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가요

[스크랩] 한대수 그의 이야기

mistyblue 2014. 2. 20. 13:05

 

 

70년대 음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히피즘의 낭만을 노래로

들려주었던 한국의 마지막 히피 한대수.

 


1948 3월 12일 부산 출생 父 - 한창석(핵물리학자) / 母 - 박정자(피아니스트)의 외아들
1958 New York City, PS 125 뉴욕 초등학교 입학
1962 부산 경남 중등학교 입학
1964 부산 경남 고등학교 입학
1965 미국 롱 아일랜드 A.G. Berner 고등학교로 전학
1966 New Hampshire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 New York Institute of Photography에서 사진 전공
1968 한국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1969 이화여자 대학교,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 드라마 센터 공연
1970 대한민국 국전 사진부문 수상
1970 군복무 (해병)
1974 코리아 헤럴드 신문 기자 겸 사진작가
1974 제1회 한국가요제 10대 작곡가상 수상
1977 뉴욕시 Color House Wheel, Chroma Copy의 사진작가 활동 및 록밴드 '징기스칸 (Genghis Khan)'의 리더로서 클럽 Trude Heller, CBGB 등에서 공연
1977 National Library of Poetry, nominated as distinguished member of International Society of Poets, Wash. D.C. 작가 수상
1988 L.A.로 이주. Color House, Burbank 사진관 매니저 활동
1991 뉴욕으로 이주. Nathaniel Lieberman 스튜디오에서 활동
1992 Oxana Alferova Hahn(모스크바 출생)과 결혼
1992 사진집 [맨하탄 빛의 광장] 출판
1993 Speed Graphics사 매니저 활동
1997 Crossbeat Asia의 후원 하에 일본의 록스타 카르멘 마키(Carmen Maki)와 함께 일본 공연 및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유니텔 록콘서트 'Koreanism' 공연
1997 시집 [대지의 새벽] 출판 - 작가상 수상 사진집 [Human Openings(Black Book)] 출판
1998 자서전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출판
1999 양희은의 '아주 특별한 만남' 공연(5/5 -5/9, 영산 아트홀)에서 고정 게스트로 함께 공 연
1999 사진집 [Human Openings 2(Blue Book)] 출판

 

album review

vol.4/no.20 [20021016]

 



한대수 - 바람과 나.

 

바람과 나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회고담: 한대수와의 인터뷰 (1) (2)


 
신현준 homey@orgio.net

 

날짜: 2002년 10월 3일
장소: 서울 연희동 한대수의 거처
질문 및 참석: 신현준, 최지선. 김형찬, 송창훈
정리: 송창훈, 신현준, 배성록, 이성식


한대수와의 만남. 나같이 그의 음악과 더불어 성장한 사람에게는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와의 만남이 전화 한 통화로 이렇게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올 때 머무는 연희동의 주택으로 찾아갔다. 1970년대 이전에 지어진 듯한 오래된 주택가에 위치한 집은 마치 “옥의 슬픔”에 나오는 집을 연상시켰다. 한적하고 조용한 오후였다.

그곳에서 4시간에 가깝게 한대수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정리가 끝났다. 1년 동안 이 일만 한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이나 정리하려고 시도하다가 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분량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A4로 5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녹취하는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지금 군에 가 있는 송창훈에게 감사한다). 둘째는 정리 과정에서 문체를 어떻게 정할지 곤혹스러웠다. 경상도 방언과 영어 발음의 영향이, 존대말과 반말이 뒤섞인 그의 독특한 발음을 ‘표준말’로 정리하면 전혀 한대수의 느낌이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인터뷰 때의 발음 그대로 옮기면 독자가 읽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뒤섞어서’ 절충하는 것을 차선으로 삼았다.

사실 한대수에 대한 이야기는 책이나 영상 등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려졌다. 일반 대중이 모두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알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변별력 있는 인터뷰가 되기 위해서 ‘음악 이야기’와 ‘사실관계의 확인’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한 ‘재탕’보다는 이게 차라리 소중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인터뷰 당시의 관심이 ‘1970년대’에 집중되어 있던 탓에 [멀고 먼 길](1974)과 [고무신](1975)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차후에 보완할 기회를 찾도록 하겠다. 한대수는 아직 ‘은퇴’한 인물이 아니니까.

 

“다들 놀랐지 뭐. 첫 곡인데다가, 전주도 없이 바로 “물 좀 주소~!”하고 나오니까 놀랬지”: [멀고 먼 길]에 대한 이야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Q: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거인 한대수 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대수 님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자서전도 있고 다른 책도 있어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오늘은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 위주로 여쭤 보겠습니다. 우선 1집 [멀고 먼 길](1974)과 관련된 질문을 드려 보죠. 먼저 1집에서 기타를 연주한 임용환 님은 어떤 분이신 가요? 저희가 갖고 있는 자료에는 ‘한국가요제’에서 두 분이 함께 연주했다는 내용도 있던데요(주: 이때는 잘 몰랐지만 임용환은 양병집 등과 교류하면서 명동의 르실랑스 등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3년의 청평 페스티벌에서는 양병집, 임용환, 최성원(!) 등이 한 팀을 이루어 노래를 부른 일도 있다. 이후의 그의 경력에 대해서는 한대수가 직접 이야기해 줄 것이다)
- 그렇지. ‘한국가요제’에서 우리 둘이 연주를 했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야. 보통 연구를 해 온 게 아니네. 둘 다 기타 치고, 나는 톱을 하고 임용환이는 하모니카를 불고. 임용환이 기타가 재밌지. 1집 녹음할 당시에는 기타 (잘) 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지금은 세션이라 하면 유능한 사람이 10명 이상은 되지만 그때는 한 명도 없었어. 원래 임용환 씨는 내 팬이어서 음악이 좋다고 따라왔는데 내가 보니까 기타를 좀 치더라고. 원래 자기 혼자 집에서 기타를 즐겨 친 사람이야. 그래서 무진장 연습을 시켰지. 내가 입으로 음을 불러주면 그걸 기타로 치더라고... 그런데 스타일이 아주 특이해. 안 그런가? 나중에 나하고 헤어진 이유는 이 친구가 어느 날부턴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자기는 가스펠만 하겠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뉴욕에 있을 때 임용환 씨가 1980년대 초반인가 뉴욕에 왔다고. 거기서 몇 번 만났는데 서로 거리가 멀어졌어. 내(한대수)가 하는 음악은 세속적인 음악이고, 자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밖에 안 하겠다고 해서.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별로 관계가 없어졌어. 그래서 임용환이 참여한 음반은 1집 [멀고 먼 길]이랑 4집 [기억상실](1990)에서 한 곡 부른 게 다인기라.

Q: 기타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한대수 님의 포크 기타 코드는 기본적으로는 간단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악보나 이정선 씨가 채보한 악보를 보면 코드들이 베이스를 달아서 나오는데, 그건 한대수 님이 붙여주신 코드인가요, 아니면 임용환 님이 기타 플레이를 그렇게 한 건가요?
- 방금 말했듯이 내가 임용환 씨에게 이래이래 휘파람으로 음을 불러준다고. 그러면 자기가 손으로 옮기는기라. 그런 식이었지. 그리고 “사랑인지”에서 쓰인 메이저 쎄븐쓰, 마이너 쎄븐쓰 같은 코드도 내가 지정해 준 것이지. 물론 리드 기타니까 내보다 훨씬 잘 치지. 나는 코드, 피킹 정도 하는 수준이고. 임용환 씨는 상당히 특이한 스타일이야. 내 첫 음반 하고 나서 그 분이 좀더 자기의 음악 세계로 갔으면 했지.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상당한 신자라서 가스펠 쪽으로 가는 바람에... 어느 정도였냐면 ‘가스펠 아니면 안 하겠다’는 분위기까지 갔다니까.

 

한대수의 데뷔 음반 [멀고 먼 길]의 커버 중 일부. 일그러진 시대, 젊은 영웅의 일그러진 자화상

 

Q: 2집 [고무신](1975)은 엄진 님이 제작자로 보이는데, 1집 음반을 제작한 분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권용남 님이나 정성조 님, 조경수 님은 어떤 계기로 음반에 참여하게 됐는지도 알려주세요.
- 1집은 신세계에서 만들었는데 김진성 씨가 날 데리고 왔으니까 김진성 씨 공이 크지. 권용남 씨는 나하고 친해서 참여한 경우예요. 그분은 (신중현과)엽전들하고 히 식스도 했어. 그 당시 드럼으로선 최고였지. 정성조와 조경수 등은 김진성 씨가 데려온 거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구만. 조경수는 인물도 좋고 해서 나중에 가수 됐잖아(주: 조경수는 탤런트 조승우의 아버지다). 정성조 씨는 나중에 재즈 클럽에서 한두 번 만났고, 뉴욕 거리에서 한번 만나고 그게 다야. 그 음반 이후로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어.

Q: 제작자는 김진성 씨겠지만 ‘프로듀서’라고 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보통 한대수 님 음반에는 편곡자나 프로듀서가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직접 맡아서 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 그래, 전부 다. 그런데 간혹 프로듀싱이 있는 것이, 3집 [무한대](1989) 때 송홍섭 씨가 몇 곡을 편곡한 게 있지. [기억상실] 때는 잭 리(Jack Lee)랑 에드 매과이어(Ed Maguire)랑 나, 이렇게 셋이 알아서 한 것이고.

Q: 1집 음반은 첫 작품이라 녹음 당시에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녹음기간도 짧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특별히 기술적인 문제는 없으셨는지요?
- 1집 녹음은 하루 만에 다 끝냈어. 완전히 하루 만에 끝냈어. 더빙 같은 건 거의 없었고, “물 좀 주소”만 좀 있었어. “물 좀 주소”가 트랙으로 한번 가고, 내가 다시 기타 치면서 노래 불렀지. 다른 곡들은 노래 부르고 연주하고 동시에 다 했어. 당시에는 내가 녹음이라는 걸 아무 것도 몰랐어. 녹음이라면 무조건 다 한꺼번에 가야 하는 줄 알았다니까. 녹음을 해 봤어야 알지. 첫 녹음인데, 그 때야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 멀티트랙 레코딩이란 것을 난 몰랐어. 네 트랙이 뭐가 필요한지 몰랐고, 지금 뭐 48트랙이라면 48번 입힐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그런데 그때는 녹음기 자체를 가진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Q: 아마도 그 당시에는 녹음에 대해서 한대수 님 말고도 다들 잘 몰랐을 겁니다. 대체로 한방에 가는 녹음이었으니까요.
- 그렇지. 트로트 같은 음악이나 반주 깔고 노래했지, 그룹 사운드는 다 한 번에 갔다고. 그런데 “물 좀 주소”는 달랐어. 왜냐하면 정성조 밴드가 연주를 하러 왔는데, 기타가 ‘짝짝’거리는 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걸 못 하는기라. 여러 번 해도 그 소리가 안 나. 그래서 정성조 씨 기타리스트(이름은 까먹었는데) 그 사람보고 ‘이래이래 해주이소’ 했는데 그 사람도 자기 고집이 있잖아. 결국 안 되더라고. 그 사람이 ‘차라리 당신이 쳐보쇼’하는 거야. 하하하. 하나도 안 어려운 건데, 개념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이제 내가 직접 손수건을 기타 줄 안에 끼고 제일 뒤에 있는 픽업만 쓰고 짹짹거리면서...

Q: 그런데 1집에서 “물 좀 주소”는 밴드와 함께 한 록 음악 스타일의 편곡이고, 나머지는 주로 통기타 음악이지 않습니까? 다른 음악도 록의 편곡으로 하고 싶었던 건데, 조건이 안돼서 그렇게 한 건지, 아니면 “물 좀 주소”만 특별히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하네요.
- 사실 다른 곡도 몇 개 더 그렇게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녹음을 하루 만에 할 수가 없지. 적어도 3일은 잡아야 되겠지. 그런데 그 당시에 녹음이란 것이 하루 이틀 만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나야 전부 다 좀 화려하게 하고 싶었지. 그런데 그 중에 “물 좀 주소”만큼은 통기타로 안 되겠더라고. 그 곡이 근본적으로 록인기라, 아무리 생각해도 통기타만으로는 되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그거만이라도 록 편곡을 가미한 것이지. 그래서 “물 좀 주소” 녹음하는 데만 두세 시간 걸렸어.

