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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세계를 풍미한 'K컬처' 풍속화가…김홍도도, 신윤복도 아니었다

mistyblue 2023. 1. 8. 11:14

 

 

18~19세기 풍속화가 하면 어떤 작가가 떠오르나요.

단원 김홍도(1745~?), 혜원 신윤복(1758~?) 같은 분들을 떠올리시겠죠.

그럼 기산 김준근(생몰연대 미상)이라는 풍속화가는 아시나요.

전혀 모르시겠다구요.

그러나 반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산 김준근은 19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 풍속화가입니다.

기산의 그림은 유럽 878점, 북미 138점, 아시아 480점, 개인소장 104점 등

전세계에 무려 1600점 정도 퍼져있습니다.

한마디로 19세기를 풍미한 ‘K-컬쳐 작가’라 할 수 있죠.

주요 소장처를 볼까요.

 

19세기말 세계에서 가장 알려진 풍속화가는 기산 김준근이었다.
기산은 조선을 방문하는 선교사, 상사원, 세관원, 군인,학자들에게
서양에는 없는 조선의 풍물을 그려주었다.
|독일 함부르크 로터바움 박물관 소장자료·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 박물관·뮌헨 오대륙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세계문화박물관,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박물관, 영국 영국박물관·도서관,

덴마크 국립박물관,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 등….

한결같이 쟁쟁한 박물관·미술관이죠.

이미 1894~95년 독일 함부르크 공예박물관에서 기산 김준근의 전람회가 열렸답니다.

지난 2003년 3월24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기산의 풍속도(49점)가

32만 달러(약 3억800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2006년에는 캐나다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과 덴마크 국립박물관 등에서

‘기산전시회’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는 전세계 20개국이 넘는 나라의 유명 박물관·미술관에 흩어져 있다.
알려진 작품만 1600점(개인소장 포함)에 이른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

 

■미국외교관 딸이 특별히 주문한 그림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 기산 김준근은 어떻게 대접받을까요.

거의 ‘무플’이었습니다.

서예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 선생(1864~1953)이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모아 간행한 <근역서화징>에서도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니까요.

훗날 평론가들의 반응은 대부분 ‘실력이 형편없는 삼류화가’로 깎아내렸습니다.

 

왜 이런 상반된 평가가 나올까요.

사실 김준근의 삶과 작품활동과 관련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김준근의 행적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았던 함경도 원산과

부산 초량 등지에서 확인됩니다.

 

1894~95년 사이 독일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에서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전람회가 열렸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짐머만(1886~1971)은 기산 그림을 중심으로 그해(1895년)
<조선의 미술사>를 썼다.|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기산 풍속도’ 가운데 ‘조선 원산항 김준근’이라는 글이 적힌 풍속도가 있습니다.

원산 토박이로서 정식 공부를 한 적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김준근의 행적은 부산 초량에서도 확인됩니다.

1882년(고종 19)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조약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로버트 슈펠트(1821~1895)의 딸(매리 슈펠트·1843~?)과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

매리는 1886년 고종 임금의 초청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조선을 방문합니다.

이때 김준근의 명성을 들었는지 부산 초량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준근을 찾아

‘기산 풍속도’를 구입했답니다.

인류학자인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이 매리가 구입한 풍속도를 삽화로 해서 쓴 책이

<한국의 놀이(Korean Games)>(1895년)인데요.

컬린은 책의 서문에서 “삽화는 화가 ‘기산’의 채색화 일부를 충실하게 옮긴 것”이라면서

“삽화의 원화는 매리 슈펠트의 주문에 따라 1886년 그린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조·미 수호 통상조약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로버트 슈펠트(1821~1895)의 딸인 매리(1843년생)가
조선 방문 도중 부산 초량까지 내려와 기산 김준근의 그림을 주문 구입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매리 슈펠트가 주문 구입해간 기산 김준근의 그림은 인류학자인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의
<한국의 놀이>(1895년)에서 삽화로 쓰였다.

 

■세계 각지로 퍼진 수출 풍속화

두가지는 확실하죠. 기산이 중앙무대가 아니라 초량·원산 등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지방작가였구요.

당시 기차도 없었던 시절인데도 미국 외교관의 딸이 직접 부산에까지 내려가

작품을 주문해서 공급 받았을 정도로 유명했다는 것도 팩트이구요.

 

그럼 어떻게 지방작가에 불과했던 기산 김준근이 매리 같은 외국인들에게 알려졌을까요.

