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애굽 및 예수님 발자취 답사
< 성지... 다녀 왔습니다 !!! >
기간 : 2007년 11월 20일 - 29일
문일남 안수집사, 이경자 권사
목 차
1. 개 요 : 이집트, 요르단 및 이스라엘 성지 답사
2.성지답사 3개국(Egypt, Jordan, Israel)의 현황
가.이집트(아프리카 국가)[Egypt]
나.요르단(아시아 국가)[Jordan 요르단 하심 국가]
다. 이스라엘 (아시아 국가)[Israel]
3. 답사일정 / 일정표
- 기간 : 2007년 11월 20일 - 29일 (8박 9일)
4. 답사 참가인원
5. 답사 국 및 주요지역
6. 답사 3국의 지도
7. 답사 국의 일반적인 사항
8. 답사를 위한 사전준비
9. 출애굽 및 예수님의 발자취 - 기행문
* 일정별 답사 기행
1) 출 국
2) 이집트
3) 요르단
4) 이스라엘
5) 귀 국
2. 참고사항
3. 기 타
출애굽 및 예수님 발자취 답사
1. 개 요항상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유대민족’ ‘모세의 출애굽’ ‘예수님의 행적’등에 관한 역사적 현장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사건이요 소망이 었으며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답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이번 답사를 통하여 조금이나마 나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 답사는 가족들의 성원과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로 기도하는 가운데 답사를 결심하고 준비를 하였다.
2. 성지답사 3개국(Egypt, Jordan, Israel)의 현황
가. 이집트 (아프리카 국가) [Egypt]
개 요
공식명칭 : 이집트아랍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 인구 : 69,261,000 면적 : 997,739㎢ 수도 : 카이로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아랍어 독립년월일 : 1922. 2. 28 화폐단위 : 이집트파운드(Egyptian pound/£E) 국가(國歌) : Biladi("My homeland")
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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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는 카이로이다. 남북길이 1,055km 남쪽 국경선에 면한 동서 최대너비는 1,250km다.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 만, 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 997,739㎢, 인구 72,034,000(2006 추계).
자연환경
알카스르 /서부사막에 있는 앗다킬라 오아시스의 ...이집트는, 경관의 지배적인 특징인 북류하는 나일 강에 의해 크기가 다른 극도로 건조한 두 지역으로 나뉜다. 보다 큰 사막지대인 서부 사막(앗사흐라알가르비야)은 와디(건천)가 없는 낮은 대지이며, 보다 작은 동부 사막(앗사흐라앗샤르키야)은 석회암과 사암층의 대지로 와디에 의해 널리 개석되어 있으며, 남동부에는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동부 사막의 북동부에 있는 시나이 반도에도 와디가 많다. 시나이 반도 남부 산지에는 해발 2,642m의 이집트 최고봉인 캐서린(카트리나) 산이 있으며 동부 사막의 홍해 구릉지대(이트바이)에는 해발 1,800m가 넘는 산이 많다. 나일 강은 이집트 영내에서는 중요한 지류가 없으며, 가파른 벼랑들 사이에서 대략 8∼16km 너비의 바닥이 평평한 유역을 따라 흐르다가 카이로 북쪽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갈라지며 삼각주 저지대를 이룬다. 이 삼각주는 길이 160km, 너비 240km로 인구가 조밀하고 연중 관개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자연 식생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건조한 서부 사막은 대체로 생명체가 없는 지역이지만, 수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막의 다년생식물과 풀이 자란다. 서부 사막보다 덜 건조한 동부 사막에는 이따금 비가 내려 몇몇 종류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데 그중에는 타마리스크, 아카시아 및 수많은 종류의 가시관목, 작은 다육식물(多肉植物)들, 방향성의 약초들이 있다.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 그리고 산재하는 오아시스들에서 이집트 농업의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며 인구의 99% 이상이 여기에 거주한다.
이집트에는 겨울(11∼3월)과 여름(5∼9월)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알렉산드리아에서의 1월평균기온은 11∼18℃),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카이로의 7월평균기온은 29℃). 연강우량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175㎜ 카이로에서 약 25㎜ 남부의 아스완 부근이 약 2.5㎜로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또한 홍해 연안 평야에는 강우가 거의 없다. 광물매장량은 보통 수준이며, 철광, 석유, 천연 가스, 석고, 인산염과 우라늄 등이 산출된다.
국민
이집트 국민은 신체적인 특징상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는데, 이는 셈족과 함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나일 강 삼각주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상(上)이집트(즉 나일 강 상류 유역의 남부 이집트) 주민들보다 중동의 다른 지역 및 유럽과 더 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소수민족 집단으로는 나일 강 유역 남부의 누비아인, 동부 사막 남부의 함족 계통의 베자인, 서부 사막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이 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13세기 동안이나 아랍어가 이집트의 문어이자 구어였다. 639년 아랍인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언어인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에서 다 같이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12세기까지는 거의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콥트어는 콥트 교회에서 전례용(典禮用) 언어로만 존속하고 있다. 이집트의 공인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국민의 약 90%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종교적으로 소수인 그리스도교도는 대부분 콥트교도들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북아프리카의 평균수준이다. 연인구증가율은 세계 평균치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며, 유아사망률 역시 높다. 국민의 2/5가 15세 미만이다. 정부는 신생아와 아동의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산모와 어린이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학령아동의 건강 관리에 비중을 두고 있다. 입국이민이나 출국이민은 전통적으로 아주 적었으나 국외로 이주하거나 외국에서의 임시취업을 원하는 사람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인구는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에 크게 밀집, 카이로 도시주(都市州)를 포함한 하(下)이집트 지방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한다. 그러나 전체 이집트인의 절반은 아직도 시골생활을 한다. 20세기 동안 도시화가 꾸준히 진행되어왔지만, 수치상으로 나타난 도시화의 일부는 시골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는 여러 부락들을 중소도시로 지정한 행정제도의 개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경제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율보다 더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1인당 GNP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다. GN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부문은 공업(석유생산 포함)이며, 그뒤를 농업, 공공사업과 방위산업, 무역과 금융이 잇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농업 종사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40%를 넘는다. 이집트의 가경지(可耕地)는 거의 전적으로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에 한정되어 있으며 관개는 필수적이다. 1970년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됨으로써 나일 강의 연례적인 홍수를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환금작물이 가경지의 약 3/4을 차지하며, 사탕수수·토마토·면화·수박·오렌지·양파·감자 등의 수확량이 가장 많다. 국내 식량작물로는 옥수수·쌀·밀·기장·호박 등이 있으며 대추가 특히 많이 재배된다.
인구가 급증하고 많은 농지가 환금작물의 재배에 충당되기 때문에 국내 소요 식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초지는 없지만 농장과 부락들에서 가축을 기른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축으로는 물소·소·당나귀·양·염소 등이 있다. 닭·오리·비둘기 등이 사육되고, 시골에서 역축(役畜)으로도 이용되는 물소와 젖소로부터 우유를 얻으며, 당나귀는 운송용으로 널리 이용된다.
어업은 상당히 선진화되었다. 총어획고의 약 4/5가 민물고기이고 그 나머지가 바다물고기이다. 지중해 연안 어업은 아스완 하이 댐이 강물 매개의 영양소를 차단하는 바람에 쇠퇴했지만, 그대신 아스완 하이 댐 배후에 조성된 나세르 호에는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었다. 광업은 석유와 천연 가스의 채취가 주종을 이루며 제조업을 합쳐 GDP의 22%를 차지한다. 광업은 노동인구의 0.3%를, 제조업은 16%를 차지한다. 주요제품은 정유제품, 시멘트, 면직·모직의 직물과 의류, 밀가루 등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념물들, 온화한 겨울기후, 지중해안의 해수욕장과 휴양지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이집트는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를 관리하며, 자유기업과 외국의 투자를 장려한다. 수에즈 운하의 소통이 1975년 재개되고 석유와 천연 가스가 생산되면서 경제는 호전되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가 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총노동력은 인구의 약 1/4을 차지하며, 노동조합 활동은 합법화되어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 때문에 이집트는 계속 저개발의 진통을 겪고 있다. 국가의 예산 수입은 주로 세금으로 충당되는데,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철도망은 국유회사인 이집트철도에서 운영한다. 도로의 포장률은 70% 이상이다. 내륙수로는 총길이가 3,200km를 넘는데, 160km가 넘는 수에즈 운하를 제외하면 전부가 나일 강 수로이다. 수에즈 운하로는 해마다 2만여 척의 배가 지나다닌다. 정부 소유의 이집트항공에서 국제·국내 항공편을 제공한다. 수출은 주로 원유와 정제품 및 면직물과 면사로 이루어지며, 이집트의 최대수출국은 이탈리아이다. 수입액은 통상 수출액보다 훨씬 많다. 주요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전기기구,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이며, 주로 미국·독일·프랑스로부터 수입한다. 해외근로자들의 송금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정치·사회
이집트의 정치제도는 강력한 행정부에 의해 좌우된다. 6년 임기의 대통령은 국회의 지명을 받아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며(연임 가능), 국가원수와 군최고사령관직을 맡는다. 또한 부통령·총리·내각과 단원제 국회인 인민의회의 의원 454명 가운데 10명을 임명한다.
국회는 정부의 정책을 심사하고 승인하는 것을 주요임무로 하며,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이집트는 제한된 복수정당제도를 운영한다. 여당인 국민민주당은 충성스런 야당의 존립은 장려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당을 결성하여 정권 경쟁에 나서는 것은 금지한다. 1971년에 채택된 이집트 헌법은 최고사법권을 최고헌법재판소에 부여하고 있다.
사회복지제도는 대부분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하며, 근로상해·실직·노령·사망·출산·신체장애·질병 수당을 지급한다. 또한 상당수의 무료 보건소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위생조건의 열악, 영양부족, 만성적인 무기력증, 지방의 의료인 부족과 같은 보건상의 문제들로 계속 골치를 앓고 있다. 이집트국민의 평균수명은 남자 59세, 여자 62세이다.
일반 공립교육은 초등(6년)·예비(3년)·중등(3년)의 3단계로 되어 있다. 6∼12세의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계속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정부의 일반교육제도와 병행하여 이슬람교 기관들이 제공하는 교육제도가 있다. 알아자르대학교(970 설립)는 세계 유수의 이슬람·아랍 학문의 중심지이다. 교육 서비스의 확대에도 15세 이상의 주민 가운데 55%가 문맹자일 정도로 이집트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 이집트의 언론은 1973년 검열이 해제된 이후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경제 문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전파 매체는 정부에서 관리한다.
문화
이집트 전통 의복 /이집트의 전통 의복인 젤라바를 ...
이집트 /이집트 전통 공예품, 제35회 ...
이집트 /이집트 전통 공예품, 제35회 ...
이집트 /이집트 전통 공예품, 제35회 ...사회적·문화적인 전통이 아랍·이슬람의 전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집트 문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범세계적이며 서구의 영향을 많이 드러낸다. 서구의 충격은 현대 이집트 소설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의 하나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나기브 마푸즈가 있다. 이집트의 현대극은 유럽의 수입판이다. 이 현대극의 발전은 세기의 변환기에 태어난 2명의 극작가 마흐무드 타이무르와 타우피크 알 하킴이 주도했다. 대중음악은 아라비아의 고전음악·민요·서양음악이 뒤섞여 이루어졌는데 무하마드 아브드 알 와하브는 작곡가겸 가수로서 이 분야의 발전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움 쿨숨은 거의 50년 동안 이집트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성악가였다.
역사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BC 2925년경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었는데, 이는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 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계속해서 지배자의 위치를 이어갔다. 역사가들은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구분한다.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이집트 미술, 이집트 법, 이집트 종교).
아시리아의 침략은 BC 7세기에 일어났으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것은 BC 525년이었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으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 왕조시대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헬레니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시는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셈족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머지 않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최고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로마인은 BC 30∼AD 395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그후 이집트는 행정적으로 동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관용령을 내림으로써 이집트의 공식 교회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오리게네스·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활동 무대였다.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비잔틴 군대가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의 무력 충돌 끝에 이집트에서 철수한 642년에 끝이 났다.
그후 200∼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바뀌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그후 969년에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당한 독립과 중요성을 획득했다. 1171년에 이어 이집트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로 귀속되었다.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이 무너지고 맘루크들이 득세한 것은 1250년의 일이었다. 맘루크들은 아라비아 세계의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이용된 비아라비아·비이슬람의 노예들이었다. 그들이 이집트에 세운 왕조는 151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집트를 이슬람 세계의 동부 아랍어 사용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까지는 이집트의 아랍화가 거의 완성되었다.
1517년에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어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는 속주로 되돌아갔다. 맘루크 왕조 말기에 시작된 경제의 쇠퇴는 계속되었고, 그와 함께 이집트 문명도 쇠퇴했다. 1798년 프랑스군의 침략은 불과 몇 년 동안이었지만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충분했다. 프랑스군이 떠난 뒤 이집트는 무하마드 알리의 수중에 들어갔다. 알바니아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알리는 오스만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하나의 왕조와 제국을 일으켰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의 치부(致富)와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졌고, 영국은 1882년 내란의 와중에 기회를 틈타 이집트를 점령했다(→ 대영제국).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22년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이집트 본토 출신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잠시나마 시리아 및 예멘과의 연방 수립을 시도했으며,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엘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했던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를 파기하려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공격해(1973) 시나이 반도의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그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1년 10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밑에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그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주도정책을 계속했으며,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1961년 12월 영사관계를 맺었으며, 이어 1962년 5월 카이로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한국과 이집트는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지만 문화협정(1968. 8)·항공협정(1979. 9)·전력기술협정(1985. 6) 등을 체결한 상태이며, 실질적인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관계개선의 장을 열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이집트에 진출, 큰 성과를 올렸으며 앞으로도 건설분야의 시장개척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두 나라의 통상현황은 1996년 대한수입 4억 7,359만 달러, 대한수출 8,668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1997년 현재 이집트에는 교민 173명, 체류자287명이 있으며, 한국-이집트 친선협회가 결성되어 있다.
