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KEY 2008. 4. 8 - 16 < 8박 9일 >
문 일 남 집 사 이 경 자 권 사
목 차 Ⅰ. 관광지 정보
1. 국가정보:국기/지도 2. 국 가 개 요 3. 지 리 4. 역 사 5. 기 후
6. 사 회 / 문 화 7. 종 교 8. 사회의 관습 9. 음 식 10. 관광 안내소
11. 시 차 12. 통화 및 환전 13. 전 압 14. 전 화 15. 우 편
16. 인터넷 사용 17. 축제 및 국경일 18. 현지 연락처 19. 한국내 대사관 20. 한국으로 전화하기
21. 여권 / 비자 22. 입국 / 출국심사 23. 교 통 24. 기 타
Ⅱ. 요 도 Ⅲ. 주요지역 정보 Ⅳ. 터키여행을 다녀와서(기행문)
Ⅰ. 관광지 정보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
▷ 역사의 나라....터키 ◁ 1. 국가정보 터키국기
터키지도 2. 국가개요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터키와 우리나라 사이에 흐르는 긴밀한 감정은 터키가 단순히 우리나라 전쟁의 참전 국가였다는 사실 이상의 것이었다. 축구에 열광하는 나라 터키는 에덴동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로부터 노아방주의 잔해, 아브라함의 거주 지역이었던 ‘하란’등 성서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온 나라이다. 이외에도 성서상의 유적과 사도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로마 유적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로도 손꼽히고 있다. ● 국가 명 : 터키 공화국 (Republic of Turkey) ● 면 적 : 779,452㎢ (한반도의 3.5배) - 아나톨리아(Anatolia, 아시아) : 755,688㎢ (97%) - 트레이스(Trace, 유럽) : 23,764㎢ (3%) ● 위 치:북위 35 ~ 42˚, 동경 25 ~ 45˚에 위치 - 아시아대륙의 서부에 위치, 유럽대륙의 동남부와 연결 -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와 다다넬즈 해협에 의하여 트레이스 반도(유럽 부분)와 아나톨리아 반도(아시아 부분)로 구분 -북쪽은 흑해, 동쪽은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남쪽은 이라크, 시리아 및 지중해, 서쪽 유럽 부분 영토는 그리스 및 불가리아와 접경 ● 인 구 : 7,071만 명 (2003년) ●민족구성:터키족(90%),쿠르드족(약1,000만 명으로 추정), 아랍인 36만, 아르메니아인 5만, 기타 그리스인, 유태인 등 ●수 도:Ankara시(인구: 약 400만명)-주요도시 : Istanbul, Izmir, Antalya 등 ● 언 어 : 터키어 3.지리 총 면적은 780,5800㎢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에게 해, 지중해, 마르마라 해, 흑해를 접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나 뉘어 진다. 터키는 위치에 따라 흑해, 말마라, 에게 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쪽 아나톨리아, 남동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4. 역사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점으로 터키 민족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 여러 민족들이 교류하였으며,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BC 6000년경 아나톨리아 원주민의 정착지로 농경취락유적을 발견하여 이곳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BC 3000년경 청동기 문화, 1650년에 인도 유럽어 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 인들이 점령하면서 히타이트왕국 세워졌고, 이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철기문명을 꽃피운다.
히타이 왕국은 강성한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다가 BC 1200년경에 트로이전쟁을 통하여 트로이가 그리스에 멸망할 무렵에 히타이트왕국도 프라키아에서 이주한 트라기아 인에게 멸망당한다. BC 8세기 그리스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고, 밀레투스ㆍ크니도스ㆍ시노프 같은 도시들이 형성되었고 BC 730년 내륙에 리디아 왕국이 자리 잡았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BC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의하여 점령 당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의 식민도시들과 소아시아 지역을 거듭 점령한다. 200여년 정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다가 폰토스왕국 등 소왕국들에 의한 이전 투구가 거듭되었다가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에 있다가 BC 1세기 로마 제국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로마 식민통치는 300여 년 간 계속되고, 395년 로마 제국이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스탄불의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에 속한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웃의 이슬람 제국의 위협에도 11세기까지 계속 유지된다. 11세기 셀주크투르크족은 점차 세력을 중앙아시아에서 비잔틴 제국을 제압하면서 아나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지만 14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당하고,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해 영토 확장에 앞장선다. 13-14세기 오스만 족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을 영토로 삼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에 포함된 국가들을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은 수도를 이스탄불로 개층하고, 유프라테스 강, 헝가리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16세기 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및 동유럽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한다. 오스만제국은 술탄 술래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후 정치적, 행정적, 재정적 으로 퇴보를 거듭한다. 1718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하였고, 러시아에서는 1783년 크리미아를 합병시켰다. 19세기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하면서 통치권을 잃었고, 19세기 말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 분쟁으로 지방자치를 허용했던 비이슬람 종교자치제가 붕괴되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학살이라는 비극과, 패전으로 해외 영토를 잃고, 연합 군 측의 터키 불 할 론을 야기했다.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의 케말 파샤 장군이 이끈 군부와 지식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술탄국왕을 해외로 추방함으로써 1923년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터키공화국" 이 탄생되었다. 케말 파샤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를 단행하였고 근대화정책을 추진, 경제, 정치, 대외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케말 파샤는 "터키의 아버지"로 추앙 받게 된다. 1938년 케말 파샤의 사망으로 불안정한 정세와 경제는 어두운 조짐을 보였지만 의회정치 및 다 당 제을 정착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유지하였고, 1952년 NATO에 가입, 1953년 발칸 협정의 조인 국이 되었고, 1955년 바그다드 조약을 맺었다. 1959년 그리스와 키프로스 분쟁을 해소하는 한편 1960년 군부 쿠데타를 계기로 불안한 정세를 보였으나 1961년 터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1963년에 유럽 공동시장의 준 회원국이 되었다. 5. 기후 터키의 기후는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이 되는데 에게 해와 지중해 연안부인 남해와 서해는 7월 평균 최고 기온이 섭씨 25~30도로 지중해성 기후이며, 흑해 연안지대는 따뜻한 여름과 온화 한 겨울이나 다우지로 연평균 강우량이 2,438 밀리미터에 달한다. 북동부 고원지대는 여름은 덥고, 겨울은 평균 섭씨 -12도로 혹한을 보이며, 중앙 고원지대는 여름은 온난건조하고 겨울은 춥고 습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터키는 봄과 가을이 짧은 편이다. -내륙지방은 대륙성 기후이며 해안지방은 해양성 기후 -지중해 및 에게 해 연안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서 여름은 대체로 고온건조하며, 겨울은 온화하고 다습함(연평균 기온 18~20℃) - 흑해연안은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서 연중 고른 분포의 강우량(연평균 2,500㎜) 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온의 일교차가 거의 없음(연평균 22~24℃) -북동부 및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대륙성 기후를 보이고 있어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림. 1~2월이 가장 추우며, 겨울철 평균기온 은 0~10℃임 - 봄,가을이 짧으며, 4월, 11월, 12월이 우기에 해당 - 평균 고도 : 902m -평균기온:11.8℃ (최저: -24.9℃, 최고: 40.0℃) - 평균습도 : 60% - 연평균 강우량 : 367㎜ - 특기사항 :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함 6. 사회 / 문화
