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의 귀족.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아카데메이아의 설립자.
아테네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플라톤은 정치가의 길을 예약해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어 철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육체나 물질보다 영혼과 정신을 존중하는 피타고라스학파와
소크라테스의 관념론적 경향을 발전시켜 영육이원론의 입장을 취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 철학에 대립하는 거대한 관념론 철학을 창시했다.
그의 사상 중 이데아론과 상기설이 가장 유명하다.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 1세에게 전제군주를 비난하는 말을 하여
노예시장에 팔리기도 했다.
철인왕 사상을 주장했으며, 개인보다는 국가를 강조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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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다
플라톤의 아버지는 아테네 세습 왕정의 마지막 왕인 코드로스의 후예였고,
어머니는 과두 정권의 우두머리인 크리티아스의 사촌 여동생이자
정치가 카르미데스의 친여동생이었다.
플라톤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최고 통치자 페리클레스와 친분이 두터웠던
피릴람페스와 재혼했다.
이처럼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명문가 태생다운 교육을 받으면서
야망에 찬 젊은이로 자라났다.
이 무렵의 교육은 읽고, 쓰고, 셈하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것이었다.
플라톤도 소년 시절에 이런 교육을 받았으며 체육 방면에서도 상당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플라톤을 가르쳤던 체육 교사는 플라톤의 체격이 좋고 이마가 넓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플라톤'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결국 그의 이름이 되었다.
그는 그림 공부도 했으며, 서정시와 비극을 썼다고도 전한다.
플라톤은 당시 최악의 사건인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당시 명문가 출신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플라톤의 장래였다.
그런 그가 철학을 일생의 과업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20세 때, 디오니소스 극장의 비극 경연 대회에 나갔다가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게 되는데, 큰 감명을 받아
"제게는 이제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며 즉시 가지고 있던 비극 대본을 불태워버렸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고상하면서도 겸허한 인품에 매료되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까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항상 "나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
노예로 태어나지 않고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
특히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부당한 판결을 받고 죽음에 이른 스승의 죽음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인들은 젊은이들을 건전하게 만들려는 일념으로
자신과 가족의 안일을 버린 저 불세출(不世出)의 철인 소크라테스에게 보답은커녕
오히려 엉뚱한 죄목을 씌워 처형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경멸하게 되었고,
정치가가 되려는 자신의 꿈마저 깨끗이 단념했다.
대신 스승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후세에 전하기로 결심했다.
유럽 최초의 대학 아카데메이아
소크라테스를 구출하려는 플라톤의 노력은 민주파 지도자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처형 직후에 위험을 느낀 플라톤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메가라로 도망가서 얼마간 은신했다.
그 후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로 여행을 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40세 무렵에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를 구경하러 갔다가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 1세의 왕궁을 방문했다.
왕이 플라톤에게 전제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용감한 사람만이 전제군주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플라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제군주는 비겁한 자 중에서도 가장 비겁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숨 두려워하기를 이발사의 면도칼을 두려워하는 자처럼 구니까요."
이에 격분한 왕은 플라톤의 말이 늙은이의 잠꼬대 같다며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왕의 처남 디온이 말려 플라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스파르타에서 온 사절단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은 다시 플라톤을 노예시장에 팔았다.
이때 안니케리스(쾌락주의를 주장한 키레네학파의 학자)라는 돈 많은 상인이
그의 몸값 20므나를 치러줌으로써 겨우 석방되었다.
플라톤이 아테네로 돌아온 후, 그의 동료들이 돈을 모아 빚을 갚으려 했다.
그러나 안니케리스는 "당신들만이 철학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 돈으로 영웅 아카데모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테네의 영웅.
헬레네의 소재지를 알려줌으로써 아테네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출함)에게 헌당한
체육관 부근에 학원을 설립했다.
유럽 최초의 대학 '아카데메이아'는 이렇게 철학자 한 사람을 판 돈으로 세워졌다.
오늘날 학원이나 학술 단체를 아카데미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은 수업료를 받지는 않았지만, 기부금이나 물건의 원조는 사양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독신이었던 그는 제자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으며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
이곳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철학과 수학, 동식물학, 천문학 등이었는데
특히 입구에는 '기하학자가 아닌 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는 사랑의 신 에로스 상을 두었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진리에 대한 사랑을 교육이념으로 삼은 까닭이다.
플라톤의 강의는 너무나 유명하여 심지어 귀부인들도 남자 복장을 하고 들어와서 강의를 들었으며,
또 어떤 농부는 밭을 갈다 말고 달려와 강의를 들었다고도 한다.
그의 명성은 그리스 전역에 퍼져 많은 청년이 몰려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곳에서 20여 년 동안이나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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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러브
플라토닉러브는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욕망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연인의 인격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적인 사랑,
이상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이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을 뜻한다.
그런데 플라토닉러브라는 이 단어는 플라톤의 이름과는 관련이 있지만,
그의 사상과는 관계가 없다.
첫째, 플라톤은 여자를 특별히 존경한 적이 없다.
오히려 플라톤은 "여자란 남자보다 덕에서는 훨씬 뒤쳐지고,
남자보다 약한 족속이며, 잔꾀가 많고 교활하다"고 주장했다.
또 "여자는 천박하고 쉽게 흥분할 뿐 아니라 화를 잘 내며,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데다 소심하며 미신을 잘 믿는다"고도 했다.
