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스페인, 세고비아]
어제 봐두었던 웅장했던 수도교에 밤새 마음이 설랬던 모양이다.
아침부터 일찍 눈이 떠졌고,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카메라와 캠코더를 챙겨들고 나섰다.
내가 상상하던 스페인의 날씨 그대로다. 새파란 하늘에 두둥실 에드벌룬까지 떠있다.
Lovely한 날씨, 아직은 차가운 공기지만 그래도 기분좋은 아침이다.
일찍 나서서 그런지 아직 관광객은 그리 많지않아 사진찍기 참 좋다.
계절에 따라 다르겠지만 3월의 아침엔 그림자가 도시 안쪽으로 지는 모양이다.
얼마나 수도교가 거대한지 그림자에 어둑어둑해진다.
가뜩이나 그 웅장함에 기가 죽었는데, 그림자까지 더해지니..
이 다리를 지나가면 과거속으로 빠져들어갈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데 멋진 자전거를 타고가는 아저씨를 보니 현실속으로 다시 빠져나온다.
저항을 줄이려고 쫙 달라입은 옷을 입은 아저씨는 중세와는 어째 안 어울리니 말이다.
그래도 참 멋지다.
그림자속에 덮힌 마을을 조금 지나가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예쁜 광장이 나온다.
어디를 가나 자주 붙어있는 이 표지판.
집, 공차는 아이, 걸어다니는 어른, 자동차.. 흠 뭐라는걸까?
이건 주거지 근처의 차도니까, 애들도 놀고,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그러니까 자동차도 조심조심 서행하세요~ 그런 뜻일 것 같다.
매우 직관적인 스페인의 표지판.
내친김에 하나 더 볼까?
흠 이건 뭘까? 자동차를 드는 그림에, 금지표시~
아마도 주차하지마라~ 차 끌고갈거다~ 이 뜻이 아닐런지.. ㅋㅋ
도시 입구에서 수도교에 압도되어 시작한 여행자의 조심스런 발걸음은..
이런 익살스러움에 어느새 편안하고 즐거워진다.
어머, 이 사랑스런 가게는 뭘까?
웃고있는 어린 양과 마늘.. 새끼돼지? 흠..
유쾌한 양의 표정에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정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새끼돼지통구이요리 전문점이다.
애저요리라고 하던가?
통구이에 놓을 자신의 운명이 저렇게 즐거울까?
활짝 웃는 아기돼지의 표정이 처연하기까지 하다.
흠, 이건 그나마 현실적이다.
웃고있는 아기돼지통구이보다, 저렇게 힘없이 고개돌리고 있는 모습이 차라리 낫다.
아무거나 잘 먹는 난, 새끼돼지구이 요리가 무척 먹고 싶었는데..
블루는 지금은 아침이니까 안된다는 둥,
이따가 다 돌아보고 와선 한참 점심이 되서 배고픈데도..
일정이 급하니 얼른 출발해야한다는 둥 해서 나를 이곳에서 성급히 멀어지게 하더니..
아주 나중에야 고백했다.
새끼돼지요리는 정말 먹을 수 없었다고..
이것이 정말 실제 요리의 샘플이었는데..
난 이걸 보고 우와 맛있겠다.. 그랬는데..
블루는 어휴 끔찍해~ 웃고있는 아기돼질 먹다니..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그 이야길 듣고,
저렇게 통째로 나오는 건 굉장히 비싸다고..
우리가 적당한 가격대로 시키면 적당한 크기의 돼지고기가 나와서
저런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볼 수 없었을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핀잔줬지만..
그래도 블루는 이미 저 모습을 보고났으니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ㅋㅋ 어차피 4~5만원을 호가한다는 저 요리는 비싸서 나도 먹을까말까 고민했는데..
의도는 달랐지만 새끼돼지요리를 먹지않는다는 결과에는 둘다 동의한 셈이다.
어쨌든 이상한 변명을 둘러대며 서둘러 나를 끌고 저 가게에서 얼른 도망나온 블루가 귀엽다.
그런 걸 솔직히 말하면 남자답지못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걸까? ㅋㅋ
이곳은 유명 인사들도 많이 온 유서깊은 레스토랑인 모양이다.
소피아로렌, 옆에 잘생긴 아저씨 이름은 잘 모르겠다.
교황님도 오시고.. 정말 오래된 곳 맞는 것 같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손님이 하나도 없는 야외 까페의 모습은 참 썰렁하다.
확실히 유럽의 도시의 매력은 건물과 공간 자체에도 있지만..
그곳을 채우는 여유있는 사람들이 한몫 하는 것 같다.
