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장품)하고 바늘 6개를 사서 보내네…”
최근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예고한 ‘나신걸 한글편지’의 내용 중 한 구절이다.
이 편지(1690년 무렵 작성)는 훈민정음이 반포(1446년)된지 40여년 만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라는 점에서 일단 ‘보물’로 지정하고자 한 것이다.
어려운 원문을 최초로 판독·연구한 배영환 제주대 교수와,
최근 한글편지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백두현 경북대 명예교수의 도움말로 풀어본다.
■남편이 보낸 ‘분과 바늘’
이 편지는 함경도에서 하급 군관으로 군무 중이던 나신걸(1461~1524)이
1490년(성종 21) 무렵 회덕(대전)의 아내 신창 맹씨에게 보낸 사연을 담고 있다.
편지는 함경도 군관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면서 시작된다.
“영안도(함경도) 경성의 군관이 되어 간다네…
이제는 가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네. 만약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탈영병으로 처리되어) 병조(국방부)가 붙잡아 귀양 보낸다네….”
이렇게 잔뜩 신세한탄을 한 남편은
“(함경도) 경성으로 (인편으로) 내 겹저고리와 겹철릭(군복)을 보내달라”고 당부한다.
여기까지는 무미건조한 내용만 한가득이다.
그런데 두번째 편지에서 흥미로운 구절이 눈에 밟힌다.
“분(粉·화장품)과 바늘 6개를 사서 보내네. 내가 집에 다녀가지 못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님과 아기 모시고 다들 좋이(별탈 없이) 계시오.
난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필자는 남편(나신걸)이 부인(신창 맹씨)에게 보냈다는 ‘화장품과 바늘’이 어떤 의미인지 간과했다.
그런데 배영환·백두현 두 연구자가 “매우 흥미로운 의미가 담겨있다”고 힌트를 주었다.
백두현 교수가 단적인 사례를 들었다.
즉 17세기 초(1602~1652년) 사이의 자료인 ‘현풍 곽씨 한글편지’(혹은 진주 하씨묘 출토 한글편지)였다.
그 중 딸이 친정 어머니(진주 하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분과 바늘’ 이야기가 등장한다.
“서울 갔던 사람(남편)이 바늘 하나, 분 한 통 사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친정 어머니에게 남편을 뒷담화하고 있다.
“(아내를 위한 선물인) 분과 바늘은커녕 남편이 너무 오래 서울에 머무는 바람에
군색해져셔 버선까지 팔아먹고 왔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사실 분(화장품)이야 조선시대 여성들이 받고 싶어했던 선물 중 하나였다.
1989년 현풍 곽씨 문중이 경북 달성군에 있는 12대 조모인
■조선시대의 ‘잇 아이템’
그럼 바늘 선물은 어떤 의미일까. 백두현 교수는 이 대목에서
교과서에서도 배웠던 ‘조침문’을 떠올린다.
‘조침문(弔針文)’은 한마디로 ‘부러진 바늘에게 바침’이다.
조선 순조 연간(1800~1834)에 유씨 부인이
27년간 쓰다가 부러진 바늘을 의인화해서 쓴 제문이다.
유씨 부인은 이 바늘은 동지사(사절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온 시삼촌이 사온 선물이라 했다.
그러면서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늘을
27년 만에 부러뜨렸으니 오호통재!”하며 슬퍼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부녀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더불어 벗이 되어…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유씨 부인은 “바늘이 부러지자 혼절할 정도였다”면서
“한 팔을 베어낸 듯, 한 다리를 베어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라고 애닯아 한다.
그러면서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 평생 함께 살고, 같은 날짜에 같이 죽자”고 기원한다.
절세의 명문장으로 꼽히는 ‘조침문’은 이렇게
‘바늘=조선 여인의 평생 애장품’ 임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여인들이 왜 바늘을 그렇게 애지중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쟁기, 가래, 괭이, 낫, 호미 등은 쉽게 제작할 수 있는 도구죠.
