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집기 경주여행 9. 진평왕릉, 설총묘, 부부총 등
나에게는 시집갈 나이가 된 딸이 하나 있다.
이 아이가 어릴 때 내가 어디 여행가자고 하면 처음엔 잘 따라다니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여느 아이들처럼 같이 가기를 피하곤 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는 나의 질문에 아이가 하는 말이 이렇다.
'아빠 따라서 어딜 가 보면 맨 남의 무덤에나 다녀서 싫다'는 것이다.
하긴 우리 나라에 고적이라고 남은 것이 절 아니면 궁궐 아니면 무덤 밖에 별다른 게 없다.
오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의 무덤으로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
진평왕릉
진평왕은 성골 남자로서는 마지막 왕이다.
아들이 없었기에 딸인 덕만공주를 세워 다음 왕으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선덕여왕이다.
삼국유사의 서동 전설에 나오는 선화공주도 진평왕의 딸이다.
선덕여왕릉이 있는 곳이 낭산이다.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는 그런대로 널찍한 들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보문동이다..
경주시내에서 보문호수 쪽으로 가다보면 명활산 못미쳐서 오른 쪽으로 보이는 그 들판이다.
멀리서 보면 왕릉 한 기가 들판 가운데 외롭게 서 있는데 바로 진평왕릉이다.
들판 가운데에 위치한 능들은 대개가 신라 통일 이전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거의 모두가 대릉원 안,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같이 무리를 이루고 있고
통일 이전의 평지 왕릉중 단독으로 조성된 무덤은 이곳 빼고는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서 읽은 바로는 진평왕릉을 경주에서 가장 찾고 싶은 곳 중의 하나로
기억하는데 책을 읽은 지가 오래 되어서 다시 찾아보니 책 자체가 어디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1권 초판이 발간된 것이 1993년 5월이니 2권은 그 후의 일일 것이다.
내가 처음 진평왕릉을 찾아간 것은 1988년 가을의 일이니 필카로 찍은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후에도 너댓 번은 가 보았는데 사진으로 남은 것은 디카를 사고나서 얼마 되지 않은 2003년 10월 것 뿐이다.
1988년과 2003년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묘역이 꽤나 정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버섯을 품고 있던 고목은 아마 지금은 다 잘려 나갔으리라...
일몰이 가까운 저녁 진평왕릉에서 본 구름과 해의 숨바꼭질...
설총묘
파계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들...
설총의 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진평왕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 마을 가운데에 있다.
세종대왕에 의해 한글이 창제되기 칠백 수십년 전...
그 때도 나랏말쌈은 듕귁과 달랐다.
한문으로는 도저히 우리 민족의 말을 표기할 수 없을 때, 문자는 한자 밖에 모를 때,
이 설총이라는 천재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 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름하여 이두(吏讀). 그 방법으로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짓고, 사람 이름을 표기하기도 하고 생각들을 글로 남겼다.
화왕계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임금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고려 때도 이두식 방법을 이용해서 시가를 지었다.
남아 있는 신라향가 25수나 고려가요들은 모두 이두가 없었으면 제대로 전승이 안되었을 수도 있었다.
일본도 비슷한 방법으로 그들의 말을 적다가 불편하니 한자를 모방하여 자기들의 글을 만들었다. 그게 가나다.
그런데 모방의 대가인 일본인들은 문자 모방의 폐해가 그렇게 큰 줄 몰랐을 것이다.
문자 구조가 가져온 발음의 한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국제화된 오늘 날 얼마나 고생하는가?
그로부터 칠백 수십 년 후, 우리는 세종대왕이라는 실로 위대한 성군을 배출해서 한글을 만들었다.
독창성과 가용성에서 세계 최고의 문자인 한글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 중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도 나랏말쌈을 제대로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들을 보냈던가?
1988년의 설총묘 사진이다.
부부총- 보문동 합장묘
1988년 이곳을 헤집고 다닐 당시 나는 10만분의 1 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당시 도로교통 지도로는 축척이 제일 큰 지도여서 지방을 다닐 때 그 지도에 의존한 바가 컸다.
진평왕릉 근처에 부부총이라는 이름의 무덤이 있다고 되어 있어서 찾아 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고
대충 이정도 지점이겠거니 하고 그냥 눌러본 사진이 있는데 부부총이 아닌 것 같아서 올리지는 않는다.
어쨌든 1906년에 발굴된 이 무덤은 다시 조사한 결과 부부가 아니고 여성 두 사람이 묻힌 것으로 확인되어서
보문동 합장묘라고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2011년 가을에 경주 박물관에서 유물특별전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국보 90호인 귀걸이는 신라의 금공예품중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가장 호화로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이 따로 없어서 문화재청의 사진과 자료를 인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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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경주 보문동의 부부총(夫婦塚)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한쌍의 금귀걸이로, 길이 8.7cm이다.
태환이식이란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가볍게 한 귀걸이를 말한다.
귀걸이의 몸체가 되는 커다랗고 둥근 고리에 타원형의 중간고리가 연결되었으며,
그 아래에는 나뭇잎 모양의 화려한 장식들이 매달려 있다.
커다란 둥근 고리에는 거북등무늬와 같이 육각형으로 나누어 그 안에 4엽 혹은 3엽의 꽃을 표현하였는데,
꽃 하나하나에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을 이용하는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밑부분에는 나뭇잎 모양의 작은 장식들을 금실을 꼬아서 달고 장식 끝에 커다란 하트모양을 달았다.
신라 귀걸이 장식에는 대부분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누금세공법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태환을 비롯한 전체 장식에 누금세공법이 사용된 것은 이것이 대표적인 것으로
화려하고 놀라운 세공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慶州) 보문동(普門洞) 고분(古墳)에서 나왔다.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이 매우 능숙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신라(新羅)의 금(金)귀걸이에는 대개 이 누금세공법(鏤金細工法)을 써서 장식한 예가 많다.
그 중에서 태환(太環)과 수식(垂飾) 전체에 걸쳐 누금세공법으로 장식한 예는 이것이 대표적인 작품(作品)이다.
태환(太環)의 전면(全面)을 금립(金粒)으로 귀갑문(龜甲文)에 가까운 6각형으로 나누어 장식하고
그 6각형 안에는 4엽(葉)이나 3엽(葉)으로 된 초엽문(草葉文) 같은 것을 하나씩 금립(金粒)으로 표현해 놓았다.
귀걸이의 몸체가 되는 이 태환(太環)에는 가는 고리를 맞물려 달고
다시 2단으로 된 중간부 둘레에 심엽형(心葉形)의 작은 영락(瓔珞)을 금실로 꼬아서 수없이 달아 놓았으며
이 수식의 맨 끝에는 큰 하트형(形) 장식 하나를 달아 놓았다.
(설명 문화재청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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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의 북쪽을 흐르는 강?이 북천이다.
북천을 건너자마자 평지의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왕릉이 41대 헌덕왕릉인데
이 글에다 붙일 것인가, 아니면 다음 편의 석탈해왕릉과 표암에 붙일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다음 차수에 넣기로 마음 먹었다.
탈해왕과 표암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야될 것이 좀 있어 보이고
애시당초 계획에 없었던 문화재청의 자료인용으로 부부총의 분량이 충분해졌기 때문이다.
계속합니다...
다음 블로그 '옛정자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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