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는…
조선중화사상에 따라…
조선고유색을 현양한 진경문화를 주도한…
진경산수화법의 창시자다.’
겸재 정선(1676~1759)을 향한 극찬이다.
심지어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도 꼽힌다.
무오류의 위인전을 읽는 듯하다.
그러나 지나친 신봉은 외려 겸재의 진정한 가치를 흐리게 하지는 않을까.
장진성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의 논문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겸재는 그야말로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로 단번에 그리는
‘일필휘쇄(一筆揮灑)’ 필법으로 유명하다.
겸재의 절친인 이병연은
“내 친구 정선은 그림 그리는 흥취가 날 때 붓이 없으면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이 더욱 방자해졌다”고 평했다.
문인 이규상은
“겸재의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지만…
붓놀림은 조악한 기운을 띠었다.
그림 요구에 응해…
붓을 쓸어내리듯 휘둘렀다”고 전했다.
오죽하면 “그림 주문량이 삼대밭처럼 많았고,
겸재가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조영석)였을까.
조선 후기 문인 권섭의 평가는 더욱 심각했다.
“정선이 피곤하여 아들이 대신 그렸는가…못 그린 그림도 있구나.”
권섭은 정선의 몇몇 그림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혹시 대필작품이 아니냐’고까지 의심한 것이다.
예컨대 삼성미술관 리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2점의 ‘내연산삼용추도’ 그림을 보면 확연하다.
리움 작품이 겸재 특유의 힘찬 필획을 자랑하지만,
박물관의 작품(그림)은 어쩐지 반복적이고 형식적이다.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겸재의 두 ‘정양사’ 작품에도 질 차이가 역력하다.
잘 그린 작품은 마치 드론으로 정양사의 전경을 찍은 듯 안정적이다.
반면 못 그린 겸재작은 너무 소략하다.
장 교수는 ‘비로봉’(개인 소장)과 ‘목멱산’(고려대박물관 소장) 등도
겸재답지 않은 작품이라고 평한다.
왜 그랬을까.
장 교수는
“쇄도하는 그림 주문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보았다.
“그림 주문이 많아지자 매우 태만한 필법으로 그렸다”는 조영석의 평가가 눈에 띈다.
그럴 만했다.
겸재의 그림값은 중국에서도 청나라 1급 궁정화가 1년치 연봉(은 130냥)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림 주문이 폭주했을 터이고,
더러는 ‘일필휘쇄’ 필법으로 설렁설렁 그린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겸재 또한 인간이다.
겸재를 둘러싼 지나친 신격화를 걷어내니 오히려 겸재의 인간적인 풍모가 배어난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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