한편 북한과 이집트는 1963년 8월 국교를 수립하고 이어 상주공관을 설치했으며, 그동안 무역협정(1957. 12, 1987. 10)·문화협정(1958. 11)·과학기술협정(1969. 10) 등을 체결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교역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으며, 1980년대부터 이집트가 실리외교에 치중하자 실질적인 교류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나. 요르단 (아시아 국가) [Jordan, 요르단 하심 왕국, 트란스요르단]
개 요
인구 : 5,505,000 면적 : 89,342㎢ 수도 : 암만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국왕/국왕 공식 언어 : 아랍어 독립년월일 : 1946. 5. 25 화폐단위 : 요르단디나르(Jordan dinar/JD) 국가(國歌) : Asha al Malik("Long Live the King") 서남아시아에 있는 아랍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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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요르단 강 동쪽에 있으며 수도는 암만이다. 남북으로 약 460km, 동서로 약 355km 뻗어 있고 북쪽은 시리아, 북동쪽은 이라크, 남동쪽과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을 경계로 한다. 아카바 만에 19km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웨스트뱅크로 알려진 요르단 강 서쪽 지역도 1949년부터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당한 1967년까지는 요르단의 영토였다(이 항목에서는 그 지역에 관한 부분을 통계에서 제외시켰음). 면적 89,342㎢, 인구 5,505,000(2006 추계, 팔레스타인 난민 약 172만 5천 명 포함
자연환경
요르단은 지형학적으로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사막지역은 시리아 사막(북아라비아 사막)의 연장으로 국토의 동쪽 4/5를 차지한다. 사막 북부는 화산용암, 현무암, 침식된 모래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은 사암층의 노출로 형성되었다. 요르단 강 동쪽의 이스트뱅크 고원지대는 평균고도 600∼900m이며, 남쪽 끝 아카바 만 가까이에 요르단 최고봉인 람 산(1,754m)이 솟아 있다. 지구대로 이루어진 요르단 계곡 지역에는 사해가 있는데, 이 호수는 수면이 해수면 아래 약 400m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토양은 일반적으로 건조하며 기후는 동쪽의 사막기후에서 서쪽의 지중해성 기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전국토면적 가운데 5% 미만에서만 연간강우량이 400㎜ 이상을 기록하며, 4∼10월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동부 사막의 내륙분지에는 와디가 흐른다. 요르단과 웨스트뱅크 사이를 흐르는 요르단 강은 동쪽 고원지대에서 흘러내려오는 수많은 샘과 시내가 합류된다. 그러나 지나친 증발 때문에 염도가 점점 높아지다가 사해에 이르러서는 표면의 평균 염분함유량이 거의 300‰나 된다. 요르단의 겨울은 서늘하고 비가 많이 오며, 북쪽의 암만에서는 평균기온이 9℃, 남쪽의 만(灣)에 면한 알카바에서는 17℃이다. 덥고 건조한 여름의 평균기온은 암만에서 24℃, 알아카바에서 32℃이다. 물이 부족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국민
국민은 대부분 아랍인으로 북아라비아의 카이스족 또는 남아라비아 예멘족의 후손이며 아랍어를 사용한다. 인구의 1/2가량이 15세 미만이다. 출생률은 비교적 높고 사망률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낮은 편이어서 연간 인구증가율이 비교적 높으며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인구가 농촌에서 도심지로 많이 이주함에 따라 경제도 어려워졌다. 인구의 2/3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 국민의 9/10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1/20은 그리스도교도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는 루마니아 정교회나 그리스 정교회 신도이다.
1980년대 중반 85만 명 이상의 허가받은 난민과 이주민을 비롯해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인구통계의 수치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수용소에 거주하며, 근동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국제연합 난민구제사업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UNRWA)에서 생계유지 수준의 지원을 받는다. UNRWA에서 주로 난민들의 위생·교육·복지를 맡고 있다. 모든 난민은 요르단 시민권을 갖고 있는 한편 난민구제 혜택을 받기 위해 난민의 신분도 유지하고 있다(→ 국제연합 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국)
경제
요르단은 자유기업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급성장하는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비슷하며 1980년대초까지 인구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으나 그후 성장률이 떨어졌다. GNP의 주요원천은 지역·사회·개인 서비스업, 무역, 건설, 제조업 등이다. 전국토의 1/20만 경작이 가능하다. 요르단 강 하곡과 바로 동쪽의 고지대는 관개가 잘 되어 있다. 농업이 GNP의 약 1/20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종사하고 있다.
주요작물은 토마토·가지·호박·고추 등 채소류이다. 그외에 밀과 보리를 비롯한 곡류·편두(扁豆)·올리브·수박·바나나·오렌지가 생산된다. 요르단에는 목초지가 거의 없으며 그나마 목축을 하기 위해서는 대개 우물을 파야 한다. 주요가축인 양과 염소에서 고기와 젖을 얻으며, 양봉도 이루어진다. 얼마 안 되는 삼림은 주로 시리아와 가까운 동쪽의 고원지대에 분포하며, 연간 국내수요의 약 1/2을 충당할 수 있는 양의 목재를 생산한다. 1967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웨스트뱅크의 농경지를 잃게 됨에 따라 요르단 정부는 조림계획을 다시 세우고 일부 삼림지를 농경지로 바꾸었다.
광업과 채석업은 GNP의 1/20 미만을 차지하며, 노동력 가운데 약 1%가 종사하고 있다. 주요광물은 인산염이며 그외에 구리·석고·망간광석·고령토·칼륨·유리질모래를 채굴한다. 요르단에서는 가정난방과 원격통신에 태양열을 이용한다. 제조업은 암만에 집중되어 있으며, GNP의 1/10을 차지하고 노동력의 1/15이 종사하고 있다. 주요생산품은 시멘트·인산비료·압연강·담배·맥주·포도주이다. 전력은 화력발전으로 생산된다. 건설업은 GNP의 1/20을 차지한다. 주요 건설계획을 통해 요르단 강 골짜기의 관개용 댐과 공장, 사해의 칼륨 공장, 알아카바의 비료 공장과 항만 시설, 라시디야의 대규모 시멘트 공장 등이 세워졌다
제라시와 페트라의 유적, 사해 주변의 온천과 광천 등으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노동력 가운데 약 1/2은 정부와 지역·사회·개인 단위의 서비스업에 고용되어 있다. 산업은 국영은 아니지만, 정부가 많은 산업부문에 공동소유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정유, 인산염 채광, 관개와 전력·수송·통신 산업의 대부분을 소유한다. 아랍과 서방 여러 나라의 원조가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몫을 한다. 노동조합과 고용주 조직이 법으로 인정되어 있다. 정부예산 수입의 2/5 이상이 보조금과 차관으로 이루어지며, 약 2/5는 국내 세입(주로 간접세·수수료·직접세)으로 충당한다.
예산은 주로 개발·국방·치안을 위해 지출된다. 남북으로 국토를 가로지르고 암만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잇는 국영 철도가 있으며, 도로망은 약 3/4이 포장되어 있다. 유일한 항구인 알아카바가 아카바 만에 있으며, 암만·알아카바·지지아에 국제공항이 있다. 주요수출품은 천연인산비료, 채소·과일류, 살아 있는 동물, 화학비료, 의약품, 의류, 섬유, 방적사 등이며, 수출상대국은 주로 이라크·인도·사우디아라비아이다. 수출액의 1/4을 초과하는 수입품은 전기·비(非)전기 기계 및 설비와 원유·운송장비·철강·곡류 등이 주종을 이루며, 주요수입국은 이라크·미국·영국·일본이다. 막대한 무역 적자는 해외에 있는 요르단 노동자들의 송금과 관광수입, 보조금과 차관 등으로 메워진다
정치·사회
요르단은 입헌군주국이며, 최고 행정권은 왕에게 있다. 양원제 국회가 있었으나 1976년 아브둘라 이븐 알 후세인 왕의 명령으로 해산되었고 후세인 왕이 1970년 대 말에서 1980년 대 초까지 칙령을 통해 통치했다. 1984년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진 국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상원은 왕이 임명한 3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하원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13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며 개인의 신분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이슬람 종교재판소(Shari?ah Muslim courts)가 있다(→ 샤리아). 병력은 7만 명으로 대부분 육군이다.
사회복지제도는 낙후된 편이다. 정부의 연금제도는 노령·장애·사망 시에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보건시설은 주로 암만을 비롯한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다. 영양부족과 위생시설이 열악할 뿐 아니라 나쁜 기후 탓으로 장티푸스·파라티푸스·살모넬라·간염·이질 같은 질병이 널리 퍼져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 60세, 여자 64세 정도이다. 주택이 계속 건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택문제가 심각하여 대다수 가구는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교육시설로는 공립학교, 사립 또는 종교계 설립 학교, 난민 어린이를 위해 UNRWA에서 운영하는 학교 등 3가지 유형의 학교가 있다. 교육부에서 모든 학교를 감독하며 14세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암만의 요르단 국립 대학교(1962), 이르비드의 야르무크 대학교(1976), 알카라크의 무타대학교(1981) 등이 대표적이다. 신문은 민간이 소유하나 여러 면에서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국영방송인 하심요르단 방송국과 요르단 텔레비전 방송국이 요르단의 전자 매체를 장악하고 있다
문화
요르단에서는 아랍 문화가 발전되어왔으며 최고 형태의 예술은 다른 아랍 세계와 마찬가지로 구전예술과 문학예술이다. 민속 문화는 노래·민요·이야기하기 등의 구전예술을 통해 표현되어왔다. 가장 유명한 시인은 무스타파 와바 앗 탈로서, 그는 뛰어난 문체와 사상으로 20세기 주요 아랍 시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브라힘 아부 나아브, 파우다 투칸, 사미라 아잠 등 새로운 세대의 시인과 산문 작가들이 나타났다
역사
이스라엘과 함께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이라고 알려진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서 대부분의 역사가 이스라엘과 뒤섞여 있다. 사람이 살게 된 시기는 아득히 먼 전기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르단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는 BC 13세기 이후 존립했던 기드온·암몬·모압·에돔 등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BC 1000경)에 지금의 요르단 동부 대부분은 이스라엘 왕국에 복속되었다. 그 후 다른 중동지역과 함께 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에 차례로 넘어갔으며, BC 330년 무렵부터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서로 싸우는 사이에 아랍어를 쓰는 나바테아 인이 요르단 동남부에 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은 BC 64∼63년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고,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에게 넘어갔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고, 아바스 왕조 때는 바그다드로 옮겼다. 그 이후로 요르단 지역은 권력의 중심지에서 멀어졌으며 주민들은 서서히 베두인족의 유목생활로 되돌아갔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예루살렘에 도읍한 라틴 제국이 요르단 강 동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에 요르단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마스쿠스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로 오가는 길을 보호하기 위해 체르케스 인·카프카스 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난민들을 요르단에 정착하게 했다. 요르단은 1920년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과 함께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아브둘라 이븐 후세인이 영주(군최고사령관)로 임명되었다.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통치가 계속되긴 했으나 트란스요르단은 밸포어 선언의 대상에서 제외된 후 1927년 입헌국가로 독립했다. 1949년 독립한 이스라엘과의 휴전으로 요르단은 웨스트뱅크를 합병했으나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1970∼71년 요르단은 정부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 사이의 전투로 쑥밭이 되었다. 전투는 정부군이 팔레스타인 게릴라 군을 요르단에서 몰아냄으로써 끝이 났다.
한국과의 관계
요르단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2년 7월, 북한과는 1974년 7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72년 11월에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한국과 경제·기술 협력협정(1977. 10), 문화협정(1977. 10), 항공협정(1978. 5) 등을 체결했다. 한때 요르단은 한국 업체들의 진출이 활발했던 건설시장이었다. 1990년 11월말 현재 대한 수입 3,018달러, 대한 수출 2,597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으며, 1989년 6월 현재 122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다. 이스라엘 (아시아 국가) [Israel]
개 요
공식명칭 : 이스라엘국(State of Israel) 인구 : 6,562,000 면적 : 21,671㎢ 수도 : 예루살렘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히브리어·아랍어 독립년월일 : 1948. 5. 14 화폐단위 : 신셰켈(New [Israeli] sheqel/NIS) 국가(國歌) : Hatikvah("The Hope") 지중해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중동의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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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이스라엘은 남북길이가 약 400km, 동서길이가 가장 넓은 곳이 121km에 이른다.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 동쪽과 남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와 이웃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골란 고원(북동쪽), 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동쪽), 가자 지구(남서쪽) 등 7,477㎢의 점령지(반자치주)를 제외한 면적이 2만 700㎢이다. 1967년 전쟁으로 빼앗은 여러 점령지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수도인 예루살렘도 한때 요르단 지역과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인구 6,801,0001(2006 추계).
자연환경
이스라엘은 지형학적으로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길이 185km, 남쪽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32km밖에 안 되는 지중해 연안의 좁고 기다란 평원지대이며, 둘째, 북쪽 국경에서 점령지인 웨스트뱅크를 지나 이스라엘 중부에 이르는 구릉 지대, 셋째, 동쪽 국경을 따라 지구표면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해수면보다 400m 낮음)를 거쳐 아카바 만까지 크게 갈라진 틈의 일부를 이루는 그레이트리프트밸리, 넷째, 이스라엘 남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넓은 지역인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주요하천들은 요르단 강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형성된 내륙분지로 유입된다. 요르단 강은 내륙분지에서 훌라 분지(해수면과 거의 같음), 담수호인 갈릴리 호(해수면보다 210m 낮음),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호수 가운데 하나인 사해로 차례차례 흘러들어간다. 갈릴리 호는 급수장과 저수지를 통해 서쪽의 대수층과 연결되며, 전국 농토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
기후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겨울 기온(1∼2월)은 예루살렘의 약 8℃에서 네게브 사막 남쪽 아카바 만 엘라트의 16℃ 사이를 오르내리며, 여름 기온(7∼8월)은 같은 지역의 경우 23∼32℃를 기록한다. 북부 산악지대와 북부 연안지역은 연강우량이 400㎜ 이상이며, 북부 산악지대 끝부분은 1,016㎜에 이른다. 북부의 경우 10∼4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온다. 네게브 사막은 102㎜ 이하, 사해 남쪽 아라바 계곡 주변은 25㎜ 이하를 기록한다.
강우량이 203㎜ 이하인 지역이 전국토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농업은 연강우량이 305㎜가 넘는 북위 31°30′ 북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옛날의 상록수림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조림사업이 계속 펼쳐지고 있다. 구릉지대는 상록관목(야생 관목식물)으로 뒤덮여 있으며, 네게브 사막에는 야생사막관목이 자란다. 동물은 멧돼지·살쾡이·영양 같은 포유류에서 아가마 도마뱀 같은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서식한다. 천연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편이며, 한정된 양의 구리와 석유 및 천연 가스가 조금 매장되어 있다.
국민
유대인이 전인구의 4/5 이상을 차지하며, 아랍인은 1/6 정도이다. 1948년 건국 이래로 수많은 유대인이 유럽·북아프리카·러시아 등지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 왔다. 유대인들은 중부 및 동부 유럽 태생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사는 그들의 후손들로 구성된 아슈케나지 종파, 지중해 및 중동·극동 지역 태생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2개 지파로 이루어진 세파르디·오리엔탈 종파 등 2개의 주요종교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소수민족으로서 가장 많은 이슬람교도는 아랍인 인구의 2/3 이상을 차지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그리스도교도는 대부분 도시에 살며, 대개 아랍어를 쓴다. 가장 큰 그리스도교도 집단은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멜키트)이며, 로마 가톨릭과 동방귀일(東方歸一)교도는 그보다 수가 더 적다. 예루살렘은 2개의 러시아 정교회 전도사업의 본거지이다. 1957년 이후 드루즈파는 독자적인 아랍어권 집단을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용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이다. 대다수의 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아랍인은 아랍어를 사용한다. 학교에서는 제1외국어로 영어를 가르친다.