Q: 당시 통기타 음악인들은 통기타만으로 순수하게 해야지, 록과 접목하는 것은 변절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 나는 장르에 대해선 전혀 신경을 안 쓰는 편이야. 지금도 그렇고 나는 내 음악을 하는데 있어서 주위의 반응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안 쓰지. 내가 내대로 충실히, 내 주위 훌륭한 음악인들과 충실한 소리를 만들면 다른 이들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기라. 설령 이해를 안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오케이라 그 말이지. 하하.

Q: 주위에서 “물 좀 주소”를 듣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없었나요? 사람들이 한대수 님 음악을 대개 통기타 음악으로 알고 있었을 텐데요. 곡 자체도 리듬감이 있고, 보컬 자체에 디스토션이 걸려 있어서 한대수 님의 이전 음악과 비교해 특이한 곡이었던 것 같습니다.
- 다들 놀랐지 뭐. 첫 곡인데다가, 전주도 없이 바로 “물 좀 주소~!”하고 나오니까 놀랬지. 전주 없는 음악으로는 첫 케이스인기라. 목소리부터 나오는 곡이 별로 없을 거라 아마. 그건 내가 고집을 했지. 음반을 만들 때마다 어떤 색채가, 오리지낼리티가 있어야 하거든. 다른 음악을 들어보니 전부 다 전주가 나오고 나서 목소리가 나오더라고. 목소리 먼저 나오는 곡은 별로 없어요.

Q: 자서전에 보니까 밴드들이 한대수 님의 의도대로 잘 따라하지 못해서 화를 많이 내셨다고 하던데요. 한대수 님은 통기타 분위기로 하려고 했는데, 밴드들이 너무 세게 연주해서 의견이 안 맞았다는 의미인가요?
- 아니, 반대인기라. 원래 “물 좀 주소~!”하고 세게 나가는 건데, 너무 안 되니까 마지막에 겨우 박자 맞춰서... 하이구. 너무 약하게들 해서 문제였지.

Q: 그 독특한 소리는 그 날 생각해 낸 건가요? 예전에 그런 비슷한 사운드를 어디서 들으신 적이 있었는지요?
- 그게 그 소리가 갑자기 생각나더라니깐. 그게 들어가야 노래가 되겠더라고. 예전에 들은 적은 없지. 한번 다시 들어봐요. 그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니까. 그게 만약 '짹짹'거리지 않고, '꿍치지 꿍치지' 이러면 재미없단 말야. 이게 리듬을 맞춰준다고.

Q: 당시 스튜디오의 녹음비는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처럼 ‘프로’ 단위로 되어 있었는지도. 또 과거에는 엔지니어들이 권력이 있고 고압적인 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녹음하는 동안 엔지니어들이 한대수 님의 음악 세계를 잘 이해하고 소화해 주던가요? (웃음)
- 그건 사장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김진성 씨가 잘 알 거야. 그 사람이 제일 정확해, 오히려 나보다도 잘 기억하지. 그런데 당시 녹음할 때 테이프 값이 얼마나 비쌌는지 몰라. 우리나라가 못 살 때였거든. 특수 수입 테이프란 말이지. 그니깐 녹음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큰 영광이었지. 그 시절에 엔지니어래봐야 몇 명 되겠노? 기계 다룰 줄 아는 양반이 우리나라에 두세 명밖에 안 됐을기라. 그 사람들이야 하이고, 하나도 이해를 못하는기라. ‘이게 뭐꼬, 이건 또 뭐꼬’ 그러지. 하모니카 삑삑 불어대면 ‘이거 뭐 하는 놈이냐’...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녹음한 음반인데, 아무 것도 안 나온 거는 아니잖아. 완전 기적인기라, 이건. 미리 맞춰보고 연습하고 한 것도 전혀 없이 곧바로 들어갔다고. 나하고 임용환이 뿐이었니까 악보 같은 것도 안 가지고 들어갔다고. “물 좀 주소”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서도...

Q: 그러면 “바람과 나”에 있는 피아노 연주나, 그 외의 곡들에서 정성조 님의 키보드, 오르간 같은 연주도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인가요?
- 그건 아니지. 피아노 코드 정도는 가르쳐 줬었지. 아, 생각해 보니까 악보도 있긴 있었네. 물론 정확하게 다 어레인지 된 건 아니고, 마디 있고 코드 있고 가사 적혀 있는 정도지. 정성조 씨 연주는 인자 즉석에서 했지. 그건 정성조 혼자 한 방에 가버린기라. 원 테이크로 한번에 간 것이고, 올갠이 코드를 받쳐주는 거니까 특별히 기교를 부리고 한 건 아니지.

Q: 정성조 님은 이를테면 김민기 님 데뷔 음반에서 연주한 것을 보면 플루트 소리가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대수 님 음반에서는 뒤로 물러나서,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스라한 느낌을 주거든요. 이것도 의도한 것인지요.
- 난 그때 이런지 저런지 몰랐어. 그냥 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지금은 계획도 짜고 의도적인 게 많은 편이지. ‘이런 효과도 넣자 빼자’하는 식으로. 그런데 그때는 처음이라 난 녹음이 뭔지도 몰랐다니까. 준비 전혀 없었지. 내하고 임용환이하고 최동휘(첼로)까지는 준비가 됐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얼 어떻게 하는지 어떤 소리로 녹음되는지 모른기라.

Q: 녹음하시면서 정성조 님 스타일의 연주들이 맘에 안 드시거나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저희의 편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서로 스타일이 안 맞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그 때 맘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딨나. 녹음 한번도 안 해봤는데 알게 뭐꼬. 생판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한 거야. 근데 한 가지 느낀 것은, 최소한 ‘들을 만’은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정성조 씨 3절부터 임프로바이제이션 나갑니다” 이래 말만 해 버리면 바로 가는 거지. 2절이나 3절에 건반 같은 다른 악기들이 더해지지? 나는 항상, 지금도 그런 식인기라. 지금도 [Eternal Sorrow](2000) 들으면 그렇잖아. 그게 내 스타일인기라.

Q: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사전 어레인지먼트(편곡) 없이 녹음한 셈이군요. 그렇게 하루만에 녹음하려면 아무래도 의견 충돌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 데요. 연주자들이 대체로 한대수 님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었나요?
- 임용환이랑 내하고는 연습을 항상 했잖아. 나머지 뭐 있나. 올갠 코드 받쳐주는 거 조금 있고, 피아노 약간 쳐주고. “물 좀 주소”만 다른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뭐. 그라고 대체로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해주더구만. 그 사람들이 나한테 이견을 안 내세우는 거겠지. 베이스 칠 때 조경수 같은 경우도 베이스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쭉 밀어야 하니까, 주문대로 하자면 손이 아팠을 텐데 인자 그렇게 해달라고 하니까 해달라는 대로 했지. 조경수는 자기가 해야 할 연주가 끝난 뒤에도 앉아서 쭉 지켜보다가 “청산유수군요” 하더라고.

Q: 저희가 듣기로는 “물 좀 주소”에 나오는 카주 연주가 한대수 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카주라는 악기를 선택한 것인지요.
- 왜 카주를 했는가 하면, 불기가 쉬운기라. 아무나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사실상 내 희망사항은 색서폰이 들어갔으면 좋겠더만, 색서폰이 없는기라. 정성조 씨가 색서폰도 하는 줄 몰랐던 거지예. 그 양반을 원래 플루트 연주자로만 알고 있었지. 그래서 카주가 들어간 거지.

Q: “사랑인지”에 나오는 딸랑이 소리도 독특합니다. 어떻게 착안한 건가요?
- 내 그 때 신문로에 살았는데 한국식 집인지라, 중간에 마당도 있고 우린 이쪽에 살고 앞집에는 다른 식구 사는 식이었지. 중간에 물 호스도 있고. 근데 그 때 우리 앞집에서 애를 낳은기라. 아기 딸랑이 소리가 어째 감미롭게 들리더라고. 그래서 아침에 녹음실 나오는데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들고 갔지.

Q: 음반 정보에는 스틸 기타도 치신 것으로 나오는데요, 놓고 치는 기타 아닌가요?
- 그게 엄밀히 얘기하면 스틸 기타는 아니고, 젓가락으로 기타를 뉘어 놓고 친 거지. 마치 스틸 기타처럼... 스틸 기타라고 하면 다른 기타를 생각할텐데, 아무튼 기타를 무릎에 눕혀놓고 젓가락으로 때렸다, 이렇게 설명하느니 그냥 간단하게 스틸 기타라고 해 버린 것이지. 어떻게 다른 말로 표현하기 힘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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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멀고 먼 길, 그 뒷모습. 맨 위 사진은 한대수의 첫 번째 부인 김명신이 찍은 20대 시절로, 이는 [멀고 먼 길] 재발매반의 커버에 쓰이기도 했다. 중간과 아래 사진은 김한성수가 찍은 50대 초반의 모습(2000).

 

Q: 좀 다른 질문인데, 1집 음반에 나오는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 사진은 촬영 장소가 어디인가요?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이었다고 들었는데요.
- 거기가... 우리 ‘첫째 마누라’가 찍은 건데, 걸어가면서 자기가 하나 찍고 싶다고 하대. 그 날 놀러가서 우연히 찍은 사진이지. 거기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분명 서울은 아니야. 저기, 강원도 하루 만에 갈 수 있나? (질문자: 지금이야 가죠.) 그 당시에는 못 갔지? 그럼 강원도도 아니야. 하루 만에 갔다 온 거리니까 경기도 어디일 거야.

Q: “인상”의 가사를 보면 굉장히 암담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짓에 무너진 옛 세상이 / 해지기 전에 잠든 운명이 / 내 눈앞을 막고 있네”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당시 어떤 심정을 표현한 겁니까? 저희가 보기엔 그 당시에 한대수 님이 한국 사회 오셔서 느꼈던 개인적인 암담한 심정이 담겨 있다고 보는데요. 그리고 낮게 깔린 첼로 연주도 그런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보이구요.
- 그렇지. 나는 모든 사회가 거짓이 있다고 보거든. 로마 제국을 보더라도 마지막에 상당히 좀 임모럴(immoral)해진 점이 있고. 모든 제국이 결국 나중에 파멸될 때는 거짓이 많아진다고 나는 본다고. 섹슈얼리티라든지, 파워, 권력, 남녀관계 위치의 바뀜 등 전부 거짓이 된다고 느꼈어. 어느 사회나 거짓이 많지 않은가. 부패를 비롯해서 그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도 거짓이 많은 것 같았고, 그런 모든 점을 이야기한 것이지. 지금도 사실 많지, 뭐.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근데 그때 어린애 치고는 상당히 큰 주제를 다룬 셈이지. 특별히 긴급조치나 유신 때문에 만든 곡은 아니고, 아마 1969년에 만들었을기라. 그 곡은 구상은 미국에 있을 때 했고 완성한 것은 한국에 와서니까. 내 한국 왔을 땐 이미 분위기가 답답했지. 그 때는 장발인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내 머리 보고도 뭐라고 그러고. 아까 좋은 지적 하셨는데, 첼로 소리 묵직한 것도 그런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예.

Q: “행복의 나라”에서 베이스 기타는 일렉트릭을 쓴 건지 어쿠스틱을 사용한 건지 궁금합니다.
- 통기타, 제일 낮은 줄 두개로 한 것이지. 사실 내가 제일 필요한 것이 콘트라베이스였는데 찾기도 힘들고, 연주해 줄 사람도 찾기 힘들고, 돈도 없고... 그래서 임용환이 보고 “이거 칠 때 제일 낮은 거 두 음만 써라” 그래 갖고 베이스 런(run)을 하라고 말한기라. 그걸 넣은 다음에 콘솔로 만지면 콘트라베이스음이 나오거든. 아, ‘이렇게 하면 베이스 소리로 들리는구나. 우리 성공한기라’라고 생각했지.

