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나라 터키 여행 / 여행기
2008. 4. 8 - 16
moonp
Arthur Kitt 의 Usku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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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kudar가는 길에 비가 내리네 Uskudar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그대의 외투자락이 땅에 끌려 그대를 위한 손수건에 사랑을 담아
내 님이 잠에서 덜 깨어 눈이 감겼네 어느새 내 님이 옆에 있네
우리 서로 사랑 하는데 누가 막으리 우리 서로 사랑 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하얀셔츠 너무 잘 어울려 내 님의 하얀셔츠 너무 잘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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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 날(4월 8일 화, 맑음) 인천 국제공항 - 이스탄불 아타크트르크 국제공항
출발을 위하여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
 
기내식
비빔밥 치킨 & 라이스

이스탄불 국제공항에서 짐을 찿고 있는 일행들..
<2> 둘째 날 맑음 - 이스탄불 / 오벨리스크. 블루모스크, 아야소피아 성당, 톱카프 궁전,
그랜드 바자르
  
오벨리스크
불루모스크 앞에 로마시대의 전차 경기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로 이것은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의해 이집트의 룩소카르나크의 아 몬 신전에서 가져온 것아다. 오늘날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라고 알려진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투트모세 3세 (기원전 1490 ~ 1436)가 카르나크 신전에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또 어떻게 운반을 했는지...아랫부분의 대리석 받침대 4면에는 전차경기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모습과 승리에게 관을 씌워 주는 모습 등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광장은 532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대중의 폭동(?)으로 '니카의 난' 이 발생하여 진압 후에 수천 명을 이곳에서 처형했던 적이 있으며 또한 오스만제국의 시절에도 예니체리 군단의 다수가 역시 이 광장에서 처형된 좀 무시무시한 광장이다.


블루모스크
라는 별칭으로 불려지는 술탄아흐멧 1세 '자미'는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인 1600년대에 건축한 이슬람 사원으로
그 옆에 서있는 천여 년 전 537년에 지어진 아야소피아 성당에 맞서는 사원을 건축한 것이라 한다. 오스만 제국은
이 사원의 건축에 든 비용이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은 이 모스크의 내부 장식이 푸흔색의 기조로 칠해졌던 시대부터 불렸는데, 지금은 원상
에 가까운 색으로 복원이 되어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미나레(첨탑)는 6개로, 본래 술탄의 이름을 딴 사원은 5개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황금(알툰)첨탑으로 지을 것을 명령하였으나 알트(6개)로 잘못 알아들어 6개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관람객들로 촬영기회를 잡기가 어려웠고 또한 가이드의 재촉을 받으면서 촬영한 것이라 만족스러운 그림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중앙 돔은 둘레가 27.5 미터, 높이가 43 미터가 되며 이 중앙 돔을 둘러싼 작은 돔의 피라미드 형태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200개가 넘는 작은 창에는 스테인드로 되어있어 내부를 밝게 해 주고 있다.