유대인들의 약 3/5이 이스라엘 태생이며 약 1/5이 유럽·미국, 약 1/6이 아시아·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의 출생률은 아랍인보다 약 1/3이 낮기 때문에, 아랍인이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는 유대인의 이민으로 상쇄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인구증가가 거의 이민 때문이었지만 머지않아 자연증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아랍인의 인구증가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3이 15세 미만이다. 인구의 9/10가 도시에 거주하며, 주로 지중해 연안 평원에 집중되어 있다.
경제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바탕을 둔 혼합경제체제이며, 국민총생산(GNP)은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1인당 GNP는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낮은 편이다. 토지의 약 1/5이 경작되며, 관개시설은 갈릴리 지방과 네게브 사막에 편중되어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3%를 차지하는 농업에 인구의 상당수가 종사하며, 키부츠(집단농장)·모샤브(공동농장)가 경작지의 3/4 이상을 차지한다.
주요작물은 감귤류 과일로서 오렌지·그레이프프루트 생산은 세계 최고로 손꼽힌다. 이밖에 목화씨·멜론·사과·아보카도·감자·포도·토마토·바나나·밀·복숭아·올리브·사탕수수가 대량 생산되며, 유럽 시장에 수출하기 위해 조생종 채소가 재배된다. 국토의 2/5에 이르는 목초지에서 소·양·염소를 기른다. 이스라엘은 또한 세계 최대의 칠면조 생산국이기도 하다. 갈릴리 호와 양어장에서 잡는 민물고기와 지중해·흑해·대서양에서 잡는 바다 물고기가 어획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잉어와 대구가 주종을 이룬다. 세계적인 칼륨 생산국이며 그밖에도 인산염, 브롬칼리와 마그네슘 혼합물(사해), 석회, 소금, 유리질 모래, 석고, 점토 등이 채굴된다.
GDP의 약 1/5를 차지하는 제조업은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전체 노동력 가운데 1/5 이상이 종사하고 있으며, 주로 원료와 반(半)가공 원료의 가공업종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제조품은 전자제품, 무기, 시멘트, 칼리 비료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비료, 황산, 면섬유와 의류, 과일 통조림과 병조림, 과일 주스, 밀가루, 가공한 다이아몬드, 금속제품, 기계류, 자동차, 항공기, 정밀기계, 합성수지 제품, 가정용 기구 등이다.
전력은 화력발전소에서 공급된다. 건설업은 GDP의 약 5%에 지나지 않지만 건축자재 제조업과 함께 경제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주택건설이 건설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스라엘 경제에서 가장 비중이 큰 부문은 공공사업과 지역사회사업으로 GDP의 1/4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1/4이 종사하고 있다. 관광업은 주요 외화수입원이며, 또 관광수입은 보통 이스라엘인이 해외에서 지출하는 액수보다 많다.
정부는 광업회사 및 광물탐사회사, 몇 개의 공장, 국영철도회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산업개발을 지원하고 수입관세를 통해 기존산업을 보호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 사회에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와 차관 외에 개발원조도 받는다.
주요노동연맹으로 1920년에 창설된 노동자총연맹(Histadrut)이 있다. 법적 조직이 아니므로 가입·탈퇴에 강제성이 없으나 노동조합 전부가 속해 있으며, 모든 노동자 및 키부츠·모샤브에 소속된 사람들은 물론 전문직 근로자도 가입할 수 있다. 노동자총연맹에서는 소매물가지수와 관련지어 단체협상을 벌이며, 근로자 복지제도·연금제도 및 수많은 사회복지사업을 펼친다. 모든 산업체의 약 5%를 소유하고 있으며, 노사(勞使)위원회·전국생산성협회(National Productivity Institute)에 대표로 참여한다. 생산성 향상과 능률 향상을 위한 장려금 제도와 그밖의 다른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약 570km에 이르는 표준궤간 철도가 놓여 있다. 도로는 완전히 포장되었으며, 4차선 이상의 간선도로도 여러 개 있다. 주요항구로는 지중해의 아슈도드·하이파, 홍해의 엘라트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드(텔아비브야포)에 국제공항이 있으며, 국내선 공항이 몇 개 있다. 엘알이스라엘항공사에서 국제선을 운항하며, 아르카이스라엘항공사에서 국내선을 운항한다.
주요수출품은 기계류, 다이아몬드 장식품, 과일·채소, 섬유·의류 등이며, 주요 수출대상국은 미국·영국·벨기에·독일·일본이다. 수입품으로는 다이아몬드 원석 및 투자상품·연료·윤활유·소비재·식품이 주종을 이루는데, 수입액이 수출액을 능가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주요 수입대상국은 미국·벨기에·스위스·독일·영국이다.
정치·사회
1948년 건국 이래 이스라엘은 의회제도를 갖춘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성문헌법이 없으며, 정치는 법률·행정법령·의회의 관행에 바탕을 두고 있다. 최고권력기관은 국회(Knesset)이다. 120명의 국회의원은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국회는 단원제로 입법에 관한 모든 의무를 수행하며 임기 5년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선출한다. 대통령은 주로 형식상의 의무를 지닌다. 1948년 이래로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했지만 1996년부터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이것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혼용한 것이다.
총리는 일반적으로 국회의 다수당에서 나온다. 그밖의 각료 임명에 관한 협의는 국회에서 다수 연합을 이룬 정당들간에 이루어진다. 여러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많이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집권한 정당은 마파이 당(이스라엘 노동당)과 리쿠드 당(통일당)뿐이다. 사법부의 최고기관은 대법원이며,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방위군은 주로 육군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48∼72시간 내에 평상시 병력의 약 5배까지 동원할 수 있다.
사회복지제도가 발달되어 있어 노후연금, 산업재해 및 출산수당, 가족수당이 지급되며, 일반지원금·구호금·실업수당도 정부 차원에서 제공된다. 노동자총연맹의 건강보험기금(Kupot Holim)을 통해 대다수의 노동자에게 질병 수당과 의료보호지원금이 지급된다. 보건·위생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며, 평균수명은 77세이다. 교육은 의무교육으로 5∼15세까지 무상으로 실시된다. 초등교육은 8년제이며, 그후의 교육은 4년제이나 마지막 2년간은 의무교육이 아니다. 학교는 국립학교, 종교학교, 아구다트이스라엘 신학교의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1918)·텔아비브대학교(1953)·테크니온(이스라엘 기술연구소 : 1912)이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90% 이상이다.
언론 매체는 비교적 자유롭게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다양한 정치적·종교적 견해를 반영한다. 그러나 국가비상사태가 되풀이되고 있는 관계로 군의 검열관이 국가안보에 관한 신문·방송 자료를 검열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은 정부에서 소유·운영한다.
문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문화유산과 더 여러 세기에 걸쳐 흡수한 각 지역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민요, 악기, 그밖의 민간전승 문화 표현양식을 포함하는 민간의 풍속은 주로 세파르디 유대인 사회와 시골의 아랍 주민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왔다. 문학과 희곡의 경우 초기에는 디아스포라(Diaspora:유대인 이산)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점차 국가와 관련된 주제로 관심이 옮겨졌다. 가장 유명한 작가로는 1966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1888∼1970)을 꼽을 수 있다.
역사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적어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BC 10000년경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한 증거가 남아 있다. 고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선형(線形)문자의 개발이다. 선형문자는 BC 2000∼1000년에 가나안인들이 창안한 것으로,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찾아냈다.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알려졌던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한 때는 BC 13세기말경으로 추측되며, BC 1550∼1200년에는 이집트인들이 지배했다. 해양 민족들의 출현으로 아시아 속국들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펠리시테인들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에 팽창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BC 10세기 중반 솔로몬 시대에 최고의 번영을 이룩했으며,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이스라엘로 알려진 북왕국과 유다로 알려진 남왕국으로 분열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나, 유다 왕국은 BC 625년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 왕국을 침략했으며 많은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바빌론 유수).
키루스 2세(BC 550∼529) 때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그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뒤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지역을 헬레니즘화하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도와 안티오코스 4세(BC 175∼164)의 성전 모독에 반발한 유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BC 141년 하스몬 왕조 때 이스라엘은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BC 65년 왕족의 내분으로 내란이 일어나 로마 제국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로마 점령기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리스도는 AD 30년경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2차례의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35년 마지막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은 극소수 집단으로 위축되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란사, 로마사).
그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도교 성지 보호로 인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691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웠다. 그결과 예루살렘은 3대 주요종교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1100∼1291년 이슬람교도들과 십자군에게 번갈아 점령되었으며,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그뒤 1798∼99년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고 다시 이집트의 지배 아래 들어가 무하마드 알리의 통치를 받았다. 무하마드 알리를 통해 서유럽의 영향을 받던 팔레스타인은 1840년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다.
19세기 후반 팔레스탄인에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가 시작되어, 1882년 최초로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촌이 세워졌으며, 1917년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영국이 1918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1922년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통치를 승인받아 정치적 책임을 떠맡게 된 후 이 정책은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초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거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시온주의 국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947년 국제연합(UN)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트란스요르단(뒤의 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중동전쟁). 이스라엘이 1967, 1973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중동은 지금까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1967년 전쟁을 전후로 팔레스타인 국가와 그 영토 내의 이스라엘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1982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7년 이후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인티파다'(intifadah : '봉기'라는 뜻)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당국은 1992년 이후 아랍의 여러 국가와 팔레스타인 대표들과 직접 평화 교섭에 나섰다. 이듬해 이스라엘과 PLO는 5년 동안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를 점차 확대 이행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스라엘은 1994년 요르단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중동).
한국과의 관계
1962년 4월 한국과 단독으로 수교가 이루어져, 1964년 8월 주한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원유수급과 건설시장 확보를 위해 한국이 중동지역에 본격 진출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1978년 2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폐쇄되고 주일 이스라엘 대사가 겸임을 했다.
그 후 상주공관이 없는 상태에서 카이로 총영사관이 이스라엘 관계업무를 관할해오다가 1992년 1월 다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주한 이스라엘 공관이, 1993년 12월 주이스라엘 한국공관이 설치되었다. 북한과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의 대(對) 아랍 군사지원과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대한 무기 지원으로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6·25전쟁 때 17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원조한 바 있다.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은 3억 2,854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액은 3억 9,097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교민 3명, 체류자는 374명이다.
2. 답사일정
- 일 정 : 2007년 11월 20일 - 11월 29일(8박 9일)
- 답사 일정표
♣ 일 정 표 : 이집트.요르단. 이스라엘 (여리고) 9일 ♣
날자 |
지 역 |
교 통 |
일 정 |
식사 |
11/20 (화) |
인 천 타쉬켄트 카이로 |
09:0011:15 14:45 17:45 21:35
|
인천 국제 공항 3층 J 카운터 두루투어 명판 앞 집결(08:00) 인천 출발(HY512/10:55). 타쉬켄트 도착(14:25-7:25분 비행) 타쉬켄트 출발(HY267-15:45) 카이로 도착(19:35-7:40분 비행)(인천-타쉬켄트-카이로:총17시간) 카이로 호텔 투숙 및 휴식 ★★★★★ NOVOTEL 혹은 동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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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내석:기내 |
11/21(수) |
카이로 시나이 반도 시내 산 |
전용 버스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전용버스-전일) 아브라함 이전의 건축물인 기자의 피라미드, 스핑크스, 파피루스 전시장, 예수님 피난교회, 유대인 회당 답사. 모세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 수웨즈 운하, 마라의 샘, 신 광야, 엘림, 르비딤, 조각 목 등 이스라엘 민족 40년 방황의 장소인 광활한 시나이 반도 답사 후 시내산 산장 호텔(해발 약 1,500m) 도착. 호텔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호텔 투숙. ★★★★ 캐서린플라자(Catherine Plaza Village Hotel) 혹은 동급
|
조:호텔 중:한식(도시락) 석:호텔 |
11/22(목) |
시내 산 국경통과 페트라 (아라비아) |
전용 버스 |
새벽 2시 경 시내산 등정하여(전용버스-전일) 시내산 정상에서 산상 예배 후 하산 성 케더린 수도원 답사 후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바란 광야 경유하여 누웨바에 도착.한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국경 통과.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 후 사도 바울이 선교한 성경의 아라비아 (페트라)로 이동. 호텔식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 호텔 투숙. ★★★★ 그랜드 뷰(Grand View Hotel) 혹은 동급
|
조:호텔 중:한식 석:호텔 |
11/23(금) |
페트라 (아라비아) 암 만 |
전용 버스 |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전용버스-전일) 페트라(아라비아), 모세의 샘,마케루스(세례요한순교지) 답사 후 현지식으로 점심식사. 아르논골짜기, 마다바, 느보 산 답사 후 암만 호텔 도착하여 호텔식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예루살렘 인터내셔날(Jerusalem International) 혹은 동급
|
조:호텔 중:현지 석:호텔 |
11/24(토) |
암 만 국경통과 사해지역 여리고 |
전용 버스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예수님 세례 터 및 세례요한 사역지) 답사 후 알렌비 국경으로 이동하여 이스라엘 입국. 맛사다(케이블카), 엔 게디, 쿰란 답사 후 한식도시락으로 점심식사. 사해수영 체험 후 여리고 답 사. 호텔 투숙 및 휴식 ★★★★ Inter Continental 혹은 동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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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텔 중:한식(도시락) 석:호텔 |
11/25(주일) |
여리고 갈릴리 북부 |
전용 버스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전용버스-전일) 팔복 산, 오병이어, 베드로 수위권,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 가버나움 답사. 현지식으로(베드로고기) 점심식사를 한 후 골란고원전망대, 가이사랴 빌립보, 단 답사 후 요단강을 따라 이동하여 갈릴리로 이동 갈릴리선상 예배 후 호텔 투숙. ★★★★ 엔게브(Engev) 혹은 동급
|
조:호텔 중:현지 석:호텔 |
11/26(월 |
갈릴리 지중해지역 예루살렘 |
전용 버스 |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전용버스-전일)
예수님 첫 번째 이적 가나 혼인잔치의 가나,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사렛(회당) 답사 후 현지 식으로 점심식사를 합니다. 므깃도(아마겟돈),엘리야의 갈멜 산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 시 이용했고 감옥에 갇혀도 있었던 가이사랴 항구 등 답사 후 호텔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호텔 투숙. ★★★★★ 그랜드코트(Grand court) 혹은 동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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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텔 중:현지 석:호텔 |
11/27(화) |
예루살렘 텔아비브 |
전용 버스
23:00
|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전용버스-전일) 감람산답사(승천교회, 주기도문교회, 눈물교회, 겟세마네동산), 기드론 골자기, 통곡의 벽 답사 후 한식(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 십자가의 길(골고다언덕), 시온 산(마가의 다락방, 다윗 왕의 가묘), 베들레헴 등 답사 후 공항으로 이동. 텔아비브 출발(HY304-23:00) * 베들레헴 답사는 일정의 시간상 못 보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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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텔중:한식(도시락) 석:한식(도시락) |
11/28(수) |
타쉬켄트 인 천 |
06:05 10:35 21:30
|
타쉬켄트 도착(05:55-4:45분 비행) 타쉬켄트 출발(HY513-11:05) 인천 도착(20:45-6:25분 비행)(텔아비브-타쉬켄트-인천:총15시간) 및 해산. * 수고하셨습니다. 두루투어를 다시 찾아 주십시오 * ☞ 상기 일정은 항공사 및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조:기내 중:기내 석:기내 |
4.답사 참가인원 : 총 9명
- 참가자 : 8명 (목사 2명, 전도사(여) 1명, 본인, 처, 기타(여) 3명 )
- 인솔자 : 노 재명 목사
5.답사 국 및 주요지역
이 짚 트 |
요 르 단 |
이 스 라 엘 |
피라미드, 스핑그스, 파피루스 전시장, Old City에 예수님 피난교회, 유대인회당, 스웨즈 운하, 마라의 샘, 신광야, 엘림, 시나이반도, 유황온천, 누비딤, 시내 산, 성 캐더린 수도원, 누에바, 타바 국경
|
아브론 국경입국(요르단), 페트라, 모세의 샘, 마케루스(세례요한의 순교지),아브론 골짜기, 느보산, 마다바, 베다니,알렌비 국경.
