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중국 동해안 식민지 건설과 왜국 지배
동이족(東夷族)이 형성했던 국가들 가운데 최대의 해상강국이었던 백제는 우수한 해양기술과 군사력으로 동북아시아의 재해권을 장악하고 국민들의 빼어난 기상, 뛰어난 무용, 고도의 정신문화, 훌륭한 건축기술과 교역활동 등으로 한반도의 한강유역, 중국 요서지방, 일본 열도 등에서 국력을 떨쳤다.
백제의 중원대륙 동편 식민지 경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강역에 대하여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설명하여 양자강 연안 옛 오월(吳越)의 영토가 백제의 국토였음을 밝히고 있다. 주서(周書)와 북사(北史) 백제전에도 진대(晉代)에 백제가 양자강 좌우 오월(吳越)의 땅을 통치하여 송(宋), 제(齊), 양(梁) 시대까지 약 250년간 계속 지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는 백제가 전성기 때에 백만의 강병(强兵)을 양성하여 남쪽으로 오(吳), 월(越), 북쪽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 지역을 장악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양서(梁書)의 백제전에는 요서(遼西), 진평(晉平) 등 화북지방에 백제군(百濟郡)이 설치되어 수(隨)가 중원대륙을 통일할 때까지 백제의 영역으로 다스려졌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 두 백제군(百濟郡)은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라고 통전(通典) 백제전(百濟傳)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의하면 246년에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管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하자 고이왕(古爾王)이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요동지방에서 낙랑군(樂浪郡) 일부를 점령하도록 하고, 분서왕(汾西王)은 낙랑서현(樂浪西縣)을 차지했으며, 책계왕(責稽王)은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대방(帶方)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비류왕(比流王)은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두 군(郡)을 차지하였고,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근구수왕(近仇首王)대에는 본격적으로 요서(遼西), 진평(晉平)을 비롯해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절강성(浙江省) 등지를 공략하여 넓은 영토를 장만하였다.
동성왕(東城王)은 남제(南齊)와 외교관계를 맺어 중원대륙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힘썼으며 488년에 북위(北魏)가 군사를 일으켜 중원대륙의 백제군(百濟郡)을 침범하자 저근(姐瑾), 양무(楊茂) 등의 장수들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 북위의 침략군을 격퇴시켰다. 이에 북위(北魏)의 황제 고조(高祖)는 489년 8월 남제(南齊)의 국왕 세조(世祖)에게 특사인 형산(邢産)과 후영소(候靈紹)를 보내 화평관계를 맺고 남제와 백제간의 동맹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세조(世祖)가 친위노선(親魏路線)으로 방향을 선회하자 마침내 하북성(河北省)지구의 백제군(百濟郡)을 무너뜨리기 위해 490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향한 재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은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 네명의 장수들에게 병력을 안겨 응전(應戰)토록 하니 북위의 10만 기병은 백제군과의 일전에서 완패, 거의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때 전공(戰功)을 세운 사법명(沙法名)을 포함한 장수 4명에게는 각각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불중후(弗中候), 면중후(面中候) 등으로 봉했다는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중원대륙에 백제의 식민지가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백제도 중원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왕(王)이나 제후(諸侯)를 봉하여 대륙 식민지를 분할, 통치하는 봉건제(封建制)를 실시했던 거대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일본 열도 분국(分國) 통치에 대해 고찰(考察)해 보자.
백제가 해상강국으로서 영토를 크게 확장한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서 그는 담대한 정복군주(征服君主)다운 기질을 발휘하여 왜지(倭地)를 비롯한 해외의 전략적 요충지를 개척, 경락했는데, 왜지(倭地)에서 가야국(伽倻國)의 분국(分國)인 야마토[大和] 정권이 신공왕후(神功王后) 사후(死後) 붕괴되어 분열상태에 있을 때인 366년에 태자인 귀수(貴首)가 왜(倭) 후왕(侯王)으로서 일본 열도를 직할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근초고왕은 당시 일본 열도가 백제의 분국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등에는 천희대신(天熙大神), 송고대왕(悚古大王), 천대언(天帶彦)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때부터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용(夫餘勇)이 천지왕(天智王)으로 등극한 이후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칠 때가지 약 300여년간 백제가 왜지(倭地)를 통치, 경영한 것이고, 백제 멸망을 계기로 백제 출신의 왜인(倭人)들은 국호를 일본으로 고쳐 왜국 경영을 계속했다고 할 수 있다.
