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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 자기주장을 함부로 내세우지 마라

mistyblue 2022. 2. 20. 21:30

춘추시대의 사상가.

도가와 도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도 있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60여 년 만에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말을 해 비범한 출생으로 유명하다.

그뿐 아니라 160세에서 260세가 넘도록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재능을 숨겨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쓴 것으로 전하는데,

그 때문인지 위대한 사상가들은 많은 제자를 키웠지만 노자는 제자가 없다.

그 영향으로 그의 사상은 훗날 왜곡되어 알려졌다.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을 담은 《도덕경》은 노자가 자취를 감추기 전

윤희의 간청으로 쓰여진 것으로 5,000자의 글 속에 무위의 다스림과 무위의 처세훈을 담고 있다.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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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 년 만에 태어나다

기원전 604년 9월 14일, 초나라 허난성 루이의 여향 곡인리에서

한 여인이 자두나무에 기대어 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신과 같은 위인이 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의 출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떨어지는 별을 예찬한 뒤 62년 동안 임신해 있었으므로,

그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태어난 즉시 주위의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나는 이 나무를 따서 성(姓)을 짓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두나무(李)와 그의 큰 귀(耳)를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 자기 이름을 이이(李耳)라 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은 벌써 하얀 눈처럼 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노자(老子)라 불렀다.

노(老)는 '늙었다'는 뜻이고, 자(子)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의 존칭어다.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은 그를 '노담(老聃)'이라고도 했는데,

'담(聃)'이란 귀가 넓적하고 축 처져서 귓바퀴가 없다는 뜻이다.

 

공자를 가르치다

노자의 생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본래 진(陳)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진나라는 그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에 남쪽의 강국 초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초나라의 정치는 포악하여 점령지 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압제를 가하여

주민들을 가난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노자 역시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유랑의 길을 떠났고,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다.

노자는 주나라에서 왕실의 장서 창고를 지키는 관리로서 40여 년 동안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 있을 무렵 공자가 방문했는데, 이때 공자가 노자에게 물었다.

"예(禮)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이에 노자는 점잖은 충고를 던졌다.

"그대가 찾고자 하는 예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뼈는 이미 썩어버렸고 남은 것은 오직 그들의 말뿐이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나아가서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숨어야 하는 법이오.

내 일찍이 듣기를 '훌륭한 장사꾼은 귀중품을 감춰놓은 채 아무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고,

완전한 덕성을 갖춘 사람은 겉으로는 단지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하였소.

그러니 그대는 몸에 잔뜩 붙어 있는 그 교만과 욕심, 위선 따위를 다 버리시오.

그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유익함도 없을 것이오. 이 밖에 내가 무엇을 더 말하겠소?"

그러고 나서 노자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자가 볼 때, 공자는 아직도 혈기 왕성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든 이에 무안해진 공자는 물러나왔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묻고 있다.

노자를 공자보다 100년 뒤의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만,

공자보다 앞서 살던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공자는 노자를 용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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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세월이 흘러 주나라의 뤄양을 떠날 무렵이 되자

다시 노자를 찾아 작별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노자는 다시 한 번 공자에게 진심으로 충고했다.

"부자는 재물로써 사람을 전송하고, 선비는 말로써 사람을 전송한다고 하오.

나는 돈이 없으므로 선비의 흉내를 내어 말로써 선물을 대신할까 하오.

총명하여 일의 이치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죽을 고비에 이르게 되는 것은

남의 행동을 잘 비평(비판)하기 때문이오.

학식이 많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이 자주 위험한 상황에 부딪치는 것은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하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주장을 함부로 내세워서는 안 되오!"

이 말을 듣고 돌아간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치며

짐승이 땅 위에서 잘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활을 쏘아 잡을 수가 있고,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는 그물을 쳐서 잡을 수가 있으며,

달리는 짐승은 덫을 놓아 잡을 수가 있다.

하지만 나는 용1) 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구만리 하늘로 오를 수 있는데

내가 만나본 노자는 바로 용이었다."

 

《도덕경》의 탄생 비밀

노자는 스스로 재능을 숨겨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다.

그는 요순시대를 이어받아 이상적인 치세라 불리는 주(周)나라 조정에 머물면서

황실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주나라는 천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도덕과 예의범절,

법률마저 권위를 잃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더욱이 잦은 전쟁으로 모든 문화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노자는 주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참을 걸어 한구관(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국경을 수비하던 관리 윤희에게 붙들렸다.

윤희는 노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고 간청했다.

"선생께서는 이제 머지않아 은퇴하실 모양인데,

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남겨주십시오."

이에 노자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죽간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

또는 대나무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에 5,000자의 글을 써주었다.

이것이 바로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을 담은 《도덕경》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희야말로 노자와 맞먹을 정도로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노자에게 글을 쓰도록 종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인류 역사상 가장 값진 책으로 꼽히는 《도덕경》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노자가 관문을 빠져나간 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후 노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노자는 160세 또는 260세를 살았다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 사마천은 '그가 도를 닦아 수명을 보존한 덕분'이라고 기록했다.

 

노자의 사상은 그 누구보다도 사상적으로 일관된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노자는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릴 만큼 비중이 큰 사상가다.

유럽에도 일찍이 《도덕경》의 번역서가 나와 널리 읽혀졌는데,

특히 독일의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는 "세계에 단 세 권의 책만 남기고 불태워버린다면,

《도덕경》이 그 세 권 가운데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 속으로

보통 도가와 도교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데, 둘 사이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도가란 우리 인간이 자연의 명령에 따르며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 사상을 가리킨다.

반면 도교란 "모든 인간은 자연의 섭리대로 그냥 놔두면 반드시 죽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을 거스르고 우리의 운명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종교적 입장을 말한다.

요컨대 도교는 불로장생의 신선(神仙)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으며,

이를 위해 그들은 약을 먹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도란 무엇인가?

유가에서 말하는 도란 인간의 윤리에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란 온 천지 만물,

모든 자연의 이법(理法)으로서 우주의 근본 원천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도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모든 법칙 중의 법칙이자, 모든 척도 중의 척도이다.

한편, 이 도는 사람이 함부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도에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도는 어떠한 시간적·공간적 한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극(無極)이며 무(無)다.

 

유가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에서 인위적인 도덕으로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방법에 반대하고, 무위자연을 주장했다.

무위자연은 인위(人爲)를 부정하는 노장사상의 근본개념으로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을 말한다.

흔히 사람들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려고 하나,

본디 하나인 이것들을 구분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가 꾸밈없이 사는 것만이 현실을 구제하는 길이다.

 

정치론에서도 노자는 유가의 대통일 국가라는 이상에 맞서

작은 나라와 적은 백성이라는 이상 사회를 그렸다.

인위적인 도덕과 잡다한 지식에서 벗어나 소박하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며,

백성들의 이런 삶을 보장하기 위해 위정자는 무위의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큰 사상가들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데 반해,

불행하게도 노자에게는 그 깊고 오묘한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만한 제자들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학설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것이 무술(巫術)이나 마법, 연금술이나 불로장생과 같은 미신과 뒤섞여버린 탓에

노자 자신의 순수한 이론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그러나 환경 파괴와 함께 인간성의 상실을 경험하는 현대에 들어와

노자 사상은 오히려 서양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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