● 국경일 : 10.29 (터키공화국 선포일) ● 정부형태 : 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내각제 -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 임기 7년의 단임제 - 대통령(국가원수) :Ahmet Necdet Sezer(아흐멧 네즈뎃 세제르) -총 리:Recep Tayyip Erdo an(레젭 타입 에르도안) - 외교장관 : Abdullah G l(압둘라 귤) ● 의 회 : 단원제(임기 5년, 의석 550석) ● 주요정당 :정의 개발 당(AKP), 공화 인민당(CHP), 정도 당(DYP), 모국 당(ANAP), 국가 행동 당(MHP) ● GNP : 2,994억불(2004년) ● 1인당 GNP : 4,172불(2004년) ● 외채잔액 : 1,532억불(2003.9월) ●대외무역 : 수출 628억불, 수입 972억불(2004년 잠정) ● 경제성장률 : 9.9% (2004년) ●환 율: US$ 1 = 1.31 YTL 터키리라(2005. 2월 현재) ● 물가 상승 율 : 9.32% (2004년) ● 실업 율 : 10.3%(2004년) ●공휴일 : 국정 공휴일과 종교 공휴일이 있으며, 이슬람국가이지만 금요일은 근무하고, 토·일요일이 휴무일임 <국정 공휴일> · 신정(1.1)
· 국가주권 및 어린이 날(4.23) ·청소년 스포츠의 날(5.19) ·승전기념일(8.30) ·공화국 선포기념일(10.29) <종교공휴일> (매년 이슬람 月曆에 따라 날짜 변동) ·쉐케르 바이람(Candy Holiday, End of Ramadan) ·쿠르반 바이람(Sacrifice Holiday, Feast of the Sacrifice) ● 국제기구가입 : UN(1945.10), ILO, FAO, UNESCO, WHO, IFC, IDA, IMF, OECD, UPU, NATO, WTO 등 7. 종교 터키는 인구의 99%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지만 그밖에 기독교, 유태교, 그리스정교 등 신앙의 자유이다. - 헌법상 정치와 종교 분리 8. 사회, 관습 한국 전쟁 참 전 때 맺은 인연을 계기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이는 터키인들은 소박하고 친절한 미소가 우리나라 사람들과 많이 닮아있다. 맹위를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후손으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체면치레를 많이 하는 편이다. 성격적인 면에서는 정열적이고 다혈질적인 면을 보이나 서두 르지 않는 편이다. 또한 터키 국민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 하다. 9. 음식 터키의 음식은 세게 3대 음식에 들어 갈 정도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 적인 음식이 바로 '케밥’으로 마치 우리나라의 김치처럼 케밥의 종류만 해도 수 백 가지에 이른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먹게 되는 케밥이 바로 쉬쉬 케밥, 이스켄달 케밥 등이 있다. 10. 관광 안내소 터키 주요 도시마다 관광 안내소가 있긴 하지만 관광 안내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해 주는 것이 없다. 그저 필요한 팜플렛을 챙기고 나면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난다. 11. 시차 GMT+2 시간(한국보다 7시간 늦음 : Summer time시 6시간) 12.통화 및 환전 터키의 통화단위는 터키리라(TL)이다. 지폐는 50,000, 100,000, 250,000, 500,000, 1000,000, 5000,000가 있고 주화는 1,000, 2,500, 5,000, 10,000, 25,000, 50,000이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신용카드는 아메리카 익스플레스, 유로카드, 다이나스 클럽, 비자, 마스타카드이다.
터키에서 환전 시 한 가지 유용한 팁 한 가지는 환전을 가능하면 늦게 하라는 것이다. 환전소가 있다고 간주되는 대도시라면 환전을 매일 매일 쓸 만큼만 하고 다음날 다시 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터키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하루에도 몇 번씩 달러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여행 기간 중 쓸 돈을 초기에 한꺼번에 바꾸는 것보다는 자주 바꾸는 것이 다소나마 환율에 유리하다.
여행자 수표의 경우 관광지에서는 우체국에서 환전이 가능하나 신분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일반 은행이 영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환전소(도비즈, doviz)에서는 커미션을 받지 않는 높은 환율로 환전을 할 수 있다. 관광지에 있는 환전소는 심야까지 영업을 하고, 특정 은행에서도 환전이 가능하다. YTL= 1.6$ = 2.0유로 정도로, 1YTL ≒ 650원 정도 13. 전압 220V를 사용. 14. 전화 전화카드식 공중전화와 제톤(jeton)이라고 불리는 코인 식 공중전화가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3가지 종류의 코인과 전화카드는 우체국이나 가판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데, 국제통화를 해야 할 경우 우체국의 국제전화 서비스를 이용하면 가장 저렴하게 통화를 할 수 있다. 15. 우편 PTT(Post, Telephone, Telegram)라고 씌여진 노란색 간판이 걸려 있는 곳이 우체국이다. 일반 우체국의 경우 영업시간은 08:30~12:30, 13:30~17:30 (월~금)으로 일반 관공서와동일하지만, 08:00~24:00 (월~토), 09:00~19:00 (일)까지 영업을 하는 특별우체국도 소수 있다. 일반, 등기, 속달 우편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시내 우편물의 경우에 배달기간이 보통 3, 4일이 소요되며 한국까지는 2주 정도가 걸린다. 간혹 일반 우편물의 배달이 지연되거나 분실되는 등의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16. 인터넷 사용 이스탄불이나 안탈랴 지방과 같이 외국인들이 몰리는 도시에서는 인터넷 사용이 아주 어려운 편은 아니다.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서는 이메일 체크 정도는 가능하다. 17. 축제 및 국경일
● 축제 1월 세커 바이라미(Seker Bayrami) 축제 12월과 1월에 걸쳐 한 달 동안 진행되는 라마잔(Ramazan)기간이 끝나는 마지막 3일 동안에 행해지는 축제이다. 축제 기간 동안 아이들은 이때 집집마다 사탕 등의 과자를 얻으러 다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 동안 만찬을 하고 카드를 주고받으며 사회자선단체에 많은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12월 쿠르반 바이라미(Kurban Bayrami) 축제 아브라함이 신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 념하는 축제로 터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축제이다. 12월 달에 4일간 행해지며 희생이라는 의미의 쿠르반은 코란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터키인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른 아침 양을 잡아서 친지 가족들과 함께 만찬을 한다. ● 국경일 1월 1일 - 신년 4월 23일 - 독립기념일, 어린이날 5월 19일 - 아타취르크 기념일, 청소년의 날 8월 30일 - 승리기념일 10월 29일 - 터키공화국 선언기념일 터키의 公式 曆은 유럽과 같은 太陽 曆이지만 그들의 축제는 무슬림 曆인 히즈리(Hijri : 태양력보다 11일이 짧다)를 따라 이루어진다. 종교적인 공식 축제는 세커 바이라미와 쿠르반 바이라미 두 개다. 18. 현지 연락처 ● 한국대사관 -주소:AlacamSok.No.5,Cinnah Caddesi,Cankaya, Ankara 06690, Turkey - 전화: +90-312-468-4821 - 팩스: +90-312-468-2279 - 이메일 : turkey@mofat.go.kr - 홈페이지: http://www.mofat.go.kr/turkey - 근무시간: 월~금요일 09:00~12:30, 14:00~17:00 (일주일단위로 공관원의 공휴일 당직근무 실시)
●한국으로의 수신자부담 신청번호 : 00800 + 828282 + 전화안내원이 나옴
19. 한국내 대사관 ● 주소 :서울용산구 서빙고동 4-52, 비비안 Co. 4층 ● 전화 : 02-794-0255 ● 팩스 : 02-797-8546 20. 한국으로 전화하기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 : 0또는9번(외부전화 접속, 호텔마다 확인 필요)+00+82+0을 뺀 지역번호 + 집 전화번호 ●공항 또는 시내의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를 이용할 경우 :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21. 여권 / 비자
터키와 우리 나라간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있기 때문에 관광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비자 없이 여권만으로도 90일간 체류할 수 있다. 취학 및 유학 목적의 장기(90일 이상) 체류 희망자는 주한 터어키 대사관에서 사증을 미리 발급 받고 터키에 입국해야 한다. ※ 장기비자신청의 경우 구비서류 : 신청서, 여권용 사진 2매, 여권, 입학 예정 학교에 가서(학생비자),터키 주재 단체로부터의 허가서(사업용 비자) 22. 입국 / 출국심사 ● 출입국 심사 가. 마약·무기 및 포르노 필름의 반입 금지 나. 문화재 및 골동품 반출은 불가 다. 여행자의 휴대품 통관품목은 아래와 같음 개인 일상용품 및 의복류, 운동기구, 책, 휴대품 타자기, 악기 1대, 카메라 1대 및 필림 5통, 비데오 카메라 1대 및 카세트 5개, 라디오 1대, 담배 2박스, 시가 50개, 엽연초 1kg, 주류 100cc 5병 또는 70cc 7병 라. 취업 및 유학 목적의 장기체류자는 치안국외사과에서 1년 단위의 거주허가증(Ikamet Tezkeresi)을 발급받아야 함. 체류허가 연장 신청 시 소지 여권의 유효기간이 1년 이상 남아 있어야 함 마. 취업 목적으로 거주하려고 할 경우에는 재무청 외국인 투자국(Hazine M ste arl,Yabanc Sermaye Genel Mdrl)으로부터 노동허가(1년 혹은 2년 단위로 갱신)를 받아야 함 ● 외환 신고 가. 입국 시 외환소지 한도는 제한이 없으나, $5,000 이상일 경우 입국 시 신고하여야 재 반출 허용 나. 신용카드(Credit Card)나 수표(Cheque Books) 사용은 고급호텔, 백화점, 식당 등을 제외하고는 일반화되어 있지 않음 23. 교통 우리나라에서 터키의 첫 관문은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중동과 유럽을 연결시킨다. 우리나라에서 이스탄불까지는 터키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이 공동운항 방식으로 인천-이스탄불 직항을 운항중이며, 그밖에 직항 편으로 대한항공, 경유 편으로 에어프랑스, 루프트한자, KLM네덜란드항공, CATHAY PACIFIC, 싱가폴 에어라인 등이 항공기를 운항하고 있다.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비롯한 전국 각지는 THY항공과, 철도, 버스 등으로 연결되어 있어 각지로의 이동이 편리하다. 기차를 이용해 육로로 터키에 입국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그리스를 경유하여 입국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비용이 적게 든다.아테네발 이스탄불 행 국제 열차가 매일 아침 7시 아테네 라리시스 역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유레일패스는 그리스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 항 공