따뜻한 태양 아래서 삼삼오오 모여 따끈한 커피 한잔과 달콤한 비스켓을 앞에두고~
여러시간동안 대화를 나누는 모습 말이다.
그런 모습이 어우러져서 유럽 특유의 여유있고 멋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이건 오후가 좀 지나서의 똑같은 야외 까페 풍경이다.
어떤 이는 무심한 듯 지나쳐가고,
하얀 머리의 노인 커플이 앉아 이야기하고,
아기를 안은 아저씨가 앉아있고..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을 나누고..
가끔 사진을 찍다보면 저 사람때문에 완벽한 타이밍을 놓치는 것 같아 맘 상할 때가 많았는데..
오히려 사람이 들어가서 따뜻해지는 모습이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건 내가 살짝 추운 초봄에 여행했기 때문이기도 할거다.
그만큼 쌀쌀하니까 모여있는 사람들의 온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작은 광장을 하나 만났다.
단체 여행객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영국의 트라팔가 광장이 생각난다.
물론 여긴 거기보다 훨씬 작은 공간이지만..
이렇게 어린 학생들이 잔뜩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비슷해보인다. ㅋㅋ
이것도 역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마법같다.
이 사람들이 없어진 광장의 모습은 또 꽤나 쓸쓸하고 보잘것없어보인다.
예전에는 무척 미인이었을 것 같은 여인상.
얼굴이 뭉개져서 형체만 남아있는 모습이 왠지 안타깝다.
그러고보니 손이 호랑이발같은데 무슨 신화속 여신의 모습일까?
소녀가 광장의 깃발든 동상을 따라한 줄 알았는데,
그냥 가방을 고쳐멘 건가보다.
우연이 만들어낸 즐거움. ㅋ
사람이 중요하다고는 했지만 자연과, 고풍스런 건물이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아름다움도 물론 있다.
사실 보통 매료되는 건 바로 이런 아름다움 때문일거다.
아 정말 빠져죽을 것만 같은 새파란 하늘, 텔레토비가 금새 뛰어나올 것 같은 초록 동산..
주황색 지붕에 뾰족한 탑들..
유럽에 대한 소녀적 감성을 바로 이루어주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을 마주할 때면, 바쁜 직장에서 시달렸던 일주일 전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치~ 정말 잘한거야~ 그깟짓 돈 또 벌면 되는거고..
집 조금 늦게 사면 되고..
좀 덜 먹고 덜 쓰면 되는거지 뭐~
대신 우리에겐 살아가는 목적이 명확히 생긴거니까..
적어도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건 아니쟎아~
사실 그랬다.
직장에서 야근에 가끔 밤샘까지 해가며 일할 때..
왜, 뭐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지?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근데 여행에 대한 꿈을 점점 확실해지고,
돈이 차곡차곡 모여가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자동차리스 예약하고 하나씩 구체화될때마다..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혀 스트레스 받지않는 나 자신을 깨닫고 무척 신기했다.
그냥 이건 일일 뿐이지..
이 작은 어항같은 사무실은 그냥 내 꿈을 이뤄주는 수단에 불과했다.
다람쥐쳇바퀴처럼 난 이곳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고,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 같을땐,
어떻게든 더 많은 일을 받아서 처리하면 손해보는 거 같고,
그냥 의미없이 한 동료나 직장 선후배들의 말들이 가시가 되서 나를 괴롭게도 했는데..
그냥 객관적일 수 있어서였을까?
난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나면, 여길 곧 떠날거고..
오히려 내 꿈을 이뤄주는 수단이 되주는 직장 일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한거다.
내가 과연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난 감성적인 사람인데 프로그래머라니..
어려서부터 글쓰는 걸 좋아하고 책읽는 게 마냥 행복했던 내가..
성적대로 그냥 대학에 가다보니 어이없이 지원했던 컴퓨터공학과..
이건 내 인생 최대 실수였다고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일을 하니 오히려 즐거웠다.
정말 적성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기꺼이 일했던 때가 바로 여행 떠나기 전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기계치에 숫자치인 내가 그나마 이런 직업을 가졌으니 바보가 안 된 것 같다.
만약 문과계통의 대학을 나오고 그런 직업을 가졌다면..
영원히 기계와 안 친해졌을 거고..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그만큼 커졌을테니 말이다.
인생은 이렇게 우연히 방향을 완전히 틀어지게 만든다.
내가 주관이 좀더 뚜렷했다면 원하는 대로 갔을 인생이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결과적으로 난 이렇게 멋있는 그림같은 풍경안에 들어와있쟎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정말루~
가슴이 먹먹해질 듯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팔려 내가 너무 많이 감상적이 되버렸다.