최재석(崔在錫)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도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일본 국왕은 백제 계열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백제에 의한 왜(倭) 직할 통치는 근초고왕에 이어 근구수왕(近仇首王), 침류왕(沈流王), 진사왕(辰斯王)대까지 약 26년간 존속했는데, 아신왕(阿辛王) 때에는 왜지(倭地)에 비류의 후손인 아라가야의 국왕 아라사등(阿羅斯等)의 아들 응신왕(應神王)이 야마토 정권을 세워 백제로부터 분립하여 5대왕 87년간 계속된다. 응신조(應神朝)의 왕권은 그 동생 진(珍) 왕가로 교체되었다. 응신왕이 즉위하기 전후의 백제와 일본의 사정은 만주 집안현에 있는 영락기공비(榮樂紀功碑)의 신묘년조(辛卯年條) 기사에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 응신왕은 아신왕이 즉위하는데 협력하였다.
서기(書紀)에는 백제 침류왕이 죽고 난 뒤 태자인 아화(阿花)가 연소하므로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자 기각숙이(紀角宿邇) 등이 백제로 가서 그 무례함을 꾸짖었고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이고 사죄했으며 기각숙이 등은 아화를 국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진사왕조(辰斯王條)를 보면 국왕이 신묘년(辛卯年) 전년에는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였고, 신묘년에는 국서대도(國西大島)에서 친히 사냥을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구원(狗原)에 사냥 행궁했다 죽었다고 하므로 아신왕과 응신왕의 연합군에게 패사(敗死)한 것으로 보여 앞의 기사와 일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아신왕이 백제 국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아신왕(阿辛王)에 앞서 근구수왕(近仇首王)의 명을 받고 장남 무내숙미(武內宿彌)가 서기 369년 지배권의 상징인 형칠지도(兄七支刀)를 가지고 왜(倭)의 후왕(侯王)에 부임하여 응신왕(應神王)과 함께 가야지역에서 백제에 전단(戰端)을 벌이자 근구수왕은 둘째아들 비류왕(比流王; 書紀에는 天律彦根命)을 보내 이를 제압했으며 침류왕(沈流王)은 371년 제칠지도(弟七支刀)를 가지고 왜의 후왕에 부임했다. 75cm인 형칠지도는 지금 일본의 천리시(天理市)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日帝)가 글자를 조작하여 한반도 침략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곡나산(谷那山) 백련철(百練鐵)로 만든 이 칠지도(七支刀)는 고대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를 푸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유물이다.
임승국(林承國) 전 명지대학교 교수는 칠지도의 명문 가운데 태화(泰和) 4년을 고이왕(古爾王) 재위 4년으로 보고, 고이왕이 야마토[大和] 정권을 무너뜨리고 왜왕과 종친들에게 발전을 기원하여 히시힌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역사학자인 손영종(孫英宗)은 칠지도(七支刀) 명문(名文) 가운데 태화 4년은 진지왕(眞智王) 재위 4년인 서기 408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응신왕(應神王) 계열인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은 삼근왕(三斤王)과 대화(大和) 무왕(武王)의 뒤를 이어 백제와 왜(倭)의 통합왕국인 아스카시대[飛鳥時代]를 열어 온조(溫祚) 계열인 무령왕(武寧王)에게 이어주고 백제가 멸망할 때가지 182년간 왜지(倭地)를 통치하고 경영했다.