한반도의 3.5배 이상의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는 터키인지라 터키 내에서 이동하는데 있어서도 늘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국내선 항공 노선이 상당히 발달해 있으며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수도인 앙카라, 이즈미르 등을 연결하는 항공 노선이 하루에도 수차례 각 지방으로 출발하고 있다. 한국에서 터키에 입국하는 첫 관문은 이스탄불입니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는 터키항공과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이 취항하고 있다. 터키항공: 전 세계 주요도시에서 앙카라, 이스탄불, 이즈미르, 안탈랴, 아다나, 트라브존, 달라만 까지 국제선 정기편이 운항중입니다. 국내선 또한 각 공항과 국내주요도시를 연결 ● 기 차 터키의 기차시설은 버스에 비해 낙후되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앙카라와 이스탄불 구간의 기차는 시설이 좋다.
● 버 스 비행기가 터키 내 상류층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라면 장거리 버스는 터키 현지인들과 주머니가 가난한 배낭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교통편이다. 비교적 도로 사정이 좋고 버스의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어 이용하는 데 있어서 불편함은 없다.
- 시내버스 대도시의 시내에서 이동할 때,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수단입니다. 대개 시에서 운영하며, 요금을 현금으로 받지 않고 버스표로 받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의 가판대나 버스표를 취급하는 가판대 등에서 버스표를 구입하여 사용해야한다. - 장거리 시외버스 터키는 버스시스템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각 지역으로 이동시에 주로 버스를 이용하게 됩니다. 수 시간에서 꼬박 하루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이동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버스 차량이 신형이고 휴게소에 자주 들르며, 이동하는 중간에 차장이 음료와 간식 등을 서비스해주므로 큰 불편함은 없다.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는 터키의 거의 모든 지역을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요금은 각 구간, 버스회사(Goreme, Kamil Koc, Kapadokya, Metro, Pamukkale, Ulusoy, Varan 등 다양합니다)에 따라 다릅니다. 티켓은 시내에 있는 버스회사 사무실이나, "오토가르(otogar)"라 부르는 버스터미널에서 구입할 수 있다. 티켓을 예매해두는 것이 좋다. 많은 회사가 시내에서 오토가르 까지, 또는 오토가르에서 내려 시내까지 차량으로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해주고 있으므로 잘 이용하면 편리하다. - 돌무쉬(미니버스) 도시와 도시 간을 연결하는 교통편이라기보다는 도시 주변의 외곽을 주로 도는 미니버스를 지칭한다. 요금은 타고나서 계산한다. 노선은 있지만 별도의 정류장이 없다. 지나가는 돌무쉬를 향해 손을 들면 세워주고, 기사에게 내려달라고 한다.
24. 기 타 터키인들은 친절하고 순박한 경향이 있어 여행하는데 있어서 별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가끔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사기나 약물을 이용한 강도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터키가 이슬람 국가 이긴 하지만 여성들에겐 개방적이다.
이슬람 여성들을 상징하던 차도르 같은 스카프도 두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연애도 즐기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닷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미니스커트나 탱크탑과 같은 노출심한 복장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Ⅱ. 요 도
Ⅲ.주요 지역정보 * 이스탄불 *
도시정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역할을 다하여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 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 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지 기 때문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주거지역이 되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유적지가 모여 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역은 유럽 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가 모여 있고 모두 이 지역에 몰려있다. 히포드럼
고대 경마장 터이다. 트랙 중앙의 스피나 위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지고 들어온 기둥, 조각상, 해시계, 오밸리스크 등이 전시 되어 있다. 히포드럼 203년, 로 마황제 셉티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만들어진 후, 서기 326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확장된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원형경기장으로서 당시 콘스탄티노플 (현재의 이스탄불) 시민들의 문화, 오락생활의 중심지였다. 블 루 모 스 크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 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최초의 건물은 360년경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나 후에 소실되어 현재 건물은 537년 유스티아누스 대제에 의해서....
성 소 피 아 사 원
비잔틴 제국의 카톨릭 성당으로 오랜 시일이 경과되었음에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 학 상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건립된 기본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15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56m 높이는 거대한 중앙 Dome과 많은 보조 Dome을 갖고 있으며, 거대한 중앙 Dome은 다시 4개의 소형 Dome으로 연결되어, 비잔틴 건축물의 표본으로 꼽혀지고 있다. 이 건축물은 이슬람 세계에 영향을 미쳐 이스탄불 회교사원들에서 발견되어 지는 비잔틴-이슬람 문화의 융화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낳게 했다.
톱카프 궁전 내 보석관
1453년 오스만제국 술탄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정복한 후 세운 오스만 제국 술탄(황제)의 첫 번째 궁전이다. 궁전의 벽 길이 5㎞ 면적 70만㎡ 골든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의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 20여명의 터어키 술탄들이 거주하였으며, 재상 회의가 열리던 곳 궁전 안에는 4개의 대형 안뜰이 있다. 도자기관, 보석 관, 회교 등의 주요 전시관을 가지고 있으며 궁전 입구 왼쪽에는 술탄의 후궁과 내시들이 거처하던 하렘(Harem)이 있다. 톱카프 궁전 내에 있으며, 역대 술탄의 보석장식과 무기, 식기, 왕좌 등 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품의 대부분은 각국에서 보낸 선물이나 약탈품이나.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등 사치가 극에 달한 화려한 소장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해서 강대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부강한 세계를 잠시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특히, 86캐럿의 거대한 다이아몬드 주변을 49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 있는 이 보석은 수많은 보석 중에서도 단연 최고를 자랑 한다 <출처:LET'S GO>
그랜드 바자르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 한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곳은두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돌마바흐체 궁전
가득 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보스포러스 해협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나누는 자연 국경 흑해와 다다넬스해(말마라해)를연결하는 폭 1㎞의 운하형태의 좁은 해협으로 수심은 50-112m 이다. 1973년과 1988년에 교량이 건설되어, 현재 2개 대교가 있음. 양 해안을 따라 전통적 터어키 가옥과 뛰어난 자연경경관을 즐길 수 있다. 근대사에서 이 해협 장악을 위해 러시아-터어키-서구 제국간의 치열한 외교전쟁이 전개되었으며, 양차 세계대전의 주요무대가 됐다.