Q: “하루 아침”이란 곡은 음반사 측에서 그 곡 때문에 음반 전체가 금지될까 해서 일부러 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 윤(상호) 사장이 그건 안 되겠다고 하더라고. 심의 통과가 안 될 것이라고 지레 겁먹은기라. 그 곡을 퇴폐로 본다고 하더라고. 빈대가 왜 있고, 젊은애가 할 일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소주를 먹고... 우리나라가 지금 가난에서 벗어나서 잘 살려고 하는데 무슨 얘기냐. 새마을 운동이 한창인데 라고 말한다는 거지.

Q: “하루 아침”에서 목탁 소리가 들리는데요, 이것도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가요? 한대수 님 음악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의도가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웃음)
- 목탁 소리는 임용환이가 했지. 특별한 의도 같은 것은 없고, 박자 맞추기가 좋더라고. 하하. 그 소리가 들어보니까 재미있던가? 그러니까 우리가 실험적으로 해 본 것이 제대로 맞아 들어간 것도 많은기라.

Q: 자꾸 기억력을 요하는 질문만 드려서 죄송한데요, 1집 가운데 한국에서 지은 곡은 어떤 건가요?
- 와, 그것도 기억해 내라고? 어디 보자, “물 좀 주소”는 여기서, “하룻밤”도 여기서. “바람과 나”는 거기서. “잘 가세”는 여기서 했고... “옥의 슬픔” 거기서, “행복의 나라”도 거기서, “인상”은 아까 말했고. “사랑인지”는 여기서.

Q: “사랑인지”는 드물게 사랑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노래 같습니다. 구체적인 사연이 있는 건지요?
- 하하, 얘기해 줄까요. 내가 TBC에 고정출연할 때 방송을 하고 있는데 스튜디오 밖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더라고. 탤런트로 활동하던 여자였어. 그 여자가 “한대수 씨 방송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라고 그러는 거야. 황홀했지. ‘이런 사람이 내 음악을 이해하다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그 여자와 사랑에 흠뻑 빠져버린 것이지. 그 당시 서울에 아파트가 별로 없었고 마포에 몇 개 있었는데 이 여자가 거기 살았어. 그래서 아파트에 자주 놀러 가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새벽에 그 집을 나서는데, 바람은 내 머리를 휘날리지 가로등 불이 켜져 있고 새벽은 천천히 밝아 오고... 그러니까 바로 가사와 곡이 나오더라고.(주: 2절 가사는 “가로등 쳐다보면 새벽은 밝고 바람은 내 머리를 가볍게 휘날리며 이것이 사랑인지”이다.)

Q: 오늘 인터뷰의 대박입니다(웃음). 이제 1집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신세계 윤상호 사장도 이 음반이 잘 팔릴 것으로 예상하고 제작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 그 사람 완전히 비즈니스맨인기라. 음악에 대한 사랑도 있긴 있지만 아무래도 장사를 할 줄 아니까 시작했겠지. 한마디로 사업가지. 사업적인 계산이 안 되뿔면 아예 시작도 안 했겠지. 하하.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팔리는 음반이 됐으니까. 아무튼 끝내주는 비즈니스 맨이지.

Q: 1집은 당시 평에 따르면 ‘불온’하다고 평가되는 음반이었는데, 무사히(!) 취입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 그런 여건이 된 것은 내 군대간 사이에 김민기가 1집에 “바람과 나”를 넣었지 않은가. 또 양희은이가 “행복의 나라” 불렀고. 마침 그 노래들을 대학생들이 좋아하고 있었고, 젊은이들한테 많이 퍼져 있었지. 그래서 김진성 씨가 내를 신세계로 끌고 갔는데, 알고 보니 그 두 곡이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걸 알고 취입한다고 하는기라.

 

“우리 젊은이들 자신이 여치같이 보이더라고. 밟으면 다 죽잖나”: [고무신](1975)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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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이제 2집 [고무신](1975)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에는 이정선 님도 참여하셨는데, 당시 이미 상당한 기타 고수로 알려져 있었는데 참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 이정선 씨는 음반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담당했지. 누가 베이스 치는 친구라고 이정선 씨를 데리고 왔어. 그 때 학생이었는데, 이정선 씨가 음반 녹음하기 전에 연습 많이 해 가지고 참여한 거지.

Q: [고무신]에서 연주를 맡은 ‘무지개 사운드’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시죠. “오면 오고”에서 5도씩 왔다 갔다 하는 베이스도 무지개 사운드의 작품으로 보이는데요. 또 그 밴드가 참여한 다른 음반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 ‘무지개 사운드’는 그 때 젊은 록 밴드였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엄진 씨가 데려온 친구들이야. 사람들 이름은 기억나질 않네. 대학교 밴드였는지 어땠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만.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올갠. 그렇게 약간 ‘로킹’한 연주는 이정선 씨가 아니라 무지개 사운드가 했지. 그 친구들이 다른 데 참여했는지는 내도 모르겠어. 앨범이 유실되고 회사도 문 닫고 했으니까 알 수가 없지. 이거 인터넷에 올려서 ‘그 때 무지개 사운드 하시던 분들 좀 나타나시오’라고 글 좀 써 봐요. 그 사람들이 살아 있다면 내 나이쯤 됐겠네. 어디 봅시다. 근데 음반에 곡목만 있고 멤버 얼굴은 없네. 얼굴 안보면 기억을 몬한다 아이가.

Q: 아무튼 한대수 님도 음반 제작하실 때, 세션 선택에 나름대로 상당히 고려를 했던 건가요? 무지개 사운드도 한대수 님 보기에 연주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 그럼. 그 당시 록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그 정도면 훌륭했지. 내 생각입니다만, 앨범마다 세션이 좋았잖나. 색깔도 서로 다 달랐고. 그 때 그 사람들이 다 출발은 내하고 같이 했지만 지금은 대가들이 됐잖아. 콩가랑 탬버린 친 유복성 씨도 어릴 때 같이 한 것이고, 내는 또 운이 좋게도 그 당시 같이 한 사람들이 다 아마추어였는데, 나중에 보면 거진 다 대가가 되어 있는기라. 손무현이도 21살 때, 김민기도 20대 초반에, 이정선이 그 아도 학생 때 같이 했으니까. 무지개 사운드도 그렇고. (질문자: 한대수 님이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서 영광스러워.

Q: 한대수 님 보시기에, 기타 세션으로서 임용환 님과 이정선 님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어요? 잘 친다 못 친다의 차원을 떠나서, 두 분 다 제각기 장단이 있을 것 같은데요.
- 둘 다 ‘양호’했어. 둘 다 양호한데, 가들이 둘 다 착해. 임용환 씨도 조용하게 기타 잘 치고, 이정선 씨도 그렇고. 둘 다 내성적이야. 특히 임용환 씨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자기 표현 잘 안하고, 이정선 씨도 그렇고. 그리고 둘 다 워낙 처음 녹음하는 거니까 얼떨떨했겠지. 정신 없었을기라.

Q: 이정선 님도 임용환 님의 경우처럼 한대수 님이 음을 불어주면 따라 치셨나요? 또 당시 녹음할 때 기타 모델이 어떤 기종이었는지 기억나시면 말씀해 주시죠.
- 이정선이도 우리 집에 와서 연습을 좀 하고, 부르는 대로 따라서 쳤지. 임용환 씨가 친 기타는 방의경 씨한테 빌렸어. 방의경 씨 기타가 제일 좋았거든. 그리고 나는 고야 기타라고, 별로 좋은 기종은 아닌데 그걸로 쳤지. 이정선이는 야마하 기타였던 것 같은데, 그것도 방의경 씨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 아마 이정선 씨가 그 때 기타가 없었을기라. 정성조 씨 밴드나 무지개 사운드의 기타는 본인들한테 물어보면 알 것이고.

Q: 오르간의 경우 1, 2집에서 사용한 것은 해먼드 오르간으로 보이는데요, 로큰롤에 많이 쓰이는 해먼드 오르간을 활용한 것은 음악 컨셉을 고려한 건가요? 저희가 보기에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는 느낌도 받는데요.
- 나야 그게 해먼드인지 다이아몬드인지 그 때는 몰랐지.(좌중 웃음) 그냥 그게 있으니까 쓴 거지 뭐. 마침 스튜디오에 있었거든. 아무튼 올갠이 비행기 뜨듯이 ‘웅~’하는 효과를 냈지. 올갠이야 1집에서는 정성조 씨가 워낙 잘 쳐서 내 입장에선 별 불만은 없었는데, 왜?

Q: 저희의 편견인지는 모르지만, 한대수 님의 경우 옛날 녹음이 요즘 깔끔한 것보다 더 듣기가 좋은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선 요즘 것과 예전 것이 비교가 안 되겠지만요.
- 그렇지. 그 당시의 녹음 같은 것은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돼. 지금이야 까지고 터진 것도 다시 해서 집어넣고 하잖아? 그 때는 한꺼번에 확 가는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실수 한 두개 정도는 오케이야. 나도 1집에서 틀린 게 몇 개 있다고. 2집도 그래. 이정선 씨가 노트(note)를 잘 못 쳤던기라. 그 왜 “나를 보게나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 다음에 기타가 틀렸지.(주: “자유의 길”을 말한다.)

Q: 2집 [고무신]에서는 프로듀서를 엄진 님이 맡으셨는데, 어느 정도나 음악적인 관여가 있었던 건가요? 대부분의 한대수 님 음반은 셀프 프로듀싱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엄진 씨가 관여 많이 했지. “물 좀 주소” 나오고 나서, 자기도 반응이 온다고 생각한 거지. 그 때 내는 ‘코리아 헤럴드’ 기자 생활 할 때라. 그런데 엄진 씨가 듣기에는 내 노래가 부드러운 면도 있으니까 ‘이쁘게 나가자, 현악기를 많이 쓰자’고 이야기한 것이지. 그게 별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단 엄진 씨가 하자고 한 것이고, 내 입장에서야 무조건 만들자고 하는데 고마운 거지. 이제 두 번째 앨범인데.

Q: 저희가 듣기에도 그 현악 편곡은 좀 별로거든요.(웃음) 저희가 질문을 드린 요지는, 어떤 사람들은 1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해서 2집 때는 대중성을 노리고 그 당시에 관행이던 스트링 편곡을 한 게 아닌가하는 이야기도 하거든요? 엄진 님이 ‘가요’계에 잔뼈가 굵은 분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지 않았나 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 엄진 씨야 히트곡도 몇 곡 있었고, 윤복희, 윤항기하고도 사이좋았지. 윤복희, 윤항기가 요즘으로 치면 이효리나 강타 아이가. 그러니까 엄진 씨처럼 상당한 관록이 있는 사람이 내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상당히 희한한 거야. 말하자면 대중적인 히트 메이커인 사람인데 내 음악을 좋아하더라고. 그런 사람이 프로듀싱을 나서니까 나는 어느 정도 프로듀서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 어떻게 말하면 약간 대중적인 판단을 한 것일 수도 있지. 그런데 아셔야 할 것이, 모든 음악가는 인디나 오버나 언더나 모든 음악가의 갈망은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거 아닐까. 이건 틀림없는 사실인기라. 이기 팝(Iggy Pop)도 그럴 거고, 스캇 매킨지(Scott Mckenzie)도 그럴 거고, 이효리도 그렇고, 내도 그럴 끼고. 수백 만 명이 들으면 좋겠다는 것은 근본적인 작곡가의 자세인기라. 그렇지 않은가?

Q: 그렇군요. 그런데 2집은 컨셉 앨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곡의 배열이나, 가사의 점층적 구조나, 절망적인 “여치의 죽음”부터 “희망가”로 이어지는 점 등등이 말입니다.
- 그렇지. 내 딴에 컨셉을 생각하지. 모든 앨범에서 어느 정도 컨셉을 생각하지.

