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 아스튜트급 핵추진잠수함이 수면 위로 부상한 채 항해를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핵추진잠수함. 수면에 떠오르지 않은 채 몇 개월 동안 물속에 머물 수 있어
세계 각국 해군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기다.
하지만 높은 비용과 기술적 난이도, 공고한 핵 비확산 체제에 가로막혀
극소수 국가만 운용하고 있다.
가입 조건이 매우 까다롭고 배타적인 프리미엄 멤버십 클럽과 유사하다.
이렇게 배타적인 멤버십 클럽에 최근 새로운 회원이 나타났다.
미국, 영국과 함께 안보 파트너십 ‘오커스’(AUKUS)를 만든 호주다.
호주는 오커스에 참여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기술이전을 받아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한다.
프랑스와 맺었던 500억 유로(69조원) 규모의 디젤잠수함 계약은 백지화됐다.
국내에서도 핵추진잠수함 보유론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 등 다른 나라로 관련 기술 이전을
확대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지만,
한국도 호주처럼 핵추진잠수함 보유가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의 선택적 저강도 핵확산, 또다른 ‘아메리칸 퍼스트’
미국은 1946년 핵물질과 핵기술의 해외 이전을 금지하는
맥마흔 법을 제정했지만, 한편으로는 법률 개정을 진행하면서
일부 국가에 핵기술을 지원했다.
영국 해군 아스튜트급 핵추진잠수함과 항모 퀸 엘리자베스호가 함께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영국 해군 제공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핵개발로 핵확산이 본격화되자 동맹국의
군사력을 자국의 전략적 이익과 연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958년 미국은 영국과 핵무기 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은 영국이 핵폭탄과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하자 영국의 핵무기를
미국 핵전략에 편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영국은 재정난으로 핵전력을 100% 독자 개발하는데 부담을 느꼈다.
그 결과 트라이던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이 영국에 도입되고,
핵추진잠수함 원자로 기술도 이전됐다.
‘100% 자체 기술’을 강조하는 프랑스도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비밀리에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와의 관계개선, 동맹국 역할 확대를 추구하던 닉슨 미 행정부는
‘스무고개 방식’을 통해 프랑스에 핵기술을 지원하면서
드골 시절 악화됐던 양국 관계 개선에 나섰다.
프랑스의 M51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기중기에 실려 이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스무고개 방식’이란 프랑스 기술자는 핵무기 관련 문제 해결 방안을
미국 기술자에게 설명한다.
미국 기술자는 프랑스 측의 구상이 옳은 방향인지 여부만 답한다.
핵기술 이전을 금지한 미국 내 법률을 회피하고자 고안된
‘스무고개 방식’은 영국처럼 구체적인 기술을 주고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유도와 구조재, 고체연료 등에서
적지 않은 기술지원이 이뤄졌다.
SLBM의 다탄두(MIRV)화 기술 이전도 진행됐다.
프랑스는 SLBM을 다탄두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MIRV를 달성하려면 핵탄두 소형화와 전자기차폐 기술이 필수였다.
미국은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지하핵실험을 할 때,
프랑스 과학자들이 자국의 SLBM 부품과 장비를 설치,
관련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호주 해군 콜린스급 디젤잠수함이 부상한 채 시드니 앞바다를 이동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이를 통해 미국은 프랑스가 핵개발에 투입하는 비용을 줄이고,
재래식 군사력 증강에 힘쓰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핵실험 횟수를 줄여 핵무기에 대한
국제정치적 악영향 확산을 차단하고,
프랑스 핵전력 강화를 통해 구소련에 대한
억제력을 키우는 효과도 노렸다.
호주에 핵추진잠수함을 지원하는 것도 미국의 이익 수호를 위한 조치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려면 호주의 참여가 필수였다.
하지만 호주의 군사력으로 남중국해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핵추진잠수함은 이같은 한계를 뛰어넘을 동력을 제공한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예산평가센터(CSBA)는
호주 해군 콜린스급 디젤잠수함은 남중국해에서 11일 동안 작전할 수 있지만,
핵추진잠수함은 77일간 작전하면서 일본 오키나와 근해까지
북상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호주 해군의 통상적 작전지역에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이 포함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탑재되면,
중국 본토 공격도 가능하다.
