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1418~1453)의 글씨가 자연미를 방불케 하니 불세출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동방에 서도를 일으켰고… 중국 조정의 선비들이 또한 글씨 한 장씩만 얻어도
가첩을 만들어 보배로 사랑하고 모방하여 비교하려고….”
조선전기의 문인 최항(1409∼1474)은 시문집 <태허정집>에서
안평대군(이용)의 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구구절절 묘사했다.
허언이 아니었다.
1450년(세종 32년) 명나라 사신인 예겸과 사마순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안평대군이 쓴 현판의 두 글자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알려진 <소원화개첩>.
국보238호로 지정됐다.
A4용지보다 작은 소품이지만 진적임을 알려주는 비해당(안평대군의 호)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다.
현재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진적은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그림)’ 정도다.
그나마 국내에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진필은 ‘소원화개첩’이었다.
A4 크기도 안되는 소품이지만 안평대군의 친필이기에 국보(238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이마저 2001년 도난당한 뒤 15년 이상 행방이 묘연하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데….
이제는 ‘소원화개첩’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군의 꿈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중국에서도 선풍을 일으킨 안평대군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세째아들(안평대군)에게 “중국 사신을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과연 예겸 등은 안평대군의 글씨에 흠뻑 빠져
“지금 중국에서는 진학사가 글씨를 잘 써서 유명하지만
여기 이 왕자(안평대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예겸 등은 예의를 다해서 받아간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예컨대 조선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합니까.”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 가운데서 어찌어찌해서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해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대부분이 안평대군의 글씨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사온 글씨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기뻐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안평대군의 글씨가 자연미를 방불케 하니 불세출의 사람이다.
중국의 선비들도 그의 글씨 한 장만 얻어도 가보로 삼았고…”(<태허정집>).
최항(1409~1474)의 극찬은 허언이 아니었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는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용재총화)이라 했다.
북경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어디 가면 좋은 글씨를 찾느냐”고 물으면
중국인들은 딱 잘라 반문했다.
“당신네 나라에 제일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합니까”(<연려실기술>).
머나먼 중국까지 가서 애써서 사왔다는 서예작품이
다름 아닌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다면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안평대군은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를 표방했다.
원나라 서예가인 ‘송설도인’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과
고법의 전통이 당나라 중엽 이래 황폐화했다는 것을 개탄하면서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필법이 굳세고 아름다웠으며 결구가 정밀했지만 호연지지가 부족하고
유약하다는 상반된 평가도 받는다.
안평대군은 바로 이 조맹부의 필법을 바탕으로 ‘호매한 필력이 대단했으며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용재총화>)
동시대인인 박팽년(1417~1456)은 “글씨 좋아하는 왕자가 서예를 배워(好書王子喜臨池)
송설의 풍류가 다시 일어섰구나(松雪風流又一時)…인간의 신묘한 솜씨 오래 흠모했는데(久欽妙手人間少)
과연 높은 이름 나타나 천하가 다 알게 되었네(果見高名天下知)…”
■천하의 인재들이 모인 안평대군의 휘하
세종대왕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사이에서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
·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등 여덟왕자를 두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은 안평대군의 무릉도원 꿈을 전해듣고 그림으로 남겼다.
일본 덴리대에 소장돼 있다.
그 중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세 사람이 유독 도드라졌다.
<연려실기술>은 안평대군(이용)의 일생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군은 특히 시와 문에 능했다.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고 옛 것을 좋아했다.
좋은 경치를 찾아 북문(자하문)밖에는 무이정사를,
남호(용산 부근의 한강)에는 담당정을 지었다.
만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안평대군의 주변으로 글깨나 쓰고 짓는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평대군 역시 이름난 문사들을 휘하에 두려고 애썼다.
안평대군에게 당대의 문·재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게 화근이 됐다.
계유정난(1453년)의 희생양이 되어 사약을 마셨다.
그토록 아꼈던 안견마저 사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스스로 도둑누명을 뒤집어쓴 뒤 안평대군의 품을 서둘러 떠났다(<백호전서>).
하지만 안평대군의 글씨는 천고의 보물로 전해졌다.
예컨대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안평대군의 책을 베껴
인쇄본으로 재출간하자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
윤근수(1537~1616)는 “안평대군의 글씨 한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고 전했다(<월정집>).
“문사들이 모여들어 달빛아래 배를 띄워 시를 짓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으며,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소리를 했고, 한때의 이름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다.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
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고, 바둑알에 도금까지 할 정도였다.
비단 위에서 진서와 초서, 행서를 휘갈겨 썼다.
그 글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용재총화>)
안평대군의 또다른 진적인 <몽유도원도> 발문.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들려준 꿈 이야기가 생생한 필치로 적혀있다.
■형(수양대군)에게 덜미 잡혔다“세종 이후 태평성대를 구가하자
문장을 잘하고 절의에 찬 선비들이 조정에 깔렸다.
이때 여러 왕자들이 다투어 문객들을 맞았는데
온 문인(文人)·재사(才士)들이 안평대군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한명회가 인재가 모여들지 않았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은밀하게 말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문인들은 필요없습니다.
나으리(수양대군)는 문인보다는 무사들과 결탁해서 세력을 쌓으십시요.’
한명회의 모책을 들은 수양대군은 그 꾀를 써서 내란을 평정하고….”(<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누명을 자초한 안견의 배신이른바 안평대군의 꿈을 바탕으로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은 어떤가. 윤휴(1617~1680)의 <백호전서>를 보면
안견과 안평대군의 기막힌 이야기를 전한다.
즉 안견은 안평대군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간파하고 되도록 멀리 하려 했다.
그러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안평 대군이 좀처럼 안견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안평대군은 북경에서 사온 용매묵(龍媒墨)을 안견에게 내리고는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안평대군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보니 용매묵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안평대군이 노복들을 꾸짖었다.
노복들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곁눈질로 안견을 의심했다.
그때 안견이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변명을 하던 중에 소매 안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견의 짓이 분명했다.
배신감을 느낀 안평대군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얼씬도 하지 마라”고 쫓아냈다.
안견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다.
이 일은 화제가 되어 장안에 퍼졌다.