 

Q: “여치의 죽음”은 속된 말로 ‘약 냄새가 나는’ 싸이키델릭한 느낌이 있는 곡인데요. 스케일의 독특함이나 연주 방식이 라비 샹카(Ravi Shankar) 같은 인도의 라가 음악을 연상시키거든요. 타블라를 치신 건가요? 아니면 콩가나 봉고로 하셨는지요.
- 타블라는 칠 줄 모르지. 봉고로 했지. 잘 보셨구만. 내가 라비 샹카를 1967년에 처음 들었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기라.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같은데서 라비 샹카가 좀 죽여줬나? 그런 분위기에 젖었고, 인도 음악을 이해하려고 하고 좋아한기라. 인도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인정하지. 그리고 이것을 기타로 하면 어떤 분위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고민을 많이 해본기라. 만약에 외국 사람이 우리 가야금을 듣고 ‘야 저거 소리 좋다’고 해서 기타로 가야금 연주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나는 기타로 인도의 라가 분위기로 한번 가 보자. 그래 타블라를 썼으면 좋다켔는데, 타블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 그래서 유복성 씨 보고 ‘봉고로 이런 기분 내 보시오’해서 맞춰 본 것이지.

Q: 그럼 “여치의 죽음”에서 기타는 직접 치신 건가요? 독특한 음색이 조율법에서 나온 것 같은데요. 녹음도 이상하게 한 것 같구요.
- 그게 조율법이 좀 특이하지. 절대 가르쳐줄 수 없어. 하하하. 녹음도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했지? 그게 인자 엔지니어가 잡은 소리지. 가만히 있어도 빙빙 돌끼라. 왼쪽-오른쪽-왼쪽-오른쪽. 엔지니어가 그런 식으로 잡은기라. 내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그 당시 말로 하면 서라운드 사운드지. 그 옛날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손으로 그리면서) 이렇게 돈다고.

Q(김형찬): 조율 같은 부분은 한대수 님이 인도 라가 음악을 연구한 성과란 말씀이군요. 실은 안 가르쳐주셔도 대충 압니다. 개방현을 많이 쓰면서 나머지 중간 현에 반 음 차이 나는 조율을 한 것 아닌가요? 또 라비 샹카 말고,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에도 영향 받으신 부분이 있나요?
- 하하, 김형찬 선생은 나중에 혼자 오시오! 인연 해봅시다. “여치의 죽음”이 선생한테는 물건으로 느껴졌구만. 아무튼 내가 연구를 많이 한기라.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은,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더라고. 내가 연구한 건 그 한 곡에만 써먹었지. 두 번 하면 재미없지 않나. 샌프란시스코 사운드의 영향은 많이는 안 받았고. 나는 그레이트풀 데드(The Grateful Dead)는 싫어 해, 곡도 좋지 않고 미국애들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

Q(김형찬):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1974-75년 당시 박정희에 저항하는 가요는 “물 좀 주소”, “미인”, 그리고 “여치의 죽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렇게 생각해 주면 영광이지. 왜냐하면, “여치의 죽음”은 가사가 없으니까 음으로 반항한 거 아이가.

Q: 그 자체가 반항이죠. “여치의 죽음”은 아무래도 일종의 메타포일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저희 생각으로는 박정희는 개미를 원했는데, 한대수 님은 여치를 이야기했다고 보여지네요. 다시 말해 사회에서 예술가의 존재가 필요한데 일개미의 사회에는 예술가는 필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거든요.
- 야, 그럼 해석이 되네. 여치가 잉글리쉬로는 그래스하퍼(grasshopper)인데, 풀에서 주로 살잖나. 우리 젊은이들 자신이 여치같이 보이더라고. 밟으면 다 죽잖나. 풀을 집으로 살고. 그게 죽으면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이지만, 음으로 크게 만들어 버린 거지. 만약에 여치가 아니고 무슨 장군의 죽음 그랬으면 웅장하게 나올 것 아이가. 비록 쪼만한 여치지만 그것을 웅장하게 만든 것이지.

Q: “여치의 죽음”은 원래 15분짜리 대곡으로 알고 있는데요. 러닝타임이 줄어든 이유가 있나요?
- 엄진 씨가 중간에 끼어들어 갖고 짧게 만든 것이지. 그게 아마 나중에는 5-6분밖에 안될걸. 사실 10분 넘어가야 제 맛인기라. 길어야 맛이 나는데 자꾸 안 된다고 사인을 주잖아. 끊으라고.

Q: 톱 연주는 어떻게 한 건가요? 그 당시에 톱 연주자가 한 분 있었는데, TV에 자주 나왔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혹시 그 분을 데리고 녹음한 것인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 그건 모르겠네. 톱은 내 혼자 배워서 한기라. 내가 톱을 어떻게 배웠는가 하면, 배우면 또 재미있지. 연희동에 사는데 세탁소 아저씨가 내가 음악하는 걸 알고, 자기도 젊은 사람인데 심심하잖나. 그래서 나를 자주 만나러 왔지. 옆집 사니깐. 그런데 하루는 이 친구가 톱을 가지고 소리를 내는기라, '야, 이게 뭐냐'고 생각해서 세탁소 아저씨한테 배운 거라고.

Q: 한대수 님 음반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오후”를 들으면 뿅뿅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한 건가요? 몇몇 팝 음반에서는 가끔씩 들어본 것도 같은데요.
-그건 주스 하프(Juice Harp)라고 하는기라. 옹아옹아하는 것인데, 미국의 컨트리 뮤직에서 많이 쓰지. 아니, 마우스 하프(Mouth Harp)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Q: 저희의 관점에서는 “고무신”이 한대수 님 곡 중에서 가장 토속적인 느낌을 주는 곡인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편견에 따르면 ‘한대수는 양키 문화의 첨병’이라는 시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시선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나요?
- 그게 시골을 그리워하는 부분도 있었고, 내가 그런 점에 대해 항상 답답해했으니까. 내가 내 자신을 촌에 있다고 비유를 해 본 거야. 촌놈이라고 생각해보고, 촌놈이 있으면 촌색시도 있어야하고, 또 내가 가난한 집안의 어부의 아들로 생각을 해 본거지, 내 자신을. 그래서 아버지 오면 뭐든지 해결이 된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그런데 사실 그 때는 상당히 기분이 안 좋을 때였거든. 너무 답답하고 돈도 없고 어머니 집에서 쫓겨 나왔고 그런 상태거든. 그래서 그런 상태를 비극에서 희극으로 만든 것이지.

Q: 그러면 2집 또한 하루 만에 다 녹음한 건가요? 만일 하루 만에 끝내는 식이 아니었으면 트랙도 2트랙보다는 더 쓰셨을 것 같은데요. 더빙도 하셨을 테구요.
- [고무신] 녹음은 하루 만에 끝낸 건 아니에요. 2-3일 걸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냐면 내가 직장생활 할 때인기라. 그러니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불가능하고, 일단 그 날 취재 끝내고 두 시에 마감하고 그 뒤에 녹음하는 식이었지. 그렇게 보면 이삼일이라 하는 게 맞겠네. 2집은 트랙도 4트랙이었고, 더빙은 아까 말한 톱 연주와 이정선 씨의 기타 빼고는 안 했지. 거진 라이브인기라.

Q: 가사에 대해서도 여쭤볼까요? 가사를 보면 라임을 맞추려고 한 흔적이 보입니다. “고무신”의 가사도 그렇구요. 음반에는 뒤에 실리지만, 이미 그 전에 만들어놓으신 “마지막 꿈”의 경우도 “시인, 여인, 미인...” 인가요? “마지막 꿈” 3집 [무한대] 수록)
- “시인, 여인, 미인, 노인, 맹인, 장인, 고인, 행인” 일종의 라임이었지. “생존경쟁 나의 투쟁 인공위성 만리장성 금은보석 썩은 비석”도 라임이 있잖아. 어떤 기자가 그러는데 한대수의 곡이 ‘최초의 랩’이라고 그러대, 하하.

Q: 음반이 “희망가”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음반의 컨셉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가는 과정인데, 마무리는 “희망가”네요. 이러한 구성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 “희망가”는 일제시대의 노래 아닌가. 일제시대의 절망을 노래한 것이지. 근데 내 기분에는 그때도 일제시대와 똑같은 억압이 있더라고. 그래서 ‘또다시 희망을 불러야 된다’는 그런 뜻이었지. 이해되는가?

 

“존 레논은 논리가 당최 서지 않는 이 사회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한대수가 영향 받은 뮤지션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존 레논 추도식. 3분간 침묵이 있었다.

 

Q: 이제 디테일한 질문은 일단 접기로 하겠습니다. 한대수 님은 자신의 음악 장르가 포크라고 생각하시나요, 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다른 정의가 있는지요.
- 나는 사회의 흐름이나 나 개인의 변화에 따라서 필요한 음악을 그때그때 만들지. 그때 내가 주로 통기타로 주로 연주하니까 그게 포크 음악으로 여겨진 것이겠지. 통기타로 주로 하면서 음악적으로 너무 심심하면 하모니카를 불면서 약간 음의 변화를 주기도 하고, 보강시키기도 하고... 아무튼 당시 우리나라에 기타 치는 사람이 없었어. 심지어 나를 기타리스트라 불렀을 정도니까. 하하.

Q: 외국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모던 포크도 많이 접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포크 이외의 다른 장르의 음악은 어떤 것을 좋아했는지요?
- 그렇지. 포크도 많이 듣고,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도 좋아했고. 짐 모리슨(Jim Morrison)도 즐겨 들었지. 그런 음악도 하고 싶었는데, 한국 오니까 같이 할 사람이 없는기라.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텐데, 그래서 통기타 하나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지. 하지만 포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다 좋아하지. 하드 록도 좋고, 헤비메탈도 좋고.

Q: 이건 자서전을 읽고 궁금했던 점인데요, 책에 보니까 '밥 딜런(Bob Dylan)은 별로고, 존 레넌(John Lennon)이 훌륭하다'는 논조로 쓰신 부분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 물론 음악적으로 밥 딜런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이 없지. 그 당시에 제일 큰 영향력이라면 비틀스(The Beatles)와 밥 딜런인기라. 그렇제? 그런데 내가 하모니카 불고 통기타 침으로서 밥 딜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졌는데, 어느 나라나 통기타 치고 하모니카 부는 사람은 있는 것 아닌가? 일본에도 있었고, 영국에도 도노반(Donovan)이라고 있잖은가. 그런데 밥 딜런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질 않는기라. 그 사람이 대가라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러면 차라리 나는 닐 영(Neil Young)을 더 존경하지. 내가 존 레논을 존경하는 것은 그 사람이 비틀스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큰 명성과 '화폐'를 벌었잖아? 그랬는데도 그 사람은 항시 평민들의 고통을 생각했고, 자기 자신이 편안한 상태에서도 그냥 안일하게 있지 않았다는 점이지. 항시 자기 위치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논리가 당최 서지 않는 이 사회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Q: 말씀을 듣고 보니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은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밥 딜런을 싫어하시는 것은 너무 ‘화폐’를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될까요?
- 물론 밥 딜런 영향은 받았지. 안 받은 사람이 있겠나. 나뿐만 아니라 전부 다 받았지. 나중에 보니까 비틀스도 밥 딜런 영향 받았다고 하더만. 특히 가사 쓰는 일에 있어서. 훌륭한 작곡가이고 작사가인 것은 맞아. 그런데 내가 안 좋아한다는 것은, 15년 전쯤에 미국에서 어느 공연을 보러 간 이후였던 것 같은데, 그 양반은 내가 보기에 자기 유태계 사람들끼리 비밀스러운 무엇이 있는 것 같은기라. 처음에 그 사람 이미지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고생하고, 기타 하나 들고 배를 굶어가며 노래하는 시인의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공연을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그다지 성의도 없는 것 같고, 노래를 아무렇게나 해버려. 그리고 ‘굿바이’하고 가고, 전혀 땀도 안 흘리고. 그래서 내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존경심은 별로 안 생기던기라. 차라리 존 레논이나 닐 영이 훌륭하고, 조니 미첼(Joni Mitchell)도 좋고.