|
맛사다, 엔게디, 사해수영체험, 여리고성, 쿰란, 팔복 산, 오병이어, 베드로 수위권교회, 가버나움성지, 골란고원전망대, 가이샤라 빌립보, 텔 단, 갈릴리바다에서 선상예배 및 성찬식, 예수님 세례 터, 티베리아, 혼인잔치의 가나, 나사렛(회당), 므깃도(아마겟돈), 엘리야의 갈멜 산, 가이사라 항구, 감란 산 일대(승천기념교회, 주기도문교회, 눈물교회, 겟세마네동산), 기드론 골짜기, 통곡의 벽, 베데스타 연못, 성전 산, 십자가의 길(골고다의 언덕), 시온 산(마가의 다락 방,다윗의가묘), 베드로통곡교회, 베들레햄에 예수 탄생교회, 기브온, 텔아비브. |
6. 답사 3국의 지도
7. 답사국의 일반적인 사항
구 분 |
이 집 트 |
요 르 단 |
이 스 라 엘 |
비 고 |
정부형태 |
이집트 사회주의 공화국 |
입헌군주제 |
으회 민주정치 |
|
국토면적 |
1.001.450평방km |
한반도 2.5배 |
27.716평방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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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구 |
68.360만 명 |
600만 명 |
600만 명 |
|
종 교 |
이슬람교(수니파)93% |
이슬람교(수니파)95% |
유대교(80%)/이슬람교(회교12%)/기독교(4%) |
|
통 용 어 |
아랍어 |
아랍어 |
히브리어/아랍어 |
|
화 폐 |
파운드 |
디나르 |
세겔 |
|
시 차 |
7시간 늦다 |
7시간 늦다 |
7시간 늦다 |
|
전 압 |
|
|
220V |
|
|
|
|
|
|
우리 국군중앙교회에서는 작년(2007년 11월)에 담임 목사님과 성도 60여명이 성지순례를 다녀왔기에 사전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출발 2주전부터 모세의 출애굽과 광야생활, 그리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등 구약시대와 예수님의 탄생부터 고난의 십자가를 공부하였고 이집트 요르단 및 이스라엘에 대하여서도 공부하였다.
기타 여행에 따른 일반적인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9. 일정별 답사지역 및 내용
가. 11월 20일(화)출국날:맑음
인천 국제공항(11:15)-타슈겐트 국제공항경유-카이로 국제공항(21:30)- HUSA HOTEL(1박)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섬기면서 항상 그 믿음에 발자취를 한번 답사하고 싶었다.
금번에 가족들의 격려와 사랑으로 기독교 성지답사의 꿈이 이루어 지게된 것을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개인적으로 너무 감격스럽고 가슴이 벅찼다. 짧은 일정으로 전부를 이해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지만, 이를 통하여 나의 영적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출발 전에 많은 준비를 한답시고 성경은 물론, 답사국의 종교, 지리, 역사, 정치 및 문화에 이르기까지 공부하였지만 너무 광범위하여 정신이 혼미 하였다.
11월 20일 아침 : * 출발에서 카이로까지 Cairo *
여행을 간다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아침 7시경 집을 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9시 정각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같이 갈 일행이 이미 도착 하였었으며 서로 어색한 만남 속에 오전 11시 15분 비행기로 우즈베키스탄에 타쉬겐트를 경유하여 카이로에 가는 비행기로 출발하였다. 인솔 목사님 까지 모두 9명의 단출한 답사 여행이다.
마음이 설레 인다. 오랜만에 부부 동반여행이라 새록새록 정이 다시 돋아나는 듯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일행으로 생각되는 여행객이 보인다. .
지루한 시간도 뒤로하고 어느 사이 타쉬겐트 국제공항을 경유하여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이다.
몽골지역에 고비사막(?)인 듯 한없이 펼쳐 진 사막지대를 비행하고 있다. 이륙 후 지금 약 7시간 째 비행하고 있다.
약 7시간 10분비행하여 타쉬겐트 공항에 도착하였으나 터미널의 시설 및 서비스 등 모든면이 매우 빈약 하였다. 우리일행은 카이로로 가기위하여 보세 구역 내에서 약 2시간 50분가량 대기한 후 다시 6시간 45분 비행하여 카이로에 현지시간 21시경 도착 하였다(인천-타쉬겐트-카이로 :총16시간 45분 소요).
이집트는 인류가 자랑하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역사 유적의 나라다. 책, TV 등을 통해서만 듣고 볼 수 있던 나라가 아닌가. 현지 가이드(이집트 인)와 한국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Bus로 카이로 시내로 향하였다. 공항을 벗어나 차창 밖으로, 밤이지만 시내에 단면을 접할 수 있었다.
거리에 교통은 무질서 하고, 혼란스러워 보였고, 불결한 환경과, 낙후된 건물 모습들이다. 군인과 경찰이 치안과 질서를 유지 하고 있다. Bus는 약 1시간 만에 현지시간
일행 중 여행가방 한 개가 인천 - 카이로 비행 중에 항공사측에 잘못으로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약 1 시간가량 지체 후 호텔에는 현지시간으로 22시 30분경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카이로시내아파트 지역 **카이로 소재 Husa Hotel
.* 카이로의 현지시간은 우리보다 7 시간 늦다. 모든 것이 질서가 없어 보였고 환경이 불결한 느낌이 들었으며 교통 신호가 없는데도 모든 차들이 가기도 잘도 가고 있었다.
버스밖에 날씨는 우리의 가을정도로 느껴졌으며 활동하기에 매우 적합 했다.
* 카이로의 이모저모 *
*과일상점 * 무질서한 차량들
*무질서한 거리(1) *(2)
*시내에 골동품 상점 *아파트
나.답사 첫날 - 11월 21일(수):맑음
(1)나일강-아브라함이전 건축물 피리미드-스핑그스-파피루스 전시장-카이로의 예날 시가지의 예수님 피난교회-모세의 기념교회답사
둘째 날,
새벽 5 시경에 호텔 주변 이슬람 사원에서 새벽 기도를 알리는 음악소리에 잠이 깨어 어리둥절 하였다.(6시에 일어나면 되는데... ). 이슬람 교인들은 하루에 5회 정도 정해져 있는 시간에 그들의 성지인 멕카를 향하여 엎드려 기도 한다. 호텔 객실 탁자에도 기도방향(↗)이 표시 되어 있다. 실제는 6 시에 일어나, 7 시에 식사, 8 시 출발인데...
오늘부터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 시내 산 부근 까지 본격적인 성지답사가 시작되었다.. 모든 여장을 버스에 싣고 피라미드와 스핑그스를 답사하는 것부터 오늘 계획된 모든 일정을 답사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텔 앞 대로변을 보니 학생들에 등교, 직장인들의 출근 인파, 폐차를 해도 몇 번을 했을 고물차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매연을 뿜어대고 있다.
우리일행 8명은 현지시간 8시에 Bus에 올라 차창 밖으로 나일 강을 보았다.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나일 강은 생각보다 폭이 좁고 물은 많이 오염 된듯 탁해 보였다.
* 나일강 Nile River *
나일 강은 총길이가 6,500 km이며, 약 260만 평방km 유역에 영향을 미치며 이집트의 젖줄로서 동식물에 큰 도움을 준다.
첫 답사지역은 이집트하면 떠오르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기자의 미라미드와 스핑그스 관광을 위하여 시내를 벗어나 기자 지역에 나섰다였다.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사막언덕위에서 4,500년 전인 고 왕국 제 4 왕조 대(BC2613*2494)의 쿠프 왕, 아들 프레 왕, 손자 멘키우레 왕의 피라미 3개가 놓여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답게 세계 각처에서 온 관광객으로 일대가 북적였다.
저 높은 하늘를 찌를 듯 웅장함과 뛰어난 건축 기술로 건설되어 있는 피라미드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다. 입을 다물 수 가 없다.
상류에 홍수 및 수량조절용 아스완 땜을 건설한 이후로는 상습적인 범람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카이로 시내를 흐르는 강의 폭은 한강의 5분의 1 정도였으며 몹시 탁하게 보였다.
* 기자의 피라미드 Pyramid *
첫 답사지역은 이집트하면 떠오르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기자의 미라미드와 스핑그스 관광을 위하여 시내를 벗어나 기자 지역에 나섰다였다.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6km 떨어진 사막언덕위에서 4,500년 전인 고 왕국 제 4 왕조 대(BC2613*2494)의 쿠프 왕, 아들 프레 왕, 손자 멘키우레 왕의 피라미 3개가 놓여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답게 세계 각처에서 온 관광객으로 일대가 북적였다.
저 높은 하늘를 찌를 듯 웅장함과 뛰어난 건축 기술로 건설되어 있는 피라미드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다. 입을 다물 수 가 없다.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건축된 것으로서 모세가 성장 후 이 건축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 애굽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피라미드 앞에서 처음부터 은혜를 받았다.
온갖 풍상을 겪어온 인류가 만든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그 당시 이집트의 국력을 짐작 할 수 있다. 밑바탕의 4면체의 방향이 지구의 동서남북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건축된 것으로서 모세가 성장 후 이 건축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 애굽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피라미드 앞에서 처음부터 은혜를 받았다.
이 형상을 사진기에 넣어 서울로 가져 오려고 했으나 만족스런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이때 아랍인 2명이 함께 사진을 박자고 하여 응하였더니 나중에 박시시(팁)를 요구한다. 그들도 관광객을 대상으로 수입을 얻어야 하기에...
*스핑크스Spinx*
스핑그스는
스핑그스 Spinx는 주전 2650년 카프레 왕 무덤을(피라미드)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하는데 그 자리에 있는 화강암을 높이 20m, 길이 72m로 깎아 만든 것이다. 몸은 사자, 머리는 사람, 이마에는 왕 군을 상징하는 코브라가 조각 되어있다.
피라미드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나오는 석회암으로 되었다는 이것 역시 규모는 장대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이 훼손 되여 있다.
피라미드와 스핑그스를 뒤로하고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거대한 구조물들이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하나의 돌산에 불과한 허망한 돌무덤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든 인간은 삶속에 주님이 임재 하시고, 주님이 개입 하시며 섭리 하시고 역사 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
다시 카이로 시내로 들어와 우리의 한지와 비슷한 파피루스 제조과정과 문자를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계속해서 Old city에 예수 피난교회와 모세의 기념교회를 답사 하였다. 이 지역은 예전에 나일 강 이 범람하여 홍수로 약 2m 정도 매몰 되여 있었으나 후세에 발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카이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모세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 시내 산 입구 까지 약 415km를 간다. 차창에 비치는 광활한 사막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도로 양편에는 건축물이 새로 세워지고, 도로도 포장과 노폭을 넓히고 있다. 물을 끌어들여 인공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다.
* 파피루스 Papyrus *
모세를 바구니에 담아 물에 띄웠을때 사용했던 자재가 파피루스란다.
파피루스라는 서양 종이의 원조(영어paper 의 어원). 파피루스 풀(식물)을 삼각으로 껍질을 벗겨서 망치로 두들겨 격자로 겹쳐 압착하여 펴 말린 후 글씨(그림)를 그 위에 쓴다. 이집트의 고대 문명이 잘 기록 보존되고 있는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한지와 비슷하다. 물론 판매도 한다.
다시 카이로 시내로 들어와 우리의 한지와 비슷한 파피루스 제조과정과 문자를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 계속해서 Old city에 예수 피난교회와 모세의 기념교회를 답사 하였다. 이 지역은 예전에 나일 강 이 범람하여 홍수로 약 2m 정도 매몰 되여 있었으나 후세에 발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예수피난기념교회 The Church Of Abusarga *
예수피난 교회는 아브사르가 교회라고도 하며 모두 기념교회이다. 길이17m, 폭15m, 높이3m의 현재 건물은 10-11세기에 재건되었음. 천정은 목조 트러스 구조인데 노아의 방주 모형이라 함. 교회 내부는 넓은 회중석과 2개의 통로로 되어있고 기둥이 12개 있는데 그중 한 개는 다듬지 않은 화강석으로 되어있는데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 예수님이 헤롯대왕을 피하여 마리아와 요셉과함께 얼마간 피신하여 계셨던 교회이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생활을 하였던 동굴 지하 은신처 입구이며 내부는 어두우며 비어있었다.
* 모세의 기념 유대 회당 *
A.D.4세기에 지어진 건물로서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은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교회이다. 나라 잃은 유대인의 신앙전승과 교육의 장이였다
2)출애굽 여정 스웨즈운하지하터널통과-마라의샘-신광야-홍해온천분출지역-르비딤-시내산 호텔 도착(2박)
카이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모세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 시내 산 입구 까지 약 415km를 간다. 차창에 비치는 광활한 사막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도로 양편에는 건축물이 새로 세워지고, 도로도 포장과 노폭을 넓히고 있다. 물을 끌어들여 인공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다.
홍해는 스웨즈 운하 지하에 터널을 이용하여 Bus를 타고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한 순간에 건넜다. 참으로 쉬운 여정이다. 1,400여 년 전 홍해를 건넜을 때 모세의 어려움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또 다시 사막이 계속된다. 넓은 사막만 계속 보니 매우 단조롭다. 두 시간 넘게 달려 도로 옆에 휴게소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또다시 광야를 가기위한 준비를 하였다. 화장실은 어디서나 1인 1회 사용 시 1달러였다.