소(小)아시아 아나톨리아 고원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아나톨리아 전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도시로서의 기원은 고대 히타이트시대로부터 비롯된다. 1923년의 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수도인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로서 발족하였다. 앙카라는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구시가는 북동부의 앙카라 구릉에 있는 오스만시대의 앙카라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좁고정비되지않은 통로와 바바자르(시장)를 중심으로 가옥이 밀집해 있으며, 시내에는 많은사원과 히타이박물관(고고학박물관민속박물관이 있있고,부근에는 선사시대와 고대 또는비잔틴시대 등의 유적도 풍부하다. 구시가의남쪽에는 도시계획에 바탕을 둔 정의연한 신시가가 자리 잡고 있다.
* 앙 카 라 *
도 시 정 보
앙고라 염소로써 세계에 잘 알려진 앙카라는 1900년대 초에는 인구 16,000명이 사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이곳은 나라의 독립 전쟁 (1919-1922)이 한창이던 때 이스탄불이 연합군의 점령 하에 있었고,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라의 전략 중심지로서 선택되었다.
앙카라는 그 후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공식적인 터키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인구 4백만이 넘는 터키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앙카라는 급속한 도시화의 압력 하에 있다.
현대 도시의 훌륭한 예인 신시가지와 근처에 있는 도시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는 빈민촌은 앙카라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인구는 320만 3362명(2000)이다. 옛 이름은 앙고라이다. 있고, 앙카라대학도 있다. 그 밖에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에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무덤이 있다.
한 국 공 원
한 한국공원 1971.8. 서울-앙카라 간 자매결연을 계기로 설치됐다. 앙카라 시내 중심부에서 약 1㎞ 지점에 위치하며 한국전에서 전사한 765명의 무명용사들의 영혼을 안치한 한국참전 터 어키 기념탑과 한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6각정자로 구성돼 있다.
아타투루크의 능묘
터키 건국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언덕. 군인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1923년 10월, 터키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술탄제 폐지 등 근대화의 초석을 쌓았다.
터키 국민은 케말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아타투르크(터키의 아버지란의미)로 부른다. 장엄한 분위기로 감싸인 언덕에는 박물관도 인접해 있다. 터키의 동상중 약 8~90% 정도는 아타투르크의 동상이다.
소 금 호 수
하얀 눈밭처럼 펼쳐진 해발 1,700M에 있는 거대한 호수 * 카 파 토 키 아 *
지 역 정 보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카파도키아.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갖이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 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카파도키아의 참 매력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 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 년 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 산(3917 m) 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습성을 지닌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바위를 깍 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데린구유라고 불리는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은 이 지역 거주민에게 더없는 편의를 제공 하였다.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응회암은 암석이라고는 하나 쉽게 깍 이는 탓에 거주공간이 좁다. 생각될 경우 주변의 돌을 더 파내기만 하면 되었을 뿐 아니라 돌로 만든 집은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기 때문이다. 지하도시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버섯 집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이외에도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도 카파도키아에는 600개가 넘는 교회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중 최고 오래된 것은 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회화들은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괴 괴 레 메 골 짜 기
앙카라에서 네비쉬르를 거쳐 가다보면 괴레메라고 불리는 카파도키아의 마을이 하나 나온다.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파도키아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찾는 명소이자 제일 기억에 남는 장소로 손꼽히고 있다.
이곳은 데린구유 지하도시와는 달리 지상으로 나있는 바위 동굴 속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교회들 대부분은 건축시기가 9세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의 벽면은 온통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이 그려진 성화로 장식되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들 성화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괴 뢰 메 야 외 박 물 관
괴레메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괴레메 야외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곳 주차장의 왼쪽에 있는 것이 Tokali Kilise(BUCKLE 교회)로, 특히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다. 처음에는 이곳 건물들의 겉모양이 약간 이상하다 생각될지도 모르나 워낙에 부식이 잘 되는 특성을 지닌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탓에 서서히 진행되는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공적인 보호막을 입힐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한다면 쉽게 수긍이 될 것이다. 에 에 센 테 페
세 개의 돌이 서 있는.... 괴레메 동굴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산으로 우치사르(Uchisar) 성채가 위치하고 있다. 과거 온통 응회암으로 뒤덮여 있었던 이곳에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터널을 만들어 살았으나 부식작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벌집모양의 바위산이 만들어졌다. 절 절 베 계 곡
집터가 무수히 남아 있는....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이루어진 곳에 다시 화산활동이 있어 그 위를 화산재들이 덮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과 부식작용으로 마모되고 부서져 약한 부분은 모두 깍 여 나가고 가장 단단한 암석들만 남아 현재의 기기묘묘한 바위모습 13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한 우치사르는 황량하고 기괴한 주변풍경이 어딘가 매우 묘해 보이는 곳이다. 이곳의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의 생성 원인은 이 지역이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수없이 뚫려 있는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우 우 치 히 사 르 (비둘기 계곡)
이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다. 이 집들의 주인이었던 비둘기들은 이 곳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에겐 귀한 손님이었다. 성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인 알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곳 사람들은 비둘기 알에서 염료를 얻어 석굴예배당의 성화를 채색하였다. 최근에는 성채에서 지하 100m 이르는 곳에 위치한 비밀터널이 발견되었는데 이 곳은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공급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이 특별한 장소를 이용한 호텔과 레스토랑들이 들어서고 있어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데 린 구 유
카이막클르 기독교인이 숨어 지낸데린구유 지하도시....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 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 도시이다. 이곳의 형성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 시대 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소수만이 공개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가 Nevsehir에서 29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린구유 지하도시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구유는 1965년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나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란 통로 곳곳은 무너져 내린 곳도 많지만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데린구유 지하 도시는 총 깊이가 55m에 달하는 8층으로 이루어졌다. 1층과 2층에 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돌로 만든 두개의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 혹은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터널이 있다. 십자가 모양의 교회, 지하감옥 및 묘지는 지하층에 위치해 있다. * 콘 야 *
도 시 정 보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 "콘야(Konya)" 예전에 이고니온이라 불렸던 콘야는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520,000명의 주민이 사는 터키 중요도시 중 하나이다. 지중해로부터 250KM 흑해로부터는 500KM,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해 콘야는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콘야는 몇 년 전만해도 보수적인 메블라나교의 영향력으로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를 써야 했다. 하지만 2002년 현재에는 스카프를 쓰지 않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 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다. 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다. 그 외에는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11세가 셀주크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콘야로 몰려들었다.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다.
그 외에는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11세가 셀주크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콘야로 몰려들었다 메 불 라 나 박 물 관
지금 남아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과 마나레 신학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 안 탈 랴 *
도 시 정 보
소아시아 반도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크리스탈처럼 맑은 물을 자랑하 는 지중해 연안지방의 수도 격에 곳하는 휴양 도시이다. 안탈리아는 팜빌리아라고 불리던 지역의 도시이다.
팜필리아라는 말은 여러 종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도시를 맨 처음 세운 사람은 페르가몬(버가모)왕국의 아타로스 2세이다. 그의 이름에서 현재의 안탈리아라는 이름이 나왔다 한마디로 터키 최대의 관광도시이며 안탈리아 주의 수도이다.
