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아테네 시민.
문답을 통해 사람의 무지를 깨닫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소피스트로 인해 혼란해진 아테네에는
새로운 스승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며 사형에 처했다.
도망치라는 주변 사람의 권유에도 '악법도 법이다'며 독배를 마신다.
소크라테스의 별명은 '아테네의 등에'였다.
소나 말 등의 피를 빨아먹는 등에가 끊임없이 소를 괴롭혀서 움직이게 만드는 것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살찌고 게을러빠진 아테네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도록 귀찮게 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악처의 대명사 크산티페가 없었다면 그는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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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추남 철학자의 탄생
소크라테스는 페르시아전쟁1) 에서 그리스가 승리하고 그 수도인 아테네가
서서히 세력을 떨쳐 나가던 시기에 태어났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당시에는 활발했던 아테네의 여러 석조 건물
계획에도 참여한 중견 조각가였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어머니의 직업을 빗대어 자신의 교육 방법을 산파술이라 이름 붙였다.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구실만 하는 존재지,
산모 대신에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다.
즉, 진리는 배우는 사람이 산출해내는 것이지, 스승이 대신하여 낳아줄 수는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크고 둥근 얼굴에 벗어진 이마, 툭 불거진 눈,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땅딸막한 키, 불거진 배, 오리걸음같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등
전체적으로 보아 추남에 가까웠다.
그러나 신체는 건강한 편이어서 추위나 더위에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밤새워 술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담성도 갖추고 있어 세 번의 전쟁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버지가 종사하던 직업이나 가족을 등한히 하고 후진 양성에만 전념했다.
가난했던 그는 누추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대화를 하고자 했다.
그의 뒤에는 항상 많은 제자가 따랐으며, 그중에는 상류사회 출신도 많이 끼여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보수 없이 이들을 가르쳤고, 기껏해야 저녁 한 끼로 만족했다.
특별한 수입도 없으면서 돈을 받지 않고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갔는지 알 수 없다.
악처 크산티페, 세계 4대 성인을 만들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들 중에서 유명하다면, 크산티페는 철학자의 아내 중에서 유명하다.
사람들은 크산티페가 남편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내 크산티페가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철학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집에서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그녀는 소크라테스가 친구들과 철학적 담화를 나누려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과 강론 중이었는데, 아내가 잔소리를 했다.
그가 들은 척 만 척하자 크산티페는 큰소리로 욕을 하고 물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는 법이지!"라고 말했다.
크산티페는 심지어 남편을 뒤쫓아가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어놓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크산티페를 가장 견뎌내기 힘든 아내라고 비난했다.
정작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내를 잘도 참아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아내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뎌냅니까?" 하고 묻자,
그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요!"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악처와의 생활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즉 '크산티페를 잘 견뎌내면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크산티페가 못살게 굴면 굴수록 소크라테스는 서둘러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을 나와 철학적 담화로 빠져들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서재에만 파묻혀 지냈더라면 결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하지만, 사실 크산티페가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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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의 결과는 크산티페의 의도와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남편이 철학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철학에 심취하여 매진하도록 도와준 셈이 된 것이다.
한 제자가 결혼을 하는 게 좋은지 하지 않는 게 좋은지 묻자,
소크라테스는 "결혼을 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집 밖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는 시장이나 경기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아무 쓸모없는 대화나 나누고 다녔다.
지독한 게으름뱅이였던 그에게 크산티페가 화를 낸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때때로 돈을 벌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을 주기도 했겠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물질에 대한 아무런 욕심 없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산티페에게마저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애를 셋이나 둔 나이 어린 아내 크산티페가 무능한 가장을 들볶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크산티페가 후처였다는 설도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할 때에 두 아들이 어렸던 것으로 보아
늙은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듯하다.
악처의 노릇에 대해서도 후세 사람들의 과장이 심하다는 평이 있다.
고대 그리스 최대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무대에 선 소크라테스를
맨발로 묘사했던 것 역시 그에게는 신발을 사 신을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또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의 신식 교육을 비난하기도 했다.
너 자신을 알라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는 학자였지만,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꽤 뒷날이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40세 때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전에 가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아폴로 신에게 물었다.
신전의 무녀는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대답했다.
카이레폰은 이 신탁을 듣고 몹시 기뻐서 즉시 소크라테스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를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놀랐다.
그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신탁을 확인하려고 자타가 현명하다고 공인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참된 지혜를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처럼 자만했다.
그들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던 것이다.
결국 평소에 신전의 비문(碑文)인 'Gnothi Seauton(너를 알라)'을 외고 다녔던
소크라테스야말로 그들보다 적어도 한 가지 사실(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더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아테네인이라는 신탁을 받은 이유였다.
'너 자신을 알라!' 는 유명한 교훈은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소크라테스의 지혜와 덕망은 점차 널리 알려졌다.
이에 대해 그의 제자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페리클레스2) 의 웅변을 들어도 감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나는 심장이 뒤흔들리고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오며, 노예 같은 상태에 빠졌다."
또 에우클레이데스(영어 이름 유클리드)는 메가라3) 사람으로 일찍부터 철학 공부를 했는데,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 나서 열렬히 그를 따랐다.
그때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불화가 생겨 메가라 사람이 아테네에 들어오면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법령이 만들어졌는데도, 그는 여자로 변장하고 아테네로 숨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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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선고 VS 벌금 1므나
그러나 아테네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펠로폰네소스전쟁4) 에서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인사와 반민주주의자 30명으로 구성된
과두 체제를 세워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위원회에 끌려가 교육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지만
자신의 교육 방식을 고수하며 교육을 계속했다.