Q(김형찬): 한대수 님 보시기에는 한국에서 그 당시 외국 음악을 들었던 포크 가수들이나 포크 마니아들이 밥 딜런 같은 프로테스트 포크와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 같은 부드러운 상업적 포크 중에서 어느 쪽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을 드리는 것은, 그 당시 음악 청중 정서를 고려할 때 밥 딜런 류의 음악은 거칠고 굉장히 미국적인 사운드라서 정말 특별한 매니아 말고는 좋아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내 보기에는 양쪽 다지. 왜냐하면 부드러운 사운드가 우리가 서양 음악을 접하는 첫 계기인 것이 사실이거든. 그전에도 프랑크 시내트라(Frank Sinatra)니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들은 사람이 있긴 있었지만 사실상 제대로 음악을 이해하게 된 것은 트윈 폴리오라든지 나라든지, 서유석이니 김민기 등부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부드러운 사운드에도 또 아름다움이 있는기라.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 같은 사람들. 또 반대로 밥 딜런 같은 류는 하나의 사회를 일깨워주는 쪽이고, 그런 부류가 있었지. 둘 다 중요했지. 물론 그 당시 양반들이 가사까지 다 들여다보고 음악을 선택하는 경지까지는 아니었지. 그래도 가사를 해석하지는 않더라도 거친 사운드면 "아 이거 뭔가 뜻이 있겠구나"하고 알아먹었을 것이고, 부드러운 사운드도 하모니에 또 매력이 있잖아. 그런데 김형찬 씨 말도 맞아. 부드러운 건 접하기 쉬우니까 프로테스트보다는 대중적인 인기는 있었을기라. 그래도 그 유신 체제하에서도 뜻있는 음악들은 사람이 많았지. 명동에 예스란 클럽이 있었다고. 거기가면 프로그레시브 록 같은 음악, 예스(Yes), 무디 블루스(The Moody Blues), 킹 크림슨(King Crimson),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같은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많았어.

Q: 예스는 어떤 컨셉으로 운영되던 곳이었는지요?
- 그냥 술파는 곳이었는데, 음악은 미국에서 듣는 음악 그 수준이지. 선곡은 사장이 했는데 이름은 까먹었네. 아무튼 거기는 위치가 명동의 달라 골목이라서 외국 사람들도 많이 왔었지. 또 이사벨이라고 함영진 씨라는 연극배우가 하는 업소도 있었고, 명동이 그 당시 상당히 진취적이었지. 단지 미국 문화를 동경하는 것을 넘어서서 미국 문화 중에서도 ‘프로테스트’하고 ‘프로그레시브’한 것을 흡수하고 자각한 분들이라고 볼 수 있는기라.

Q: 조금 전에 록 음악은 국내에 연주할 사람이 없어서 통기타를 했다고 하셨는데요,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그룹 사운드 분들을 만나본 바에 의하면 1960년대 말에 바닐라 퍼지(Vanila Fudge)나 아이언 버터플라이(Iron Butterfly)를 이미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한대수 님은 그 쪽 연주자들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으셨던 건가요?
- 맞아, 미8군 무대와 나는 관계가 별로 없었지. 미8군 클럽에 가면 그런 음악도 듣고 하고 했을텐데, 나랑은 좀 거리가 멀었지. 만약 그런 사람들과 사귀었다면 음악이 많이 달라졌겠지.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임용환 대신 김홍탁 씨와 친했다면 사운드가 많이 달라졌겠지. 완전 포크 록이 되었겠지.

Q: 키 보이스도 1960년대 중반에 “Blowing in the Wind”를 녹음했고, 비록 가사는 원곡과 다르게 번안되었지만 음악 형식상은 분명 포크를 연주하고 있었거든요. “Green Back Dollar”(킹스턴 트리오)도 무대에서 종종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과 만날 기회는 없었는지요?
- 전혀 우린 관계가 없었으니까. 씬이 완전히 달랐지. 그런데 내가 주로 음악을 찾아다니고 하는 사람은 아닌기라. 예를 들어 [천사들의 담화](1992) 때 재즈 분위기를 낸 것도 이우창 씨와 잭 리가 주위에 있었으니까 한 것이지. 내가 사람들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니깐 주위에 같이 있을 경우 같이 음악을 하게 되는 거지.

Q: 정리하자면, 한대수 님은 한국에 와서 굳이 포크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환경 상 통기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도 되겠군요. 아무튼 한대수 님 음악을 포크로 정의하는데는 별 이의는 없으신 거죠? 한대수 님이 귀국한 시점이면 미국 등에서는 순수 포크가 포크 록으로 변화된 다음 시기인데 이런 동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 그렇지. 통기타 하나 갖고 하모니카 불었으니 포크라고 불러야지. 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통기타 뿐 아이가, 안 그런가? 하지만 당시를 뭐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는 기라. 포크는 포크 나름대로 있었고, 또 포크에 다른 게 가미되기도 하고, 재즈도 프로그레시브도 있고...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

 

“반응이 희한했지. 왜냐. 첫째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이 없는기라” : 데뷔 초기의 활동과 반응

 

시와 사진과 음악에 열정을 쏟던 동양인 뉴욕 청년, 한대수. 뉴욕 사진학교 시절(1967-68년)의 자화상.

 

Q: 이제 질문의 방향을 좀 바꿔 보죠. 대학 때는 수의학을 전공하셨는데,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건가요?
- 잘못 택했지. 하하. 우리 집이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운영할 사람이 없었어. 할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하는기라. 또 1968년 당시에는 수의학이 한국에서 당시에 개발이 안 되어서 우리나라도 수의학이 필요한 실정이었지. 3-4년 전에 영국에서 발생한 광우병 알지? 굉장히 비참했잖아. 소를 500-1,000마리씩 죽이는데 끔찍하대... 아무튼 그때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런데 보통 심각한 공부가 아니더라고. 나는 수의학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첫 관념부터 틀렸지. 수의학이라 그러면 목장에서 말 타고 기타나 칠 줄 알았는데... 아주 복잡하더라고, 수술도 해야 하고. 그래서 막상 수술하기 시작하니까 난 그거 못하겠더라고.

Q: 한대수 님 집안은 엘리트 가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그런 집안에서 보기에 대중음악이란 천한 음악 아니었나요? 엄청나게 반대했을 것 같은데요.
- 그렇지. 대중음악이란 뭐 음악도 아니지. 그런 거 한다면 집에서 쫓겨나지. '창피하다'고 하는기라, 집안에서.

Q: 작곡은 언제부터 한 건가요? 따로 작곡 이론을 공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 이제 고등학교 시절, 뉴욕에 있을 때 많이 했고, 여기 와서도 많이 했고. 그때는 제일 작곡이 잘 나올 때지. 아무래도 감수성이 예민하고, 부대끼는 것도 많고, 마음도 순수한 상태니까 모든 느낌이 바로 음으로 변하는 시기지. 작곡 이론을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만들었다'고 표현하긴 뭐하지. ‘비틀스한테 배웠다’라고 해야 안 되겠나? 내가 자작곡을 시작한 계기가 비틀스인기라. 그 사람들 인터뷰를 봤는데 음대도 안 다녔다고 하고, 그냥 코드 가지고 이렇게 하면 작곡이 된다고 하더라고. ‘아, 그게 되는 일인가, 그럼 나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해서 작곡을 시작한 거지.

Q: 국내에서 처음 가진 무대가 세시봉이었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그곳 분위기는 어땠는지요? 또 공연 날짜나 당시 어떤 곡들 부르셨는지 기억하시나요?
- 세시봉은 대학생이 많이 오는 곳이고 커피를 마시는 곳이지. 술은 없었을 거고. 말하자면 커피숍인데, 중앙에 조그마한 무대가 있어. 무대를 보고 죽 둘러앉는 식인기라. 그러니까 손님 중에는 가수 뒷모습 보는 사람도 있었겠지. 시설은 앰프는 없고 PA 시스템 정도 있었을기라. 크기는 한 200명 수용할까, 그런 것 같애. 조그만 테이블에 앉아서 사람들 커피 마시면서 음악 듣고 담배도 피우고. 내가 한 공연은 특별 무대 같은 게 아니라, 늘상 거기서 하던 공연인 모양이야. 이상벽 씨나 이백천 씨가 사회를 보면 트윈 폴리오가 와서 하고, 나도 하고, 다른 또 기타 치는 친구 있으면 하고... 그 때 제일 두각을 보였던 사람이 조영남 씨하고 트윈 폴리오인기라. 공연 날짜까진 모르겠네. 아마 송창식이나 윤형주가 알기라. 난 기억력이 없어. 연도는 1968년도였는데, 다른 기억은 안 나네. 노래는 주로 내 자작곡, “Till That Day”, “행복의 나라”, “잘 가세”와 같이 첫 앨범에 있는 곡들을 많이 불렀지. “Till That Day”는 [무한대] 앨범에서 처음 녹음했는데 그때부터 있던 곡이지.

Q: 세시봉 이외에 다른 곳에는 출연 안 하셨나요? 이를테면 당시 잘 나가던 오비스 캐빈이라든가…
- 오비스 캐빈은 그 때 제일 음악적으로 잘 나가는 장소였지. 영어 속어로 힙(hip)하다카면 되겠네. 거기가 3층짜리였는데, 젤 꼭대기는 로큰롤, 젤 아래층 지하실은 통기타, 중간은 스탠더드, 이런 식이었지. 무대가 세 종류였고, 항상 붐볐지. 그라고 생맥주가 특별히 처음 소개돼 가지고 인기가 좋았지. 나는 오비스 캐빈 지하에 고정 출연했어. 그런데 직장 생활하면서 저녁에 가는 식이었고, 한 시즌만 하다가 재미없어서 그만 뒀어. 서유석 씨하고 30분씩 교대로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 불렀는데, 술 마시는데 가서 한두 곡하는 게 내하곤 성격이 안 맞지. 미사리도 아니고, 메뉴판 놓고 맥주 마시고 통기타 치고, 그다지 진지하게 감상하지도 않고. 그래서 한 석 달 정도 하고 그만 두었지.

Q: 음악 활동 내내 직장 생활을 하셨군요. 음악 활동이 생계 수단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신문사에 다니신 것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 난 항상 직장 다니면서 했지. 군대 가기 전에도 일했고, 코리아 마케팅이라고 가구 대리점 일도 했고, 제대하고 나서 [고무신] 할 때도 코리아 헤럴드 직원이었고. 그래서 고정 출연은 많이 못 한기라. 오비스 캐빈 지하실이랑 TBC(동양방송) 나간 게 전부지.

Q: 그 당시 내쉬빌이 굉장히 내용 있고 의식 있는 프로테스트 포크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음악 감상실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대수 님과는 별 인연이 없었나요?
- 나는 거기는 안 했어. 이종환 씨가 하던 쉘부르 그것도 안 했어. 아마 세시봉 한 게 조금 먼저일끼라. 내쉬빌이나 쉘부르는 아마 내가 군대가고 나서 만들어졌을기라.

 

사진 출처: 1969년 8월 [선데이 서울]

 

Q: 주변에 보면 1968년 세시봉 공연을 보고 속된말로 '눈 돌아간'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자작 곡을 부른다는 자체가 충격적이었고... 어느 정도 그런 분위기를 체감하셨나요? 한대수란 사람이 와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분위기를. 당시에 본업 따로 음악 따로 했다고 말씀하셔서 여쭤보는 겁니다.
- 그런 느낌은 전혀... 나는 나대로 그냥 열심히 한 거지. 음악을 항상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음악이 생계수단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것이지. 음악 할 때는 항상 진지하게 했고, 진지하려고 노력했지. 음악 처음 할 때 목적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잖나? 대부분은 ‘돈을 벌겠다, 유명해지겠다’는 것이 시작인데, 내게는 내 자신을 표현하는데 음악이 가장 좋은 수단으로 보이더라고. 그래서 진지하게 한 것이지 다른 목적의식은 없는기라. 내가 유명해진다는 생각도 안 했고 말이지. 그리고 포크 음악, 기타 치는 것, 노래하는 것... 이런 것들이 1960년대의 바람이었으니까 내도 그냥 자연스럽게 한 거지. 기회가 주어지면 하는 거지, 그것이 어떤 길로 간다, 어떤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안 했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쩌다 어떤 사람들이 좋다고 반응해줄 때는 고맙고, ‘아, 내가 하는 이것이 몇 사람한테는 의미가 있는 거구나’라고 하고 생각했지.