아야소피아 성당
그리스어로 '성스러운 예지'를 의미 한다고 하는데 그리스 정교의 본산 이었다고 한다. 11세기 성상 파괴논쟁과 정치적인 상반된 입장(절대적인 교황 권을 갖고 있는 서로마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황제가 다스는 동로마)대립의 골이 깊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가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서쪽의 로마 교회는 교황을 수장으로한 로마 카톨릭과, 동쪽의 비잔티움 황제를 수장으로 한 그리스 정교로 분열되어 동방의 비잔티움제국의 여러 교회는 정교(그리스교)를 신봉하며 독자적인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 당시 문화적인 측면에서 열악한 게르만족에게 성상의 신비함을 보여줘 서로마와 이를 동 로마에서는 성상을 결국 우상으로 판단하고 성상 파괴라는 과정이 있었으며 모든 교회는 서로마의 교황을 정점으로 복종 할것을 요구하는 교황과 교황 권을 가지고 있는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반발로 결국은 황제와 교 회의 정치적 갈등이 분열을 가져 오게 된것이다.
옆에 있는 블루모스크보다도 천여 년도 전인 360년 비잔틴제국 시대의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세워 졌으나 그동안 화재를 입기도 하고, 532년 '니카의 난' 으로 소실되어 그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7 년에 재건한 것으로 비잔틴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대 성당이다.
유스티아누스 1세(527-565)의 치세때인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황금시대를 맞았다. 당시인구가 50만에 이르렀던 콘스탄틴노플은, 황제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며 학자와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덕분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제국의 수도로서 그 위치를 굳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이 곳에서는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탄생되었고, 그 방법과 양식은 제국 전체에 퍼졌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비잔티움 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532년에 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1주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무정부 상태에 빠뜨린 '니카의 반란'이 일어 났다.
반(反)황제파의 원로원 의원까지 휘말려든 대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하기아소피아와 하기아 이레네 등 이때 파괴된 성당을 복구하고 개축하는 한편, 시가지를 서쪽으로 더욱 확장했다한다. 이 때 호화로운 새 궁전도 지어 졌지만, 지금은 일부 유적만이 가까스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후, 1453년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어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그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게 되었다. 술탄이라 불리는 오스만 제국의 수장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뒤에도 이스탄불에 남
아있던 시민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법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하는 한편, 제국 각지에서 이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상징이자 그리스 정 교회의 총 본산으로 군림한 이 대성당을 콘스탄티노플 최초의 모스크로 바꾸었다.
모스크로 개조된 대성당에는 미나레트와 마드라사가 설치 되었다. 또 내부의 둥근 천장이나 벽면을 뒤덮었던 황금 빛 모자이크의 일부가 하얗게 덧칠되어 [코란]의 문구가 씌어졌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에 대한 관용으로 자치권을 부여한 결과로 이 귀중한 보물이 파괴 되지않고 보존이 된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슬람은 과격하다는 선입견이 있으나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오류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우리가 흔히 정통하다는 말을 영어 로 '오소독스'하다고 표현하는데 그리스정교를 영어로 Greek Orthodox 라고하는것에서 알수가 있겠다.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을 신이 지상의 군주로 인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앙심으로 탄생 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오스만 제국의 점령과 함께 가장 먼저 모스크로 바뀐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터키의 술탄제를 폐지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4년에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종교와는 관계없는 박물관으로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슬람교도 사이에는 다시 모스크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 보다도 약 천년이나 먼저 지어진 것으로 그 당시 제국의 각지에서 석재를 운반하여 건축하였는데 실제로 내부의 기둥 중에 녹색기둥은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그 곳에는 기둥 하나만 남아 있다)에서, 붉은 얼룩의 기둥은 레바논의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성당의 내부는 아직도 복원을 하고있는듯 하며 양쪽 기둥 위에 둥그런 문양은 오스만제국 시대에 이슬람의 알라를 경배하라는 뜻이라고...
 
2 층으로 가면 비잔틴 시대의 聖畵들이 황금 모자이크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시대에 모스크로 사용하기 위하여 위에 횟칠로 덮었다 한다. 그래도 파괴는 하지 않은 덕분에 현재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랜드 바자르

이 분수는1898년 이스탄불을 방분했던 독일의 카이세르 빌헬름 황제가 이곳의 극진한 환대에 대한 보답의 인사로서 선물한 것이라고...

톱카프 궁전
궁 입구

바코드가 수록되여 있는 현대적인 입장권

궁내에서 사용하던 그릇


고궁에 관광하는 초등학생들
<3>세째 날 - 앙카라/한국공원. 아타트르크의 묘, 소금호수, 가파토기아/괴레메,
동굴교 회, 우치사르를(비둘기 집), 지하도시 ,벨리댄스 무도장

한국공원
준비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행 모두 엄숙한 마음으로 6.25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영령 앞에 고개숙여 묵념을 하였다.

