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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억의 LP 여행/이장희

mistyblue 2014. 2. 20. 13:24

 

 

 

 

[추억의 LP 여행] 이장희

 

 

 

475세대를 음악적 포로로 만든 '음치' 

 

가수 겸 작곡가, 방송 DJ로 70년대를 풍미했던 이장희. 굵고 은은하면서 귓전을 훈훈하게 데워줄 만큼 따뜻함이 배여있던 목소리로 들려 주었던 <한 잔의 추억>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불꺼진 창>등 주옥같은 레퍼토리들. 도시 젊은이들의 생활을 속삭이듯 달콤하고 정감어리게 표현했던 노랫말과 감각적이고 열정적이였던 멜로디는 만인의 연가였다. 저항적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유신정권의 삐딱한 시각 속에 비친 이장희는 늘 사고뭉치였다.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시건방져 보였던 콧수염, 불량끼 넘쳐 보였던 오토바이. 그는 높은 인기만큼이나 표절시비, 금지곡, 대마초사건 등 크고 작은 사고로 늘 대중들의 관심을 몰고 다녔다.

1947년 경기도 오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이장희. 4살 때 천자문을 뗀 신동이었다. 가수가 되려 그랬을까 울보로도 유명했다. 피난민 시절 마산 월영초등학교에 입학해 4학년 때 서울창신초등학교로 전학, 명문 서울중.고를 졸업했다. 고1 때 삼촌의 친구인 가수 조영남의 기타 연주와 노래에 반하면서 AFKN 음악 프로를 밤늦도록 접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동창생 11명이 모여 <매드 클럽>을 결성, 공부보다는 노래에 정신을 빼았겼다. 삼촌의 기타를 빌려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등 500여 곡의 반주와 가사를 줄줄 외웠을 정도로 뛰어났던 음악성에 비해 ‘노래는 친구들로부터 늘 음치 소리를 들을만큼 별 볼 일 없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이 때부터 멋드러지게 노래를 부르고 싶어 남몰래 노래 공부와 기타 연습에 전념했다. 미국 컨츄리&웨스턴음악의 신이라는 행크 월리엄스는 음악적 스승. 이장희가 추구한 단순한 화음, 쉬운 멜로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한 가사는 그의 영향이 지대했다. 히트곡 <자정이 훨씬 넘었네>는 고교 시절에 작곡했던 습작으로 음치를 극복하고픈 심정을 잘 표현한 컨츄리 웨스턴풍의 대표적인 노래였다.

 

연세대 생물학과에 간신히 합격한 이장희는 고교 때부터 동창생인 유종국의 소개로 의예과 보컬 그룹 휘닉스 멤버였던 윤형주와 첫 대면을 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이장희가 멜로디, 윤형주가 하이, 유종국이 베이스 파트를 맡으며 라이너스라는 연세대 남성 포크 트리오를 결성했다. 몇 달 후 윤형주는 송창식과 트윈 폴리오로 이장희는 <베가 본드>라는 밴드를 결성하며 각각 음악적 방향을 달리했다.

연세대에 적을 둔 채 서울대 공대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 생활을 하던 중 친구들과 주먹다짐으로 눈을 다쳐 왼쪽 시력이 엉망이 돼 버렸다. 현미경을 오래 봐야 하는 전공도 문제였지만 책조차 오래 볼수 없게 되자 이장희는 학교까지 중퇴해 버릴 정도로 좌절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나간 곳이 음악 친구들이 있는 세시봉.

이 곳에서 절친한 음악 친구 홍대생 강근식을 만났다. 첫 만남부터 마음이 통한 이들은 포크 듀오를 결성, 명동 <코스모스>에서 무명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음악 친구들인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은 이미 유명 가수들. 이장희는 강근식의 군 입대로 짧은 음악 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홍대를 다니던 화가 친구 이두식은 아무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이장희를 측은하게 여겨 화실 운영을 제의했다. 미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화실 생활은 묘하게 마음을 편하고 아늑하게 해주며 정신적인 안정을 찾아주었다. 히트곡 대부분은 이 때 탄생되었을 정도로 작곡에 전념했던 시절이었다.