모든 안탈리아의 주 의 관광, 그러니까 서부 지중해의 관광은 안탈리아에서 시작 된다. 국제공항이 있기 때문에 직접 유럽에서 날아오는 비행 편이 많다. 마찬가지로 버스를 이용한다 해도 안탈리아에 먼저 도착하게 될 것이다. 년 중 8~9 개월간 수영이 가능하고 겨울에도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여 여름에는 피서객이, 겨울에는 피한객이 몰려드는 괸광객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시내에는 고고학 박물관이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페르게 , 아스펜도스, 시데 등 고대도시와 마나브갓트 폭포가 있다. 뿐만 아니라 테르메소스, 미라, 파타라, 파셀리스 등의 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서라도 이 도시를 거처가게 된다. 하 드 리 아 누 스 의 문
BC 2세기에 세운 장식용의 대리석 아치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고대 팜필리아 지방에서 가장 볼만한 명소이다. 이 울 리 탑
이울리 탑은 13세기 셀죽트루크의 술탄 이있던 Alaeddin Keykubat에 의해 세워졌다. 이 탑은 회교사원의 일부분이었지만 현재 회교사원의 다른 것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이 이울리 탑만이 38M의 높이를 자랑하며 건재하고 있다. 이 탑은 많은 낡았지만 푸른 타일로 만든 탑 정면이 매우 아름다워 도시의 상징물처럼 되었다. * 파 묵 깔 레 *
도 시 정 보
파묵깔레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이다. 지면에서 뿜어 나온 석탄 성분을 포함한 섭씨 35도 온천수가 100m 높이에서 산 표면으로 흘러나와 많은 수영장을 만들었다. 온천수가 수영장에 흘러 넘쳐서 크림색의 종유석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세계에서 둘도 없는 경관을 만들었다 파묵깔레는 석회 붕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파묵칼레는 목화솜으로 이루어진 성이란 뜻으로 도시는 온통 눈이 내린것 같이 새하얀 모습이다. 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흘러 내리면서 층층이 바위를 지금의 하얀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역사적으로도 치유와 휴양을 위 해 많은 위인들이 방문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지나친 개발로 온천수가 줄어들어 터키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계획성을 갖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온천수가 흘러 나오는 지역 이외에도 곳곳에 고대 유적들이 들어서 있어 원형극장 이나 신전등 당시의 건축물도 구경할 수 있다. 히에라폴리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져 로마 시대의 온천지로서 2,3세기에 가장 번영했다. 히에라 폴리스의 유적은 광범 위 하게 분포되어있다. 이에 아래의 코스를 추천한다. 번화한 거리를 구경한 후 팔각형의 필립사도의 기념교회를 보고 야외 원형극장으로 가서 아폴로의 부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아폴로 신전 옆에는 '신성한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는 지면에 생긴 깊은 구멍으로 부터 유독한 가스가 분출되고 있는데 성직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겠지만 자신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이 내용은 '신성한 장소'의 옆에 있는 분수에 기록되어 있다. 석 회 붕
파묵깔레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파묵깔레의 노천온천은 수천 년 동안 깊은 지하수에서 미네랄워터를 쏟아내었다. 이 지하 온천수들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원형의 욕탕을 형성하였고, 희고 풍부한 미네랄 내용물들이 석회질 바위와 융화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파묵깔레의 온천은 초당 400리터의 물을 쏟아내고 있고, 이곳에는 하루 6000명의 관광객이 수용가능한 숙박시설과 온천수를 가지고 있다. 이곳의 미네랄 온천수에는 풍부한 칼슘과 마그네슘, 황산, 중탄산염 등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심장질환, 소화기 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능으로 로마시대의 황제들까지 요양을 했을 정도라고 전해져 온다.
*보 드 룸 *
도 시 정 보
에게해와 지중해가 교차하는 눈부실 정도로 푸른 해변, 보드룸에는 기사 로드스가 세운 중세의 해안선을 산보하는 관광객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며 마리나도 호화로 운 요트로 들끓고 있다.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맑고 투명한 바다가 있어 파도 속에서 따듯하게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성곽이 상징적인 모습으로 입구를 호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온갖 매력이 넘치기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며 야자나무가 있다.
잠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은 암초와 가로로 된 동굴을 탐색하기도 하고 바위가 만들어 낸 장엄한 해저의 모습도 관찰 할 수 있다. 형형색색의 해면이나 문어 외에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해산물을 딸 수 있다.
보드룸의 보트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지금도 장인이 뱃머리와 뱃꼬리 부분이 뽀죡한 티르한딜과 배의 폭이 넓고 뱃꼬리에 둥굴게 띠를 두른 굴레트라는 전통적인 요트를 제작하고 있다. 특히 글레트는 유람선과 레저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10월에 행해지는 경주에도 사용되고 있다.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보드룸은 헤레도투스의 탄생지이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서손꼽히는 마우솔후스 왕의 묘(기원전 4세기)가 있다. 항구에는 15세기 십자군 건축 양식인 세인트 페텔로 중세 성곽, 보드룸성곽이있다.
이 성곽은 해저 고고학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아주 오래된 청동기 시대의 유산 을 전시하고 있다. 괴크테페에서 보이는 멋진 경치는 박물관 내에 있는 2세기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진 촬영 장소가 되고 있다. 보 드 룸
에게해와 지중해가 교차하는 눈부실 정도로 푸른 해변, 보드룸에는 기사 로드스가 세운 중세의 성곽이 상징적인 모습으로 입구를 호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온갖 매 력이 넘치기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며 야자나무가 있는 해안선을 산보 하는 관광객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며 마리나도 호화로운 요트로 들끓고 있다
무그라 성
보드룸에 있는 성이며 보드룸 성 또는 무그라 성이라고 물린다. 보드룸 성은 15세기에 한 기사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 후 피터성인에게 헌정되어 '성 피터 성' 이라고 불린다. 완공되기까지 총 99년이 걸렸다. 이곳에 있는 석조상과 부조는 원래 제프라이언 섬의 마우솔로의 왕 사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 쿠 샤 다 시 (Kusadasi) *
쿠샤다시는 아이든(Aydin)시의 해안선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항구도시의 이름이다. 쿠샤다시 항이 있는 아이든 시는 예전부터 질 좋은 무화과 산지로 유명했다. 고대에는 트랄레이스로 알려졌었으며 유명한 조각학교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 때의 유적이다. 1186년 이후 도시는 셀주크 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곳의 박물관에는 각 시대의 공예품 이 전시되어 있다.
근처의 칼레이치 지방의 쿠쉬쇼핑 센터는 항상 활기찬 곳이어서 하루 종일 쇼핑 을 즐겨도 지루하지 않다. 요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현대적인 마리나도 있다. 쿠샤다스의 북쪽은 맑고 깨끗한 투산-쿠쉬투르 에게 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쿠샤다시는 가면 새의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빛나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계단상으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에게 해가 한눈에 들어와 방문객들에게 감탄을 사고 있다. 쿠샤다시 에는 수 많은 방갈로와 펜션 그리고 호텔 등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해변이 있으 며 남쪽으로 23km만 가면 휴양지 규젤차므르가 있다.
* 에 페 소 *
도 시 정 보
옛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에페스는 에게 해 최대의 유적지이다. 초기 에페 스는 기원 전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에베소가 에페스이다. 터키 서쪽 지중해 연안 이즈밀 항구 도시에서 남쪽으로 74km 지점 에 있는 이 도시는 1세기 때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흙이 씻겨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한다. 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 신전은 현재 발굴된 가장 오래된 건물을 기준 으로 볼때 BC 3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헌에 의하면 아르테미 스 신전은 BC 6세기 중엽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때 지어지기 시작해서 120년 동안 지어졌다 한다.