터키 앙카라 시에 있는 한국공원 준공 기념비

망 명 록

아타트르크의 묘소
터키 공화국의 國父로 추앙된 케말파사가 안치 되어 있다

소금호수


세계 최대의 소금호수로 염분의 함유량이 약 30%란다.
호수 주변에는 소금의 결정체가 쌓여 있다


동굴식당
가파토기아에서 점심을 먹기 위하여
이 동굴식당에 들어갔다 - 입구
 
동굴식당 내부의 광경
 
점심에 나온 메뉴의 일부와 식당 전체 광경

터키에서 제일 맛 있다는 쫄깃 쫄깃한 아이스림~~~ 글세 ????
 
민속춤 및 밸리댄스
저녁을 먹고 우리일행 모두는 지하에 있는 동굴 무도장으로 이동하여
터키의Fork Dance 및 Bally Dance를 관람하였다.
<4> 네째 날(4월 11일 금요일 맑음) : 콘야 - 안탈야
 
하늘에서 雲石이 떨어저 웅덩이가 되었는데 항상 물이 뒤에보이는 폐허가 된 건물은 예날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이
지금 보이는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물은 농업용수 곳을 왕래하던 상인들이 묵었던 여관방과 馬房이 었는데 지금
로 활용 한다고. 복구가 한창이다

오랜 시간의 버스여행 후 오후 1시 넘어 도착한 콘야의
점심을 위한 뷔폐식 식당으로서 많은 관광객으로 만원이다.

점심식사후 2시 30분경에 급한분이 계셔 들른곳에 있는 개인 모스크

오후 3시 30분경 아직도 잔설이 많은 평균고도 3000m가 넘는 험준한 이산맥을 넘어야 했다.
산맥의 고개에는 1850m라는 표지판이 있다.
<5>다섯째 날 맑음 안탈야/시내 해변, 파묵깔레/히에라폴리스, 木花 城(足浴)

안탈야 시내에 있는 유적

안탈야의 지중해
거울 보다 더 잔잔한 바다다. 한척의 요트가주인을 기다리나..

지중해성 기후로 야자수가 욱어져 있다

멀리 지중해를 보면서 망중한....

파묵깔레에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아래 사진부터 세계유산으로 되어있는 파묵칼레의 히에라폴리스 유적지의 관광이 시작이다.
'성스러운 도시' 라는 뜻의 히에라폴리스는 기원 전 190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중 한사람이 세운 페르가몬왕조의 시조 텔레포스의 아내 히에라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라 하는 설과 르리기아 人등 이전에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은 이곳의 온천지역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히에론 신전을 지어 이것이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폐허가 된 히에라폴리스 유적들

석관(무덤)
라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석관들이 보이는 곳이 네크로폴리스(죽은자의 도시)라고 한다. 매크로폴리스의 열려진 무덤은 예로부터 파묵칼레의 석회온천이 병을 고치는데 좋다고 하여 많은 병자들이 이곳을 찾 아 왔었기에 치료 중에 사망하면 여기에 묻혀서 이곳에는 천개가 넘는 석관들이 쌓이다 보니 점점 도시에 붙어서 도시의 입구와 거의 붙어 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로 부터 비잔틴제국의 무덤양식 까지 다양한 묘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비잔틴 시대에 크리스트교의 중요한 중심지였던 이곳은 11세기에 터키인이 진출하여 전쟁터로 변하여 14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셀주크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1354년 대지진이 이곳을 강타하여 폐허가 되었다.

히에라폴리스의 북쪽 문으로 들어가기 전의 욕장으로 후에 교회로 개수되었다 한다

溫泉 水路
석회성분이 함유된 온천수가 지하에서 흘러나와 이수로를 통하여 흘렀다

木花 城
멀리서 보면 목면을 뭉쳐 놓은 듯이 보인다하여 목면의 성이란 뜻의 파물칼레는 석회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세월동안 흘러 내려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계속 쌓여 져서 특이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패인 곳에서 온천욕을 하였다한다.

석회 성분의 온천수가 담겨저 있다
 

파묵깔레의 이지역은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 되여 있슴
<6>여섯째 날 맑음 보드룸/ 해변 및 바자르, 쿠사다시/휴양도시

아침 8시 정각에 파묵깔레에 있는 이 호텔에서 출발하여 오늘도 보드룸을 거쳐
구사다시까지 약 8시간 이상 가야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꽃을 피우는 듯 보인다.... 고속화 도로부근에 솟아오르고 있는
양귀비 꽃호텔 화단에 보이는 양귀비꽃인데 자연적인 분출수 지대
마약성분이 추출되지 않는다고 ........