*스웨즈 운하의 지하 터널*
우리일행은 모세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서 이곳 카이로에서 끝이 보이지 않은 사하라 사막의 북쪽지역을 횡단하여 스웨즈 부근의 Ahmad handi Tunnel(지하터널)로 스웨즈 운하를 통과하였다.
스웨즈 만 동쪽 연안을 따라 남하, 신(sin)광야(출 16:1)를 지나 호랩 산인 시내 산까지는 약 450km 이상의 먼 거리이다.
이 광활한 사막과 광야를 우리일행은 Bus로 편안히 답사 하면서 지금부터 기원전1,400 여년 전에 출애굽 하던 당시를 상상해보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감히 상상치도 못할 출애굽 경로였음을 실감 하였다.
카이로 쪽에서 시나이 반도 쪽으로 스웨즈만(홍해)밑을 관통하는 지하터널(Ahmad handi Tunnel)이다. 스웨즈 양안에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이집트 군인의 초소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있었으며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 홍해 Red Sea *
홍해는 스웨즈 운하 지하에 터널을 이용하여 Bus를 타고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한 순간에 건넜다. 참으로 쉬운 여정이다.
저 멀리 넓은 홍해가 사막 한 가운에 위치하고 있다. 홍해는 이집트 스웨즈 쪽에서 시나이 반도 서쪽과 동 북쪽에 요르단 아카바 만 까지다.
1,400여 년 전 홍해를 건넜을 때 모세의 어려움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또 다시 사막이 계속된다. 넓은 사막만 계속 보니 매우 단조롭다. 두 시간 넘게 달려 도로 옆에 휴게소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또다시 광야를 가기위한 준비를 하였다. 화장실은 어디서나 1인 1회 사용 시 1달러였다
* 마라의 쓴물 Marah Spring /Spring of Musa*
성경의 마라의 샘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 있고 주변도 엉성하다. 그 황량한 광야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을 방황한 광경을 상상 해 보기도 하였다. 물이 없어서, 먹을 것이 부족하여 아우성 쳤던 민족...
현재의 샘은 성경의 마라의 샘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 있고 주변도초라하고 엉성하다. 그 황량한 광야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을 방황한 광경을 상상 해 보기도 하였다. 물이 없어서, 먹을 것이 부족하여 아우성 쳤던 민족...
마라는 홍해 해저터널에서 30km 남쪽지점에 있었는데 마라지역이 이윤 무사(Uyun Musa)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집트 말로 이윤 무사는 모세의 우물이란다. 마라의 뜻은 쓰다, 쓴 맛, 슬픔 등을 나타낸다.
이곳은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광야를 거처 사흘 길을 와서 물을 얻지 못하여 마라(출15:22~27)에 이르러 그 곳 물이 써서 먹지 못해 원망을 하자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드리고 계시를 받아 한 나뭇가지를 물에 던졌더니 쓴 물맛이 변하여 달게 되었다는 곳이다.(출15:23.민33:8)
* 신(sin) 광야지역 Sin Desert *
신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여정 중, 엘림과 시내 산에 이르기 전에 있는 광야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 광야에 이르러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 하며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을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느냐 하며"(출 16:3) 불평을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신 광야라는 사막지대. 낮에는 구름기둥....밤에는 불기둥...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듣고 저녁에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주어 양식으로 먹게 했다.
만나는 사람 수대로 각 사람마다 하루에 한 오멜(약 2.4리터)씩 내려주었다. 평일에 한 오멜을 넘게 거두어 남으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 먹었다. 그러나 제 육일 에는 다음날 안식일 분까지 두 오멜을 거두어도 벌레가 생기거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만나는 시내 광야와 요단 동편에 이르기 까지 40년간 내려주어 양식으로 삼게 하였으며 가나안 지경에 이르러 그쳤다.(출 16:1-36)*맛나와 메추라기....
* 함맛 파라오의 유황 자연온천수 *
신광야 사막에서 홍해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함맛 파라오라는 곳에 현재 개발이 안 되여 있는 자연 온천수분출지역으로서 섭씨 70도가 넘으며 하루에 80만 배럴 정도가 나온단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발을 담그며, 이곳에서 잠시휴식을 취하니 발바닥이 뜨거워서 화끈 거린다.
* 르비딤 골짜기 Wadi Repidim *
신 광야와 시내 광야 사이에 있는 한 좁은 골짜기로서 오아시스가 있는 비옥한 평원 와디 파이란(출17,18장 민 33:14-15) 이다
와디의 길이는 약4km 나 된다고 하며, 도로 좌우로 종려나무와 잡목들이 무성하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야영 했던 곳이며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솟아났던 곳(출 17:1-6)으로 "므리바”라 불렀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여호와를 시험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모세와 아론과 홀이 아말렉 자손들이 한 산(670m)에 올라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손을 높이 들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현상이 일어나니까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 아래 돌을 쌓고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부축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출 17:8-16)는 성서의 말씀에 근거한 곳..... 밤이 되어 못올라 갔슴.
파이란 오아시스를 지나 오늘에 숙소까지 왔다. 밤인데 이곳을 지나면서 불빛이 많이 들어온다. 사람들이 좀 사는지(?)
그러면서 드는 생각. 뭘 먹고 살까.. 얼마나 불편할까? 하기야, 저들이 불편할 일이 있겠는가? 수 천년 살아온 민족이기에... 도리어 문명의 자리로 나오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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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500m의 MORGAN LAND산장 (시내산 )2박 *
강수량이 모자라 중동지역 전체가 사막이다 시피한데 이렇게 해발 1,500m 지역에 풀장을 설치해 놓고 한 여름에 더위를 달래고 있었다.
답사 기간 중에 기온은 우리나라에 늦가을과 같어서 수영장을 사용 못하고 온 것이 아쉬웠다. 여행하기에 제일 좋은 계절로 생각되어진다. 이 지역은 해발 1,470m이다. 기온도 많이 내려가 한기가 든다. 숙소의 환경은 최악이다
다.둘째날 - 11월 22일(목 ): 맑음
(1)시내산 등정 : 2.285m의 시내산 등정의 날
1) 호텔-시내산 등정-정상 해맞이-산상예베-성 캐더를 수도원-호텔
* 시내산 등정 *
오늘은 너무나 기대가 큰 답사일이다. 모세가 40일 기도 후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은 시내 산을 등정 한다는 셀레임 속에 호텔를 나왔다. 또 이집트답사를 마치고 이스라엘 남부국경지대를 거쳐 요르단으로 입국하는 날이다.
* 시내산/모세의 산 Sinai Maunt,Jobel Musa *
시내산은 카이로에서 415km지점, 척박한 시나이 반도의 남쪽, 황량한 검붉은 바위산 가운데 해발 2,285m 높이의 호렙산(출 3:1)을 말한다. 또한 예벨무사(모세의 산)이라고도 하며 2,700m 높이의 붉은 화강암에 봉우리로 이루어진 험준한 돌산중에 한 봉우리 이다. 시내(Sinai)는 히브리어로 “가시덤불”이라는 뜻이며 호렙(Horeb)은 “건조한 곳” 이라는 뜻이다.
* 시내산 등정 *
새벽 1:30분에 일어나 시내 산 정상에 올라가서 태양이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보기위해 새벽 2시경에 출발했다. 걸어서 2시간 40분정도 소요 되었다. 달빛이 비취어 먼 곳에 윤곽은 선명 하였다. 맑은 하늘에 별자리를 헤아리며 동방박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1시 30분에 힘들게 일어났다. 호텔주변은 아직 적막에 싸여 있고 하늘에는 넘어가는 달이 저 멀리 이름 모를 산에 걸려 있다. 새벽공기가 상쾌하다.
2시경에 성 케더린 수도원 입구 매표소에서 입산에 따른 수속을 거쳐 2시 30분경부터 야간등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곧 모세가 본 하늘을 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뜻한 총총한 별, 하늘은 하나님이 나에게도 말씀을 주실 것만 같았다.
나이에 비해 아직 까지 등산에는 자신이 있는 나지만 일행에게 피해를 줄 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낙타를 타고 가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고난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던 내 인생이지만 나는 모세가 오르던 그 길을, 그 당시에 모세를 생각하면서 오르고 있다. 낙타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엘리야의 길이라고 하는 800계단과 모세의 길이라는 200계단을 올라 정상일대에 도착했다.
일행 모두는 정상부근에 상점에서 뜨거운 물(1달러)을 구입하여 컵라면으로 추위를 달래며 일출을 기다렸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 이 시내 산 정상에 와 있다는 감격으로 모두들 추위(아마 영하 3도 정도)도 잊고 있다. 여기 좁은 상점 안에는 국적, 신분, 남 여 구분 없이 조금 있으면 떠오를 시내 산에 태양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남고 추워서 모두는 컵라면 1개씩을 먹었다.(더운물도 1$, 찬물도 1$,밑에 주차장에서도 1$.)
* 해맞이 *
2007년 11월 22일 새벽 5시 53분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내 산(호랩 산)에 태양...산위에 운해 속을 뚫고 솟아오르고 있다.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타 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여있는 순례객들...현재의 기온이 섭씨 영하 2-3도 정도 이지만 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새로운 날에 떠오르는 태양을 응시 하고 있다.
대지위에 이글거리는 태양 빛의 장관을 여기에서 맞이 하기위하여 세계각국에서 모여든 순례객들로 발 디딜곳이 없을 정도로 인산 인해이다., 이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것이다.
안개 속에 변화무쌍한 시내 산 일대에 봉우리군들을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을 관망하기 위하여 모여있는 순례객들의 모습....~~~
일출에 순간을 함께 하려고 추위 속에서도 담요를 걸치고 태양을 조망하고 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기념교회 이다(출 20장)
* 산상예배 *
이번 답사를 인솔하신 노재명 목사님의 집례로 2,285m의 시내산에서의 예배는 뜻이 깊었다.
* 하 산 *
장엄하게 떠 오른 ?양을 뒤로하고 아침 7시경 하산을 시작 하면서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께 이곳까지 순례 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에 다시 깊은 감사를 들였다. 하산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멀리보이는 엘리야의 예배소를 보면서 우물과 1,000년 이상된 상록수 한 구루가 2,000m 고지대에서 10m 이상 높게 자라고 있는 기이한 현상도 보았다. 올라 갈 때에는 야간이라 보지 못했던 주변의 험준한 경관을 보는 의미가 또 달랐다.
* 성 캐더린 수도원 *
시내산 기슭에 위치한 희랍 정교회에 속한 수도원으로 높은 돌담으로 가려져 있어 밖에서는 안을 볼 수 가 없다. 시내 산에서 하산하여 아침 8시 20분쯤 도착하였으나 호텔로가서 식사를 하고 10시경 다시 와서 답사를 하였다.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 유수티니아누스(Justinianus)황제의 명에 의해 건립된 이후 1400년 이상 한번도 파괴 되거나 정복당한 일없이 원형을 유지. 경내 도서관에는 귀중한 성경 사본과 성경 희귀본 들이 소장 되어있음.
*불 타지 않은 떨기나무*
수도원 경내에는 모세가 본 야훼 하나님의 표적으로 불에 타지않는 떨기나무와 하나님의 음성,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출3:1-5)는 장소가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우 물’도 있는데 지금은 뚜껑을 닫고 자동 펌프가 설치 되여있다.
2)광야체험-누웨바-타바(이집트/이스라엘국경)-엘랏(이스라엘/요르단국경)-페트라-호텔(3박)
* 광야 체험 Sinai Desert *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출 13:21)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 인도하셨다. 이 죽음의 광야를 200만이 넘는 민족이 어떻게 이동을 했는지.... 오직 여호아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 했을것이다.
지금(11월)은 건기의 계절... 가시나무가 말라 있다. 현지민들은 이 가시나무를 화목으로 사용 하고 있었다.
사막 가운데 싯딤나무, 가시나무, 사이를 잠시 걸으면서 .
* 싯딤나무 *
모세가 출애굽했었던 광야를 몸소 체험...
싯딤나무는 뿌리가 500미터 이상 뻗으며. 조각목으로 불리운다 .법궤가 이것으로 만들어졌다.
* 가시나무 *
광야 체험 중에 자주 볼 수 있었던 생명력이 대단한 가시나무들..신기해서 모두들 모여 사진을 촬영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이다.
가시가 장난이 아니더라. 굉장히 날카롭다. 만약 이것으로 가시관을 만든다면...
* 누웨바(Nuweiba) 리조트 *(중식 했던 곳)
홍해(아카바만 쪽) 해변에 접한 휴양 시설로 바닷물의 다양한 색상과 풍치가 아주 훌륭하다
* 타바(이집트/이스라엘국경) *
타바는 홍해(아카바만 쪽)에 위치한 이집트의 국경도시로서 이스라엘 입국에 관문이다.
* 엘랏(이스라엘의 도시) *
종려나무 숲이란 뜻. 이스라엘 남부의 항구도시로 공항이 있음. 홍해 아카바만 북쪽에 위치함.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때 이집트로부터 빼앗은 7평방km에 해당 된다. 입국수속이 까다롭고 경비가 삼엄하다.어수선하던 이집트에 비해 질서가 있고 환경이 깨끗하였다.
* 요르단국경(Avrona crossing point/Jordan) 통과 *
오후16시 요르단에 입국 수속을 마치고 요르단의 남북으로 길게 종단하고 있는 왕의대로(King's Highway)을 따라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페트라로 향했다..
옛날에는 낙타를 이용한 대상들의 무역로서 여러 제국의 군대와 문물이 왕래하는 통로였다.
* 페트라 그랜드 뷰(Grand View) 호텔 3박 *
요르단에 첫 밤을 페트라에서 잔다. 도시가 물이 부족한 지역 인것 같다. 나무가 별로 없는 경사진 길을 올라가 호텔이 있다. 오후 7시경에 도착 방을 배정 받았으나 물이 잘 나오지 않아 다른 방으로 옮기는 번거러움을 겪었다.
라.넷째 날 - 11월 23일(금):맑음
페트라(아라비아)-므리바의샘-마케루스(세레요한순교지)답사-아르논골짜기-마다바-느보산-암만 AL ITALY HOTEL(4박)
* 페트라(Petra-Sela) *
페트라 지역은 사해바다에서 동남쪽으로 약 75 km지점, 페트라의 뜻은 "반석" 또는 "바위" 라는 뜻이다.이 곳은 산악 바위로 이루어진 자연 요새인데, 매표소에서 부터 약 2-3km 정도를 들어가면 비로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사이로 길이 나있는 천연의 요새 입구에 다다른다.
이 길만 막으면 당시의 어떤 군대도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 전체적으로는 반경 4-5 km 정도의 그리 넓지 않은 지역이지만 당시 왕국의 수도로서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으로 보인다.