그것은 분명 안견의 계책이었다.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의 회오리에 빠지자 문객들이 대거 희생됐지만
안견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서울 종로 부암동의 안평대군 집터.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돼 있다.|경향신문 자료사료
■안평대군을 멀리해서 목숨을 건진 이들
안지(1377~1464)와 성간(1427~1456)의 이야기도 인구에 회자된다.
인재 모으기에 힘썼던 안평대군은 당시 덕망이 있던 안지를 무던히도 초청하려 했다.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 “한번 만나보자”고 청했다.(<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전말 문형’)
심지어 병풍이나 족자에 글씨를 써서 선물공세까지 해댔다.
그러나 안지는 “한번 찾아뵙겠다”고 대답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안평대군 처소에서 여러 문인들이 글짓기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자 안평대군은 “안지의 글이 정평이 나있으니 한번 그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안지는 가져온 글들을 보고 일부러 잘 쓴 글은 못썼다고 하고, 못쓴 글을 잘 썼다고 했다.
안평대군의 품에 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모든 선비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 늙은이가 나이 많아서 정신이 없으니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안평대군 역시 그 말을 듣고 안지를 구하기를 포기했다.
-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사이에 나눈 창화시 (倡和詩·시를 읊으면 다른 사람이 받아 노래하는 화답시) 지독한 책벌레로 꼽히는 성간의 어머니 이야기도 극적이다.(<용재총화>) 안평대군은 성현(1439~1454)의 둘째형인 성간을 휘하에 두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역시 사람을 시켜 “한번 교유해보자”고 초청했다. 부르심을 받고 안평대군의 용산 정자(담담정)을 찾아갔다. 안평대군은 성간의 시에 찬사를 보내면서 후히 대접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만나 보고 싶다”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성간의 어머니는 “다시는 만나지 말라”면서 신신당부했다. “왕자의 도(道)는 문을 닫아 손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어찌 (안평대군은)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반드시 패할 것이다. 너는 같이 사귀지 말아라.” 어머니의 말을 들은 성간은 안평대군이 몇차례 초청했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안평대군이 마침내 계유정난으로 사사되자 성간의 집안은 어머니의 혜안에 탄복했다
■안평대군 작품 소장은 사대부의 로망
안평대군은 1747년(영조 23년)이 되자 비로소 관작을 회복했다. 명예회복하기까지 자그만치 294년이 걸린 것이다. 하기야 시·서·화에 모두 능해 3절(絶)의 칭호를 받았고, 양사언·김구·한석봉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예가로 꼽혔으니 그럴만도 했다. 조선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1595~1682)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그 변화무쌍함이 신의 경지”라 했다. 조선 중기 문인 정두경(1597~1673)은 “명필의 족보를 보면 첫번째가 김생이고, 다음이 고려 이암(1297~1364)이며 그 다음이 안평대군 이용”이라 했다.(<동명집> ‘해동명적’). “안평대군의 글씨는 조선의 명필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글씨의 모양새가 고상하고 점획이 근엄하다. 강건하면서도 원활하고 우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안평대군은 족제비털로 백추지(다듬이로 부드럽게 편 흰종이)에 글씨를 썼는데 오직 한석봉(1543~1605)만이 그 묘미를 깨달았다. 조선 중후기의 문인 송준길(1606~1672)은 이후원(1598~1660)에게 보내는 편지(1640)에서 “나에게도 안평대군의 친필이 있다”고 자랑했다.(동춘당집)
■안평대군 해적판까지 찍은 백사 이항복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아예 안평대군이 쓴 책의 인쇄본 2~3책을 베껴서
활자로 만든 뒤 다시 인쇄본을 여러 책 찍어냈다.
그러자 인쇄본을 구하려는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고 한다.(<백사집>) 지금 같으면 불법 복제물, 즉 해적판을 마구 찍어냈으니 백사는 저작권법으로 큰 처벌을 받아야 했을 판이다. 그러나 백사가 안평대군의 해적판을 찍어 훈련도감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다소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나 할까. 그저 객쩍은 소리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옥 같은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 ■안평대군은 ‘수집덕후’ 안평대군은 자신의 글씨와 시 뿐 아니라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동문선>에 수록된 신숙주의 ‘보한재집·화기’를 보라.
안평대군은 언젠가 소장품들을 모두 꺼내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수집열을 한껏 과시했다.안평대군은 시쳇말로 ‘수집 덕후’임을 자랑한 것이다.
안평대군은 이 자리에서 소장 작품들을 일일이 소개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안평대군의 소장품은 동진·당·송·원 등 5대 왕조 작가 35명의 작품 222축
(산수 84점, 조수초목 76좀, 누각인물 29점, 글씨 33점)에 이르렀다.
“아! 물(物)이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다 때가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운수가 있다.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어찌 알겠는가.”“안평대군이 소장한 서첩과 명화, 서적 중에는
몰수되었다가 세상에 흘러나온 것 또한 적지 않았다.
내(윤근수)가 젊었을 적에, 세상에 돌아다니는 안평대군의 시축 가운데
성삼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은 시가 있다.
안평대군이 첫머리에 시를 쓰고 장난삼아 붉은 먹으로 매화와
대나무 한 가지씩을 그려놓았다.”(<월정집>) 안평대군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계유정난으로 사사된 뒤 안평대군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소장품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 작품 가운데 일부가 시중에 흘러나왔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자신의 수집열을 과시하면서 끝에 덧붙인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내 천성이 소장을 좋아하니 이것이 병인 것 같소.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소.”
“비해당(안평대군)은 서화를 사랑했다.
다른 사람이 한 자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을 갖고 있다고 하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해서 좋은 표구로 소장했다.” 중국 작가 35명의 작품 222점을 수집했다.
“좋은 작품은 후한 값을 들여 구입했다”면서 자신의 수집병을 한껏 과시했다.
사대부들은 안평대군의 사후에 몰수된 작품 가운데 시중에 흘러나온 것을 구하느라 혈안이 됐다.
심지어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서 우연히 발굴된 벼루까지 ‘보물’ 대우를 받기도 했다.
윤근수는 벼루의 소유주(박동열)를 지칭하며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고 부러워하면서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다.
이렇게 안평대군의 글씨와 소장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비해당(안평대군)은 서화를 사랑했다.
다른 사람이 한 자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을 갖고 있다고 하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해서 좋은 표구로 소장했다.”
“내 천성이 소장을 좋아하니 이것이 병인 것 같소.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소.”