데뷔곡 <겨울이야기>는 외기러기 상태였던 당시의 우울했던 자신의 인생을 소설가 최인호의 도움으로 만들어본 일종의 토크 송. 송창식의 히트곡 <애인>과 <비의 나그네>도 이 때 작곡된 불후의 명곡들이다.

작곡을 하자 71년 처음으로 DJ 제의가 들어와 다시 음악 인생의 길이 열렸다. 미숙했던 3개월간 KBS 라디오 <리듬 퍼레이드> DJ 생활은 71년 데뷔곡 <겨울이야기>의 발표에 이어 꿈같은 첫 독집 앨범 제작을 가능케 해주었다.

72년11월, 친구 이두식이 자켓 디자인을, 강근식이 기타 연주를 해준 첫 독집 앨범 <이장희-유니버샬,영 페스티발 1집,K-APPLE777>을 발표했다. 9곡의 창작곡과 하나의 번안곡등 총 10곡으로 구성된 앨범은 ‘철두철미한 자작곡의 본격 포크 송 앨범으로 근래 가장 큰 디스크 수확의 하나’라고 당시 언론의 극찬과 기대를 받았다. 이 중 1면에 수록된 <그 여인 그 표정>과 2면의 <그 애와 나랑은>은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히트곡이다.

72년 12월 2일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성황리에 열렸던 첫 리사이틀 <겨울이야기>. 현경과 영애가 백 하머니를 윤형주가 사회를 맡았고 송창식, 조영남, 양희은, 김세환 등도 노 개런티로 우정 출연한 포크 잔치 한마당이었다.

이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기타를 연주해 주기로 했던 군 복무중인 강근식은 공연 시작 전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간신히 참석하였다. 그는 예정된 외출이 허락되지 않자 탈영을 하여 절친한 친구 이장희의 첫 리사이틀을 빛내 주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73년 정초부터 동아 방송의 <0시의 다이얼> DJ로 복귀하며 안정된 음악 생활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 만난 이화여대 불문과 여학생 서혜석. 너무도 서정적인 명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자신의 애인를 위해 작곡했던 사랑의 세레나데로 그녀도 대중들도 모두 이장희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동방의 빛'으로 연 음악적 절정기 

 

이장희는 음악 친구 강근식의 군 제대와 때를 맞추어 늘 꿈꿔오던 새로운 록 그룹을 결성했다. 자신은 작곡과 보컬을, 강근식은 기타와 편곡, 베이스는 정성조악단에서 명성을 날리던 친구 조원익, 드럼은 HE5의 배수현을 영입해 4인조 라인 업을 구성했다. 이 때는 그룹 이름도 없이 음악적 탐구에만 전념했던 시기였지만 이들은 마니아들 사이에 입소문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록그 룹 <동방의 빛> 1기라 할 수 있다. 리더 강근식과 새로운 음악적 지향점을 찾으며 한 축을 담당했던 이장희는 자신이 DJ를 맡고 있는 동아 방송 A스튜디어에서 그룹 멤버들과 매일같이 밤을 세우며 음악 탐험 여행을 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는 록 그룹이 지향하는 그룹 사운드의 음악성보다는 가수만을 중시하는 잘못된 풍토가 더욱 강했다. <동방의 빛>을 이장희 개인 세션 그룹 쯤으로 과소평가 되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초로 신디사이저를 록에 접목하며 환상적 사운드 시대를 연 <동방의 빛>은 무심하게 잊혀지기엔 그들이 남긴 음악적 영향력은 너무도 지대했다. 표절 시비가 거셌던 공전의 히트곡 <그건 너>, <촛불을 켜세요>, <자정이 훨씬 넘었네>등 레퍼토리들은 이 때 만들어져 사랑을 받았던 명곡들.