삶에 필수인 수로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어, 성문이 오래 동안 닫혀 있어도 물을 충분이 공급할 수 있다. 로마 령으로 합방된 후(105년) 시설된 돌로 된 포장도로, 야외극장등이 근래에 발굴되고 있다.
구불구불한 미로를 지나서 들어가면 아까 말씀 드린 붉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나오는데, 바로 여기가 나바티안들이 살았던 수도의 심장부이다. 신전이나 야외 원형극장 등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현재 발굴이 되고 있다.
이것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나비테아(Nabataen) 시대인 BC 4세기 경 사암지대에 건축하여 레무(R다 Mu)라고 불렀다.
또 알 카즈네(Al Khasneh:보물창고)라고 불리는 신전은 석조물로는 최고의 걸 작품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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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는 관광지로 잘 개발이 되어 있는데, 현지의 붉은 모래를 유리병에 넣으면서 각종 모양을 만드는 예술작품(Sand Art)을 보여주고 있다. 또 나올 때에는 걸어서 체력을 소비하지 않고 말을 이용해 본 것이 색다른 체험이 되였다.
* 가데스 바네아의 므리바 샘 Kadesh Banea *
“가네스 므리바”라고 부르는 모세가 광야에서 물을 내었던 곳. 가데스 바네아에 붙여진 또 하나의 별칭이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두 번째 원망하자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쳐서 샘을 낸 곳이다. 이 므리바 사건으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는 하나님의 중벌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신32:49-52, 민20:1-13, 민20:12).
2장 사진
상단에 보이는 바위가 쪼개진 반석(모세가 세게 때리긴 때렸나 보다)이며 여기서 샘이 흘러 나와 인근의 현대 페트라를 적시고 있으며, 고대에도 페트라에 물이 공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샘물 보호를 위하여 지어진 건물안의 반석에서 사철 샘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나도 한 모금 마실 수 있었다
* 마케루스 요새(세례요한 순교지) *
마케루스는 이스라엘 지역에 있는 헤로디움과 마사다와 함께 헤롯이 건설한 요세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순교했다(마14:1-12)
* 아르논 골짜기 *
*느보산 Mt.Nebo *
느보 산은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숨을 거둔 곳이다. 암만에서 남쪽으로 약 35km떨어진 해발 710m.
그 산에 정상을 시야가(Siyagha)라 부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너는 여리 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비림 산맥을 타고 느보 산 정상에서 죽어라” 라고 말씀하시며 너는 브리바 샘 가에서 내가 하나님 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너는 내가 주는 땅을 바라만 볼 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신34:4) 라고 하셨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한 번의 실수가....
모세는 지휘권을 여호수아에게 인계하고 출애굽 후 44년만인 124세로 뱃브올 맞은 편 골짜기에 죽어 묻혔으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신34:1-6)
교회 앞 언덕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모세의 놋 뱀 장대가 세워져있어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21:9),모세의 돌판 기념비도 세워져 있었다.
이 교회 앞에서 서쪽을 바라 보면 거칠 것 없는 광야가 펼쳐 지는데, 맑은 날에는 여리고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언덕 앞에는 교회쪽에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이정표가 있다. 예루살렘, 여리고등의 지명을 써 놓고 방향과 거리를 명기해 놓고 있다.
*교회 내부의 모습
교회 내부에는 정교하고 다양한 모자이크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발굴 당시의 자료들이 발굴된 모습 그대로 반지하 형태로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우리 일행들과 함께..
이곳은 4세기 경 로마시대에 세워졌던 모세를 기념하는 교회와 수도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프란체스코회에서 세운 교회가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마다바 *
매드바는 마다바라고 불리기도 한다. 느보 산에서 동쪽으로 약 9km 정도 덜어져 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운 성 죠지 교회내에는 1896년에 발견된 모자이크 때문이다. 주후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 당시의 예루살렘의지도가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또한 각 성지의 지도들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부터 시내산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까지 비교적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갈릴리 호수나 사해까지 그려져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 성의 중앙에 로마식 도로와 건축물들이 정확하게 모자이크 되어 있는데, 1967년 이후 예루살렘 발굴 작업 시에 이 지도에 나타난 건축물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모자익 지도
*성 죠지교회 내부의 모양* 암만 AL ITALY HOTEL 4박 *
현지 시간으로 19시 40분경에 도착 여장을 풀고 식사 후 하루에 답사 결과를 정리 할 수 있었다.
마.다섯째 날 - 11월 24일(토):맑음
요단강-베다니답사-알렌비국경통과(요르단/이스라엘)-이스라엘입국-맛사다(케이불카)-엔게디-사해수영-여리고 JERUSALEM INTERNATIONAL HOTEL(5박)
오늘부터 기대하던 이스라엘의 여러 성지를 답사한다. 더욱이 오늘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이라 성지를 다니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갈릴리 선상예배도 계획 되여 있어 뜻이 깊다.
* 요단 강 Jordan River *
요단 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40년 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의 북쪽 헬몬 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또 흘러 내려가 사해에 이르는 길이 220 km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강이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등장을 하며, 이 강을 중심으로 요단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게 된다.
* 베다니 답사(Bethany) *
베다바라(베다니)는 현재지명으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요단 강가에서 세례(마태복음 3:16)를 받으신 지역이다.
현재는 요르단 지역에 있어 이스라엘에서는 요단 강(알렌비 다리)을 건너서 와야 한다. 요르단에서는 이 지역일대를 대대적으로 발굴 정비 하고 있었다.
* 알렌비 국경통과 *
* 요르단 국경 사무소 * 요단강 다리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입국 철차를 마치고 BUS를 타기
위해서 이동중
요르단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긴장된 가운데 출(요르단),입(이스라엘)국 수속에 임했으나 식구가 너무 단출(9명)해서인지 생각보다 간략하게 마쳤다.
버스 안에서 요르단 안내자를 환송하고, 다시 이스라엘에서는 최원경 전도사의 인도로 맛사다로 향했다.
* 맛사다 (Masada) *
우리는 끝없이 넓은 사해를 왼 족으로 보면서 폭이 좁은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약 70km 를 Bus로 달리고 있다. 차창 밖으로 나무 한 그릇 자라지 않는 메마른 유대광야가 계속되어 지고 있다.
오늘이 안식일이라 현지시간 오후 2시까지 도착 하여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도착하여 케이불 카를 이용하였다.
유대광야 멀리 오른편 시야에 마사다는 거대한 타원형 원통을 중간에 잘라놓은 듯한 모양이다. 해발 450m의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에 있다. 길이가 약 600m, 폭(가운데 부분)이 250m 되는 이곳이 유대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 마사다 이다.
헤롯이 죽 은지 70년 후 마사다는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게 됐다. 예루살렘이 로마군대에 함락 될 때까지 끝까지 저항하던 960여명의 유대인이 마사다 요새로 이동하였다. 로마군대는 지형이 험하여 공격이 여의치 않자 3년 만에 마사다 정상에 이르는 토담 경사로를 만들어 공격에 성공 하였다.
마사다는 헤롯(B.C 37 - 4년)이 유대인의 반란과 왕위를 노리는 찬탈을 염려하여 유사시에 피신할 수 있는 요새 궁전을 마사다 정상 북쪽 끝 아슬아슬한 절벽부분에 계단 모양의 3층 궁전을 지었다. 신기에 가까운 건축기술의 걸작 품으로 평가 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정상부분에 1,300M의 성벽을 쌓았다. 또한 저수장과 여러개의 곡식창고도 만들었다. 그러나 헤롯 왕 때는 마사다가 요새기능을 발휘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3년간 마사다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퍼스(jOSEPHUS)의 증언이다. “로마군대가 공격하기 전 날 밤, 유대 지도자 벤 야일은 960여명의 동지들을 모아 놓고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의 칼에 의한 죽음이냐> 그러나 벤 야일은 제 3의 선택을 제시 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먼저 그들은 소유물을 한데모아 불살랐다. 남자들은 가족 중에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게 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열 사람을 뽑아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게 했다. 뽑히지 않은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 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아홉 명을 죽인 뒤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이 사실은 동굴에 숨어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를 발견 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다. 요세퍼스는 이들의 증언을 그의 역사책[유대인 전쟁 기]에 기록하여 남겨 놓았다.
오늘날 마사다는 유대인들이 힘이 없어 죽음으로서 항거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를 다짐하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며 군대훈련의 최종코스는 마사다에 오르는 것이다. 마사다 정상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합하여 힘차게 외친다
“마사다의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Masada anaever Again !"
* 엔 게디 Engedi *
엔게디는 맛사다 북쪽 16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헤브론에서 거의 동북쪽에 있는 샘과 이에 딸린 내(개울)의 이름으로, 사해 서쪽에 있는 석회석 벼랑 아래서 많은 물이 솟아나와 이루어진 곳이다.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여 있고 굴이 많으며 , 이곳의 폭포는 남부지방의 유일한 폭포다. 부근은 자연 보호구역으로 뛰어 노는 짐승을 볼 수 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엔게디에 숨었다(삼상 23:29, 24:22, 그 외에 대하 20:2, 아1:14, 겔47:10).
* 유대광야에서 가장 이상적인 오아시스
엔게디는 B.C.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있으며, 비잔틴시대의 건물 유적과 유대교회당의 유적도 있다.
* 사해수영 Dead Sea*
이스라엘은 면적이 우리나라의 8분의 1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秘景이 많은 땅이다. 그 중 하나가 사해이다. 死海(鹽海)는 해면보다 398m나 아래에 있어 지표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다. 길이는 약 80km, 가장 넓은 폭이 18km, 수면의 넓이 1,036평방km, 가장 깊은 수심은 396m, 소금성분 300g/L이상, 염분비율 25-30% 이며 사해 바닷물 속에는 미네랄 등 인체에 유익한 각종 원소들이 130여 가지가 함유되었음을 발견 순도 높은 소금, 머드팩, 화장품 및 의약품 원료들이 생산 되고 있다. 우리일행은 수영복을 입고 배를 하늘로 향하여 손 발을 조금씩 움직이니 신기하게도 수영(배영)이 되는 신기함을 체험 하였다.
*여리고 INTERNATONAL HOTEL 5박*
이스라엘에 첫 밤은 너무나 시설이 좋은 Hotel이였다.
오늘은 그동안 답사 해온 이집트, 요르단 답사의 결과를 정리하고, 아직 남아 있는 Israel 답사을 위하여 준비하고 잠을 청 했으나, 내일부터가 기대 되여 얼른 잠이 오지 않았다.
바.여섯째 날 - 11월 25일(주일):맑음
여리고 성 답사-쿰란-팔복산, 오병이어 및 베드로 수위권 교회- 중식(베드로 물고기)-갈릴리사역의 중심지 가버나움 -골란고원 일대(가이사 라빌립보-텔 단)-갈릴리 선상예배-Maagan Holiday Vilage(on the sea of galilee) (6박)
이스라엘에 첫 밤을 보내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호텔은 서비스나 시설 등 모두가 만족스러웠다. 질 좋은 아침식사를 제공 받았으며,맛있는 오렌지도 먹었다. 이제 바쁜 오늘의 일정이 시작된다.
* 여리고(Jericho)城 답사 *
여리고는 해발고도 -255m의 해수면 보다 낮은 곳으로 종려나무 성(신34:3, 대하28:15)으로도 불리었고, 요단강 계곡의 사해 서북쪽 약 17km지점에 중요한 성읍이며 또한 교통의 요충지다. 모세가 죽기 전에 느보 산에서 바라만 보았던 여리고는 출애굽 후 약속의 땅으로 가기위하여 40년 만에 요단강을 건넌 후 이곳을 첫째 주요정복지로 정하였던 곳이다. 여호와의 부름으로 엘리야 선지자가 승천하려고 할 때 ,엘리사와 같이 이곳에 머물렀다가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곳 이기도하다.
엘리사의 샘에는 지금도 분당 약 4천 500 리터의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있어 이를 본 나는 신기하게 여기며 물을 마셔 보았다
.
예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마 20 29-34, 막 10 : 46-52, 눅 18:35-43), 또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키가 작은 삭개오를 만나신 곳도 이곳이다(눅 19:5-9).
[여리고 성 공격시 정탐꾼이기생 랗합을 만난곳]
[나팔 불고 고함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수 6:15-20)]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다(마20:29-34)]
[삭개오를 만난곳(눅 19:5-9)]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기도 하시며 사탄에게 시험 받던 성전산이 여리고 성 뒷산이다]
* 쿰란에 사해사본 Dead sea Scrolls/Wadi Qumran *
쿰란은 여리고성에서 남쪽으로 약 10km정도 내려 가면 사해 서쪽에 있다. 1947년에 와디 쿰란(Wadi Qumrun)지역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들은 성경본문과 신 구약 중간시대 유대교의 중요한 초기 자료이다.
제 4 동굴에서는 약 4만개의 단편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을 이어 맞추니 400개의 사본이 되었고 그 가운데 약 100개의 성경사본이 포함 되여 있었다. 주로 파피루스나 가죽에 기록 되었고 후 대에 몇 몇 사본들은 양피지에 기록 되여 세마포에 싸여서 항아리 속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원본에서 필사한 사본만이 남아 잇다. 쿰란은 BC 33년에 지진으로 무너진 후 얼마동안은 사람이 살지 못했다. 근래에 1,200개 정도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 팔복 산 기념교회 The Church of the Betitudes *
팔복교회는 티베리아에서 북쪽으로 약 11km 지점, 타브가에 도착하기 전에 좌측 산 언덕으로 약 3km 올라가면 갈릴리 호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절경의 팔복 산 정상에 있다. 이곳이 예수께서 팔복의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곳이다.“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하시며.(마5:1-14). 교회 외부는 팔복을 상징 하기위하여 팔각형 이다.
외부 지붕은 둥근 돔으로 만들어 지은 것이 특이하다. 내부에 천장 돔 부분 유리창에는 라틴어로 팔복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오병이어 기념교회 The Church of Tow fishes and Five loves *
오병이어 교회는 예수님께서 떡 5덩어리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명(5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을 행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오늘은 입장이 허락 안되는 날이여서 밖에서만 보았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 사 하늘를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다(눅 9:12-17)
* 베드로 수위권교회 The Church of The Primacy of St. Peter *
베드로 수위권 교회는 수제자 임명 교회라고도 하며, 제자들 중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고 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38년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바위 위에 세운 교회이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며 예수께서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교회 중앙 앞에 바위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식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중식에는 갈릴리바다에서 직접 잡은 베드로 고기로...*
베드로가 어부였던 데서 유래된 민물고기의 일종인“베드로 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를 기름에 튀겨서 요리하여 관광객에게 식사용으로 팔고 있어 점심으로 먹었다. 맛보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
* 가버나움 Capernaum *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티베리아로 부터 북동쪽으로 16km 지점에 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지방의 선교본부라고 할 만큼 이곳에서 가장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좋은 교훈을 많이 가르치셨다. 당시에 가버나움의 인구는 대략 15,000 - 20,000명 정도의 꽤 큰 도시였으나 끝까지 회개치 않음으로 멸망을 예고은대로(마 11:23)멸망 한 후 오랬 동안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여기에서 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의 회당과 고대의 마을의 일부도 발굴했다.