미국으로서는 강력한 원군이, 중국에는 또다른 적수가 등장하는 셈이다.
미 해군 버지니아급 핵추진잠수함이 항구에 입항하기에 앞서 수면 위로 부상해 대기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핵기술 지원을 통해 영국의 핵 및 군사전략을 자국에 결속시킨 미국이
영국과 손잡고 핵추진잠수함을 호주에 제공해 영국과 같은 길을 걷도록 유도,
동맹국이 없는 중국을 곤경에 빠뜨리는 효과도 있다.
◆막대한 정치적 대가 감당할 수 있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미국에서 핵기술을 지원받은 국가는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대가를 지불했다.
1970년대부터 10년 넘게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스는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탈퇴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미군과 긴밀히 협조하는 작전계획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유사시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령부 밑에서 싸우게 됐다.
프랑스 해군 바라쿠다급 핵추진잠수함 1번함 쉬프랑함이 건선거 위에 올려져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 본토에서 유럽으로 전개되는 증원군은 프랑스의 항구와 공항을 이용할 수 있었고,
프랑스 핵무기는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긴밀히 공조하면서 쓰일 예정이었다.
이는 미국에 막대한 군사적 이익을 안겨줬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핵무기는 1960년대보다
위력과 정확성이 크게 높아졌다.
프랑스의 핵전쟁과 재래식 전쟁계획은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미국과 높은 수준에서 통합됐다.
이는 구소련과의 전면전 상황에서 프랑스군의 지원이
보장되는 결과를 얻었다.
프랑스 정부는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유럽 배치에 찬성하는 등
정치적으로 미국을 도왔다.
호주도 마찬가지였다. 호주의 핵추진잠수함 보유 계기를 만든
오커스 발족 직후 미국과의 협상에서 호주는
△대만과의 관계 강화
△중국 해경국의 무기 사용을 인정한 해경법 반대
△신장위구르 관련 인권 문제
△미 해군과 공군, 해병대의 호주 방문 강화 등에 합의했다.
미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중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사안들이 모두 포함됐다.
미 해군 LA급 핵추진잠수함이 안다만 해를 항해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한국이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하려면 미국의 지원이 필수다.
기술적 지원은 프랑스도 가능하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협의 등을 위해서는
미국의 정치적 지원 또는 묵인을 받아야 한다.
프랑스와 호주의 사례로 볼 때 한국이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하려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 견제에 대한 공조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 신장위구르, 인권, 지식재산권 등
미중 갈등 사안에서 미국을 지지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북한 비핵화 협상 동력 제공 차원에서 중단됐던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또는 추가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주한미군의 대만 해협 출동을 포함한
전략적 유연성 증대 등이 제기될 우려도 있다.
이는 제2의 한한령을 비롯한 중국의 고강도 반발과
보복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차기 대선에서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프랑스처럼 독자 개발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핵기술을 확보하겠다고 결심한 국가를 상대로 한
국제사회의 제지나 반발은 별 효과가 없다.
북한과 인도, 파키스탄 등이 입증한 원칙이다.
국내 기술로 충분히 핵추진잠수함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전문가 견해도 많다.
한국 해군 잠수함 도산안창호함이 성능검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핵보유국들이 이미 확보한 기술을 다시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과 인력, 시간을 퍼붓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핵연료 공급도 난제다.
호주의 핵추진잠수함 보유는 1950년대부터 지속된,
미국의 ‘선택적 저강도 핵확산’ 기조를 통한 동맹국의 역할 강화 정책이
일관성 있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과거에는 구소련을 겨냥했지만, 이젠 중국을 노린 것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국제 정세가 미중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인도태평양 내
군비경쟁이 본격화는 상황에서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보유는
한국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는 정세 속에서 핵추진잠수함 보유는
고도의 국제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프랑스와 호주가 핵기술을 얻으면서 치른 대가를 보면,
한국이 핵추진잠수함을 확보하고 받게 될 ‘청구서’ 목록은
매우 길고 복잡하며 가격도 매우 비쌀 것이다.
핵추진잠수함 보유를 추진하기 전에 미중 대립 구도에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일지, 핵추진잠수함을 얻게 되면
반대급부로 어떤 것을 지불할지 등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민간용이든 군사용이든 핵은 언제나 그 대가가 비싸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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