아 르 테 미 르 신 전
바닥면의 넒이가 가로 130M, 세로 70M, 높이는 18M로 기둥은 무려 127개였다. 이오니아식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BC 356년에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던 헤로스투스라는 사람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지만 신전은 바로 재건에 들 어갔고 에베소인들은 신전의 복구에 최선을 다해 기둥이 10M에 불과했던 파르테 논 신전보다 8M나 높은 18M의 하얀색 최고급 대리석을 사용한 기둥을 127개나 세웠다. 또한 사방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BC 250년 완성된 아르테미스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가량 컸으며 전세계 에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널리 알려졌다. 에베소는 신전으로 인한 특수를 누리 며 더욱 번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에베소의 영화도 AD 3세기경 동고트인들의 침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동고트인들은 신전을 모두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이에 아르테미스 신전은 대파되었고 파괴된 신전에서 대리석을 가져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신전은 완벽한 폐허로 변하였다. 이렇듯 1600년간 페허로 남아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 와트에 의해서 발굴된 다. 와트는 철저한 고증에 의해서 신전을 복원해 나갔으나 현재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에는 외로운 기둥 한 주만 서있다. 대 극 장
에페소 대극장 피온산을 따라서 돌로 만들어진 야외극장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이 극장은 연극 공연이나 시민의회를 열었던 장소로 에 페수스 시민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원래는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나 로마 시대에 각부분이 확장되었다. 약 2만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관람석은 직경 154m, 높이 34m의 반원형이다. 초기에는 객석과 오케스트라 무대 사이에 난간만 있었지만 후에 지금 처럼벽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4세기경에는 맹수와 투사의 격렬한 싸움이 열렸으 며 사도 바울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난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성 모 마 리 아 의 집
고대 에페스의 위쪽을 문을 지나쳐서 산으로 차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에페스 를 더욱 유명하게 하 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이 성모 마리아의 집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게 된다. 사도요한과 성모마리아는 AD42에서 AD48년 사이에 에베소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독일의 수녀 안네 캐더린은 꿈속에서 본 것을 책으로 쓰게 된다. 안네 캐더린은 1884년에 죽었다. 그 후 발 굴 조사단은 캐더린의 책에 근거해서 발굴 작업을 펴다가 AD 6C 경으로 추정되는 옛날 집을 발견한다. 그 집의 기초는 AD 1C경의 것으로 밝혀졌다. 안네 캐더린 은 단 한 번도 에페소를 방문한 적 이 없었다. 이 장소는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지로 선포되었고, 교황 6세는 1967년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반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곳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곳은 기독교인 뿐 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에게도 중요한 장소로 많은 방문객들 이 찾고 있다. 매년 8 월 15일에 벌어지는 성모 마리아 추도 예배는 1800년대부 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별도로 매일 07시에 그리고 일요일 10시 30분에 예배가 있으며 여기에는 카톨릭 교황청에서 파송된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계신다.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상점들이 있고 몇 미터를 가면 세례를 받 던 장소가 있고 좀 더 가다 보면 여러 나라 말로 된 안내판을 볼 수가 있는데 물 론 자랑스러운 한글도 보실 수 있을 거다. 더 지나가면 작은 집이나 오는데, 이것이 작은 교회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작은 예배당은 새로 재건축한 것이다. 방의 분홍색 대리석 밑으로 지하수가 나오는데 이것이 성수로 알려져 있다.
세우시우스 도 서 관
세우시우스 도서관 대극장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2층 건물의 잔해가 보이는데 셀 시우스 도서관이다. 정면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각각 상징하는 여성상이 놓여 있다. 금세기 초 발견 당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어 있었지만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정면은 제 형태를 갖추었다. 1만 2000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하 드 리 아 누 스 신전
로마 황제 하드리안과 아르테미스 여신, 그리고 에페스 시민을 위해 118년 지은 코린트 스타일의 사원으로 운명의 여신 티케(tyche)가 조각된 아치형의 정문과 양손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된 안쪽 문의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두 문의 사이로 신들, 동물의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성 요 한 교 회
성요한 교회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사도 요한이 노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이유로 6세기에 동로마의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교회를 세웠다. 7세기에는 아랍 의 침략을 막기 위해 주위에 성벽을 쌓았고 14세기 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쪽에는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요한의 묘가 있다. 사 도 요 한 의 교 회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이곳은 기원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 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 누스 황제(577-565 AD)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에페소가 아랍민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 8세기에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 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현재 여행객들이 출입하 는 곳이 주 성문인데, 나머지 두개의 문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 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들의 먹이가 된 기독 교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인 듯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 여겨 많은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 트 로 이 *
도 시 정 보
트로이 유적은 에게 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 강과 시모이스 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 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 해쳐진 9개 층에 이르 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 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 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 관에 기증하나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 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 로 지정되었다. 트로이 목마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끝>
Ⅳ. 터키여행을 일정별로 - 기행문
-관광지를 다시 생각 하며~~~~ 첫 번째 날(4월 8일 화) 아주 오래전부터 언제나 가장 여행을 하고 싶었던 Turkey를 관광하기 위하여 09:50분경 집에서 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공항철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영종대교 부근에 섬에는 진달래꽃이 한창이다. 갯벌을 메워 넓게 변한 광활한 지역은 앞으로 경제발전에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이 생각된다. 인천국제공항에 계획된 시간에 도착하여 인솔자 서정연 씨와 먼저 온 일행(모두 31명)들과 인사를 나누고 출국 수속을 마쳤다. 면세점에서 사랑하는 며느리와 딸애에게 줄 선물도 구입했다. Istanbul Ataturk국제공항에는 현지 김재희 가이드의 영접을 받으며 현지시간 4월 8일 20:00시경 도착했다. 세계의 많은 국적기가 분주하게 이착륙하고 있으며, 공항청사는 인천공항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모든 기능과 절차는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곳은 초저녁이라 더 이상 관광은 안 되여 바로 호텔로 향하였다. 호텔은 골목을 몇 번 돌아 도착하니 시설이나 환경이 별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내일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둘째 날이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Tour의 시작이다. Ankara까지 가야 한다이슬람 사원에서 코란을 읽은 시끄러운 소리가 약 3분 정도 요란하다. 이스탄불은 '이슬람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 칭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정복당한 후 수도로 결정되면서 이스탄불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번 여정의 시발점인 동시에 마지막 종점인 이스탄불은 동서양의 교차점으로 그리스, 로마는 물론 비잔틴과 아랍문화가 공존하는 영광과 영욕의 도시다. 한편으로 이곳이 두개 대륙에 걸터앉아 여러 제국을 거쳐 오면서 오늘날 동서양의 간극을 어느 때 보다도 성공적으로 이어오는 도시라는 것을 다시 생각되게 한다. 오늘 이스탄불의 첫 방문코스는 Hippodrome(마차 경기장) 광장이다. 고대 로마의 검투 경기장 터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단다. Egypt에서 가져온 이음새가 없는 한 개의 돌로 된 오벨리스크, 청동제의 뱀 장식 원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원주 등 3개만이 지금 까지 남아 있다. 이 광장은 약 10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경마장으로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그다음은 Blue Mosque 였다. 시간이 일러 입장을 위하여 20분 정도 기다렸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라고도하며 실내 장식에 푸른색의 타일을 사용하였다 하여 블루모스크라고 불리는 이 이슬람 사원은 술탄 아흐멧 1세가 당시 유럽 최대의 건축물이었던 소피아성당과 버금가는 모스크를 짓기 위해 건축한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다. 신발을 벗고 이곳에 발을 들여 놓으니 침묵의 기도에 잠겨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소원성취의 기도일까?...모스크 벽에는 화려한 터키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즈닉 양식의 수공예 푸른 타일 2만 2천여 개가 거대한 상들리에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또한 200개의 딘드라 글라스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빛은 너무나 황홀하다. 술탄들은 종교적인 선언 시에 이 모스크를 이용하였고, 종교휴일의 축제를 가졌으며, 메카로의 성지순례 출발점이 되었다. 