에서 여자는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의무이며, 미덕으로 보기 때문에 이슬람권에서 인구 증가율이 이슬람外의 나라들보다 현저하게 앞서고 있다고 한다.
선진국들은 산아제한으로 인구 증가율이 계속 감소하지만, 산아제한이 없는 이슬람권은 경제발전에 따라 출산율이 증가하기 때문에 이 같은 추세를 유지한다면, 2030년경에는 세계인구 비율에서 이슬람권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한다.
부인들이 외출 시 얼굴을 가리려고 뒤집어쓰는 옷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히잡(윗부분과 밑 부분 둘로 나누어진 옷)이고, 하나는 차트르(통옷)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내에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이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경우는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 팀의 가이드는 특별한 면이 있는 유능한 가이드인데, 자기 아버지는 목사님이라고 했다. 여러 해 동안 터키에서 살면서 가이드를 하고 있지만, 장래 희망은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는 것인데, 영화감독이 되면, 첫 작품으로 07년, 한국교회 신도들이 아프카니스탄에 선교하러 갔을 때, 일행을 인솔해 갔다가 현장에서 순교한 목사님을 주제로 한 단편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가이드는 한국교회가 터키에 와 있는 한국선교사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곳의 한국선교사들이 본국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선교는 뒷전이고 개인적으로 호화생활을 하는 사이비 선교사로 전락해 있다면서 질타했다.
이 가이드에게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일반적인 무슬림들의 인생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가이드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인슐라(알라의 뜻대로) 이며,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의심 없이 믿는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인슐라(알라의 뜻대로)’에 대한 의미를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여된 숙명적인 사고방식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알라가 바라는 대로 살겠다는 차원 높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한다.
“알라의 뜻을 따라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의 인생관인가!
이슬람의 선교방식과 관련해서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들의 종교를 권력으로 강요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재의 이슬람은 자기들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홍보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무슬림이 되는 여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사항이라고 한다. 자기 아버지가 목사인 가이드의 말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있었다.
몇 년 전 남미의 천주교 나라 “볼리비아”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버스를 타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터키의 밀밭을 보면서 크기나 규모가 비슷하게 생긴 “볼리비아”의 밀밭이 생각났다. 그런데 경작한 소득 물에 대한 지주와 경작자간의 배분방법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터키는 소득의 10%만 지주가 갖고, 경작자(농부)가 80%를 갖으며, 10%는 경작경비로 사용한다고 한다. 볼리비아는 소득의 50%를 지주가 가져간다고 했다. 비슷한 경작 상황에서 지주의 몫이 50%와 10%의 현격한 차이는, 볼리비아와 터키의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천주교의 나라와 이슬람의 나라가 약자에 대한 배려의 차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씁쓸한 기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언론보도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가장 큰 차이는 ‘칼리프’(이슬람의 최고 지도자)의 선정방법이라고 한다. 시아파는 반듯이 이슬람의 창설자인 마호멧의 혈통 중에서 선정해야 된다고 하고, 수니파는 천주교의 교황과 같이 마호멧 혈통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자를 투표에 의해 선정해야 된다고 하는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이 차이는 같은 이슬람국가이면서도 가끔 전쟁을 할 정도로 정통성과 이권이 걸린 양보할 수 없는 이슈인 것 같다.
국가별 종파를 거론 할 때는 터키는 수니파로 구분되지만, 터키 무슬림의 80%는 수니파고, 20%가 시아파라고 하는데, 이들이 공존하는 것을 보면, 일반 무슬림들은 한국의 개신교가 분파가 많지만,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과 같은 입장인 것 같다.
2. “케말 파샤”
터키에 갔을 때 여행가이드가 언급한 “케말파샤” 라는 단어가 낯설지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들어 본 이름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지 안했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귀국해서도 그 이름과 그 인물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어려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일제 강점기 때의 일이다.
집에 서재를 갖춰 놓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으셨던 (송정에 사셨던) 아저씨와 저의 아버님이 자주 대화를 하셨는데, 대화하시는 중에 “케말파샤”라는 말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은 두 분 다 작고하셨지만, 어렸을 때 의미도 모른 채 머릿속에 입력된 그 기억이 60여년이 지난 지금 터키여행을 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케말파샤”의 의미는 ‘케말’ 장군(파샤)이라는 뜻이란다. 이분은 단순히 터키의 장군이라는 존칭 외에 더 많은 수식어가 붙은 이름이 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 투르쿠” 다.