처음 음반사들은 '너무 젊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곡들'이라며 시큰둥했다. 실망한 멤버들은 음반 발표가 난항을 겪게되자 몇 달동안 키워온 꿈을 접고 해체 일보 직전까지 갔다. 구세주는 있었다. 이들의 새로운 음악에 매료된 성음 제작소 기술부장 나현구였다. 그의 열열한 지원으로 발표된 이장희의 3집 <그건 너-성음,SEL20-0015,73년6월20일>음반. 그룹 이름이 아닌 이장희 독집으로 세상 빛을 본 아쉬움이 있지만 포크 록의 명반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대중들은 발표 직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 음악을 무시했던 모든 음반사들이 땅을 치며 후회했을 만큼 상상을 초월한 호응은 몇 달 후에야 요동을 쳤다. <그건 너> 등 수록된 9곡 모두는 당시 젊은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3집은 외국 원판에 버금가는 뛰어난 음질을 뽐낸다. 국내 최초로 무그 신디사이저 음악의 새 장을 활짝 열어 제친 새롭고 신비로운 사운드로 무장된 이 불후의 명반은 이장희를 명실상부한 정상급 가수 반열에 올려놓았다. <동방의 빛>은 74년 당시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성음,SEL20-0029,74년4월>의 사운드 트랙을 연주하며 정식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74년4월 이화여대 강당 리사이틀은 이장희의 개인 리사이틀 형식으로 치러졌지만 사실은 한달간 서린호텔에서 합숙훈련하며 준비한 <동방의 빛>의 데뷔 무대였다.

 

       

 

AFKN의 미국인 팝 DJ 보비 직스가 사회를, 송창식, 윤형주 등 음악 친구들 외에도 인기 절정의 어니언스가 우정   출연을 한 이 공연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대성황이었다. 2기 멤버는 드럼이 유영수로 교체되고, 올갠 이호준이 가세해 음악적으로 더욱 화려해진 5인조였다.

유명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무료 협찬한 회색 우주복 무대 의상도 장안의 화제거리였을 만큼 팬들은 야단이었다. 이장희는 '동방의 빛 활동이야말로 본격적으로 진정한 음악을 추구했던 시절'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후 톱 가수의 인기와 더불어 <그건 너>의 주인공이기도 한 첫사랑 서혜석과 꿈같은 결혼으로 이어진 인생의 전성기는 달콤하기만 했다. 호사다마라 할까. 인기 절정을 치닫던 이장희는 75년 6월 1차 가요정화 운동 때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불꺼진 창> 등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 족쇄를 차버렸다. <동방의 빛>도 자동해산, 이장희는 반 년 후 그룹 <영 에이스>를 개편하여 5인조 록 그룹 <북극성>으로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75년 12월3일, 이번엔 윤형주, 이종용 등 인기 연예인 80여 명과 함께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됐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도 밀어 버리고 대중 앞에 사죄까지 했지만 퇴폐 온상의 대표주자로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적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노래를 좋아했지만 가수를 평생 직업으로 생각치 않았던 이장희는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서린동에 반도패션 종로지점을 개설, 사업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업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을 거두자 이장희는 음반 제작쪽으로 방향을 선회, 가수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하며 음악적 갈증을 해소했다. 그가 기획, 제작한 음반 중 <한동안 뜸했었지>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사랑과 평화의 데뷔 음반은 클래식과 록을 접목한 새로운 음악으로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과 찬사를 받았던 명반으로 기억된다.

이장희는 81년1월 보다 큰 야망으로 품고 미국 LA로 이민을 떠났다. 이민 초기, 한인방송의 방송국장과 더불어 작곡, 노래를 계속하며 <동일>이라는 연예회사 설립과 함께 소극장 형식의 카페 <로즈 가든>을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 LA에서 한인방송 라디오 코리아 대표로 성공한 이장희. 88년엔 14년 만에 자신의 신곡앨범을 들고와 하얏트호텔에서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포크와 록을 넘나들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노래 가락들은 가요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한 콧수염에 중절모를 눌러 쓴 그의 모습과 <그건 너>와 <한 잔의 추억> 등 명곡들은 아련한 추억의 책장속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주간한국 2001.09.18.]

 


 

 

출처 : 길 떠나는 나그네
글쓴이 : 임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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