그런데 안평대군이 자신의 수집열을 과시하면서 끝에 덧붙인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안평대군의 벼루도 특별했다.
“농부가 옛터에서 밭을 갈다가 오래된 벼루를 발견했다.
이 벼루는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색깔 또한 조선의 것이 아니다.
결코 보통 사람이 갖고 있던 물건이 아니다.
별장의 옛터에서 얻었으니, 안평대군의 물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안평대군이 죽은지 백여 년이 넘었고 그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벼루는 박(동열)군의 소유가 됐다.
박군은 한창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날마다 글씨를 쓰고 있다.
벼루가 박군에게 간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겠다.
그것도 운명이 아닌가.”
■잘못 쓴 글자도 안평대군이기에 유명했다.
다른 글자는 절묘하게 감춰졌지만 오로지 사람 인(人)자 위에만
세개의 금니 흔적만 감춰지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급히 붓을 안쪽으로 놀려 세 개의 금니점을 그대로 둔채 사람 인(人)자를 만들었다.
이것은 단점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안평대군을 따라
이 글자를 사람 인(人)자로 알고 쓴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목구비’)
이처럼 안평대군의 작품이나, 소장품, 그리고 그의 채취가 묻은 모든 물건, 심지어는 그의 실수까지도 조선의 국보급 유물과 자취로 전해졌다.
■소원화개첩의 행방.
그의 진적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유정란의 희생자였기에 모든 소장품들이 몰수됐고,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유독 많은 전란에 시달렸으니 그 사이 어쩧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안평대군의 해서로 <몽유도원도>에 실린 ‘몽유도원기’는
일본 뎬리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문제는 국내에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진필로 알려진 <소원화개첩>이다.
<소원화개첩>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812~858)의 칠언율시 ‘봉시(峰詩)’를 필서한 것이다.
비단에 행서체로 썼으며 말미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안평대군 호의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다.
A4용지보다 작은 크기(가로 16.5cm, 세로 26.5cm)의 56자 소품이지만
1987년 국보 제238호로 지정됐다.
안평대군의 정형이 분명한데다 또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어 진적이 확실하고
국내에서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의 소장자는 고미술수집가인 서정철씨였다.
수집경위를 보도한 1991년 9월7일 <동아일보>를 보면
서씨가 경북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발견해서 수집하기까지 10년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원소장자는 서씨의 정성에 감복해서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을 그냥 건넸다고 한다.
그래도 ‘귀한 작품을 그냥 받을 수 없다’며 적절한 값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작품 가운데 국내에 남은 유일한 진적으로 알려진 <소원화개첩>은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
15년 전인 2001년 소장자인 서씨가 집을 한 달 정도 비운 사이
문제의 <소원화개첩>을 도난당했다며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2010년 이 소원화개첩>을 비롯한 도난문화재 29점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했다.
세상이 다 아는 국보이다보니 해외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소원화개첩>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조선시대 내내 천고의 보물로 남았던 안평대군의 자취는 이제 영영 사라져버린 것일까.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데….
이제는<소원화개첩>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군의 꿈을 기다려야 할 판인가.
안평대군의 유일한 흔적인 <소원화개첩>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의 진적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유정란의 희생자였기에 모든 소장품들이 몰수됐고,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유독 많은 전란에 시달렸으니 그 사이 어쩧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 정도를 꼽을 수 있다.
- 이처럼 안평대군의 작품이나, 소장품, 그리고 그의 채취가 묻은 모든 물건, 심지어는 그의 실수까지도 조선의 국보급 유물과 자취로 전해졌다.
- 이런 일화도 있다. 안평대군이 취중에 금니(金泥·금박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를 검은 비단에 흥건히 뿌린 뒤 붓을 들어 금니의 점을 따라 초서를 썼다.
- 윤근수는 “박군이 보물로 간직하여 영원히 반남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전했다.
- 윤근수는 “안평대군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얻어서 자기 생각대로 다시 만들어낸 것”이라고 추측했다. 문제의 벼루가 나온 안평대군의 옛 별장터는 승지 박동열(1564~1622)이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벼루는 박동열의 것이 됐다. 윤근수는 안평대군의 벼루를 차지한 박동열을 무지무지 부러워하고 있다.
- 안평대군이 쓰던 물건 역시 특별했다. 예컨대 그가 쓰던 문방사우는 예사스럽지 않았다. 언젠가 안평대군의 옛 별장터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희한한 물건이 출토됐다.
- “안평대군이 소장한 서첩과 명화, 서적 중에는 몰수되었다가 세상에 흘러나온 것 또한 적지 않았다. 내(윤근수)가 젊었을 적에, 세상에 돌아다니는 안평대군의 시축 가운데 성상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은 시가 있다. 안평대군이 첫머리에 시를 쓰고 장난삼아 붉은 먹으로 매화와 대나무 한 가지씩을 그려놓았다.”(<월정집>)
“아! 물(物)이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다 때가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운수가 있다.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어찌 알겠는가.”
- 안평대군은 시쳇말로 ‘수집 덕후’임을 자랑한 것이다. 안평대군은 이 자리에서 소장 작품들을 일일이 소개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안평대군의 소장품은 동진·당·송·원 등 5대 왕조 작가 35명의 작품 222축(산수 84점, 조수초목 76좀, 누각인물 29점, 글씨 33점)에 이르렀다.
- 안평대군은 언젠가 소장품들을 모두 꺼내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수집열을 한껏 과시했다.
- 안평대군은 자신의 글씨와 시 뿐 아니라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동문선>에 수록된 신숙주의 ‘보한재집·화기’를 보라.
- 그러면서 윤근수는 “친구가 선물로 준 안평대군의 책과 족자를 모두 잃어버려 가슴이 아팠다”면서 “겨우 비해당첩(안평대군의 글씨책)을 얻었는데 아직 장황(표지장식)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 조선 중기의 문인 윤근수(1537~1616)도 안평대군이 표제를 쓴 책과 족자(서축)는 “필획이 정밀하고 광채가 나서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모두 희귀한 보물”이라 했다.(<월정집>)
-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아예 안평대군이 쓴 책의 인쇄본 2~3책을 베껴서 활자로 만든 뒤 다시 인쇄본을 여러 책 찍어냈다.