심지어는 "여자로 태어난 것은 저주임이 틀림없다"고 확언했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자제할 줄 모르던 남자, 비겁하고 의롭지 못했던 남자들은
그에 대한 벌로 죽은 후 다시 여자로 태어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결혼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공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꾸려나간다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오직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관점에서만 보았다.
남자와 여자를 결속시키는 힘 역시 상호 간의 이해가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유능하고 성품이 훌륭한 후세를 낳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 일을 위해 적당한 배우자를 찾아 맺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여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남자에게 상으로 주어졌으며,
극단적으로는 남자들의 공동소유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플라톤이 생각한 남녀 간의 사랑은 애정이 넘쳐흐르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둘째, 플라톤은 결코 육체를 경시한 적이 없으며,
유년 교육에서도 음악과 함께 체육을 필수과목으로 강조했다.
이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건강을 위해 열심히 체조를 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플라토닉러브'란 말이 왜 생겨났을까?
그것은 플라톤 철학이 갖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에 대한 막연한 유추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가장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인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의 주장이
'특수한 형태로서의 육체가 배제된, 그야말로 가장 정신적이고도 순수한 사랑',
즉 플라토닉러브라는 언어를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이 용어는 플라톤이 철학에 대해 취한 태도의 한 방식이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철학 자체를 에로스의 한 방식으로 보았고, 본질상 사랑으로 파악했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토닉러브'의 심오한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단순히 관능적인 욕구를 억눌러 억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욕구를 고양된 형태로 넘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어떻든 여성 차별적 사고를 갖고 있었던 플라톤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면
수많은 적과 싸워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여권(女權)이 신장된 요즘의 기준으로 보자면 천재적인 철학자 플라톤도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셈이니 말이다.
"철학은 플라톤이요, 플라톤은 철학이다"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겪었던 젊은 날에 비해 플라톤의 만년은 행복했다.
여러 방면에서 성공한 그의 많은 제자 중 한 명이 80세가 된 그를 결혼식에 초대했다.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노철학자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와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축하연이 끝났을 때, 환락에 지친 사람들이 그를 깨웠다.
그러나 플라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축하연의 환희 속에서 영겁의 세계로 떠난 것이다.
이웃뿐 아니라 아테네의 모든 시민이 그의 관을 따라 묘지까지 갔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요,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말했으며,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철학 속으로
플라톤의 철학 사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데아론이다.
우리 인간은 동굴(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와 같아서 사물의 희미한 그림자만 볼 뿐,
참다운 진리를 보지 못한다.
죄수가 동굴의 밑바닥을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와야만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영혼이 이념(Idea, 이데아)의 세계로 비약해야만 보편적인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데아(개별적인 사물이 소멸하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존속하는 불멸의 원형,
감성적 사물의 모범이자 개별자에 실현되어야 할 이상)를 만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각각의 이데아가 있는데,
그 가운데 최고의 이데아는 이데아의 이데아, 곧 '선의 이데아'다.
태양이 만물을 키우듯 선의 이데아는 전체 세계를 지배하는 이성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주적 이성이자 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아는 오직 철학적 충동(에로스)에 의해서만 포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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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플라톤은 상기설을 주장한다.
우리의 혼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불볕이 내리쬐는 긴 들판을 건너야 한다.
물도 없는 그 들판이 다 끝나갈 무렵 강이 하나 나타나는데,
그 강 이름은 레테 강(망각의 강)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순간 과거(전생)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후천적인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잊어버렸던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이미 전생에서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기억하는 것일 뿐이고, 따라서 지식은 곧 상기(想起)인 것이다.
상기설은 플라톤 자신의 영혼 불멸설을 증명하는 데에도 이용된다.
즉 상기설을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서 우리의 영혼이 전생에서도 존속했다는 증거가 되며,
따라서 육체가 없어지는 후생(내세)에서도 존속할 것이라는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영혼론과 윤리학과 국가론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먼저 인간의 신체는 머리, 가슴, 배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하는 기능 즉 영혼의 활동은 이성, 의지, 욕망이다.
또한 각각의 영혼이 추구하는 덕은 지혜, 용기, 절제이며
이것들이 모두 합해져 정의를 이룬다.
국가에도 이에 상응하는 세 계급이 있는데 머리 부분에는 지혜가 월등한 통치 계급이,
가슴 부분에는 용기 있는 무사 계급이,
배 부분에는 절제심을 발휘해야 할 생산 계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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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육체적 건강은 신체의 세 부분이 각각 자기의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때 달성되고,
영혼의 내적 평화는 각각의 영혼이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여
그 분수를 넘지 않게 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이상 국가의 정의는 각각의 계급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기의 직분에 충실했을 때 달성된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란 신체가 건강할 뿐 아니라
영혼의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국가 생활에서도
계급에 맞는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나가는 자다.
세 부분 중에서도 특히 머리 부분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처럼,
국가 계급에서도 통치 계급은 금(金) 계급으로서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플라톤은 통치 계급에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철학자도 포함했고,
또 '철학자가 왕이 되든지 왕이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이른바 철인왕(哲人王)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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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철학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첫째 개인보다도 국가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
둘째 그 주장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모든 사상은 결국 플라톤에게서 융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철학은 플라톤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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