기산은 당시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 선교사인 제임스 S 게일(한국명 奇一·1863∼1937)과 교분을 맺고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 무렵 게일을 통해 작가 김준근이 서양인들에게 알려졌을 겁니다.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1848~1929)의 <조선풍물지>(1888)와,
영국 군인 알프레드 캐번디시의 백두산 등정기인 <백두산 가는 길>(1894),
독일 선교사 안드라에스 에카르트(1884~?)의 <조선미술사>(1929)에도
기산 김준근의 그림이 삽화로 실려있다.

 

조선의 풍물을 소개하고 싶었던 서양의 외교관·세관원·군인·학자들이

기산에게 ‘조선의 풍속화’를 주문했구요.

그들이 쓴 책의 삽화로도 기산의 풍속화가 사랑받았습니다.

컬린의 <한국의 민속놀이>외에도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1848~1929)의 <조선풍물지>(1888),

영국 군인들의 백두산 등정기인 <백두산 가는 길(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1894),

독일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1884~?)의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1929) 등에

실린 삽화가 그것입니다.

 

1882~1885년 사이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일한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1848~1901)는
수집한 기산의 풍속도 중에는 ‘조선왕(고종)에게 받은 그림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묄렌도르프의 수집품은 독일 베를린 민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산 작품 가운데는 독일인 하인리히 콘스탄틴 에두아르트 마이어(1841~1926)가 수집한 61점도 유명하다.
마이어는 인천에 세운 무역회사(세창양행)를 통해 기산 풍속도를 수집했다.

 

기산의 풍속화를 구입한 외국인은 매리 슈펠트 뿐이 아닙니다.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1848~1901)가 있습니다.

독일인인 묄렌도르프는 1882~1885년 사이 조선의 외교고문으로 일했는데요.

현재 독일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에 소장된 기산의 풍속도 중에는

‘조선왕(고종)에게 받았다’는 그림이 있습니다.

 

기산 김준근의 작품 중에는 프랑스 민속학자인 샤를르 루이 바라(1842~1893)의
‘기산 풍속도’ 170점도 유명하다.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이 소장중이다.

또 유명한 기산 풍속화가 바로 독일인 하인리히 콘스탄틴 에두아르트 마이어(1841~1926)가 수집한

61점입니다.

마이어는 인천에 세운 무역회사(세창양행)를 통해 기산 풍속도를 수집했는데요.

그가 수집한 기산 풍속도는 1889년 함부르크 산업박람회에 소개되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1894년 함부르크 공예박물관에서 개최한 한국 관련 전시회에 출품한 겁니다.

이밖에도 프랑스 민속학자인 샤를르 루이 바라(1842~1893)의 ‘기산 풍속도’ 170점(기메 동양박물관)도

유명합니다.

 

기산 김준근 그림의 주인공은 노동자, 광인, 어린이, 걸인, 하층 여성, 장애인, 처벌을 받고 있는 사람등이 많다.
이것이 미셀 푸코(1926~1984)가 말하는 ‘문화의 타자(他者)’에 속하는 범주의 사람들이라는 지적이 있다.

 

■무표정·무관심의 풍속화?

기산의 풍속화 수출과 관련해서는 다른 시각이 존재합니다.

(김수영의 ‘수출회화로서 기산 김준근 풍속화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7)

우선 기산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거론하는데요.

노동자, 광인, 어린이, 걸인, 하층 여성, 장애인, 처벌을 받는 사람들 등 절대 다수입니다.

이것이 미셀 푸코(1926~1984)가 말하는 ‘문화의 타자(他者)’에 속하는 범주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특히 기산 풍속화의 인물이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무표정과 무관심 등에 주목하는 연구가 있습니다.

기산이 서양인의 주문에 따라, 즉 타자의 시선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서양인들은 그들의 주문으로 그려진 기산의 풍속화를 보며

‘봐! 너희는 열등하잖아.’

‘그러니까 서양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라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한껏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기산은 서구인의 눈에 ‘바라 보이는 것’ 혹은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그렸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는 조선의 오랜 문화와 조선인의 ‘삶의 의욕’을 심하게 훼손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화가(기산 김준근)가 우리(조선)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성큼 다가설 수 없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는 이유라는 겁니다.

저는 이 연구자의 시각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는 전반적으로 표정이 없다.
심지어 형벌을 가하는 관리도, 당하는 죄인도 무표정하게 그린 사례가 많다.

 

■기산을 위한 변명?

그렇지만 그러한 시각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좀 다른 시각으로 풀어가고 싶어요.