- “저에게도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친필이 있습니다. 형(이후원)께서 보신다면 형의 기호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것을 단연 으뜸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 “안평대군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 중흥군주인 정조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홍재전서> ‘일득록·문학’)
- 최항·박팽년 등 동시대 문인·학자들은 물론 후대 학자들 가운데서도 지금의 속된 말로 ‘안(평대군)빠’들이 많았다.
- 하지만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조선시대 내내 지금으로 치면 국보급 유물의 대접을 받았다
조선전기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원대 조맹부의 송설체를 기반으로 하여 행서
글씨로 쓴 칠언절구의 시입니다.
국보 238호로 지정되어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이라 불리는 이 글씨는 국내에서 조선전기
안평대군의 진품 글씨로 인정받고 있는 유일한 작품입니다.
[글씨의 원문과 내용]
蜂(봉) 벌
小苑花開爛熳通(소원화개란만통) 작은 동산에 꽃이 피어 찬란하게 빛나는데,
後門前檻思無窮(후문전함사무궁) 후문 앞 난간에서 생각은 끝이 없네.
宓妃細腰難勝露(복비세요난승로) 복비의 가는 허리도 이슬을 견디기 어려운데
陳后身輕欲倚風(진후신경욕의풍) 진왕후의 가벼운 몸이 바람에 한들거리네.
紅壁寂寥崖蜜暗(홍벽적요애밀암) 붉은빛 적막한 절벽 언덕에 꿀벌이 숨었고
碧簾迢遞霧巢空(벽렴초체무소공) 푸른빛 주렴은 아득한 게 안개로 둥지가 비었네.
青陵粉蝶休離恨(청릉분접휴리한) 푸른 언덕의 흰 나비야, 이별을 한탄 말아라.
定是相逢五月中(정시상봉오월중) 오월 중에는 반드시 서로 만나게 되리.
* 爛熳(난만) : 빛깔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눈부시다; 순진하다.
* 宓妃(복비) : 원래 복희씨의 딸이자 하백의 아내. 낙수(洛水)에 빠져 죽은 다은 수신(水神)이 되었다 함.
* 陳后(진후) : 동양현(東陽縣) 사람으로 진아교(陳阿嬌), 혹은 진교(陳嬌)로 일컬어진다. 서한(西漢) 시기의
무제(武帝; 한무제) 유철(劉徹)의 황후(皇后)이자 당읍이후(堂邑夷侯) 진오(陈午)와 대장공주
(大长公主) 유표(刘嫖)의 딸이다.
건원(建元) 원년(BC 140)에 황후로 책봉되고, BC 130년에 무고죄(誣告罪)로 폐위되었다.
후세에 효무진황후(孝武陳皇后)로 일컬어진다.
* 倚風(의풍) : 바람 따라 흔들리다.
* 寂寥(적요) : 1.조용하다. 고요하다. 2.광활하다. 넓디넓다. 적적(寂寂)하고 쓸쓸함. 적막(寂寞)함.
* 迢遞(초체) : 멀다. 요원하다. 높은 모양
* 粉蝶(분접) : 빛이 흰 나비를 통틀어 일컬음. 흰나비
* 定是(정시) : 반드시. 필시(必是). 추측하는 말로 是는 조자(助字)임.
[출전] : 당(唐), 이상은(李商隐)「蜂(봉)」
[출전의 원문과 내용]
小苑華池爛熳通(소원화지란만통) 작은 동산의 화려한 연못은 찬란하게 빛나는데,
後門前檻思無窮(후문전함사무궁) 후문 앞 난간에서 생각은 끝이 없네.
宓妃腰細才勝露(복비요세재승로) 복비의 가는 허리도 이슬을 견디기 어려운데,
趙後身輕欲倚風(조후신경욕의풍) 조비연의 가벼운 몸이 바람에 한들거리네.
紅壁寂寥崖蜜盡(홍벽적요애밀진) 붉은빛 적막한 절벽 언덕에 꿀벌이 다 없어지고
碧簾迢遞霧巢空(벽렴초체무소공) 푸른빛 주렴은 아득한 게 안개로 둥지가 비었네.
青陵粉蝶休離恨(청릉분접휴리한) 푸른 언덕의 흰 나비야, 이별을 한탄 말아라.
長定相逢二月中(장정상봉이월중 ) 이월 중에는 반드시 서로 만나게 되리.
이상은(李商隱, 813~858)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그는 자신이 당나라 황족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시가와 문장에서 여러 차례 이를 명백히
나타냈다. 고증을 거쳐 그가 당나라 황족의 먼 친척 종실임이 확인되었으나, 황실의 먼
친척이라는 점은 그에게 아무런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이상은의 가세에 대한 기록은 그의 고조부 이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부 이섭은 가장 높은 행정 직위를 맡았고,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다른 사람들의 책을 베껴 쓰며 돈을 벌어 생활비를 보조했던 내용들이
그의 문장에 드러나 있다.
당시 관료가 되는 길은 과거에 급제해 자격을 가지는 것과 권력 있는 관료의 추천을 받는
것 두 경우였다. 이에 따라 궁정 관료들은 우승유와 이종민 등이 중심인 과거 급제자 출신의
당파와 이덕유가 거느린 문벌 귀족 출신의 당파로 나뉘어 정치적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소위 ‘우(牛) · 이(李)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당쟁이었다.
이상은은 처음에 우당(牛黨, 우승유 일파)인 흥원윤(興元尹) 산남서도(山南西道) 절도사
영호초에게 변려문을 배웠다. 영호초는 이상은의 재능을 매우 아껴 변려문 창작 기교를
가르치고 그의 집안 생활도 도와주는 한편, 자신의 자식들과도 사귀도록 했다.
영호초의 가르침을 받은 이상은의 변려문 창작은 매우 빠르게 발전했고,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바랐던 이상은은 25세에 영호초의
도움으로 진사에 급제했고, 교서랑(校書郞), 동천절도(東天節度) 서기(書記), 검교공부낭중
(檢校工部郎中) 등의 낮은 벼슬을 역임했다.
문종 태화(太和) 3년인 829년부터는 여러 해 동안 지방 관직인 막료를 지냈다. 막료 생활은
조정에서 정식 관리로 일했던 기간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다 영호초가 사망했고, 그 이듬해에
이상은은 상급 시험에서 낙방했다. 이후 반대편인 이당(李黨, 이덕유 일파)인 태원공(太原公)
왕무원(王茂元)의 부름에 응해 그의 비호를 얻어 서기가 되었고, 왕무원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사람들은 그를 변절자로 여겼고, 이상은은 우 · 이 당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또한 당파와 무관하게 초자도(楚子綯)의 미움도 받아 초자도가 재상이 되자 오랫동안 배척을
당해 불우한 생애를 보냈다.