무령왕은 왜지(倭地)에다 백제의 동조(東朝)를 두고 경영했고 각라도(各羅島)라는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마(斯麻)라 했는데, 이는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武寧王陵) 석관(石棺)에서 입증되었다. 무령왕의 딸 수백향(手白香)이 왜국의 계체왕(繼體王)에게 시잡을 가서 흠명왕(欽明王)을 낳으니 계체왕(繼體王)으로부터 숭준왕(崇峻王)까지 5대 120년간 무령왕의 사위와 외손이 왕위에 올랐다. 이와 관련하여 소진철(蘇鎭轍) 원광대학교 교수는 '스다하치망거울[人物書像鏡]'과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 지석(誌石)을 연구한 다음 스다하치망거울은 무령왕이 신임장(信任狀)으로 왜왕(倭王)인 계체왕에게 하사하여 승인한 것으로 왜왕은 백제의 제후였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와 같은 백제와 왜국의 직접적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일본 국왕인 아키히토왕[明人王]이다. 그는 2001년 12월 23일 일본 국회에서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간무왕(桓武王)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본인은 일본 왕실이 전통적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느끼고 있다."라고 발언하여 고대 일본의 군주였던 간무왕(桓武王)이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고 확인하였다. 간무왕(桓武王)의 생모(生母)는 화을계(和乙繼) 부인으로서 광인왕(光仁王)의 왕비인 고야신립(高野新笠)인바 그녀의 묘소는 일본 교토시 외곽 이세코우산 라쿠사이 주택단지 위에 있는 오에릉[大技陵]이라고 한다. 간무왕의 묘소는 가시와라릉[栢原陵]인바, 간무왕은 서기 794년에 천도하여 교토에다 헤이안궁을 짓고, 왕궁 북쪽에 백제 성왕(聖王)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를 세웠다.
또 무왕(武王)의 딸인 보황녀(寶皇女)는 서명왕(舒明王)에게 시집갔다가 서명왕이 죽자 황극여왕(皇極女王), 제명여왕(齊明女王)으로 두차례 등극하여 11년간 왜왕(倭王)으로 재위했다. 서기(書紀)와 성씨록(姓氏錄)에 의하면 서명왕은 나라현[奈良縣] 백제사(百濟寺) 옆에 백제궁(百濟宮)을 짓고 죽은 다음에 백제대빈(百濟大殯)을 만들었으며, 그의 조부 민달왕(敏達王)은 백제대정(百濟大井)을 만들었고 백제계 일본 국왕이라는 것이다. 또 백제에는 분국(分國)으로서 일본 왕실을 관리하는 일궁부(日宮部)가 있었는데, 이는 왜왕이 백제를 섬기기 위하여 보낸 제관(祭官)이 상주하는 곳으로 무령왕(武寧王)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왜왕에게 시집보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백제가 아스카시대[飛鳥時代]에 왜지(倭地)에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 등을 통해 불교문화를 전하여 나라[奈良],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지방에 꽃피운 문화를 아스카문화[飛鳥文化]라 하는데, 아스카문화의 우위성과 호화찬란함은 정평이 났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종교 예술작품은 호류사[廣隆寺] 영보전(靈寶殿)에 안치되어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다. 이 보살상은 백제의 후예인 진조하승(秦鳥河勝)이 백제인 조사공(造寺工)을 시켜 건축하게 한 절인 호류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 추고기(椎古紀) 11년조의 문헌에 의하면 성덕세자(聖德世子)가 이 소나무[松木]로 만든 보살상을 진조하승에게 주었으며, 이는 백제국 공덕부(功德部)에서 한국에서 가장 질이 좋은 전라북도 변산반도 소나무로 제작하여 일본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에 대하여 독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한국인이 만든 이 불상은 인간 실존의 깊이까지 도달한 자의 표정이며,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얻은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심법(心法)의 모습이었다. 나는 수십년 철학자로 일해왔으니 동서고금에 이만큼 인간 실존의 평화로운 참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아직껏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백제의 정치와 사회
백제사회는 원래 남하한 부여족에 의해 지배권이 획립되고 왕권이 비류(比流)와 온조(溫祚) 계통으로 세습 강화되었으므로 전통적인 사회의 유대가 견고하지 못하였다. 백제는 도리어 북부의 한군현(漢郡縣)이나 고구려의 압력 및 영향을 받으며 지배기구가 갖추어져 편제에 있어서 동서연합왕조(東西聯合王朝)격인 흔적이 있다. 따라서 백제의 왕실은 원래 이 지역의 부족세력과는 관계없는 유이민 세력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왕권세력은 흔히 팔대성씨(八代姓氏; 沙氏, 解氏, 燕氏, 眞氏, 岡氏, 木氏, 苗氏, 協氏)로 대표되는 귀족들이었다.