그 의미는 ‘무스타파’는 姓이고 ‘케말’은 이름인데, 중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이 이분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터키족의 관습에 따라 자기의 姓인 ‘무스타파’를 제자에게 증여하고 ‘위대하다’는 뜻이 있는 ‘케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뒷부분에 있는 ‘아타 투르크’는 투르크(터키)민족의 아버지(아타)라는 뜻인데, 국회에서 이 이름을 헌정하고, 다른 사람은 이 이름이나 姓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결의를 했다고 한다. 이분이 죽은 후에는 터키수도인 ‘안카라’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안장하고 석조 건물로 기념관을 만들었는데, 터키여행객의 필수 관광코스에 들어가는 것 같다. 현장에 가보지는 못하고, 버스로 지나면서 보는 外觀관광이지만...
그리고 터키의 모든 화폐. 1터키리라의 동전으로부터 500만 터키리라의 종이화폐 까지 10여종의 모든 화폐에 이분의 모습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시내를 다니면서 동상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아타 트루크의 동상이라고 한다.
터키인들은 국기를 사랑하는 것 같다. 관광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아파트를 보면 난간에 터키국기를 평일에도 계양한 집 몇을 볼 수 있는데, 거의 모든 아파트마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자동차에도 국기를 차창에 붙이고 다니는 승용차를 많이 보게 되는데 한번은 국기와 ‘케말’의 사진을 나란히 붙인 지프차를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모든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인 것 같다.
여행가이드의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19~21세기를 포괄하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설문을 했는데, 첫째는 링컨 대통령이고 둘째는 위에 언급한 ‘아타 투르크’ 라고 한다.
이분이 어떤 일을 했기에 그런 존경을 받는가?
이분은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설립 할 때 초대대통령이었다.
1. 터키공화국을 설립 할 때의 상황은 한마디로 지극히 암담했었지만, 국민들을 규합하고, 궐기시켜 이런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터키공화국을 설립했다. 1차 대전 때 오스만터키(지금의 터키공화국 전신인 오스만 제국)가 독일편에 가세했다가 패전하고 연합국에 가세했던 그리스 등 다른 나라들이 터키 땅을 분할하여 진주 했던 상황에서, 국민군을 조직해서 부패했던 오스만터키 제국을 먼저 제거하고 터키 땅을 점거했던 연합군을 차례로 몰아내고, 터키공화국을 설립했다.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침체되어 있는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내가 터키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라는 말을 만들었으며, 이는 터키 공화국 역사에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명언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노래를 보급했던 박정희 대통령처럼.
2. 헌법을 만들 때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남녀평등)을 보장하는 내용의 근대적인 헌법을 만들었다. 당시 이슬람 전통에서는 여자의 인권은 없었다. 여자는 羊과 같이 남자의 재산정도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남녀평등을 헌법에 삽입했다.
3. 당시 오스만터키 제국 하에서는 이슬람이 國敎이었는데, 국교를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4. 이슬람에서 천주교의 교황과 같은 역할을 하는 ‘칼리프’를 폐지했다. 당시 오스만터키제국은 중동 이슬람국가들의 맹주로서 ‘칼리프’가 터키에 있었는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이것을 폐지했다.
5. 당시만 해도 터키의 문자는 꼬불꼬불한 아랍문자로 국민들이 배우기도 어렵고,
사용하기도 어려웠는데, 과감하게 알파벳 문자를 도입해서 바꾸었다.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이분의 업적은 그 하나하나가 당시의 상황에서는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었는데, 이 일을 성취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이다.
이분의 업적을 다른 면에서 보면, 터키국가와 국민과 터키여자들을 이슬람의 굴레로부터 과감하게 해방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슬람의 종교적 원리와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억압의 굴레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된다는 입장에서 볼 때 말이다.
이분은 이슬람의 전통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이 이분 인생관의 기초가 되어 있었을 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터키의 미래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완전히 새로운 터키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욱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이드에게 이분이 불란서나 기타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일이 있는가? 질문했는데, 없다고 한다. 정말 위대한 분이다.
이분에 대한 기억을 오래도록 갖고 싶어서 이분의 모습이 들어 있는 터키리라 동전 한 개를 일부로 가져왔다.
3. 한국과 터키는 형제 국인가?
“이스탄불”에서, 성소피아 성당을 관람하고, 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터키 중학생들이 와서 자기들이 배운 영어실력을 시험 해 보려는 듯이 영어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등을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정확한 한국말 발음으로“안녕 하세요” 하면서 반가워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한국의 중학생이 같은 상황에서 터키관광객을 만났다면, 터키말로 인사를 할 수 있을까?