끝이 안보이는 잔잔한 호수이지만, 이 호수에도 고기를 언제 잡는지 떠 있는 배가
한척도 보이지를 않는다

모두들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할까....
 
이 호수에서 잡았다는 민물고기 튀김 요리가 오늘의 주 메뉴다
 
또 $1씩을 들고 바삐......

보드룸으로 가는 도중에 있던 아름다운 도시

검문소
보드룸 입구 고개에 위치한 검문 초소에서 우리일행이 탄 버스는 물론 관광객(우리)의
여권을 검사 받았다.
또 다른 차량에 운전기사가 검문소 초소에서 얼굴을 숙인체 심각한 표정을 하고있다.

보드룸은 지중해 해변의 휴양도시로 대부분의 집이 그리스나 이태리식의
하얀집 들이다

이 많은 배(요트)들이 여름 휴가철에는 빌리기가 어렵되요

정박중인 유람선들

그 중에도 낚시로 망중한을 달래는 강 태공님..

부두 뒤편으로 형성되어 있는 옷 가게

시장 골목길

풍성한 지중해성 과일

터키의 전통음식 도넬요리
여행 오기 전부터 한번 먹어 보고 싶은 요리 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
그래서 사진만 한장 실례.....

부두가의 먹자 골목


 
도로 포장이 돌로 잘 된 보드룸의 거리 풍경
<7>일곱째 날 맑음 에페소스/아르데 신전, 원형 경기장, 쉘시스 도서관

오늘도 힘차게 출발을 서두른다

누가의 묘를 알리는 한글 표지판

묘 지

에페스 유적지
BC1500~1000 사이 히타이트-리디아 페르시아-그리스
(알렉산더대왕의 헬레니즘 시대)그리고 로마에 이르는
문화유적지 인 셀주크의 에페소 유적지(에피소스)는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도시로
터키를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가장 인기 있는관광 명소 중 하나라 한다.

당시 25만 명의 인구가 산 로마시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대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헤라클레스의 문
헤라클레스 상이 있는 헤라클레스의 문으로 4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원래는 2층으로 된 개선문으로 현재 보이는 기둥은 아치의 위에 있었던 6개의
기둥 중에 2개이며 헤라클레스가 그의 상징인 사자 가죽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크레테스 거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길을 계속 내려가면 셀수스 도서관이 나온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AD 138년 경에 에페소스(에페소) 시민들에 의해 지어저 로마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졌다 한다.
최근 복원된 이 신전은 신전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돌 담 위에 신과 여신들의 부조가 가득하며 4명의 로마
황제의 상이 꼼꼼히 들어차있다. 또한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 중 2개의 기둥을 잇는 아치는 에페소 유적지에
서 가장 아름답다는 펑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 문의 아치 위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티스(운명의
여신)가, 두 째 문에는 메두사의 모습이 부조 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
AD 2 세기경에 로마시대 아시아지역의 통치자였던 셀수스의 무덤을 그 아들이 세우려다
허가를 받지 못하여 대신 도서관 으로 지은 것으로 발견 당시 1만 2천권의 장서가 습도/온도를 최적으로
유지되도록 과학적인 구조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유적은 에페소의 유적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며 전면의
1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진 건물 정면의 출 입구 양쪽에는 4 개의 아름다운 여성 조각이 새겨져 있
는데 각각 지혜, 사색, 학문 그리고 미덕을 상장한다고 한다. 거의 원형이 보존되어있으며 전면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유적이다.