백제의 관료체계에서는 이미 정무분담의 형식과 문무관(文武官)의 분화현상이 나타났다. 백제의 관등은 16관등으로 분화, 발전되었으며 그 중에서 대신급인 제1품 좌평(佐平)에는 6명을 두어 왕명출납, 재무, 예식, 숙위, 사법, 국방 등 6개 부문의 정무(政務)를 분장하게 하였다. 좌평 밑의 여러 솔관(率官; 達率, 恩率, 德率, 蘖率, 奈率)이 차례로 2~6등급을 이루고 그 밑에 여러 덕관(德官; 將德, 施德, 固德, 季德, 對德)이 7~11등급을 이루었다. 그 밑에는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剋虞) 등이 12~17등급의 관등을 이루었다. 이들 16등급의 관료군은 크게 3단계로 나뉘어 그들이 착용하는 복색(服色)으로 그 신분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1~6등급의 좌평과 솔관들은 자의(紫衣)를, 7~11등급의 덕관들은 비의(緋衣)를, 12~16등급의 하급관료는 청의(靑衣)를 착용하게 되어 있었다. 복색에 의한 신분제한은 신라의 골품에 의한 신분제한과 대비를 이룬다.
백제에서는 관서(官署)도 현저히 분화 발전하였는데, 크게 내관(內官)과 외관(外官)으로 나뉘어 도합 22부의 관서명을 남기고 있다.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전대의 족장선거의 유품인 동시에 족장 사이의 세력균형을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
백제의 지방행정구분은 원래의 부족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서 표시되어 수도를 상부(上部), 전부(前部), 중부(中部), 하부(下部), 후부(后部)의 5부로 구분하고 다시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의 오방(五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방에는 방령(方領)이라는 지방장관을 두어 이를 통솔하게 하되 방 밑에 각각 십군(十郡)을 두게 하고, 군(郡)에는 3인의 장(將)을 파견하여 700~1200여명씩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수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전국 22개처(제주도와 일본 열도도 포함)의 주요 성읍(城邑)에는 왕족을 보내 이에 분거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담로(擔魯)라 하였다.
한편 종래의 족장들이나 중앙귀족들이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로 흡수되면서 그들이 지배하던 공유지는 토지국유의 원칙하에 재편되어 갔으며, 왕실이나 국가의 직할지를 위시하여 식읍(食邑), 사전(私田)의 형태로 특수한 공훈이 있는 귀족, 장수들에게 국왕으로부터 토지가 사여되고 전쟁 포로의 분배, 개간 등에 의하여 토지,인민의 사유화과정이 진전되어갔다. 또한 고구려에서와 같이 불교의 공인,수용에 따라 사사전(寺私田)이 있었다.
농민들의 토지소유를 보면 고구려와 같이 각기 소규모의 경작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민에게는 미(米), 견(絹), 마포(麻布) 등의 부세(賦稅)가 부과되었고, 그 위에 빈번한 전쟁과 요역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들이 전쟁 포로가 되는 경우에는 노예로 전락하였고 때로는 집단적인 사민(徙民)의 대상이 되어 예민(隸民) 집단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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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제의 중국대륙진출 단순한 설일까 사실일까?