우선 기산은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처럼 중앙화단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활약한 화가는 아니죠.

그렇게 지방작가를 김홍도·신윤복과 같은 반열로 놓고 평가하는 것은 공정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기산이 그려준 그림은 외국인들의 주문에 따라 그려준 조선의 풍물입니다.

그랬으니 주제에 맞게 행위와 사물에 중점을 두어 그림을 그렸을 겁니다.

외국인들을 위해서요. 게다가 상당수 작품들은 ‘삽화’로 쓰였죠.

정식 그림하고 ‘삽화’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죠.

그런 측면에서 ‘기산의 그림이 조선의 오랜 문화와 조선인의 삶의 의욕을 심하게 훼손한다’는 이야기는

기산 김준근에게는 가혹한 평가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산의 작품에서 19세기 말 조선의 생활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기산 김준근이 미개, 열등과 같은 서양인들이 보고 싶어 했던 조선인의 삶을,
그들의 주문에 따라 그렸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홍도와의 차이는?

우선 기산과, 풍속화가의 레전드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을 비교해볼까요.

물론 기산이 단원의 그림을 참고로 그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홍도의 ‘씨름’과 기산의 ‘단오에 씨름하고’라는 작품은

긴장감이나 역동성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새참>(단원)과 <농부 밥먹고>(기산), <활쏘기>(단원)와

<활쏘기 하는 모양>(기산) 등의 작품도 다릅니다.

그러나 100점을 한 세트로 그린 기산의 풍속도에도 나름 특장이 있습니다.

 

세트 마다 각종 민속놀이와 가내 수공업, 농업, 객주, 서당, 기생, 형벌,

장애인, 무속, 혼례, 상례, 관리 행차 등 당대 조선의 생활상을 일별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특히 그림의 주제를 부각한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예컨대 요즘처럼 4~5명이 한 가구를 이룬다든가,

서민층에서는 엄격한 남녀유별이 보이지 않는다든가,

농업 및 가내수공업에서 여성의 역할이 도드라진다든가 하는 현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산 김준근은 풍속화가의 레전드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을 참고로 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씨름’ 그림에서 보듯 긴장감이나 역동성 측면에서는 다소 떨어진다.
‘점심’과 ‘활쏘기’ 등을 주제한 기산의 작품도 김홍도와 비슷한 듯 다르다.

또 각종 생활용품의 제작 과정 묘사는 직접적인 사료의 가치를 지닙니다.

의상 표현도 다양합니다.

 

 

남성들은 다양한 모자를 썼구요.

남녀구별없이 머리띠를 즐겨 착용했습니다.

또 부녀자들이 노동할 때 일상적으로 머릿수건을 쓰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콧수염을 길렀구요.

담뱃대 또한 기녀와 아낙네들도 즐겨 물고 있죠.

당시 담배가 남녀노소 구별없는 기호품이었음을 알 수 있죠.

또 쥘부채(合竹扇)의 경우 남성들이 사계절 휴대하고 있었던 것 같구요.

 

먹을 거리는 어떨까요.

김홍도의 <씨름>, 유숙의 <대쾌도>에 이어 기산 풍속화에서도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엿장수가 등장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간식거리가 ‘엿’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기산이 하층민의 사회상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에 의미를 두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소외된 계층의 삶을 빼놓지 않았다는 측면을 높이 산 겁니다.

전반적으로는 “단원과 혜원이 스토리텔링을 중시했다면,

기산은 팩트를 충실하게 묘사했다”(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촌평도 있습니다.

 

기산의 풍속화는 각종 민속놀이와 가내 수공업, 농업, 객주, 서당, 기생, 형벌, 장애인,
무속, 혼례, 상례, 관리 행차 등 당대 조선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갓쓴 예수’의 표현

기산 김준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죠.

1895년 국내 최초로 번역된 서양문학작품인 <천로역정(텬로력뎡)> 조선어판 삽화를 그렸다는 겁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은

영국 작가인 존 버니언(1628~1688)이 1678년 쓴 작품인데요.

주인공인 ‘기독교인’이 온갖 역경을 딛고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다뤘죠.

그런데 원책 그대로가 아니라 조선식으로 고쳐 그렸다는 것이 흥미로습니다.

 

‘갓쓴 기독교인(Christian)’과 ‘갓쓴 예수’가 등장하는데요.

예컨대 갓쓴 예수가 성령의 기름을 붓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초로 그려진 한국인 형상의 예수상이구요.