그러나 바늘은 어떻습니까.
다양한 크기로 만들면서도 되도록 가늘게, 뾰족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했겠죠.
난이도가 높은, 당대 최첨단 기술을 요했을 겁니다.”(백두현 교수)
조침문에서도 “시삼촌이 중국에서 사온 바늘 여러 쌈을 여기저기에 선물을 보냈고,
또 (나도) 썼지만 무수히 부러뜨리고 너만 남았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나온다.
‘나신걸 편지’와 ‘현풍 곽씨 편지’에서 보듯 조선시대 여성을 위한 선물 중 ‘넘버 1’은
‘바늘과 분(화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도 차이는 있다.
‘현풍 곽씨 편지’에서는 당대의 ‘잇 아이템’을 받지못한 여성의 하소연이 쟁쟁하다.
반면 ‘나신걸 편지’에서는 ‘분과 바늘’을 선물로 보낸 이야기가 담겨있다.
무슨 ‘보고 싶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무심한듯 아내를 챙겨주는
‘츤데레 남편’의 향기가 풍기는 대목이다.
분(화장품)과 바늘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평생 간직하고 싶었던 ‘잇 아이템’이었다.
■‘츤데레 남편’?
곰곰이 따져보면 조선시대에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찾기 쉽지 않다.
그 예가 있다.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셨냐”고 애달파한
‘조선판 사랑과 영혼’의 편지가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먼저 죽은 남편(이응태·1566~1588)를 향한 부인(원이 엄마)의 추모글이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시쳇말로 ‘멋 없는 남편’이었다.
1806년(순조 6) 부인(홍혜완·1761~1838)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중인 남편(다산)에게
그리움을 가득담은 편지 한통과 함께 시집 올때 입고 온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냈다.
편지내용은 이랬다.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남편은 어떤 리액션을 했어야 할까.
당연히 사랑을 가득 담은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다산은 어찌했을까. 이 빛바랜 다홍치마를 5조각으로 잘라
각 폭마다 자식들에게 훈계하는 글을 지어 보냈다.
시쳇말로 ‘너무 합니다’가 아닐까.
‘날 잊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보낸 부인의 치마를 ‘자식 훈계용’으로 써버렸다니….
물론 부인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느날 아내를 만나는 꿈을 꾸고는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그리워 말아야지. 그리워 말아야지. 서글픈 꿈 속에서 본 그의 얼굴….”(‘꿈속에서 본 아내에게’)
부인이 보낸 다홍치마에 이런 감정을 담아 직접 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까 언급한 ‘현풍 곽씨 한글편지’에도 ‘츤데레’ 남편의 면모가 보이는 글이 있다.
주인공인 곽주(1569∼1617)가 만삭의 몸으로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간 부인(하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신 몸만 건강하면 되니 또 딸을 낳아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아들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들 걱정할 필요없다. 당신 몸이 최고다’라고
아내를 안심시키는 남편이라니….
‘나신걸 편지’에도 남편이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잔뜩 담아놓으면서
슬쩍 ‘분과 바늘’ 선물 건을 얹어놓았다.
함경도 군관으로 발령받아 떠나는 나신걸이 충청도 회덕에 있던 부인 맹씨에게 보낸 한글편지는
■“당신이 직접 농사짓지 마세요”
해독하기 어려운 훈민정음 초기의 고어로 가득찬 ‘나신걸 편지’에는 의외로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특히 외지 근무 때문에 집에 갈 수 없는 남편의 고향집을 향한 ‘노심초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남편은 ‘내년까지 돌아올 수 없다’고 했는데요. 아내가 지켜야 할 고향집이 걱정되었을 겁니다.
농사는 직접 짓지말고 반드시 소작을 주라고 하고, 소작을 짓는 집에
구체적으로 어떤 어떤 곡식의 씨를, 얼마큼 주라고 일일이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관아에 세금을 내는 일도 똑똑한 노비 누구누구에게 시키라는 내용도 있어요.”(배영환 교수)
백두현 교수는 편지 내용 중 ‘피 씨’에 주목했다.