대원형 극장
2만 5천명의 관중이 들어올 수 있는 대 원형극장으로 뒤편의 언덕 경사와 비슷한 계단의 설계로 무대의 음향이
잘 전달되는 구조로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같 은 원형극장은 터키의 곳곳의 유적지에서(도시를 이루고 있는)볼 수가 있었다

이슬람 성당 내부
 
우리일행의 패션쇼 모습

폐허가 된 유적들

고대에 수세식 변기
이 변기는 위쪽의 목욕탕에서 쓰고 버린물로 청소가 되는 수세식 변기
<8>마지막 날 가나깔레/ 트로아의 모마, 이스탄불/돌마 바흐체 궁전, 보스포러스 해협, 위스큐다르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이번 터키 여행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Canakkale에 호텔를 나와서
오늘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쪽 터키에 마지막 관광지인 전설의 고장 TROIA를 찾아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트로이 木馬
전설의 목마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보고, 그 목마 안으로 3층 까지 올라가 보고..

유네스코에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여 있는 木馬 다

다르다넬즈 해협을 건너 유럽쪽 터키 이스탄불로 가기 위하여 정기 여객선을 탔다

돌마 바흐체 궁전 정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인 압둘 메지드 1세가 19세기 중반에 건축한 것으로 프랑스인 기사가
내부장식을 맡았다.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화려함이 프랑스의 베르샤이유 궁전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궁전 앞 정원의 연못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앞에 꽃 시계가 보인다 .

근위병 교대식
궁중을 경비하는 근위대의 교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람선에서 본 돌마 바흐체 궁전
마르마라 해변 (보스포러스 해협 가)에 총 600여미터의 규모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궁전에는 홀이 18개, 방이 332개, 6개의 목욕탕, 68개의 화장실이 있으며,
이궁을 장식하기위하여 14톤의 금과 은 40톤이 소요
되었다, 내부장식이 화려하다

샹들리에
높은 천장은 36 미터나 되며 큰 홀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선물인 무게 4.5 톤의 상들리에는
750개의 등이 있다.
이는 보헤미안 유리와 바라캇 수정으로 되었다.
둘메지드 술탄에게 선물하였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장식 되어 있다.

샹들리에

넓은 홀에는 4,455평방m 크기에 카펫이 깔려 있다. 이겄은 손으로 짠 헤러켓(마을명)카펫이다.
 
궁내에서 술탄들이 사용 했다는 황금 식기및 황금 茶器들
시계탑
궁 밖에 시계탑은 프랑스의 사르키스 발얀의 작품으로
높이가 27m이다. 시계탑 4면에는
각각 아랍어 숫자로된 프랑스산 시계가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흑해에서 지중해로 연결되는 마르마라해까지 약 30킬로의 거리라고 한다.
해협의 좁은 부분은 660미터 밖에 안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이 해협은 옛날부터 종교와
정치세력 간의 다툼이 잦았던 곳이다.
터키는 EU가입을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며, 그 자신 유럽으로 인정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나 유럽측에서는 그들의 회원으로 받아주기를 꺼리는 눈치라고 한다. 물론, 표면적으로
는 정치적인 이유(사이프러스)와 경제력의 차이를 들고있다고는 한다.
사진의 오른쪽으로 더 내려간 곳이 아시아측의 '위스큐다르' 라고 하는 제목 의 노래가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이스탄불의 대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가 보스포러스 해협을 가로 질러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는 다리는 2개가 있는데,첫 번째 보스보포러스 대교는 1973년 터키 독립 50주년기념으로 세워?으며총 길이 1.560m, 양 교각 사이의 길이가 1.074m,높이 64m이고, 교량폭 33.4m(5차선)이다. 두번째 다리는 파티흐 술탄메흐메드 대교(정복자 메흐메드 황제의 다리)로 1988년에 개통 되었다. 현재 현수교로는 세계에서 다섯 번 째로 긴 다리이다, 교각간 길이 1.090m, 높이 64m, 교량폭 39.4m(6차선)으로, 아시아 - 유럽쪽으로 갈때에는 무료이고, 유럽에서 - 아시아 쪽으로는 통행료를 받는다.

루멜리 히사리 요새

유람선에서 본 구 시가지(유럽)

유람선에서 본 신 시가지(아시아)

고급주택들
이스탄불 대교 아래 유람선 관광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었다
2008. 4. 8 - 16 moo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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