성 소피아 대성당(Hagia Sophia)은 블루모스크 맞은편에 위치한 돔 양식의 동양과 서양,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스탄불의 영원한 상징인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 세계 8대 불가사의 하나인 이 성당은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소피아 성당은 중앙에 있는 돔을 황금으로 덮어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면 예수의 얼굴 모자이크가 더욱 찬란하게 미소 짓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박물관으로 되어 있는 소피아 대성당은 건축의 웅장함이 주는 장중함 뿐이고, 내부는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 때 소피아 사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조한 후, 찬란한 모자이크 성화에 로마군이 회칠를 하여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을 지금 일부를 복원 하고 있었다. 477년 간 회교 사원으로 쓰이던 성 소피아 사원은 아타투르크가 박물관으로 지정한 이후 오늘에 이르렀다. Topkapi Palace은 터키의 국화인 튜?이 활작 웃으며 우리일행을 맞이한다.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살았던 이 궁전은 현재는 박물관 이다. 과거 70만평에 달하는 면적에 호화스럽던 술탄들의 식생활에 쓰였던 식기와 의상이 전시되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특히 보석 관에 전시 되여 있는 86캐럿의 다이아몬드 및 에메럴드, 단검 등 많은 보석은 과거 에 영화를 대변 해주고 있다. 우리일행은 바쁘게 서둘렀지만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말로만 듣던 Kebap(사라다+터키식 식빵에 볶은쌀밥+닭 가슴살 구이)으로 식사을 하고, 구시가지의 Grand Bazar에서 자유 시간을 가졌다. 지붕이 있는 단일 시장 중에서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상점이 4천 3백가 모여 있다는 정말 큰 시장이다.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깨끗하였고 청결 하다, 한국인을 금세 알아보고, 빨리 빨리..., 대~한 민국을 한국말로 는 연호 하는 상인들, 친밀감이 넘쳤다. 이곳 먼 나라에서 한국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잠시나마 상인들과 흥정도 해보면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의 이스탄불에서의 일정을 남겨 놓고,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기 위하여 철구조로 된 현수교 이스탄불 대교위로 Bosporus해협을 건너 서둘러 453Km나 떨어져 있는 Ankara로 떠났다. 앙카라로 달리는 고속도로는 화물차가 눈에 많이 띤다. 대략적으로 평균 해발 고도가 1000m, 끝이 안 보이는 평야에는 대부분 밀 경작을 한단다. 너무 부러워 잠도 안 온다. 앙카라에 근접하면서 돌이 많은 토질이다. 벌써 셋째 날 아침 8시다. 상쾌한 이른 아침에 호텔을 나서 Ankara 시내에 있는 한국공원에 참배 후 방명록에 서명 했다.. 서울 - 앙카라 간 자매결연을 계기로, 6. 25 한국전에서 전사한 765명 용사들의 영혼을 안치한 한국참전 기념탑과 한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6각형 정자로 구성 되여 있는 공원이다. 후세에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계속 받고 있는 아트르크의 묘는 멀리 차안에서 보았다. Cappadocia로 가는 길은 광활한 농토와 가끔씩 눈에 띄는 양떼무리, 방풍림으로 심어 놓은 포플러의 숲, 그리고 시골 마을들이었다. 넓은 구릉 위에 아낙네들이 머리엔 수건을 쓰고 바지를 입고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 우리네 농촌를 보는 것 같아 정겨웠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동남부로 이동하면서 기후와 환경이 달라져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중도에 바다처럼 넓은 소금호수는 염도가 약 30%로 호수 주변에 소금 결정체가 모여 있다. 일찍 서두른 탓에 정오경에 도착했다. 점심을 동굴로 된 지하식당에서 먹고는 문자 그대로 세쌍둥이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이 즐비한 파샤바 계곡과 성당과 집터가 무수히 남아 있는 Zelve 계곡, 비둘기 집으로 가득한 바위산 우츠히사르, 그리고 히타 인들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지하도시 Kaymakle(Derinkuyu), 그리고 30곳 이상의 석굴교회가 있는 Goreme계곡을 오후 내 내 돌아보았다. 돌로 만든 집은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보호를 충분히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굴을 곳곳에 파서 살았고 그 곳들이 마치 비둘기 집처럼 보였다. 데린구유는 지하 도시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버섯 집 주민들도 자신들의 거주지 이외에도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어냈다. 현재 카파도키아에는 600개가 넘는 교회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중 최고 오래된 것은 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회화들은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이곳에서만 나는 특산물인 노아의 포도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최초로 심은 포도나무로, 낮은 키에 나무에서 자라는 매우 작은 열매로서 씨와 함께 먹는 것이 특징이다. 저녁식사 후 기온의 차가 심한 전형적인 사막기후의 선선함을 느끼며,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모두 모인가운데, 지하 동굴로 된 무도장 EVRANOS RESTAURANT에서 터키 Folk Dance 및 Belly Dance 공연을 관람하였다. 오늘은 넷째 날로, Konya를 거쳐 Antalya로 간다. 가파토기아를 벗어나면서 김진희 가이드는 “이 고장 처녀가 시집을 가려면 지붕 위나 굴뚝 위에 유리병을 세워 놓는 단 다” 우리 일행 모두가 열심히 네 집 정도를 찾을 수 있었다. 참으로 흥미 있는 풍습이다. 이동하면서 멀리 보이는 타우루스 산맥(평균 2500m)에는 지금도 잔설이 남아 있고, 산맥을 넘기 위한 고개의 해발고도는 1850m다. 호수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콘야는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해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고,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현재 스카프를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 하는 여성이 눈에 많이 보인다. Antalya지방은 지중해에 연한 도시로 보기에 자연미가 물씬 풍기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저녁 여장을 풀고, 지중해에 푸른 바다를 관망 하면서 해변 언덕 위에 Cafe에서의 Coffee한잔은 추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안딸랴는 바다, 태양, 역사,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해안인 것 같다. 안탈리야의 아침은 너무나 쾌적했다. 지중해가 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은 호텔 2층 방. 탁 트인 지중해의 코발트색 바다와 이슬을 머금은 뜻한 맑은 햇살, 멀리 보이는 타우루스 산맥의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을 머금은 봉우리들, 가슴 깊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카파도키아의 삭막함과는 전혀 다른,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아침이다. 이경자 권사와 해변 가의 절벽의 오솔길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어제 하루 종일 카파도키아에서 달려 온 보람이 있었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푸른 바다에 손을 담그니 손에 물이 들듯 파랗다. 산다는 것이 이런 맛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딱히 꼬집을 순 없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과 커피 한잔이 무척 소중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안딸랴는 199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1,146,109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벌써 다섯째 날이다. Antalya에서 Pamukkale는 5시간이 걸려 정오가 다 되어서야 파묵칼레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백색의 온천수에 의해 수천 년 동안 석회성분이 퇴적에 퇴적을 거듭하여 거대한 석회 붕으로 인해 형성된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Hierapolis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 된 듯하다. 이 파묵칼레는 '솜의 성 Cotton Cast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마치 하얀 솜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을 연상하여 이렇게 부르게 된 모양이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거대한 목욕탕과 공동묘지가 있다. 우리일행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모두 신을 벗고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니 그동안에 피로가 많이 풀린 듯 했다. 목욕탕에 온천물을 이용하여 피부병 치료 중, 중병을 앓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망하게 되면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어 묘지가 형성 되었다. 저녁식사 후에 호텔 온천 수영장에서 남여가 목욕(수영복을 입고)을 하면서 그 옛날 화려했던 히에라폴리스의 영광을 잠시 상상해본다. 그동안의 긴장과 피로를 풀면서~~~ 여섯 번째 날, 눈부신 해변의 도시 Bodrum의 입구 고개에서 검문검색을 받고, 에게 해와 지중해가 교차하는 눈부실 정도로 푸른 해변, 보드룸에 도착했다. 중세의 성곽이 상징적인 모습으로 입구를 호위하고 있다. 해양 휴양도시답게 모든 집은 그리스 및 이태리식의 유럽풍 이며, 야자나무가 있는 해안선을 산보하는 관광객의 모습이 많이 눈에 뛴다. 관광지로서 좁은 길에 늘어서 있는 작은 상점에는 각종 피혁제품등 공산품과 토산품을 나란히 누군가 찾아 주기를 원하는 듯하다. 보드룸은 생동감 있고 친숙하며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시장은 언제나 사람냄새가 나서 좋다. 대개의 재래시장이 그렇듯 보드룸의 시장도 무척이나 서민적이지만 활기차고 분주하다. 생필품 중에는 신발, 그릇, 전자제품도 모두 중국산이 많이 들어와 활개를 치고 있었다. 심지어 Rayban 선 글라스는 중국제 모방품이 진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오히려 터키 상품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나는 선물용으로 이 고장에서만 만들은 선물을 샀다. 일행과 함께 아이스크림도 먹고~~~ 보드룸의 밤을 좋아 하는 젊은이들은 레스토랑에서 에게 해의 신선한 해산물요리를 즐겨 볼 수 있는 낭만이 있고, 그 후에 나이트클럽이나 화려한 디스코 장(터키에서 제일 큰)에서 새벽까지 놀 수 있단다. Kusadasi항에는 일몰 이후에 도착했다. 오늘 숙박할 호텔을 못 찾아 시내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에게 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해안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계단식으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에게 해가 한눈에 들어와 보기에 아름다웠다. 쿠샤다시에는 수많은 방갈로와 펜션 그리고 호텔 등이 많이 눈에 뛴다.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에게 해에 섬들을 유람하는 크루즈의 기항지인 항구까지 해변을 왕복하여 조깅 하였다. 터키는 돈을 버는 사람은 모두가 남자다. 일곱 번째 날, Efesus는 에게 해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유적지다. 그 전에 먼저 누가의 묘를 보니 다 허물어진 흔적 위에 잡초만 무성하다. 에페스는 일 년 내내 수많은 순례자로 붐비는 곳인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너무 평화롭고 조용했다. 역시 조금만 일찍 서둘러 호텔을 나서면 이렇게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니까.