문종 개성(開成) 4년인 839년, 이상은은 왕무원의 천거를 받아 문인 관료에게 가장 이상적인
자리로 여겨지던 비서성(祕書省, 문서 · 서적 보관청)의 교서랑(校書郞)이 되지만, 우승유
일파는 예전에 영호초의 비호를 받았던 그를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라고 몰아붙였다.
결국 이상은은 양쪽으로부터 배반자로 몰려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이로 인해 관직에 나선
그 해에 바로 지방으로 좌천되어 홍농현)의 현위(縣尉, 현령의 보좌관)가 되었다.
그 후 계관방어관찰장(桂管防禦觀察掌) 서기, 관찰판관(觀察判官), 검교수부원외랑
(檢校水部員外郞), 경조윤유후참군사주서연조(京兆尹留後參軍事奏署掾曹), 무령군절도판관
(武寧軍節度判官), 태학박사(太學博士), 동천절도(東川節度) 서기, 검교공부낭중(檢校工部郞中),
염철추관(塩鐵推官) 등의 지방관을 지냈지만 중앙의 실질적인 자리는 받지 못했다.
간혹 중앙 자리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곧바로 사직, 면직 등을 반복하는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무종 회창(會昌) 2년인 842년, 이상은은 다시 비서성의 관직을 맡았다. 품계는 낮았지만
새로운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도성의 관직 생활은 승진할 기회가 많았고,
특히 비서성은 고위층의 관심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종의 신임을 얻고 있던 재상 이덕유의 정치적 주장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이상은은
비서성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84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관례에 따라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삼년상을 치러야 했고, 이로 인해 그는 권력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회창 5년인 845년 10월, 이상은은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비서성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 3월에
무종이 세상을 떠나고 선종(宣宗) 이침(李忱)이 즉위했다.
선종은 무종의 정책에 대부분 반대했으며, 특히 이덕유를 몹시 싫어했다. 회창 6년인 846년,
선종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재상 이덕유를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이 빠르게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배척당했다. 그리고 선종의 지지 아래 우당이 점차 정부의 주요 직위를 차지했다.
우당은 이상은이 예전에 이덕유의 의견을 적극 지지했는가 하면 영호초를 배반했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이상은은 우당의 승리를 누리지 못했고, 관직이 낮았음에도 배척을 당했다.
851년에는 그의 아내 왕씨(王氏)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상은의 시문을 보면 그와 왕씨의
사이가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왕씨는 부귀한 집안의 딸로 여러 해 정성을 다해 가정을
돌보고 남편을 지지했다. 그는 아내가 살아있을 때 같이했던 시간이 짧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져 보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해 가을, 사천(西川) 절도사 유중영(柳仲郢)이 이상은에게 자신을 따라 서남(西南) 변경의
사천 관직으로 갈 것을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사천 재주의 막부 생활 4년 동안 몹시 울적해했다. 그래서 한동안 불교에 매우 큰
흥미를 갖고 그곳 승려들과 교류했으며, 돈을 기부하고 불경을 인쇄하기도 했다. 심지어
출가해 승려가 되는 것까지 생각했다.
858년, 다시 실직한 이상은은 향리로 돌아온 후 향년 47세에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저서로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 『번남문집(樊南文集)』이 있고, 『이의산잡찬』도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이상은은 만당(晩唐) 시기의 저명한 시인으로 장시가(長詩歌) 창작에 능하고 변려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두목과 더불어 ‘소이두(小李杜)’로 일컬어지고, 온정균과 더불어
‘온이(溫李)’로 불린다. 또한 산문(散文)에 있어서는 화려한 사륙문을 잘 지어 온정균, 단성식과
이름을 나란히 해 ‘삼십륙체(三十六體)’로 불렸다.
중국의 전례 고사를 자주 인용해 풍부하고 화려한 자구를 구사하여 당대 수사주의(修辭主義)
문학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변려문의 명수였으나 시는 한(漢) · 위(魏) · 6조시(六朝詩)의
정수를 계승했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서사시, 또는 위정자를 풍자하는 영사시(詠史詩) 등도 있지만, 애정을
주제로 한 <무제>가 특히 아름다워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널리 암송되었다.
시의 구상이 신선하고 기괴하며 유미주의적 경향이 있고 풍격이 화려했다.
두보의 시를 깊이 배운 그는 이하의 상징적 기법을 매우 좋아했다.
이상은은 말년 생활에 대한 자료가 적을 뿐 아니라 사망과 매장 위치에 대한 정설이 없기
때문에 무덤의 위치에 관해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허난성 자오쭤(焦作)시 친양(沁陽)시의 산왕장진묘(山王庄鎭廟) 너머의 마을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곳은 이상은의 본적 소재지다. 두 번째는 허난성 정저우시 싱양시의
위룽진(豫龍鎭)에 있다는 주장인데, 이곳은 이상은의 조상이 이사해 산 곳이다. 세 번째는
자오쭤시 보아이(博愛)현의 장링부촌(江陵堡村)에 있다는 주장이다.
친양시 정부는 1987년 1월 7일에 이상은 무덤을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1998년과 2001년에
각각 무덤을 수리했다. 현재는 무덤 주위를 담이 둘러싸고 있다.
싱양시에 있는 이상은 무덤의 경우, 싱양시 정부 홈페이지의 소개를 보면 묘비가 없고 무덤
위에는 고목과 야생초가 무성한 채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정저우시와 싱양시가 이상은 무덤을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상태이다.
보아이현에 있는 무덤은 묘비에 “전국문물보호단위 이상은묘”라고 쓰여 있고, 주위에 벽이
있다. 비석 정면 중앙에 전서로 “이상은지묘(李商隱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비석의 뒤쪽에는
그의 일생이 쓰여 있다.
이용(李瑢, 1418~1453)
安平大君(안평대군).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로 書畫家(서화가)이다. 자는 淸之(청지). 호는
匪懈堂, 琅珏居士, 梅竹軒(비해당, 낭각거사, 매죽헌). 시호 章昭(장소).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金宗瑞(김종서) 등을 죽일 때 함께 몰려 江華(강화)에서 죽었다.