백제의 중국대륙설은 이전부터 끊임없시 주장되었지만 현 사학계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설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백제는 분명 중국대륙에 진출하였고 중국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동남아 어떤 부족은 현 우리가 갖고 있는 풍습(널뛰기, 절구 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 사학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제시대 우리의 역사를 말살시킨 이마니시류의 수제자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로 구성되었기에 우리의 찬란했던 고대사들을 그들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김부식, 이 인간 또한 백제의 중국대륙 지배를 기록하지 않았지요. 거기다가 고구려와 백제는 당나라에게 대항해서 멸망했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해댔지요.
김부식과 현 사학자(이들은 식민사학자)들 때문에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가 동방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백제의 중국대륙 지배의 근거
중국의 역사책-송서, 남제서, 양서, 구당서, 자치통감, 통전, 남제서, 북제서에 기록
현 중국 산동성에 백제라는 지명 있음.
중국의 역사책 송서, 남제서, 양서, 통전의 기록들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온 말로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바다건너 요서와 진평 이군을 차지하여 백제군을 설치했다.
구당서 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일본)에 이른다"
'북으로 바다를 건넌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산동성에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 가능한 얘기입니다.(한반도 백제는 불가능)
문헌비고 :
"월왕 구천(전국시대 월나라의 왕, 월나라는 양쯔강 이남을 지배했던 대국)의 고도(옛 수도)를 둘러싼 수천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
만주원류고 :
"금주, 의주, 애주, 애훈(중국 북경인근 지방) 등지가 다 백제이다"
3.바다를 지배한 백제의 힘
백제의 요서진출 아니 중국진출은 8대 고이왕이 낙랑의 서현(금주지방)을 함락하면서 개시되었다가 10대 분서왕 때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분서왕이 지금의 중국 천진지방을 점령하자 서진은 국력이 급속히 약해져서 결국 유연이 세운 한에 멸망하게 됩니다. 한편 서진 멸망 후 서진의 왕족이 양쯔강 이남에 동진을 건국합니다. 중국 역사책을 보면 동진이 호(胡)에게 끊임없는 시달림을 겪다가 양자강 하구의 기름진 옥토를 빼앗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학자는 이 호를 흉노라 기록했지만 사실 이 호는 동호 아니 동이족 정확히 말하면 백제였습니다.
중국 역사책 사기를 보면 이 호와 흉노를 구분하였습니다. 사기를 보면 호를 고조선이라고 기록한 예가 많은데 이 기록을 참고하면 호가 백제임을 알 수 있지요
아무튼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이 즉위하면서 영토를 급속도록 확장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제(소열제)를 전사시키고 왜를 신민으로 삼았으며 중국의 동진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러다가 고구려 19대 황제 광개토태황제에게 굴욕을 겪다가 24대 동성왕이 즉위하면서 백제의 힘은 급속도록 강력해집니다.
백제 동성왕 때 당시 북중국의 강자 북위(고구려의 속국)가 10만 기병을 이끌고(10만 기병은 40만 보병과 맞먹는 힘) 백제를 쳤으나 백제는 평야지방에서 북위의 10만 대군을 몰살시켰다고 합니다.
남제서를 보면 백제의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 이 네 명의 장군이 북위의 침략을 격퇴시켰으므로 백제의 요청에 따라 이들을 왕으로 임명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백제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고 문정창 선생에 의하면 백제는 바다를 지배하고 대륙을 지배한 거대강국이었습니다. 그 분에 의하면 백제는 중국의 남조국가를 식민지로 두었다고 합니다.
백제가 남조 중 하나인 양나라 즉, 양나라를 세운 도이 숙연이 나라를 세울 때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양나라의 문화인 벽돌문화가 양이 아닌 백제의 문화라고 합니다. *
4.백제의 최대영토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호남성, 호북성, 절강성, 사천성, 인도차이나(동남아 일대) 일대를 지배했습니다.