* 골란고원 *
헬몬 산기슭에서 갈릴리호수에 이르는 골란고원은 남북이 약 70km, 동서가 약 20km, 넓이는 1,150평방km나 된다. 이 고원이 오늘날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생명의 젖줄인 헬몬 산의 수원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정예부대를 투입 그 곳을 시리아로부터 빼앗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 곳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가이사라 빌립보 Caesarea Philippi *
가이사라 빌립보는텔단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4km거리에 골란고원의 헬몬 산 밑에 있다. 날 이헤롯왕이 수원지 물가에 대리석으로 신전을 만들어 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헤롯이 죽은 후 그 아들 헤롯 빌립이 분봉 왕이 된 후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로마 황제와 자기이름을 결합하여 “가이사라 빌립보”라 불렀다.
예수께서 제자와 함께 이곳을 방문 하셨을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게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다.(마16:13-20, 막8:27-30)라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곳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 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못하리라“하셨다.(마16:18). 그러나 기독교 성지 중의 성지가 되는 이곳에는 고대 사람들이 판 신을 섬긴 신전의 유적은 남아 있지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기념하는 교회나 기념물은 아무것도 없다.
* 텔단 Tel Dan *
텔단 지방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23 km 정도 떨어진 국경 지역으로 헬몬 산으로 부터 풍부한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요단강이 발원하는 지역이다. 요단의 뜻이 “단에서 부터 흐른다”라는 히브리어 “요레드단”에서 연유되어 “요르단”으로 부르게 되어 요단강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단 지파가 불레셋 사람들에게 밀려나서 북쪽 라이스 지방으로 진출, 점령함으로써 이곳의 이름이 “단”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곳 단은 우상 숭배의 근거지로도 사용이 되었는데, 현재 이 제단의 일부를 볼 수 있다.
* 갈릴리 바다에서 선상예배(The Sea of Galilee) *
갈릴리 바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50km거리에 위치한 지중해보다 해저 -212m의 담수의 호수, 남북의 길이는 21km, 동서의 폭은 13km,수심은 평균 44m, 호수의 둘레는 50km,약 170평방km의 넓은 호수이다. 여기에 물은 3분지 2이상이 헬몬 산으로부터 들어오며 이 생명수로 농작물과 유실수를 재배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켰다.
* 선상예배 및 성찬식 *
오늘이 주일이라 선상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옛날 예수님이 타셨다는 배와 똑같은 배에 우리일행과 서울 용산소재 주신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승선하였다. 1부 예배는 우리 측 이재용 목사님의 말씀괴 이경자 권사의 기도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이루어졌다.
이어서 2부 성찬식은 주신교회의 담임 목사님 집례로 선상에서 다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가시며 베드로의 믿음이 약함을 나무라던 일과, 폭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던 능력을 찬양하여 보기도 하였다.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 서서 2,000년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멀리 보이는 현대의 전기 불빛이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마음이 생기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면서 고기잡이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그 형제요한을 부르셨던 곳이다.(마4!*,-22, 막1:16-20, 5:1-11).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였지만 모두가 2000년 전으로 돌아간 마음으로 뜻 깊은 예배를 마쳤다.
* Maagan Holiday Vilage *(6박)
이스라엘에 대표적인 기브츠 숙박 시설로서 우리나라 국기, 태극기가 게양 되어 있었다. 갈릴리 바다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많은 나무와 숲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수영장, 옥외 야영장. 공연 및 강연 장등 각종 시설이 완벽하다. 우리나라의 유스 호스텔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사.일곱째 날 - 11월 26일(월):맑음
요단강 세례터-예수님 첫 번째 이적 혼인잔치의 가나-예수님께서 어린시절을 보내셨던 나사렛(회당)-므깃도(아마겟돈)-엘리야의 갈멜산-사도바울이 선교여행시 이용했고 감옥에 갇혀도 있었던 가이사라 항구-Park Plaza Hotel(7박)
* 야르데니트 예수님 세례 터(요단 강)
Yardenit Baptismal Site on the Jordan River *
이곳은 순례 객들을 위하여 긴내렛 기브츠에서 만들어 놓은 곳이다. 갈릴리바다에서 풍부한 물이 흘러 요단강이 시작되는 곳에 다리가 놓여 있고, 그 남쪽에 세례 장소가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기독교인이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던 예수님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은 요르단쪽 요단 강 부근 베다니로 알려져 있다.
* 혼인잔치의 가나 Cana *
가나는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7km 지점에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곳을 기념하여 교회가 세워져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어머니와 같이 청함을 받아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곳이며(요2:1-11) 또한 이곳에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고쳐주셨다. 이것이 두 번째 이적이기도 하다(요4:46-54).
현재의 가나 교회는 1883년 세워졌고, 전 마을이 포도주 장사를 위주로 하며 순례 객들도, 혼인 찬치 때에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기리며 포도주를 사간다. 오늘날 이 교회당에서 결혼을 행하면 행복하게 산 다고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혼례식을 올린다고 한다.
* 나사렛(회당) Nazareth *
나사렛은 티베리아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32 km 정도 떨어져 있고, 예루살렘에서는 북쪽으로 약 135 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해발 380 m 정도에 위치한 아주 오래된 도시이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며 예수님이 출생하여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생활하신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를 때에 나사렛 예수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을 비하하는 호칭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나사렛이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는 호칭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며, 이 말은 지금은 기독교인을 칭하는 말로 바뀌어서 신앙적으로 어쩌면 우리들의 고향은 모두 나사렛이 아닐까 한다.
오늘 날의 나사렛은 아랍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아랍인 마을인데, 그들 중에 약 60% 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성지 순례객들은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지역이다.
마리아가 예수 수태의 사실을 천사로부터 고지 받은 마리아의 집터 위에 마리아 수태고지교회가 세워져 있다. 천장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를 고지하듯 밝은 빛이 제단까지 내리 비추고 있다. 교회 내부에는 마리아가 살던 집터로 알려진 수태 고지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의 벽에는 수채화로 그려진 낙원을 묘사한 그림이 있으며 꽃과 승리의 화환이 그려져 있다.
이 교회를 유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성모 마리아와 성자 예수의 모습을 주제로 한 성화들이 교회의 넓은 벽면에 가득 걸려 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리아가 색동옷을 입은 어린 예수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인 이남규 교수의 작품이 있다. 교회의 안쪽 바닥은 온통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어 한층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제단 앞에서 천장을 올려다 보면 높이가 60m나 되는 뾰족탑이 마치 거꾸로 세워 놓은듯한 백합꽃처럼 느껴진다.
성 가정교회는 성요셉 교회라고도 불리는데, 마리아 수태고지교회 바로 옆에 위치한다.
요셉이 정혼한 여자였던 마리아가 결혼을 하기도 전에 아이를 수태함으로써 당시에는 도덕적,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가정을 지키고자 이를 조용히 끊고 마무리지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와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 므깃도 Megiddo(아마겟돈) *
므깃도는 나사렛에서 약 18km 정도 떨어진 이스르엘 평야에 위치하는데, 아마겟돈이라는 말로 더 유명한 군사 전략적 요충지 중의 하나이었다.
이 므깃도는 유다 왕이었던 아하시야 왕과 요시아 왕이 전사한 곳이며, 주전 3000년 전부터 주전 4세기까지 무려 24번이나 점령과 파괴가 반복되는 전쟁터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성경에는 인류 최후의 전쟁이 있을 곳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지의 박물관에서 므깃도의 모형과 함께 요새로서의 모습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다.
가나안 땅을 장악하려면 반드시 이 므깃도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이 므깃도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해안을 따라 애굽으로, 남쪽으로는 사마리아와 세겜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북쪽으로는 악고를 지나 두로와 시돈으로, 또 갈릴리를 거쳐 다메섹으로, 벳산을 거쳐 암만으로 연결되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이스르엘 평야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곡창지대로, 이 므깃도는 고대로부터 이 이스르엘 평야를 지키는 요새 도시로 전해지고 있다.
평화 시에는 대상들이 왕래하는 길목이었고, 전시에는 북쪽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이 애굽을 치러 남쪽으로 갈 때, 남쪽의 애굽이 북쪽을 치러 갈 때, 항상 이 므깃도를 거쳐서 가야만 했으므로 이 므깃도는 아군에게는 발판으로, 적군에게는 점령해야만 하는 교두보로 이용이 되었다.
므깃도를 둘러보면 솔로몬 당시의 성터와 궁전 터를 볼 수가 있으며, 아합왕 때 만들어진 수로를 볼 수가 있다. 이 수로는 므깃도 성 내부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120m의 통로. 성 밖까지 지하로 50m 에 샘까지 지하 수로를 건설함으로써 식수 문제를 해결 했는데, 현지를 방문해 보면 이 지하 수로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 갈멜산 Mt.Garmel *
갈멜 산은 최고봉이 552m이나, 갈멜 산은 이스르엘 평야 인근에 있는 산악지대에 위치하는데, 평균 높이가 약 500m, 길이가 약 23km, 폭이 약 10km에 이르는 산맥으로 이 지역 전체를 갈멜 산 지역으로 부른다.
갈멜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산으로 구약 성경에는 기록 되어 있다.
이 갈멜 산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참 신과 거짓 신을 분별하는 대결을 벌여, 승리하고 그들 거짓 선지자들을 기손 강에 전멸시키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던 곳이다.
엘리야가 홀로 바알, 아세라 선지자가 대결했던 봉우리가 바로 “무흐라카”라는 산 정상이며, 이 말의 뜻이 “불의 장소”,“불이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현지에는 엘리야 기념교회가 해발 486m의 무흐라카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엘리야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엘리야 석상 받침대에는 엘리야와 관련된 성경 구절이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로 적여 있다.
* 가이사라 항구 Caesarea *
가이샤라는 갈멜 산으로부터 남쪽으로약 2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안의 도시로 헤롯 왕에 의해서 주전 20년에 중건되어 10년 만에 세워진 항구도시이다. 현재는 사람들이 거주하지는 않고 유적만이 존재한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헤롯왕에게 이 지역을 선사함으로써 헤롯왕은 감사의 표시로 이 항구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도시에 로마 총독의 관저와 행정 본부가 있었고 시장과 경기장, 원형 극장, 로마식 공중 목욕탕 등이 건축 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인구가 약 10만 명에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도시는 후에 십자군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 패망하면서 역사속의 도시로 사라져 가게 되었다. 지금은 당시의 유적들이 발굴이 되어서 관광객을 맞고 있으며, 지중해를 바라보는 바닷가 모래밭에 유적들이 있어서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바다를 바라 볼 수 있는 있는 원형 야외극장, 갈멜 산에서 부터 물을 끌여 들였던 수로에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야외 원형 극장에서는 지금도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콘서트가 가끔 열린다고 하니까 대단히 낭만적인 곳이라 하겠다.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우리 기독교가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 여러 번 들린 곳으로, 로마에 수감되기 전에 이 곳 가이사랴 감옥에 약 2년간 수감되어 있다가 로마로 가서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Park Plaza Hotel(7박)*
그동안 너무 먼 거리를 강행군 하였다. 심신이 많이 피로 해있다. 모처럼 선물 센터에 들러 마음에 드는 선물을 샀지요. 하루를 정리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아.여덟번째 날 - 11월 27일(화):맑음
감란산 일대-성전산-예루살렘 성-십자가의 길(골고다의 언덕)-시온산-베들레햄-기브온-텔아비브 공항-타슈겐트 국제공항
** 오늘은 성지순례의 마지막 날이다. 가장 핵심적인 성지를 답사한다.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 또한 평화의 도시 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상반되게 수 세기동안 전쟁으로 주인이 헤아릴 수도 없이 바뀌었었고, 파괴되고 또다시 재건되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1)감란산일대 답사 : 승천교회-주기도문교회- 눈물교회- 실로암 샘-만국교회(겟세마네 동산)
*감란산 답사 Oliver Mount *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편에 위치한 해발 830m인 산으로 감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감람산은 북쪽 히브리대학의 동쪽에 있는 해발 826m인 스코프스 산에서 시작 한다 감람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유는 이 산에 감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감람나무는 올리브 나무를 말한다.
* 승천 기념교회 *
승천 기념교회(돔)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만에 감람산에서 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령을 보내시기로 약속 하신 후 승
천하신 곳을 기념하여 세운 돔이다. 최초의 승천 기념건물은 380년경 지붕이 없는
8각형이었다. 그 후 십자군이 재 수축하였고 1187년에는 모슬렘 교도에 의해 지붕에 돔(Dome)이 씌어졌다.
건물 중앙에는 승천 때 밟은 발자국이 남겨졌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 하시더니”“ 축복 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눅 24:50,51) 두 천사들은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했다.
*기온 샘*
샘 입구에서 츠계로 내려가면 무이 솟아 터널을 통해 흐른다. 이 기혼 샘에서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와이 된 곳이다(왕상1:38-39).
현재는 아랍인 거주 하는 지역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눈물 교회*
예수님 눈물교회는 감람산 정상에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내려가는 좀 가파른 언덕길 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눈물교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최후를 생각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신 것을 기념하여 지어 졌는데, 이 교회 돔 지붕의 네 모퉁이에는 눈물 모양의 뽀족한 돌이 하늘을 향해 달려 있는 작은 교회이다. 교회 내부에 들어가 보면 예루살렘 성을 향해 돔 형태의 이 창문에는 쇠창살로 무늬가 만들어져 있다. 이 창문을 통해 보면 예루살렘 성이 유난히도 잘 보이고 또 성전 산의 황금사원과 그 뒤편으로 파란 돔형 지붕을 가진 성묘 교회가 잘 보인다.
이 쇠창살은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상징해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방문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창살 앞에서 예루살렘 성전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곤 한다.
*만국 교회*
만국교회는 겟세마네(Gethsemane)에 동산에 있으며 히브리어로 “기름을 짠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에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찾아온 겟세마네라는 곳(막 14:32)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끔 모이던 곳(요 18:2)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기도하시던 동산(요 18:1, 마 26:36)으로 땀이 핏방울로 변하도록 기도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가룟 유다에 의해 인도된 유대인 대제사장 가야바 무리들에게 잡히신 곳이기도 하다.
만국 교회 의 정원에는 오래된 감람나무들이 많은데, 거의 아름드리 정도의 몸통을 가진 몇 백 년 이상 된 감람나무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고, 또 그 중에는 예수님 당시부터 있었다는 2000년이 넘은 감람나무도 있다.