학문을 사랑했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유명한 선비와 서민들까지 그를 따라
중망이 높았다.
遺筆(유필)로 世宗英陵神道碑文(세종 영릉신도비문)이 있다.
중종 때의 金絿(김구), 명종 때의 楊士彦(양사언), 선조 때의 韓石峯(한석봉)과 함께 朝鮮
書道4大家(조선 서도 4대가)라 일컫는다.
[느낀점]
작품은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로써 국보 238호로 지정되어 있는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입니다.
비단바탕에 쓴 26.5×16.5㎝ 크기의 이 작품은 소품이지만 안평대군의 호인 ‘비해당(匪懈堂)’
이란 낙관과 인장이 찍혀 있어 1987년 문화재 위원 전원의 의견일치로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후 동방화랑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2001년 도난을 당해 현재 소재지가 불명확합니다.
이 작품은 당초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 거주하는 선비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고미술
애호가 서연철(徐延徹)씨가 양도받은 것인데, 이후 문화재 위원 임창순(任昌淳)과 서예가
김응현(金應顯)의 감정으로 진본임이 확인되었는데, 이후 이 작품을 재표구 하는 과정에서
낙관의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글씨는 당시 유행하던 원대 조맹부의 송설체 글씨로 중국 만당(晩唐) 시기 문인이었던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칠언율시 ‘봉(蜂)’을 적은 것인데, 시의 원문과 대비해 보면 글자 중
여덟 글자가 다른 글자로 바뀌어 있습니다.
비록 소품이기는 하지만 이 글씨는 안평대군의 행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조맹부보다도
더 웅장하고 활달한 기품을 드러내며 독자적인 웅혼(雄渾)한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평대군 이후 퇴계 이황같은 학자들은 제비 꼬리처럼 아름다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너무 아름다워 취할 수 없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수장되어 있는 안평대군의 진필(眞筆) 「몽유도원도발
(夢遊桃源圖跋)」과 더불어 「소원화개첩」은 행서를 대표할 뿐 아니라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진본입니다.
원시의 작자 이상은(李商隱)은 9세기 만당(晩唐) 시기에 활동한 문인이자 시인이었는데,
자신이 당나라 황족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황족의 먼 친척 종실임이 확인되었으나, 생애
중에는 그에게 아무런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당파싸움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배척을 당하여 불우한 생애를 보낸 인물입니다.
안평대군 역시 세종의 셋째 알로 태어나 문종 사후 수양과의 정치적 경쟁관계로 인해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불우한 왕실의 예술가였는데, 그가 이 글을
쓴 것은 결국 이상은(李商隱)과 자신이 왕족 출신으로써 불우한 생애를 산 공통점이
있다고 느끼면서 내일을 알 수 없는 혼미한 현 정국에서 느끼는 비애와 만남을 기약하는
이별의 심정이 이 글에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제강점기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반출해간 ‘오구라 유물’에 속한 안평대군 이용의
‘행서칠언율시축’. 이 작품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오구라 유물을 조사한 뒤 펴낸 도록에 실려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도록에서
‘어, 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네. 진적이 거의 없다고 하더니만….’ 얼마 전 필자가 이른바
‘일제강점기 오구라(小倉)와 오쿠라(大倉)의 한국 문화재 반출’ 기사를 준비하면서
이른바 ‘오구라 유물’의 도록을 훑어보았다.
도록은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국외소재 문화재 조사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東京) 국립박물관을 찾아가 4차례에 걸쳐 조사했던 1100여 점의 사진과 함께
유물 설명을 곁들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제12책’, 2005).
필자는 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 및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 39건을 위주로 기삿거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회화·전적·서예 부문까지 훑어보던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이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유물 도록에 안평대군의 작품과 함께 유물 설명을 붙였다.
안평대군 행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목록에 포함된 안평대군 글씨
바로 ‘오구라 유물 목록’ 863번째에 나와있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였다.
‘행서칠언율시축’, 즉 행서(획을 악간 흘려쓰는 서체)로 된 두루마리 칠언율시(34.1×56.5㎝)였다.
도록의 뒤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된 작품설명이 붙어있었다.
“행서의 명가(名家)로 필속(筆速)의 완급, 필획의 강약, 허획과 실획의 운용 등의 특징에서
안평대군 행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안평대군의 글씨라면 대부분 <해동명적>
(신라말~조선초 명필의 글씨를 모아 목판 및 석판으로 새긴 서첩)의 석판 혹은
목판으로 찍은 서첩 등으로 전해졌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 두전>의 전서와, <심온묘표>의 예서도 안평대군의 글씨는 맞다.
하지만 비석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받아 각수가 새긴 것이다.
안평대군의 글씨임을 확산하게 하는 독특한 서법.
조맹부의 서법을 따랐지만 자유분방한 자신만의 필법을 구사했다.
따라서 본인이 먹을 묻혀 종이에 직접 쓴 글씨를 뜻하는 진적(眞蹟)과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안평대군의 진적이라면 일본 뎬리대(天理大)가 소장한
‘몽유도원도’ 발문과, 2001년 도난당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소원화개첩’(국보 238호) 정도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최근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27.9×14.3cm)가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33살이던 안평대군이
엄상좌라는 노 대선사를 떠나보내며 쓴 글씨첩이다.
오래도록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 등 딱 두 점으로 알려져 있던 안평대군의 진적이
이제야 3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구라 유물 중에도 제4의 안평대군의 진적이 있다는 것인가.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힌 ‘재송엄상좌귀남서’. 송설체의 아리따운 교태를 넘어 단아한 기품을 바탕으로 한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안평대군의 글씨가 틀림없다
하여 도록에 실린 글씨 사진을 몇몇 서예 전문가에 보여줬더니 돌아온 대답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면 안평대군의 글씨가 맞냐고 물었더니 “작품을 친견하지 않았으니 단언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지만
“사진상 보면 안평대군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 같다”는 답이 나왔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송설체(원나라 조맹부의 서체·조맹부의 서재 이름이 송설재였다 해서 붙인 이름)를
조선화시킨 주인공으로 풍류왕자 안평대군의 유려하고도 격조 높은 안평대군 글씨가
잘 드러나있다”고 평가했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은 “작품 말미에 흘려쓴 ‘청지(淸之·안평대군의 자)’는
안평대군 서체의 전형적인 형태”라면서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안평대군의 몇가지 특징을 설명한다.