즉 지주인 나신걸 집안에서 소작인들에게 나눠 줄 종자(씨)의 분량을 거론하면서
‘논에 뿌릴 볍씨’와 ‘밭에 뿌릴 피씨’를 구별했다는 것이다.
‘피’는 농경 초기부터 재배되어온 벼과 작물이다.
좋지 않은 환경에도 자라는 힘이 강해 구황작물로 애용됐다.
요즘도 ‘피죽 한그릇도 먹지 못했다’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나신걸 편지’에서 보듯 1490년대의 조선에서 피농사가 여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신걸 편지’에는 외지 근무 때문에 집에 갈 수 없는 남편의 고향집을 향한 ‘노심초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훈민정음 반포 40여년 만에 쓰여진 한글편지
그런데 이 편지는 어떻게 훈민정음 반포 직후인 1490년대의 것으로 추정될까.
이 편지는 2011년 5월 3일 대전 유성구 금고동의 안정 나씨 문중의 묘역이
집단 이장 과정에서 확인됐다.
이곳에 제2쓰레기 매집장이 조성됨에 따라 진행된 이장이었다. 이중 조선 초기 무관 출신인
나신걸의 부인(신창 맹씨) 목관에서 미라 상태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는 피장자(맹씨)의 머리맡에서 여러번 접은 모습으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벽돌처럼 단단하게 밀봉되어 산소가 통하지 않은 회다짐묘(석회:모래:황토=3:1:1)였기에
편지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다.
배영환 교수의 판독 결과는 놀라웠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순천 김씨묘 출토 언간(한글편지)’(1555년)보다
65년 정도 앞선 1490년 무렵의 한글 편지로 추정됐다.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우선 편지에 등장하는 ‘영안도’(함경도)에 주목했다.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 등에 따르면 함경도는 1470년(성종 1) 영안도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498년(연산군 4) 다시 함경도로 회귀된다.
따라서 이 편지는 1470~98년 사이에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편지 중에는 남편(나신걸)이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기를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신걸의 아버지(나연종)은 1488년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1488~98년 사이로 좁혀진다.
더 좁혀보자.
1461년생인 남편 나신걸이 하급 군관으로 발령받은 나이라면 어떨까.
서른 살 안팎 정도였을 것이다. 뭐 이런 저런 방증자료를 토대로
이 편지가 쓰여진 연대를 1490년대로 추정할 수 있었다.
필자가 사족으로 사료를 하나 더 인용하자면
1504년(연산군 10) 7월19~20일자 <연산군일기>이다.
이때 “임금(연산군)이 신하를 파리 죽이듯 죽인다”는 한글익명서가 궁중에 돌자
연산군이 “한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신걸’ 편지는 2011년 5월 3일 대전 유성구 금고동의 안정 나씨 문중의 묘역이 집단 이장 과정에서 확인됐다.
■한글창제 후 서울거리에서는…
1490년대에 주고받은 이 편지의 사료적인 가치는 천정부지로 뛸 수밖에 없다.
1490년대라면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0여년 뒤에, 그것도 지방에서,
그것도 부부가 주고받은 한글편지이기 때문이다.
삼척동자가 다 알지만 만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
(<세종실록> 1446년 9월29일)이라 했다,
그래서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의 언급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배우기 쉬운 문자’를 창제했다.
한마디로 훈민정음의 핵심가치는 임금-백성, 양반-백성, 남-여, 노-소의 ‘소통’이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백성 스스로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훈민정음 반포 불과 3년만인 1449년(세종 31) 10월5일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 74살의 나이에 영의정부사가 된 하연(1376~1453)을 겨냥해
“하 정승아! 정사를 망령되게 처리하지 마라”는 내용의 한글벽서를 붙인 것이다.