또 한국개신교 미술의 효시이며, 조선 전통화법을 토대로

서양화법을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정병모의 ‘기산 김준근 풍속화의 국제성과 전통성’,

<강좌 미술사> 제26호, 한국미술사연구소, 2006)

 

기산의 풍속도를 보면 당대의 생활상을 미시적으로 볼 수 있다.
요즘처럼 4~5명이 한 가구를 이룬다든가, 서민층에서는 엄격한 남녀유별이 보이지 않는다든가,
농업 및 가내수공업에서 여성의 역할이 도드라진다든가 하는 현상을 읽을 수 있다.

 

기산은 왜 갓쓴 예수와 갓쓴 기독교인을 그렸을까요.

조선판 <천로역정>을 번역한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이 기산에게

<천로역정>의 삽화를 맡기면서 조선의 취향과 감각에 맞게 그려달라고 주문했다는 겁니다.

당시 개신교에서는 토착민들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많은 영향을 끼쳤거든요, 덕분에 이 기산의 삽화는 독자들에게

<천로역정>의 내용을 쉽게 전달되도록 도와주는 효과를 주었답니다.

 

기산 김준근은 1895년 국내 최초로 번역된 서양문학작품인 <천로역정(텬로력뎡)>
조선어판 삽화를 그렸다.
특히 주인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갓쓴 조선인으로 고쳐 그렸다.

 

당대 선교사들의 잡지인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1월호에

선교사 C.C. 빈톤(1856~1936)의 <천로역정> 서평이 나와 있는데요.

삽화가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해부학상 인물 묘사가 훌륭하여

조선 최고의 선묘화를 능가할 정도”라면서 “외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호평을 받을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번역본에서는 장면마다 삽화에 대한 설명을 한글로 적어놓기 까지 했구요.

기산의 삽화는 제4판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기산의 <천로역정> 조선판의 삽화에는 또하나의 포인트가 있답니다.

(정성은의 ‘텬로력뎡 삽화의 시각이미지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2013)

 

기산의 <천로역정> 삽화를 보면 천국에 가까이 갈수록 의복이 바뀐다.
천국에 가까워질수록 신분 상승하는 기독교인처럼 조선의 백성들도
믿음이 충만해지면 신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례를 시작할 때 가난하고 비천한 박물상의 모습이었던 기독교인이

천국에 가까워질수록 의복이 바뀌는데요.

외면과 내면의 갈등을 극복할수록 ‘일반도시민→전투무관→상급무관→임금(또는 상층 문인)’으로

신분의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겁니다.

 

무엇을 말해줄까요.

천국에 가까워질수록 신분 상승하는 기독교인처럼 조선의 백성들도

믿음이 충만해지면 신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신분제 사회가 와해되는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반영한 거구요.

어떻습니까.

‘그림도 아니고 화가도 아니’라는 평도 있고,

‘서양인의 주문에 따라 영혼없는 조선의 생활상을 그렸다’는 평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료가 기산의 풍속화 외에 또 있을까요.

무엇보다 좋든 싫든 당대 서양인들이 기산이 표현한 그림과 삽화로

조선을 알고 이해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기산 풍속도의 의미일 겁니다.

 

(이 기사를 위해 정병모 경주대 교수,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

이기원 홍보담당 사무관 등이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사진은 국립민속박물관·숭실대 기독교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 박물관·

프랑스 기메박물관 등의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원, <독일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국외소재한국문화재조사보고서 제35권), 2017

국립문화재연구원,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국외소재한국문화재조사보고서 제36권), 2017

국립문화재연구원,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1999

국립민속박물관,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특별전 도록), 2020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기산 김준근 풍속도>(매산 김양선 수집본, 스왈슨 수집본), 2008

강희정, ‘기산 김준근 천로역정 삽화 연구’, 명지대 석사논문, 2012

김광언,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해제’, <기산, 한국의 옛 그림>, 민속원, 2003

김수영, ‘수출회화로서 기산 김준근 풍속화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7

신선영, ‘기산 김준근 회화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2012

정병모, ‘기산 김준근 풍속화의 국제성과 전통성’,

<강좌 미술사> 제26호, 한국미술사연구소, 2006

정성은, ‘텬로력뎡 삽화의 시각이미지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2013

스튜어트 컬린, <한국의 놀이>, 윤광봉 옮김, 열화당, 2003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조선미술사>, 권영필 옮김, 열하당, 2003

알프레드 캐번디시, <백두산 가는길>, 조행복 옮김, 살림, 2009

윌리엄 칼스, <조선풍물지>, 신복룡 옮김, 집문당, 1999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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