즉 ‘도(途)’자의 책받침을 살짝 구불구불하게 흘려 쓴 것은 안평대군 특유의 필법이라는 것이다.
고기가 노니듯 세번 구부린데 해서 유어삼절법(游魚三節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연미(아름답고 수려)하기만 조맹부체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 ‘나(那)’자의 오른쪽(제방)의 세로 획이 올라간다든지,
윗부분이 멋들어지게 휜 ‘있을 유(有)’ 자 등을 종합할 때
안평대군의 글씨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2006년 일본 뎬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그리고 안평대군의 발문과 함께 신숙주, 이개, 김종서, 박팽년 등
당대 대표문인들의 시문과 글씨를 모아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개관100주년기념특별전-여민해락> 도록, 2009년에서(일본 뎬리대 소장)
이 기사의 모두에 인용한 안평대군 글씨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중국 당나라의 선승인 동안상찰(?~961)이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 중 2번째인 ‘조의(祖意)’”라고 했다.
“조사의 뜻은 공한 것 같지만 공하지 않으니(祖意如空不是空)
참된 기틀이 어찌 있다 없다는 공과를 따지랴(眞機爭墮有無功)…”.
필자와 같은 장삼이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선문답 같은 것이다.
그저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노래한
시라는 것만 알면 된다.
궁금증이 생긴다. 200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오구라 유물’을 조사하고 도록을 펴냈을 때
이 안평대군 글씨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다.
아마도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일본 중요문화재와 미술품 등으로 지정된
39건 위주로 조사했기 때문에 여타의 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못했을 것 같다는 추정만 할 뿐이다.
당시 현지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미술공예실이 주도했다.
그래서인지 서예·전적(22점)의 조사·연구는 깊이있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오구라 유물’의 안평대군 글씨가 진짜가 맞다면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 그리고 최근 진적으로 평가된다는 ‘재송엄상좌귀남서’ 등에 이어
4번째 진적인 셈이 된다. 물론 작품을 실제로 친견해봐야 최종판단할 수 있다.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몽유도원도’ 발문 부분.
안견이 그린 그림에 안평대군이 글을 붙였다.
안평대군의 꿈에 도원에서 노닌 광경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그리게 한 뒤
자초지종을 발문에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는 안평대군이 썼다
이와 별도로 필자는 최근 그 유명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의 한자를 쓴 주인공이
안평대군임을 논증한 논문을 보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재본(登梓本) 제작과 서체’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은 오는 26일 발행될 학술지 ‘<문화사학> 54호(한국문화사학회)’에 게재된다.
지금까지 귀가 아프도록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들었던 필자에게
해례본에 쓰인 한자의 작가가 안평대군이라는 이야기는 색다른 것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재본이 무엇인가.
알다시피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발행된 훈민정음 해설서이다.
목판으로 찍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230종류 537자와 한자 728종류 4761자로 구성됐다.
그런데 이 책을 목판으로 찍어내기 위해서는 한글과 한자의 필자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우선 종이에 글자 수가 많은 한자를 쓴 뒤, 공란으로 남겨놓은 한글 부분의 경우
한글 목활자로 눌러 채워 넣어 완성했다,
이것이 목판에 새기기 위해 제작한 등재본이다.
이 등재본을 풀에 묻혀 뒤집어서 나무에 조심스럽게 붙여놓고 글자의 획을 따라
각수가 새긴 뒤 완성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 바로 목판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으로 찍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한자가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 정설이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등재본에 새긴 한글 목활자는 당대의 명필 중 한사람인
강희안(1418~1464)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해례본’ 중 절대 다수의 한자의 필자는 누구인가.
‘해례본’에 등장하는 ‘정인지 후서’의 내용, 즉
‘신 정인지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절하며 삼가 쓴다(臣 鄭麟趾拜手 稽首謹書)’는 내용 때문에
정인지(1396~1478)의 작품인 것처럼 됐다.
학계 일각에서도 “세종대왕 당시에는 수양대군(세조 1417~1468·재위 1455~1468)이
<동국정운> 등 주요 간행물의 글씨를 전담했다”면서 “그런 가운데 정작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안평대군이 썼을 리 없다”는 견해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와 안평대군 글씨의 목판본 등과 비교하면 너무도 흡사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에서
그렇지만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는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다.
‘정인지 후서’ 또한 문장은 정인지가 짓고 글씨는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란다.
손환일 소장은 “그러나 지금까지 안평대군 글씨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지적한 연구결과는 볼 수 없다”면서
“이번 논문은 안평대군 글씨의 목판본인 ‘진초천자문’과,
‘엄상좌찬’ 서첩의 글씨와 조목조목 비교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초천자문’은 불세출의 서성(書聖)인 왕희지(307~365)의 7대손 지영 스님이
해서와 초서로 쓴 것을 안평대군이 다시 쓴 작품이고,
엄상좌찬은 안평대군이 엄상좌라는 스님의 불법강연을 들은 뒤
이별을 아쉬워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그런데 ‘해례본’과 ‘진초천자문’의 글자 중 오른쪽에 점을 찍는 습관은
안평대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 ‘쇠 금(金)’에서도 오른쪽 새로획이 올라간 것도 마찬가지다.
굳이 구체적으로 비교할 필요도 없겠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훈민정음 해례본>과 ‘진초천자문’과 ‘엄상좌찬’의 글씨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러한 비교연구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비전문가가 봐도 안평대군의 글씨와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글씨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손환일 소장의 논문에서
■중국 황제도 감탄한 서예가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안평대군의 작품 하면 ‘몽유도원도’ 발문과
2001년 도난 당한 ‘소원화개첩’ 정도만 떠올린 것 같다.
물론 실물을 쉽게 볼 수 없고(‘몽유도원도’ 발문),
또한 소재 불명인 채(‘소원화개첩’)인 두 진적의 케이스는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던 차에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가
진작으로 꼽히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할까.
돌이켜 보면 안평대군의 작품은 당대 중국 황제(명 경제·재위 1450~1457)로부터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맹부(1254~1322)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원나라 서예가인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과 고법을 바탕으로
필법이 굳세고 아름다웠다는 평을 듣는 명필이다.