터키의 이스탄불 공항에 처음 도착해서 관광버스를 탈 때, 폭탄테러의 첩보가 있다며, 경찰이 검색을 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가이드의 안내가 있었다.
5분도 안되어 가이드가 말한다. “형제국” 코리아에서 왔다고 했더니 검문시간이 단축되었다고 하며 바로 출발했다. 가이드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터키국민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은 확실 한 것 같다.
터키의 수도 ‘안카라’에는 한국공원이 있다. 한국관광객이 꼭 들리는 코스다.
그곳에는 6.25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제일 많은 3만 명 규모의 부대에, 연인원 5만 명을 파견했는데, 그 터키군 중에서 전사한 780명의 이름을 참전비에 새겨 넣은 亭子가 있다.
작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행과 같이 묵념을 하는 동안 왜 저들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났다. 다행히 한국정부에서 생존해 있는 참전자들과 임이 작고하신 경우는 그 유가족에게 매월 200불씩 참전 감사 연금을 드린다고 한다.
이 한국동산의 관리는 터키 정부의 도움 없이 참전자들이 自費를 모아 관리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 방명록을 내놓고 인사하는 나이 많은 관리인이 저곳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인들 중에는 터키를 형제 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형제국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느끼는 것은 형제국의 의미가 양국국민간의 친밀성을 의미한다면, 양국은 형제 국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터키국민들이 한국을 형제 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古代로부터의 역사적인 인연과, 또 하나는 지난 2002년의 월드컵의 인연 때문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AD 300~700년경 고구려가 중국의 수나라 및 당나라와 쟁패 할 때 고구려와 가까이 위치해 있던 돌궐족(지금의 터키족)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중국의 위협에 대비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알려 준 친구의 말로는 이 내용이 터키 역사교과서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돌궐족(터키족)은 그 후 한족의 위협을 피해 쫒기고 떠밀리며, 돌고 돌아 지금의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지난 2002년의 월드컵의 인연을 말하려면, 먼저 터키남자들의 축구에 대한 광적인 열정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월드컵 당시 대구에서 있었던 한국과 터키의 3.4위전경기는 월드컵역사에서 가장 신사적인 게임으로 평가한다고 하는데, 터키가 3위를 했던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응원석에 대형 태극기가 펼쳐지고, 이어서45m나 되는 터키국기가 한국인 관중석이 있는 자리에서 펼쳐질 때 텔레비전 중계를 보던 모든 터키국민이 감격과 흥분으로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고 한다.
자기들 국기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갖고 있는 터키국민들이 예상하지도 못 했는데, 대형 국기가 한국인의 손으로 펼쳐질 때의 감격은 상상을 초월 했을 것이다. 그때 펼쳤던 터키국기가 지금은 터키 국립박물관에 영구보존하기 위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당시 터키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아이디어를 낸 한국인이 누구였는가? 궁금하네.
4. 터키의 명암
“터키의 명암”이라는 제목을 정하고 나서, 스스로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도 아닌 사람이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저 사람은 건강하다, 아니다, 병이 있다. 진단하는 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차피 여행기에 불과한 것이니 구애받지 말고, 써보자.
터키를 여행하면서 첫 느낌은 이 나라는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나 라라는 인상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터키는 세계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속 한다고 했다. 아직 본격적인 개발은 안 했지만, 터키 동부에 있는 석유의 매장량은 거대하다고 한다. 년 간 관광객이 1천만 명이 넘지만, 이 정도의 관광 수입은 터키정부의 관심사가 아니라며, 터키의 풍요로움을 강조했다.
그러나 의문이 생긴다. 넓은 국토 중에서 동부의 산악지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활용 할 수 있는 광활한 땅과, 풍부한 부존자원이 있고, 온난지대의 좋은 날씨와, 아랍권에서는 문맹률이 제일 낮은 양질의 인력이 있으며, 터키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중동과 남부유럽 일대를 지배한 오스만제국이 자기들의 선조라는 역사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나라보다 30여년 앞서 근대적인 헌법을 만든 나라인 점을 생각하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앞서 있어야 하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1/3수준에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우리를 한국에서부터 인솔한 가이드가 설명해 준 터키의 EU공동체 가입의 어려움인가? 아니면, 현지 가이드가 말하는 쿠르드 족(같은 국민이지만, 터키의 동부에 거주하며 언어도 다르고, 自治 형태로 존속)과의 갈등 때문인가?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터키에서 관광하는 동안, 4번의 검색을 받았다. 4회 중 3번은 경찰이, 한번은 군 헌병이 검사를 했다. 첫날 공항에서 폭탄테러에 대비한 경찰의 검색. 그리고 버스로 3,800km를 달리는 동안 교통경찰로부터 과속검사 2회를 받았다. 그런데 경찰의 마지막 검색을 받고 10분도 안되어 군 헌병이 도로에서 버스를 세워 탑승객의 여권을 일제히 검사하는 일이 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외국인의 불법 체류를 검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불법체류는 치안의 문제인데, 왜 경찰이 아닌 군인이 간여를 하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속을 단속하는 경찰의 복장과 여권을 검사하는 헌병의 복장은 한 눈에 뜨일 정도로 헌병의 복장이 고급스러웠다.