전임자인 황희(1363~1452)가 86살의 고령에 은퇴했는데,
그 자리에 다시 74살의 하연을 기용한 세종의 인사정책을 지적하는 벽보가 아니었을까.
1485년(성종 16) 7월17일 종로거리에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 ‘종로 시전(시장)의 이전 방침’에 상인들이 거부 농성을 벌였다.
상인들은 이때 판서·정승 등 고관대작의 비위를 고발하는 한글 투서를 던졌다.
이 투서에는 (신숙주 아들인) 신정(?~1482)과 영의정 윤필상(1427~1504) 등
고관대작의 이름까지 적시됐다.
훈민정음 창제·반포 후 40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미 서울에서는 임금의 인사정책과 고관대작의 비리를 고발하는 투서와
벽보가 거리에 붙을 정도였다.
회곽묘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편지는 피장자(맹씨)의 머리맡에서 여러번 접은 모습으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소주 막고 확!”…딸에게 보낸 친정엄마의 편지
지방은 어땠을까.
이번에 보물로 지정예고된 나신걸 한글편지가 단서를 제공해준다.
훈민정음 창제 후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가던 한글열풍을 증거할 자료가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편지의 언급처럼 함경도 경성에서 충청도 회덕까지는 ‘한달거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던 남편이 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있다.
그것도 한글로….
투서니 벽서니 뭐 이런 무시무시한 고발이나 고변도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나신걸 한글편지’보다 60여년 늦게 주고받은
‘순천 김씨묘 출토 언간(한글편지)’를 떠올린다.
모두 192점에 달하는 한글편지는 1555년(명종 10) 전후에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1977년 충북 청주 비행장 조성을 위한 순천 김씨 묘의 이장과정에서 출토된 한글편지.
그중 시집간 딸에게, 늘그막에 첩을 둔 남편을 원망하는 친정 엄마의 편지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하물며) 재상도 첩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예순에 맨 끝 찰방(종 6품)된 사람(남편)도 첩을 얻으니…
내가 서러워서…”
예순이 다 된 나이에 겨우 말직(찰방)에 오른 남편이 첩을 두고 본처를 홀대하니 서럽다는 내용이다.
어떤 편지는 부부간 나눈 생생한 대화를 딸에게 일러바치고 있다.
“내가 ‘첩 두기를 그만 두라’고 하자 남편은 ‘내 이년(첩)이 밉지 않으니 첩으로 삼겠다. 잡말마라’고 했다.
더 무슨 말을 하랴.”
친정 엄마는 “하물며 아들까지도 ‘엄마가 샘을 낸다’고 하니 서럽기만 하다”
“소주를 맵게 먹고 죽고 싶다”는 등 여러차례 괴로움을 토로했다.
생각해보면 이 친정 엄마가 한글 편지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늘그막에 첩을 둔 남편 때문에 속이 문드러졌을 여인이 한글을 도구로 삼아
남편 흉을 보고 한껏 욕을 해대며 가슴 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들의 한풀이 수단, 그것도 역시 한글의 역할이었다.
백성과 양반, 백성과 임금 간 언로를 풀어주는 가교 기능, 뭐 이런 거창한 역할이 아니더라도….
(이 기사를 위해 배영환 제주대 교수, 백두현 경북대 명예교수, 김은선 대전시청 학예연구사,
김기범 대전시립박물관 학예 연구사·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배영환, ‘현존 최고의 신창맹씨묘출토언간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
<국어사연구> 제15호, 국어사학회, 2012
백두현, <한글 고문서와 한글편지 강독>, 역락, 2024년 출간 예정
백두현, <한글생활사 연구>, 역락, 2021
노경자, ‘순천김씨묘 출토 언간 연구’, 부산대 석사논문, 2010
문화재청, ‘나신걸 한글편지 문화재위원회 보물지정 자료, 2022
토지주택박물관, <옛문서에 담긴 사랑이야기>(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2017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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