기껏 비행기타고 여행 온 거 가지고..
무슨 유관순 열사라도 된 듯 말하고 있쟎아.. 머쓱해진다. ㅋㅋ
[섹시한 마녀]
[후덕한 할머니 마녀]
[귀여운 꼬마 마녀]
유난히 마녀 인형을 많이 팔길래 사진에 담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이곳이 백설공주의 무대가 되었다는 알까사르 성이 있는 곳이 아닌가?
백설공주의 계모인 마녀때문인가보다.
그제야 고개가 끄덕끄덕 한다.
아, 문득 또 내 발길을 잡은 벽에 걸린 한장의 그림..
레스토랑 간판같은건데..
영화 까사블랑카가 연상된다.
아리따운 여인 잉그리트버그만과 그를 사랑하는 멋진 신사, 험프리보가트..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를.
아름다운 피아노선율에 인상좋은 할아버지가 AS TIME GOES BY~를 연주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해리가샐리를만났을 때의 영화에서
해리가 잉그리터버그만을 보고 색깔없는 여자라고 한 대목이 생각나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한참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갑자기 환한 베이지색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어, 이건 뭔가 무척 가우디스러운데..
용암불꽃같은 장식이 된 뾰족 지붕 말이다.
시대가 분명 가우디 시대는 아닌데 말이다.
세고비아의 유명한 대성당 건물이었다.
외관도 무척 아름다왔지만, 안에 들어가서도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근데 난 이 아름다운 건물을 보고는..
더 빨리 바르셀로나에 가고싶어졌다.
이 건물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가우디의 건물은 얼마나 더 멋질까?
사진으로만 보던 파밀리아 성당을.. 150년째 계속 공사중이라는 그곳에 빨리 가보고 싶어졌다.
그만큼 이곳도 아주 아름다웠다.
화려한 대성당 뒤로는 또 다시 세고비아의 소박한 골목이 펼쳐진다.
소박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다.
유난히 화창한 날씨때문일까?
유럽에 온지 며칠만에 이렇게 밝은 태양을 보는건지..
하늘이 너무 예쁘고 장해서 계속계속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내가 소유한 하늘도 아닌데 계속 자랑하고 싶고 칭찬하고 싶다.
하긴 지금은 적어도 내가 누리는 하늘이긴 하다.
또 다시 낯선 표지판..
이 작은 골목에 무슨 횡단보도 표시지?
여길 차가 지나갈 수나 있나 황당해하는데..
아래에 그걸 증명이나 하듯..
작은 미니카가 비스듬히 주차되어있다.
정말 작은 차 아니면 주차가 결코 불가능할 공간이다.
그렇게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작은 공원이 나오는데.. 또 한번 헉~ 하고 나를 놀라게 만든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듯 화사한 정원..
이미 벚꽃이 저렇게 피었었구나.. 봄이 오긴 온거다.
매일매일 숙소 찾느라.. 밤마다 짐을 풀고 아침마다 다시 여행짐을 싸고..
정신없이 돌아다닌다고 몰랐던 봄이 어느새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예전에 봤던 영화속 봄날은 간다에서..
우리의 젊음과 어리고 때묻지않은 사랑이
닳고닳아 때묻고, 이제 상처받지않을만큼 익숙해질 무렵..
그렇게 어리디어린 봄같은 우리의 젊은 날은 지나가는거구나..
봄은 정말 슬프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이곳에서 만난 봄은 전혀 슬프지않았다.
화사했고, 젊고 당당했다.
상처받아도 또다시 세상을 예쁘고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닳고닳은 어른들에게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어린왕자같은 봄의 모습이었다.
세고비아의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느라~
아직 오전이 다 가도록 알까사르 성 근처에도 못 가봤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도시 속 골목들은 나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하도록 말을 거는 것 같다.
잘 떠나왔다고, 왔으면 고민말고 온전하게 즐기고 가라고..
기쁘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할아버지 한분이 오랜 역사속 도시, 세고비아의 한 골목 귀퉁이에서 뒤를 흘낏 돌아보신다.
할아버지.. 그렇게 돌아보시는 건 할아버지가 살아오신 세월일까요?
우리도 한걸음 한걸음 성실하게 걷다보면..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어른이 되어있을 수 있겠죠?
세고비아의 골목길, 사람들, 찬란한 태양~
모든 것이 선물같았던 한때를 보내고..
진심으로 할 수 있었던 한마디..
"떠나길 정말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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