우리가 탄 버스 안에는 터키인 버스운전수, 운전보조원, 정부에서 파견한 터키가이드(한국말을 모르는 터키인이 정부에서 파견한 가이드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일행과 동행했다. 감시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현지의 한국인 가이드 합해서 4명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경찰보다 헌병 앞에서 더 긴장을 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군대의 역할이 궁금했다. 귀국해서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결과는 터키에서 군대는 국가의 후견인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터키역사에서 군인은 자타가 인정하는 최정예 엘리트 집단이었다. 오스만터키 제국시절부터 터키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최근까지도, 이 엘리트 군인들은 자기들 기준에 맞지 않으면, 수시로 정권을 갈아치웠다. 1908년에는 군인의 봉급을 주지 않는다고, 들고 일어나 당시의 술탄(황제)을 폐위시켰고, 1913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독재를 했으며, 1923년 터키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아타 투르크”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평온하다가 1960년에는 집권정당을 해체했고, 71년, 80년, 97년 거의 10년 주기로, 국회해산, 정당의 해체, 종교의 국가지배 배제 등의 명분으로 정권을 강제로 바꾸는 쿠데타를 했다. 마치 국가의 후견인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법에 기초하여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군인이 일방적으로 해체시키는 상황에서 군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인정을 받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논리성은 접어두고, 직감적인 생각을 적어보겠다. 먼저 헌법에 대한 내 생각이다.
근대적인 헌법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보장 하려는데 있다. 자유를 보장하려는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다시 말해 근대적인 헌법의 저변에는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있다.
그런데 터키의 엘리트그룹인 군인들이 19세기 초 터키공화국을 수립 할 때 서구의 근대적인 헌법을 借用(차용) 했지만, 이슬람의 정신은 이 헌법을 수용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슬람의 몸(문화)으로 기독교가 만든 옷(헌법)을 입다보니 잘 맞지가 않는 것 같다.
이슬람 나라의 정부는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가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진정한 의미의 “국민의 정부”가 될 수 없다면, 국가의 효율성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를 국민과 언론이 감시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일부 군인들이 감시하는 상황에서는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가이드가 터키공무원들의 부패에 대해 언급하면서 부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예를 들었는데,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공무원의 봉급을 인상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봉급 외의 수입(부정한 수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이슬람의 문화와 전통은 국민들을 권위(정치권력, 이슬람의 권위 등)에 순종하도록 수백 년 동안 습성화 시킨 면이 있다고 본다. 권위에 순응하는 국민, 국민보다 군인의 눈치를 보는 정부, 공무원의 부패를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하는 정부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와 같이 된 배경에는 이슬람의 전통과 문화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터키가 한국보다 경제발전이 낙후한 가장 큰 원인은 이슬람 종교 안에 있다는 생각이다.
* EU 가입이 어려운 터키
터키의 국가적인 당면 과제는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준 회원국 인데 준 회원국이 된지 10년 내에 가입이 되어야 한단다. 3년이 지났고, 남은 기간에 회원국이 될는지는 불투명하다고 한다.
가입하기 위해서는 현재 27개 회원국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큰 장벽이 되는 것이 3가지라고 한다.
첫째는 인접국인 그리스와의 껄끄러운 관계라고 한다. 과거 오스만 터키가 400여 년간 그리스를 점령 통치한데 대한 그리스국민의 반감은 36년간 피점령국이었던 한국의 일본에 대한 반감 이상 일 것 같다. 그리고 현재는 키프러스 섬을 양국이 분할해서 관리하고 있지만, 서로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 하는 입장이 우리의 독도와 비슷한 것 같다. 그리스국민들이 터키의 가입을 환영할까?