그런데 명 경제가 ‘안평대군=조맹부’라 했지만 실은 안평대군이 한 수 위였다.
안평대군은 이 조맹부의 필법에다 ‘호매한 필력과 늠름한 기운을 담아
날아 움직일 듯한 서법을 더 얹었다’는 극찬을 받았다(<용재총화>).
이후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 사람들은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또 어찌어찌해서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작품을 감식해보면 그중 절대 다수가 안평대군의 글씨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사온 글씨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기뻐했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국보 238호 ‘소원화개첩’. 안평대군의 진적인데,
2001년 도난당해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개인소장
■뿔뿔이 흩어진 작품들
그렇게 잘나가던 안평대군이 어느 순간 신숙주(1417~1475)에게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을 보여주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아! 물(物)이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다 때가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운수가 있다.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어찌 알겠는가”(<동문선> ‘신숙주·화기’)
안평대군 자신과 안평대군이 평생 쓰고 모아둔 작품의 운명을
소름끼치도록 예감한 것이 아닌가.
말이 씨가 되었다.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으로
36살의 젊은 나이로 사사된 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작품과 소장품들이 모두 몰수됐다.
그 와중에서 일부가 시중에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작품은 지금으로 치면 국보급 문화재의 대접을 받았다.
‘안평대군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예컨대 조선 중후기의 문인 송준길(1606~1672)은
이후원(1598~1660)에게 보내는 편지(1640)에서
“나에게도 안평대군의 친필이 있다”고 자랑했다.(<동춘당집>)
“저에게도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친필이 있습니다.
형(이후원)께서 보신다면 형의 기호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것을 단연 으뜸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안평대군의 ‘집고첩발(集古帖跋)’.
1443년(세종 25) 안평대군이 역대 명필의 서첩을 모은 책(<집고첩>)에 쓴 발문이다.
석각 첩장이다.|개인 소장
■안평대군 작품 소장은 가문의 보배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아예 안평대군이 쓴 책의 인쇄본 2~3책을 베껴서
활자로 만든 뒤 다시 인쇄본을 여러 책 찍어냈다.
그러자 “인쇄본을 구하려는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백사집>)고 한다.
지금 같으면 불법 복제물, 즉 해적판을 마구 찍어낸 셈이니
저작권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을 판이다.
그러나 백사는 안평대군의 해적판을 찍어
자신이 관할하는 훈련도감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다소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나 할까.
조선 중기의 문인 윤근수(1537~1616)는
“필획이 정밀하고 광채가 나서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모두 희귀한 보물”(<월정집>)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옥 같은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
그러면서 윤근수는 “친구가 선물로 준 안평대군의 책과 족자를
모두 잃어버려 가슴이 아팠다”면서 “겨우 비해당첩(안평대군의 글씨책)을 얻었는데
아직 장황(표지장식)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안평대군이 쓰던 물건 역시 가보가 됐다.
예컨대 안평대군의 별장터였던 곳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벼루를 수습한 적이 있었다.
이 밭은 당시 승지 박동열(1564~1622)의 소유였기 때문에 벼루 역시 박동열의 것이 됐다.
윤근수는 이 대목에서 “안평대군이 죽은지 100년이 지났고 그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면서
“벼루가 한창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날마다 글씨를 쓰고 있는 박군(동열)에게 갔으니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부러워했다.
윤근수는 그러면서 “벼루가 박군에게 간 것도 운명이이니 보물로 간직하여
영원히 반남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중국 조정 선비들이 자연미 넘치는 불세출의 안평대군 작품을
한장씩 얻어도 가보로 삼았다”(<태허정집>)는 최항(1409~1474)과,
“인간의 신묘한 솜씨 오래 흠모했는데 과연 높은 이름 나타나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박선생유고>)고 읊은 박팽년(1417~1456) 등
동시대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1595~1682)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그 변화무쌍함이 신의 경지”(<기언> ‘별집·발’)라 했고,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안빠(안평대군 빠)’임을 자처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으뜸이다…강건하면서도 원활하고 우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안평대군은 족제비털로 백추지(다듬이로 부드럽게 편 흰종이)에 글씨를 썼는데…”(<홍재전서> ‘일득록·문학’)
서울 종로구 부암동 안평대군의 별장터인 무계정사터.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 수많은 문인 선비들이 드나들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적은 국내에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 안평대군의 또다른 진적으로 추정되는 ‘오구라 유물’과,
그동안 대중적으로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 필자가
안평대군이라는 사실 등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 안평대군의 흔적이 실제로는
여기저기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서예 전문가들은 안평대군의 진적이 분명 국내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가 대표적이다.
손환일 소장과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개인 소장가들은 진작이 분명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고 있다”면서
“섣불리 공개했다가 누군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서화는 사찰을 지키는 금강역사와 같은 눈(금강안·金剛眼)과
혹독한 세리와 같은 손(혹리수·酷吏手)으로 봐야한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언급처럼 철저하게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추사와 같은 안목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 작품이 안평대군의 것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국내에는 장담하건대 안평대군의 진적은 없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군가 혹시 안평대군의 진적을 소장하고 있다면
이런 판국에 굳이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요즘처럼 누구라도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라면
그 누구라도 ‘그 작품은 가짜’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은 진위와 상관없이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만다”고 말했다.
■선무당이 안평대군을 죽이는가
그런 의미에서 1450년(세종 32년)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
예겸(1415~1479)의 안목이었다면 쉽게 안평대군의 진작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예겸 등은 안평대군이 쓴 현판의 두 글자를 보고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예겸은 범옹 신숙주(1417~1475)가 들고 있던 책표지에
‘泛翁(범옹:신숙주의 자)’이라고 쓴 안평대군의 정자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이냐.
글씨 좀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신숙주는 이때 “강희안이 쓴 것”이라고 둘러댄 뒤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다.
그러자 예겸은 대번에 “이것은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니다”라고
딱 잘랐다.(김안로의 <용천담적기>)
하기야 이 시대엔 예겸같은 감식가가 나타나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지는 의문이다.
예겸이 재림해서 ‘안평대군 진작이 맞다’해도 온라인 공간에서
‘무슨 소리냐’고 지적하는 순간 수많은 찬반댓글이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선무당들이 안평대군의 진적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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