Q: 데뷔 초기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종종 출연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나요?
- TBC의 [명랑 백화점] 나간 것은 자서전에 있으니 알 테고, 또 무슨 쇼 프로가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질문자: [쇼쇼쇼]였나요?) [쇼쇼쇼]는 내 몇 번 밖에 안 나갔어. 그것보다도 다른 무슨 프로가 있었는데, 이백천 씨가 진행하는 코미디와 음악이 섞인 프로였어. 그 당시로선 굉장히 전위적이었지. 그때 아마 개그맨이란 말이 처음 나왔을기라. 전유성 씨 같은 사람들이 그때 출발 했을 거야. 전통적인 코미디가 아니고 젊은이들의 코미디, 젊은이들한테 무언가 말해줄 수 있는 코미디를 하고, 송창식 씨, 윤형주 씨 노래 부르고 펄 시스터스나 정훈희 같은 분들도 출연했지.

Q: TV 방송에서는 주로 어떤 곡을 부르셨는지요? 또 악단 반주에 맞추셨나요, 평소대로 통기타로만 하셨나요?
- 어떤 날에는 ‘오늘 테마가 산이다’ 하면 ‘산에 대한 노래를 하자’는 식으로 할 때도 있고. 주로 “잘가세”, “행복의 나라” 같은 노래도 했지. 연주는 남들은 다 악단 반주로 할 때 트윈 폴리오와 나만 전부 통기타로 했는데, 그게 매력이었다는 사람들이 많았지.

Q: TV 출연하셨을 때 소감이 어떠셨나요? 포크가 알려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게 있으셨는지요.
- 소감이랄게 뭐 있나... 텔레비전이 참 불편하더라고. 시간도 참 많이 끌고. 또 가수들이 모일 때 묘한 분위기가 있는기라. 어떤 사람은 인기 있고 어떤 사람은 인기 없잖아. 그런 데 대한 상당히 묘한 분위기가 있었어. 예를 들어서 그 당시에 최고 인기를 누리던 사람이 펄 시스터스하고 김추자였거든. 대기실에서 다 같이 기다릴 때 그런 사람들은 완전히 여왕대접 받고, 히트곡 없는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이렇게 있는 것이고. 아무튼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묘한 분위기라.

Q: 통기타 포크 가수들이 방송 출연에 유리한 면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사운드가 간단하니까 자기가 원하는 사운드를 충분히 낼 수 있었을 것 같고, 또 방송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포크라는 새로운 장르는 가수들 본인이 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 새로운 부분을 개척한다는 기분도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가 뭘 하는 건지 알지를 못했을 걸. 우리는 그냥 음악만 한기라.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Q: TV 출연 이후에 그것을 본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요? 굉장히 충격으로 받아들였으리라 짐작합니다만.
- 반응이 희한했지. 왜냐. 첫째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이 없는기라. 머리 길고 기타 치고 하모니카 부는 모습을 처음 봤으니까. 음악이 좋다, 나쁘다를 느끼기 보다는 ‘야~ 저 머리 긴 아저씨 봐라’, ‘히피 아저씨다’하는 식이었지. 음악은 “행복의 나라”가 뭔지 뜻도 모르면서. 음악보다는 이미지에 집중되니까, 음악적 인정을 전혀 받지 못한 거지. ‘기인 같다’라는 거지. 나쁜 뜻으로 해석하면 창경원 동물 구경하는 식이랄까, 요즘 말로 ‘또라이’라고 할까, 그런 분위기였지. 하하.

Q: 앞서 ‘여왕 대접’ 받던 가수로 언급한 펄 시스터스나 김추자 님의 음악은 당시 주류 음악인 트로트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새로운 음악이었는데, 신중현 님이 만든 그런 음악은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 난 신중현씨 작곡은 상당히, 비교적 다 좋아해. “봄비”, “마른 잎” 같은 거 말이지. 곡이 참 좋아요. 그런데 방송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펄 시스터스나 김추자를 떠받드는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방송 자체가 싫은 거지. 방송 나가서 기다리고 하는 거 말야. 얼마 전에 [이소라의 프로포즈]도 나갔는데 방송 그 자체가 내 성격과 맞지를 않는기라. 사운드 체크하고 3시간 기다리고, 또 4시간 기다리고 하루 정도 잡아먹고. 또 ‘그 노래는 안 되고 이 노래를 하십쇼’하는 식으로 간섭하는 것부터. 분장해야 되는 것 등등. 나는 전반적인 방송 자체가 싫어. 다른 사람들은 인기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자기 인기를 위해서 참아낸 거지만 나는 인기라는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든. 음악이 알려지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1969년 9월 19-20일, 한대수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통기타와 자작곡 노래로 울려 퍼진 이 공연은 한국 포크의 자기 목소리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맨 위 사진은 한대수가 직접 작업한 포스터, 중간과 아래 사진은 공연 장면(사진: 박영재).

 

Q: 이제 대학교 공연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드라마 센터 공연이 먼저인가요, 대학교 공연이 먼저였나요? 최초의 한국 자작곡 통기타 공연이 드라마 센터로 알려져 있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드라마 센터 공연이 최초라면 이 공연은 누구의 기획이었나요?
- 아. 또 기억을 짜내야 하나, 가만있어 봐. 어느 걸 먼저 했지... 드라마 센터가 먼저인 것 같은데. (질문자: 드라마 센터 공연이 1969년 9월인데요) 그럼 드라마 센터가 먼저라고 봐야지. 이 공연은 내 팬이라고 하는 여대생 두 명이 자기들 용돈 모아서 기획한 거야. 대관부터 시작해서 모든 준비를 다 해 줬어. 게스트는 트윈 폴리오와 요들송 가수 김홍철이 했어.

Q: 이정선 님 증언에 의하면 드라마 센터 공연에서는 향을 피우고, 시계 소리도 내고, 징 소리도 넣었다고 했다던데요. 대학교 공연에서도 이런 컨셉의 공연을 하신 것인가요?
- 향, 시계, 징도 있었고 슬라이드도 만들어 비추고 했지. 이정선 씨가 그 공연을 왔대! 하하. 나는 [고무신] 녹음할 때 처음 본 줄 알았는데! 대학교 공연 때는 그렇게 거(巨)하게는 못하고, 통기타를 한 시간 정도 치면서 했지.

Q: 제일 먼저 무대에 섰던 대학은 어디였나요? 그 뒤 다른 대학교도 기억을 더듬어 주십시오. 또 반응은 어땠나요
- 처음은 서울대 공대에서 했어요. 그러고 나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생기니까 서강대도 하고... 입소문으로 초청한 곳도 있고, 내가 유도해서 한 적도 있고. 둘 다 인기라. 부산대는 내가 아무래도 부산 사람이니까, 또 부산에는 고등학교 동창들도 많고 하니까 걔들이 '야, 여기서 한번 해라'해 가지고 한기라. 하여간 대학교마다 상당히 잘 대해주더라고. 나는 그때 매니저란 개념도 없고 내가 개척해야 되니까 그냥 테이프에 내 노래 녹음해서 학생회장한테 보낸다고. 그럼 만나서 이야기하고 자기들도 대학교가 심심하니까 새로운 젊은 음악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해서 하게 된 것이지. 그게 방송출연을 금지당하고 무대가 없으니까 대학교가 최고겠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지.

Q: 자서전에 보면 우미회관에서 노래 부를 때 다른 유명 5인조 그룹 사운드도 출연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어떤 그룹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 기억이 안 나네. 그 친구들 무지 인기 있더라고, 인물도 잘 생겨 갖고 여자들이 막 가더라고(웃음). 키 보이스도 아니고 히 식스도 아닌데. 하여간 잘 했어. 그런데 주로 미국 노래만 했지. 그리고 오비스 캐빈 같은 곳에서 제일 인기 있었던 그룹이 라스트 찬스였지. 머리도 길고. 머리 기른 것은 내가 처음인데 이 친구들이 더 길러 버린 거야. 산타나(Santana)도 하고 뭐도 하고. 싸이키델릭도 많이 하고 그랬어.

Q: 아까 말씀할 때는 그룹 사운드 쪽 분들과는 교류가 없었다고 했는데 박인수 님과는 친분이 있다고 자서전에 나옵니다. 하긴 두 분이 어딘가 잘 통할 것처럼도 생각되는데요.(웃음)
- 박인수 씨랑은 친했지. 우미회관에서 노래할 때 그 사람이 탬버린 쳐 줬어. 그때 박인수 씨가 MC를 봤다고. 아까 말했던 유명한 5인조 밴드가 싹 나간 뒤에 내가 나왔는데, 5인조 밴드가 꿍짝꿍짝거리다가 통기타 하나 들고 나오면 좀 썰렁한 게 사실야. 그런데도 박인수 이 친구는 “좋아 좋아~” 이러면서 흥이 나서 나를 도와준다고 탬버린 쳐 주는기라. 그러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워. 그래서 악수도 하고 친해졌는데, 영어도 잘 하는데 완전 흑인 영어더라고. 난 그때도 영어가 더 편했거든. 그래서 내 골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 와서 둘이 막 솰라솰라하면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Q: 이건 저희 짐작인데요, 그룹 사운드 음악은 커버(카피)가 많아서 별로 가깝게 느끼지 않으셨던 건가요?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셨는지요.
- 그렇지. 창작곡이래야 신중현 씨 곡이랑 “해변으로 가요” 정도였지.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그 쪽에서 추구하는 방향이 좀 다르지. 싫어했던 건 아니고 인연이 닿지 않은 거지.

Q: 그룹 사운드와는 인연이 없었지만 당시 많은 포크 가수를 거느리고 있던 나현구 사장의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나 이곳의 간판이었던 이장희, 강근식 님과는 별다른 교류가 없으셨나요?
- 강근식 씨가 그 당시에 가장 잘 나가는 리드 기타였어요. 강근식 씨가 포크나 록 모두 다 했을기라. 근데 나하곤 전혀 인연이 없더라고. 나는 나현구 씨나 강근식 씨 쪽과는 인맥이 없는기라. 그것도 ‘디퍼런트 씬’이야. 또 이장희 씨는 우리보다 뒤에 시작했지. 송창식이나 윤형주 씨가 나하고 먼저 했고, 이장희 씨도 세시봉에 나오기는 나왔는데 내가 보기엔 노래를 직접 하는 것보다는 음악이 좋아서 앉아 있었지. 임용환 씨도 그런 사람이었어. 음악을 듣기만 하다가 나하고 친해진 것이지. 그러니까 나는 다른 포크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도 그다지 절친하지 못하고, 혼자 가는 경향이 있었지. 나는 외계인이었지. 하하.

 

한대수가 서울에 와서 기거한 ‘보금자리’

 

Q: 인맥과 관련해 한 가지만 더 질문 드릴께요. 김민기 님의 1집에 "바람과 나"가 수록되었습니다. 김민기 님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별 거는 없었지. 방송국에서 함 만나 가지고, 내 노래 “바람과 나”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술 무진장 취해 가지고 그러는기라. 그때 내가 우리 첫째 마누라하고 동거 생활하고 있을 때였는데, 우리 집에 와서 술도 먹고, 담소도 나누고 그런 적이 있어. “바람과 나” 가사 적어 달래서 적어줬는데, 나중에 보니까 취입까지 했더라고. 악보를 본 것도 아닐 텐데. 정식으로 허락 받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 오케이! 자기가 좋아서 부른 거니까. 김민기 씨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참 잘 대해 주고 있고.