둘째는 독일이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베를린에 사는 터키인이 13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도시의 주택지역에서 터키인이 터를 잡으면 생활패튼이 다르기 때문에, 인접해 사는 독일인은 터키인을 피해서 이사를 간다. 그러면 가족적인 유대가 강한 터키인이 고향의 가족을 불러드려, 같이 살려고 하기 때문에, 점차 터키인의 구역이 확대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만약 터키가 회원국으로 가입이 되면 회원국내에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어, 위와 같이 터키인 주거지역이 더 빨리 확산 될 것이고, 이 같은 상황을 국가에서도 통제 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은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셋째로 기존 회원국들 대부분이 기독교성향의 국가들이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이슬람인 터키의 가입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란다.
5. 낙수
여행 안내서에 기록되지 않은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적어본다.
(1) 사방 천지가 올리브나무
올리브나무가 참 많다. 3,800km를 달리는 동안의 절반 정도의 길, 좌우의 산과 밭에 올리브나무가 깔려있다. 올리브나무 열매를 수확 하는 11월에는 손이 모자라기 때문에, 한국에서 70년대 모내기 할 때 학생들을 동원했던 것 같이 터키도, 학생들 까지 동원해서 열매를 딴다고 한다. 열매는 한 개씩 따는 것이 아니라 줄기째 훑어서 딴다고 하면서 가이드가 직접 시범을 보인다. 딴 열매를 큰 맷돌에 갈아서 물이 담긴 통속에 넣어, 올리브기름이 물위에 뜨게 해서 수집한다고 한다. 올리브기름은 세계적으로 건강식품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먹을 때는 生것 그대로 먹어야 한단다. 불이 닿으면, 역효과가 난다고 하는데, 나는 집에서 프라이팬에 올리브기름을 붓고 빵을 구어 먹었는데, 잘못 사용 한 것인가??
(2) 선교 유적지?
우리 일행의 관광은 성지순례가 목적이 아닌, 일반적인 관광이다 보니 성지를 일부로 찾아보지는 못 했지만, 초대교회를 생각하게 되는 몇 곳을 지나쳤다.
사도바울이 2년이나 목회를 했다는 에베소에 들려, 바울 때문에 여신상이 팔리지 않는다고 여신상을 만들던 장인들이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고 2시간이나 외쳤다는 회당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어디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소를 돌아보았다.
로마 때부터 온천이 있었다는 “파묵갈레”로 가는 동안 요한계시록에서 질책을 받았던 “라오디기아”교회가 있었던 곳이라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파란 풀만 보이는 야산지대였다. ‘가파도기아’ 에는 기독교 탄압을 피해서 지하에서 생활하면서 신앙을 지켰다는 지하도시를 돌아보았다.
에베소로 가는 입구에서 “사도 ‘누가’의 묘”라는 간판과 돌들이 쌓여 있는 장소를 보았다.
일찍이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을 지키고, 선교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걸어갔던 장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3)시집갈 처녀를 알리는 방법
터키 농촌지대를 지날 때, 가이드가 농가의 지붕이나 담 위에 유리병이 있는가, 찾아보라고 한다. 유리병이 있는 집이 많았다. 있다면, 시집을 보낼 처녀가 있다는 표시란다. 어떤 집은 4개의 유리병이 있었는데, 4명의 시집 갈 처녀가 있다는 표시란다. 그 표시를 보고, 중매쟁이가 찾아가 결혼 중매를 하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약혼이 성사되면, 유리병을 깨트려 놓는 방법으로 약혼이 되었다는 표시를 한단다. 결혼 할 때 지참금은 남자가 여자 쪽에 지불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혼 할 권한이 있는 남자가 함부로 이혼하지 못하게 하는 목적이라고 한다. 이혼하게 되면 지참금을 돌려받지 못한다고 한다.
(4) 터키는 역사 유적의 보고
가는 곳마다, 로마와 비잔틴제국 그리고 오스만터키제국의 유적과 유물들이 있다. 생생한 역사의 유물과 유적을 보면서 지나 간 역사를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의문이 있었다. 로마의 탄생은 기원전 700년 전이라고 한다. AD 400년경 로마가 東西로 분할되면서 東로마가 비잔틴 제국이 되었다고 한다. 국명은 비잔틴으로 바뀌었지만, 국가의 성격은 종전 로마의 연장이라고 본다는데, 그렇다면 15세기경에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무려 2,200년간이나 로마라는 나라가 지속되었다는 뜻인데, 이와 같이 하나의 나라가 장기간 지속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동양권의 중국의 경우 고대의 하, 은, 주, 같은 나라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晉, 漢, 수, 唐, 元, 明, 淸 등의 여러 왕조가 수백 년 단위로, 교체 되었는데, 로마는 장구한 기간을 존속한 이유가 뭔지 다시 서양사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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