<가이드 김재희씨의 설명>
{에페스, 또는 에페수스는 기원전 13세기경 히타이트의 비문에 Apasas 라고 불렸던 도시. 하지만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왕국의 크로수스 왕이 기원전 560년 에 처음으로 이 도시를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간의 펠레폰네소스 전쟁도 당시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 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이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교회 역사에서 에페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바울로 인해 복음이 왕성히 전해지고 있다는 에페소로 오게 되었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곳은 카톨릭 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다. } 이곳에는 당시의 학교, 체육관, 목욕탕과 지금도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도서관의 전면, 터키에서는 가장 크다는 야외 원형극장을 볼 수 있다. 에페스의 유적을 방문하고는 사도 요한의 교회와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터를 본 후 차나깔레로 달렸다.. 피곤함과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Canakkale 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교통 요충지로 인구 5만 5천명의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며 에게 해(Aegean sea)에서 마르마라 해(Marmara sea)로 들어오는 다르다넬스 해협(St.Dardanelles)의 입구에 있다. 버스 기사가 부지런히 달렸지만 일몰 후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저녁 귀국 비행기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오늘 아침엔 차낙칼레 남쪽에 위치한 트로이를 먼저 관광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넸다. 일리아드의 배경 트로이(Troy) 차낙카레 남쪽에 위치한 트로이 유적은 에게 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위치는 바다와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 않으며 교역의 어려움도 없어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 갔던 중요한 도시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며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 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 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TROY 트로이 木馬의 傳說 트로이 목마는 트로이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트로이의 성 밖에 만든 목마이다. 전쟁은 두 나라사이의 비슷한 전투력과 트로이의 강력한 요새로 인해서 끝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그리스는 선물이나 되는 듯 큰 목마를 성문 앞에 만들어 놓고 후퇴하는 것처럼 트로이를 떠난다. 트로이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목마를 만든 이유를 알기위해 점술사를 불러 물어본 결과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그리스에 재앙이 임하고, 성 밖에 방치해 두면 트로이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해석 때문에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 군이 배로 철수한 후, 견고한 요새의 문을 열고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그리스의 작전이었다. 큰 목마 안에 그들의 군사를 잠입시켜두고 점술사를 매수하여 난공불락의 트로이의 성벽을 넘고자 하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고 승전의 축제를 벌이고 곤히 잠든 트로이 주민들에게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나와 성문을 모두 열고, 배로 철수했던 그리스 군사들이 모두 돌아와 결국 트로이는 점령당하고 만다. 정기 카페리에 승선, 이스탄불로 가기위하여 Lapseki에서 Gelibolu지역으로 10시 30분 정기선을 타고 약 30분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갔다.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 쪽에서 아시아 쪽으로 매일 수차례 왕복하는 페리에는 언제나 승객들과 차들로 가득하다. 해협의 아시아 쪽과 유럽 쪽까지의 해협의 넓이는 고작 1200m 밖에 되지 않는다. 해협을 다시 건너면서 이스탄불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을 잠시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관광이지만 그 속에서 사는 서민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단편일 뿐이겠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Dolmabahce Palace. 서둘러 방문한 돌마바흐체는 "채워진 정원" 이란 뜻이다. 이 궁전은 보스포루스해협에 연하여 지어 졌다. 1923년 왕정이 종식되고 터키 공화국이 되자 대통령 궁은 앙카라로 옮겨가고 이 궁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터키의 고대 궁전 중에서 베류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화려한 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로 되어 있으며, 금 14톤과 은 40톤을 사용하여 이 궁전의 건축 경비는 당시 500만 금화가 들었다 한다. 수많은 카펫트, 크리스탈 촛대, 그림들 특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2세가 선물한 4.5톤의 무게에 750개의 촛대가 있는 회색 빛 나는 세계 최대의 샨들리아가 압권이다. 유람선 관광이다. Bosporus해협을 1시간가량 유람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분기점이 되는 이 해협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두 개의 다리와 그 옆에 웅장하게 서있는 베이레르베이 성, 카다피도 교육을 받았었다는 군사학교, 아름다운 별장들, 고기 잡는 작은 배들~~~ 그리고 멀리 톱카프, 돌마바흐체 궁전의 측면을 돌아 '황금의 뿔'이라는 의미의 골든 혼이 보이고, 커다란 지중해 유람선 두 척이 정박한 항구도 눈에 들어왔다. 이스탄불은, 특히 노을이 지는 이스탄불의 광경은 이 해협에서 바라보면 참 장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귀국 하는 날, 이렇게 해서 8박 9일 여정의 터키여행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간 관광을 위하여 이동한 총 거리가 3,800km(가이드 김재희의 자료. 필자의 계산은 약 2,640km정도), 총 이동 소요시간은 57시간, 만보기에 의한 보행 횟수는 95,490보, 왕복 비행거리 10,112mile (항공기 탑승시간 왕복 : 22시간 )로 여행자로서는 긴 일정일지 몰라도 우리나라 남한보다 7배 이상 큰, 그리고 장구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지닌 터키를 단 며칠 안에 제대로 느끼고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을 여행하면서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역사의 흔적이나 종교,Bosporus 고대의 거대한 유적들이라기보다는 이동 중간 중간에 잠시 방문했던 시장의 정이 담겨있는 광경, 거리를 거닐면서 느낀 사람들의 넉넉한 웃음, 톱갑프 궁전에 관광 온 어느 초등학교학생들의 천진하고 예쁜 아이들의 눈동자, 음식점에서 추가로 더 내밀면서 자기가 오히려 즐거워하던 여주인, Bodrum 휴양지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아저씨의 너털웃음들이었고~~~ 그러한 사람냄새가 나를, 아니 우리 일행을 다시한번 터키로 가보고 싶도록 만들고 있다. 정말 날씨에 관한 한 이번여행은 행운이 항상 우리와 같이 하는 것 같았다. 수고 했습니다. <끝> < 신림동에서 문 일 남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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