Q: 이제 노랫말에 대한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한대수 님 노래는 가사를 보면 약간 시적인 듯하면서 때로는 비문법적인데, 이 또한 의도적인 건가요?
- 가사는 말이지, 음과 가사는 저 개인의 이론인데, 이거는 철학도 아니고 내 혼자 믿는 관념인기라. 곡을 쓰는데 음이 제일 중요해. 음이 젤 중요하고, 가사는 음을 해치지 않고 따라 가면 되는 거야. 그것이 해치지 않으면서 시적이면 다행이고, 아니라도 오케이야. 그 이상 말도 필요 없는 거야. 근데 노래 가사와 시는 또 다르지. 노래 가사가 문법적으로 맞는다 안 맞는다는 상관 없는기라. 음에 가사가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어느 나라나 노래 가사가 문법적으로 맞는 건 없어요. 왜냐면 음의 느낌에 따라서 가야 되는 거지. 비교적 맞추려고 노력은 하지만 100% 맞추는 건 힘들지. 그리고 어떤 음에 어떤 발음이 들어가야 맞는 것도 있지. 발음이 안 맞으면 음이 안 올라가고 노래가 안 된다고. 음에 (가사의) 발음이 얹혀야 된다고.

Q: 그런데 2집 [고무신]의 경우엔 가사만 따로 떼 놓아도 문법적 연결이 되는 편이거든요. 1집과 달리 어떤 변화의 요인이 있었는지요.
- 아마 사람이 변했겠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내가 제대하자마자 결혼했어. 1975년쯤에.

Q: 그러면 보통 작업하실 때 가사를 먼저 쓰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곡을 먼저 쓰시는 스타일인가요?
- 비교적 곡을 중심으로 하지.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뭔가를 느꼈을 때는 동시에 같이 나오더라고. 가령 화가 났을 때 “물 좀 주소”룰 예로 들면 ‘물’하는 단어도 나오고 음도 나오고. 그래 갖고 물론 세밀한 부분은 앉아서 정리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후렴부분, 그런 부분은 음을 쓸 때 이미 나와 있다고. 나머진 앉아서 정리하면 되지. 가사의 기본적인 테마만 잡히면 나머진 붙여 나가면 되는기라.

Q: 보통 한대수 님 가사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연적 소재를 다룬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을 다룬 노래들인데요. 특히 자연을 다룬 노래들은 표현 방식이 공감각적이고 입체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의도해서 작업한 건가요?
- 주로 내 작곡이 10대 후반 때부터 30대까지 많이 했잖아. 그 이후는 띄엄띄엄한 것이고... 아무튼 한창 때야 나이가 있으니 주요 관심사가 여자였고, 그러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지. 그 다음 자연이야 내가 항상 사랑하는 것이고. 이건 일종의 히피 사상의 영향이기도 한기라. 공감각적이라, 입체적이라 봐줬다면 고마운데, 그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지 의도한 건 없지.

Q: 혹시 외국에 계시면서 따로 시 창작을 공부한 적은 없습니까? 저희가 보기에는 “바람과 나” 같은 노랫말은 영국 시인 셀리(P. B. Shelley)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 영시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잘 썼지. 말씀한 셸리의 “Ode to the Western Wind” 같은 시를 읽고 “바람과 나”를 느낀 것은 맞아. ‘야, 이 시인은 바람을 님이라고 하는구나’라고 감명 받은기라. 미국의 고등학교는 2학년 때쯤 되면 대학교 공부를 하는 반이 두 개 있다고. 하나는 수학, 하나는 영어. 그렇게 고등학생이 대학교 공부를 한다고. 그게 A반인데, 전교에서 20명 정도 뽑는기라. 근데 내가 두 과목 다 A반에 있었단 말이지. 동양인은 영어 A반에는 별로 없었는데... 거기서 진짜 시를 공부하게 되고, 영문학을 공부하고... 아무튼 많이 배웠지.

Q: 직접 기타를 쳐봤는데, 한대수 님 곡은 기타 교본식의 연주와는 느낌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한번은 C - Em - F의 코드 진행은 근음을 '도 - 미 - 파'로 치는데 한대수 님은 '도 - 시 - 라' 식으로 진행하더라구요. 이런 부분이 뭔가 좀 비어있는 듯한 독특한 공간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 내 기타 주법이 좀 다르지? 난 첫째, 기타리스트는 아닌기라. 기본적으로 코드도 많이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고. 록도 그렇고 포크도 그렇고, 다 서너 코드로 다 처리한다고. 그리고 보면 가장 히트한 노래일수록 가장 간단하다고. 예를 들어서 바비 멕페린(Bobby McFerrin)의 “Don't Worry, Be Happy” 같은 것. 이런 식으로 모든 가장 유명한 노래들이 가장 간단하더라. 우리 “아리랑” 보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얼마나 간단한가? 간편하고 간단할수록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한편으로 간단한 음이 사람을 자극하게 하는 거야. 또 베토벤 교향곡 9번도 '빠바바 밤'하는 게 계속 반복되거든.

Q: 기타 연주를 누구한테서 ‘배운’ 적은 있는 건가요?
- 대학교 때 좀 배우긴 배웠어. 대학교 다닐 때 음식점에서 일을 했는데, 그 때 한 친구한테 배웠지. 그 당시 미국 애들이 대개 다 그렇지만, 그 친구가 무척 기타를 잘 치더라고. 그래서 핑거링을 배우면서 기타 레슨을 좀 받긴 받았어. 그게 한국 기타 학원과의 차이일 수도 있겠네. 그런데, 그 친구한테 어떻게 배웠냐면 돈을 주고 배운 게 아니라. 콘돔을 사 주면서 배웠어. 알아두어야 할 것이, 미국에서는 학교를 다니면 집에서 절대 돈을 안 주거든. 독립적으로 키우기 위해서 학비 정도 내주고, 나머지 알아서 해라는 식이지.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어느 정도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까 나는 음식점에서 일한 거지. 그런데 뉴햄프셔 대학의 캠퍼스에 음식점이 두세 개 밖에 없었고 입구에서 잡화를 파는 곳에서 콘돔을 팔았다고. 그런데 그 친구가 콘돔 몇 개 갖다 주면 기타 피킹 가르쳐 주겠다는 거야. 그 친구는 아직 미성년자라서 콘돔을 못 사게 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콘돔 몇 개 갖다 주고 기타 연주를 배운기라. 주로 피터 폴 앤 메리, 도노반, 밥 딜런, 조니 미첼, 폴 사이먼(Paul Simon) 같은 음악들로 레슨 받았지비.

Q: 한국에서도 기타를 배우셨나요? 또 주로 사용하시는 것은 통기타인데, 일렉트릭 기타는 따로 배우신 건가요?
- 미국 가기 전 한국에서는 부산에 있을 때 배웠지. 고등학교 때 김형수라는 친구한테서. 그 친구는 “목포의 눈물” 같은 트로트 많이 쳤지, 하하. 그리고 일렉트릭 기타는 내 어릴 때부터 쳤어. 그때 뭐 기타면 그냥 기타지 통기타, 일렉트릭 기타의 구분이 있나. 내가 김도균 같은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는 아니잖아, 하하. 그러니 어떤 기타든 상관없었지.

 

"미국에서도 외계인이었지... 그러니까 나는 태평양을 혼돈의 바다라고 생각한다고": 영원한 이방인 한대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Q: 한대수 님이 만약 금지를 당하지 않고 계속 음악 활동을 하셨다면 어떤 음악적 방향을 취하셨을까요? 저희도 괜히 궁금한 부분이네요.
- 만약 죽 했다면 막 나갔겠지. 아무래도 음악을 막 했으면 돈은 됐을 거 아냐. 그렇게 생활이 나아지면 좀더 풍부한 음악이 나왔을 수도 있었겠지. 그때 내가 에너지가 있었잖아. 25살 젊었을 때 이미 히트곡이 두 곡 있었으니 상당히 좋은 조건 아니야? ‘한국가요제’에서 작곡상도 받았고, 그 끔찍한 군대도 끝났고, 이쁜 여자와 결혼했고, 그래서 계속 쭉쭉 나갔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인생은 도통 알 수가 없는기라. 만약 그렇게 화폐가 많아지면 어떤 사고도 있을 수 있잖아. 그래서 음악을 계속했다면 어느 정도 단계에서 창작은 끝났을 것 같애. 특히 작곡가로서 한 40-50곡 쓰고 끝났을 것 같애. 그 정도 하고 한계선에 다다랐을기라. 그런데 한동안 음악을 못 했으니까 지금은 한 70~80곡을 썼잖아. 우리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애.

Q: 어떻게 보면 1975년까지 한국 대중음악이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었고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있었는데 갑자기 맥이 잘린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대수 님은 그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 내 생각엔 완전히 뭐 간단하게 김샜지 뭐. 한참 나이 젊고 에너지 많은데. 음악을 못하는 상태에서 코리아 해럴드를 출퇴근하고 있는데, 음악을 하면서 돈 버는 것은 의미가 있는데 음악 못하고 돈 버는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기라.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느냐? 직장생활을 왜 하느냐? 완전히 환멸이고 김새는 거지. 그래서 차라리 미국 뉴욕에 가서 밴드를 구성했지. 아시다시피 아직까지도 동양계 록 밴드로 성공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장벽이 두텁단 거지. 벽이 높은 이유는 일단 유태인이 다 움직이는 사회고, 또 미국에서 동양계 인구가 3.5%밖에 안되니까 시장이 안 된다고, 미국에 있는 큰 레이블들이 새로운 밴드를 밀면 수백만 달러를 예산으로 잡잖아. 수백만 달러로 한대수를 밀었다고 하면 투자한 만큼 나올까 생각하면 그렇지 않지. 그래서 한참 땀 흘리고 하다가 나중에 느꼈어. 이거는 아무리 두드려도 답해 주지 않는 문이구나.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만 한 거라. 하나의 기억상실이지. 그래서 앨범 타이틀이 ‘기억상실’이라고. 과거를 잊고 싶다 그 말이야. 그냥 직장 일만 생각하자.

Q: 한대수 님은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온 외계인으로 비판받고, 미국에서는 동양인이라서 다시 차별받은 셈이군요.
- 아 그럼 거기서도 외계인이었지. 그러니까 나는 태평양을 ‘혼돈의 바다’라고 생각한다고.(주: 태평양(The Pacific Ocean)은 마젤란이 ‘평온한 바다’라고 이름 붙인 데 어원을 두고 있다. 한편으로 이런 뜻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로 생각된다.) 오고 갈 때마다 항상 혼돈스러우니까. 한 인간이 새로운 곳에 가고 새로운 분위기를 접하면 모든 자기 감각이 살아나잖아. 예를 들어서 우리가 몽고를 처음으로 갔다. 자연 조건이 좋으니까 하늘이 더 좋게 보인다고. 마찬가지로 혼자 고독을 지니고 있는 분위기가 작곡에 도움이 되지. 개인 생활은 지옥이지만 창작하기에는 그런 생활이 괜찮은 면도 있지. 그런데 사실 창작 안 하고 마누라랑 같이 있는 게 좋아. 하하.

Q: 근래의 한국 포크를 보면 리바이벌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았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할까요. 그냥 지금 있는 정도로 자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미국의 경우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나 엘리엇 스미쓰(Eliott Smith) 같은 새로운 얼굴들이 계속 나오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인 것 같은데요.
- 지금 내도 할 수 없이 하기는 하는데, 이백천 씨나 과거의 동지들에게 동지의식 차원에서 협조하는 건데... 문제는 뭔가 하면 어떤 음악이든지 포크든 록이든 헤비메탈이든 살아 있으려면 계속 재창조를 해야 하는기라. 그런데 창조적 부분이 없더라고. 다들 자기 옛날 히트곡 하고 끝나더라고. 나는 내 딴에 새로운 음악 창조해보겠다고 스트링 세션 데리고 오는데 잘 받아주지 않더라고. 그 사운드를 잡아 주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어떤 계열 음악이든 살아있으려면 재창조가 있어야 한다고. 과거의 히트곡은 나중에 한다고 해도 한두 곡 정도만 하고. 근데 그런 부분이 좀 모자란 것 같아. 말씀한 미국의 경우 과거같이 큰 물결은 없는데, 그래도 계속 노력은 하는데 우리는 노력 자체를 모르는기라.