즉 중국의 동부와 남부의 일부, 서남부 일부지방과 동남아 지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륙백제의 근거>
'동방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던 동아시아 강대한 해상제국 백제는 분명히 중국대륙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망국통일 후 신라와 당은 백제의 역사를 축소, 깎아내렸지만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다는 증거는 여럿 있습니다.
1.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 과 중국 사서
신라 말 대학자였던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강병 100만이 넘었으며 북으로는 유, 연, 제, 노 등지를 소란하게 하였고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였다."
위의 유, 연, 제, 노, 오, 월은 중국의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에 이르는 바꾸어 말하면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이들 지역을 공격한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다는 증거이지요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커져서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였고, 백제도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 소유하였다." <송서, 양서> [백제전]
"원래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두 군을 영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통전> [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월주(양쯔강 연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구당서> [백제전]
"부여가 처음에 녹산에 웅거하고 있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 가까이 옮겼다." <자치통감>
"월(춘추전국시대 양쯔강에 있던 국가)왕 구천의 고도를 둘러싼 수 천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 <문헌비고>
"금주, 의주, 애훈(중국 동해안 지역) 등지가 다 백제이다." <만주원류고>
2. 북위와 백제의 전쟁
서기 499년 북중국의 강자 북위가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백제에 쳐들어 왔으나 당시 백제의 왕 동성왕은 북위의 기병을 평원에서 패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북위가 과연 한반도의 백제를 쳤는가? 대답은 No입니다.
북위와 싸운 백제는 한반도 백제가 아닌 대륙백제입니다.
만약 북위가 한반도에 있던 백제와 전쟁할려면 가능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배를 이용한 해상전 인데 이는 가능성이 희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은 전형작인 유목민족이라 바다를 이용한 해상싸움은 불가능합니다.
유목민이 세운 왕조를 보면 해상싸움보다는 기병전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위서, 남제서를 보면 북위가 "10만 기병"을 일으켰다고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즉 백제와 북위의 싸움은 육지전이었으며 이 싸움은 대륙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 고구려의 땅을 지나야 한다.
이것 역시 가능성이 거의 제로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패자였습니다.
북위 또한 이런 고구려에 꼼짝을 못했죠. 일례로 고구려는 북위에 북위 왕실의 역사서를 바치라고 했는데, 이는 천자가 제후에게 할 수 있는 행위죠. 북위는 고구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구려에 북위 왕실의 역사서를 바쳤습니다.
고구려보다 약한 북위가 어떻게 고구려를 거쳐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칠 수 있겠습니까?
셋째, 당시 국제정세를 볼 때 북위는 바다 건너에 있는 적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북위는 동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토욕, 남으로는 남조, 북으로는 유연에 둘러쌓인, 즉 사방이 온통 적으로(동쪽의 고구려는 제외) 둘러쌓인 나라입니다. 만약 북위가 바다 건너 원정을 한다면 수도인 낙양이 비겠지요 그렇다면 그 틈에 적국이 북위를 공격할 틈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는 북위로서는 위협도 되지 않는 바다 건너의 세력을 공격하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대륙 정확히 말하면 화북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아니 오히려 동쪽의 또 다른 위협세력인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대륙백제를 공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백제는 대륙에 있었고 북위와 싸운 백제는 한반도 백제가 아닌 대륙백제인 것을 알 수 있지요.
*문정창 선생의 글*
『백제 동성왕이 그 21년(499) 과거 십여 년간 10만~20만의 규모의 병력으로써 대결해 오던 북위의 문제를 결정타하여 회수 유역과 산동반도를 점령한 후부터는, 남지나(남중국)는 완전히 백제인의 천지가 되었다.
그 전투에서 백제 세력을 등에 업게 된 도이(島夷: 동이의 일족) 숙연이 남제 화제로부터 찬위하여 양을 건립하였음은 위에서 밝혔다.