주변에서는 그가 머지않아 처형되리라고 걱정했으나 그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그의 태도가 확고부동한 데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두파 인물 중에 그의 제자와 플라톤의 큰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두정치가 8개월 만에 무너지고 다시 민주제로 바뀌자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기반을 상실했다.
아테네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아테네를 지배한 부정한 야심가들에게는 모든 진리의 기초를 도덕에 둔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은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첫째 청년을 부패하게 했고,
둘째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믿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고소했다.
원고 쪽에서 고소 이유서를 낭독한 직후,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시작되었다.
그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참되게 청년들을 교육하는 '아테네의 양심'이라고 말하고,
폴리스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비난은 중상모략이라고 주장했다.
재판관들이 생각할 때 그가 하는 말은 피고가 하는 말이 아니었고,
그의 모습은 피고를 나무라는 검사와 흡사했다.
그러니 듣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느껴졌고, 조롱받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당시에는 30세 이상의 아테네 시민으로 나라에 빚이 없으면
누구나 배심원을 지망할 수 있었고, 그 지망자가 많을 때에는
재판하는 날 추첨으로 500명을 뽑았다.
이들이 먼저 유죄냐 무죄냐에 대해 투표를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유죄 280표, 무죄 220표로 예상보다 적은 표차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형량을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원고 쪽에서 요구한 형량은 사형이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가 요청한 형량은 재판관을 조롱이나 하듯
벌금 단 1므나(당시 아테네의 화폐단위. 프로타고라스가 자기의 수업료로
100므나를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1므나는 적은 금액인 것 같다)에 불과했다
(크리톤과 플라톤 등이 부탁한 끝에 30므나로 늘어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청은 그를 무죄로 판결한 재판관들의 심기까지 건드렸기 때문에,
360대 140이라는 커다란 표차로 사형을 선고받고야 만다.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시오?"
아테네 법률에 따르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24시간 안에 처형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침 델로스 섬5) 에 있는 아폴론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바치러 떠난 배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은 연기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면 신청도 하지 않고 날짜만 기다렸다.
한 달 후에 배가 돌아왔는데, 배가 들어오는 날 아침 일찍 아내 크산티페가 감옥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부당하게 사형되는 거라며 마지막으로 탈출을 권유했다.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반문은 그야말로 황당한 것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시오?"
그날 아침 소크라테스의 아내 외에도 친구와 제자들이 감옥에 모였다.
어렸을 때부터 죽마고우였던 크리톤은
"돈은 얼마가 들든지 관리들을 매수할 테니 탈출하게나"라고 권유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제까지 나는 아테네 시민으로서 아테네 법이 시민에게 주는 특권과 자유를 누려왔네.
그런데 그 법이 이제 내게 불리해졌다고 하여
그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비겁하지 않은가?" 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명언 '악법도 법이다!'는 이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사형집행 시간은 해가 지는 때로 정해져 있었으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독주를 빨리 가져오도록 재촉했다.
크리톤이 마지못해 눈짓을 하자 사환이 나가 간수와 함께 독주를 들고 들어왔다.
간수는 약을 다 마시고 다리가 무거워지면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신에게 한 방울 떨어뜨려도 되겠냐고 묻자, 간수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조금도 떨거나 얼굴빛이 변하는 기색도 없이
독이 든 약을 다 마셨다.
울지 않으려고 겨우 참고 있던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더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점차 감옥 안은 높고 낮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있다가 "사람은 마땅히 조용히 죽어야 하네"라고 말했다.
그는 감옥 안을 거닐다가 반듯이 드러누었다.
하반신이 거의 다 식었을 때에 소크라테스는 얼굴에 가렸던 천을 제치고 크리톤에게 말했다.
"아스클레피오스6) 에게 닭을 한 마리 빚졌으니 꼭 갚아주게."
크리톤이 다른 할 말이 없냐고 물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야스퍼스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비극이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초월하고 있었다.
절대적 진리와 정의로 향한 그의 정신 앞에 죽음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살과 피를 가지고 사람의 모습을 한, 철학 그 자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서도 남기지 않아 그 사상의 핵심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인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것은 그의 독특한 인품과 더불어
그 죽음이 일으키는 추념의 마음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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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속으로
소피스트들이 상대주의적이고도 회의주의적인 태도에 머물렀던 데 대해,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도덕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것을 논리적인 방법으로 설파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직접 응용할 수 있는 처세술보다는
인간의 본질과 정의로운 행위를 규명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윤리학에서도 행복주의에 머물기보다는 순수한 이상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인들과 아테네 시민들과 갈등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행위의 진정한 주체는 스스로의 영혼(자아)인데도
아테네 시민들이 자기의 소유물, 예컨대 명예와 재산과 육체 등에
자신의 영혼을 종속시키고 있다고 보았으며,
여기에서 아테네의 정치적·도덕적 부패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통해 시민에게
스스로의 존엄성을 자각시키고 시민의 도덕의식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리한 정치적 환경으로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역설(Irony)을 말하고, 독특한 '문답법'을 통해
덕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은 외적인 자연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영혼(자아)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어떻든 그를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기꺼이
철인[哲人, 단순히 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철학자(哲學者)라 한다면, 자신의 철학을 확립하고
그 철학에 따라 살고 또 그 철학에 따라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으로 호칭하도록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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