Q: 대체 왜 그럴까요?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럴까요?
- 내 생각엔 모험 정신이 항상 모자란 것 같다카이. 음반사 자체도 그렇고. 음반사 자체도 정확하게 돈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그 쪽으로만 나가지, 가능성이 불투명한 새로운 것을 뚫는 데는 이리저리 재고 고민만 하다가 결국은 안 하는 거 같고.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옛날 노래 모아서 파는 CD 많았잖아. 한두 사람 성공하니까 이제는 전부 다 그러잖아. 그거처럼 안일한 일이 어딨나. 새로운 사람 녹음은 안 하겠다는 거 아니가.

Q: 1970년대 통기타 가수가 가졌던 아마추어리즘이 궁극적인 문제는 아닐까요? 정말 자기가 예술가로서 승부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 말입니다.
- 맞아, 오케이. 모든 책임은 아티스트에게서 시작하는기라. 그런데 내가 보기에 1970년대 이후로는 전세계적으로 창의력이 많이 줄어든 거 같애. 어느 정도 창의력이 있는 부분은 펑크 록 나왔을 때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재밌었고, 랩 음악도 처음 나왔을 때 퀸시 존스(Quincy Jones)가 프로듀스한 것들은 꽤 신선했다고. 그것도 지금은 이제 15년 지나가고 있고. 아무튼 아티스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전세계적으로 록 음악계에 있어서는 창작력이 죽은 거지. 두 번째는 시스템의 잘못인기라. 레코드 인더스트리가 대기업으로 산업화되었잖아. 그러면서 큰 돈을 쥐고 큰 돈을 뽑는 시스템으로 가니까 모험정신이 줄어든 거 같애. 재미있는 아티스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밀어줄 생각을 안하는기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밀어주고 있느냐. 여자의 경우는 섹시한 여자. 몸매 좋고, 목소리 약간만 좋아도 오케이야. 일단 섹스어필로 밀어붙이니까. 그러니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라든지,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니 크리스티나 아길레나(Christina Aguilera) 이런 쪽으로 가지 않는가. 남자의 경우는 미남의 프리티 보이스(Pretty Boys), 엔싱크(Nsync)니, 백스트릿(Backstreet Boys)이니. 또 그 누구지? 리키 마틴(Ricky Martin). 일단 미남이니까.

Q: 예전에 U2도 애송이라고 했잖아요? 한국에 U2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내가 U2는 싫어하지. 돈은 많이 벌지. 근데 뭐 질적으로 따져서는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애.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프로듀서 맡은 것 한두 개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전체적으로 나는 U2사운드가 아주 형편없는 거 같애. 보노 목소리가 아주 짜증나고. 아, 물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서도.

Q: 영미권 외의 록 뮤지션들, 특히 빅토르 최나 추이 지앤(崔健) 같은 음악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 빅토르 최는 목소리 죽여주지. 그런데 돌아가셨지. 나는 목소리로 따지면 록에서 대가들 목소리 중에서 짐 모리슨 매력 있고, 조 카커(Joe Cocker), 루이 암스트롱(Louis Amstrong) 같은 목소리도 좋고.. 아, 그리고 추이 지앤과는 두 번이나 합동 공연을 추진하다가 좌절되었어. 작년에 이 친구가 한국에 왔을 때 나를 보고 싶다고 해서 두 번 만났고.

Q: 앞으로 음악적인 방향은 어떻게 잡고 계시나요? 아까 말씀하시기는 40-50곡 냈으면 다 낸 거라는 말씀도 했는데, 한대수 님은 공백을 두고 띄엄띄엄 작업해 오셨잖아요.
- 내도 이제, 이 정도면 거의 다 된 거지. 사실 9집까지 냈으면 개인으로서 자작곡을 많이 낸 거라고. 내가 억지로 안 하는 건 아니고, 곡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으니까. 곡이란 것이 작곡을 하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곡이 자기를 찾아와야 되는기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소수의 싱어송라이터 빼놓고는 거의 다 한 30, 40대에 끝나잖아. 50이 넘도록 자기 영혼대로 밀고 가는 사람은 닐 영이나 롤링 스톤스 같이 한두 서너 사람밖에 없다고. 그것이 자연에 의한 자연의 법칙인기라. 뭐냐. 우리 몸이 쇠퇴되고, 노후의 과정에 들어오게 되면 창작의 엔진인 뇌세포가 낡아지는 거지. ‘흥분과 자극’에서 작곡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지. 18살 때 이쁜 여자 보면 ‘와~이쁘다’인데, 지금 50이 넘어서 이쁜 여자를 보면 ‘그냥 어, 이쁘구나’거든. 그러면 벌써 작곡이 안 되는기라. 사람이 많은 경험과 고통을 받고 나면 감각이 둔해지지. 이번 [고민(Source of Trouble)]이 아홉 번째 앨범인데 자작곡으로 이만큼 할 수 있는 게 고마운 거지. 그리고 나는 내가 가수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거든.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가 가수라기보다도 하나의 덩어리, 뭉태기로 생각했던 거라, 뮤지션으로. 그래서 자기가 느낀 것을 내가 발표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한 거지. 내가 남들처럼 목소리가 듣기 좋은 건 아니거든.

Q: 개인적으로 같이 한번 작업해보고 싶은 음악인이 있으신가요? 여태까지 작업을 보면 인맥이 약간 한정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받는데요.
- 같이 작업하고 싶은 음악인이라... 충격이 있으면 누가 떠오르겠지. 근데 재미있는 사람들 많더라고. 안흥찬 씨나 어어부 프로젝트, 또 이상은 씨도 좋고, 전인권 씨도 재밌고, 강산에 씨도 재밌고, 좋은 사람이 많아. 그러니까 아까 말했듯이 '씬'이 맞으면 뭐가 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싱어송라이터로서 자작곡을 해서 '한대수의 음악이다'라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음악에 작사, 작곡, 프로듀싱 면에서 Collaboration, 즉 협조하거나 합작해 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가 있겠지.

Q: 한대수 님 개인적으로 한국이란 나라에 바라고 싶으신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겠습니까.
- 제일 중요한 게 남북관계 아이가.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남북관계 때문에 음악에 가하는 제재도 변명이 된다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이러고 있느냐’고 탄압하는 큰 변명이 된다고. 그러니까 일단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정치 이념을 넘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는 있거든. 그래서 남북관계의 긴장을 상당히 완화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앞으로는 일본과 중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많이 이루어질 거야. 내 생각에 한국과 일본과 중국은 ‘유러피언 유니언’ 같이 ‘아시안 유니언’ 이렇게 만들었으면 하고 생각 하는기라. 거기서 음악이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거 같고. 내 생각에 앞으로 미국의 힘을 빌리기는 힘들 거 같애. 아마도 그 쪽이 해가 지고 있는 거 같고, 우리가 해가 뜨는 거 같애. 그래서 이런 부분에 우리 어른들이 좀 더 신경을 써 주시고 나도 거기 협조할 예정이야. 제가 상하이에 갈 계획이거든. 거기서 음악적 분위기도 잡을 예정이야.

Q: 저희처럼 글로 음악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주문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 글 쓰는 사람도 조금 더 모험정신을 가지고... 아무래도 자본주의 사회에 사니까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한번씩 ‘이런 음악은 꼭 문화면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할 때, 아니면 ‘뭔가 새로운 부분을 들려줄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 그런 모험정신을 알려주면 좋겠지. 그런 면에서 여러 음악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지. 그러니까 방송국 프로듀서부터 아티스트, 음반업계, 음악 평론가, 또 대중들까지도 새로운 것에 한번 기회를 주자는 것이지. 그리하면 뭔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지 않을까. 전 세계적으로 현재 음악 상태를 보면 고인 물이라고 본다고. 안 그런가? 들어오는 물도 없고, 나가는 물이 없어. 지금 그냥 고인 물이야.

Q: 정치적 성향에 대해 여쭤 볼까요? 간단히 말해서 한대수 님은 보통 투표하실 때 어떤 후보를 찍으시나요?
- 투표할 때 나는.... 지금 저, 지금은 언급을 좀 회피하지. 그 부분은 정치부분은 말이지. 개인적으로 내가 어느 쪽이라는 것을 생각은 하지만 이거는 침묵을 지키지. 특히 투표 부분은. 어떤 경우는 우리 마누라하고 얘기 안 할 때도 있으니까. 하하. 안 그런가? 부부이지만 정치적 자유는 절대적 자유니까. 분명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는 싫어 해. 우리가 남북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기라, 쓸데없는 문제가.

Q: 자서전을 보면 1980년대의 '운동권'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 이해는 하지. 1980년대가 보통 때인가. 그런데 이건 아셔야 할 것이, 나는 극우파도 싫어하지만 극좌파도 싫어하는기라. ‘너도 죽고 나도 죽자’하면 말이 안 되지. ‘우리 같이 살자, 하지만 이런 건 바꾸자’라고 해야 말이 되는기라. 극우파와 극좌파의 가장 좋은 케이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야. 서로 자멸이잖아. 그렇지? 우리가 한 민족으로서 반대를 하더라도 그것을 파괴적으로 나가면 안 되지. 젊은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영감들도 마찬가지고. 타협의 선을 항상 지녀야지. 중간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할 거 같애. 불교에서도 그런 말이 있잖나. 이리로 가지 말고 저리로 가지 말고 요리로 가라. 불교에서도 중간 길이 좋다는 그런 거지라.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말이지.

Q: 19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미국 문화 추종적인 면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우리가 과거 일본 밑에 35년 동안 식민지로 지낸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내 보기엔 그에 못지않게 우리가 50년 동안 또 미국 지배 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기라. 그거는 여러분들의 옷이나 헤어스타일, 듣는 음악, 먹는 음식을 보면 알 수 있는기라. 어떻게 피할 수가 없지. 하지만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전세계가 미국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런데 미국을 반대한다고 하면 다른 옵션이 있어야 되거든. 그럼 다른 길이 뭐가 있냐는 말이지. 그러니까 '여자가 싫다'고 하면 다른 옵션이 있어야 될 거 아냐. 남자가 좋다든지. 중성이 되겠다든지. 그렇지 않고 무조건 여자가 싫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인간의 심리라고. 그런데 현재 미국이 50년 동안 권력을 잡고 있으니까 미국을 무조건 미워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는 것 같아. 미국의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소화시키고 나쁜 점은 나쁜 점대로 반대하되, 미국의 영향권 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대로의 문화를 청년들이 또 만들어야지. 옵션을 한국말로 뭐라고 하노? 대안인가. 그러니까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중국과 일본과 우리 셋이 뭉침으로써 하나의 옵션이 생기지 않겠는가.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것을 포함하는 옵션. 만약 셋이 분위기를 맞춘다면 세계적인 주도권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기라.

Q: 그런 일은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요?
- 예술가의 범위란 것은 그게 뭔지 모르겠어, 범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고,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고. 아시다시피 아돌프 히틀러도 원래 화가였잖나. 하하. 예술가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하다면 다 해 봐야지. 남을 해치지 않은 이상 말이지.

Q: 한대수 님 성향 상 미국의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 같은 사람은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조지 부시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기라. 나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그가 예일 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는데 이게 예일 대학을 졸업했는지 예일 유치원을 졸업했는지...(웃음) 너무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아주 가까운 앞만 보는 것 같아요. 만약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벌였을 때 차후 50년 동안 어떠한 고생을 할 지 생각도 안하고 하는 것 같애. 그 사람이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 제국 같은 분위기, "인상"의 가사가 어떻게 되던가? “거짓에 무너진 옛 세상, 해지기 전에 잠들어 버린 운명이...” 그런 분위기지.

Q: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고 '양호'한 시간이었습니다.(웃음) 곧 나올 사진집과 전시회 모두 잘 되시기 바라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음악도 기대하겠습니다.
- 예, 그래요. 20031020

 

 

 

 

출처 : 길 떠나는 나그네
글쓴이 : 임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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