*주기도문 교회*
예수님 승천당에서 남쪽 방향의 아래로 약 70m지점에 주기도문 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출입문 윗 벽면에 “Pater Noster”라는 간판이 부착되어 있다. Pater Noster는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파테르 노스테르(Pater
Noster)교회라 부르기도 한다. 교회 내에 긴 회랑에는 우리의 한글 주기도문을 포함해 세계 각국 나라말로 주기도문이 있다
(2)성전 산과 황금 돔-통곡의 벽-실로암 연못-기드론 골자기-십자가의 길(골고다의 언덕)-성묘교회
*성전 산*
성전 산은 14만 평방m로 예루살렘 성 전체의 6분지 1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 이다. 여기에는 솔로몬 왕이 제 1성전을 건축(BC 959. 11. 8완공)하였고, 헤롯 왕이 제 2성전을 증축(BC 70)하였다. 성전산은 아랍인들은 이스마엘을 바치려 했던 곳인 동시에 모하메드가 승천 한곳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이다. 예수님의 예언 되로 성전은 70년 로마에 의해 아브월(양력 7~8월) 9일 서쪽벽 폭 60m, 높이18m만 남기고 돌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파괴된 후 모리아 산에 성전이 다시 세워지지 못 하였다.
* 황금 돔(사원)*
성전산 정상에는 아랍국의 아브드엘 말리크 왕에 의하여 691년 이슬람(회교)의 대 사원이 완성 되었다. Dome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금 사원이 세워져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데 “오마르 사원”“바위 사원”이라고도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곳이며, 모하메드가 승천한 곳이라고 믿고 있다. 모하메드가 승천할 때 생겼다는 발자국이 바위 한쪽에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회교인)들에게는 모하멧이 태어난 메카 Mecca, 모하멧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 Medina 와
더블어 이 곳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성을 회교의 3대 성지로 여기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황금 사원 내부 중심에 있는 이 거룩한 바위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바위사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원은 십자군 시대(1187년 멸망)에는 기독교인의 성전으로 사용되다가 그 후 부터 지금 까지 회교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곡의 벽*
통곡의 벽은 폭 60m, 높이 18m로, 이 벽은 헤롯 대왕이 주전 20년부터 46년간에 걸쳐 건축한 제 2성전의 서쪽 벽에 해당되는 곳을 말하는데, 주후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파괴 될 때 이 성전 벽이 일부 남았다고 한다. 그 때 서쪽 벽만을 남겨놓아 후세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후 유대인들에게 성전 출입이 금지되었고, 1년에 단한번 성전이 파괴된 날인 아브 월(양력 7-8월)9일 하루만을 들어 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날 유대인들이 이 벽 근처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수난과 박해를 받으며 살아온 한 많은 삶을 눈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통곡하며 울었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 되었다고 한다.
1967년 6일 전쟁 이전(6월 7일 10시경) 요르단이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이스라엘 정예 공수부대가 예루살렘 공격에 성공하여 2천년 동안 잃었던 이곳을 완전히 탈환하고 통곡의 벽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난 2천년동안 통곡의 벽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귀향의 꿈을 상징하는 성소가 되었다.이곳을 답사하는 순례 객 중에 통곡의 벽의 얽힌 한스런 유래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다.
통곡의 벽 앞에서 벅찬 감회를 감당할 수 가 없었다. 지금은 출입이 자유로워 통곡의 벽을 반으로 나누어 남쪽은 여자가, 북쪽은 남자들이 기도 하며, 남자는 반드시 들어가는 입구에서 주는 키파를 머리에 쓰고(둥근 작은 모자)나 모자를 써야하고 여자는 어깨와 무릅이 드러나지 않은 얇은 옷을 입어야 한다.
키파를 쓰는 유래는 유대인의 탈무드에 기도할때머리를 덮어서 가리는 것이 좋다고 기록 되여 있는 것에 연유하고 있다.
통곡의 벽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간절한 소망을 종이에 적어 통곡의 벽에 남겨놓고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 소박한 신앙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순례 객들도 역시 이 벽의 틈새에 기도 제목을 끼워 놓고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기드론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해발 750m)과 감람산(해발 830m)의 사이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예루살렘 성의 서편에서 돌아 내려오는 힌놈의 골짜기와 합쳐진 후 에느로겔 아래를 통과하여 사해로 들어간다.
*성안나 교회*
성 안나 교회는 예루살렘 동편의 사자 문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교회로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았던 집터 위에 지어진 교회라고 한다. 교회의 지하실에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장소가 있으며, 아름다운 모습의 교회이다.
또한 이 교회는 천정의 특이한 구조로 인해 울림이 아주 좋고 잔향이 오래도록 이어져서 많은 순례 객들이 이곳에 와서는 찬송을 하곤 하는데, 자신들의 소리보다 울림이 좋고, 고운 음으로 은은하게 돌아오감동 때문에 순례 객들은 이 장소를 잊지 못하되는 곳이기도 하다.
*베데스타 연못*
성안네 교회의 마당에 들어가면 이 교회의 서쪽에 인접하여 베데스다 연못의 유적이 발견된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현재 성안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물도 말라 버리고, 그저 돌들로 이루어진 연못 벽들이 남아 있어서 연못의 형태하고는 거리가 좀 먼 물 저장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 밖의 북쪽 벽에 가까운 곳으로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문(Sheep Gate, 느 3:1, 요 5:2) 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연못에서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
십자가의 길(비아돌로로사)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신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세상 죄를 대신하여 피와 땀으로 온 몸을 물들이며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 무덤교회가 있는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신 슬픔의 길”“수난의 길”이라 말한다. 모든 순례 객들도 그 발자취를 따라 순례를 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에 남대문 시장보다 더 복잡하며 국제 소매치기까지 한 목 보는 복잡한 길목 9개의 지점에서 발길을 잠시 멈추고 그곳에 관련된 사연을 설명 들으며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해 보는 것이다.
*성묘교회*
거룩한 무덤(성묘)교회는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명으로 336년에 건축된 후 파괴와 재건이 반복 되다가, 그 후 이슬람교도에 의해 다시 파괴 된 것을 십자군운동과 더불어 1149년에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의 마지막 장소인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장소위에 오늘날에 모습으로 복구되어 세워진 교회이다. 골고다라는 뜻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해골이라는 뜻이며 골고다는 예수님 당시의 아랍어이고, 헬라어로는 크라니온(KRANION), 라틴어로는 칼바(KALVA)인데, 영어로는 칼바리(CALVARY)가 된다. 이것이 우리말로는 갈보리, 골고다와 갈보리는 같은 뜻이다.
성묘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사건이 일어났던 , 우리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가 아닐 수 없다. 골고다 언덕 전체가 성묘 교회로 덮여 있다고 보면 된다.
현재 성묘 교회는 여섯 교파가 소유 및 관리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 무덤과 부활 예배소, 예수님 시신을 염했던 장소는 공동 소유이고, 그 외에 지역은 그리스 정교회, 로마 카톨릭, 알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틱 교회, 에디오피아 교회가 관리를 공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성묘 교회 내부로 들어가서 바로 앞에 보이는 돌 판과 하얀색 병들이 달려 있는 곳이 있다.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을 땅에 내린 장소이다. 이곳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석회암 판에 눕히고 몰 약과 향을 섞은 세마포로 장례를 준비한 곳이다.
(3)시온산-마가의 다락방- 다윗왕의 가묘--베드로통곡교회
*시온산 Mt.Zion*
*마가의 다락방*
마가의 다락방은 구조적으로 우리가 얘기하는 다락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데, 지붕 이 있는 방을 서양 건축 양식에서는 다락방으로 부른다고 한다. 현재 지어져 있는 다락방은 예수님 당시의 120명이 모여 기도하던 다락방이 아니고 1333년경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의해 지어진 고딕 양식의 기념 건물이다. 내부는 아치형 돔 형태의 건물로 꾸며져 있는데, 아무런 장식품들이 없어서 조금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울림은 대단히 좋아서 이곳에서 찬양을 하면 곱게 울려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전날 밤에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던 곳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 13:4-15) 또 떡과 포도주를 들어 기념하라(고전 11:23-26) 라고 말씀 하시면서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과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곳이다. 바로 이 다락방에서 이런 일들이 행하여 졌음을 느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것을 따라 성만찬을 지금도 하고 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과 여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이시고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신 곳이다(누 24:36-43).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집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성령 충만함을 받고 따라 방언이 시작된 장소이며 또한 초대 교회가 시작되는 역사적 장소다.
*다윗왕의 가묘*
다윗왕의무덤(가묘)은 마가의 다락방 옆에 있다. 이 무덤은 석실 안에 높이 2m 폭 1m 정도의 큰 석관으로 자주색 천으로 덮여 있으며, 다윗의 별이라고 하는 금박의 별들이 이 자주색 천에 새겨져 있다. 무덤은 쇠창살로 보호가 되고 있다. 원래 다윗왕의 무덤은 다윗성에 있어야 하는데, 찾을 길이 없고 지금의 가묘를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아주 근엄한 표정과 유대인 사제 특유의 검은 색 옷과 모자를 쓰고 있다. 순례 객들도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써야 하며, 여자들은 노출이 심한 복장은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기도 하다.
*베드로의 통곡교회-The church of St.Prter in Callicantu -베드로 닭울음교회 *
베드로 통곡교회는 시온산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교회인데, 성전산과 감람산이 잘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게 되는데, 이 때 뒤따라온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게 된다. (마 26: 69-74). (마 26: 75)
베드로의 세번 부인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 예언이 된 내용이었는데, 베드로가 세번 부인한 후 예수님께서 “네가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세워진 현재의 교회를 베드로 통곡 교회라 부르고 있다.
물론 이 곳은 가야바의 집터로 알려져 있는 장소이며,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세워졌다가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후에 1931년에 현재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The Church of St. Peter in Gallicantu 인데, 갈리칸투는 닭이 운다는 뜻으로 베드로 닭울음 교회 또는 베드로 통곡 교회로 부른다.
교회 내부 지하에는 예수님이 천장에 매달려 고문을 당한 장소와 밧줄에 묶여 지하로 내려뜨려 갇히었다는 지하 감옥 동굴이 현재 남아 있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4)베들레햄-기브온-텔아비브 국제공항-타슈겐트 국제공항
* 베들레햄 Bethleem *
베들레햄은 예루살렘성에서 남쪽으로 약 10km지점에 소재하며, 해발 777m의 유대 지방의 산악지대에 작은 마을로 예수탄생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팔레스틴과의 분쟁이 심할때는 방문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현재도 8m 높이에 분리장벽으로 완전히 분리하여 고립 아닌 고립이 되게 하고 있다. 장벽 출입문에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군인이 출입자를 삼엄하게 검색하고 있다. 베들레햄은 사사시대애에 릇의 시가가 있으며, 그는 시모 나오미를 따라와 부호인 보아스와 재혼하여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룻2~4장). 베들레햄은 다윗이 태어난 곳이며, 다윗은 이곳에서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 16:1-13). 또한 다윗이 자라날 때 이곳 목장에서 양을 치던 곳이 있다.
*베들레햄 광장*
베들레헴 광장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기념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되고 있다.
135년에 베들레햄 동굴 위에 로마의 아도니스 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졌는데 200년 후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해 아도니스 신전을 헐어 버리고 예수님탄생 교회를 창건하였다(339년).
예수님 탄생교회에 출 입구에 높이가 120cm, 폭이 80cm밖에 안 되는 좁은 문“겸손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머리를 숙여야 한단다. 그래서 이 돌문을 “겸손의 문”이라 통상 부른다. 원래는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 탄생교회 The Church of the Nativity *
예수님 탄생교회는 베들레헴의 정 중앙 광장에 위치하는데 이후 파괴되고 재건되는 가운데 1100년 크리스마스 날, 이 교회에서 왕위 즉위식이 있었다.
현재 교회 내부지하층에 작은 대리석 동굴이 아기 예수께서 탄생 하신 곳이다.
바닥은 1717년에 카톨릭 교회에서 은으로 만든 별 모양의 장식으로 기념이 되어 있다. 옆에는 예수님 구유가 놓였었다는 장소가 역시 기념되고 있다
*기브온Gebeon*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 10km지점, 해발 900m의 높은 곳에 있어 맑은 날에는 지중해와 동쪽으로는 요르단의 산들이 보이고 예루살렘이 선명하게 보인다.
기브온에는 주후 1157년에 세워진 회교사원(교회)이 있다.이 교회 지하에 사무엘에 무덤이 있다.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예루살렘왕등 아모리의 다섯 왕과 싸울 때 이곳에서 큰 기적이 났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들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다(수 10 :1-13).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여호와의 장막인 회 막이 다윗 왕 시대에 기브온 중에서 제일 높은 이곳에 있었다(대상 16:39,21:29). 또 한 가지는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부귀를 주신 곳이다(왕상 3:4-15,대하 1:3-13)
기브온에는 직경, 길이가 다같이 11m, 내벽에 폭이 1.5m되는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물이 말라 있었다.
*귀국을 위하여 텔아비브 국제공항으로 이동 Tel Avive *
모든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잘 발달되어 있는 1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TelAvive 국제공항으로 향하였다.
아쉽다. 모든 것이 매우 아쉽다. 답사초반에는 적응이 잘 안 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힘이 들었 었다. 지금 막상 끝나고 귀국하려고 하니 기간 중 좀 더 보고 더 듣고 배울 것을.... 후회 아닌 후회가 난다. 전체적으로 뒤 돌아 볼 때 보람 있었고 유익했던 성지 답사였다고 생각되어진다. 예루살렘을 조금 벗어나 이름 모를 어느 공원에서 Israel에서는 마지막으로, 도시락으로 저녘 식사를 하였다. 도로에 보이는 많은 차중에서 우리나라에서 만든 승용차를 많이 볼 수 있다. 교통 문화 중에 특이 한 것은 주간에도 상호식별이 용이 하도록 헤드램프에 스몰라이트를 켜고 다닌다.
공항에 도착하니 보안(경비)이 철저하다. 출국에 따른 절차도 엄격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Israel내에 테러조직과 연계 되여 있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출국 수속을 해주고 있는 듯 보였다.
모든 공항근무 보안요원들의 몸 움직임이 분주했다.
자.아홉번째 날 - 11월 28일(수):맑음
타슈겐트 국제공항-인천국제 공항(기내숙박 8박)
이번 답사여행은 공식적으로 8박 9일지만 몹시 긴 여행으로 느껴졌다.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의 3개국을 육로로 다녔다. 이번 성지답사는 두루 투어 성지답사 전문여행사의 세심한 배려와 인솔를 해주신 노 재명 목사님의 헌신과 사랑이었다. 그리고 기간 중 동고동락을 함께한 팀원 모두에 격려로 더욱 알찬 여행이 되었다. 이제 어느덧 인천 국제공항 상공이다....
2. 성지! 다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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