양대는 백제국이 남지나에 진출한 지 200여 년이요, 또한 남지나가 완전히 백제인의 천지로 된지 60년이다. 그간 백제문화와 백제인의 생활 양식이 남지나에 작용하고 침투하여, 남지나의 생산품, 음식, 일상생활, 혼례, 그리고 심지어는 언어까지 이토록 백제화 하기에 이른 것이다. 』
*백제의 번영*『가림토』에서 발췌
"A.D121년 기루왕(백제 3대 왕)은 백제의 발상지인 금주(현 요서지방) 즉 대방지역을 공격하였으나 부여군의 한(漢) 측 가담으로 실패하였다.(예족과 맥족의 대립: 예, 맥족은 우리민족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고이왕 때 서기 246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맹공격하여 환도성을 함몰하고 고구려 동천왕(고구려 11대 임금)을 추격하여 집안으로 들어가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낙랑지역(지금의 금주지방)을 기습하여 점령하엿다.(고이왕의 대륙상륙작전)
고이왕이 발해만의 낙랑지역을 점령한 지 20여년 만에 조위(삼국지연의의 위(조조)나라)가 망하고 사마염의 진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곧 사방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대륙이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백제의 분서왕(10대 왕)이 천진지방을 점령해버리자(304) 서진은 국력이 급속히 약해지면서 사직 51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비류왕, 317)
다시 말해서 백제 분서왕 때 유연이 한을 건국하면서 중국대륙은 5호 16국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대개 5호(胡)를 흉노, 갈, 선비, 저, 강이라고 하는데 흉노는 호가 아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호와 흉노를 분명히 구분하였다.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난 동진은 그 후에도 계속 호족에게 쫓겨 양자강 하구의 기름진 옥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는데 송서에서 말하는 호란 바로 백제국인 것이다.>
한편 서진이 망하자 사마예가 양자강 남쪽에서 동진을 세워 102년간 사직을 보존하였다. 이 때 백제는 남만주 금주지방과 천진지방을 근거로 남북으로 뻗어나가며 하북성 지방을 온통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백제는 약해질대로 약해진 동진을 밀어 내면서 곡창지대인 양자강 좌우양안을 점령하여 250년간이나 통치하게 된다. 당 태종의 명으로 영고덕, 방헌령이 지은 <<주서>>백제전과 역시 당나라 때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의 백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진(自晋) 송·제·양거강좌(梁據江左)·후위택중원(後魏宅中原) <주서>> [백제전]
"자진(自晉) 송(宋)·제(齊)·양거강좌우(梁據江左右) <북사> [백제전]
또 문정창 선생은 신라 경문왕 때 '최치원이 당나라도 들어가 과거를 급제하여 당성군 태수로 재직시 당묘에 제출한 상소문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할 때 강병이 100만이 넘었으며 북으로는 유, 연, 제, 노를 소란케 하였고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였다."
백제가 망한지 200년 뒤에 최치원이 이런 글을 썼다면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백제는 강병 200만으로 중국 대륙의 하북, 산동, 회수유역, 양자강 유역의 오, 월 지대를 점령하였고 일본열도와 대마도, 일기도, 북구주등을 쳐서 굴복시켰던 것이다.
특히 백제의 동성왕(백제 24대 임금)은 20만 대군으로 북위의 문제를 강타하여 회수유역과 산동반도를 점령하면서 남중국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이다.
「백제는 멸망하기 직전까지 대륙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방대한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백제가 망한 후에도 3년 이상 계속되는 그들의 항쟁사를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아직까지도 이러한 대백제의 전통과 문화(유물 및 유적)가 중국 대륙 곳곳에 남아 있으며 일본 열도에는 그러한 잔영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밝히고 널리 알리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 땅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이 적다하여 800년 백제의 위대한 역사를 덮어 두려고 한다면 배달민족의 뿌리를 이어온 대백제의 조상들에게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고개를 들 것인가」"
출처:네이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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